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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예수의 탄생 2:1-7
때가 차니.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보내고자 하신 때가 찼으며, 그 아들이 베들레헴에서 나리라는 것이 예고되었다. 이제 여기서 그 출생의 때, 장소, 그리고 방법에 대하여 알아보자.
1. 우리 주께서 출생하신 때(1,2)
(1) 예수께서는 제 4군주국이 한창일때 태어나셨다. 그분은 아구스도 황제때 태어나셨는데, 그때 로마 제국은 동쪽으로는 페르시아, 서쪽으로는 영국에 이르기까지, 전에 없이 세력을 확장하였다. 그래서 그 당시 로마 제국은 온 세계의 제국이라 불리었다. 여기서도 로마제국을 천하라고 부르고 있는데(1절), 그 이유는 그 당시 로마에 속해있던 나라를 제외하고는 문명화된 곳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2) 예수께서는 유대가 로마 제국의 영토가 되고 그 속국이 되어 있었을때 태어나셨다. 이것은 로마 제국이 세금을 부과할때, 그 과세 대상에 유대인들도 끼어있었던 점으로 보아 명백하다. 예루살렘은 이 일이 있기 약 60년전쯤에 로마의 장군 폼페이에게 점령당했다. 유대는 수리아의 총독 구레네가 다스렸다(2절). 이것이 유대에서 있었던 첫번째 세금 부과였으며, 유대인들이 제국에 예속되어 있다는 첫번째 표시였다.
(3) 예수께서 출생하신때에 대해서는 또다른 상황을 언급할수 있다. 즉, 당시 제국에는 전반적인 평화가 유지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어떠한 전쟁이 일어났어도 결코 닫히지 않았었을 야누스 성전의 문이 그때 닫혔다. 그러니 평강의 왕이 태어나시기에 적합한 때였던 것이다.
2. 우리 주 예수께서 태어나신 장소(3-6)
우리 주 예수께서 태어나신 장소에 대해서는 매우 주목할만하다. 예수께서는 베들레헴에서 나셨다. 예수의 출생지를 서기관들은 그렇게 알고 있었으며(마 2:5,6), 일반 사람들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요 7:42). 그 지명은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베들레헴은 떡의 집이라는 뜻이다. 생명의 양식, 곧 하늘로부터 내려온 떡이신 분이 태어나시기에 적합한 것이었다. 베들레헴은 다윗의 성이요, 다윗이 태어난 곳이므로, 다윗의 자손인 예수께서 태어나셔야할 곳이었다. 시온이 다윗의 성이라고 불리어지기도 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거기서 나시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베들레헴이야말로 다윗이 비천하게 태어나 목자가 된 바로 그 다윗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구주께서는 다윗이 권세와 번영을 누리며 통치하던 시온이 아닌 바로 이곳을 그의 출생지로 택하신 것이다. 이제 동정녀 마리아가 임신하여 해산의 때가 가까워지자 하나님의 섭리하심에 의하여 로마제국의 모든 속민들은 제국의 명령에 따라 호적하게 되었다. 다시말해서 백성들은 세대별로 등록하고 기록해야 했으며 이것이 여기(본문)에서 사용된 단어의 적절한 의미인 것이다. 아구스도가 의도했던 것도, 자기 백성들의 수를 알고 그것을 세상에 공포함으로써, 자만심을 채우기 위해서였거나 정책적으로 그 일을 실행하여 자신의 통치가 더욱 막강해 보이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통하여 다른 일을 계획하셨다. 온 세상이 호적하는 일로 곤란을 겪게 되었다. 요셉과 마리아는 더욱 그랬을 것이다. 이 일로 그들은 갈릴리의 나사렛에서 유대의 베들레헴으로 가야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윗의 집 족속이었기 때문이다(4,5절). 따라서 이 일은 하나님의 여러가지 목적들에 일치하게 되었다.
(1) 동정녀 마리아는 이미 잉태하여 베들레헴으로 가서 예언에 따라 거기서 해산하게 되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인간의 목적과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어떠한가를 볼수 있을 것이다.
(2)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에게서 났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베들레헴으로 가게된 것은 그녀가 다윗 집 족속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3) 그리스도가 '법의 지배를 받았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태어나자마자 로마 제국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이다. 왕들이 그에게 공물을 바치는 대신, 예수께서 세상에 오셨을때에는 그 자신이 공물을 바치는 자가 되었다.
3. 예수님의 출생 배경(7,8)
예수께서는 아주 비천한 상태로 태어나셨다. 실로 그분은 맏아들이셨다. 그러나 선천적인 것밖에 물려줄 것이 없는 마리아처럼 보잘것없는 여인의 맏아들이 된다는 것은 그리 영예로운 것이 못 되었다. 이점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이 말할수 있을 것이다.
(1) 예수께서는 다른 아이들처럼 보잘것없는 모습이셨다. 예수께서는 마치 그가 사람들에 의해 지켜질수 있거나 지켜져야할 필요가 있는 것처럼 갓 태어났을때의 다른 아이들과 같이 '강보에 싸여' 있었다. 즉 위대하신 하나님께서는 잠시동안 어린아이가 되셨던 것이다.
(2) 예수님 특유의 비천한 면이 있었다.
1)예수님께서는 사관에서 나셨다. 그리스도께서 사관에서 태어나셨다는 것은 그분이 사관에서 머무르는 것처럼 잠시동안만 머무르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사관은 찾아오는 모두를 받아들인다. 그리스도 역시 그러하시다. 그분은 당신의 상징으로 사랑의 깃발을 내거시고, 누가 오든지 결코 내쫓지 않으신다. 사관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리스도께서는 돈없이 값없이 오는 자들을 환영하신다는 사실이다.
2)예수께서는 마굿간에서 나셨다. 그래서 그 마굿간이 우리가 구유라고 번역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왜냐하면 사관에는 방이 없었고, 설비가 아니 필수품들조차 갖춰져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요람 대신 구유에 누우셨던 것이다. 예수께서 마굿간에서 나셨고, 구유에 누우셨다는 것은 다음의 사실들을 나타내 준다.
첫째, 그분의 부모가 가난했음을 보여준다. 그들이 부자였다면 방을 구할수 있었을 것이다.
둘째, 그 당시의 예의범절이 타락하고 부패했음을 알수 있게 한다. 사람들간에 보통의 인간애만 있었더라도 그들은 진통을 겪는 여자를 마굿간으로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셋째, 그것은 우리 주 예수의 겸비의 한 예였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의지할데 없고 절망적인, 버림받은 아이와 같이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도 그러한 처지에 계셨던 것이다.
