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우리의 본이 되시는 그리스도 (12:1-3절)
여기서 바울은 히브리인들에게 큰 의무를 수행하도록 촉구한다. 이 의무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 예비적으로 수행해야 할 의무(1)
그것은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는 것'이다. 모든 무거운 것이란 육체와 현세의 생과 세상에 대한 과도한 관심과 사랑을 의미한다. 얽매이기 쉬운 죄란 우리의 처해있는 환경 우리의 관습, 그리고 우리의 교제들을 통하여 우리가 저지르는 죄를 말한다.
2. 완전해지기 위하여 수행해야 할 의무(1-3)
이는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1) 기독교인에게는 달려야 하는 경주가 있다.
2) 이 경주가 기독교인들 앞에 대기되어 있다. 우리가 달려야 할 경주 과정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 즉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허다한 증인들의 본을 통하여 구획된 것이다.
3) 이 경주는 인내와 끈기로서 달려야 한다. 믿음과 인내는 모든 것을 정복하는 은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이 두 가지를 신장시켜야 한다.
4) 기독교인들에게는 앞에서 언급한(2절) 믿음의 사람들보다도 훨씬 강하게 그들을 격려해 주시는 분이 계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된 우리들에게 어떠한 분이신가? 그는 믿는 이들의 믿음의 주이시며 온전케 하시는 분이시다. 그는 우리의 믿음의 대상일 뿐 아니라 주이시다. 그는 믿음의 규례를 반포하시는 분이시며 또한 믿음의 근원이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믿음을 온전케 하시는 이'이시다. 그는 은혜의 완성자이시며 믿는 사람의 영혼 안에서 능력으로써 믿음의 역사를 일으키시는 분이시다. 또 그는 재판관이시오, 그들의 믿음을 보상하는 분이시다.
②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경주하실 때 어떤 고난을 만나셨을까? 그는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셨다'(3절). 그는 죄인들의 모든 악한 태도를 큰 인내로서 참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것을 참아내셨다. '그는 십자가도 참아내셨다'. 그는 이 세상에서 만난 고통을 참으시고 마침내 때가 이르자 십자가를 지시고 거기에 못박히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불굴의 인내와 의지로 이 모든 것을 참아내셨다. '그는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였다'. 그의 생전에 그리고 심지어 죽는 자리에서도 심한 욕설과 비난이 그에게 퍼부어졌으나 그는 이 모든 수욕을 개의치 아니하셨다.
③ 이런 고통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인성의 영혼을 지지해 준 것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그의 앞에 놓인 즐거움이었다.' 그는 자기가 고통을 받으시므로써 하나님의 손상된 공의가 회복되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평이 이룩되며 또한 인간에게 구원의 길이 열리는 것을 보시고 즐거워하셨다.
④ 그의 고난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보상하셨던가? 그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시게 되었다'. 그는 영원히 살아 계시면서 그의 백성들을 위하여 중보하신다.
⑤ 이러한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의무는 무엇인가? 우리는 먼저 그를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는 항상 그분을 우리의 본보기로서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는 항상 그분에 대하여 깊이 묵상해야만 한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가 당하는 고난보다 훨씬 더 컸으며 그 분의 인내 또한 우리의 인내보다 훨씬 더 크셨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⑥ 이렇게 함으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유익은 무엇인가? 이로써 우리가 얻게 되는 유익은 낙심치 않게 되고 피곤치 않게 되는 것이다(3절). 아무리 믿음이 좋은 자라도 시련과 고통을 당하면 낙심케 되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런 낙심을 막는 최상의 방법은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다. 믿음과 그리스도에 대한 명상은 신선한 힘과 위로와 용기를 준다.
Ⅱ. 고난을 주는 이유 (12:4-17절)
1. 히브리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겪는 고난의 정도는 그렇게 심한 편이 아니었다(4절). 사도는 그들이 죄를 대항하여 싸우느라 고통을 많이 당하였고 고난 또한 컸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이 더 큰 고난을 겪게 될 수도 있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자기 백성을 처음부터 극심한 시련 가운데로 불러내지 않으시며, 현재의 감당할만한 고난으로 그들을 지혜롭게 훈련시킴으로써 장차 다가올 더 큰 고난을 대비케 하신다. 시련을 통하여 그들을 강건케 하신다는 바로 그 점에 그리스도의 위대성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들이 당하고 있는 고난에 찌들리지 말고 그 고난 가운데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자비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2. 사도는 이러한 고난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밝혀서 그들에게 인내할 것을 권면한다. 즉 핍박자들은 하나님의 채찍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들 핍박자들까지도 모두 주관하신다. 이것이 그가 유대인들에게 주었던 당연한 주의였으며 유대인들은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했다(5절).
