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나타냅시다

[고린도전서 13장 1절~13절]
1절 -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절 -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절 -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4절 -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절 -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절 -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절 -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8절 -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절 -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절 -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절 -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절 -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절 -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13:13절을 보면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하시면서 기독교의 제일 중요한 진리 3가지를 말씀하고 그 중에서도 제일은 사랑이라고 하셨는데 그 이유는 사랑은 믿음과 소망의 뿌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시기까지 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었다면 예수님께 대한 믿음도 있을 수 없고 천국에 대한 소망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과 소망은 다 자신을 위한 것이지만 사랑은 이웃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믿음과 소망은 인간에게 속한 것이지만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에 사랑이 제일인 것입니다. 사랑은 가장 하나님을 닮은 영혼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은 사랑의 생활에 항상 힘써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최고의 덕이기 때문입니다.
갈 5:14절에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라고 하신 말씀과 같이 모든 덕 중에 최고의 덕은 사랑입니다. 성경에 600가지가 넘는 계명을 10가지로 추린 것이 10계명이요, 이 10가지를 2가지로 줄이면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신을 섬기거나 우상 숭배하거나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남을 살인하거나 도적질하거나 간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이야말로 최고의 은사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 성령의 여러 가지 은사를 말씀했는데,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의 은사, 신유의 은사, 능력의 은사 등을 말씀하시다가 제일 마지막에 가서 사도 바울은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씀하시면서 고린도전서 13장에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은사가 다 있어도 사랑이 빠지면 온전한 은사가 될 수 없고 별로 유익한 것이 못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곧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요일 4:7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은 이렇게도 중요한 사랑을 우리 생활에 어떻게 나타내야 할지 적극적인 측면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주는 것으로 나타냅니다.
요 3: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셔서 가장 귀한 독생자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사랑은 무엇보다 주는 데서 나타납니다. 그래서 본문에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치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사랑의 실천에 대하여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셨는데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사마리아 사람이 찾아가서 '기름을 부어 주고, 포도주를 부어 주고, 상처를 싸매어 주고, 짐승에 태워 주고, 주막에 데려다 주고, 데나리온 둘을 주인에게 내어 주고 잘 돌봐달라고 부탁해 주었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랑을 실천하는데 그 첫째가 주는데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참 믿음이 있는 자는 하나님께 대하여 시간과 물질을 드리고 노력과 정성을 드리는 자입니다. 하나님께 정성을 드릴 줄 모르는 사람은 참 믿음이 있다고 볼 수 없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이웃에 대하여는 굶주리고 헐벗는 사람이 보이면 도와주어야 합니다. 슬픔을 당한 자에게 위로해 주어서 어려움 당하는 자를 위해 기도해 주고 지옥으로 떨어질 영혼에게 복음을 주고 예수 그리스도를 심어 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꿈에서 천국과 지옥을 갔다왔는데 지옥에 가보니까 큰 상에 산해진미가 가득하게 놓여 있더랍니다. 그런데 거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뻗정손이라 하나도 못 먹어서 모든이가 삐쩍 말랐더라는 것입니다. 또 천국에 갔는데 거기도 큰 상에 산해진미가 놓여 있고 손도 전부 뻗정손이더랍니다. 그런데 지옥에 있는 사람들과는 달리 얼굴들에 피둥피둥 살이 올라 있더랍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거기 있는 사람들은 서로 먹여 주더라는 것입니다. 내세의 천국과 지옥에 가기 전에 이 세상에서도 사랑이 있는 곳에 천국이 이루어지고 미움이 있는 곳에 지옥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옛부터 내려오는 얘기가 있습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가 좋지 않아서 매일같이 시어머니는 아들한테, 며느리는 남편보고 면박을 주곤 하는데 이 아들은 정말 중간에서 매우 난처한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하루는 아들이 궁리한 끝에 어머니와 부인에게 서로 유익이 되는 좋은 꾀를 내었습니다. 그리고나서 짐짓 부인을 불러서 얘기하기를 '어디 가서 얘기를 들으니까 밤을 깍아서 꿀을 발라 먹으면 점점 살이 붓고 위가 두꺼워져서 나중에는 죽는대 그러니까 내일부터 당장 시작해 봐'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 며느리는 다음날부터 밤을 한 말 사고 꿀을 사와서 시어머니께 아침 저녁으로 해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시어머니는 의아스럽게 생각하면서도 며느리가 해가지고 오는 것을 잘 잡수셨습니다. 그러던 중 뭉쳐있던 미워하는 마음도 풀리기 시작하더니 그전에는 돌봐주지 않던 손주도 업어 주고 방 청소도 하고 물도 길어 주곤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온 동네에 다니면서 며느리 칭찬을 하였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이 소리를 듣고 며느리한테 묻기를 '당신은 시어머니한테 어떻게 해드리길래 시어머니가 그렇게 당신을 자랑하고 다닙니까?'라고 하자 이 며느리는 양심의 가책이 생겨 남편을 불러서 사정 얘기를 했답니다. '여보, 시어머니가 좋으신 분인 줄 모르고 제가 못된 행위를 했는데 어디 죽지 않는 약이 없느냐'고 사정을 하니까 남편은 일부러 화를 내면서 '아니 시어머니가 싫으니 죽었으면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무슨 딴소리야! 어서 계속 해'라고 하니까 아내는 더 간청하면서 어서 죽지 않는 약을 구해 달라고 하니까 그제서야 남편이 말해 주었습니다. '여보, 밤에다 꿀을 먹는데 죽긴 왜 죽어, 당신이 하두 그러길래 일부러 내가 꾀를 낸거야'하면서 아내를 위로했다는 것입니다.

2. 용서하는 것으로 나타냅니다.
하나님이 우리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원하시려고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기까지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용서하도록 항상 노력해야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못박는 무리들을 향하여 그 쓰라린 고통 중에서도 '아버지여 저희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용서의 기도를 했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성령이 충만하여 무릎을 끊고 기도하기를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부산에서 자기의 아버지를 찔러 죽이고 감옥에 들어간 죄인의 가족들이 굶주리고 가난하게 사는 것을 보고 죽은 사람의 아들인 예수 믿는 사람이 쌀 몇 가마를 사다 주었다는 기사가 신문에 난 일이 있었습니다. 그 기사를 보고 많은 이들이 그 아들에게 왜 쌀을 사다 주었냐고 물었을 때 그 아들은 말하기를 '내가 그들에게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그의 자식들이 또 원수를 갚고 우리 자식들이 또 원수를 갚는다면 이 원수 갚는 일이 언제 끝나겠습니까?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참으로 원수를 갚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들려 온 여인이 있었습니다. 구약의 율법에는 간음을 하면 돌로 쳐죽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올무에 넣으려고 사람들이 일부러 예수님 앞에 붙들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돌로 쳐죽일까요? 말까요? 하고 물었습니다. 죽이라고 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서 어떻게 죽이라고 하느냐 할 것이고 또 죽이지 말라 하면 율법에 돌로 쳐죽이라고 했는데 당신은 하나님의 계명을 어깁니까? 하며 트집을 잡을게 뻔했습니다. 어느 쪽으로 말해도 올무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땅바닥에 엎드려 글씨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너희 중에 누구든지 정말 죄가 없거든 이 여자를 돌로 쳐라'하니까 모인 무리들이 한명, 한명 돌을 놓고 도망가더랍니다. 사람들이 다 돌아간 후에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너도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갈 5:15절에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3. 약한 것을 감싸주고 위로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약점이나 아픔을 감싸주고 위로하여 용기를 북돋아 주는 일에 참으로 인색한 것 같습니다. 벧전 4:8절에 "무엇보다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심지어 없는 죄와 허물을 만들어서 떠들어 대고 다니며 사람을 매장시키는 일을 하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러분, 사랑은 도리어 남의 허물과 죄를 덮어주고 감싸주며 위로해 줄 때 나타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도 우리가 죄를 회개할 때 우리의 죄를 기억도 아니하시고 잊어버려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미 7:6절에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라고 했습니다. 다시 떠오르지 못하도록 깊은 바다에 던지신다고 했는데 들추어내서야 되겠습니까?
사람은 뜨물통과 같다고 합니다. 뜨물통은 가만히 놔두면 아주 맑은데 막대기를 가지고 휘저으면 콩나물 대가리, 김치 찌꺼기 등 별의별 지저분한 것이 다 떠오릅니다. 사람의 혀를 가지고 남의 뜨물통을 실컷 휘저어 남의 약점을 들추고 상처를 헤집으면 상대방도 역시 내 뜨물통을 휘젓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서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약점을 들추어내서 상처를 주기보다 감싸주고 위로해 줌으로 사랑을 나타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은 첫째, 주는 것입니다. 둘째, 용서하는 것입니다. 셋째, 남의 약한 것을 감싸 주고 위로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은 이것을 잘 실천하여, 승리하는 삶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신자의 일하는 동기