Ⅱ. 천사들이 목자에게 전해준 기쁜 소식 2:8-20
그리스도의 겸비를 보이는 비천한 환경들은 그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들이 수반됨으로써 조화를 이루고 있다. 우리는 그분이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워계셨던 것을 보고, 단연코 이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일리가 없다고 말하고 싶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분이 탄생하실때 천사들의 합창이 수반되었음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이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고 말하게될 것이다. 마태복음에는 이방인들인 박사들이 별을 보고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았다고 되어있다. 여기에서는 천사들이 그 소식을 유대인 목자들에게 전해주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각자에게 그들이 잘 아는 언어를 선택하여 말씀하셨다.
(1) 목자들은 어떻게 쓰임받았나?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8절). 천사는 대제사장들이나 장로들에게 보내어지지 않고, 비천한 목자들 무리에게 보내어졌다. 족장들은 목자들이었으며 이러한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여전히 순결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게 은총을 내리신다는 것을 보여주시고자 하셨다. 이 소식이 그들에게 전해질때, 그들은 잠자리에서 자지않고, 밖에서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완전히 깨어있었으므로 조는 자들처럼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을 잘못 생각할수는 없었다. 그들은 예배를 드리고 있을때가 아니라 그들의 천직을 수행하고 있을때 쓰임을 받았다. 그들은 자기 양떼를 지키고 있었다. 우리가 열심히 정직한 일을 하고 그 일을 함에 있어서 하나님과 함께한다면, 하나님의 은총의 길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2) 그들은 천사의 출현에 놀랐다(9절). 천사가 그들위에 임했다는 것은 그들이 그러한 일을 거의 생각하거나 기대하지 못했음을 암시해 준다. 은총은 하늘로부터 우리에게 내려온다. 다시말해서 우리는 그 은총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 주위에서 주님의 영광을 보고 들었다. 그것은 밤을 낮과 같이 밝게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무슨 불길한 소식이라도 있는게 아닌가하여 크게 무서워하였다. 우리가 죄의식을 크게 가질때, 하늘로부터 오는 모든 소식이 재난에 관한 것이 아닌가 하고 당연히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3) 천사가 목자들에게 다음의 메시지를 전했다(10-12절). 두려워 말라(10절). 원수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너희 친구들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천사는 그들이 기뻐할만한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보라 내가 큰 기쁨을 전하노라. 그것은 모든 백성에게 기쁨이 될 것이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11절). 구주는 오늘 나셨으며 그것은 모든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되리니, 너희는 이 소식을 선포해야 한다. 그분은 그분이 나시리라고 예언되었던 장소인 다윗 동네에서 태어나셨다. 그리고 그분은 너희에게 나셨다. 우선 너희 유대인에게 그분이 보내지셨으며, 너희를 축복하기 위하여 세상에서 가난하고 비천한 너희 목자들에게 보내어 지셨다. 이것은 이사야서 9:6절을 가리키는 말이다. '한 아이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도다.' 이것은 실로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이 되는 일이다. 오랫동안 기다리던 분이 마침내 오셨다. 그분은 이 일로 그들에게 그들의 믿음을 확증할 한 징표를 주셨다. 너희는 이 증거로 말미암아 그를 깨닫게될 것이다. 그는 결코 어떤 갓난아기도 누웠던 적이 없는 구유에 누워계신다. 너희는 그분이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것을 볼 것이다.
(4) 이 엄숙한때에 천사는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고, 사람들에게 축하를 보냈다(13,14절). 한 천사가 그 메시지를 전하자마자 갑자기 그 천사와 함께 하늘의 허다한 천사들이 하나님을 찬양하였다(13절). 이 일의 역사에 대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할 것이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14절). 즉 자비하심과 사랑으로 이러한 은혜를 내려주시고 지혜로써 그 일을 도모하신 하나님께 영광이로다. 하나님의 다른 역사들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만 세상을 구속하신 일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여, 그것을 기뻐하자.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화목하신다면 그로부터 모든 평화가 도래할 것이다. 평화는 모든 선을 지향한다. 우리가 지니고있는 모든 선이나 희망은 하나님의 자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에 대하여 위안을 느낀다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에 대하여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여기에 매우 엄숙하게 선포된 평화가 있다.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와서 그 평화를 누릴수 있다. 그 평화는 땅 위에 '선의를 가진 사람들'(어떤 사본에는 이렇게 되어있다.)에게 주어진 평화이다. 즉 하나님에 대해 선의를 가지는 사람들 혹은 하나님의 선의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에게 평화가 있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평화로다라는 말은 진실된 말이요, 모두 받아들일만한 가치가 있는 말이다.
(5) 목자들이 갓 태어나신 구주를 방문하였다.
1)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15절). 천사들이 찬송을 부르는 동안 그들은 그것만 듣고 있었다. 그러나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까지 가서…보자. 그러므로 관찰과 경험을 통하여 그것을 확증하는 일은 천사들의 증언이나 하나님의 증언 자체를 불신하는 행위가 아니다. 이 목자들은 가서 사실인지 아닌지를 알아보자고 의심스럽게 말하지않고, 확신을 가지고 '가서……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라고 말하였다. 이렇듯 주께서 그들에게 그 일을 알리셨는데 어찌 그것에 대해 의심할 여지가 있겠는가?
2) 그들은 즉각 아기를 찾았다(16절). 그들은 지체하지 않고 빨리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았다. 그러나 그들이 본 그리스도 주의 초라하고 비천한 모습이 그들의 믿음을 동요시키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이 매우 가난하고 비천한 상황에서 하나님과 즐겁게 교제하는 생활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고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들은 요셉과 마리아에게 그들이 보고 들었던 천사들의 환상과 노래에 대하여 이야기했을 것이다. 그일이야말로 마을에서 제일가는 귀부인들이 그들을 방문한것 이상으로 그들에게 용기를 복돋워주었던 것이다.
(6) 목자들은 이 소식을 퍼뜨리기 위해 노력했다(17절). 그들이 그것을 알았을 때 그들은 이 아이에 관하여 천사들과 마리아, 요셉이 그들에게 들려 준 이야기 즉 그는 곧 그리스도 주시오, 그로 말미암아 땅위에 평화가 있을 것임을 널리 알렸다. 그들은 이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말했으며, 그 일에 관한 그들의 증언은 서로 일치하였다. 그 사실은 사람들에게 어떠한 느낌을 주었을까? 듣는 자가 다 목자의 말하는 일을 기이히 여기되(18절). 그들은 기이히 여겼지만 구주에 대하여 더이상 묻지않고, 예사일로 흘려 버렸다.
