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udy
(1~40절)
예언과 방언의 은사 - 성령의 다양한 은사(12장)와 모든 은사 위에 뛰어난 사랑을 논한 바울은 이제 공중 예배시 방언의 남용으로 인한 고린도 교회의 무질서를 다루고 있다. 본장의 내용은 예언과 방언의 가치 비교와 그 용례(1~25절), 공중 예배시 지켜야 할 질서(26~40절)의 두 단락으로 구분된다. 본장은 특별히 교회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회중 전체를 위한 것으로서 그 목적은 교회의 건덕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며, 참으로 가치 있는 일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웃과 소속된 공동체 전체에 유익을 끼치는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1~25절)
영적 분별력 - 하나님의 특별 계시인 성경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던 초대교회 내에서는 직접 계시로서의 각양 신령한 은사들이 풍부하게 나타났다. 따라서 자칫하면 이 은사들이 남용되어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힐 위험이 잠재해 있었다. 특히 구약 시대를 통해 연연히 이어져 온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익숙지 못했던 이방 지역에서는 더더욱 영적 분별력이 요청되었다. 따라서 이방인의 사도였던 사도 바울이 이러한 문제를 표면에 강력히 부상시킨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1절]
사랑을 따라 구하라. 바울이 본장에서 밝히고자 하는 내용과 13장을 연결시켜 준다. 즉 예언과 방언의 은사가 성도들에게 주어진 신령한 표적으로 중요한 것이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사랑이며, 이 사랑이 동기가 되어야 함을 가리킨다. 여기서 우리는 예언과 방언의 본질에 대해 좀더 자세히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예언 : 하나님의 뜻이 주의 종들을 통해 인간에게 계시되는 것을 의미한다. 구약 시대의 예언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지만(창 37:5~11; 렘 9:11) 장차 오실 메시야, 즉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이 예언의 핵심을 이루고 있으며(사 53장), 신약시대에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종말에 대한 계시가 가장 큰 주류를 형성한다(마 24:30; 행 1:11; 계 1:1). 한편 상기한 것과는 달리 오순절 사건 이후 성령의 은사의 한 형태로 초대교회에 나타난 예언이 있다. 본서에서 바울이 언급하는 것은 바로 이 예언이다. 이 은사는 주로 하나님의 영적 진리를 깨달아 가르치는 것과 숨겨진 죄악들을 지적해서 회개케 하는 역사로 나타난다. 당시 초대교회는 성경 66권이 완성되기 전이었고 현대와 같이 일정한 형식이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예언의 은사는 교회의 설립과 확장 및 성도들을 권면하고 교회의 덕을 세우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2) 방언의 은사 : 성령 은사의 하나로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나누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방언 은사는 오순절 성령 강림시 일어난 것으로 당시 각국에서 사용되던 지방 언어를 말하는 것(행 2:5~13)과 성도가 영으로 기도하며 해독 불가능한 언어로 비밀을 말하는 것의 두 가지로 나타난다. 여기서 바울이 언급하는 방언은 후자의 것이며 이 방언 은사는 당시 믿지 않는 자들에게 표적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초대교회 당시 일부 성도들간에는 방언에 너무 치중하여 교회에 덕을 끼치지 못하고 예배에 혼란을 초래한 경우가 많았다.
3) 예언과 방언의 적용 문제 : 하나님의 은사는 시대적 상황이나 여건에 시효 적절하게 주어지는 것이다. 즉 초대교회의 상황에서 예언은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는 본질적인 역할을 담당했으나 성경이 완성된 오늘날 예언 은사는 초대교회와 같은 특수성을 갖지 못한다. 오늘날 예언 은사는 보편적인 것으로,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초자연적 권능의 상징으로 남용되는 일부 교회 및 성도들의 예언 은사는 잘못된 것으로 반드시 절제되어야 한다. 방언 은사도 마찬가지로 구원의 유일한 증거가 될 수 없으며, 예배를 방해하는 요소로 남용되어서도 안 된다. 방언 은사는 교회의 건덕을 위한 은사 중 초보적인 것으로, 성도들은 더 큰 은사를 사모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최고 계명인 사랑을 실천하도록 노력해야 하겠다<요일 서론, 성경에 나타난 사랑의 이해>.
[2절]
그 영으로.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방언을 말하는 사람의 영을 의미한다(14, 15절). 비밀(헬, 뮈스테리아).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법칙에 대한 깊은 진리를 뜻하나 여기서는 방언의 내용은 그대로 알아들을 수 없다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행 2:11).
[6절]
통역 없는 방언이 교회의 건덕에 전혀 무익함을 지적한 것이다. 즉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방언만을 말하고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전혀 해주지 않는다면, 방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무가치한 것이며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뜻이다. 여기서 우리는 방언에 대한 예언 은사의 우위와 성령 은사의 참 목적은 교회의 건덕이라는 점, 개인의 신비적 체험만을 강조하는 이방 종교와 달리 계시 의존적 종교로서의 기독교의 성격을 볼 수 있다.
(7~11절)