[고린도전서 3장 12절~17절]
12절 -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절 -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14절 -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절 -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16절 -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17절 -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공산주의자들이 좋은 목적을 위해서는 어떤 수단과 방법을 써도 좋다고 해서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크게 잘못된 사상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의미에서 결과보다 그 일의 동기를 더 중요시하십니다. 무슨 일이나 그 일의 동기가 순수하고 좋아야 합니다. 동기가 나쁘면 그 결과가 아무리 좋아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습니다. 좋은 결과가 있으면 더 좋겠지만 먼저는 동기가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고 좋아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그러면 오늘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봉사하는 일을 함에 있어서 바른 동기로 일하는 성도가 되기 위하여 성도가 일함에 있어서 버려야 할 잘못된 동기의 일과 취해야 할 올바른 동기의 일을 살펴봄으로써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1. 잘못된 동기의 일
첫째, 구원받기 위해 일하는 것은 잘못된 동기입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원받기 위해 일하고 봉사합니다. 전에 목사 고시위원이 돼서 막 목사 안수받을 사람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전도사님 구원 받았습니까?' 했더니 '예, 구원받도록 힘쓰고 노력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었습니다. 자기 자신도 구원받은 확신이 없으면서 누구를 구원하겠다는 말입니까? 구원과 영생은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거저받는 선물이지 행위의 결과가 아닌 것입니다.
엡 2:8, 9절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 하시는 것은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롬 3:20, 24, 롬 4:4, 5). 인간의 행위란 죽은 것입니다.
육신에 속한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합니다(롬 8:6-8). 거듭나기 전에는 모든 사람이 육에 속한 자이며 육신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서 일해서도 안되고 또 일할 수도 없습니다. 도리어 일하기 위해서 구원받는 것입니다. 구원받았으니 일하고 봉사하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가 좋아하기 때문에 일하는 것은 잘못된 동기입니다.
주의 일하는 것을 비둘기나 강아지 기르듯이 오락이나 취미삼아 하는 이도 있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면 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만 두는 것은 다 잘못된 동기입니다.
전에 시골 교회에서 목회할 때의 일입니다. 어렸을 때 조실 부모하고 고모 손에서 제멋대로 자란 사람이 속장이 되고 권사까지 되었는데, 이 사람은 제 기분나면 열심히 일하고 제 기분 나쁘고 제가 좋아하는 일이 아니면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한번은 추운 겨울날 급히 교회 일할 것이 있어서 찾아갔더니 벌렁 누워서 대답도 하지 않고 내다보지도 않는 것이었습니다. 어찌나 괘씸하던지 도무지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그 사람은 종래 신앙 생활을 못하고 마는 것을 보았습니다.
주님의 일은 좋아하고 말고 하는 데 따라서 선택하는 것이 되어서도 안 되고, 기분에 따라 하는 것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주님을 사랑해서 주님의 명령대로 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다른 사람이 하니까 나도 따라서 일하는 것은 잘못된 동기입니다.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따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함께 행동하고 하나님을 따라가는 사람이었으나 롯은 아브라함을 따라가고 아브라함과 함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오직 주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넷째, 남의 칭찬 때문에 일하는 것은 잘못된 동기입니다.
예를 들면 '야! 그 사람 참 열심이다', '야! 그 사람 참 말 잘한다', '그 사람 헌신적이다' 등의 사람들의 칭찬을 듣기 위해서 일하는 것은 모두 잘못된 동기입니다.
옛 이야기에 개구리가 칭찬해 주는 배에 배를 자꾸 불리다가 결국 배가 터져 죽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존 번연(John Bunyan)이 한번은 설교를 하고 났더니 '오늘 당신 참 설교 잘 했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겸손히 모자를 벗어 인사하면서 '당신이 말하기 전에 마귀가 먼저 말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남의 칭찬을 들을 때 경계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하물며 남의 칭찬을 들은 것 때문에 일한다면 순수한 동기의 봉사가 아닙니다.

다섯째, 무엇을 얻을까 하는 이기심에서 일하는 것은 잘못된 동기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따르는 목적이 물질의 이익이나 예수님이 왕이 되면 한자리 해먹을까 하는 이기적인 욕심과 탐욕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결국 참 신앙을 가지지 못하고 예수님을 팔아먹고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자기 이익을 위해서 일하는 것은 모두 잘못된 동기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여러 가지 직분을 맡아 일하고 봉사하는데 잘못된 동기에서 하지는 않는가 반성해야겠습니다. 구원받기 위해서 한다든지 우리가 좋아하는 것만 골라서 한다든지 다른 사람이 하니까 따라 한다든지 남의 칭찬 때문에 하거나 이기심 때문에 해서는 결코 안되겠습니다.

2. 올바른 동기의 일
첫째, 자기 부인이 있어야 합니다.
눅 9:23, 24절에 "...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요 12:24-26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주님을 섬기려면 자기를 철저히 부인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듯 하면서 자기를 도리어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어느 분이 '전에는 내가 살았으나 지금은 내가 죽었노라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아 계신다'고 한 것은 참으로 훌륭한 자기 부인의 신앙을 고백한 것입니다.
참으로 끈질기고 무시무시한 것이 자아입니다. 얼마나 많은 방법으로 자기를 나타내려 하는지! 겸손한 듯 하면서 교만한 자아가 살아나고, 알지도 못하고 경험도 못 한 것을 아는 체하고 경험한 것처럼 말하는 위선의 자아, 위대해지려고 하고 무슨 일이나 우두머리가 되지 않으면 일하지 않는 야망의 자아, 사울 왕이 다른 사람들보다 머리가 어깨 위만큼 더 큰 자였던 것 같이 잘난체 하는 자아, 하나님의 영광은 눈에 보이지 않는 열심있는 자아,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더 거룩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종교적인 자아도 있습니다.
자아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그 생명이 끈질기고 천천히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슨 훌륭한 일을 해냈다면 나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역사하신 것이지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소년이 구슬치기를 잘 합니다. 이 소년은 구슬치기를 하기만 하면 다 땄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친구는 하나 하나씩 다 떨어져 나갑니다. 어느날 이 소년은 목사님과 대화하면서 목사님께 말씀드리기를 '나는 구슬치기를 잘 하는데 왜 친구가 자꾸 떨어져 가는지 모르겠습니다'하니까 목사님께서 소년에게 묻기를 '너 하나님께 기도할 때 어떻게 기도하니?' 그러자 이 소년은 '하나님, 구슬치기를 잘 해서 구슬을 따 먹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목사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얘야, 그것은 잘못된 기도란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 생명을 버리시기까지 했는데 너는 남의 것을 자꾸 따 먹기만 하니까 친구가 떠나가지 않니. 지금부터는 네가 희생하고 구슬을 주고 포기하는 사람이 될 때 친구들도 너에게 다가오고 네가 믿는 하나님을 그들에게 보여줄 수 있단다'하고 타일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하나님은 네 하나님이시다. 네 하나님을 그들에게 보여줘야 한다'고 타일렀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자기의 생명까지 버리신 하나님을 보여줘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생명을 버리신 것입니다.
우리들이 희생하고 헌신하므로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 사랑의 하나님을 더 좋게 생각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살려면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둘째, 헌신적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을 바치고 헌신해야 훌륭한 일꾼이 되고 훌륭한 제자가 됩니다.
사도 바울은 무슨 일을 하든지 그리스도를 위해서 했습니다.
복음성가 중에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주님 나는 오늘부터 모든 것을 버리고
일편단심 주님만을 사랑하겠습니다.
주님 위해 나는 살고 주님 위해 일하고
주님 위해 고생하며 주님 위해 죽겠네'
'나를 위해 죽어주신 주님 생각할 때에
생명이나 물질이나 아깝지 않습니다.
주님 위해 나는 살고 주님 위해 일하고
주님 위해 고생하며 주님 위해 죽겠네'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을 바치고 헌신하는 자들을 통하여 많은 생명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들이 크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셋째, 고난 중에 즐거워해야 합니다.
행 9:16절에서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고 한 것은 아나니아가 바울의 장래를 예언한 말씀입니다.
또한 고후 4:11절에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억울한 말을 듣고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즐거워해야 합니다.
골 1:24절에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말씀했습니다.
교회를 위하여, 남을 위하여 고난 받는 것을 기뻐해야 하겠습니다.
고후 12:10절에서 사도 바울은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의 영광에만 관심을 두고 교회와 남의 유익을 위하는 동기로 일한다면 우리는 고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위하여 일하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올바른 동기로 열심히 충성하여 주님의 참된 축복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사랑이 있어야 모든 것이 의미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절~13절]
1절 -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절 -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절 -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4절 -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절 -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절 -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절 -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8절 -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절 -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절 -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절 -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절 -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절 -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방언을 하고 예언의 능력과 믿음이 있고, 가진 모든 것으로 구제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진리를 기뻐합니다.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며 견딥니다. 항상 있을 믿음, 소망, 사랑 중 제일은 사랑입니다.

