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udy
(12:1~14:40절)
영적 은사 - 히 11장이 '믿음의 장'이라면 본문은 '은사의 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본문은 교회가 복음 사역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영적 은사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본문의 내용은 은사의 종류와 교회 조직(12:1~31), 사랑의 은사(13:1~13), 방언과 예언(14:1~40)의 세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본문은 은사에 대한 오해와 이단이 난무하는 현대 교회에 은사의 참된 목적과 그 활용, 교회 조직과 직분의 의미 등에 대한 귀중한 성경적 관점을 제공해 준다. 한편 12장은 성령의 은사에 대한 기본적인 원리를 설명함으로써 은사 문제로 생긴 고린도 교회의 대립 상황을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은사의 근원은 오직 한 분 성령이시며, 은사의 목적은 분쟁의 조장이나 자기 자랑이 아니라 교회의 건덕과 복음의 확장임을 깨달을 수 있다.
[1~3절]
은사의 기원 - 본문은 그들의 보잘것없는 과거와 성령의 사역을 대조시킴으로써 은사 문제로 말미암아 고린도 교회에 발생한 분쟁의 부당성을 지적한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의 선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에 그 근거를 둔 것이며(눅 11:13), 성도들이 구속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입증하며(롬 8:15), 하나님께서 함께하셔서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표임을 알 수 있다(행 2:3).
[4~6절]
은사는 여러가지나...같으니. 모든 성도들은 성령의 은사를 받아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나 그들에게 맡겨진 직분은 각기 다르며 그 일을 수행하는 방법 및 양상도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성도들의 모든 은사와 직분 및 사역은 삼위 하나님께서 함께 주관하시며 그분의 섭리 가운데 있다는 점을 본문은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7~11절]
성령의 은사 아홉 가지<서론 도표>. 여기서 우리는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분배되며, 은사의 활용은 사랑의 동기에서 출발되어야 한다는 것과 교회의 건덕을 위해서 은사의 남용을 절제해야 한다는 것을 깨우칠 수 있다.
(12~26절)
은사들의 유기적 관계 - 본문은 성령의 은사를 받은 신자들의 상호 관계 및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인간의 몸과 지체로 비유함으로써 은사의 다양성과 일치성을 다시 한번 밝힌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사람과 같이 생명을 가진 유기적 통일체이며 그리스도의 각 지체들인 성도들을 유기적으로 통일시키는 것은 성령이다. 즉 몸은 하나이나 지체는 다양하며 각 지체들이 자신의 고유기능을 수행하여 몸의 전체적인 조화와 균형을 유지하듯이 성도들의 은사는 각기 다양하나 서로 조화하고 협력하여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의 발전과 영적 성장을 도모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한 몸이라는 지체 의식을 가져야 하며 각자에게 부여된 영적 은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교회의 건덕과 사랑의 실천에 힘써야 하며 성도들 상호간에 참된 신뢰와 존경, 형제애의 나눔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깨우칠 수 있다(요 13:34; 롬 12:4, 5; 골 2:19).
[13절]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성령과 성도의 관계를 설명한 특이한 표현이다. 이것은 인간의 육체가 물을 마셔야 살 수 있듯이 성도들의 영혼은 성령과 교제해야 할 절대적 필요성이 있다는 의미이다. 바울은 특히 모든 성도들이 한 분 성령과 교제한다는 사실을 밝히 드러냄으로써 교회의 단일성과 성령으로 말미암은 조화롭고 일치된 삶을 강조한다.
(21~26절)
은사의 상호 의존성 및 관련성 - 본문은 사람의 몸에 있는 여러 지체들의 상호 의존성과 관련성에 대해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는 인간적인 불평등이나 은사와 직분의 차별이 없으며, 상호 보완(相互補完)의 유기적 관계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특히 사회, 경제적으로 비천하고 가난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각별하신 사랑이 부각되어 있다. 바울은 지체의 중요치 않는 부분에 대한 특별한 보호의 비유를 통해 교회가 이들에게 각별한 관심과 사랑을 기울여야 한다고 역설한다(22, 23절).
[26절]
본절에서 바울은 인간의 지체가 당하는 고통의 비유를 통해 고린도 교인들의 분쟁에 뼈아픈 일침을 가하며 지체 의식과 사랑의 회복을 부르짖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의 탁월한 문학성과 실물 인증(實物引證)의 차원 높은 표현 기법을 볼 수 있으며, 사랑의 회복만이 현대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임을 깨달을 수 있다(벧전 4:8).
(27~31절)
교회 안에서의 직분 - 본문은 바울 당시 교회의 직책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엡 4:11, 12, 교회의 직분>. 본문은 특히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몸과 지체로 비유함으로써 교회 안에 있는 직책의 다양성과 통일성을 강조한다. 즉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보편적 교회는 하나이니 그 안에는 수많은 유형적 지교회들과 다양한 직분이 존재한다.
[31절]
제일 좋은 길. 다음 장에서 언급될 '사랑'을 가리킨다. 사랑은 기독교의 최고 계명이며(마 22:37~40; 요 13:34) 성도라면 누구나 다 실천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은사이다.

 

# 해설

은사의 기원 (1~11절)

여기서 14:40절까지는 영적 은사에 관해 다루고 있다. 본문은 여러 가지 다양한 은사의 궁극적 기원이 한 성령(11절)이라는 사실을 밝힘과 함께 은사의 활용이 교회 건덕(健德)을 위한 사랑의 동기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갈파한다.

은사의 하나됨 (12~26절)

몸과 각 지체들 간의 유기적 관계를 비유로 들어 성도의 다양한 은사와 직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상호 보완적인 통일성을 이루고 있음을 재천명한다.

직분과 은사 (27~31절)

교회 내의 몇몇 영적인 은사들을 선택적으로 언급함으로써 성도들에게 주어진 그리스도의 지체 된 역할과 사명을 설명해 준다(롬 12:3~8; 엡 4:11). 특히 본문은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몸과 지체로 비유함으로써(27절) 양자간의 불가분적 관계성을 거듭 주지시키고 있다.

 

# 핵심

1~11절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이 받은 은사만이 최고인 양 자랑하며 교만하게 처신했다. 이에 바울은 은사의 다양성과 통일성에 대해 가르치면서 그들의 올바른 처신을 촉구하였다.

은사 (gift, 4~11절)

헬라어 '카리스마'는 보통 하나님이 성도 개개인에게 주신 특별한 재능을 의미한다. 이런 은사는 예언, 통역, 방언, 신유와 같은 이적적 은사와 사도, 선지자, 교사, 전도자와 같은 직분의 은사로 구분된다. 각 사람마다 개성이 다르듯이 은사의 종류도 다양하다. 그러나 모든 은사는 성령을 통해 성도에게 주어지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섬기기 위한 것이라는 통일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의 은사를 과시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는 데 선하게 활용해야 한다.

 

# 묵상

성령받은 영혼의 신앙 고백 (1~3절)

성령을 받은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를 저주할 자가 아닌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성령께서는 죄인의 심령 속에 거룩한 변화를 일으키시고, 그 속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우리의 삶 가운데서 구원의 능력을 적용시키십니다.

성령의 나타남 (7~13절)

성령이 역사하시는 이유는 각 사람의 영혼에 유익을 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지속적으로 얻지 못하면 주님의 구원은 온전한 열매로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하나님과 늘 동행하고 있다고 의식할 때뿐만 아니라 홀로 버림받았다고 느낄 때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머물러 있습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잇는 영적 유대도 성령의 내주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성령께서는 교회에 속한 각 성도들에게 은사를 통하여 영적 유익을 얻게 하실 뿐만 아니라, 교회에 내주하심으로써 그리스도와 교제케 하십니다.

교회의 권위 결정권 (18절)

교회의 각 지체의 직분은 하나님의 구원에 의해서 결정이 됩니다. 그래서 교회의 모든 사역은 성령이 인도하시는 은혜와 모든 성도들의 협력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따라 정해진 사람들을 통하여 조화롭게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모든 교회의 성도들은 자신들에게 맡겨진 사역에 충실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부여된 모든 일은 그 나름대로의 독특한 가치를 절대적으로 지니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 사역시 분쟁이 없도록 각별히 주의하고 서로 돌아보아 부족함이 없도록 힘쓰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질서를 통하여 교회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사역을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교회의 정의 (27절)

교회는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유기체로 성도들은 그 몸의 각 부분을 이루는 지체가 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구속과 부활을 통하여 이 땅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경의 증언이 항상 교회에 적용될 수 있도록 깨어 근신하는 자세가 모든 교회에 필요합니다.

교회의 직분과 사역 (28~31절)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다'고 할 때의 몇은 교회를 위하여 주신 여러 사역자와 은사를 받은 자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소수의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를 위하여 특별한 역할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그 사람들은 사도요, 선지자요, 교사요, 능력을 행하는 자요, 병고치는 자요, 서로 돕고 다스리고 각종 방언을 말하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직분들은 교회의 설립과 지속적인 발전, 그리고 선교를 위한 것으로써, 단순히 그 직분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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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1~34절)
공적 예배에 대한 권고 - 본장은 교회 예배 문제에 관한 바울의 설명(11:1~14:40)이 시작되는 부분으로, 예배시 여자가 수건을 쓰는 문제(2~16절)와 성찬식(17~34절)에 관해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앞 단락에서 나온 성적 타락과 우상의 제물 문제는 교회와 불신자들 사이에 발생한 것이지만 본장에 언급된 내용은 교회의 내적 문제 특히 예배시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각 문화권의고유한 전통이나 관습을 무시하지 않는 바울의 태도와 모든 피조물은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통일성과 참된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절]
나를 본받는 자 되라. 이것은 10장의 내용과 연결된 것으로서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고린도 교인들에게 바른 교훈과 사랑을 가지고 대한 것처럼 그들도 우상의 제물이나 기타 문제에 있어서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유익을 끼치고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힘쓰라는 뜻이다. 즉, 바울을 본받으라는 권면은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2~16절)
머리에 수건을 쓰는 문제 - 여자가 공예배시에 머리에 수건을 쓰던 전통적 관습에 대한 바울의 강력한 지시와 그 이유에 대한 설명 부분이다. 쉽게 생각하면 단순한 듯이 보이는 이 문제는 사실 근원적으로는 기독교의 여성관과 관련된 문제이고 직접적으로는 초대교회의 질서유지와 관련된 것이다. 바울 서신에서는 두 문제가 항시 연결되어 나오는바 본서 14:34, 35절과 딤전 2:9~15절 그리고 딤전 서론에 그 종합적 이해가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다만 여기서 우리는 이 남녀의 평등 문제 및 남녀의 질서상의 순서는 논쟁의 여지가 없는 하나님의 창조원리에 입각한 진리이나, 머리에 수건을 쓰는 풍습 자체는 위 진리에 대한 상징적 표식 및 초대교회 당시의 특수한 상황으로 질서 유지의 목적으로 생겨난 것이라는 점과 현대 개신 교회는 이를 채택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성경의 진리와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즉 현대 개신 교회는 사도 바울이 설명해 준 남녀관에 대한 진리는 인정하나 거기서 연유된 수건 덮는 풍습 문제는 문자적으로 이행할 필요는 없는 그 시대만의 방법론적 조치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2절]
너희가 모든 일에...칭찬하노라. 지시와 권면에 앞서 고린도 교인들이 그를 기억하고 그의 가르침과 교훈을 잘 지킨 데 대한 바울의 칭찬이다. 이것은 바울 서신의 영감성과 신적 권위를 증거하며, 꾸짖기 전에 먼저 칭찬할 바를 잊지 않는 바울의 세심한 배려를 잘 보여 준다.
(3~10절)
교회 내의 남녀 질서 - 이는 왜 남자는 머리에 수건을 쓰지 말아야 하고 여자는 꼭 써야 하는가에 대한 설명이다. 머리란 한 인격체의 권위의 상징으로 그 머리에 수건을 덮은 것은 당시에는 상급자에 대하여 자신의 머리를 가림으로써 자신이 상급자 밑에 있음을 보이는 행위였다. 그런데 3절의 비유가 보여 주듯이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고,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 여자의 머리는 남자이다. 물론 이는 존재와 직분상의 순서를 말하는 비유이다. 사실 그리스도는 남녀를 불문한 모든 사람의 머리이다. 이렇게 볼 때 여기 머리 비유는 매우 적절하다. 그리스도의 머리가 하나님이라는 말은 그리스도가 하나님보다 그 본질적 속성이 영등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직분의 순서상 서열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남자가 여자의 머리라는 말도 남자가 본질적으로 여자보다 우월하다는 뜻이 아니라 다만 그 직분의 순서가 여자보다 앞선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남자도 그리스도 아래 있다는 표로 머리에 수건을 쓰는 것이 마땅했다. 그러나 7절에서 보듯이 남자는 동시에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기도 하였으므로 하나님은 그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말아야 했다. 반대로 여자는 그가 남자에게 속했다는 표로 수건을 쓰는 것이 마땅했다.
[4~5절]
머리에 쓴 것. 당시 유대인은 남녀를 불문하고 성전, 회당 예배시에 머리에 '탈리트'(tallith)라는 수건을 썼는데 반하여 헬라인은 공식 집회 때 자유인을 제외한 종들만이 썼다. 따라서 바울은 유대인의 풍습보다는 헬라인의 풍습을 취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만 보더라도 수건 쓰는 문제 자체가 선악의 진리 문제가 아니라 상징적인 풍습의 문제임를 알 수 있다.
[6절]
깎거나 미는 것. 바울 당시 유대나 로마 사회에서 여인들의 머리를 깎는 것은 전쟁 포로인 경우(신 21:10~14), 간음한 여자인 경우(민 5:18), 여자 노예인 경우였다. 따라서 당시 삭발은 여자로서의 모든 미덕을 잃어버리는 것이며 최대의 수치였다.
(7~10절)
남녀간의 권위의 순서 문제 - 바울은 여자가 존재론적, 인격적으로 남자와 동등하되 다만 그 사역과 역할에 있어서 지켜야 할 질서를 지적한다.
[10절]
이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찌니라. '이러므로'는 본절이 8, 9절을 전제로 이제까지 논증한 것에 대한 결론임을 나타낸다. '천사'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창조 때에 일하였으며(욥 38:7) 죄인들의 회개와 개종을 기뻐하며(눅 15:7, 10), 성도들을 보호하기도 한다(마 18:10). 또한 천사들은 사람들을 섬겨서 성도들의 삶과 신앙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온전하게 실현되도록 한다. 그런데 본절에서 '천사들을 인하여'는 해석이 다양하다. ①그리스도인의 예배를 지켜 보게 하기 위해서 이교도가 보낸 스파이로 생각한다. ②교회의 예언자로 해석한다. ③가장 신실한 성도들을 의미한다고 본다. ④악한 천사로서(창 6:2) 예배 때 수건을 쓰지 않은 여자를 보고 색욕을 일으킨다고 본다. ⑤선한 천사로서, 예배 때 함께 참석해서 지켜보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런 해석들 가운데 가장 타당한 것은 마지막 견해이다. 이렇게 볼 때 본문은 선한 천사들이 예배를 지켜보기 때문에 창조 질서에 어긋나지 않도록 여자들은 머리에 수건을 써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권세 아래 있는 표'는 헬, '엑수시아'로서 본문에서 머리에 수건을 쓰는 것을 의미한다(Gro-sheide). 머리에 수건을 쓰는 것이 '엑수시아'가 되는 이유는 당시 헬라의 여자가 수건을 쓰지 않는 것은 자신을 매춘부로 취급하는 것으로 여자로서의 권위와 존엄성을 버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절은 여자가 자신의 머리에 이런 권세 있는 표식을 함으로, 창조 때에 함께 사역하고 성도들과 함께 현존하여 예배를 지켜보는 천사들에게 창조 질서에 벗어나지 않음을 보여 주며, 천사들을 예우(禮遇)함과 동시에 자신의 권위와 명예를 세울 것을 고린도 교인들에게 권면하는 것이다.