방언의 위험성 - 통역 없는 방언은 교회 전체에 아무런 덕도 끼치지 못하는 무익한 것임을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 강조하고 있다. 방언의 위험성은 방언하는 자들로 하여금 교만하게 하며, 타인에게 유익을 끼치지 못하며, 방언하지 못하는 자들을 판단하고 정죄함으로써 교회 안에 분쟁의 소지를 만들며, 예배시 혼란을 야기시키며, 무의미한 소리의 남발로 믿지 않는 자들의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14~15절]

영, 마음. 바울이 이처럼 영과 마음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은 양자 사이의 구분이 목적이 아니라, 방언 은사는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를 가능케 하나 인간이 지적(知的)으로 이해하지 못하며 실제 생활에서도 신앙의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16절]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 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한 자들을 의미한다. 고린도 교회에서는 이러한 자들을 멸시하고 업신여기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것은 성령의 은사가 하나님의 온전한 은혜임과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약하고 비천한 자들을 사랑하시고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잊은 행위이다.

[18~19절]

바울이 교회 안에서 방언의 사용을 절제하라고 한 것은 질투나 시기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방언 은사의 본질을 깊이 깨달은 자로서 한 말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방언을 많이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방언이 교회에 덕을 끼치지 못함을 알기 때문에 방언의 사용을 절제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주의 복음과 교회의 건덕을 위해 모든 것을 절제하는 바울의 겸손하고 헌신적인 태도와 무의미한 많은 말보다 진실하고 사랑이 담긴 한마디 말이 더욱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벧전 4:3, 그리스도인의 절제>.

[20절]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방언을 절제하라는 권면이다. 고린도 교인들은 방언의 은사를 대단히 강조하여 방언의 은사를 갖고 있는지의 여부만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들은 화려하고 눈에 보이는 것을 좋아하는 어린아이와 같이 외적으로 드러나는 방언을 통해 자신의 신앙과 인격을 자랑하려고 하였다. 바울은 개인의 자랑과 이기심을 추구하는 그러한 속성을 악으로 규정할 정도로 방언의 사용에 관한 단호한 교훈을 주고 있다.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장성한'에 해당하는 헬, '텔레이오이'는 '어떤 목표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계속해서 성숙해야 할 것을 시사하고 있으며, 본문에서는 고린도 교인이 마땅히 가져야 할 장성한 분량에 이르지 못하였음을 보여준다. 즉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은 교회의 유익과는 무관한 방언의 은사를 더욱 사모(思募)하고 있었던 것이다.

[21절]

사 28:11, 12절의 인용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선지자들의 예언을 외면한다면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보내 그들에게 방언으로 말하지라도 듣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즉 방언에 대한 예언의 우위성을 암시한 것이다.

[22~23절]

방언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이적으로서의 충격과 감동을 줄 수 있으나 근본적으로 회중들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듣고 그리스도를 영접하거나 새로운 삶을 결단하기에는 불충분하다는 뜻이다. 뿐만 아니라 공중 예배시 성도들이 방언을 지나치게 사용할 경우 불신자들이나 신앙의 초보자들이 역반응으로 교회에 대해 좋지 않은 인식을 갖게 되며 성도들을 비정상으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방언의 사용을 절제해야 한다.

[24~25절]

본문은 불신자들에 대한 예언의 적극적인 역할 및 필요성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본문에 나타난 예언의 기능은 책망, 판단, 마음속의 숨은 일을 드러냄, 하나님을 경배케 하는 것이다<14:1, 예언과 방언의 본질>.

(26~33절)

예언과 방언의 올바른 활용 - 본문에서 바울은 교회의 건덕을 위해 예언과 방언 은사의 질서 있는 활용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초대교회에는 일정한 교직(敎職) 제도가 없으며, 성령의 은사의 다양한 교류가 가능하며, 초대교회의 예배 순서 역시 일정하게 고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공(公) 예배시 질서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다.