● 사랑이 있어야 모든 것이 의미 있습니다.
어떤 지식이나 능력보다도 '사랑'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듭니다. 아무리 해박한 성경 지식과 유창한 언변과 놀라운 믿음이 있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그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전 재산을 기부하고 모든 것을 희생한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무의미합니다. 사랑은 시기와 교만을 극복하고, 인내와 온유로 모든 사람에게 참된 선을 베풀도록 인도합니다. 죄인인 우리를 주님이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알고 주님의 사랑을 품은 사람은 사명을 위해 모든 수고와 고통을 기꺼이 감내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신 그리스도만이 모두가 더불어 행복하게 살아가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길입니다.

* 묵상 질문
사랑이 없으면 왜 내가 아무것도 아니고, 사랑 없이 한 일은 왜 내게 아무 유익이 되지 않을까요?
* 적용 질문
오늘 삶의 현장에서 특히 어떤 사랑을 실천해야 할까요?


출처 : 생명의 삶 (큐티)

사랑은 최고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절~13절]
1절 -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절 -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절 -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4절 -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절 -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절 -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절 -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8절 -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절 -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절 -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절 -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절 -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절 -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우리의 생애를 가장 빛나고 아름답게 하는 것은 바로 사랑일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은 '사랑은 최고입니다'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기로 하겠습니다.
본문의 마지막 절에 보면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고로 우리 성도들은 이 사랑을 가장 귀히 여기고 사랑을 이루고 실천하는 일을 최고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곧 사랑으로서,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요일 4:7).
이에 오늘 우리는 우리가 최고의 것으로 여겨야 할 사랑이 과연 어떤 면에서 최고인지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사랑을 가장 귀히 여기고 열심히 실천하는 일에 힘쓰고자 합니다.  

1. 사랑은 최고의 능력입니다.
참된 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진정한 사랑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빅톨 위고의 유명한 소설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장발장의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많은 죄를 범해 감옥에도 여러 번 갔다 왔으나 마음은 변화되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어느날 다시는 도둑질을 하지 않으리라 굳게 결심하고 어느 교회의 성직자의 집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그 집의 은촛대를 보고는 그의 결심이 깨졌습니다. 그는 그 은촛대를 훔쳐 가지고 나왔습니다. 몰래 도망하려다 경찰한테 붙잡혀 그 성직자 앞에 끌려 왔을 때 성직자는 말하기를 '저쪽 것도 주었는데 어찌 하나만 가져 갔는고' 라고 하여 장발장은 마음에 큰 감동을 받고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의 마음을 진정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 사랑을 베푸는 길 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계속된 선지자의 외침과 징계에도 불구하고 죄를 회개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완악한 인간들을 위해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어 피흘려 죽게 하신 사랑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기만 하면 용서해 주시고 영생을 주신다고 하는 그 사랑을 보여 주셨을 때 마침내 인간들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위해서 목숨까지라도 버리겠다고 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랑은 제일 큰 능력입니다.
아이들도 완력만 가지고 기르려면 잘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무슨 실수나 허물이 있을지라도 사랑으로 감싸주고 용서해 줄 때에 마음이 감동될 줄로 믿습니다. 부부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주 싸우게 되는 것은 서로 사랑으로 대해 주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서로가 완력, 폭력을 버리고 사랑으로 대해 주기를 축원합니다.
사랑밖에는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가 없고 가정도 변화시킬 수 없기에, 우리는 교회에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랑의 운동을 일으켜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임을 믿으시고 성령을 내 마음속에 모셔야 되는 것임을 명심합시다. 

2. 사랑은 최고의 덕입니다.
갈 5:14절에 보면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말씀에 이루었나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수많은 계명이 있지만 그것을 줄이면 10계명이 되고 이것을 다시 둘로 나누면 위로 하나님 사랑하고 아래로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하신 말씀이 됩니다. 이것을 다시 하나로 줄이면 바로 사랑입니다. 고로 사랑은 성도들이 갖추고 이루어야 할 최고의 덕목인 것입니다.
사랑이 있는 사람은 살인을 할 수 없고 이웃을 해칠 수도 없고 거짓말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정 사랑한다면 그 사람은 시간과 물질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드러몬 헨리(D. Henry) 라고 하는 사람은 "세계 최대의 것은 사랑이다"라고 말했고 골 3:14절엔 "사랑은 온전케 매는 띠니라"고 했습니다.
또한 오늘 본문인 고린도전서 13장은 말씀하기를 "천사의 말을 해도 사랑이 없으면 유익이 없고 모든 비밀을 아는 지식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요, 비록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또 불쌍한 사람을 구제하고 순교를 해도 그 속에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최고의 덕은 사랑인 것입니다.
여러분! 최고의 덕인 사랑을 지닌 여러분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3. 사랑은 최고의 은사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은사에 대해 나옵니다. 성령은 같지만 그 은사는 서로 다른데 지혜의 은사, 지식, 믿음, 병고침, 능력, 예언, 방언, 통역, 영분별 등 여러 가지 은사가 나타납니다. 그 은사에 대해 결론적으로 말씀하시길(31절)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제일 좋은 길을 보이겠다고 말씀하시며 12장을 끝맺고 13장에 와서 사랑에 대한 말씀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제일 큰 은사요 가장 좋은 길임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즉 은사란 '거저 주어진 선물'이라는 뜻으로서, 이는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누릴 수 있는 복된 것들을 말합니다. 고로 은사란 성도들이 성령 충만한 가운데서 간절히 사모하고 누려야 하는 축복들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러한 것들 중의 최고가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나이가 굉장히 많이 들었을 때 설교를 하라고 하면 10번이고 20번이고 '성도들이여 우리 서로 사랑합시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누군가 '왜 선생님은 그렇게 똑같은 소리만 하십니까?' 하고 물을 때에 '사랑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하면서 설교할 때마다 사도 요한은 사랑을 이야기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가장 귀하고 복된 것이기 때문이지요. 실로 여러분들 모두 이러한 가장 귀한 축복인 사랑의 은사를 소유하시길 축원합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린다면 내가 수양하고 노력한다고 해서 이러한 사랑을 소유하고 행할 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을 받아야만 사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은 곧 사랑 충만인 것입니다.
로마서 5:5절에 의하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우리의 마음이 결심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와야 되는 줄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마치 달빛은 햇빛을 받아 반사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와야만 우리 또한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같이 여러분들 하나 하나의 가지가 예수님께 붙어서 사랑의 진액이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옮겨와 진정한 사랑의 열매를 맺으시길 축원합니다.
- 아 멘 -

사랑이 넘치는 가정

[고린도전서 13장 4절~7절]
4절 -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절 -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절 -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절 -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첩경인 가정 안에서의 사랑의 문제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리고 크리스챤의 가정은 세상의 어떤 가정들보다도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고로 우리 성도들은 가정에서 먼저 사랑을 실천해야 되겠습니다. 제 가족, 제 식구만 아는 사람도 이기주의자요, 좋은 사람이 될 수 없지만, 또한 자기 가정에서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면 다른 사랑은 위선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면 가정에서 사랑을 실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1. 서로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야 합니다.
서로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하며 사는 가정, 서로 상대편 중심으로 생각하며 사는 가정은 분명히 사랑이 넘치는 행복한 가정이 될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의 입장을 생각하면서 '좋은 옷도 잘못 사주고 외식 한 번 제대로 못해 주는데 종일 아이들 데리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참 고생 많지...' 하고, 아내는 남편 입장을 생각하면서 '종일 윗사람 눈치 보면서 뼈빠지게 일해서 가족들 벌어 먹이느라고 얼마나 수고하실까...' 하며 서로서로 상대편의 입장에서 생각하면서 살아가면 복된 가정이 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내가 시어머니라면 나 같은 며느리 두었을 때 섭섭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내가 저렇게 나이 젊은 며느리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고 바꾸어 놓고 생각한다면 고부간에도 의가 나쁠 수 없을 것입니다. 자기 입장만 생각해서 '내가 어떻게 정성들여 키운 자식인데... 내 아들 사랑을 몽땅 빼앗아 가는구나' 하고 생각만 하니까 마음 편할 날이 없는 것입니다.
부모는 세대가 달라진 오늘날의 자녀들의 입장을 생각해 주고 자식들은 옛날 고생하며 지내오신 부모님의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야 될 줄 압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내가 저 사람의 입장이라면 어떨까?' 하며 항상 바꾸어 놓고 생각하는 가정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목사의 입장을, 목사는 교인들의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하면 교회도 역시 평안할 것입니다.