[11~12절]

바울은 남녀의 근원적인 평등을 분명히 함으로써 남녀의 권위 관계에 대한 자신의 논증에 오해의 소지를 없앤다. 즉 남녀 사이에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권위의 질서는 존재하지만 이것이 곧 근본적인 능력이나 인간 기본권의 차이는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남자와 여자는 주 안에서 근본적으로 동등하고 조화로운 삶을 위해 상호간에 서로 권위의 질서와 기능 분담을 지키며 의존하고 협조해야 하며 남녀 결합의 최종적인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다.

[13~15절]

바울은 수건을 써야 한다는 것을 인간의 본성(本性)이 말하고 있다고 제시한다. '본성'은 크게 두 가지로 해석된다. 본질에 대한 천성적인 감각과 인지를 말한다(Meyer). 그래서 남자는 본성적으로 긴 머리를 갖는 것을 부끄러운 일로 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여자의 본래적인 신체 구조를 암시한다(Godet). 두 가지 견해가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을 때 남자가 긴 머리를 하는 것을 본성적으로 부끄럽게 느낄 뿐만 아니라 신체 구조상 긴 머리는 여자에게 해당되는 것임을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가 긴 머리를 소유한다면 그것은 남자의 권위와 명예를 포기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긴 머리는 머리에 무엇을 쓰는 것과 동일시 되며, 그것은 하나님이 여자에게만 허락하신 권세이다. 여자가 긴머리를 갖는 것은 본성이 아름답다고 당연하게 생각하게 할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서 남자와 구별된다. 또한 긴 머리나 머리에 수건을 쓰는 것은 여자의 권위와 존엄성을 나타낸다.

[16절]

변론하려는...자. 직접적으로는 지금껏 말한 수건 쓰는 규례에 대한 반대자들을 가리킨다.

(17~34절)

성만찬에 대하여 고린도 교회 안에 발생한 성찬식의 문제점에 대한 교훈이다. 초대교회 당시 주의 만찬은 예배 의식의 일부로 그들의 신앙 생활에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이러한 주의 만찬이 고린도 교인들의 비신앙적 행위 때문에 분쟁과 파당을 만드는 해로운 요소로 작용하였다. 이에 바울은 주의 만찬에 대한 그들의 잘못된 태도를 지적하고 만찬의 참된 정신을 교훈한 후 그릇 행하는 자들에게 경고를 주고 있다<눅 22:19, 성만찬과 성찬식>.

[19절]

편당(헬, 하이레세이스). '이단' 또는 '분파'의 뜻이 있으나 여기서는 애찬으로 말미암아 고린도 교회 내에 인위적으로 생긴 분쟁을 의미한다. 너희 중에 옳다...나타나게 되리라. 풍자적 어법으로, 교회 안에는 어느 정도 분쟁이 있을 수 있으며 이러한 분쟁을 통해 참과 거짓이 드러나게 된다는 의미이다(요일 2:19).

[20절]

너희가 함께...먹을 수 없으니. 이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주의 만찬을 이기적인 동기와 옳지 않은 방법으로 행함으로써 그 영적 의미를 상실케 했기 때문에 그들이 행하는 주의 만찬은 전혀 무가치한 것이며 할 필요조차도 없음을 지적한 것이다.

[21~22절]

고린도 교인들의 주의 만찬에 대한 잘못된 태도가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즉 고린도 교인들 중 지위나 부, 권세가 있는 자들은 스스로 울타리를 두르고 가난한 자들을 교회에서 소외시키며 자기 만족과 안일에 빠져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분쟁의 근본적인 동기는 인간 속에 내재한 이기심이며 명목이 아무리 훌륭할지라도 그 동기가 불순한 교회의 모든 행사는 출발부터 잘못된 것이며 나누어 주는 사랑의 실천이 없는 교회는 참 교회가 아님을 알 수 있다.

[23~26절]

성만찬의 의미 - 본문에서 바울은 주의 만찬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서술한다.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은 구원의 역사를 기념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것이며(마 26:26~28),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인 전도의 사명을 다시 한번 깨우치는 것이다(마 28:19, 20; 행 1:8). 그러므로 성도들은 주의 만찬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랑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와 살아 있는 친교 관계에 들어가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고난의 삶을 살기로 결단하며 구체적으로 주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하고 부활의 소망 가운데 거하게 된다<눅 22:19, 성만찬과 성찬식>.

[27절]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 불순한 마음이나 죄를 지은 상태로 주의 만찬에 참여하여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자를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는 성도들이 성찬에 참여할 때는 죄 사함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확신(고후 13:5),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에 대한 진정한 감사, 전도의 결의 등의 조건을 갖추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내적 신앙의 요소가 결여된 성찬은 십자가의 영광을 가리는 죄이며(히 2:9, 10), 자기 죄를 먹고 마시는 것에 불과하다.

[28절]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주의 만찬에 참여하는 자가 자신의 마음 자세와 겉으로 드러난 행동, 주의 만찬을 행하는 참 목적, 그것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했는가를 스스로 시험해 보라는 뜻이다.

[30절]

잠자는 자. 죽은 자를 가리킨다(행 7:60; 벧후 3:4). 여기서 약함과 질병, 죽음은 모두 성찬에 그릇되게 참여하여 죄를 범한 자들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심판이다. 여기서 우리는 성도들이 받는 심판은 지옥에 들어가는 영원한 형벌이 아니라 죄에 대한 이 세상에서의 보응 또는 징계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2절]

주께 징계를 받는 것. 신자들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을 가리킨다. 본절은 주의 징계는 성도들의 영원한 멸망을 방지하고 회개로 인도하는 사랑의 채찍이며, 참된 헌신이나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점을 교훈해 준다.

[33절]

서로 기다리라. 부유층에 대한 권면이다. 즉 그들의 이기적인 욕망만 채우지 말고 가난한 성도들과 함께 좋은 음식을 나눔으로써 사랑으로 하나 되며 주의 만찬의 의미를 살리라는 뜻이다.

 

# 해설

머리에 수건 쓰는 문제 (2~16절)

여기서부터(14:40절까지) 바울은 교회 예배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본문은 예배시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쓰는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복음 증거와 더불어 여성들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엄격한 가부장제에 익숙해 있던 유대인들로부터 비난을 사거나 심지어 교회 내의 질서를 혼잡하게 하는 사례도 생겨났다. 이러한 제반 상황을 염두에 두고서 바울은 여자가 존재론적, 인격적으로 남자와 동등하되 다만 그 사역과 역할에 있어서 지켜져야 할 질서를 지적한다(14:34, 35). 한편 머리에 수건을 쓰는 풍습 자체는 초대교회 당시의 특수한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지 시대를 초월하여 엄수되어야 할 사항은 아니다.

성만찬에 관하여 (17~34절)

본문은 내용상 애찬(love feast)을 죄악되게 행함으로 성만찬을 우롱하는 문제(17~22절), 성만찬의 의의(23~26절), 성만찬을 그릇되게 행하는 자에 대한 경고(27~34절)의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성만찬은 예수의 구속 사역으로 인류가 죄와 영적 사망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막 14:22~26)하며 장차 성도들이 하늘나라에서 맛볼 천국 잔치를 상징하는 것인바, 정한 규례에 따라 성결히 집행되어야 한다.

 

# 핵심

1~16절

공중 예배와 관련해, 당시 관습대로 여자가 머리에 써야 할 베일에 관한 교훈이다.

여성의 베일 (5절)

고대 지중해 연안의 여러 지역에서는 여성의 머리털이 남성의 성욕을 자극한다고 간주했다. 때문에 정숙한 여인들은 머리에 베일을 쓰고 다녔다. 그러나 자신의 헤어스타일을 자랑하고 싶어한 상류층 여성들은 이 관습을 따르지 않았다. 반면 유대 여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표시로 공중 예배 때, 머리에 수건을 썼다. 바울은 이런 관습에 입각해 고린도 교회의 여신도들도 예배때, 베일로 머리를 가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교훈했다. 그러면서 그것이 남녀를 지으신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도 부합됨을 강조했다(11:3).

 

# 묵상

여자의 머리를 가리는 규례 (3~16절)

여자의 머리를 가리는 규례는 당시의 문화적인 특징에 의하여 정해진 것으로써 모든 교회를 향한 절대적인 구속력은 없습니다. 각 나라마다 소유하고 있는 특별한 문화의 형태는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거나 배치되지 않는 한 결코 정죄할 수 없습니다. 성경의 가르침과 이러한 문화의 차이를 이해해야만, 땅 끝까지 이르러 내 복음을 전하라는(행 1:8; 막 16:15) 전도의 사명을 바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애찬 모임 책망 (17~22절)

바울은 무질서한 애찬의 진행으로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였기에 고린도 교회를 책망했습니다. 초대 교회의 다양한 계층적 구조는 지금도 교회 안에 존재하는 한 특징입니다. 이러한 계층적 구조는 신앙과 사랑으로 화합하지 못할 때에 교회의 부조화와 갈등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성만찬 (23~32절)