[26절]

본절은 초대교회에서 행해지던 대체적인 예배 순서를 보여 준다. 당시 고린도 교회의 예배는 찬송시, 말씀의 가르침, 계시, 방언과 통역 예언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처럼 초대교회의 예배 의식은 현대처럼 일정한 형식은 없으나 하나님께 대한 찬양(시 149:1)과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실천하는 것을 특별히 강조한 것을 볼 수 있다. 한편 계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예언적 교훈을 의미한다<벧전 서론, 계시>.

[27~30절]

예언과 방언의 사용 규칙 - 예배시 방언과 예언 은사의 사용 규칙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은사의 사용은 교회의 건덕을 위해 하라. 방언시 반드시 통역하며 통역이 없을 경우는 잠잠하라. 방언은 순서를 따라 하고 세 사람 이상 하지 말라. 예언은 세 명 이상 하지 말고 그 내용은 타인에 의해 진위(眞僞)의 판단을 받아야 한다. 예언하는 자는 자제와 더불어 타인에 의해서도 절제를 받아야 한다(30절).

[32절]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예언자들의 예언은 예언하는 자 본인에 의해 자제되어야 한다는 설과 예언자들의 말은 다른 예언자들에 의해 제재와 판단을 받는다는 설이다. 본문에서는 후자의 견해가 타당성을 갖는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의 은사는 독선적이거나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덕을 세우는 것이며 포용적이고 질서를 존중하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다.

(34~35절)

여성의 교회 내에서의 활동을 제한하는 내용의 교훈이다. 이 교훈은 성경 전체의 맥락과 연결시켜 종합적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마치 바울 또는 성경 전체가 여성의 인권과 인격을 무시하고 여성에 대한 남성의 전제적 지배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오해할 소지가 많다. 본 문제에 대한 종합적 이해는 딤전 서론에 잘 나와 있다. 다만 여기서는 이 조치가 여성에 대한 천대가 일반적이던 당시 사회 문화적 배경하에서 갑자기 여성도 교회 예배에 동참하여 약간의 당황과 혼란, 나아가 일반 세속의 의혹까지도 살 수 있었던 바울 당시 시대에 교회 내외의 오해와 질서 유지를 위하여 취해진 상대적 조치이지 교회가 전시대에 걸쳐 지켜야 할 문자 그대로의 계명은 아니라는 사실만 기억해 두면 될 것이다. 또한 바울이 이 조치를 취한 것은 공적 예배시에 국한된 것으로 공중 예배의 질서 유지를 위해서였으며 그 외 시간에서의 여성의 활동까지를 무조건 제재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여성의 활동을 일부 제한한 것은 당시로서는 여자가 같이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 사실 자체가 너무 혁신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별 문제가 될 수 없었다. 동시에 비록 이 부분의 강경한 듯한 금지 조항은 당시에 국한된 일이기는 하지만 여성이 교회 내에서, 나아가 남성과 함께 생활하는 모든 분야에서 지켜야 할 질서의 순서 문제가 분명 영원히 존재하는 것임을 뜻한다. 이에 대해서는 본서 11:1~16; 딤전 2:1~15절을 각각 참조하라.

[34절]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이것은 여성에 대한 남성의 전제적 우위와 여성에 대한 인간적인 무시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예배의 경건을 위해 공 예배시 침묵할 것을 권면한 것이다<딤전 서론, 교회 내에서 여성의 지위와 역할>.

[35절]

자기 남편에게 물을찌니. 이것은 여자를 무시하는 처사가 아니라 교회의 질서와 남녀 관계에 대한 창조 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것이다(11:11, 12). 성경은 여자의 은사와 활동을 인정하며 바울 역시 긍정적이다(11:15; 행 2: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결되어야 할 문제는 여성다움의 유지와 교회 전체의 질서와 유익,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삶의 원리의 준수이다.

[36절]

풍성한 은사로 인해 그들에게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다고 착각하고 다른 교회와 성도들을 무시하던 고린도 교인들의 영적 교만을 지적한 것이다<렘 43:2, 겸손과 교만>.

[38절]

본절의 내용은 바울의 명령을 무시하는 자는 진리이신 그리스도에 대해 바로 알지 못하는 자란 뜻이다.

[39~40절]

바울은 방언보다 예언을 중시하였지만 모든 은사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점에서 방언을 결코 무시하지 않았다. 그는 예언은 적극적으로 권장하였지만 방언은 단순히 은사의 한 종류로 인정하는 정도에 그친다.