2. 먼저 주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꿈에 천국엘 갔는데, 모두들 만반진수를 차려 놓은 상에 앉아서 뻗정 손으로 1m나 되는 젓가락을 들고 서로 먹여 주면서 희색이 만연하여 행복하게 지내더랍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베드로에게 지옥을 좀 보여 달라고 했더니 보여 주는데 똑같은 탁자에 똑같은 음식을 놓고 1m나 되는 똑같은 젓가락을 가지고 있는데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바싹 마른 얼굴에 살기가 등등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배가 고파서 굶어 죽어가고 있더랍니다. 이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먹여줄 생각은 하지 않고 자기만 퍼 먹으려고 애를 쓰는데 몸은 움직일 수가 없고 1m나 되는 긴 젓가락이니 입에 갖다 넣을 수는 없고 하니까 전부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더랍니다. 이 이야기는 행복을 누리는 비결을 잘 설명해 주는 상징적인 이야기라고 봅니다.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먼저 남을 대접하라'는 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황금률 아닙니까? 내가 사랑을 받고 싶으면 남을 내가 먼저 사랑해 주고, 내가 칭찬받고 싶으면 내가 먼저 칭찬해 주는 생활을 해야 사랑이 실현됩니다.
제가 결혼 주례할 때마다 늘 하는 말 가운데 하나는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유치원 아이들은 늘 달라고만 하고 받으려고만 하는데 성숙한 사람은 주려고 합니다. 용서해 주고, 기쁘게 해 주고, 편안하게 해 주고, 이해해 주고, 이렇게 주려고 할 때 그런 가정은 행복합니다. 이기주의적인 남편, 이기주의적인 부인은 자기만 위해 달라고 하고 자기만 사랑해 달라고 합니다. 그런 부부는 얼마 못갑니다. 가령 부부가 사랑이라고 하는 사과를 나누어 먹을 때, 남편은 아내가 맛있게 먹을 때까지 기다려야 되고 맛있게 먹도록 도와 주어야지, 아내는 한 입도 안 먹고 맛도 못 보았는데 혼자 다 먹어버리면 안됩니다. 이기주의자입니다. 아내는 아내대로 제 고집만 부리지 말고 남편을 최대한 편안하게 해 드리고 기쁘게 해 드려야 좋은 아내입니다.
내 기분 맞춰 주기를 기다리지 말고, 상대편의 기분을 이해해 주고 맞추어 주도록 노력할 때 분명히 행복한 가정이 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으려고 하지 말고 사랑을 주는 생활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걸치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3. 겸손히 섬겨야 합니다.
가정에서 사랑을 실천하려면 교만함이나 자존심을 버리고 겸손히 섬기는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언젠가 군목 수양회 때 가정이 파산되어 이혼 직전에 있던 한 부부가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화합이 되어 돌아올때까지 서로 팔장을 끼고 잠시도 떨어지지 않는 것을 보고 참으로 기뻤습니다. 그 목사님은 키가 훤칠하게 크고 잘 생기고, 사모님도 얼굴이 희고 눈이 부리부리하게 잘 생긴 이상적인 부부처럼 보였는데, 왜 이혼 직전에 왔었는가 하면 서로 잘 생긴만큼 서로 고집을 부리고 교만해서 어느 편 하나 자존심을 굽히려 들지 않고 제 고집만 부렸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하찮은 일로 이혼까지 할 뻔 했는데 다행히도 그 수양회를 통해 각자 자기 잘못이었다고 하면서 재결합되었던 것입니다.
가정 안에서 부부간에, 식구끼리 무슨 자존심이 필요하며, 교만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갈 5:13절에 보면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고 했습니다.
서로 섬기는데 대한 좋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에 한 화목한 가정이 있었는데, 하루는 가장되는 큰 아들이 옷을 사입고 와서 바지가 길다고 하면서 줄여달라고 했습니다. 열 두 시쯤 그의 아내가 조용히 일어나 바지를 줄여서 다려 놓았습니다. 3시쯤 어머니가 일어나서 '며느리가 고단한데 언제하랴' 생각하고 일러준 대로 싹둑 잘라서 다려 놓았습니다. 시누이는 시누이대로 새벽에 일어나 그만큼 잘라서 걸어 놓았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바지를 입어보니까 거의 반바지가 되어서 온 식구가 재미있게 웃고 조금 더 잘라서 반바지로 입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비록 바지는 반바지가 되었어도 가정은 더욱 사랑이 넘치고 화목해진 것입니다.
여러분, 서로서로 겸손히 섬기는 생활을 합시다. 세상에서 가장 삭막하고 외로운 장소는 사랑이 없는 곳입니다. 가정은 사랑의 보금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4. 긍정적인 눈으로 바라보야야 합니다.
사랑의 눈은 긍정적인 눈입니다. 가급적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보도록 해야 그 가정이 화평하고 행복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참는다'고 했습니다. 가령,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볼 때, '저것이 들어와서 애지중지 키운 내 아들의 사랑을 빼앗아 갔지' 하고 밉게 보기 시작하면 발꿈치까지 트집 잡는다는 말대로 모든 것이 부정적으로만 보이는 법입니다. 그러나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쁘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사랑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좋게 보이고 긍정적으로 보이는 법입니다. 다른 사람이 다 실망을 하고 믿어주지 않고 소망을 갖지 않아도 사랑을 가진 부모는 그 자녀에 대해 실망하지 말고 끝까지 믿고 힘쓰기를 바랍니다. 남의 단점만 찾아보려 들지 말고 장점, 좋은 점을 찾아보고 칭찬하도록 힘씁시다.
주님은 자신을 배신하고, 저주하고 도망간 베드로에게도 부활 후 제일 먼저 찾아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고 사명을 부여했습니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마침내 수제자로서 큰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못자국을 보여달라고 하던 의심많은 도마도 주님께서는 들어 사용하사 순교하기까지 힘있게 복음을 증거한 귀한 사도가 되게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주님은 당신의 가족된 우리 성도들이 비록 약하고 불완전한 존재이지만 끝내 긍휼과 자비로 대해주시고 주님의 귀한 일을 맡겨 복된 삶을 살게 하십니다.
고로 우리 성도들은 가정에서도 긍정적인 눈을 가지고 바라 보도록 합시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단점은 있는 법이고 아무리 몹쓸 사람같이 보여도 어느 구석엔가 장점이 반드시 있는 법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부터 입장을 서로 바꾸어 생각하며, 사랑을 먼저 주는 생활을 하며, 겸손히 섬기는 생활을 하며, 긍정적인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가운데 사랑을 실현하는 가정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 아 멘 -