1) 사람편에서 볼 때 진정한 핍박이라 여겨지는 고난도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아버지의 회초리요 책망이다. 불신자들은 신자들이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핍박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신자들의 믿음이 약하기 때문에 더욱 강건해지도록 연단을 하시는 것이다.
2)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고난속에서 어떠한 자세를 견지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셨다.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의 백성은 주님의 질책을 무시하거나 경멸해서는 안된다. 고난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히 여기며 따라서 자기의 죄도 가볍게 여기는 자이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은 질책을 받을 때 나약해져서는 안된다.
3) 비록 하나님의 진노의 열매로 임한 고난이라 할지라도 이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대한 부성적 사랑과 관심의 증거가 되는 것이다(6,7절). 아무리 훌륭한 하나님의 자녀에게도 바르게 고쳐야 할 잘못과 결점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인 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를 시정하실 것이다. 또한 그들의 죄를 시정하심에 있어서 하나님은 아버지로서 그들을 징계하시는 것이다. 현명하고 좋은 아버지라면 남의 자식의 잘못을 눈감아 주듯이 자기 자식의 잘못을 묵인해 주지는 않을 것이다. 징계를 받는 일 없이 죄가운데 빠져 허덕인다는 것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는 슬픈 표시인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사생자이지 하나님의 친자가 아닌 것이다(7,8절).
4) 육신의 아버지의 징계에 대하여 우리가 공경하는 자세로 감수해야 한다면 하늘 아버지의 징계에 대하여는 더욱 공경하는 자세로 받아들여야 함이 마땅한 것이다(9,10절). 자식들이 불순종하여 부모에게 징계를 받았을 때 그 징계에 복종하는 것이 자녀된 의무이다. 이와같이 하늘 아버지께서 그의 자녀인 우리에게 우리의 잘못을 시정하시고자 징계를 내리실 때 겸손하게 복종하는 것이 옳다고 사도는 가르치고 있다. 이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면을 살펴볼 수 있다.
① 이 땅의 아버지는 단지 우리의 육신의 아버지에 불과하지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우리의 영의 아버지이시다. 그러므로 단지 우리의 몸, 즉 육신만을 주는데 도구 역할을 한 이 땅의 아버지께 우리가 존경을 드려야 한다면 우리의 영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는 당연히 더 큰 존경과 사랑을 드려야 하는 것이다.
② 우리의 세상의 아버지는 '자기들의 마음 내키는데 따라서' 자녀를 징계한다. 또 자녀들의 태도를 고치려고 징계하기 보다는 종종 감정에 치우쳐 벌을 주는 수가 있다. 이것은 육신의 아버지의 연약함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견책은 마땅히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행해져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아들들로 가능한한 자신을 닮게 하려 하신다. 이런 목적하에 하나님은 그 자녀들에게 징계가 필요하다고 인정될 때만 그들을 징계하신다.
③ 육신의 아버지는 우리를 잠시동안, 즉 우리가 어렸을 때만 우리를 다스리고 가르치신다. 그러나 우리가 어른이 되면 그 때의 일을 생각하고 부모님들을 더욱 사랑하고 존경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 우리는 인생 전부가 어린아이 시절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가 온전한 상태에 이르렀을 때에 비로소 현재 우리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견책이 얼마나 필요한 것이었는가를 깨닫고 하나님께 온전한 감사를 드리게 될 것이다.
④ 하나님의 견책은 정죄나 저주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견책을 하시는 이유는 그 자녀들의 영혼이 죽거나 멸망당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나고, 그래서 하나님을 닮게 되며 결국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살게하기 위함인 것이다.
5)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견책 대하여 현재의 입장으로 그것을 판단해서는 안되며 이성과 믿음과 신앙 경험으로 그것이 무엇인가를 음미해야 한다(11절).
① 고난을 현재 느끼는 감각으로만 판단할 때 그 고난은 단지 괴로운 것에 지나지 않는다.
② 고난을 믿음으로 판단할 때는 그 고난으로 인하여 의롭게 되어짐을 생각하고 화평을 얻게 된다. 왜냐하면 의의 열매는 평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이 고난을 당할 때 갖는 가장 큰 관심은 어떻게 하면 그 고난을 잘 인내하여 보다 큰 거룩함에 이를 수 있겠는가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이 인내와 거룩함에 대하여 좀더 살펴 보자.