성만찬은, 유월절 전날 만찬을 통해 예수님께서 친히 주신 성례로서, 행동하는 설교의 형태를 가집니다. 성만찬은 교회의 2,000년 역사를 통하여 끊임없이 거행되어 왔습니다. 이는 주님의 구속 사역을 기념하고, 재림의 소망을 더욱 견고히 하는 것으로 말세의 교회에서 더욱 강조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만찬에 참여하는 성도는 먼저 자기를 살피고 분변한 후에 믿음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자신을 살피지 않고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또한 성만찬은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친히 임재하시는 귀중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이 의식은 단순한 교회의 의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망하는 구속 사건의 재연으로써, 이미 주신 위대한 구원을 재확인하는 놀라운 은혜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만일 합당치 않게 성만찬에 참여하면 주님의 징계를 받아 초대 교회처럼 교회 안에 병든 자와 죽는 자들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때로 징계를 통해 우리들에게 우리의 무지와 죄를 가르쳐 주십니다. 따라서 환난이나 어려움이 닥쳤을 때 겸손히 자신을 돌아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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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1~33절)
종합적인 교훈 - 고린도 교인들에게 우상의 제물에 관한 일반적인 원칙을 서술하고 자신의 삶을 모범으로 제시한 후 결론적으로 전체적인 교훈을 주고 있다. 특히 본장에 나오는 경고는 믿음이 약한 자들보다도 강한 자들을 향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지식을 남용하여 우상의 제물을 먹음으로써 은연중에 이방인들의 우상 숭배적인 종교 의식에 동참하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1~13절)
방종에 대한 경고 - 전장에서 그스도인의 절제와 정진을 격려하던 바울은 이제 모세 당시 이스라엘 민족의 죄악과 그로 인한 실패를 실례로 들어 고린도 교인들에게 경고를 주고 있다. 특히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십자가에 대한 믿음의 절대성을 빙자하여 우상의 제물에 무분별하게 참여하는 지식 있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비록 이스라엘 민족이 축복의 언약을 받고 기적적으로 애굽에서 구출되었지만 불순종과 죄악으로 인해 광야에서 비참하게 죽어간 사실을 상기시킴으로써 죄악에서 돌아설 것을 간곡하게 권면하고 있다.
[1절]
구름 아래 있고.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향해 광야를 지날 때 하나님께서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으로 보호하신 것(출 13:21, 22)을 가리킨다.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애굽 군대의 맹추격을 받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기적적인 은혜로 홍해를 건넌 사실(출 14:21~25)을 가리킨다.
[2절]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홍해의 이적과 이스라엘을 인도하던 광야의 구름 기둥은 신약 시대 물 세례의 모형이다. 이 사상은 신.구약성경을 통해 일관된 맥을 형성하고 있다. 물은 구약에서 죄와 더러움을 씻는 정결 의식의 수단이며(레 14:8),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한다(출 40:34). 따라서 홍해의 이적과 구름 기둥 사건을 통해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해방되어 가나안을 향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음으로써 죄에서 해방되어 구원의 소망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는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행 19:3, 물 세례에 대하여>.
[3~4절]
신령한 식물은 광야 생활 때 이스라엘 백성이 먹었던 만나를(출 16:12~18), 신령한 음료는 이스라엘 백성이 목마를 때 반석에서 솟아난 물을 가리킨다(출 17:1~6).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먹었던 식물과 음료는 참 떡과 참된 음료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각각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의미한다(요 6:30~59).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선재성(先在性)을 볼 수 있다.
[5절]
본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특별하신 축복과 구원의 은혜를 받았으나 죄악과 패역으로 인해 그들 중 대다수는 광야에서 죽고 여호수아와 갈렙만 가나안에 들어간 것을 가리킨다(민 26:64, 65).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과 축복은 성도들에게 성결한 삶과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순종을 요구하며, 믿음에 의한 구원도 중요하지만 순종의 삶과 지속적인 헌신을 통해 그리스도의 신실한 종으로 끝까지 충성하는 것 역시 중요함을 깨달을 수 있다.
[6절]
우리의 거울이 되어. 이러한 구약의 사건들은 단순히 그 시대의 사건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악을 행하는 모든 자들에게 주어지는 심판의 경고인 동시에 예언이다.
[7~10절]
패역한 이스라엘 - 이스라엘의 죄악과 패역상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는데 그것은 우상 숭배(출 32:4), 이방 여인과의 간음(민 25:1), 하나님을 시험함(출 17:2), 원망(민 14:2) 등 네 가지이다. 바울은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을 지적함으로써 고린도 교회에서 발생한 동일한 범죄를 책망하고 회개할 것을 촉구한다.
[11절]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한 죄악과 그로 인한 실패가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한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서 동일하게 발생할 수 있는 범죄인 동시에 심판임을 암시한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한 역사적 사건은 오늘날의 모든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임을 밝혀 준다. 여기서 우리는 신.구약의 긴밀한 연관성과 죄악은 계속적으로 반복되며 그 정도는 점차 심화된다는 점, 이 세상에 새로운 것은 결코 없다는 진리를 깨닫게 된다(전 1:9).
[12절]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자유를 남용하여 우상의 제물에 함부로 참여한 고린도 교회의 믿음이 강한 자들의 지적 교만에 대한 경고이다. 여기서 바울은 교만은 끝내 버림을 당한다는 것과 참된 믿음은 자랑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는 것이며, 사람들에 대해서도 스스로 낮아져서 섬기는 자로 봉사하는 것임을 교훈해 준다.
[13절]
본절은 성도들이 당하는 일반적인 시험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성도들의 시험은 하나님의 섭리로서 그들의 신앙을 연단하고 훈련시켜 더 큰 믿음을 낳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시험을 당할 때 더욱 용기를 내어 이를 극복해 나가야 한다. 한편 본절에 언급된 시험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시험은 생(生)의 기본 요소로 반드시 닥쳐오며, 우리가 당하는 시험은 특별한 것이 아니며, 시험에는 반드시 피할 길이 있다<창 22:1, 시험이란?>.
(14~22절)

우상 숭배에 대한 바울의 경고 - 당시 고린도 교인들 중에는 기독교로 개종한 후에도 이방 신전에 출입하며 그 식탁에 동참하는 자들이 있었다. 이에 바울은 그리스도의 성만찬을 비유로 들어 이방 신들의 제사 잔치에 참여하는 것은 곧 우상 숭배 행위임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14절]

우상 숭배하는 일. 여기서는 이방 신들에게 직접 경배하는 것보다는 이방 신전에서 베풀어지는 제사 의식에 참여하거나 그 식탁에 함께 앉아 먹는 행위를 가리킨다.

[15절]

스스로 판단하라. 신앙의 세 요소, 즉 지(知), 정(情), 의(義) 중 이성적 지각을 사용하여 사리를 분별하고 올바른 길을 선택하라는 뜻이다.

[16~17절]

축복의 잔...떼는 떡. 직접적으로는 성찬식에서 마시는 잔과 떼는 음식을 가리킨다. 성찬식의 잔과 떡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상징하며, 잔을 마시고 떡을 떼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와 살에 참여하는 행위로서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일치되는 것을 의미한다(요 6:56).

[18~19절]

본문은 구약 시대 유대인의 제사 의식과 이방인의 제사를 비교하고 있다. 즉 이스라엘의 경우 제단에서 제사를 지내거나 제물의 일부를 먹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예배 의식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는 반면,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나 우상 그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우상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보여 주며, 참된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 밖에 없음을 명백하게 선포하는 것이다.

[22절]

본절에서 바울은 반어법을 사용하여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의 무능과 연약성을 고발한다. 이는 유약한 인간이 자신의 본 모습을 깨닫지 못하고 강하신 분의 뜻을 거역하며, 우상 숭배와 귀신과의 교제를 일삼음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시킨다면 그 진노를 피할 길이 없음을 강조한 것이다(겔 6:12, 13).

(23~33절)

그리스도인의 자유 - 앞에서 우상 숭배에 대해 경고한 바울은 본문에서 다시 우상의 제물 문제에 대해 결론적인 교훈을 주고 있다. 여기서 바울은 타인에게 덕을 끼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절제해야 할 것과 성도들은 자기의 유익만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동료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 노력해야 하며,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해야 한다는 대원칙을 제시한다.

[24절]

남의 유익을 구하라. 성도들의 참된 자유와 사랑의 실천 원리가 나타나 있다. 타인의 유익을 구하는 삶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안에서 가능하며 모든 이기주의의 야욕을 배척하는 것으로서, 성도들에게 주어진 구원을 완성하는 길이다.

[25절]

시장에서 파는 것. 당시 고린도 지역에는 이방 신전들이 많았으며 그곳에서 제사를 지낸 후 제물들을 시장에 내다 팔았다. 따라서 시장에서 판매되는 대부분의 고기는 우상의 제물이었다. 이것을 묻지 말고 그냥 먹으라는 바울의 권면을 통해 우리는 우상이나 우상의 제물은 본래 아무것도 아니며 실제 문제가 되는 것은 미혹된 사람의 마음임을 알 수 있다(마 15:17~20).

[27~28절]

불신자들의 음식 초청에 대한 성도들의 태도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참된 목표는 우상의 제물을 먹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마 6:33).

[29절]

어찌하여 내 자유가...판단을 받으리요. 이것은 "내가 감사함으로 먹는 것이 남의 양심에 의해 판단을 받아서야 되겠느냐', 즉 나의 자유가 남에게 거리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31~33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본문은 8:1절부터 시작된 우상의 제물에 관한 포괄적인 결론이다. 즉 형제의 유익과 건덕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것과 일치하며, 성도들이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데 기여해야 한다. 이것은 우상의 제물 문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든 영역에 미치는 행동 강령이다.

 

# 해설

패역한 이스라엘 (1~13절)

출애굽의 과정에서 빚어졌던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출 32:4), 간음(민 25:1), 하나님을 시험함(출 17:2), 원망(민 14:2) 등을 구체적으로 지적함으로써 고린도 교회에서 발생한 동일한 죄악을 책망하고 그 죄에서 돌아설 것을 권고한다. 인간의 타락한 본성은 늘 하나님을 거역하고 죄악 가운데 나아가려고 하므로, 한순간이라도 영적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하겠다(벧전 1:13).

우상 숭배에 대한 경고 (14~22절)

당시 고린도에는 최소한 열두 개 이상의 이방 신전이 있었던바, 단순히 우상 제물을 먹는 행위를 넘어서 이방신의 잔치에 참예하는 자들이 있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주의 만찬의 의의를 밝힘과 아울러 주의 만찬과 이방인의 제사를 대조하여, 우상 숭배의 허탄함과 거기에 빠진 자들의 가증스러움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 (10:23~11:1절)

본문은 8장 후반부(7~13절)의 내용을 보다 심도있게 다루고 있다. 즉 우상 제물을 먹는 문제에 있어서 진리를 앎으로 누리게 되는 많은 자유(요 8:32)가 동료 그리스도인의 신앙 증진을 위해 별반 도움이 안 될 경우에는 자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자유를 타인의 신앙,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엄정히 조절, 제한할 수 있게 될 때 비로소 성도는 성숙된 기쁨을 맛볼 것이다.

 

# 핵심

1~13절

절제된 삶을 살지 못한 탓에 죄악의 유혹에 넘어간 과거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는 고린도 교인들이 타산지석으로 삼아야할 산 교훈이었다.

 

# 묵상

구약의 조상들의 멸망 (5~10절)

구약 조상들은 하나님보다 죄악을 더 기뻐하고 즐겼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결국 멸망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확신한다고 하지만 그 은혜의 사실이 죄악된 방종한 생활을 합리화하는 수단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확신한다는 것은 죄의 용서를 확신할 뿐만 아니라, 죄의 세력을 이기고 승리한다는 성화의 의미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 (11~12절)

이스라엘의 역사는 말세를 만난 우리에게 근신하여 삼갈 줄 아는 신앙의 필요성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이라는 판단은 궁극적으로 열매를 통하여 증거됩니다. 선한 생각과 강한 확신, 열렬한 활동 등은 구원의 열매로써 생활이 변화되지 않는 한 도리어 멸망의 증거들이 되고 맙니다. 우리들의 믿음 생활은 말씀과 일치하여 풍성한 믿음의 열매를 맺을 때에(요 15:8), 진정한 가치를 갖게 됩니다.

하나님의 시험 (13절)

하나님께서는 감당할 시험을 주시고, 때를 따라 피할 길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험은 우리의 의지가 죄악에 걸려 쓰러질 때에 당하는 어려움과 분명하게 구별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험은 우리의 연약함을 강하게 하고, 우리의 교만함을 겸손케 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사모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행동 지침 (23~24절)

자기의 유익보다 타인의 유익을 위하여 행동하는 것이 건전한 그리스도의 삶입니다. 성도의 덕행은 이기적인 자아와 권리를 포기하고, 그리스도의 본을 받아 남을 섬기는 희생과 봉사에 있습니다.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를 깨달은 영혼들은 기꺼이 그리스도의 남은 십자가를 겸손과 온유로써 짊어져야 합니다(골 1:24).

성도의 목적 (31절)

성도는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선의 근원으로서, 마땅히 영광을 받으셔야 하는 창조주요, 구속주이십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는 순수한 의도로써 범사에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정진할 때에, 우리들은 그 목적한 바를 달성할 수 있습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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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1~27절)
자유의 모본 - 본장은 바울의 사도직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에 관해 개괄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8:13절에서 바울이 선포한 그리스도인의 실천 원리에 대해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가면서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유와 권리를 절제하고, 복음을 위하여 종의 자세를 취하는 자신의 삶을 강조함으로써 우상의 제물을 먹을 자유가 있노라고 주장하는 일부 지식 있는 고린도 교인에게, 그리스도인의 참된 자유에 대해 교훈해 주고 있다. 한편 본장은 바울 자신의 삶이 간증적으로 기록되어 바울의 역사적 생애를 연구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며 신앙의 참된 가치는 말이나 사상의 위대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인 삶 속에 있다는 것을 웅변적으로 증거한다.
(1~14절)
사도의 권리 -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적 권리를 분명하게 강조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의 권리를 보장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역의 신적 기원과 참된 봉사, 겸손과 기독교적 사랑의 정신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살후 서론, 서신서의 인사말과 사도권 주장>.
[1절]
본절에서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를 뵙고 그리스도로부터 직접적인 계시 명령을 받은 점과 자신을 통해 복음의 능력이 나타난 점을 들어 자신의 사도권을 변호하고 있다. 여기서 복음의 능력은 때로 기적을 의미하기도 하지만(행 19:12), 본질적으로는 사도들의 복음 전도를 통해 나타나는 회개의 역사와 삶의 변화를 의미한다(행 2:37; 행 16:34).
[2절]
당시 고린도 교인들 중에는 바울의 사도권을 의문시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자들이 있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그러한 문제를 제기하는 장본인들이 바로 자신의 전도의 열매이며 그의 사도 됨을 증명하는 증거임을 역설적으로 강조함으로써 그의 사도권을 논증한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설교로 맺은 열매이기 때문에 그들이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하는 것은 곧 그들의 믿음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 된다<살후 서론, 서신서의 인사말과 사도권의 주장>.
[4절]
먹고 마시는 권(權). 사역자들이 말씀을 전파하고 섬기는 교회로부터 생활의 기본권을 보장 받을 권리를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로부터 보조를 받을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절하고 자급 선교를 수행하는 바울의 생애를 통해 참된 봉사와 희생 정신을 배울 수 있다.
[5절]
주의 형제들. 예수 그리스도의 친형제들, 즉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 태어난 형제들을 의미한다(행 1:14). 자매된 아내. 사도들의 복음 전파 사역에 봉사한 부유한 여인들이라는 견해도 있으나 여기서는 실제 아내를 가리킨다. 한편 이것은 사도들 중 많은 사람들이 결혼했다는 점(막 1:30), 사도들의 전도 여행시는 부인들도 같이 다녔다는 점, 사도들 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족까지도 교회가 부양해야 할 책임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6절]
바울은 자신과 바나바가 비록 자급 전도를 하지만 그들도 다른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교회의 녹(祿)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천명한다. 바울은 전도 기간 동안 장막을 제작하는 육체적인 노동을 통해 자신의 생계 문제를 해결하였다(행 18:3).
[7절]
누가 자비량하고. 바울은 본문에서 군사, 농부, 양 치는 목자의 세 가지 비유를 들어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교회로부터 생계를 보장 받는 것이 정당함을 증거한다.
[8~10절]
복음 사역자의 생활권 보장 - 바울은 여기서 모세의 율법(신 25:4)과 주님의 말씀(마 10:10)을 예로 들어 복음 사역자의 생활권 보장에 대한 자신의 주장이 사견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거한다. 한편 복음 사역자들의 이러한 권리는 단순히 권리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전파, 교인들에 대한 헌신적인 봉사, 성도들의 영적 생활에 대한 책임성이 수반되는 것이다.
[11절]
신령한 것.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의미한다. 육신의 것. 생계 유지의 수단인 물질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의 영적인 일에 참여한 자는 그 대가로 자신의 생활에 필요한 물질적 지원을 교회로부터 받아야 한다는 원칙을 반어법적 표현으로 강조한 것이다.
[12절]
다른 이들도...우리일까보냐. 이 말은 '만약 고린도 교인들이 다른 사역자들에게 물질적인 필요를 공급해 주었다면 고린도 교회에 최초로 복음의 씨앗을 뿌린 우리들 또한 물질적인 공급을 받는 것이 당연하지 않는가?'란 뜻이다. 범사에 참는 것은...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바울이 자신의 물질적 권리를 부인한 내적 이유가 나타나 있다. 즉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함으로 말미암아 복음 전도가 방해를 받기보다는 복음을 위해 그 권리를 행사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13~14절]
레위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십일조를 받는 것(민 18:21)과 제사장들이 성전에 바쳐진 제물로 생계를 유지하는(민 18:8) 것을 실례로 들어 신약의 복음 사역자들에 대해 교회가 물질을 공급할 의무가 있음을 말한다.
(15~18절)

복음 전파자의 자세 - 바울이 사역자로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한 이유 및 목적, 복음에 대한 그의 자세를 분명하게 표명하고 있는 본문은 전도의 참된 정신과 복음은 자체 안에 역사하는 힘이 있어 중생한 양심들이 복음을 증거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도록 만든다는 사실을 잘 보여 준다.