정신적 장애를 극복하라

[고린도전서 1장 26절~31절]
26절 -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절 -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절 -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절 -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절 -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31절 -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몸이 불구가 된 사람은 자칫 정신적인 장애자까지 되기 쉽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고 과감히 도전하는 용기를 길러 주기 위한 목적에서 장애자 올림픽과 같은 행사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몸은 불구가 아니면서 정신적인 장애자가 되어 열등감 속에서 마음이 뒤틀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에 나환자촌에 부흥회 인도하러 갔던 일이 있는데 가자마자 담임 목사님이 부탁하기를 절대로 '문둥이'란 단어나 '나환자'란 말은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약점이나 단점을 말하면 대단히 불쾌하게 생각하고 자존심이 상해서 은혜도 못받는다고 하면서 성경 본문도 '문둥이' 이야기가 들은 말씀은 택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손가락, 발가락이 떨어진 것만이 아니라 마음에 문둥병이 들어서 마음이 뒤틀려 있다는 그러한 말을 듣고 저는 더욱 조심스럽게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안수 기도도 더 많이 해주었습니다.
사실 육신적 장애보다도 마음의 장애, 즉 정신적 장애가 더 문제가 심각합니다. 건강한 정신만 가지고 있다면 육신적 장애는 충분히 극복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를 통해 더욱 위대하고 가치있는 삶을 이루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신적 장애를 가진 자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문제만 일으키다가 끝내 폐인이 되고 사회적으로 문제만 일으키는 암적인 존재가 되기도 합니다.
특히 열등감으로 대표되는 정신적 장애가 가져올 수 있는 상반된 두 가지 결과에 대해 말씀을 나눔으로써 우리가 정신적 장애를 어떻게 극복하고 그것을 어떻게 유익한 방향으로 이끌 것인가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정신적 장애가 실패의 요인이 됩니다.
정신적 장애의 대표적인 증상은 열등감(Inferiority Complex)입니다. 열등감은 병적인 상태입니다. 열등감에 사로잡히면 만사에 자신이 없고 소극적인 사람이 되어서 무능, 무력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이런 사람은 씨름하기도 전에 누울 자리부터 봅니다. 따라서 매사에 자신이 없기 때문에 할 일을 못하다가 결국 인생의 패배자가 되고 맙니다. 이 열등감을 극복하지 못하면 교회엘 다녀도 봉사도 못하고 전도도 못합니다. 또한 다른 사람과 어울려서 친교 생활도 못하고 고립되고 맙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말도 하고 봉사도 해야 열등감이 치료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심한 사람은 소극적일 뿐 아니라, 모든 일에 자포자기하고 지나치면 자살까지 합니다. 또한 섭섭함을 느끼지 않을 일에 섭섭함을 잘 느끼고 토라지기도 잘 합니다.
어찌하든지 정신적 장애의 대표적인 증상인 이 열등감을 극복하지 못하면 소극적인 사람이 되고 무능한 사람이 되어 인생의 패배자가 됩니다.
이러한 열등감은 여러 가지 원인에게 생겨날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부모가 자식을 키울 때, 어려서부터 너무 윽박질러 키우고 못난이로 취급해서 키우면 그 아이는 자라서 사람을 대할 때나 무슨 일에 직면할 때 자신감을 갖지 못하고 '난 그저 못난 놈이야 난 못해'하면서 열등 인생이 되고 맙니다. 너무 칭찬만 듣고 제멋대로 하고 자라도 문제아가 되고 교만해져서 남에게 좋은 영향력을 주지 못하지만 반대로 너무 윽박지르고 못난이 취급해도 인생의 낙오자가 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자식을 키울 때는 자신감을 심어 주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또 어떤 여자는 얼굴이 못나서 열등감에 사로잡히는 수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지나치게 화장을 하거나 지나치게 옷치장을 하게도 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아내가 자기보다 인물이나 학벌이 낫다는 열등감 때문에 아내를 더 학대하고 못살게 구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청년은 대학에 못갔다는 열등감 때문에 교회에도 못나오고, 혹은 삼류대학에 갔다고 고개도 못들도 다니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또 자기는 대학을 못나왔다고 늘 그것이 열등감이 되어서 '나는 대학도 변변히 못나온 놈인데…'하고 열등 인생으로 자처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등 인생이냐, 열등 인생이냐 하는 것은 학벌이 좋고 나쁜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 링컨 같은 분은 대학은 커녕 국민학교도 몇 달밖에 못다닌 분이지만 미국에서 제일 훌륭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인도의 라빈 그라드 타골 같은 사람은 대학은 못나온 사람이지만, 세계적으로 유명한 시인이 되었습니다.
어떤 분은 몸에 병이 있거나, 불구가 되어서 열등감에 사로잡혀 인생의 패배자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헬렌 켈러 같은 여자는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는 삼중고(三中苦)의 사람이었으나 세계적으로 유명한 박사님이 되었습니다. 
베토벤은 청각장애자, 즉 귀머거리였고 루즈벨트 대통령은 소아마비로 다리를 저는 사람이었습니다. 언젠가 장애인 올림픽에서 화제를 모았던 15살난 케니라는 소년은 허리 아래가 없는 불구자였습니다. 엉덩이도 없고 물론 대소변 보는 곳도 없는 사람입니다. 다른 기구로 뽑아내겠지요. 그런데 이 케니는 말하기를 '장애는 슬픈 일이 아니라 단지 조금 불편할 뿐이다. 나는 무엇이든지 잘 먹고 즐겁게 생활한다'고 했습니다.
어떤 이는 좋은 옷을 못입었다고 부끄러워서 교회도 못나오는 이가 있지만, 그러나 세례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다녔으나 그가 외칠 때 많은 사람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4세기 경에 성 안토니우스(St. Antonius)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큰 부자집 아들이었습니다. 하루는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왔다가 재산문제로 고민하며 되돌아간 말씀을 읽다가 감명을 받고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평생 가죽옷 한 벌만 입고 수도 생활을 했는데, 시내에 나오면 짐승으로 착각할 정도였으나, 그가 한번 외칠 때마다 사람들은 무릎을 끓지 않을 수가 없었고 회개치 않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옷을 얼마나 잘 입었느냐가 큰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서느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이는 사업에 실패하고 그 다음부터 열등감에 사로잡히는 이가 있으나 사실 실패없이 성공한 사람은 없습니다. 실패가 나쁜 것이 아니라 실패 후에 절망하는 것이 나쁜 것입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실패도 있고 실수도 있는 법입니다. 여기서 주저 앉지 말고 용감히 딛고 일어서야 성공자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과거 지은 죄 때문에 평생 죄의식에 사로잡혀 '나는 죄인이다. 나는 벌 받을 놈이다'하고 자학하는 이가 있는데, 이것도 나쁜 것입니다. 예수님께 회개하면 씻지 못할 죄가 없는 것입니다. 죄를 지은 것은 나쁘지만, 회개한 다음에는 뒤를 돌아보지 말고 믿음으로 의로운 삶을 전진해야 합니다. 사 43:18, 19절에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열등감으로 대표되는 정신적 장애는 결국 실패와 절망만을 가져오지만 그것을 딛고 일어서면 오히려 더욱 큰 성공의 길에 서게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2. 정신적 장애가 축복의 요인이 됩니다.
누구나 어떤 부분에 대해서 조금씩이라도 열등감을 갖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열등감의 요소를 믿음으로 역이용하면 도리어 없었던 것보다 더 큰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몸에 찌르는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는 늘 이 질병의 가시 때문에 고통을 겪으면서 열등감을 가졌으나, 그는 이것 때문에 더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 안에 살게 되었습니다.
그가 주님께 그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을 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고 응답을 받고, 그 후부터는 자기의 약점과 능욕과 궁핍과 고난을 오히려 자랑하며 다녔습니다.
결국 열등감의 원인이 되는 요소가 바울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능력과 은혜 안에 매달리게 하는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그는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하므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에게는 열등감의 요소가 축복이 되었던 것입니다.
위대한 지도자 모세도 본래는 말도 변변히 못하는 사람으로서 열등감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부르실 때, 자기는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 낼 수 없는 무능한 사람이라고 변명했습니다. 출 4:10절에 보면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으리라'하시는 데도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라고 핑계댄 것을 보면 모세도 내성적인 사람이요, 열등감의 사람이었으나 결국 믿음으로 극복하고 열등감을 축복으로 바꾼 사람이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를 하나님이 부르실 때도 예레미야가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한 것을 보면 그도 역시 내성적인 사람이며 열등감을 가진 사람이었으나, 결국 그것 때문에 더욱 능력있는 하나님의 종이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을 너무 믿고 자기 확신에 찬 사람은 하나님을 간절히 믿고 의지하려 들지 않고, 또 간절한 기도도 하지 않게 됩니다.
그레이머(Raymond L. Gramer)라는 사람은 마 5:3절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에 대해서 말하면서 예수님의 관심을 끄는 비결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첫째, 자신의 부족을 깨닫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즉 분명히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기가 죽어 있는 사람들, 겁에 질린 사람들, 자신의 부족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을 의미하는데 이런 사람들을 축하할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이며 천국에 들어갈 후보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둘째, 죄를 절감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마 9:13절에서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셨기 때문에 죄를 절감하는 자는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받을 때가 누구보다 가까운 사람이므로 축하해야 될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셋째, 절망을 느끼는 자는 예수님의 관심을 끄는 사람이므로 축하할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38년된 중풍병자, 누구에게도 기대를 걸 수 없는 가장 절망에 처한 이 사람이 예수님의 관심을 끌어 큰 은혜를 받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학교에서 문제가 두드러진 아이가 선생님의 관심을 끄는 것과 같습니다.

