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의 고난과 그의 성화 (김희보 前 총신대 신대원 교수)

야곱이 당한 고난과 요셉이 당한 고난을 생각해 볼때 그 양자는 전혀 판이한 의미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야곱은 자기의 많은 허물과 죄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였으나 요셉은 허물없이 당한 고난이었다. 요셉이 당한 고난은 일종의 대속적 성격을 띠고있는 십자가의 고난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수난은 자기 가정의 불순한 형제들의 죄를 짊어진 결과로 온 것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고난이라는 인간적 비극이 지니고 있는 성경적 의미를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자기의 죄로 인하여 당하는 고난은 그로 하여금 성화에 이르게 하고 대속적인 고난은 그로 하여금 영화에 이르게 한다는 사실이다.
요셉은 그의 모든 수난을 통하여 마침내 영화에 이르렀고 야곱은 성화에 이르렀다. 필자가 적은 논문에서는 요셉의 고난은 보류하고 야곱의 고난만을 취급하는데 그가 어떻게 그 고난을 통하여 성화에 이르렀는가함을 살펴보려 한다.
먼저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그의 어린 시절의 교육과 신앙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 한다.

1. 야곱의 받은 교육
창 25:27에 "에서는 익숙한 사냥군인고로 들사람이 되었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인고로 장막에 거하니"라 하신 말씀이 있다. 여기에서 보는대로 에서는 외향적인 성격이요 남성적이었으나, 야곱은 내향적인 성격에 그 무슨 우열을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야곱은 그 내향적인 성격때문에 그 신앙에 결정적인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인것 같다.
에서의 남성적인 성격은 그로 하여금 "들사람"을 만들었으나 야곱은 조용한 성격에 장막에 거하기를 좋아하였기 때문에 부모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았을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그는 그의 부모를 통하여 아브라함과 이삭과 자기의 가문에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이 얼마나 존귀한 것임을 배웠을 것이다. 특별히 그 어머니 리브가는 아직 그 아들이 모태에 있을때에 받은 계시 즉 "... 큰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창25:23)"한 그 말에 따라서 어린 아들 야곱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교육했을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야곱이 하나님의 언약의 존귀성을 알고 어떻게 해서든지 그 언약이 자기에게 이루어지기를 사모하게 되었음은 그의 일찍부터 받은 교육의 결과이었을 것이다.

2. 야곱의 잘못된 방법
창25:23에 "여호와께서 그(리브가)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자를 섬기리라."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을 야곱은 인내로써 기다렸어야 할 것이었다. 하나님의 언약을 인간적인 사기적 방법으로 성취하려한 야곱과 리브가의 태도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야곱의 환난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어머니 리브가도 슬픔을 당한다. 에서의 분노를 본 리브가의 말이 "내 아들아 내 말을 쫓아 일어나 하란으로 가서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 피하여 네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날 동안 그와 함께 거하라"(창27:43) 했으나 야곱은 " 몇날"이 아니라 20년의 피난생활을 해야했고(창31:41), 그 어머니 리브가는 다시 그 사랑하는 아들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이것은 곧 리브가가 받은 하나님의 징계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또 한편 장막에만 있기를 좋아하던 조용한 성격의 야곱이 20년동안 아니 거의 일평생을 "들사람"으로 살아야 했던 것도 육신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의 잘못된 방법은 이러한 곤고를 자초하게 되었다.

3. 은혜를 잊어버린 야곱
창28:16에 "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 말씀은 야곱이 천사들의 현현을 본 후에 잠이 깨어나서 한 말이다. 위험한 지경에서 하나님의 보호를 체험하고 그는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는 꿈 속에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이 자기에게 계승될 것을 계시로 받게 되었다(창28:13~14).
또 그가 어디에 가든지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키시며 인도하실 것을 약속하였다(창28:15). 그는 거기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돌을 가져다 기둥으로 세우며 하나님 앞에 서약했다. 그의 서약이 어떻게 간절한 것임을 그가 그위에 기름을 부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 기름은 그 어머니가 피난 길에 나선 아들에게 준 유일한 노자일지도 모른다. 그것을 아낌없이 부었다는 것은 그의 간절한 헌신을 의미한다고 본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의 감격과 그 헌신과 서약이 오래 지속된 흔적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소원대로 (창28:20) 어디에 가나 그와 함께계셨고 그의 길을 지키었고 먹을 양식을 주었고 입을 옷을 주셨다. 마침내는 아비의 집으로 평안히 돌아가게도 하셨다. 그러나 그는 그 서약을 오랫동안 지키지 않았다.
그가 서약한대로(창28:21~22) 우선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했지만 그의 가정에는 20년 내지 30년간이나 우상을 그대로 두고 처자들이 그것을 섬겨도 방치했던 것이다.
또 야곱은 "벧엘에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라고 했지만(창28:22) 그는 그후 30년 가까이 지나면서도 그곳 벧엘을 찾은 흔적이 없다가 디나 사건 이후 비로소 벧엘을 찾게 되었던 것이다(창35:1).
물론 그가 하나님 앞에 약속한 십일조를 (창28:22) 약속대로 실천했다는 기록도 성경에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요구를 채우셨고 그에게 은혜를 계속 베푸셨건만 그는 그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살았던 것이다. 디나 사건은 진실로 그러한 야곱의 영혼을 깨우치기 위한 하나의 징계였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사실 야곱은 그때에 비로소 영안이 열려 벧엘을 다시 찾게되었던 것이다(창35:1). 물론 그 가정의 모든 우상을 청산하고(창35:2).