(7) 그들의 말을 믿은 사람들은 이러한 일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응하였다.
1) 동정녀 마리아는 그것들을 개인적으로 명상할 문제로 삼았다. 그녀는 거의 말을 하지않고,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였다'(19절). 그녀는 그녀의 정조에 대한 의심을 푸는 일을 조용히 하나님께 맡겼던 것처럼, 지금은 가려져있는 그녀의 영예를 드러내는 일도 묵묵히 하나님께 맡기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그녀의 아이의 출생에 대하여 주목하지 않았지만 천사들이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녀는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는 지킬만한 가치가 있으며, 그것을 안전하게 지키는 방법은 그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명상은 잊지않도록 하는데 최선의 도움이 된다.
2) 목자들은 그 일들을 그들이 더욱 공공연하게 찬양할 일로 삼았다. 다른 사람들은 그러한 일들에 감동하지 않았지만 목자들 자신은 감동을 받았던 것이다(20절).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갔다.' 하나님께서는 목자들이 하나님께 감사드렸던대로 구유에 뉘인 아기를 보았던 것에 대하여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보았던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후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랬던 것처럼 지금 그분의 구유도 어떤 사람들에게는 하찮은 것이요 걸림돌이 되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권능을 보고 감복하고 찬양하였던 것이다.
Ⅲ. 성전에서 하나님께 드려짐 2:21-24
우리 주 예수께서는 여자에게 나시고 율법아래 나셨다(갈 4:4). 아브라함의 딸의 아들이신 그분은 모세의 율법아래 나셨다. 이제 여기서 그분이 그 법아래 나셨고, 그 법을 따르셨던 두가지 실례를 볼수 있다.
(1) 그분은 율법이 정한 날에 할례를 받으셨다. 할례할 팔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21절). 할례는 고통스러운 수술이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그것을 감수하셨다. 할례는 이방인들에게 행해져 그 의식을 통하여 하나님과 계약을 맺도록 하는 것이었으며, 또한 그것은 죄인에게 해당되는 의식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때문에 그분은 그것에 복종하였다. 그것은 그분은 육신의 모양으로뿐만 아니라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지셨기 때문이다(롬 8:3). 그렇게 함으로써 그 자신이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갈 5:3)가 됨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율법을 따랐다. 그리스도께서 할례를 받으셨던 것은 자신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인정하시기 위함이었으며 또한 자신이 죄의 담보이며, 우리의 안전을 책임질 분이심을 자인하시기 위함이었다. 할례가 있었고(롬 4:11), 세례가 있듯이 계약의 표인 그러한 규례를 행함으로써 하나님께 교회의 어린 자손을 바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함이었다. 할례받을때 그 이름이 주어졌다. 그분은 예수 혹은 요수아로 불리었는데, 이는 그분이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어머니 마리아에게 그렇게 이름을 지어주었으며(눅 1:31), 나중에 아버지가 될 요셉에게도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마 1:21). 그 이름은 유대인들 사이에는 흔한 이름이었으며 이로써 그분은 그의 형제들과 같고자 하셨던 것이다. 그것은 구약에서 그를 상징하는 위대한 두 인물의 이름이었다. 즉 그것은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와 대제사장인 여호수아의 이름이었던 것이다(슥 6:11,13). 그 이름은 바로 그분이 하실 일을 뜻하였다. 예수는 구세주란 뜻이다. 그분은 구원을 가져오신다.
(2) 그분은 성전에 바쳐졌다. 이 일은 율법이 정한때, 곧 그가 난 지 40일이된 '결례의 날이 차매' 행해졌다(22절). 이제 율법에 따라 다음의 일들이 행하여졌다.
1)아기 예수는 장자였으므로 주께 드려졌다. 여기서 율법이 진술된다. 첫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23절).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그리스도의 형제들 중 장자였으며, 어떤 사람도 그렇게 불린 적이 없었던 주의 거룩한 자라고 불리웠다. 그런데도 그분은 다른 장자들이 그랬듯이 주께 그려졌다. 그러나 율법에 따라 그분은 대속되었다(민 18:15). '사람의 처음 난 것은 반드시 대속할 것이요', 그 값은 '다섯 세겔'이었다(레 27:6; 민 18:16). 그러나 여기서는 속전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가난한 사람에게는 아마도 대제사장이 값을 감해 주거나 면제해 주었던것 같다.
2)그 어머니는 그녀의 제물을 가져갔다(24절). 그때까지도 여전히 효력이 있었던 주의 율법대로 그녀는 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반구 둘을 바쳐야 했다. 그녀에게 능력이 있었다면 그녀는 번제물로 어린양과 속죄물로 비둘기를 바쳐야했을 것이다. 그러나 가난하여 어린양을 살수가 없었으므로, 그녀는 한 마리는 번제물로 다른 한 마리는 속죄물로 쓸 비둘기 두 마리를 가지고 갔다(레 12:6,8절을 보라).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사람들처럼 죄가운데서 잉태되고, 출생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분은 법아래 나셨으므로 그것에 응하셨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분은 모든 의를 성취하시게 되었던 것이다.
Ⅳ. 시므온의 찬송과 안나의 예언 2:25-40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낮추실때에도, 영광을 받으신다. 시므온과 안나가 이제 성령의 감동을 받아 그리스도를 찬양한다.
1. 시므온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매우 영예로운 증언을 함(25-35)
(1) 시므온 혹은 시몬에 관한 기록은 이러하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살았으며, 경건함과 하나님과의 교제로 이름이 나있었던 자였다. 유대인 작가들을 잘 아는 어떤 학자들은 이때에 예루살렘에 매우 명성이 높은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유대인들은 그가 예언의 영을 받았다고 말한다. 이에 상반되는 견해도 있다. 즉 이때에는 그의 아버지 힐렐이 살아있었으며, 힐렐 자신은 이 일이 있은후에도 여러해 동안 살았다는 견해이다. 그러나 이점에 대해 말한다면 여기서는 그가 나이가 많았다는 기록이 없다. 이제는…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29절). 이 말은 그가 지금이라도 기꺼이 죽을수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지, 그가 일찍 죽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또 다른 상반된 견해는 시므온의 아들은 바리새인이요 그리스도의 대적자인 가말리엘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점으로 말한다면, 신실하게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에게 완고한 바리새인 아들이 있다고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본문에는 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1) 그는 의롭고 경건하였다(25절). 즉, 인간에 대하여 의롭고, 하나님에 대하여 경건하였다. 이 두가지는 항상 공존하는 것이며, 서로 도움을 주지만 하나가 다른 하나의 결함을 보상하지는 못한다.