첫째, 그들이 당하는 고난은 인내로써 견뎌내야 한다(12절). 그리스도인들은 무거운 고난의 짐으로 어깨가 축 늘어지고 무릎이 후들후들 떨리며, 낙담되고 실망에 빠질 수가 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것들에 대항하여야 한다. 그렇게 할 때 그는 더 나은 영적인 경주를 하게 될 것이다. 믿음과 인내, 그리고 거룩한 용기와 결단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보다 꿋꿋하게 앞을 향하여 나가게 할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격려해야 하며 낙담시키지 말아야 한다.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낙담시키기가 쉽다. 하늘 나라를 향하여 힘있게 전진하도록 서로 돕는 것도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다.
둘째, 그들이 당하는 고난은 그들을 더 높은 차원의 거룩함으로 발전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14절). 믿음과 인내는 그들로 화평과 거룩함을 얻게해야 한다. 고난은 영혼을 자극하고 감정을 날카롭게 하기가 쉬우나 그리스도인은 고난 중에서도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화평을 유지해야 한다. 화평과 거룩함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평화는 거룩함이 없이는 결코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한다.
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과 고통이 하늘 아버지의 채찍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배교의 함정에 빠질 위험이 있다(15,16절).
① 배교에 대한 심각한 경고들
첫째, 배교의 성격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신앙을 고백하나 참된 은혜가 영혼을 지배하지 못함을 의미하며, 이 세상 뿐만 아니라 내세에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면 배교의 결과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참 은혜를 받지 못하므로 쓴 뿌리가 자라날 것이며 부패가 솟아 올라와 뒤덮을 것이다. 이것은 그 사람의 생활 원리를 부패시키며 다른 사람의 생활에도 쓴 열매를 맺도록 오염시킬 것이다. 즉 많은 자들이 더러움을 입게 되며, 이들의 악한 생활 원리에 감염되어 더러운 행실에 빠지게 될 것이다.
둘째, 사도는 에서를 예로 들어서 배교의 두려운 본을 삼고 있다. 에서의 죄는 무엇이었던가? 에서는 자기의 장자권을 경시하고 장자권과 그 권리에 따른 모든 축복을 팔아 버렸다. 이렇게 하여 그는 배교하는 죄에 빠지고 말았다. 또 거기에 따른 형벌은 무엇이었던가? 에서는 자기의 죄와 어리석음을 뒤늦게 깨달았으나 그때는 이미 너무 늦은 때였다. 그는 자기가 그렇게 경히 여겼던 그 축복이 찾아야 할 가치가 있는 것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그는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에서는 마음속의 커다란 악함 때문에 축복을 싼값에 팔아 버렸으며 모든 판단에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이 사실을 확인하시고 기정사실화 하셨던 것이다.
② 그리스도를 배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보다 육신의 영화를 더 좋아하는 데서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죄인들이 언제까지나 지금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축복과 유산을 멸시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끊기는 날에는 그들은 더 이상 죄를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피하기 위하여 거룩한 신앙을 버림으로써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소망을 포기하는 일이 절대로 없어야 할 것이다.
Ⅲ.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질 나라의 속성 (12:18-29절)
1. 사도는 복음에 입각한 기독교가 유대교와 어떻게 다르며 복음 교회가 얼마나 우수한가를 말하고 있다(18-21절).
1) 모세 시대의 교회는 전적으로 가시적인 것이었다. 시내산은 '만질만한 불붙는 산이었다'(18절). 구약의 교회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외형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시온산에 세워진 복음 교회는 보다 영적인 교회이다.
2) 모세 시대의 교회는 어두운 섭리하에 있었다. 그러나 복음 교회는 보다 분명하고 밝은 곳에 있었다.
3) 모세 시대의 교회는 무섭고 두려운 섭리하에 있었다. 유대인들은 그 두려움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19절). 그러므로 모세 자신도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복음 교회는 부드럽고 온화하여 연약한 우리 인간에게 적합하다.
4) 모세 시대의 교회는 제한된 섭리하에 있었다. 모든 사람이 다 그 산에 오를 수는 없었다. 그러나 복음 교회에서는 모든 신자들이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이와 같이 구약 교회는 엄격하고 공정한 하나님의 의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교회였다.