그레이머 씨는 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에 대해서 말하기를 '심한 슬픔을 경험하고 버림받은 것같이 느끼는 분들, 자존심이 상한 분들, 생활에서 별다른 소망을 찾을 수 없는 분들, 기쁨이 자신을 피해 간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축하받을 분들이다'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은혜도 받기에 합당한 분들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면에서 볼 때 열등감을 느끼는 분들은 누구보다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할 수 있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분들이며 따라서 엄청난 은혜와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저도 사실 열등감을 많이 가진 사람이었는데, 그것 때문에 더 하나님을 굳세게 의지하게 되고, 더 많이 하나님께 엎드리게 되고, 더 남보다 하나님 뜻에 맞는 사람이 되려고 애쓰게 되었고, 그것 때문에 결국 엄청난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나는 누가 열등감을 자극시킬 때 그것을 전진의 추진력으로 삼고, 하나님께 매달리는 기회로 삼습니다. 너무 자극이 없을 때는 있기를 바랄 때가 있습니다.
본문에 보십시오. 영생을 얻고 천국에 들어갈 사람들 중에는 육체적으로 볼 때 지혜있는 자나 문벌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고, 도리어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패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스스로에게 있는 열등감을 잘 선용하여 그것이 도리어 축복의 요인이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열등감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정신적 장애인들은 결국 실패하는 인생이 되고 말지만 열등감을 극복하고 정신적 장애를 물리친 자들은 실로 커다란 축복과 성공을 이루게 된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고, 모든 정신적 장애를 극복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기독교인의 부활 신앙

[고린도전서 15장 12절~22절]
12절 -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13절 -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14절 -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절 -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16절 -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17절 -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절 -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절 -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20절 -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1절 -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절 -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우리의 영혼에 영원한 안식을 가져다 준 사건이 있으니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입니다. 스탠리 존스(Stanley Jones) 선교사가 인도에서 전도를 하고 있을 때, 어느날 한 이슬람교도가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우리 이슬람교에는 당신들 기독교인들이 가지지 못한 위대한 것이 있소. 성지 메디나에 가보면 마호메트의 시체가 들어 있는 관이 있어서 정말 마호메트란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소. 그러나 당신들 기독교는 예루살렘에 가더라도 빈 무덤밖에 볼 것이 없지 않소?' 그러자 스탠리 존스는 이렇게 자신있게 대답했습니다. '고맙습니다. 당신이 말해 준 것처럼 마호메트는 죽어서 지금도 관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의 위대한 점이요, 빈 무덤이야말로 그것을 확실히 증거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요, 생명의 종교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기초는 부활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는 무너졌을 것이며 아무런 소망도 없었을 것입니다. 부활이 없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며, 부활의 신앙이 없는 사람은 교회 다니는 사람(church member)은 되었을지라도 기독교인은 아직 되지 못한 것이며 그의 구원도 확실치 않은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활을 부정하려 들거나 회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의심을 가졌던 도마도 예수님의 부활을 확인한 다음에는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으며 순교하기까지 하면서 부활의 증인이 된 것처럼 우리도 처음부터 확신이 없다고 낙심하지 말고 부활의 확실성을 살펴보며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부활의 확실성
많은 사람들이 죽으면 그만이지 죽은 후에 무슨 영생이 있고 부활이 있느냐고 아예 믿으려고 들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가지 면에서 부활은 확실히 있습니다.

 

첫째, 자연계를 보아서 부활이 있음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불란서에서는 고고학자들이 2000년 된 고분에서 꽃씨를 발견해서 의혹을 가지고 땅에 심어 보았더니 여러날 후에 굳은 땅을 뚫고 살아 올라 오더랍니다. 여러분 일년생 식물도 몇천 년 후에라도 다시 사는 것을 우리 눈으로 똑똑히 보면서 그보다 높은 생명을 가진 사람이 왜 한 번 죽음으로 끝난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은 영생하는 존재로서 부활이 있고 영생이 있습니다. 이것을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에게 증거하여 보여주신 것입니다.

둘째, 본능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다른 동식물과 달리 영생을 사모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사모하는 본능을 가진 것은 여자가 있기 때문이요, 여자가 남자를 사모하는 본능을 가진 것은 남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먹고 싶은 것은 어딘가 그것이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먹고 싶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만이 유독 영생과 내세를 사모하는 것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내세가 있고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거짓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 강력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영생과 부활을 빼놓으면 할 말이 없어집니다. 성경은 금생보다 내생을, 죽음보다 부활을 더 강조하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단 12:2절에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지혜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고 하였습니다.

요 11:25절에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핍박하고 죽이는 데 앞장섰던 바울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부활을 증거하는 사도가 되었고 이를 위해 순교까지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15:3-8절에서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서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후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그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예수님의 부활 전에 다 무서워서 도망갔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는 당대히 부활을 증거하다가 거의 다 순교한 사실을 성경을 통하여 볼 수 있습니다.

2. 세 가지 부활
첫째로, 과거의 부활을 살펴 보면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로서 모든 부활의 기초가 됩니다. 고전 15:20절에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 죄를 위한 대속의 제물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가 삼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부활을 확증해 주신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예수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니"(고전 15:22)라고 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마귀에 대한 예수님의 승리를 입증하셨고 생명의 능력이 사망 권세를 이긴 것과 선이 악을 이기고 정의가 불의를 이긴 승리를 보장해 주신 것입니다.

둘째로, 현재의 부활을 살펴보면 이것은 믿는 자들의 영적 부활입니다. 아담 안에서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영혼이 죄를 대속하였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순간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라고 했고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고 했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24, 25)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이 복된 말씀을 믿음으로 받는 자는 죽어 있던 영혼이 살아납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요 6: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 26)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위에 생명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므로 지금도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멸망의 구렁텅이로 떨어지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빨리 이런 자들을 전도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은 사람은 죽어도 이 다음에 생명의 부활로 다시 살고, 구원받은 사람이 죽기 전에 예수께서 오시면 영원히 죽지 않고 변화되어 영원한 세계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셋째로, 미래의 부활을 살펴보면 이것은 장차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믿음 안에서 죽은 자들이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은 천년왕국 시대가 지난 다음 심판의 부활로 부활하여 죄악의 분량대로 심판을 받아 영원한 불못에 던지워지게 됩니다.
고전 15:51, 52절에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살전 4:16-18절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고 하였습니다. 부활의 신앙을 돈독히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신자는 아직 참된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늘 이 말씀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부활을 확실히 깨닫고 믿는 기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 아 멘 -

절제하는 삶을 살자

[고린도전서 9장 24절~27절]
24절 -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5절 -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26절 -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27절 -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요사이 저는 마음 속으로 신앙 생활을 하는 데는 언제나 절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절제하는 삶을 살자'라는 제목을 가지고 말씀을 나누고자 하는 것입니다.
봉독한 말씀을 보면 특히 25절에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 말씀했고, 이어서 27절에는 "내가 내 몸을 쳐 복종케 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한 사도 바울은 그 자신부터 날마다 자기의 육에 속한 성품, 육에 대한 본능, 혹은 욕망을 쳐서 복종시키는 삶을 실제 살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살던 당시 고린도시 교외에는 2년마다 지금의 올림픽 게임과 같은 경기가 있었는데 그때가 되면 전 그리스(Greece)인들이 열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그 경기에 참가하는 모든 선수들은 적어도 10개월 이상을 극기하고 절제하면서 연습과 훈련을 한 다음에 참가하곤 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연상하면서 세상의 썩을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도 이토록 극기하고 절제 하는데, 하물며 영적인 싸움, 신앙의 승리를 거두고 하나님 앞에서 상을 얻으려 하는 일에 어찌 절제없이 될 수 있겠느냐고 강조한 말씀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반드시 엄격한 금욕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극기와 절제는 신앙 생활에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갈 5:23절에 9가지 성령의 열매를 열거하는 가운데 맨 마지막에는 절제의 열매를 강조한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방언과 예언의 갖가지 은사를 다 받았다 하더라도 만약에 절제가 없다고 하면 그는 언젠가는 쓰러지고 실패하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절제하는 삶이란 무엇이며, 우리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절제해야 할 것인지를 몇 가지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절제하는 삶이란 무엇입니까?
첫째, 참고 억제하는 삶입니다.
나의 육신의 모든 본능과 감정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참고 억제할 때 가서는 억제하는 것입니다. 절제가 없는 사람은 마치 자동차 브레이크가 고장난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자동차라도 그 속에 브레이크가 고장났다면 그 차는 해지기 전에 파손될 뿐만 아니라 자신도 죽고 남도 죽이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절제 없는 신앙 생활은 얼마 못가서 파손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둘째, 구별하는 삶입니다.
십계명 중에도 열번째 계명을 보면 "네 이웃의 집이나 네 이웃의 아내나 네 이웃에 있는 것을 무엇이든지 탐내지 말라"고 했습니다. 즉 남의 것과 내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께서는 동산 안의 과일을 무조건 다 먹지 말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중앙에 있는 선악과만을 먹지 말라고 엄히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명령을 어기고 따 먹고야 말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구별없이 무절제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기독교는 무조건 육신을 악하게만 보는 금욕주의나 이원론(Dualism)은 아닙니다. 그러나 먹을 것과 먹지 않을 것, 할 말과 안할 말, 할 일과 안할 일을 분명하게 구별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절제가 필요하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셋째, 분수에 맞도록 적당히 하는 삶입니다.
무조건 본능과 욕망을 꺽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적당히 하고 분수에 맞도록 도에 지나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분수에 지나치고 도에 넘으면 죄가 안될 것도 죄가 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오십보 백보 차이란 말과, 종이 한장 차이란 말을 많이 듣습니다. 이 말은 좋게도 사용되는 말이기도 하겠지만 또 한편 절제라는 차원에서 볼 때는 대단히 위험한 말이기도 한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말세에는 쾌락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시대입니다. 한마디로 무절제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더욱 더 믿음의 생활과 절제의 은혜를 받아서 분수를 지키며 경건하게 구별된 생활을 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2. 우리는 무엇을 절제해야 합니까?
첫째, 말(言)에 있어서 절제해야 합니다. 
약 1:26절에 보면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 것이라"고 했습니다. 계속해서 약 3:2절에도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고 했습니다. 마치 말(馬)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재갈을 먹여 온 몸을 이끄는 것같이 우리의 혀에도 재갈을 먹여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말하는 중에 실수를 많이 합니다. 하지 않아도 되고, 해서는 안 될 말이 있는데도 절제하지 못하고 함부로 하다가 실수를 하고 죄를 범하게도 되는 것입니다.
시 34:13절에 보면 "네 혀를 악에서 금하여 네 입술을 간사한 말에서 금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또 잠 10:19절에도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리라"고 했습니다.