2) 그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다. 즉, 메시야가 오시기를 기다렸다. 그리스도께서는 백성들을 위로해 주시는 장본인일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위로의 본질이요 근거이다. 오랫동안 기다린 끝에 그분은 오셨다. 그리고 그분이 오시리라고 믿었던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가 오시기를 기다리고 소망하며 인내하면서 기대하였다. 나라면 그렇게 오랫동안 참고 기다리지 못했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위로는 기다려지는 것이고, 그것은 기다릴만한 가치가 있으며, 지금까지 기다려왔고 지금도 끊임없이 기다리고있는 사람들에게 매우 환영받게 될 것이다.
3) 성령이 성결의 영으로서 그리고 예언의 영으로서 그에게 임하였다. 그는 성령으로 충만해졌다.
4) 그에게는 은혜의 약속이 있었다. 그 약속은 그가 죽기전에 메시야를 보게 되리라는 것이었다(26절). 그는 저가 주의 기름부음 받은 메시야를 보기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계시를 받았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보는 자들만이 용감하게 죽음을 볼수 있고, 두려움없이 정면으로 죽음을 응시할수 있는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 성전에 바쳐지고 있을때, 때마침 시므온이 성전으로 들어왔다(27절). 요셉과 마리아가 아이를 데리고 들어온 바로 그때에 시므온이 성령의 인도로 들어온 것이다. 그에게 소망을 가지도록 했던 성령이 이제 말할수 없는 기쁨을 가져다 주었다. 그리스도를 보고자하는 자들은 그분의 성전으로 가야할 것이다. 왜냐하면 네가 찾는 주께서 그곳에 홀연히 오셔서 너를 만나주실 것이므로 그곳에서 너희는 그를 만날 준비를 해야하는 것이다.
(3) 그는 크게 기뻐하며 이 광경을 보았다.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28절). 시므온은 아기를 가슴 깊이 포옹하였으며, 그것이야말로 더할나위 없는 기쁨이었다. 시므온은 아기를 안고 하나님께 그 아기를 드렸다. 복음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전해주는 기록을 생생한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복음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제의하는 은혜를 사랑과 인정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우리의 팔에 그리스도를 안게되는 것이다. 시므온은 그리스도를 보게되리라는 약속을 받았다. 그러나 약속된 것보다 더 큰일이 성취되었다. 즉 그는 그리스도를 안았다.
(4) 그리고나서 시므온은 선언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찬송하여 말하였다. 주재여 이제는…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29절).
1)그는 즐거운 기대에 넘쳐있었다. 그는 생에 대한 경건한 경멸과 죽음에 대한 열망을 지니게 되었다. '주재여, 내가 죽기전에 보리라고 약속받은 구원을 내눈이 보았으니,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여기에는,
①하나님이 자신의 약속을 지키셨다는 것에 대한 인정이 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사람은 결코 그 믿음이 무색해지지 않는다.
②그것에 대한 감사가 있다. 그는 그 구원을 자신의 팔에 안고 보게된 것에 대하여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③그의 팔에 안겨있는 이 아이가 구주 곧 구원 그 자체라는 그의 신앙고백이 있다. 즉 이 아이는 당신의 구원, 당신께서 약속하신 구원, 당신께서 예비하신 구원이라는 것이다.
④이 세상에 대한 작별이 있다. 당신의 종을 놓아 주시는도다. 그리스도를 보기전까지는 보이는 것에 만족해하지 않을 그 눈이 이제 만족하게 되었다. 팔에 그리스도를 안고 눈으로 구원을 보는 자에게 이 세상은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으로 보일까!
⑤죽음에 대한 환영이 있다. 주재여 이제는 놓아 주시는도다. 시므온에게는 그가 그리스도를 보기까지 죽지않으리라는 약속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 약속된 것을 그가 그리스도를 보게된다면 그때 죽을 것이라는 뜻으로 기꺼이 해석하였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주재여, 이제 나를 떠나게 하소서. 여기서 다음과 같은 것을 주목하자.
첫째, 선한 자의 죽음은 얼마나 평온한 것인가. 그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수고로운 곳을 떠나 안식처로 간다. 그는 평화롭게 떠난다. 하나님과 화평하며, 그의 양심에 거림낌없이 평온하게 죽는다.
둘째, 이러한 평온함의 근거는 무엇인가? 내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보았사오니(30절). 이 사실은 그가 본 구원을 통하여 저편에 있는 죽음이 행복한 상태이리라는 믿음에 찬 기대를 갖고있음을 나타내준다. 이 구원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사라지게 할뿐만 아니라 죽음을 유익하게 하는 것이다(빌 1:21). 그리스도를 즐겁게 영접하는 자는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2)그는 세상과 교회에 대한 기대감에 넘쳐있었다. 이 구원은 세상에 축복이 될 것이다. 그것은 '이는 만민앞에 예비하신 것이요(31절)', 지금 어둠속에 앉아있는 '이방을 비추는 빛'이다. 이 말은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으리라'는 이사야 49:6절의 말씀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빛이 되기위하여 유대인의 촛대의 초가 아니라 의의 태양으로 오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교회의 축복이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다'(32절). 예수께서는 실로 이스라엘 백성 곧 영적 이스라엘의 영광이셨으며 영원토록 그러하실 것이다. 그들은 그를 기뻐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나라에 복음을 선포하라고 사도들에게 명하시면서 친히 이방을 비추는 빛이 되셨다. 또한 "예루살렘에서 시작할 것"을 말씀하실때 그분은 몸소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 되셨다.
(5) 시므온은 이 아이에 관한 예언을 요셉과 마리아에게 전했다. 그들은 이 아이에 관한 더욱 상세하고 명확한 이야기들을 '기이히 여겼다'(33절). 왜냐하면 그들이 이미 들었던 당시에 또한 그러한 더욱 상세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기 때문이다.
1)시므온은 그들에게 그들이 기뻐해야 하는 이유를 알려준다. 그는 '그들을 축복하였다'(34절). 그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축복해 주시라고 기도하였으며,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도록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했다. 그분은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흥함을 위하여 세움을 입으셨다(34절). 다시말해서 죄가운데 죽어서 매장된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시고, 슬픔과 절망에 빠진 많은 자들에게 하나님 안에서 위안을 갖게하기 위하여 그분은 오신 것이다. 그리스도가 세워지심으로 다시 패함을 입을 자들은 또한 그리스도가 세워지심으로 다시 흥함을 입게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패함은 그들이 다시 흥하기위하여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상처를 입히시나 또한 치유하신다. 바울은 패하였으나 다시 흥하였다.
