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안에 돌아온 야곱 (김희보 前 총신대 신대원 교수)
야곱은 밧단아람 땅에서 20년을 지나면서 양 떼와 소 떼를 몰고 들판에서 헤메는 곤고한 목자의 생활을 했다. 본래 그는 성격이 조용한 내성적인 사람으로 장막에 거하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성격에도 맞지않는 20년의 [들 사람]의 생활을 했던 것이다. 마침내 그는 고향이 그리워졌고, 고향에 돌아갈 마음이 생겼다. 벌써 그때는 야곱의 슬하에는 네 아내와 열두 형제의 아들들이 있었고 많은 종들과 우양의 떼를 가지고 있었다. 혹시 어떤 사람은 야곱이 네 아내를 얻은 구약의 다처주의에 대해서 의심을 갖는 사람이 있을줄 안다.
족장중 이삭과 요셉은 첩을 얻지 않았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야곱은 첩을 얻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살았던 시대의 동방 여러나라 사람들의 풍속이었다. 사람이 그 시대의 풍속과 습관을 벗어버리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던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실례가 된다.
사실 아브라함과 야곱은 그의 가정이 불순했기 때문에 받은 가정적 고통이 참으로 많았다. 야곱의 아들들은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고 마침내는 자기들의 동생인 요셉을 죽여버리려 했던 것도 그들이 서로 어머니가 달랐기 때문이었고, 그 어머니들이 서로 시기 질투하는 것을 어릴때부터 보았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처럼 복잡한 가정에서 자라난 그 자녀들이 서로 화평할 수 없었던 것도 결국은 야곱의 죄 때문이었다. 야곱의 가정의 그러한 불화는 하나님께서 그 가정에 내린 하나의 심판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야곱은 지금 네 아내와 그들에 따르는 여러 자녀들과 많은 우양의 떼와 종들을 거느리고 자기의 외삼촌 라반도 알지 못하게 밤중에 길을 떠났다. 그러나 그때 한가지 사건이 있었다. 떠날 때의 야곱의 아내 라헬이 자기 아버지의 집 우상인 드라빔을 훔쳤다.
드라빔은 순금으로 된 인간형태의 우상이라고 한다. 그것은 소위 가정을 지키는 수호신이라고 해서 그 우상을 섬겼다. 그런데 야곱의 아내 라헬은 어찌하여 그 우상을 도둑질 했을까 하는 문제에 대해서 당시의 풍속을 알려주는 좋은 고고학적 자료가 발견되었는데, 그 자료에 의하면 한가정의 우상을 소유한 자녀가 결국 그 가정의 모든 재산을 상속받을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다.
아마도 라헬은 아버지 집의 금 우상이 탐이 나서가 아니라 결국은 아버지 집의 재산이 탐나서 그러한 일을 저지른줄 안다. 한마디로 말해서 야곱의 집의 신앙이란 것은 보잘것 없었던것 같고 한가정의 가장으로서 야곱의 신앙적 감화란 것도 볼 것이 없었던 줄 안다.
그러기에 야곱은 앞으로도 더 많은 환난을 겪어야 했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야 했던 것이다.
야곱이 떠난지 제 3일만에 라반은 그 소식을 들었고 우상을 도둑 맞은 것도 알았다. 라반은 많은 사람을 거느리고 뒤따라 가서 제 7일만에 야곱의 일행을 찾게 되었다. 라반은 심히 분노해서 야곱을 크게 해치려 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창 31:29에 보면 라반의 말에 "너를 해칠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어젯 밤에 내게 꿈에 나타나서 말하기를 너는 삼가 야곱을 해하지 말라고 했기에 너를 용서한다"고 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어떻게 보호해 주셨는지 보여주시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야곱을 크게 해치려는 라반의 마음을 감화시킴으로써 야곱을 보호하셨던 것이다. 야곱은 사실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택한 백성을 그처럼 끝까지 지키시며 보호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창세기 32:1~2를 보아도 이런 말씀이 있다.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더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여기에서 보는대로 야곱은 다시 길을 진행할 때에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났다고 했다. 아마 이것은 그의 환상 중에 되어진 것인줄 안다.
그 하나님의 사자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야곱은 그들을 군대라고 하면서 그 장소 이름을 [마하나임]이라고 했다. [마하나임]이란 말은 두겹으로 둘러싼 큰 부대란 뜻이다. 영어로 "double camps"란 말로 이중부대란 뜻이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이러한 환상을 보여준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이렇게 보호해 주는 것을 믿고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그러나 아직도 야곱은 하나님의 그러한 보호를 온전히 믿을수 있는데까지 그 신앙이 이르지 못했다. 그는 형 에서를 만날 생각을 하니 크게 두려움이 생겼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먼저 그 형 에서에게 사자들을 앞서 보냈다.