2. 사도는 복음 교회가 하늘 나라의 승리 교회를 얼마만큼 대표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복음 교회는 시온산, 하늘의 예루살렘으로 불리운다. 따라서 시온산인 복음 교회에 들어가는 신자들은 하늘 나라의 공동체 안에 들어가는 자들인 것이다.
1) 복음 교회에 들어온다는 것은 하늘나라에 들어감을 뜻한다. 첫째,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에' 들어감을 뜻한다. 하나님께서는 복음 교회를 당신의 자비의 거처로 삼으셨다. 그래서 복음교회는 하늘나라의 상징인 것이다. 둘째, '하늘의 예루살렘'에 들어감을 뜻한다. 그들은 그곳에서 자유로이 거하게 될 것이다.
2) 복음 교회에 들어오는 것은 하늘나라의 공동체에 들어감을 뜻한다.
① 그들은 '천만천사들'과 함께 거하게 될 것이다. 믿음으로 복음 교회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천사와 함께 거하게 되며 마침내는 그들과 같은 존재가 된다.
② 그들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에 속하게 될 것이다. 즉 비록 흩어져 있다 할지라도 그들은 보편 교회에 속해있는 것이다. 믿음으로써 우리는 이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에 들어가서 그들과 더불어 동일한 복된 소망 가운데서 사귐을 갖고 동일한 거룩한 길을 걷게 된다. 그러므로 이곳이 바로 장자들의 총회 곧 이전과 이후의 모든 신자들이 모이는 곳이 될 것이다. 이들의 이름은 하늘나라에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집에 이들의 이름이 있으며 마치 주민등록부에 주민들의 이름들이 기재되어 있듯이 이들의 이름이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③ 그들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함께 거하게 된다. 즉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동일한 법에 따라 재판하실 크신 하나님과 함께 거하게 될 것이다.
④ 그들은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함께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의인이라 함은 의에 의해서 으뜸가며 성품에 있어서도 가장 뛰어난 사람으로 그 영이 온전케 된 사람들을 말한다.
⑤ 그들은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도 더 큰 힘을 발휘하는 속죄의 피'와 함께 거하게 된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인내하도록 힘을 주는 큰 격려의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첫째, 복음의 계약은 새로운 계약이며 행위 계약과는 구별되는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는 이 새 계약의 중보자시다. 셋째, 이 계약은 우리의 양심속에 뿌려진 그리스도의 피로써 확증되었다. 이 그리스도의 피는 하나님의 진노를 풀고 인간의 양심을 정화시킨다. 넷째, 그리스도의 피는 말하는 피며 그것도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피다. 이 피는 죄인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말한다. 그러나 아벨의 피처럼 복수를 탄원하지 않고 자비를 구한다. 또 이 피는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죄사함을 전하여 주고 그들의 영혼에 평안을 가져다 준다.
3. 사도는 복음 교회의 속성에 맞는 태도로 인내할 것을 강력히 촉구하며 본장을 종결짓는다(25절). 그리스도는 전에는 땅에서 말씀하셨으나 이제는 하늘에서 말씀하신다. 다음을 살펴보자.
1) 하나님께서는 지금 인간들에게 가장 뛰어난 방법으로 말씀하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당신의 말씀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 경청하기를 바라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높은 영광의 보좌, 즉 하늘에서 말씀하신다. 또 어느 때보다도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으로 말씀하신다. 실로 전의 하나님의 목소리는 땅을 진동시켰으나 이제는 땅 뿐만 아니라 하늘까지도 진동시킨다. 유대 나라를 산산조각내고 새로운 교회를 세운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보낸 복음이다.
2)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이렇게 특별한 방법으로 말씀하실 때 그것을 듣지않는 사람들의 죄는 더욱 무거운 것이 된다(25절). 하나님께서 다시는 흔들려 파괴되지 않을 새 왕국을 복음의 나팔소리로 이 지상에 세우셨다. 이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단번의 변혁이었다. 사도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고 있다. 첫째,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는 일'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납하지 않으시면 우리의 믿음의 수고는 헛 것이 되고 만다. 둘째, 만일 우리가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예배를 드릴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받으실 예배를 드리는 데에는 믿음과 아울러 거룩함도 필요하다. 셋째,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로 하여금 정당한 방법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게 한다. 넷째, 하나님께서는 율법에서 나타나신 바와 똑같이 복음 아래에서도 공의롭고 정당하시다.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 이시다. 즉 엄격한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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