 

4. 하나님과 대항한 야곱

창32:24에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라고 하신 말씀이 있다. 여기에서 야곱이 씨름했다는 말을 성경 해석자들은 흔히 야곱의 간절한 기도와 상징으로 보는 경향이 있으나 그것은 오해인 것이다. 호12:2~3에 보면 그것은 온전히 하나님을 대항한 악한 소행이라고 했다.
가시채를 차는 자의 발이 상할수 밖에 없는것 같이 하나님을 대항한 그에게 평안이 있을 수 없었다. 그는 환도뼈가 상하고야 그 싸움은 끝이 났다.
여호와의 사자가 밤새도록 져주었다는 사실은 야곱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기 위함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위골이 되기까지는 그의 영안이 열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그 위골로 인하여 장구한 세월 치료를 요했던 것도 짐작이 된다. 그 기간은 그에게 있어서 깊은 반성의 기간이요, 회개의 기회였을 것이다.
그가 환도뼈가 부러진후 울며 간구했다(
호12:4)고 했으니 그때부터 그의 회개는 시작되었음이 분명하고 그때에 이스라엘이란 복된 이름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에게 회개의 열매를 볼 수 없었던 것은 그의 세겜에서의 10년간의 생활이(가정의 우상을 청산치 못한) 충분히 증명한다고 생각된다. 그는 세겜에 그처럼 오래 살면서도 옛날에 벌써 하나님의 전을 세우겠다고 그렇게 서약했던 그곳(벧엘)을 찾아가 본 흔적조차도 없다. 그럴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 무서운 디나의 사건을 당하게 한 것이다(창34장).
그것은 그에게 준 가장 큰 징계의 하나였다고 본다. 그러나 그가 얍복강에서 울며 간구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크게 응답하여 주신 것이 사실이다(
창32:28, 호12:4-6).

그런데 그가 그때에 그처럼 울며 간구한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생각컨데 그것은 형 에서의 손에서 구원하여 달라는 애원이었을 것이다. 창 32:6에 보면 에서는 벌써 야곱이 오는 것을 알고 400명을 거느리고 출발하였음을 본다. 그 400명이란 야곱을 치기위해 인솔하고 떠난 하나의 부대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야곱은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믿음으로 그를 맞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야곱에게는 그러한 믿음이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에서의 부대를 두려워하지 말도록 벌써 가르쳐 주신 일이 있다.
창 32:12에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더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나지라 약보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이 얼마나 놀라운 계시였던가? 여기 "마하나임"이란 이중부대(double camps)를 의미한다. 에서의 400명 부대를 이기고도 남을수 있는 여호와의 부대를 의미한다.
이러한 놀라운 계시를 받은 야곱이 그처럼 에서의 부대를 두려워서 처자를 먼저 앞세우고(
창32:22) 자기만이 홀로 남아 얍복나루를 건너지 못하고 하회를 보려함은 참으로 비겁한 행위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그러한 야곱에게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셨다. 에서의 부대는 야곱을 치지 않았다. 형 에서는 오히려 울며 그를 만났다(
창33:4). 아, 어찌된 일일까?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인줄 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위하여 에서의 마음을 감동시킨 것이라고 본다. 창31:29에 "너를 해할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 너희 아버지 하나님이 어젯밤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고 라반의 마음을 감동시킨 하나님께서 에서의 마음을 또한 감동시킨 것이 아니겠는가? 크게 분노한 외삼촌의 마음을 감화시킨 하나님께서는 에서의 마음을 또한 감화시켜 저를 해하지 않게 하심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지키시며 보호하셨다.
그러나 야곱에게는 그에 합당한 신앙의 열매가 없었다. 디나 사건뿐만 아니라 요셉을 잃어버리는 비극도 어떤 의미에서는 야곱에게 준 하나님의 징계였다.
그의 130년의 일생이 "험악한 세월을 보낸"(
창47:9) 것도 그의 간악한 성품과 불신앙을 깨우치기 위한 하나님의 징계라고 보아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러한 징계들을 통하여 야곱은 점차 성화의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그는 어느 정도의 성화에 이르렀던가 이제 그것을 살펴보기로 한다.