2)시므온은 또한 그들이 두려워하면서 기뻐해야 하는 이유를 가르쳐준다. 요셉과 특히 마리아가 풍성한 계시로 스스로 높아지지 않게하기 위하여, 여기 그들을 위한 육체의 가시가 주어지고 있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때때로 필요한 것이다. 실로 그리스도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축복이 되실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에는 '그리스도의 서심으로 패한자'들이 있으며, 그들은 그분을 싫어하고 그분으로 인하여 노하며 실족할 것이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을 생명에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으로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하면 즐거워지듯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죽음에서 죽음으로 그치게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그분은 표적으로써 세우심을 입어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찬양의 대상이 되시고, 많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방의 대상이 되셨다. 그분을 지켜보는 많은 눈이 있었고 그분은 표적이 되셨지만, 그분을 대적하는 자 또한 많았다. 그러므로 그 결과는 여러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35절). 어떤 사람들에 있어서는 마음속에 있는 은밀하고도 선한 품성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분을 가까이함으로써 드러나게 된다. 또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들에게 숨겨져있던 부패성과 사악한 성향이 그리스도에 대한 적개심과 반감을 가짐으로써 드러나게 된다. 인간은 그들의 마음의 생각, 즉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심판을 받게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분별하는 자이신 것이다. 참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위안이 되셨을 것이다.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하리라(35절). 그러므로 그것을 지나치게 자랑하지는 말아라. 그분은 고난당하는 예수가 될 것이다. "동정심, 그와의 밀접한 관계, 그리고 그에 대한 강한 애착으로 인한 동정심때문에 그대는 그와 함께 고난을 당하리라." 그리스도가 핍박받았을때, 그 일이야말로 그녀에게는 골수의 칼이었다. 그녀가 십자가 곁에 서서 그가 죽어가는 것을 보았을때, 그녀의 비탄은 칼이 그녀의 마음을 찔러 골수에 사무칠 정도였을 것이리라. '그때는 그 때문에 괴로워하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마리아의 고통에 대한 예언으로 이해하고 있다.
2. 여선지자 안나가 그분에 대하여 예언함(36-40)
(1) 안나에 대한 설명 : 그녀는 선지자였다. 이는 곧 그녀가 다른 여자들보다 뛰어나게 성경을 이해하여, 하나님의 일들을 젊은 여자들에게 가르치는 것을 자신의 일로 삼았던 사람이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자신을 증거하신다. 그녀는 바누엘의 딸이었으며, 그녀의 이름은 '은혜로운'이라는 뜻이다. 그녀는 아셀지파 출신으로써, 갈릴리에서 살았다. 그녀는 나이가 매우 많았으며, 팔십사년 동안을 과부로 지냈다. 그녀는 다시 결혼하지 않고 죽을때까지 쭉 과부로 살았는데, 여기서는 이러한 사실이 그녀에 대한 칭찬으로써 언급되어 있다. 그녀는 항상 성전안에서 지냈거나 적어도 성전의 일을 돌보았다. 어떤 사람들은 그녀가 성전의 뜰에 거처를 갖고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또 어떤 학자들은 그녀가 성전을 떠나지않았다는 것은 그녀가 예배때마다 항상 거기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어떤 선한 일을 해야될때, 그일을 도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섬겼다'(37절). 그녀는 자신을 전적으로 경건생활에 바쳤으며, 다른 사람들이 먹고 마시며 잠자는데 허비하는 시간을 신앙생활에 쏟았다. 그리고 그러한 일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섬겼다. 또한 이 사실은 바로 그녀의 신앙생활을 가치있고 훌륭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녀는 금식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섬겼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았다. 때때로 다른 일들은 할수도 있고, 안할수도 있지만, 기도는 항상해야 한다. 경건한 생활을 영위하는 연로한 그리스도인을 본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들은 지치지 않고 선을 행하며, 그 가운데에서 더욱 즐거움을 느낀다. 안나는 이제 마침내 그토록 오랫동안 성전에서 일해온데에 대한 풍성한 보상을 받는다.
(2) 우리 주 예수에 대한 그녀의 증언(38절) : 그녀는 마침 이때에 나아왔다. 항상 성전에 있었던 그녀였으므로 그 기회를 놓칠리가 없었다. 그녀는 시므온처럼 주께 감사를 드렸다. 그리고 아마도 시므온이 그랬던 것처럼 이제 평안하게 떠나기를 바랬을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것을 보고 자극을 받아서 우리의 의무를 행해야 한다. 왜 우리는 그들처럼 마땅히 감사드리지 않는가? 그녀는 선지자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에 대하여 가르쳤다. 그녀는 메시야가 오리라고 믿으면서 그분과 더불어 예루살렘의 구속을 기다렸던 모든 사람들에게 그분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예루살렘에는 구속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소수였다. 안나가 그들을 다알고 있었다는 점이 그러한 사실을 입증해 준다. 그녀가 있는 곳을 알고있었으므로 그녀는 자신이 주를 보았다는 좋은 소식을 그들 모두에게 말했다.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도 그분을 알게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3) 여기 우리 주 예수의 유아기와 어린시절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있다. 그분이 유년시절을 어디서 보냈나? 그들은 '갈릴리로 돌아갔다'(39절). 누가는 그들이 갈릴리로 돌아가기까지 있었던 일에 대하여는 더이상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마태복음에는 이에 대한 설명이 있다(2장).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으로 갔으며, 애굽으로 가라는 지시를 받기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그리고 헤롯이 죽자 그곳에 다시 돌아와서 그들의 본동네 나사렛으로 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본문에서는 나사렛을 그들의 본동네라고 부르고 있다. 그분은 유년시절을 어떻게 지냈나?(40절). 모든 면에서 그분은 형제들과 동등함을 취하셨으므로 다른 아이들같이 유년시절을 보내셨다. 다른 아이들처럼 키가 자랐고 그분의 인간적인 영혼속에서 이해력이 자랐다. 그러나 분별력과 결단력이 약한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그분은 영적으로 강하셨다. 하나님의 영에 힘입어 그분의 인간적인 영혼은 비상한 활력을 부여받았다. 다른 아이들의 마음에는 어리석음이 자리잡고 있지만, 그분은 지혜가 충만하였다. 그분은 나이답지 않게 지혜롭게 말하고 행동하였다. 다른 아이들은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어서 죄의 가라지가 이성의 일과 더불어 자란 것을 보여주었지만, 그분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음을 보여주셨다(40절). 그분은 지극히 사랑받는 자였으며, 하나님의 은총을 풍성하게 받는 자였다.