[15절]

차라리 죽을찌언정. 바울이 교회로부터 생활을 보장 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 것은 보수를 달라는 의미가 결코 아님을 강렬한 어조로 천명하고 있다. 오히려 이것은 교회의 보조를 받지 않고 하는 자신의 자급 전도 자세를 끝까지 고수하겠다는 그의 결의를 표명한 것이다.

[16절]

본절에서 바울은 십자가 진리는 자랑할 만한 것이지만 자신의 복음 사역 자체는 임의로 한 것이 아니라 맡겨진 사명이며, 그 사명을 유기할 때는 화(禍)를 당하기 때문에 자랑할 것이 없다고 역설한다. 이것은 그의 사도로서의 겸손과 복음 전도자가 갖추어야 할 참된 내적 자세를 교훈해 준다. 또한 바울의 이러한 표현은 책망이 두려워 어쩔 수 없이 복음을 전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복음 전파 임무의 중요성에 대한 깨달음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바울의 감격적인 경외심이 표출된 것이다.

[17절]

만약 자유로 복음을 전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상이 있다. 그러나 바울은 그의 의지와는 상광없이 그리스도로부터 강압적으로 복음 전도의 사명을 부여 받았으므로 거기에 대한 보상이나 자랑거리가 있을 수 없다.

[18절]

내 상이 무엇이냐. 바울이 받을 상급은 복음을 전할 때 교회로부터 생계비 지원을 받지 않고 자급 전도한 그 자체이다. 그는 사랑의 정신과 복음에 대한 뜨거운 열정으로 말미암아 그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전적으로 봉사하는 자세를 견지했다. 바울은 이를 통해 그의 사역의 순수성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증명되기를 원했다.

[19절]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바울은 완전한 자유인으로 당시 로마의 시민권까지 가진 당당한 신분(행 16:37)일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모든 죄와 사망과 속박의 굴레로부터 자유한 자였으나, 스스로 이 권리를 포기하고 모든 사람의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구원시키고자 하는 뜨거운 중심에서 나온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향한 바울의 불붙는 헌신과 인간에 대한 형용할 수 없는 사랑, 진리에 대한 전적인 순종의 태도를 배울 수 있다.

(20~23절)

바울의 전도 방법 - 바울은 유대인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유대인처럼, 이방인을 구원하기 위해선 율법 없는 이방인처럼, 연약한 신자들에게는 믿음이 약한 자처럼 행동하였다. 이러한 바울의 전도 방법은 우리에게 전도는 일방적으로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외치는 것이거나 어떤 일정한 형식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우선 인간적인 이해와 현실적인 욕구에서 출발되어야 하며 그 무엇보다도 전도 대상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우선되어야 함을 교훈해 준다.

(24~27절)

열정적인 신앙 - 본문에서 바울은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절제해야 할 것과 구원의 상급을 위해 정진해야 할 것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이를 위해 바울은 자신의 생애와 운동 경기, 특히 달리기와 권투 경기를 실례로 든다. 당시 고린도 시는 2년마다 이스미안 운동 경기(lsthmian athletic games)를 개최하였다.

[24절]

상 얻는 자는 하나. 바울이 여기서 강조한 것은 상을 얻기 위해 쏟아야 할 최선과 절제이다.

[26~27절]

본문에서 바울은 권투 선수의 비유를 들어 성도들의 삶이 목표 없는 자처럼 되어서는 안 되며 타인의 구원과 함께 자신의 상급을 위해 하나님 앞에 스스로를 쳐서 복종시키는 삶, 곧 절제와 극기의 생활을 해야 할 것을 특별히 부각시킨다. 한편 27절의 내용은 구원의 여부에 관심을 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들의 상급을 위한 실천을 강조한 것이다.

 

# 해설

사도의 권리 (1~14절)

여기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의 기원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있음을 분명하게 밝힌다. 이는 바울의 인간적으로 빈약한 외모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한 과거 행적을 빌미 삼아 일부 고린도 교인들이 그의 사도권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자유와 특권을 향유하고 있었으나 그것을 절제하고 형제의 유익과 복음 전파를 위해 헌신적 자세를 취하는 바울의 삶 속에서 하늘의 권세를 버리고 종의 옷을 입으신 예수의 초상(肖像)을 엿볼 수 있다(빌 2:7).

복음 전파의 자세 (15~18절)

복음은 너무도 소중한 것이라 값으로 따질 수 없기에, 바울은 행여나 대두할지라도 모를 이권 개입에 관한 시비를 추호라도 없도록 하기 위해 몸소 자비를 벌어 쓰기까지 했다(행 18:3). 그에게 있어 복음 증거는 어떤 대가를 바라서 혹은 직업 의식에서 하는 일이 아니라 생명을 걸고라도 반드시 수행해야만 될 사명이었다(빌 2:17).

바울의 복종 (19~23절)

전도나 복음 전파는 일방적으로 한쪽의 주장을 강요하는 형식이어서는 안 되며, 도리어 상대방의 현실과 심령 상태에 대한 면밀한 배려와 헌신적인 사랑으로써만이 가능하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내 자신을 타인과 동일시하는 작업이 전제되어야 하는바, 바울은 본문에서 그 전형을 보여 주고 있다. 예수께서도 당신의 권위를 버리시고 세리와 창기들과 벗함으로써 복음을 전파하셨다(마 9:10).

열정적 신앙 (24~27절)

본문에서 바울은 당시 고린도 시에서 흔히 목도할 수 있었던 권투 경기와 육상 경기를 실례로 들어서 온 힘과 정성을 기울여 복음 사역을 위해 정진할 것과 스스로 쳐서 복종시키는 삶, 곧 극기와 절제의 삶을 살 것을 당부한다.

 

# 핵심

1~14절

바울 자신이 사도지만 어떻게 처신하였는지에 관한 고백이다. 이는 성도가 교회 전체의 덕을 위해 절제해야 함을 가르치기 위함이다.

바나바 (6절)

구브로 출신의 레위인으로서 본명은 요셉이다(행 4:36). 일찍부터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한 그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구제에 힘썼다. 회심한 바울을 그 교회에 소개하기도 한 그는 이후 바울과 함께 안디옥 교회에서 사역했다. 그리고 바울의 1차 전도 여행에 동행했으며, 예루살렘 총회의 경의 사항을 이방 교회에 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2차 전도 여행 때에는 마가 요한의 동행 여부로 바울과 의견이 대립되어 제각기 전도 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바울은 여전히 그를 자신의 동역자로 여기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갈 2:1, 9).

면류관 (25절)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경기로 올림픽, 이스트미아, 피티아, 네메아가 있었다. 이 중 가장 성대한 것이 4년마다 개최되던 올림픽이다. 이 경기에는 순수한 헬라인으로서 적어도 10개월 동안 훈련한 사람만이 참여할 수 있었다. 경기 종목은 달리기, 권투, 레슬링, 전차 경주 등이었다. 경기에서 승리한 사람에게는 면류관이나 화관이 수여되었는데 이 때 모든 관중이 일어서서 승리를 축하해 주었다. 면류관은 왕관을 본뜬 것이며, 화관은 올리브 잎으로 만든 것으로서 둘 다 큰 영광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 묵상

바울의 자기 소개 (1~7절)

고린도 교회가 바울이 스스로의 권리들을 포기하면서까지 선교한 열심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바울은 부득불 자기를 소개합니다. 주님의 일꾼들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구하는 자들입니다(고전 10:24).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자신의 개인적인 권리를 포기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겪으시고 얻으신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인격으로 성장해 가도록 인도함은 바울의 힘이요 능력입니다.

수고하는 일꾼들 (9절)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는 말은 수고하는 일꾼들에게 마땅한 대우를 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의미입니다. 교회에서 수고하는 하나님의 일꾼들이 필요한 생활비를 교회로부터 얻는 것은 성경적인 가르침입니다(갈 6:6). 그러나 하나님의 일꾼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복음 선포를 위하여 때때로 그러한 권리를 스스로 포기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12절).

복음을 전파하는 바울의 태도 (16~19절)

바울은 하나님의 일을 맡고서, 자기를 부인하며 사람들을 얻는 데 모든 수고를 다하는 열정적인 사명감과 책임감을 가지고 일했습니다. 바울에게 사역을 맡기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바울의 사역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으로 수행되었습니다(행 24:15, 16). 영혼 구원의 사역에서 우리가 전적으로 헌신되지 못하는 주요 원인은 바로 이러한 사명감의 결여에서 비롯됩니다.

바울이 얻은 축복 (18절)

바울은 복음을 값 없이 전하고, 자신의 권리를 다 쓰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성도들의 실제적인 상급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썩지 않을 영광의 면류관입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그 대가로 세상의 것을 추구하거나 자기의 권리를 요구한다면, 그는 전도자로서의 진정한 임무와 가치를 망각한 사람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입니다(고전 9:14).

영적 전투의 승리자들의 특징 (25~27절)

영적 전투의 승리자들은 모든 일에 절제하며 썩지 않을 면류관을 얻고자 정진합니다. 영적 전투에서의 승리는 자기 부정과 십자가의 고난을 감내하는 생활 정도에 따라 좌우됩니다(눅 9:23). 이는 자기 자신의 의지를 꺾어서 주님께 철저히 복종시키는 것으로써, 분명한 구원의 목표를 붙잡아야만 끝까지 인내할 수 있습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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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8:1~10:33절)
신앙 안에서의 자유함 - 고린도 교인들의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우상의 제물과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교훈이 서술되어 있다. 당시 고린도 시는 성적 타락과 더불어 신전을 중심으로 하는 우상 숭배가 극히 성행했기 때문에, 고린도 교인들 사이에는 우상에게 바쳐졌던 제물을 먹는 것이 양심의 문제로 크게 대두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에 수반된 그리스도인의 자유 문제도 거론되기 시작했다. 여기서 바울은 우상 제물의 문제는 율법의 차원이 아닌 믿음이 연약한 형제에 대한 사랑의 차원에서 해결될 수 있으며, 그리스도인의 자유 또한 형제애가 그 동기가 될 때 참된 가치를 발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1~13절)
우상 제물에 대한 태도 - 본장은 우상의 제물에 대한 내용의 서론 부분으로 지식에 대한 사랑의 우월성과 그리스도인의 참된 자유는 자신의 유익만을 추구하는 편협한 것이 아니라 형제들에게 덕을 끼치는 것이라는 근본적인 원칙을 밝히고 있다.
(1~3절)
인간의 교만한 지식과 사랑 - 본문은 특히 사랑의 건덕(建德)과 지식의 교만성, 사랑 실천의 최고 가치성을 강조한다. 이것은 참된 지식은 자신을 드러내거나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는 것이며, 사랑의 실천으로 인도하는 것임을 교훈해 준다.
[1절]
우상의 제물. 본장의 핵심 주제로 문자적으로는 우상에게 바쳐졌던 제물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특히 신전에 제물로 바쳤다가 다시 시장에 내다 판 고기를 가리킨다(행 15:29).
[4절]
우상은...아무도 아니며. 우상의 본질을 밝힌 것이다<왕상 14:23, 우상>. 즉 우상은 인격적 실체도 아니며 아무런 능력도 없는 허망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우상의 제물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는 뜻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상 숭배 행위의 어리석음과 참된 신앙의 대상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음을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다(사 41:24; 렘 10:14).
[5절]
많은 신과 많은 주. 이것은 바울 당시 헬라나 로마 신화에 언급되어 있던 이방 신들로서 이방인들의 경배의 대상이 된 우상들을 풍자적으로 비유한 것이다. 본절은 이러한 풍자를 통해 이방 신들이 비실재적인 존재이며 피조물로서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분명하게 지적한다<신 4:23, 우상의 원어적 개념>.
[6절]
한 하나님 곧 아버지.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자로서의 속성과 유일성이 강조되어 전절의 이방 신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보여 준다. 특히'아버지'라는 표현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 통치권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들에 대한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사랑을 상징한다.
[7절]
이 지식은 창조자이신 하나님께 대한 바른 신관과, 우상은 비인격적 존재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깨달음을 의미한다. 이 지식이 있으면 우상의 제물은 실상 아무런 문제도 아니나, 고린도 교인들 중에는 미신적인 생각을 가진 채 우상의 제물을 먹고 그로 인해 양심의 가책을 받아 급기야는 신앙의 상처를 입는 경우가 허다했다.
[8절]
식물은 우리를...없으리라. 이것은 식물의 무해성과 식물 자체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신앙에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않음을 보여 주며 제물을 먹는 행위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위한 필수적인 요소라고 하는 지식있는 고린도 교인의 주장은 근거 없는 것임을 드러내 준다.
(9~12절)
사랑의 건덕 - 본문은 믿음이 강한 자들이 약한 자들에 대해 취해야 할 기본적인 자세를 보여 준다. 즉 사랑은 지식이나 그리스도인의 개인적인 자유보다 우월한 것이니 인간을 교만케 하는 지식이나 타인을 실족시키는 이기적인 자유를 추구하기보다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랑의 동기를 따라 행동하라는 권면이다.
[9절]
거치는 것. 믿음 약한 형제의 양심에 상처를 줄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이 우상과 타협함으로써 죄를 짓도록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11절]
바울은 본절에서 자유가 남용되는 경우를 예로 들어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모든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해방과 구원의 증표가 되지만 그것이 남용될 때 연약한 형제들을 실족케 하는 빌미가 됨을 잘 지적하고 있다.
[13절]
우상의 제물에 대한 바울의 태도가 결론적으로 집약되어 있다. 즉 우상의 제물로 인해 믿음이 연약한 형제가 실족한다면 제물 뿐만 아니라 고기까지도 결단코 먹지 않겠다는 바울의 결심은 약한 형제들에 대한 바울의 뜨거운 사랑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또한 이것은 인간적으로 보잘것없는 형제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천하보다도귀하게 여기시며 그를 통해 당신의 섭리와 사역을 이루어 나가신다는 점(마 25:40, 45)과 그리스도인의 영속적인 생활 원칙을 밝히 드러내는 것이다.