둘째, 보는 것을 절제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죄는 눈으로 보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마귀의 유혹에 걸려 범죄할 때도 그 선악과를 보니 그야말로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지라"고 했습니다. 다윗도 그토록 점잖고 흠과 티가 없을 정도의 훌륭한 인격을 갖춘 임금이었지만 어느날 옥상 위에서 민가를 내려다 보다가 어느 아리따운 여인이 목욕하는 것을 보고 정욕을 참지 못하여 무서운 간음죄를 범하고 나중에는 그 여인의 남편 우리아를 죽이는 살인죄까지 범하게 된 것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토록 안목의 정욕은 무서운 것입니다.
욥 31:1절에 보면 "내가 내 눈과 언약을 세웠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고 했고 마 5:28절에도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눈 앞에 십자가를 세우고 보는 것에서부터 조심하며 절제하는 생활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셋째, 먹는 것을 절제해야 합니다.
사람의 본능 중에 무엇보다도 식욕이 제일 강하다고 합니다. 구약의 에서는 당장의 배고픔을 참지 못하여 팥죽 한 그릇에 귀한 장자권을 동생 야곱에게 팔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평생에 그리고 자자 손손 대대로 있을 하나님의 축복을 그 한 순간에 놓쳐 버렸던 것입니다. 우리는 먹는 것을 조심해야 되겠습니다. 먹을 것과 안 먹을 것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쉬운 예를 들어서 우리 몸에나 정신에나 어떤 면에도 하나의 유익이 없는 술과 담배 같은 것은 우리 신앙인의 양심으로 금해야 마땅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을 많이 찾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잠 23:29-35절에 "재앙이 뉘게 있느뇨 원망이 뉘게 있느뇨 까닭없는 창상이 뉘게 있느뇨 붉은 눈이 뉘게 있느뇨 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 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그것이 마침내 뱀같이 물 것이요 독사같이 쏠 것이요 또 네 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일 것이요 네 마음은 망령된 것을 발할 것이며 너는 바다 가운데 누운 자 같을 것이요 돛대 위에 누운 자 같을 것이며 네가 스스로 말하기를 사람이 나를 때려도 나는 아프지 아니하고 나를 상하게 하여도 내게 감각이 없도다 내가 언제나 깰까 다시 술을 찾겠다 하리라"고 했습니다.
구약의 삼손과 같은 사람은 그렇게 기운이 센 하나님의 종이었지만, 구별된 나실인으로서 생활을 의식하지 못하고 절제하지 못하여 금지된 술을 마시고 기생 들릴라의 무릎에 누웠다가 머리를 깎이고 눈이 뽑혀 비참한 운명이 되어 죽고 말았던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날 악한 마귀는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 성도들을 넘어 뜨리려고 온갖 유혹을 다합니다. 간교한 올무를 쳐놓고 걸려 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가 정신 차리지 않으면 삼손과 같이 영적인 힘도 다 잃어 버리고 믿음도 다 팔아버리게 되고 신령한 눈이 어두워져서 비참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고 만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넷째, 육신의 정욕을 절제해야 합니다.
이 시대야말로 음란한 세대입니다. 하나님께서 짝지워 주신 부부 생활로 정당하게 본능을 만족시켜야지, 육신의 정욕을 절제하지 못하면 앞에 말씀드린 삼손과 다윗 왕처럼 무서운 실수와 죄를 범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성 어거스틴도 회개한 다음부터는 전에 짓던 죄가 생각나고 정욕이 일어날 때마다 자기의 팔을 물어 뜯어 가면서 참고 이겨 나갔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초대교회 교부(敎付)들 중에는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려고 추운 겨울날에도 맨 마루 바닥에 누워자고 가시덩굴에 뒹굴면서 자신의 몸에 피가 나도록 몸을 괴롭히면서까지 육신의 정욕을 참고 절제하면서 신앙 생활을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욕은 무엇보다 절제하면서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지켜 성도로서 몸과 마음까지도 깨끗한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다섯째, 감정을 절제해야 합니다.
우리의 감정이 나는대로 다 나타내고 살면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나의 혈기, 시기, 질투 이 모든 감정을 잘 제어할 줄 알아야 올바른 신앙 생활과 건전한 인격을 갖출 수 있는 것입니다. 잠 14:30절에 보면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고 했습니다. 또 잠 16:32절에도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그 외에도 고전 7:30절의 말씀에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며…"라고 사도 바울이 말했습니다.
여러분! 감정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다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감정을 제어하고 절제하는 자가 훌륭한 인격자요 승리자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몸과 얼굴 치장도 절제해야 합니다.
옷입은 것이나 화장하는 것, 모든 것에 있어서 너무 분수에 지나치지 않도록 적당히 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유행도 좋고 어느 정도의 멋도 좋지만 자기의 분에 넘치게, 생활 능력 이상의 지출을 해가면서까지 외모를 치장한다고 하면 바람직한 성도의 생활은 아닌 것입니다. 주님은 사람의 외모보다 중심을 보신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일에 절제하여 건전한 인격과 승리의 신앙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절제의 생활은 나의 신념만 가지고는 절대로 안됩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이 보고 계심을 인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따라서 시 1:2절의 말씀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언제나 죄의 결과는 무섭다는 사실을 마음 속 깊이 되새기면서 요 15:1절 이하의 말씀같이 포도나무가 되시는 주님께 의지하고 붙어 있어서 늘 성령의 주시는 능력을 받아 모든 일에 절제하며 이기며 살아나가는 여러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아 멘 -

있어도 없는 것 같이 여기는 신앙

[고린도전서 7장 29절~31절]
29절 -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0절 -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1절 -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빌립보서 2장 5절~11절]
5절 -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절 -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절 -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절 -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절 -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절 -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절 -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저희 형님이 공군 군목으로 계실 때 있었던 이야기를 들은 것이 생각납니다. 대전 기교단 군종 실장으로 있을 때 기교단 단장인 어떤 한 장군이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은 뒤에 당시 대위 계급장을 단 군목 형님을 보고 '목사님, 제가 봉사할 일이 뭐 없겠습니까? 분부만 해주십시오. 최선을 다해서 봉사하겠습니다'라고 물어오더랍니다. 그래서 예배 시간에 문간에 서서 주보를 나눠주며 훈련병들 안내를 보라고 했더니 그 별을 단 장군이 머리를 빡빡 깎고 땀내나는 훈련병들에게 겸손히 주보를 나눠주면서 인사를 하고 자리를 안내할 때 훈련병들과 부대내 장교들이 황송해서 어쩔줄을 몰라 하고 복음 전도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자기 계급을 생각한다면 장군이 훈련병 앞에서 굽신 굽신 인사하면서 안내를 보겠습니까? 계급으로 말한다면 어떻게 자기보다 까맣게 아래 서열에 있는 군목한테 '목사님, 목사님'하면서 명령하는 대로 순종하고 봉사하겠습니까?
이런 자세가 바로 참다운 그리스도인의 자세요, 신앙 생활의 멋도 있고 맛도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있어도 없는 것 같이 여기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 자세입니까?
오늘 본문에도 보면 사도 바울은 "아내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라 이 세상 형적은 지나감이니라"고 하였는데, 한마디로 하면 우리 성도들은 영원한 하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주님의 재림을 기대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세상 것들은 '있어도 없는 것 같이' 여기며 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뜻깊고 멋진 말씀입니다.