Ⅴ. 예루살렘 성전에 계신 소년 예수 2:41-52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복된 구주의 유년시절에서부터 이스라엘에 자신을 드러내기까지에 대하여 기록된 유일한 내용을 접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소중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더이상 알려고 해봐야 헛일이기 때문이다.
(1) 그리스도께서는 유월절 절기때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41,42절). 예루살렘까지는 긴 여행이었으며, 또한 그들은 가난하였지만 항상 율법에 따라 유월절 행사에 참여했다. 공적인 의식은 종종 거행되어야 하며, 우리는 모이는 일을 폐해서는 안된다. 어린 예수는 열두살때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유대 학자들은 열두살된 아이들은 때때로 금식을 시작해야 하며, 열세살이 되면 아이는 율법의 아들이 되기 시작하는데 이는 유아기때부터 할례에 의하여 계약의 아들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른 면에서 다른 아이들보다 앞선 아이들은 신앙적인 면에서도 당연히 앞서게 된다. 어려서 하나님께 바쳐진 아이들은 자라서는 복음의 유월절에 즉 주의 만찬에 청하여지게 된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을 그들 자신이 실행하도록 해야한다.
(2) 그리스도께서는 부모가 돌아간 뒤에도 계속 머물러 계셨으며 그 부모들은 알지 못하였다.
1)그분의 부모는 그 날들을 마치기까지 돌아가지 않았다. 비록 그 이틀이 지난 후에까지 그곳에 머물러 있어야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들은 유월절 연회기간인 7일동안 내내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다. 여기있는 것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답게 의식이 끝날때까지 서둘러 떠나지않고 머물러있는 것은 좋은 일이다.
2)이때 그리스도는 예루살렘에 남아있었는데, 그 이유는 집에 가기가 싫었거나 부모와 동행하기가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거기서 해야할 일이 있었으며, 또한 부모로 하여금 자신에게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계시며 자신은 그들에게보다 그분에게 더욱 복종하여야함을 알게하기 위함이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그분이 부모들에게 보다 더욱 복종해야 될 분이셨다. 그렇다고해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대한 존경이 부모에 대한 불경으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또한 기꺼이 주의 집에 거하고자 하는 젊은이들을 대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주의 집에 거할때 그들은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이다.
3)그의 부모는 그가 뒤에 남아있으리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하룻길을 갔다. 그들은 그가 동행중에 있는줄로 생각하였던 것이다(44절). 이 절기에는 많은 무리들이 몰려왔으므로, 그의 부모는 그가 그들의 이웃들과 함께오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친족과 아는자 중에서 그를 찾았다. 혹시 "우리 아들을 보셨습니까?"하고 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를 찾아내지 못했다(45절). 어쩔수 없이 교제해야 하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라곤 거의 혹은 아무것도 알지못하는 친족과 이웃들이 많이 있다. 그가 어디있는지 알수 없게 되자, 그들은 그날밤 그들이 묵었던 곳에 가면 그를 만날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그러나 거기서도 그에 대한 소식을 들을수 없었다.
4)그들은 지난밤 묵었던 곳에서 그를 찾지못하자, 다음날 아침 다시 그를 찾아 예루살렘에 돌아갔다. 그리스도를 만나고자 하는 사람은 그분을 만나게 될때까지 찾아야 한다. 그분을 찾는 자들은 반드시 그분을 만나게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위안을 상실한 자는 그들이 어디서 언제 어떻게 그것을 상실하였는지를 숙고하고, 그것을 마지막으로 누렸던 지점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5)사흘후에 성전에서 그를 만났다. 거기서 그들은 그가 선생들 중에 앉아있는 것을 보았다(46절). 즉 그는 그 선생들에게서 훈련받거나 가르침을 받기위해 배우는 사람으로서 있지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그가 지혜가 충족했을뿐만 아니라(40절), 그 지혜를 더하며 그것을 주고받고자 하셨음을 보이는 한 예이다. 여기서 그는 어린이와 젊은이들에게 하나의 본보기가 되고있다. 즉 젊은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유익이 되는 사람들과 교제하는 즐거움을 이러한 그리스도의 모습을 통하여 배워야하며, 노는 자들 가운데 있기보다 선생들 가운데 앉는 것을 택해야 한다. 그리스도와 같은 나이의 많은 어린이들은 그때 성전에서 다른 아이들과 놀고 있었을 것이지만 그는 성전의 선생들과 함께 앉아있었다. 그는 그들의 말을 들었다.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은 잘들어야 한다. 그는 그들에게 질문도 하였다. 그가 선생으로서(그는 물을 권위도 가지고 계셨다) 질문했는지, 아니면 배우는 자로서(물어볼만큼 겸손하셨다) 질문했는지 우리는 알수 없다. 그는 선생들에게 대답하기도 했는데, 그 대답은 매우 놀랍고 만족스러운 것이었다(47절). 대답과 질문에서 그의 지혜와 총명이 드러났으므로 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기이히 여겼다. 그들은 그처럼 어린아이는 말할 것도 없이 가장 훌륭한 선생도 그가 하는 말만큼 이치에 닿는 말을 하는 것을 본적이 없었다. 그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맛보게 해주었다(칼빈은 이렇게 주장한다).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기이히 여길 뿐이었다.
6)그의 어머니는 이일에 대해 그와 조용히 이야기하였다. 요셉과 마리아는 그가 거기에 있는 것을 보고, 그리고 그가 선생들 중에 앉아있도록 허락받을만큼 대우를 받고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의 어머니는 자기들이 얼마나 걱정했는지를 그에게 이야기하였다.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48절). "어찌하여 우리를 이렇게 놀라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그리스도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그들의 손실에 대하여 한탄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근심하며 절망에 쌓여 앉아있지 않았고, 오히려 근심하면서 찾았다. 근심하며 그를 찾는 자들은 그만큼 더 큰 즐거움을 가지고 그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는 자기에 대한 그들의 지나친 근심을 조용히 책하셨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49절). 이 내 아버지 집에 대하여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해석한다. 즉 "내 아버지의 돌보심과 보호아래". 우리는 다음의 해석을 택한다. "내 아버지의 일에 즉 나는 아버지의 사업을 하지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당신들처럼 즉시 집에 갈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알지 못하십니까?" 자기 아버지의 뜻을 행하며 자신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 그가 세상에 와서 생활하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 그의 부모는 그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50절).