 

# 해설

방언과 예언에 관하여 (1~33절)

성령으로 말미암은 성도들의 다양한 은사(12장)와 사랑(13장)을 논한 바울은 방언과 예언의 상대적인 가치와 그 용례를 다루고 있다. 바울이 본문을 기재하게 된 배경은 당시 일부 고린도 교인들이 공중 예배시 방언을 남용함으로써 교회의 무질서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이에 바울은 모든 영적 은사가 사랑 안에서 행해져야 한다고 전제한 후(1절) 방언과 예언도 교회의 건덕을 위해 사용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이에 근거해 볼 때 방언이나 예언 등과 같은 개인의 신비적인 체험만을 강조하여 도리어 기독교 공동체 내의 분란을 야기시키는 행위는 적극 제지되어야 마땅하다.

교회 내에서의 여자의 위치 (34~36절)

일견(一見)하면 본문은 남성의 여성에 대한 지배권을 정당화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본문의 조치는 공적 예배의 질서 유지를 위해 취해졌으며 당시 사회 문화적 배경의 맥락 하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다만 여성이 가정이나 교회에서 남성과 협력하는 과정에서 지켜야 할 원칙적 질서는 영원히 존재한다.

바울의 경고 (37~38절)

바울은 자신의 명령이 단순한 사견(私見)이 아니라 주의 명령과 동일할 정도의 신령한 통찰로 말미암았음을 밝힘으로써 그것을 무시하는 자는 바울 자신과 교회, 나아가 주님으로부터 무시받을 것이며, 결국 신앙이 결여된 자로 간주될 것임을 단언한다(1:18).

방언과 예언 (39~40절)

본장 본래의 논의인 방언과 예언 문제의 결론 부분이라 하겠다. 성령의 다양한 은사는 교회의 건덕과 그리스도인이 드리는 예배의 질서를 따라 적절하게 행사되어야 마땅하다.

 

# 핵심

1~25절

방언과 예언의 은사도 근본적으로 교회 전체의 덕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교훈.

교회에서의 여자의 처신 (34~35절)

11:5절에서는 '머리에 수건을 쓰고서 기도나 예언하라'고 했고, 본문은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말한다. 이처럼 모순되는 듯이 보이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전자는 공중 예배에 참여하는 여자의 복장에 관한 것으로 당시의 문화적 배경에 따른 교훈이다. 후자는 여자가 공적 집회에서 남자들을 주관하는 태도로 말하는 것은 남성 헤드십(male headship) 원리에 어긋남을 교훈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교회의 질서를 세우기 위해 마땅한 처신을 명한 것이지 결코 여자의 인격을 무시한 것이 아니다.

 

# 묵상

은사의 효용성 (1~5절)

'사랑을 따라 구하라'는 말씀은 성령의 은사를 구하려는 성도들의 내적인 의도의 순수성을 촉구하는 권면입니다. 은사의 효용성은 과연 그 은사가 사랑을 따라 사용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은사가 사랑과 유리되면, 이미 그 은사는 주신 바 목적에서 이탈되고 맙니다. 또한 은사는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교회 전체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사를 사모하거나 활용하는 사람들은 교회 전체의 유익을 위하여, 사랑이 충만한 기초 위에서 열매맺어야 합니다. 방언의 은사는 개인적인 유익에 그치는 반면, 예언의 은사는 교회 전체에 유익을 가져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배워야 하는 것은 '교회를 위한 유익'입니다. 즉 개인적인 덕을 세우는 것보다 교회 전체의 유익과 덕을 세우는 일이 우선되고 더 가치 있게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은사 사용의 원칙 (26~33절)

모든 은사는 덕을 세우기 위해 사용되어야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 발견한 가장 큰 문제점은, 교회의 공적인 유익보다 개인이나 분파를 더 지향하는 교인들의 성향이었습니다. 그들은 은사의 사용에서도 동일한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고린도 교회의 무질서를 책망하면서, 그 대안으로 교회의 덕을 추구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예언을 하는 목적도 모든 사람이 배우고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초대 교회의 예언은 현대 교회에서의 설교와 가르침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은사는 은사가 지니는 자체적인 의미보다 그 은사가 사용되는 용도에 더 많은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개인적인 은사보다도 교회의 모든 사람들이 배우며 권면을 받도록 하는 사역이 강조되고 실천되어야 합니다. 만일 교회의 질서를 문란하게 하면서까지 사용되는 은사는 결코 성경적인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은사를 사용할 경우에는 교회의 질서와 화평을 위해 절제할 때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의 질서와 화평 (40절)

교회의 질서와 화평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는 절제가 필요합니다. 이 구절이 가르치는 것은 타협할 수 없는 신앙의 절대성이 어떻게 교회에서 화평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 하는 문제입니다. 적당하게 하라는 가르침은 신앙의 원칙에 관한 것이 아니라, 신앙의 실질적 적용에 관한 것입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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