# 해설
우상 제물에 관한 태도 (1~13절)
여기서부터는 주제가 바뀌어 우상 제물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11:1까지). 본장은 그 서론으로서 우상 제물을 먹는 행위의 의미(1~6절)와 신중하게 행사되어야 할 그리스도인의 자유(7~13절)를 가르치고 있다. 우상은 그 자체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우상 제물을 먹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바울은 믿음이 연약한 형제들의 실족을 면키 위해 자제하여야 함과 그렇지 못한 이기적 자세, 곧 사랑을 결여한 어떠한 신앙적 행위나 영적 지식도 무가치할 뿐임을 지적한다(13:2). 신자들의 자유는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형제들에게 덕을 끼치는 데 사용되어야 마땅하다.

 

# 핵심

1~13절

우상 제물에 관한 가르침이다. 바울은 우상 제물 역시 단순한 식물에 불과하지만 신앙이 약한 사람은 그것으로 인해 실족할 수 있으므로 먼저 그들을 배려하는 신앙 자세가 필요함을 역설했다.

 

# 묵상

우상의 제물 (1~13절)

우상 숭배는 유형의 형상에 경배하는 것을 총체적으로 가리키는 말로써 이것은 십계명에 의하여 강력하게 거부될 뿐만 아니라 신약에서는 내적인 무형의 형상에까지 의미가 확대됩니다. 따라서 탐욕은 보이지 않으나 성경이 금하는 우상 숭배인 것입니다(골 3:5). 바울은 당시의 고린도 교회 가운데 크게 논쟁이 되었던 우상의 재물을 식물로 취하는 것에 대하여, 이미 영적으로 성숙한 믿음과 지식을 지닌 성도들에게는 먹어도 아무 거리낌 없고 또한 먹지 않아도 전혀 상관없는 것에 불과하지만, 약한 신자의 양심을 고려하여 차라리 먹지 않는 것이 옳은 태도라 하였습니다. 신자의 자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지 제약을 받는데, 그것은 그 자유가 모든 사람에게 유익을 주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고전 10:33).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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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1~40절)
혼인에 대한 권고 - 본서의 후반부로 본장부터는 고린도 교인들의 신앙적 질문에 대한 바울의 답변이 서술되어 있다. 본장은 그리스도인들의 결혼에 관한 일반적인 교훈(1~7절), 독신 생활과 이혼(8~24절), 처녀의 결혼 문제(25~38절), 과부의 재혼(39, 40절)의 네 단락으로 구분할 수 있다. 특히 본장은 고린도 교회 내에 결혼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 사람과 이를 부정하는 사람 두 부류가 있음을 보여 주며, 결혼도 신앙 곧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목적에서 수행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도들은 부부 생활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고, 가정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현하며,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과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수행하는 방편임을 깨달을 수있다<7:25~38, 그리스도인의 결혼관>.
(1~7절)
성도의 결혼 생활 - 본문은 결혼에 관한 구체적인 문제에 들어가기 이전의 서론 부분으로 부부 생활에 대한 일반적인 권면이 언급되어 있다. 바울은 본문에서 원칙적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 독신 생활을 찬양하나 육신의 정욕을 억제하지 못할 때는 결혼할 것을 권고한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결혼관의 일면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정상적인 가정 윤리라기보다는 임박한 재림이나 큰 환난 등의 종말론적 입장이 전제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1절]
너희의 쓴 말에 대하여는 고린도 교회가 편지로써 질문한 내용을 가리킨다. 이를 통해 우리는 본장의 내용이 일방적인 책망이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라는 사실과 고린도 교회 내에도 주의 말씀을 따라 살려고 노력하는 충성된 자들이 많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바울은 여기서 원칙적으로 독신 생활을 찬양하고 있으나 극단적인 금욕주의나 독신주의자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독신 생활과 더불어 건전한 가정 윤리의 중요성 또한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엡 5:22, 23; 골 3:18~25).
[2절]
음행의 연고로. 성도들이 결혼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 말에서 단순히 결혼의 목적이 성적 타락을 피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7:25~38, 그리스도인의 결혼관>.
[3~5절]
남편과 아내의 권리와 의무 조항 - 본문은 특히 남편과 아내는 어느 한 쪽의 육체적 욕구에 대해 거절할 권리가 없으며, 일정한 기간 동안 특별한 목적이 있을 때 상호 동의하에 별거할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부부는 독립되어 있는 별개가 아니라 하나로서 상호 의존적이며 인간의 성적 충동은 범죄와 타락을 유발시키는 중요한 동기가 됨을 암시한다.
[6~7절]
바울은 앞절의 부부 관계에 대한 권면이 주의 절대적인 명령이 아니라 바울 자신의 권면(勸勉)임을 밝힘으로써 독신이나 결혼 중 어느 하나를 절대시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바울이 독신을 좋게 여긴 것(7절)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근본 목적 때문이 아니라, 최선의 방법으로 복음을 전파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자 하는 그의 마음이 표출된 것이다.
[8~9절]
바울은 독신이 결혼보다 유익하다고 권면한다. 그러나 독신으로 인해 성적 욕망으로 타락하는 것보다는 결혼하는 것이 낫다고 선언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성결과 범죄에 대한 경계의 중요성을 밝히 드러내며 성도들의 삶의 목표가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임을 암시해 준다(10:31; 마 6:33).
(10~24절)
이혼의 문제 - 바울 당시 이혼 문제는 교회의 중요한 문제 중 하나였다. 특히 도덕적으로 극히 타락해 있던 고린도 지역은 이혼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러한 상황을 감안한 바울은 그들에게 이혼 문제에 대한 새로운 생활 지침을 주고 있다.
[10~11절]
만일 갈릴찌라도. 바울은 부부가 모두 신자인 경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혼을 엄금하고 있다. 또한 부득불 이혼한 경우는 다른 사람과 재혼하지 말아야 하며 가능한 한 다시 결합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본문은 고린도 지역이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가족 제도라는 점과 고린도 교회에 금욕적, 신앙적 이유로 주의 계명을 거스르고 실제로 이혼한 부부가 있다는 것을 보여 주며 계명을 어긴 자들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와 사랑의 손길을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12~13절]
부부 중 한편이 불신자인 경우의 이혼 문제가 서술되어 있다. 그 원칙은 불신자 편에서 원하는 대로 하라는 것이다. 즉 불신자가 결혼 생활을 원하면 계속하고 그가 떠나가면 가게 내버려 두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원칙적으로는 신자들끼리 결혼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며 불신자라는 사실이 이혼의 조건이 될 수 없으며 결혼은 외적 조건보다도 사랑과 애정, 화평의 내적 원리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14절]
본절은 신자인 남편이나 아내는 상대를 신앙으로 감화시켜 성도의 일원으로 만들 의무가 있음을 강조한다. 동시에 신자가 이러한 자신의 임무를 유기할 때 그 자녀 역시 구원에서 제외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15절]

구속 받을 것이 없느니라. 이것은 불신자들이 먼저 이혼할 것을 제안하고 떠나갈 경우 신자는 그로 인해 구속 받을 필요가 없으며 재혼할 수 있다는 뜻이다. 화평 중에서...부르셨느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혼은 돌이킬 수 없는 불화 상태이므로 가능하면 이혼을 피하고 화평한 결혼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힘쓰라는 의미이다.

[16절]

아내 된 자여...알 수 있으리요. 불신자가 먼저 이혼을 제안하고 고집할 경우 구태여 불들 필요가 없음을 부연한 것이다. 즉 구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에 그를 구원하겠다는 명목으로 끝까지 불들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17~24절)

그리스도인들의 화평케 하는 의무 -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의 의무, 즉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처한 환경이 어떠하든지 그 안에서 자족하며 그리스도의 나라와 영광을 구하는 삶을 살 것을 권면하고 있다.

[18~19절]

할례에 대한 문제가 언급되어 있다. 즉 유대주의자들은 할례를 중요시하여 이것을 이방인 신자들에게까지 강요한 반면, 일부 사람들은 할례가 오히려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을 그르치는 것이라 하여 그것을 무용화(無用化)하고 이미 할례 받은 자들에게도 그 할례 표시를 지우라고 강요했다. 따라서 바울은 할례가 구원과 아무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피력함으로써 고린도 교인들의 할례 논쟁에 대해 경고하고 있으며, 참으로 중요한 것은 외적 형식이나 율법이 아니라 구원의 복음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순종임을 강조한다(갈 5:6)<창 17:9~14, 할례와 신앙>.

(21~23절)

그리스도 안에서의 평등 - 고린도 교회에 존재했던 노예 신분의 신자들에 대한 언급이다. 본문에서 바울은 그들이 비록 노예 신분일지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참된 자유자라고 강조함으로써 복음 안에서는 종이나 자유자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고 선포한다. 여기서 우리는 고린도 교회에는 실제로 노예 신분의 신자들이 많았다는 것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만 모든 사회적 차별은 무시되고 참된 평등이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1절]

자유할 수 있거든...사용하라. 이것은 '만일 당신이 자유를 얻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라'는 뜻이다.

[23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사회적 신분을 무시하고 무조건 자유인이 되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함을 받아 주의 종이 되었으므로 하나님 나라와 주께 영광 돌리는 일을 최우선으로 하여 살아가라는 뜻이다.

(25~38절)

처녀의 결혼 문제 -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결혼관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1) 결혼의 정의 : 법적으로 인정된 남녀의 결합이다. 즉 두 사람의 남녀가 부모의 보호를 떠나 독립된 개체로서 연합하여 가정을 형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결혼은 안식일, 노동의 규례와 더불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기본적인 창조 질서이다(창 2:24).

(2) 결혼의 목적 : 일반인의 결혼은 대개 윤리적인 면과 종족 보존의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결혼은 다음과 같은 목적을 위해 수행된다.

  ① 가정을 이루어 자녀를 출산하고 양육함으로써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이루기 위함이다.

  ② 복음 전파의 사명과 더불어 온전한 연합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다.

  ③ 성적 타락을 방지하고 건전한 가정 윤리를 세움으로써 신앙의 순결을 지키고 사회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함이다.

(3) 결혼의 의의 : 부부간의 완전한 연합은 그리스도와 성도의 관계를 밝히는 역할을 한다. 성경은 그리스도와 성도의 연합된 관계를 남녀간의 결혼, 즉 그리스도를 신랑, 성도를 신부로 비유한다(마 9:15; 마 25:1~6). 우리는 결혼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성도된 나 사이에 부부와 같은 일체감, 애정, 친근감 등이 실존하는 참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

(4) 결론 : 따라서 그리스도인 부부들은 결혼 속에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심오한 사랑의 배려가 내포되어 있음을 깨달아 아름답고 신성하며,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 서로 협력해야 하겠다.

[26~28절]

임박한 환난 - 종말론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있을 대환난을 의미하며, 역사적으로는 로마 제국에 의한 초대교회의 가혹한 핍박을 뜻한다(마 24:8, 9). 한편 본 단락에서 바울이 비록 직접적 계시가 아니라 사견임을 전제하기는 하였지만 비교적 독신 생활을 권장한 것은 로마 박해가 임박했고 또 목숨을 걸고라도 선교에 진력해야 할 초대교회의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지 결코 독신 생활을 더 성경적이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행 14:22).

[29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때'(헬, 카이로스)는 주님의 재림 때를 지칭한다. 따라서 이 말은 주님을 위해 일할 시간은 짧고 세상 끝 날은 가까이 다가온 것을 의미한다.

[31절]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이것은 이 세상의 임시성과 무상함, 종말 즉 그리스도 재림의 임박성을 강조한 것이다. 인간이 이룩한 업적과 모든 가치들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형체도 없이 무너질 것이기 때문에 성도들은 이 세상 것에 연연해서는 안 되며 오직 주의 재림을 준비하는 자세로 살아가야 한다(시 103:15, 16).

[32~34절]

기혼자와 미혼자의 신앙적 태도 - 바울은 미혼자는 전심으로 주를 섬길 수 있지만 기혼자는 배우자에게 관심을 두어야 하기 때문에 신앙적 의무를 태만히 하기 쉽다고 보았다.

[35절]

분요함이 없이 주를 섬기게. 기혼자와 미혼자를 비교한 이유가 언급되어 있다. 즉 고린도 교인들의 신실한 신앙과 빛 된 생활을 촉구하고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지속적이고도 완전하게 주께 헌신토록 하기 위함이다.