7)그들은 나사렛으로 돌아갔다. 그는 양친에게 예루살렘에 와서 정착해 살것을 권하지않고 기꺼이 나사렛에 은둔해 계셨다. 말하자면 그는 수년동안 세상에서 잊혀진채 그곳에서 지내셨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알수 있다.
첫째, 그는 그의 양친에게 순종하였다. 그는 그의 아버지와 함께 목수일에 종사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여기서 그는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고 의무를 다하는 본보기를 어린이들에게 보여주신다. 양친이 가난하고 비천한 반면 그 자신은 영적으로 강하고 지혜가 충만하였지만, 그는 그의 양친에게 순종하였다. 그렇다면 어리석고 연약하면서도,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자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둘째, 그의 모친은 아들이 하는 말들을 완전히 깨닫지는 못했지만, '이 모든 말들을 마음에 두었다'(51절). 우리는 사람들이 하는 말들이 모호하다고해서 그것들을 소홀히 여기는 경우도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처음에는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지 모를 정도로 불분명하던 것도 나중에는 분명하고도 쉽게 생각될 것이다. 또한 그 말씀이 지금은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는지를 알지못하지만 언젠가는 그것의 용도를 알게될 것이다.
셋째, 그는 점점 자라서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52절). 이것은 그의 인성에 대한 이야기로써 그의 몸, 즉 키와 체구가 자랐음을 뜻한다. 그는 성장기에 따라서 자라났던 것이다. 또한 지혜의 면에서 그리고 인간 영혼의 모든 재능적인 면에서 그의 영혼은 성장하였다. 성숙됨에 따라 그의 인간적인 영혼이 신성으로부터 부여받은 은사들도 점점 확산되었다. 그는 하나님과 사람의 사랑을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하나님의 형상은 그가 유아였을 때와 어린이였을 때보다, 자라서 청년이 되었을때 그 안에서 더욱 밝게 빛났다.
# 해설
메시야가 나시다 ( 2 )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의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면서 기쁨과 감사의 찬송을 드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희망을 주었고 기쁨을 주었으며 평안을 주셨습니다. 예수의 탄생은 새로운 삶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절망과 좌절의 삶에서 벗어나서 생명과 희망의 삶을 살게되는 것입니다.
1. 예수의 탄생
1) 베들레헴에서 낳은 아들
메시야의 탄생이 초라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그가 구원할 백성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더러운 죄악가운데 있으며 죄의 종이 되어 지극히 보잘것없는 존재이기에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도 초라한 구유에 오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루시기 위해서 때가차매 그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을 이루시며 다윗의 동네에 이르러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이로써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셨던 말씀들을 성취시키셨으며 언약의 완성을 위한 가시적 실현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이루시는 것이 우리 눈에 보이기 시작하였다는 것은 그가 곧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a.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 다름(사55:8).
b.기묘한 섭리(롬11:23).
2) 목자들에게 전한 소식
하나님의 사자가 메시야 탄생의 기쁜 소식을 목자들에게 전했습니다. 양을 치며 자신의 일에 충실하던 그들에게 인류의 구원을 알리는 복된 소식이 전해진 것입니다. 자신의 양을 돌보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 바치는 목자들에게 선한 목자되시는 예수의 오심을 알리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제 더이상 절망은 없습니다. 죄아래서 신음하던 과거는 이제 그리스도로 인하여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희망과 즐거움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입에서는 찬송이 울려퍼져야 하며 감사와 기쁨의 노래가 흘러나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을 지키기 위해서 독생자를 보내신 사실을 우리에게 전하신 것입니다.
a.예언의 성취(사7:14).
b.독생자를 보내심(요1:14).
3) 목자들의 경배
메시야의 탄생은 모든 사람들의 경배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탄생은 그를 싫어하는 악한 무리들의 시기로 인해서 백성들가운데 적은 무리에 의해 경배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하시는 일이 작아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너무나 크신 일이기 때문에 악한 인간들의 반응과는 상관이 없이 이루어가시는 것입니다. 목자들의 경배는 마리아에게 새로운 용기와 확신을 더해 주었습니다. 그들의 경배는 결코 몇몇 적은 무리의 초라한 찬양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위대하신 메시야를 발견하고 구원의 확신을 얻은 자들의 위대한 찬양이었습니다. 이제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찬송하는 자리에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a.새 언약을 세움(렘31:31,33).
b.탄생의 예언(시2:7).
2. 예수를 만난 사람들
1) 결례를 행하심
예수는 모세의 법에 의한 의식을 모두 지키셨습니다. 할례와 초태생 속량의 의식과 결례를 행하신 것입니다. 물론 요셉과 마리아의 행함에 의한 것이지만 그가 모세의 법을 지키신 것은 그 법을 온전케하시는 그의 사역을 뒷받침해 주는 것입니다. 의식을 행하는 가운데 만난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을 볼수 있었으며 그로 인해 감사와 기쁨의 찬송을 올릴수 있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a.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징표(창17:10-12).
b.언약의 상징(행7:8).
2) 시므온의 찬송
시므온은 성령께서 말씀하신 구세주를 이제 만나게 되었습니다. 평생을 기다려온 시므온은 감격의 찬송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이는 조용히 기다리는 자에게 구원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결정하였고 그래서 정치적이고 화려한 메시야를 기대하였으나 낮고 천한 자들을 위하여 이 땅에 오신 메시야는 고난과 핍박을 받으며 그의 사역을 이루게 되실 것입니다. 시므온은 이것을 깨닫게 되었고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감사할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시므온과 같이 조용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바라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a.경배받으심(시72:10-15).
b.높이우심(빌2:9-10).
3) 안나의 예언
안나는 여선지자로서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는 이스라엘에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소리는 작은 메아리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소식이 한 선지자의 예언에 그치고 만 것입니다. 겸손히 메시야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그의 나심이 구세주의 구원을 바라보는 것이었는데, 그렇지않은 자들에게는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오랜 경건과 겸손의 생활을 통해서 얻은 지혜는 메시야를 맞이하는 기쁨을 누리게 하였습니다. 안나는 자신이 만난 메시야를 모든 사람에게 전했습니다.
a.여호와의 구속하심(시31:3-5).
b.그리스도를 통한 구속(롬3:24).