1. 권세가 있어도 없는 자 같이 여겨야 합니다.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세상 권세는 있어도 없는 것 같이 여겨야 합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그 공군 부대 장군과 같이 하나님의 자녀된 존귀한 성도들은 세상 권세 따위에 너무 큰 비중을 두지 말고 그까짓 것들은 있어도 없는 것 같이 여기며 겸손히 봉사하는 자세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4장에 보면 예수께서 한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기를 잔치집에 청함을 받아가거든 스스로 높은 체하여 높은 자리에 앉지 말고 아예 스스로 낮춰서 말석에 가 앉으라고 하시면서 만일 높은 자리에 앉아 있다가 더 높은 사람이 오면 낮은 자리로 밀려나서 창피를 당하는 것보다 스스로 낮추어서 말석에 앉았다가 청한 사람이 강청해서 높은 자리에 앉게 되면 더 영광이 되리라고 하시고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4:11)고 말씀하셨습니다.
권세가 있어도 없는 것같이 여기며 높아도 낮은 자같이 여기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참으로 겸손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입니다. 그것이 참으로 멋도 있고, 맛도 있는 신자의 생활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가르치실 뿐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생활로 본을 보이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과 동등되신 분이요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그 권세를 버리시고, 높으신 분이시지만 낮은 자가 되어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입고 세상에 오셔서 자기를 낮추어 죽기까지 복종하신 분입니다. 참으로 가장 멋있는 행동을 보여주신 분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가장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모든 무릎을 그 앞에 꿇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신약 성경의 삼분의 이를 기록한 분이요, 삼층천에까지 올라가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극도의 신비를 체험한 분이지만 언제나 자기를 낮추어서 '나는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다', '팔삭등이', '죄인 중에도 괴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고전 9:18절에 보면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라고 했습니다. 마땅히 누릴 권리가 있어도 그 권리를 다 쓰지 않는다고 했고 그것이 더 큰 상을 받게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맡을 때에도 그렇습니다. 집사가 권사가 되고 권사가 장로가 되고 또 무슨 회장이 되도 그 전과 똑같이 겸손한 자세로 자기를 낮추고 높아도 낮은 자같이 생각하고 봉사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교회 안에서 권사나 장로나 부장이다 해서 어깨에 힘주고 대접이나 받으려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있어도 없는 것같이, 즉 높아도 낮은 자같이, 권세가 있어도 없는 자같이, 부자라도 가난한 자같이 여기며 또한 다른 성도들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고 겸손히 섬기면 얼마나 훌륭한 신자가 되겠습니까?
교회 안에서 가장 위험한 존재는 제일 높은 자리만 차지하려 하고 중한 직분을 받았다고 목에 힘만 주는 사람입니다.
권세가 있어도 없는 자같이, 높아도 낮은 자같이 사는 성도가 되시기를 간절히 부탁합니다.

2. 물질이 있어도 없는 자 같이 여겨야 합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재산상속 문제로 형제가 싸우다가 예수님을 찾아와 판결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이 사람아 내가 무슨 물건이나 나눠주는 재판장인 줄 아느냐"고 핀잔을 주고 나서 "삼가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리석은 부자의 생명을 하나님이 불러가시는 말씀을 하시면서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고 또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히 11:26절에 보면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부유하고 물질이 풍부하다고 물질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고 사모하거나, 또 물질 때문에 가난한 형제들을 실족케 하는 일은 반드시 없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물질은 얼마 지나지 않아 썩어 없어지고 안개와 같이 사라질 뿐인 헛된 것이기에 그것이 아무리 많이 있어도 없는 것 같이 여기며 영원하고 참된 하늘의 가치를 더욱 소망하는 우리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3. 선행이 있어도 없는 것 같이 여겨야 합니다.
착한 일을 하고 칭찬 들을 일을 하고 자랑할 만한 일을 했어도 없었던 것같이 여겨야 진실된 신앙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6장에 보면 예수께서 엄히 경계하여 말씀하시기를 "사람에게 보이려고 너희 의를 행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습니다. 즉 선행을 하고 나서는 곧 없었던 것 같지 잊어 버려야지 그것을 나팔을 불면 이미 세상에서 자기 상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받을 상이 없어진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목적으로 기도하지 말고, 금식할 때에도 사람에게 보이려고 흉한 얼굴을 하지 말고 금식해도 안하는 것 같이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40일 동안 하나님과 대면하여 기도하고 내려온 후에 그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서 온 백성이 두려워서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는데, 모세 자신은 그것을 깨닫지도 못했다고 했습니다.
이사야 39장에 보면 히스기야 왕이 죽을 병에 걸려서 사형 선고를 받았는데 눈물로 간곡히 하나님께 기도하여 고침을 받고 15년이나 생명의 연장을 받았습니다. 그때 바벨론에서 축하 예물을 가지고 사절단을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히스기야 왕은 너무 기분이 좋고 신이 나서 그 사절단에게 궁중에 있는 모든 것을 구경시켰습니다. 금고와 무기고와 보물 창고...등 안보인 것이 없이 다 들추어 내보였습니다. 이 광경을 보신 하나님께서 노하셔서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보물은 다 바벨론으로 옮겨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후에 그 말씀대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왜 노하셨을까요? 우리가 은혜를 많이 받고 체험이 많을수록 자중하고 조심해야 하는데 히스기야는 너무 자기도취에 빠져서 자만하다가 이방인에게까지 자랑삼아 다 들춰 내보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기의 선행이나 장점을 너무 나타내거나 너무 의식하는 사람은 실족하기 쉽습니다.
식물의 줄기도 무성하고 번창해야 되지만 뿌리는 더더욱 중요합니다. 식물의 뿌리까지 햇빛에 다 노출시키면 그 식물은 곧 시들고 마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도 하나님과 자신만이 아는 은밀한 부분이 있어야 건전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지 않는 데서 하는 기도와 성경 읽기와 선행이 있어야 땅속 깊숙히 뿌리를 내린 식물과 마찬가지로 신앙이 튼튼한 법입니다. 신앙 생활에 숨은 선행이 없이 모두 드러내기를 즐긴다면 실로 위험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권세가 있어도 없는 것같이, 물질이 있어도 없는 것같이, 칭찬을 들어도 못들은 것같이, 자랑거리가 있어도 없는 것같이 무게있고 깊이가 있는 신앙 생활을 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 멘-

십자가는 가장 큰 능력, 가장 뛰어난 지혜

[고린도전서 1장 18절~25절]
18절 -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절 -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절 -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절 -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절 -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절 -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절 -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절 -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하나님은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십니다.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에 하나님은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십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입니다.

1.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18~20절)
세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이들을 미련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진정한 지혜입니다. 구주 예수님의 삶은 순종의 삶이었습니다. 그분은 아버지께 순종해 성육신하셨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도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아버지께 순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로써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보여 주셨습니다. 스스로 죄를 해결할 수 없고,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인간의 능력과 지혜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드러내셨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지혜입니다.
* 묵상 질문
'십자가의 도'란 무엇일지, 여러 면으로 깊이 묵상해 보세요.
* 적용 질문
특히 이번 고난 주간에 내가 따라야 할 십자가의 도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요?

2.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21~25절)
인간적인 지혜와 능력으로 무엇인가를 결정하고 행동할 때,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것이 지혜로운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유대인은 힘 있는 정치적 왕을 기대했기에, 목수 출신에다 저주의 형벌인 십자가형으로 죽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방인 역시 범죄자처럼 사형당한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지 않았고, 헬라 철학에 비해 보잘것없어 보이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다시 살리심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드러내셨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할 때,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에 이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전해야 합니다.
* 묵상 질문
하나님은 어떻게 그분의 지혜와 능력을 나타내셨나요?
* 적용 질문
내 지혜와 능력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인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나요? 고난 주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누구에게 어떻게 전할까요?

오늘의 기도
세상 사람들은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이라며 비웃지만, 십자가 복음만이 저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고 지혜임을 굳게 믿습니다.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만 자랑하고 그리스도로 전부인 삶이 되게 하소서.


출처 : 생명의 삶 (큐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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