[36~38절]

결혼에 대하여 부모들이 알아야 할 것 - 결혼 적령기에 이른 처녀의 혼인과 관련하여 그들의 부모에게 주는 바울의 권면이다. 여기서 그는 결혼시키는 것도 무방하지만 그녀가 독신 생활을 원할 경우 결혼시키지 않는 것이 더 좋다고 권면한다. 바울은 결혼의 여부는 당사자인 처녀의 권리이며, 결혼 적령기를 지닌 처녀들에 대해 정당하게 대우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39절]

주 안에서만. 이것은 남편이 죽은 후 여자가 재혼할 경우 그리스도인과만 결혼하라는 뜻이다(롬 7:2, 3).

[40절]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이것은 독신에 대한 바울의 견해가 직접적인 주의 게명은 아니나, 성령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서 하나님의 뜻과 부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 해설

결혼에 대한 교훈 (1~16절)

당시 고린도 교인들 중에는 그리스도께 헌신하기 위해서는 독신 생활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하는 금욕주의적 생각을 가진 자들이 더러 있었던 것 같다. 바울 자신은 전적 헌신을 위해 독신 생활을 권장하는 입장이었지만 독신주의자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성적 타락을 방지한다는(2절) 소극적 의미를 벗어나 결혼(엡 5:31, 32)은 안식일 규례와 노동의 규례와 더불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근원적인 창조 질서(창 2:24)이며, 그리스도와 교회 간의 사랑을 체험적으로 발견케 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본분 (17~24절)

결혼을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에서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처지와 환경이 어떠하든지 간에 자족하며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구해야 할 것을 가르치는 내용이다.

처녀의 결혼에 대한 교훈 (25~38절)

본문은 내용상 현재 결혼하지 않은 처녀에 대한 권면(25~35절)과 처녀의 결혼에 관한 고린도 교인들의 태도에 대한 권면(36~38절)으로 나뉜다. 여기에서 바울은 임박한 박해와 복음 증거에의 시급한 요청 등을 들어 처녀이건 독신자이건 간에 지금의 상태로 있는 것이 더 좋다는 사견(私見)을 피력함으로써(26절) 결혼 그 자체가 옳고 그름의 논쟁이 될 수 없음을 주장한다. 도리어 고린도 교인들이 현재에 가진 시간과 능력들을 어떻게 옳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결국 바울의 주장은 결혼도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목적에 충실히 따라야 한다는 결론에 귀결된다 하겠다.

재혼에 대하여 (39~40절)

결혼 관계는 죽음으로써 해소되므로(롬 7:1) 원칙적으로 재혼은 허용되나 앞서 논의된 결혼 문제와 마찬가지로 오직 주께 충성하기 위해 가급적 그냥 지낼 것을 권면한다.

 

# 핵심

1~16절

기혼자와 미혼자, 과부들이 유념해야 할 결혼과 이혼, 독신 생활에 관한 가르침이다.

 

# 묵상

결혼의 당위성 (1~2절)

결혼이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창조의 법칙을 따르며 음행의 죄악을 피하기 위한 제도입니다. 그래서 독신의 은사를 갖지 못하여 절제하기가 어려운 사람들에게 결혼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의 섭리요 도우심입니다. 때문에 결혼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드려야 하는 섭리이지, 인간의 욕구를 채우려는 저속한 쾌락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바울은 극단적인 금욕주의나 독신주의자는 아닙니다. 단지 그는 독신 생활과 더불어 건전한 가정 윤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부부의 분방 조건 (5절)

부부가 일시적으로 분방할 수 있는 조건은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신앙적인 부부의 공존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제1차적인 목적으로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합의한 일차적인 분방은 부부간의 유대와 일치를 강화하고 아름다운 사랑으로 이끌어 줍니다.

불신자와의 삶 (11~16절)

성도들은 불신 남편(아내)의 의향을 좇아 동거하면서, 거룩한 성도의 본을 보여 불신 남편을 주님께로 인도해야 합니다. 불신자와 결혼하는 것은 신중히 고려해야만 하는 중대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미 결혼한 신자들은 그 결혼에 충실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의무를 계속적으로 성실하게 수행해야 합니다. 믿지 않는 상대방을 사랑하며 지속적으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참된 자유자 (21~23절)

참된 자유는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에만 가능합니다. 복음 안에서는 종이나 자유자의 구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이 모든 사회적 차별이 극복되고 참된 평등이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처녀의 결혼 (28~36절)

바울은 처녀의 결혼을 그 결과로 있을 육신적인 고난 때문에 염려했습니다. 결혼은 하나님을 향한 단일한 마음을 하나님과 배우자에게로 나뉘게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들의 결혼이 혹 열심 있는 신앙을 가로막을까 염려했습니다.

기혼자들에 대한 권고 (29~31절)

기혼자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환경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지혜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때로 기혼자들은 주어진 환경을 주님보다 더 사랑함으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소망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삶의 궁극적인 소망은 주님의 재림으로 주어지는 영생입니다. 없어져 버릴 이 세상의 것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소망과 배치되는 것입니다.

결혼에 대한 부모의 도리 (36~38절)

성경은 결혼의 여부는 당사자인 처녀의 권리이며, 결혼 적령기를 지난 처녀들에 대해서도 정당하게 대우하라고 말씀합니다. 결혼도 무방하지만 독신 생활을 원한다면 결혼시키지 않는 것이 더 좋다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재혼 문제에 대하여 (39~40절)

바울은 재혼하는 것보다 홀로 생활하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성도들의 모든 판단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성경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바울은 재혼 문제도 역시 동일한 관점에서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판단은 종말론적인 사상에 의하여 한층 강조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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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1~20절)
소송과 음행에 대한 교훈 - 성도 상호간에 발생한 소송 문제(1~11절)와 음행에 대한 경고(12~20절)가 언급되어 있는 본장은 성도들의 소송의 부당성과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유를 남용하는 자들이 초래하는 도덕적 타락상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이러한 죄악들은 기독교 공동체에 내재해 있는 상호간의 불신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배은 망덕인 동시에 세상 사람들에게 교회의 거룩성을 실추(失墜)시키는 것이다.
(1~11절)
소송 문제 - 본문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 사이에 발생한 소송 사건의 진상을 밝힌 후 그에 대해 준엄하게 책망하고 있다. 여기서 관건이 되는 것은 재판의 종류나 판단의 정확성 여부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들이 불신 세상에게 판단을 의뢰한 소송 그 자체에 있었다. 본문은 특히 분쟁 해결의 대원칙은 그리스도께서 모범을 보이신 사랑의 교훈(마 5:39)을 따르는 것임과 성도들이 자신의 이기심이나 불의로 말미암아 세상 법정에 서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행위임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1절]
불의한 자들. 그들의 재판 자체가 완전히 거짓되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을 부인하는 세상의 재판관들을 일괄적으로 지칭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적인 의와 세상적인 의의 차이점을 분명하게 볼 수 있는데 세상적인 의는 인간의 행위나 공로에 그 기반을 두는 반면, 그리스도인의 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이다(롬 1:17). 역사적으로 볼 때 유대인들은 그들의 문제를 이방인들에게 판단받는 것을 죄악으로 여겼으며 법으로 금하였다. 이것은 세상 법에 대한 하나님의 법의 우월성과 성도간의 문제는 법 이전에 신앙적 차원에서 해결해야 함을 교훈해 준다.
[2~3절]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이 누리게 될 세상에 대한 왕권(벧전 2:9)을 상징하는 본문은 현재적으로는 성도들이 빛 된 생활로 세상을 교훈하고 복음을 통해 세상의 불의를 심판하게 되는 것, 종말론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성도들이 주와 함께 세상을 심판하고 왕 노릇하게 될 것을 의미한다(단 7:22; 계 20:4).
[4절]
경히 여김을 받는 자. 이는 믿지 않는 재판관이라는 견해도 있으나 교회에 속한 믿음이 연약한 자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따라서 본절은 풍자적 어조를 가진 명령법 문장으로 그 뜻은 '너희가 이런 문제로 세상 법정에 소송을 제기해야 한다면 차라리 교인들 중에서 가장 무시당하는 자를 세워 그 일을 처리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5절]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고린도 교회의 소송 문제에 대한 바울의 솔직한 심정이 토로되어 있다. 바울은 성도들이 세상 법정의 심판을 받는 것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를 강조하기 위해 풍자적 어조까지 사용하고 있다.
[7절]
완연(宛然)한 허물. 성도들끼리 서로 송사한 것과 그 송사가 세상 법정에서 일어난 것, 두 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첫 번째 경우는 성도들간에 내적으로 심화된 증오와 불신이 단적으로 드러난 것이며 두 번째 경우는 고린도 교회가 비록 외적으로는 부흥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영적으로 완전히 실패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러한 고린도 교회의 모습은 오늘날 교회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 주는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으며 성도들의 참된 자세는 이기적인 추구가 아니라 자기 희생적인 사랑의 실천임을 역설적으로 증거한다.
[9~10절]
당시 고린도 교회에 만연하던 죄상들이 자세하게 열거되어 있다. 그것들은 성적 타락, 우상 숭배, 대인 관계에서 발생한 죄로 크게 구분된다. 이 중 성적 타락과 우상 숭배는 서로 깊은 연관이 있는데, 당시 고린도 지역에 있던 이방 신전들은 성적 타락의 본거지였다. 특히 탐색과 남색은 동성 연애와 관련된 말로 비정상적인 성 행위를, 후욕은 술 취함과 관련된 말로 난폭한 행동을, 토색은 권력의 힘을 이용하여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착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본문은 고린도 교회의 만연된 죄상을 고발하여 그들의 수치를 자각시키고 성도 본연의 사랑과 순결의 중요성을 깨우치며 죄악을 가지고는 하나님 나라를 상속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선포하고 있다.
[11절]
고린도 교인들의 회개와 구원의 세 단계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본문은 그들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별(聖別)되었음을 강조한 것이다.
(12~20절)
음행에 대한 경고 - 본문은 고린도 시에 만연했던 공공연한 음행의 습성과 이에 대해 고린도 교회가 경계할 것을 훈계하고 있다. 당시 고린도 시는 구약의 소돔(창 19장)을 방불케 하는 곳으로 신약의 대표적인 음행 지역이었다.
[13절]
식물은 배를 위하고...위하시느니라. 이것 역시 12절의 격언과 같이 고린도 교인들이 이미 알고 있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먹는 것은 육체의 본능이기 때문에 앞의 구절과 같이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다는 뜻으로 이 말을 사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우상에게 바친 음식이라 할지라도 몸을 위하여 또는 식욕의 본능을 채우기 위하여 믿음으로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8:8; 10:25). 그런데 당시 고린도 교인들 중에는 이 격언을 엉뚱한 곳에 적용시키는 자들이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식물을 먹는 것이 육체적 본능이듯이 성적 욕구를 채우는 것도 육체적 본능의 발로라고 주장하며 그들의 성적인 타락과 방종을 정당화시키려 하였다(Barrett).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주장을 단호히 거부한다. 왜냐하면 먹는 것과 성적인 욕구는 잠깐 있다가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모두 폐하게 될 것이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새롭게 태어난 몸은 오직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따라 행하며 거룩한 생활 가운데서 주를 영화롭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도는 자신의 몸이 하나님을 향한 헌신의 도구임을 자각해야 하며, 또한 그 헌신 뿐만 아니라 모든 육체적 생활조차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15~16절]

그리스도의 지체, 창기의 지체. 성도의 거룩한 신분과 성적 타락으로 더럽혀진 죄악 된 상태를 대조시킴으로써 고린도 교인들의 성적 부도덕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며, 성도들의 참된 지향점은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는 것임을 암시해 준다(엡 4:13).

[19절]

성도들을 성령의 전(殿, 요 14:16, 17)으로 묘사함으로써 중생한 영혼의 거룩성과 죄 사함 받은 육신의 성결성을 강조하며 성도들은 구속받은 영육을 거룩하게 보존해야 할 의무가 있음을 보여 준다.

[20절]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은 죄와 사탄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어 그리스도와 의의 종이 되었다는 뜻이다(마 20:28; 롬 6:18; 골 1:13).

 

# 해설

송사 문제 (1~11절)

신자들간의 분쟁 해결의 대원칙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교훈(마 5:39)을 따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인들은 형사 소송도 아닌 재산 소송을 세상 재판관과 중재자에게 맡겼던바, 바울은 이것이 단순한 수치(羞恥)의 차원을 넘어 하나님의 영광을 거스르는 행위임을 가르쳐 준다. 모름지기 성도간의 문제는 법 이전에 신앙과 사랑의 차원에서 해결되어야 한다.

음행에 대한 경고 (12~20절)

5장의 내용과 연관하여 고린도 교인들의 성적 타락을 거듭 책망하고 있다. 본격적인 책망에 돌입하기 이전에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도입부에 제시하고 있는데(12절), 이는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음행과 같이 육신의 정욕을 만족시키는 데에 오용되지 않고(벧전 2:16) 오직 교회를 성장시키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데 소요되어야 함을 주지시키기 위해서였다.

 

# 핵심

1~11절

음행에 이어 성도간의 송사 문제를 다룬다. 바울은 교회내에서 발생한 문제는 굳이 세상 법정의 판결을 구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 신앙적으로 해결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 묵상

세상을 판단하는 성도 (2절)

성도가 세상을 판단한다는 의미는 종말의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성도들이 왕노릇하며 세상을 심판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 어떠한 지식도 바로 소유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세상은 세상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며, 오직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만이 판단하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아는 성도들도 진정한 의미에서 세상을 알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교회 분쟁의 해결법 (4~8절)

교회의 분쟁은 교회 안에서 주님의 권위로 세워진 지도자의 인도를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지혜롭게 판단하고 해결해야 합니다. 모든 성도들은 교회가 어려울수록 더욱 서로 순종하는 겸손과 자비를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불의한 자 (9~10절)

불의한 자란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 즉 행위로써 믿음의 고백을 부인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믿음은 행함을 낳고, 믿음은 행함과 함께 동행하며, 믿음은 행함으로 그 진실함을 증거합니다.