3. 성전과 예수
1) 예루살렘으로 올라감
예수께서 유월절을 맞이하여 그의 부모를 따라 예루살렘에 가셨습니다. 아직 구원을 이루실때가 아니지만 절기의 전례를 지키시기 위한 배려였습니다. 예수가 있어야할 곳은 성전입니다. 성전이 그의 집이며 그가 머무를 곳입니다. 그러나 아직 아버지의 정하신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머무심은 절기에 국한된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오르시는 것은 그의 사역을 미리 준비하는 것입니다.
a.유월절을 지킴(레23:6).
b.유월절을 지킨 예(대하35:1).
2) 성전에 계신 예수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에 오르신 예수는 부모의 손길에서 벗어나 홀로 성전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선생들과 토론을 하셨습니다. 성전에서 가르치던 선생들은 자신의 일에 열심이었는지 모르지만 가르침의 궁극적인 목적인 구세주를 만나고서도 그를 알지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했습니다. 예수는 아버지의 집인 성전에 머무는 것이 당연한 것임을 말씀하셨고, 그의 말씀은 우리가 어디에 살아야하는지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살아야할 곳은 아버지의 집이며 그곳이 진정한 우리의 집입니다.
a.배움의 집(미4:2).
b.택하신 곳(신12:5).
3) 예수의 성장
예수께서 그 부모에게 순종하시며 받드시는 것은 인간의 삶에도 충실하신 메시야의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이르기까지 성실과 근면으로 생활하시며 진실한 순종으로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사랑스러워 가시는 것입니다. 인간들의 모든 것을 맛보시며 체험하시는 것은 우리들을 속속들이 이해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인간들을 구원하시되 인간의 내면과 생활을 모두 경험하시고 세밀하게 구원의 길과 방법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과 자비의 손길을 느낄수 있습니다.
a.그리스도의 흠 없음(벧전1:19-21).
b.그리스도의 겸손(빌2:6-8).
결론
이제 하나님의 구원사역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더이상 말씀만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볼수 있는 눈은 복된 눈입니다. 그의 구원의 시작을 깨닫는 자는 진정 지혜로운 자입니다. 우리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일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바라볼수 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바라보는 자들에게 구원을 베푸실 것입니다. 그의 백성들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보면서 즐겁고 기쁜 찬송을 올리게 되는 것입니다.
# 핵심
2:1-20
예수님 탄생과 목자들의 경배 기사. 이는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자신을 지극히 낮추어 인간이 되신 사실에 대한 역사성을 강조한다.
구레뇨 당시의 인구 조사(2:1,2)
구레뇨가 수리아의 총독으로 부임한 해는 A.D. 6-7년경이다. 반면 예수님이 탄생하신 해는 B.C. 5-4년경으로 추정된다. 그러면 요셉과 마리아가 아구스도의 명령에 따라 인구 조사에 응한때(2:4,5)와 구레뇨의 재임 기간이 상치되는 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램지(Ramsay)가 발굴한 비문에 의하면 구레뇨는 예수님 탄생을 전후해 두번이나 수리아 총독으로 재직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구레뇨 당시의 첫번째 인구 조사(2:2)는 주전(B.C.)에, 두번째 인구 조사는 주후(A.D.)에 행해진 것으로 볼수 있다.
안나(2:36-38)
‘은총’이란 뜻의 이름. 결혼한지 7년만에 남편과 사별한후 84년동안이나 성전에서 생활하며 선지자 사역을 감당했다. 일평생 메시아 강림을 대망하다가 영광스럽게도 주님을 뵈었다. 주야로 금식, 기도하며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통하던 중 아기 예수님이 구세주이심을 즉각 알아차렸다. 그녀는 메시아의 강림을 사람들에게 최초로 증거했다.
# 묵상
예수님 탄생의 역사적 배경 ( 2:1, 2 )
당시는 가이사 아구스도가 로마 황제로 호적령을 내리고,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으로 있었을 때입니다. 아구스도(Augustus 주전 27- 주후 14)는 로마의 공화정을 종식시키고 강력한 힘을 가진 황제로 즉위하였으며, 주변 국가들을 차례로 평정하여 로마의 세력을 크게 넓힌 자였습니다. 당시 로마는 14년마다 인구 조사를 하여 제국의 통치를 효율적으로 하였고, 특히 세금 부과에 적절히 이용하였습니다.
메시야 탄생 소식 ( 2:8-14 )
메시야 탄생 소식을 처음 들은 사람은 양치는 목자들이었습니다. 목자라는 직업은 당시 가장 천한 직업에 속하였는데, 본문을 통해 본서는 복음이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사람들에게 맨 처음으로 전해졌음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역사는 강하고 능력있는 자보다 약하고 부족한 자들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때로 외양을 추구하는 자에게 있어 그리스도는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이는 양인 우리들을 영적으로 돌보시는 목자로서의 예수님의 탄생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목자들의 반응 ( 2:15-20 )
본문은 목자들이 천사들의 이야기와 체험한바를 전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들은 목자들은 즉시 베들레헴으로 가서 아기를 찾아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들이 구유에 누인 아기가 메시야인지 여부를 율법적으로 따지거나 의논하지 않고 소박한 믿음으로 달려가 확인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점에서, 믿음은 학식이나 이론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즉시 실행하는 것임을 알수 있습니다.
아이의 이름 ( 2:21 )
마리아와 요셉이 아이에게 지어준 이름은 예수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미리 알려주신(눅1:31) 것으로,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마1:21)이심을 확증하는 이름입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계획은 순종하는 자들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영접 ( 2:25-38 )
시므온과 안나는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영접했습니다. 이들은 제사장도 아니고 유명한 사람도 아니며 단지 메시야를 기다리며 의롭게 살아가는 평범한 노인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이처럼 심령에서부터 당신을 간절히 사모하는 자들에게 임하십니다. 시므온은 예수님이 비방받는 표적이 된다고 예언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승리의 메시야상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고난받는 메시야를 이해할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메시야의 고난을 예언하셨고,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을 통해 우리를 속량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성장 과정 ( 2:40-52 )
예수님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영육은 균형있는 성장을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은 신자들의 성장 과정에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성장 과정에서 부모는 예수님을 잠시 잃어버리는 일을 당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머물러있는 것을 모르고 동행 중이라 생각하며 하룻길을 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늘 동행해야 하는 우리가 주님의 뜻보다는 자기 생각을 앞세울때, 그리고 그 생각대로 살아갈때 우리의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예수님을 잃을수 있음을 유념해야 합니다. 여기에서의 문제는 예수님이 움직이고 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움직이며 변하는데 있습니다. 주님은 한결같은 분이십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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