 

5. 야곱의 성화

많은 고난을 통하여 노년기에 이르러서 야곱의 인격은 성화되고 신앙은 크게 심화된 것을 우리는 여러가지 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1) 노년기의 그에게서는 우선 탐심이 없어진 것을 본다.
창43:12에 "그 땅에 기근이 심하고 그들이 애굽에서 가져온 곡식을 다 먹으매 그 아비가 그들에게 이르되 양식을 조금 사라"고 했다. 히브리 원문 성경에서는 "양식을 조금 사라"가 아니라 "적은 양식"을 사라로 되어 있다. 이 말은 곧 앞의 "큰 기근"과 잘 조화되며 대구되는 말이냐. 이 말에서 우리는 야곱의 인격의 변화를 찾아본다. 그는 본래 탐심이 많은 사람이었다(창30:37~43). 그러나 그러한 탐심은 이제 그에게서 온전히 떠났음을 상상할 수 있다. 이제 생각해 보라. 그의 가족은 70인이었다(창 46:27). 또 그에게는 많은 우양이 있었다(창46:32). 이러한 그의 "큰 기근"을 넘기 위해서는 "많은 양식"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 그러한 양식을 원한 것이 아니라 "적은 양식"을 사오라고 했다. 그에게 많은 양식을 살 수 있는 교환물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앞서 말한대로 그에게는 많은 우양이 남아 있었다. 그밖에도 많은 재물이 있었다 (창46:6). 그리고 요셉의 창고에서는 얼마든지 양식을 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야곱이 적은 양식을 요구한 것은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에게 탐심이 없어졌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제 자기만을 생각하는 이기심에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남을 생각하는 동정심이 얼마나 깊어졌음을 우리는 이 적은 문구(적은 양식이란)에서 찾아본다.

 

(2) 하나님의 섭리를 의지하는 그의 믿음이 깊어졌다.
과거에 요셉을 잃어버리고 슬퍼하던 그는 (
창37:33) 이제 온전히 범사에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의지했다.
창43:14에 "전능한 하나님이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되면 잃으리로다" 했음을 본다. 물론 우리는 창42:36의 탄식의 말을 기억한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 시험이었다. 그후 그는 온전히 하나님의 섭리에 의지했음을 상기의 창43:14에서 본다.
거기에서 특별히 그는 하나님을 엘사다이(우리 한국어는 전능하신 하나님)로 불렀다. 하나님에 대한 이 호칭은 야곱의 입에서는 지금 처음 나오는 말이었다. 엘사다이의 이 명칭은 이른바 야웨와 대립되는 말로서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깊은 신앙을 표현하는 말이다. 이 호칭은 본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을 세우실 때에 계시된 하나님의 명칭이다(
창17:148:3, 28:343:14, 출6:3). 물론 이 명칭은 하나님의 능력을 강하게 표현하는 말로써 그의 은혜의 확실성을 계시하는 호칭이다. 이처럼 엘사다이의 호칭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세우시고 그것을 그의 능력으로서 성취하실 것을 믿게하는 이름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여호와라고 할 때에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것과 같이 엘사다이라고 할때 또한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야곱이 처음으로 (창43:14) 하나님을 엘사다이라고 부르면서 은혜 베푸시기를 원한 것은 자기의 받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확실한 신앙을 고백한 것으로 본다. 그는 하나님의 그 언약을 생각하면서 "내가 자식을 잃게되면 잃으리라"고 했다. 이것은 옛날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던 "여호와 이레"의 신앙을 (창22:8-14, 히11:18~19) 방불케 한다.
그가 이러한 신앙을 가지게 될때 하나님께서는 시므온과 베냐민을 도로 돌릴뿐만 아니라 요셉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게 했고 그가 어떻게 영화롭게 된 것을 비로소 알게 했다(
창45:25-28).