성령이 거하시는 성도의 몸 (19~20절)

성도의 몸은 성도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성도들에게 주어진 은혜는 위대한 변화를 낳습니다. 그 변화의 기초는 성령께서 성도들의 심령에 믿음으로 내주하시는 것입니다. 죄에 종노릇하던 인생들이 이제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된 것입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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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1~13절)
성적 부도덕의 죄 - 전장(1~4장)까지 고린도 교회의 분쟁 문제를 언급한 바울은 이제 그들의 성적 부도덕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당시 고린도 시는 성적 문란과 방종한 생활로 유명한 곳이었다. 고린도 지역의 이러한 풍조은 교회 내까지 침입하여 근친 상간이라는 패륜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다. 따라서 바울은 근친 상간의 죄와 이에 대한 고린도 교회의 무관심과 침묵을 단호하게 책망하고(1~5절), 그리스도를 본받아 순결한 생활을 유지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본장은 특별히 성적 타락의 치명적인 죄성과 파급적인 영향력, 신앙의 미성숙과 인간적인 교만은 육체적 방종과 부덕(不德)을 초래한다는 점, 도덕적 순결이 신앙 공동체 형성의 필수적인 요소임을 잘 보여 준다.
(1~5절)
근친 상간의 죄 - 근친 상간의 죄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본문은 기독교 공동체의 연대 책임성을 강조하며 죄와 불의를 보고도 침묵, 방조하는 것 또한 비난받아 마땅한 범죄 행위임을 보여 준다.
[1절]
음행(헬, 포르네이아). 남녀가 갖는 일종의 불륜한 성 관계를 의미한다.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근친 상간의 죄를 가리킨다. 아비의 아내. 친모가 아니라 아버지의 후처 또는 첩을 가리킨다. 또한 본절은 '취하였다'는 현재형 동사를 사용하여 근친 상간 행위가 일시적인 것으로 그치지 않고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행위는 율법에서 엄격히 금한 것으로 당시 이방인들 사이에서도 가장 치욕스러운 죄로 취급당한 것이다(레 18:8; 신 22:30).
[2절]
바울은 음행한 자에 대해 무관심 내지 방조(傍助)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죄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만 가운데 있던 고린도 교인들을 크게 책망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인들의 연대적 책임성과 지체 의식, 무관심과 교만은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을 방해하는 범죄라는 점, 어떠한 죄악 가운데서도 회개의 은총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다(5절).
[3절]
내가...이미 판단하였노라. 근친 상간 죄를 범한 자에 대한 처벌을 확고하게 결정했다는 뜻으로, 이것은 범죄한 성도들에 대한 교회의 징계권을 보여 주는 것이다.
[4절]
교회의 징계는 인간의 힘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권위에 그 근거를 두어야 할 것을 강조하며, 그렇기 때문에 음행자에 대한 징계가 정당함을 증거하고 있다.
[5절]
사단에게 내어 주었으니. 이는 행음자를 교회로부터 출교시켜 사탄의 지배하에 있는 세상으로 내어보내는 것을 의미한다는 견해와 사탄에 의해 육체적인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는 견해가(살전 2:18; 딤전 1:20) 있다. 영은...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범죄자에 대한 징계의 목적이 언급되어 있다. 즉 징계는 범죄한 영혼에 대한 최종적인 심판이나 유기(遺棄)가 아니라 회개와 돌이킴을 위한 고난이며, 구원을 전제로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이다. 본절은 특히 범죄자를 그대로 방치하는 행위는 사랑이 아니라 무관심의 소치로서 그 사람을 멸망에 빠뜨리며, 다른 사람들까지 함께 타락게 만드는 범죄라는 사실과 참된 징계의 정신은 사랑이라는 점을 극명하게 교훈해 준다.
(6~8절)
누룩 - 그리스도의 복음(마 13:33; 눅 13:21), 죄(출 12:15; 갈 5:9)의 뜻이 있는데 여기서는 '죄악'을 상징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본문의 상징적인 표현을 통해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누룩, 즉 죄악으로부터 구속함을 받은 새로운 존재임과 죄악의 파급적인 영향력에서 교회의 순결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모양이라도 버려야 할 것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히 12:1).
[8절]
명절을 지키되. 성도들이 죄악을 버리고 진실한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을 의미한다(롬 12:1).
(9~13절)
부도덕한 신자들로부터의 분리 - 일전에 바울이 보낸 서신 곧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는 글이 불신 세상과의 교제를 완전히 끊어버리라는 뜻으로 오해되어, 고린도 교인들 사이에는 사회 생활의 혼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사귐에서 제외되는 배척의 대상이 믿지 않는 불신자들이 아니라 교회 안에 속한 음행자라고 밝힘으로써 자신의 진의를 드러내고, 성도의 성결한 삶을 강조한다.
[11절]
형제라 일컫는 자. 바울은 음행으로 인한 배척의 대상을 교회 내에 속한 자로 한정한다. 이것은 단순히 그들을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정화시켜 구원하려는 적극적인 행위로서 성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과 구원의 새 계명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국한된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시 119:151; 롬 7:12).
[12~13절]
본절에서 바울은 교회가 성도들에게 영적 질서와 규범을 실천하도록 하는 것은 타당한 일이지만 구원받지 못한 오늘날의 시회를 영적 기준에서 판단하려고 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에 대한 교회의 예언적 사명과 빛과 소금의 역할을 포기하라는 뜻이 아니라 다만 성도들의 신앙 규범이나 행동 원리를 사회에 그대로 강요할 수 없다는 뜻이다<엡 서론, 성도의 사회 참여>.

 

# 해설

성적 부도덕 (1~13절)

전장(1~4장)까지는 고린도 교회의 분쟁을 지적했으나 본장은 그들의 성적 부도덕 곧 근친 상간에 대해 책망하고 있다. 당시 헬라의 중심 도시였던 고린도는 많은 여행자와 상인 그리고 이방 신전으로 인하여 도덕적으로 극도로 부패하고 타락하였다. 결국 이 같은 타락이 교회 내까지 침범하였는바, 바울은 그리스도 공동체의 순수성을 위해 그러한 세력들에 대해 단호히 대처할 것을 촉구하였다.

 

# 핵심

1~13절

고린도 교회의 또 다른 문제점은 음행을 다루는 부분이다. 바울은 교회가 성적으로 부도덕한 자를 방관한데 대해 책망하며 권징을 명했다.

교회의 권징 (12~13절)

교회의 정통 신앙을 고수하며 도덕적 순결을 유지하기 위해, 복음의 진리에서 이탈한 이단 사상을 유포하거나 심각한 죄를 범하고서도 회개하지 않는 교인에게 징계를 가하는 것을 가리킨다. 권징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하는 데 있다. 따라서 육체적 속박이나 벌금형은 부과하지 않고 사안에 따라 경고, 공적 예배 참여 금지, 정직, 출교 조처만을 내린다. 그리고 이런 징계도 권면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에만 시행하며, 출교 처분당한 자라도 회개하면 다시금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 묵상

친교의 범위 (1~11절)

바울은 성도라 칭하는 범죄자들에 대한 경계의 필요성을 느끼고 친교의 범위를 가르쳤습니다. 불신자들의 범죄는 간접적으로 교회에 영향력을 미치지만, 신자들의 범죄는 하나님과 교회 모두에게 직접적인 영향력을 끼치며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상처를 줄 뿐만 아니라, 교회의 친교를 가로막는 장애가 됩니다. 교회의 기초는 하나님의 자비에 근거한 사랑입니다. 때문에 범죄한 영혼이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도록 교회는 처벌과 함께 언제나 사랑으로 기도하면서 기다려야 합니다(딤후 2:25, 26).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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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1~21절)
화합과 일치의 권면 - 본장에서 바울은 간곡한 어조로 인간적인 교만과 분파주의, 서로에 대한 비난을 버리고 화합할 것을 결론적으로 권면하고 있다. 또한 본장은 성도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청지기로 부름받은 책임있는 일꾼이며, 부르심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사랑의 정신을 이웃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확산시키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요일 서론, 성경에 나타난 사랑의 이해>.
(1~5절)
하나님의 판단 - 본문은 모든 인간들이 당하게 되는 세가지 판단이 암시되어 있다. 그것은 사람의 판단, 자신의 판단, 하나님의 판단이다. 이 중에서 사람의 판단과 자신의 판단은 틀리거나 독단적일 수도 있으나 하나님의 판단은 참된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재림 때 최후 심판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1절]
일군(헬, 훼페레타스). 당시 노예들 중에서도 가장 비천한 계급인 배 밑창에서 노 젓는 노예를 뜻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을 본받은 바울의 겸손을 보여 주며,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이 고린도 교회 분쟁의 해결 방법임을 암시해 준다<렘 43:2, 겸손과 교만>.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 계시된 진리, 즉 구원의 복음을 하나님으로부터 위임 받아 성도들에게 전하는 직책을 의미한다. 이것은 사역자의 두 측면, 즉 하나님의 청지기로서의 소명과 자각, 성직자의 존엄성 및 지도적 위치를 보여 주며, 하나님의 사역자들에 대한 성도들의 경솔한 판단을 경고하고 있다.
[3~4절]
바울은 자신이 주님의 종이요 청지기이므로 인간은 자신을 판단할 이유가 없으며, 그 판단은 가치가 없다고 선포한다. 또한 그는 자신의 행위와 봉사에 대해서 판단하고 심판하실 분은 그리스도뿐이라는 사실을 표명함으로써 자신의 가치 평가도 믿을 것이 못 된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초월성과 모든 판단의 준거를 그리스도께 두는 바울의 겸손한 신앙 인격을 엿볼 수 있다.
[5절]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최후 심판 때에 일어날 사건이 묘사되어 있다. 그때는 외적으로 드러난 죄악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속에 숨겨져 있는 은밀한 죄악 및 그 동기까지 다 드러나 심판의 대상이 될 것이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판단 및 심판의 권리는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주권이며, 인간에 의한 인간의 판단 및 정죄는 분열과 증오를 조장하는 죄악 된 행위임을 보여 준다(마 5:22).
(6~13절)
고린도 교인들의 교만 - 고린도 교인들의 오만 불손과 사도들의 겸비를 풍자적으로 대조시키고 있는 본문은 성도들의 모든 축복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겸손은 하나님의 사역을 위한 전제 조건임을 잘 보여 준다.
[6절]
나와 아볼로를...본을 보였으니. 이것은 본서 3:5~9절의 내용을 의미한다. 즉 바울과 아볼로는 말로만 복음을 전파한 것이 아니라 삶의 실례를 통해 본을 보였다는 의미이다.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지적 교만에 사로잡혀 특정한 사역자를 중심으로 파당을 지으며 분쟁을 일삼는 데 대한 경고이다. 즉 앞에 기록된 교훈들을 지켜 겸손하고 분수를 지키라는 뜻이다.
[7절]
바울은 하나님의 은총을 잊어버리고 자신들의 재능과 지위, 그들이 속한 당파를 자랑하던 고린도 교인들에 대해, 그들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자랑할 근거가 전혀 없다는 것을 천명한다(요 3:27). 본절은 특히 교만은 배은 망덕의 죄이며, 인간이 자랑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밖에 없음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갈 6:14).
[8절]
고린도 교인들의 교만을 지적하고 그들의 오만 불손을 경계하는 대표적인 풍자의 글이다. 그 뜻은 '여러분은 벌써 배가 불렀습니다. 벌써 부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를 제쳐놓고 벌써 왕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정말 왕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과 함께 우리도 한번 왕 노릇을 해 볼 것이 아닙니까?'이다(공동 번역).
(9~13절)
사도들의 겸손 - 바울은 사도들이 복음을 위해서 당한 고난, 즉 수치, 매맞음, 투옥, 비방 등을 구체적으로 지적함으로써 고린도 교인들이 누리고 있던 부요와 대조시키고 있다. 즉 바울은 자신이 겪은 고난의 일부를 구체적으로 밝힘으로써 고린도 교인들의 안일과 교만을 일깨우며, 그들의 허세를 엄히 경계하고 있다.
[9절]
구경거리(헬, 데아트론). 여기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로서의 고난받는 삶을 콜로세움에서 맹수들에게 던져져 찢겨 죽어가는 저주받은 자의 모습으로 암시하고 있다<행 8:1, 초대교회가 당한 박해>.
[12절]
후욕을 당한즉...참고 복음을 위한 고난에 대처하는 바울의 태도가 잘 요약되어 있다. 즉 그는 온갖 독설과 모욕에 대해 참을 뿐만 아니라 사랑으로 응답하여 오히려 그들을 축복하였다(마 5:38~48). 당시 헬라사회는 바울의 이러한 인정과 사랑을 미덕으로 여기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멸시하고 천대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전도자의 참된 자세와 참된 신앙은 고난 가운데서 더욱 찬란하게 빛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14~21절)

겸손에의 권고 - 앞에서 풍자적 표현 기법을 사용하여 고린도 교회의 교만과 분쟁을 심하게 책망하던 바울은 이제 어조를 바꾸어 사랑이 담긴 권면 곧 영적으로 겸손해질 것을 간곡히 호소하고 있다. 바울의 이러한 권면 속에는 고린도 교회를 향한 그의 부성애적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참된 사랑은 단순히 감상적인 동정이나 자비에 그치지 않고 대상의 참된 성숙을 위해 책망이나 훈련, 공의를 시행하는 아픔을 감내(堪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계 3:19).