형의 동태를 우선 알아보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사자들이 돌아와서 보고하는 그 말은 야곱을 크게 놀라게 했다. 창세기 32:6에 보면 그 사자들의 말이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4백인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라고 했다.
동생을 만나려고 오는 형 에서가 4백인 씩이나 사람을 거느리고 올 필요가 어디 있었겠는가. 야곱은 이 사실에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에서가 4백명이나 되는 하나의 부대를 거느리고 온다는 것은 야곱을 영접하려는 것이 아니라 야곱에게 복수하여 멸하려 오는 것으로 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실 창32:6을 원문에서 보면 야곱의 사자들이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또한 4백인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 여기에서 [또한]이라는 히브리말(메모드)은 벌써란 뜻으로써 야곱의 사자들이 에서에게 이르니 "그는 벌써 4백인을 거느리고 오더라"라는 말이다.
에서가 어떻게 벌써 야곱이 오는 줄을 알고 4백인을 거느리고 떠났겠는가? 야곱은 밧단아람을 떠날때도 밤에 남이 모르게 도망쳐 나온 사람이 아닌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에서가 야곱의 출발을 벌써 알고 4백인을 거느리고 떠났다는 것은 심상한 일이 아닌 것임이 분명하다.
생각컨대 에서는 오랫동안 야곱에 대해서 큰 원한을 품고 그의 동정을 예리하게 살피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야곱의 종들 중에 혹 에서의 정탐군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떠한 방법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야곱의 출발이 가까운 라반은 몰랐어도 멀리있는 에서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얼마나 야곱에 대해서 원한이 컸던가를 보여주는 것으로 안다.
여기에서 야곱은 자기의 일행을 세 떼로 나누어서 각각 예물을 가지고 앞서가게 했다. 먼저간 일행이 에서를 만나서 예물을 드리며 그의 원한을 풀게하고, 제 3진까지 그렇게 하게하고 그의 처자를 맨 뒤에 따라가게 하고 자기만은 홀로 남아서 에서의 모든 태도를 살피게 했던 것이다. 이것은 야곱이 얼마나 형 에서를 무서워 했던가를 보여 준다.
그런데 창32:24에 보면 떨고있는 야곱에게 [어떤 사람]이 다가왔다. 성경에 보면 야곱은 그와 더불어 밤새도록 씨름했다고 했다. 여기에서 씨름이란 무슨 운동이나 유희같은 오늘날의 씨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마도 야곱이 낯선 어떤 사람이 찾아올 때에 그는 에서가 보낸 한 자객이 아니었던가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와 생사를 결정하는 싸움을 한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마침내 야곱에게는 신령한 눈이 열려서 그가 하나님의 사자인 것을 알게 됐다. 물론 그것은 그의 환도뼈가 부러진 후의 일이다. 그가 천사와 더불어 씨름한 것은 하나님을 크게 대적한 일로써 크게 징계를 받았다. 호세아 12:2~3을 보면 여호와께서 "야곱의 소행대로 벌을 주시며 그 소위대로 보응하시리니 그는 태에서 그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장년에는 하나님과 힘을 겨루었다"라고 한 말씀이 있다.
야곱이 그처럼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한 것은 그가 모태에서 형과 싸운것 같이 그의 악한 소행이라고 선지자 호세아는 말씀했다. 하나님을 대적한 일이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그의 환도뼈를 꺽으신 것은 그에게 큰 징계임이 분명하다. 그는 징계를 통해서야 하나님을 알게 됐던 것이다.
그는 그때 비로소 울며 회개했다고 호세아는 기록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회개를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하나님께서는 그때 이후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했다. 그 뜻은 하나님과 힘을 겨루어 이겼다는 말이다.
그 반대로 말한다면 [이스라엘]이란 말은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졌다는 말이 되겠는데 그러나 그것은 문자적으로 그러한 뜻이 아니라 사람이 아무리 사특하고 악하다할찌라도 그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며 사죄를 간구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진노를 거두시고 축복하신다는 뜻이다.
야곱은 자기의 혈육의 힘과 간교한 지혜로써 승리한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울며 회개할때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로 크게 성공한 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 일이 있은후 드디어 야곱은 에서를 만나게 됐다. 뜻밖에도 형 에서는 야곱을 만나 그의 목을 안고 울었다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원한에 가득찬 에서의 마음도 녹여주고 마침내 한 혈육의 정을 나누게 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라반의 마음을 녹여서 야곱을 해하지 못하게 하신것 같이 이번에는 에서의 마음을 녹여서 야곱을 해하지 않도록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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