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를 입은 노아 (김희보 前 총신대 신대원 교수)

 

성경에 가르치기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창6:9)"고 했다.
그는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은 자였다. 이러한 노아에 대하여 다음 몇 가지를 생각해 보자.

1. 노아의 가문
우리가 이제 노아의 가문과 아브라함의 가문을 비교할 때 조금 다른 것이 하나 있다. 아브라함은 우상을 섬기는 불신앙의 가정에서 태어났고 그런 가운데서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노아는 다르다. 경건한 조상들 밑에 태어난 믿음의 정의 아들이다. 노아의 증조부는 유명한 믿음의 사람 에녹이었다. 에녹은 65세 때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또 그의 나이 252세 때에 (창5:21과 25절을 비교해 보라) 손자 라멕을 보았다. 에녹이 승천할 때 손자 라멕의 연령은 113세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므두셀라와 라멕은 에녹이 어떻게 경건한 생활을 하며 하나님과 동행 했던가를 친히 보고 자라난 아들과 손자였음이 분명하다.
바로 그러한 므두셀라는 노아의 할아버지였고 또 그러한 라멕은 그의 아버지임을 생각해 본다면 노아는 얼마나 경건한 가정의 아들이었는가를 상상할 수 있겠다.


우리가 창세기 5:29을 깊이 생각해 볼 때 노아의 아버지 라멕의 믿음을 넉넉히 알 수 있다."라멕은 182세에 아들을 낳고 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창5:29). 이 본문에서 우리는 두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로는 그의 탄식이다. 우리가 이렇게 수고로이 일하며 고생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그는 탄식했다. 우리는 이러한 그의 탄식에서 그의 슬픔이 무엇이었던가를 상상케 된다. 우리 인생들은 다 범죄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들이 되었다고 그는 탄식하며 슬퍼했던 것임을 본다. 이러한 탄식, 그러한 슬픔이야말로 곧 그의 믿음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본다. 우리는 다 우리의 허물과 죄로 인하여 멸망할수 밖에 없다고 슬퍼하며 탄식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구원의 길에 가까운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지금 내가 이렇게 고생해야 하는 것은 나의 죄값이라고 생각하는 그 양심이야말로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라멕이 그러한 슬픔과 탄식만으로 끝났다면 그것을 가리켜 참 믿음이라고 할 수 없겠다. 라멕은 그저 슬픔과 탄식만으로 끝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저주 받은 인간들이라도 장차 하나님의 위로와 안식을 받을 길이 있다고 믿었던 사람이었다. 이러한 그의 믿음은 그가 지은 그의 아들 노아의 이름에 잘 나타나 있다.
구약시대에는 그 아들의 이름을 작명함에 있어서 그 아버지의 믿음과 소망이 그 아들의 이름에 표현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 그러므로 노아의 이름에서 그 아버지 라멕의 믿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결코 무리한 일이 아니다.
창세기 5:29을 읽어 보라. "라멕은 아들을 낳고....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는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노아라는 히브리 말의 원뜻은 안식과 위로란 말이다.

라멕은 참 안식과 위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을 믿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아들을 하나님의 선물로 받으면서 그 아들을 통하여 참 안식과 위로를 바라보고 기뻐하며 감사했다. 그런 의미에서 노아는 장차 나타날 그리스도의 예표로 보아도 좋다.
이러한 그 아버지의 믿음은 노아에게도 깊은 감화를 주었을 것이 분명하다. (말라기 2:15 참고)

2. 노아 시대의 환경
노아 시대는 심히 부패한 시대였다. 창6:2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했음을 본다.
여기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천사를 가리킨 것이 아니다. 하늘의 천사들을 결혼하지 않는다. 그것은 셋의 후손들을 의미한다. 아벨의 거룩한 계대를 이어줘야 할 셋의 후손들도 가인의 무리와 연합하여 어떻게 부패해진 것을 위의 성경은 보여준다. 이렇게 가인의 후손도 셋의 후손도 다 같이 타락하게 됐다. 창6:56을 보면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하셨는데 이처럼 노아 시대는 죄악이 관영한 시대요, 사람의 마음이 악하여 하나님을 탄식케 하여 근심케한 시대였다. 사람의 마음이 악함과 세상의 죄악은 하나님을 그처럼 슬프게 했고 탄식케 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천지와 만물과 사람을 처음 창조하신 때는 "보시고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는데 그렇게 좋아하셨다는 말씀이 창세기 1장에서 7번이나 나온다(1:4,10,18,25,31).

그러나 이제는 반대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기뻐하시던 것을 보시고 슬퍼하셨다. 죄악이란 이처럼 흉악한 것이다. 노아 시대는 그러한 죄악이 세상에 차고 넘쳤다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암흑한 때이기에 노아는 하늘의 별같이 더욱 빛나게 되었다. 모든 백성들이 다 하나님을 탄식케 하는 그러한 시대에 오직 노아만은 하나님을 기쁘게한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악한 시대를 슬퍼하시며 탄식하심이 사실이었으나 의인 노아, 그 한사람으로 인하여 그는 지극히 기쁘셨다. 그로 말미암아 세상을 새롭게 할 수 있으셨다. 억만인이 죄악을 범한다 할찌라도 오직 죄악을 이기며 의를 행하는 한사람의 존재가 얼마나 존귀함을 우리는 노아에게서 배워야 한다(참고, 예레미야5:1). 그러면 노아는 어떻게 그처럼 의로운 자가 될 수 있었을까? 그 대답은 오직 창세기 6:8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그처럼 의롭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큰 믿음을 지킨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그가 구원을 얻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다.
죄악이 관영한 시대에 홀로 의롭게 산다는 것은 큰 고통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불의의 물결이 홍수같이 밀려드는 그런때에 홀로 그것을 경건히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노아는 그것을 감당했다. 그것이 결코 노아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었다. 노아가 마침내 심판을 이기고 구원을 얻은 것도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가 아니었더라면 그렇게 큰 믿음을 지킬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 창세기의 저자인 모세는 노아의 그 승리의 생애를 기록하려할 때에 먼저 기록한 말씀은 창세기 6: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하신 그 말씀이었다(엡2:8참고).

성경은 노아의 생애를 기록하기에 앞서 그가 어떻게 "은혜를 입은" 사람이었던가를 먼저 기록한 것을 우리는 주의 깊이 읽어야할 것이다. 노아의 경건한 신앙과 생애는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었다. 혹 우리에게 좋은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자가 있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먼저 하나님의 은혜임을 감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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