 

(3) 노년기의 그는 아브라함같이 먼저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는 족장이 되었다.
창45:28-46:1에 "이스라엘이 가로되 족하도다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았으니 내가 죽기 전에 가서 보리라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발행하여 브엘세바에 이르러 아비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니" 했음을 본다. 이처럼 그는 요셉의 살아있음을 알고 그를 만나고자 애굽으로 가려할때 먼저 브엘세바로 가서 하나님 앞에 희생 제물로 드리는 제단을 쌓았다.
이것은 그의 많은 환난을 통하여 얻은 신앙의 열매인줄 안다. 그가 애굽을 향하여 떠나려 한것은 옛날 아브라함이나 이삭같이(
창12:1~4, 26:1~2) 기근을 피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다만 아들 요셉을 죽기전에 보려고 가려했던 것이다(
창45:28). 그러나 그는 마음에 두려움이 있었다. 약속의 땅을 잠시나마 떠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그는 알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애굽으로 가려할때 그것을 두려워한 것은 당연한 일인줄 안다. 그의 그 마음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애굽에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창46:3)"고 했고 다시 올라올 것을 약속했다. 야곱이 애굽으로 떠나기를 두려워했다는 그 사실만도(그때의 그의 의도는 잠간 아들 요셉을 만나보려는것 뿐이었지만) 그의 신앙의 깊이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이러한 신앙의 태도는 일찌기 아브라함이나 이삭에게서 볼 수 없었던 것이다(창12:10, 창26:1참고).

 

(4) 노년기에 있어서 그의 육신의 눈은 어두웠으나 그의 심령의 눈은 밝았음을 본다.
창 48:10에 "이스라엘의 눈이 나이로 인하여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하셨는데 말년의 야곱은 옛날 그 아버지 이삭과 같이 눈이 어두워졌다(창27:1참고). 그러나 그는 이삭과는 크게 달랐다. 창48:17에서 보는대로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에게 축복할 때에 작은 아들 에브라임에게 오른손을 얹고 큰 아들 므낫세에게는 왼손을 얹었다. 요셉은 말하기를 "아버지여 그리 마소서"(창48:18 ) 하면서 아버지의 손을 바꾸려 할 때에 야곱은 허락치 않으며 하는 말이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면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창 48:19~20)고 했다.
이처럼 야곱의 영안은 밝아서 두 아들 중 누구에게 축복해야 할 것을 알았다.
이 한가지만 보아도 야곱은 이삭과 다르다(
창27:21-32참고). 창 27:33에 보면 이삭은 야곱에게 축복한후 에서가 들어왔을때 "심히 크게 떨었다"고 했다. 그것은 에서가 두려웠던 것은 아니었다. 자칫하면 하나님의 뜻을 크게 어길뻔 했던 자기의 실수를 하나님 앞에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러나 야곱은 이삭같지 않았다. 야곱은 그 권속들의 제사장으로서도 허물없는 제사장이었다. 육신의 눈이 어두웠음에도 그처럼 영안이 밝았던 것은 그의 신앙의 깊이와 성화의 수준을 넉넉히 보여주고도 남음이 있다(히11:21 참고).

 

(5) 노년기의 그는 또 위대한 선지자였다.
창49:1에 "야곱이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의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고 하면서 그 아들들에게 예언적인 축복을 한 것이 있다. 그는 현실의 눈은 어두웠으나 "먼 후일"을 보는 믿음의 눈이 열린 선지자였다. 특별히 창49:18에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라고 했는데 이는 곧 하나님의 구원을 사모한 사람이었던 것을 보여 준다.

 

(6) 노년기의 그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심히 사모한 사람이었다.
창48:21에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시려니와"라 하신 말씀이 있다. 자, 생각해 보라. 요셉은 지금 애굽의 최고의 권좌에 올라 있다. 그러나 야곱은 요셉의 받은 애굽의 그 영화를 기뻐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그를 인도하여 약속의 땅에 돌아가게 하실 것을 고대했다. 이것은 애굽의 보화보다도 하나님의 나라와 그 약속을 더 사모한 모세의 믿음을 (히11:24-26) 방불케 한다.

말년에 그는 성경에 나타난 어느 족장보다도 어느 지도자보다도 더욱 경건했고 신앙과 성화의 최고의 수준에 이르렀다고 생각된다. 본래 간교한 성품의 그가(창27:35) 어떻게 그처럼 성화될 수 있었을까? 그것은 곧 그의 당한 환난이었다. 성도의 당하는 환난은 그들로 성화에 이르게 하는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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