[15절]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바울은 자신을 고린도 교회의 영적 아버지로 천명함으로써 다른 지도자들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고린도 교회 설립자인 자신의 위치와 권리를 내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자신의 책망 및 권면이 진실된 것이며, 책망의 동기 또한 부성애적 사랑에서 기인된 것임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16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바울의 이 선언은 단순히 자신의 추종자나 바울 당파의 일원이 되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바울이 본을 보인 사랑과 실천과 그의 겸손과 고난에의 동참, 지적 교만과 불손한 태도를 버리고 신앙 안에서 화합하는 것, 결론적으로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을 의미한다(11:1).

[17절]

신실한 아들 디모데. 디모데는 바울의 전도를 통해 회개한 믿음의 아들로서 바울이 이 편지를 고린도에 보낼즈음에 마게도냐 지방을 통해 고린도로 향하고 있는 도중이었다(행 19:22; 딤전 1:2).

[20절]

하나님의 나라. 신학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재림으로 성취될 메시야 왕국을 의미한다<막 1:15, 하나님 나라의 개념>. 여기서는 미래적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복음의 능력과 사랑의 실천을 의미한다(고후 5:17).

 

# 해설

충성된 일꾼 (1~5절)

인간적 판단 기준으로 복음 사역자들을 구분지어 파쟁을 조장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최후 심판을 의식하면서 '그리스도와 그 복음에의 충성'이라고 하는 대의(大義)에 몰입할 것을 권면하는 말씀이다.

고린도 교인의 교만 (6~13절)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교만함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자신과 아볼로 및 다른 교회 지도자들의 겸손과 대조하여 풍자적으로 드러낸다. 고린도 교인들의 교만은 지적(知的) 우월성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파당을 일삼은 것이었다.

사랑의 권고 (14~21절)

고린도 교인들에게 겸손하라는 간곡한 권고를 던짐으로써 지금까지 논의되었던 고린도 교회의 분쟁 문제를 마무리짓는다. 본문에는 어떻게 하든 고린도 교인들을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시키려는 바울의 눈물겨운 사랑이 가득 담겨 있다.

 

# 핵심

1~13절

바울은 함부로 타인을 판단하는 잘못을 경계하였다. 사실 고린도 교회의 분열 양상은 교인들이 교만한 마음으로 서로를 판단했기 때문이다.

미말에 처한 상황 (9절)

'미말'(헬, 에스카토스)은 사람들 중에서 가장 보잘것없고 비천한 처지를 의미한다. 초대 교회 당시, 기독교에 대한 핍박이 극심하던 때에 전도자들은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만으로 체포당해 원형 경기장에 사자 밥으로 내던져졌다. 그러면 그들은 수많은 관중이 구경하는 가운데 맹수와 사투를 벌여야 했다. 바울은 사도들이 복음을 위해 이토록 극심한 고난을 감내했음을 강조하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미말에 두셨다'고 했다. 이 말은 원형 경기장에서 벌어지는 그 날의 마지막 구경거리를 염두해 둔 표현이다.

 

# 묵상

사명맡은 자 (1~2절)

사명을 맡은 자들이 유의해야 할 점은, 그 사명이 하나님의 손에 있으며, 하나님의 일이므로 하나님께서 이루어 나가실 것이라는 것을 믿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성실히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충성의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때는 내외적으로 방해요소가 따를 것인데, 이러한 것들에 귀기울이거나 한눈 팔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한 길을 굳게 디뎌 나가야 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사명을 맡은 자들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충성해야 하는 절대적인 주종의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관계는 그리스도로부터 위임된 권한과 의무를 동시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심판하실 그 날을 바라보는 종말론적인 열심이 필요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책망 (7~13절)

고린도 교회는 교회의 분쟁을 낳은 영적 교만과 자기 과신 때문에 책망을 받았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은사는 하나님과 우리 자신에 관한 참된 지식을 더하여 줍니다. 그러므로 영적 지식이 성숙할수록 나타나는 교회의 열매는 겸손과 섬김의 수고입니다.

사랑의 책망 (14절)

바울은 사랑하는 자녀라는 말을 하므로 바울의 책망이 담고 있는 진정한 의도와 목적이 무엇임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경고는 절망이나 포기가 아닌, 참된 회개와 소망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담고 있습니다(렘 29:11). 하나님의 말씀보다 인정을 앞세운 거짓 훈계와 위로는 참된 의미에서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디모데를 파송한 바울 (17절)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 교회에서 가르친 것들을 상기시키고,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의 사랑을 새롭게 확인시키기 위해서 디모데를 고린도 교회에 보냅니다. 교회의 교육은 새로운 내용을 더하는 지식의 축척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예수 그리스도의 지식을 성령으로 새롭게 하여 전달하는 데 있습니다.(빌 3:1).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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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1~23절)
분쟁의 요인들 - 전장에서 세상적인 지혜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성령의 감동하심만을 의지하라고 강조한 바울은 본장에서 고린도 교회의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해 언급한다. 즉 고린도 교회의 분쟁이 신앙의 미성숙과 세상 지혜를 자랑하는 인간적인 교만으로 인해 방생한 것임을 밝힌다. 그와 더불어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복음 전도자와 신자들의 관계를 밝히 드러냄으로써 고린도 교인들의 화합을 간곡하게 권면하고 있다. 또한 본장의 내용 속에는 고린도 교회를 향한 바울의 견책, 교훈, 격려, 호소 등이 적절하게 배치되어 있어 많은 감동과 영감을 주며,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진한 애정이 잘 드러나 있다. 본장은 성도들이 자신의 본 모습을 바로 깨달아야 한다는 것과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할 것, 참된 화합은 인간적인 야욕을 버리고 하나님의 일에 힘쓸 때 가능하다는 접을 교훈해 준다.
(1~9절)
영적 미숙과 분쟁 - 앞에서 성령에 속한 사람과 육에 속한 사람을 대조시킨 바울은 그 원리를 고린도 교인들에게 직접 적용시킨다. 여기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분쟁 원인이 영적 분별력의 결여와 하나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에 더 치중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그들이 추종하던 자들은 하나님의 사역자에 불과하며, 성도들을 실질적으로 양육하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심을 증거한다. 본문은 특히 인간은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인간 경배는 우상 숭배로서,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며 참 경배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심을 강조한다.
[1절]
육신에 속한 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아이들로, 구원은 받았으나 영적으로 미숙한 자들을 의미한다. 이들은 2:14절의 육에 속한 사람, 즉 구원받지 못한 자들과는 구별된다. 이들은 항상 신앙의 초보에 머물러 있어 하늘나라의 깊고 비밀한 은총, 신앙적 실천이 주는 참된 기쁨, 의(義)의 말씀을 경험치 못한 자들이다(히 5:12, 13).
[2절]
젖. 고린도 교인들의 영적 미숙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은유적 표현으로 기독교 교리의 초보를 뜻한다. 밥 젓과 대조되어 하나님 말씀의 깊은 영적 원리와 심오한 교리를 뜻한다(히 5:12). 지금도 못하리라. 하나님의 심오한 말씀 곧 밥을 먹지 못하는 자들은 현실적인 여러 문제 곧 분쟁, 도덕적 타락 등을 스스로 해결치 못하며 자유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깊은 은총을 자신들의 생활 속에서 맛보지 못한다는 의미이다(요 8:32).
[4절]
고린도 교회의 분열상이 구체적으로 지적되어 있다. 본절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분열은 지도자들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 당파심은 인간의 이기적, 자연적 본성과 직결된 것이라는 점, 이러한 당파심은 하나님 안에서만 해결될 수 있다는 점을 교훈한다. 한편 고린도 교회 내에 네 개의 당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파와 아볼로파만 실례로 든 것은 두 파가 대표적인 당파이며, 이런 수치스러운 일로 그리스도와 선배 사도인 베드로의 이름이 더럽혀지기를 원치 않는 바울의 배려 때문이었다(1:12).
[5~8절]
하나님의 종인 전도자 - 본문에서 바울은 당파의 주역이 된 자신과 아볼로가 하나님의 종이란 사실을 밝히 드러내어 분쟁의 부당성을 강하게 지적하고 있다. 즉 영적 성장의 진정한 주체자는 하나님이시며, 인간은 단지 그 일에 쓰임 받는 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명백히 함으로써 그들도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한 상을 받는 한 인간에 불과하다는사실을 거듭 강조한다.
[9절]
하나님의 밭. 성도들을 의미한다(사 5:1; 마 13:1~9). '하나님의 집'이 구속받은 영혼의 연단과 성화 과정에 중점을 두고 있는 반면에 이것은 복음으로 인간 영혼을 새롭게 하는 중생의 사역에 그 강조점을 두고 있다(딛 3:5).
(10~15절)
성도들의 행위에 따른 상급과 책망 - 본문은 종말, 즉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최후 심판과 깊은 연관이 있다. 이때 성도들은 영벌의 심판이 아니라 봉사와 충성의 여부에 따른 상급<히 13:2, 3, 성도의 봉사와 상급>, 곧 심은 대로 거두게 될 것이다(고후 9:6; 갈 6:7).
[10~11절]
터를 닦아 두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기초를 놓은 것을 의미한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기초가 될 수 있으며, 그리스도를 떠난 교회는 이미 참된 기독교 공동체가 아님을 분명히 한다.
(12~15절)
행위와 공력에 따른 상급을 언급 - 본문은 일반 성도들보다는 복음 전도자들이나 특별한 직분을 맡고 있는 자들을 일차적인 대상으로 한 교훈 및 경고이다. 즉 건축물로 비유된 성도들을 무엇으로 가르치고 어떻게 양육했는가에 따라 그들의 공력이 드러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롬 14:12; 계 22:12).
[12절]
금, 은, 보석.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영감을 의지하여 사역한 자들의 공력과 선행으로 열매를 풍성히 맺는 성도의 충성된 삶을 의미한다. 반면 나무, 풀, 짚은 철학이나 세상의 지혜로 사역한 자들의 공력과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한 성도들의 불출성한 삶을 가리킨다(골 2:8).
[13절]

그날이...밝히리니.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날에 각 사람의 공력에 따른 결과가 공개적으로 드러날 것이라는 의미이다.

[15절]

본절은 그리스도의 재림 날 성도들의 공력에 대한 '불'시험이 있을 것과 무가치하거나 잘못된 동기에서 나온 공력은 불타 없어질 것, 그리고 참된 공력은 상급의 기준이 된다는 점을 암시한다<계 22:12, 구원 받은 자의 상급 문제>.

[16~17절]

하나님의 성전. 성도들을 하나님의 밭과 집으로 비유한 바울은 이제 그들을 성령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으로 선포하고 있다. 본절의 성전(헬, 나오스)은 특별히 하나님의 임재 처소인 지성소(출 25:8)를 의미한다. 알다시피 성전은 전이스라엘 위에 임재해 계시는 하나님의 상징적 처소였다. 그런데 신약 시대에 이르러서는 성도의 각자에게 성령이 임재하여 내주하시므로 이제는 성도 각자에게 성령이 임재하여 내주하시므로 이제는 성도의 각 인격이 모두 다 구약 시대의 성전과 같게 되었다(6:19).

(18~23절)

세상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 - 1:19~25절의 내용과 연결되어 세상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가 역설적으로 대조되어 있는 본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원이며, 하나님을 부인하는 인간의 지혜는 거짓된 것이며 자신을 속이는 일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21~22절]

본문에서 바울은 온 우주 안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축복이 구속받은 교회에 속한 것이라고 선포한다. 특히 본문은 구속받은 교회는 만물의 중심임과 성도들은 인간적인 것을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우쳐 준다(4절; 1:12).

[23절]

본절은 인류의 궁극적인 근원, 즉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고 있다. 즉 성도들의 구속은 그리스도의 중보로 이루어졌으며 그리스도의 중보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보여 준다.

 

# 해설

영적인 미숙과 분쟁 (1~9절)

분쟁이라고 하는 실제적 당면 문제로 돌아가 바울은 교인들의 영적 미성숙(1, 2절)과 분쟁(3~5절)을 지적하고 있다. 이 둘은 상호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 왜냐하면 영적 미성숙 또는 분별력 결여는 결국 분쟁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터 (10~15절)

견고한 건물은 좋은 터 위에 세워져야 하듯 교회 또한 모퉁잇돌 되신 그리스도의 터(엡 2:20) 위에 세워져야 함을 전제한 후, 봉사와 충성의 정도에 따라 각 성도에게 다양하게 주어질 상급을 설명한다. 이는 단지 '지옥에 가지 않는다'는 식의 소극적 신앙 자세를 취하는 자들에게 엄중한 책망으로 다가오는 말씀이다.

성전 된 몸 (16~17절)

예수께서 자신의 육체를 성전(요 2:9~21)이라고 부른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개인적으로든지 공동체로든지 간에 하나님의 성전으로 불린다. 본문은 도덕적, 영적 타락과 음란이 만연한 오늘날의 세태에 경종을 울린다.

지혜의 근원 (18~23절)
두 가지 상이한 지혜, 곧 하나님의 지혜와 세상적인 지혜가 역설적으로 대조되어 나타난다. 전자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이나(1:18~25) 생명의 길로 인도하고, 후자는 스스로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함과 아울러 자만으로 인한 분쟁을 야기시키기도 한다. 특히 22절은 왜곡되고 편협한 분파 의식에 종지부를 찍게 함은 물론 만물을 상속받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원대한 자부심을 일깨운다(롬 8:17).

 

# 핵심

1~9절

교회 지도자들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워 나가는 일꾼에 불과하다. 본문은 특정 지도자를 중심으로 파당을 형성한 고린도 교인들의 어리석음을 책망하는 부분이다.

아볼로 (4~6절)

구약 성경에 능통했던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인이다. 그가 언제,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했는지에 대해서는 전해지지 않으나 세례 요한의 세례에 관해 알고 있었던 점(행 18:25)으로 보아 요한의 영향을 받아 회심한 것 같다. 바울이 3차 전도 여행을 시작하기 앞서 에베소에 당도한 그는 그곳에서 전도하다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만나 더욱 심오한 복음의 진리를 접했다. 그런 그는 고린도 등의 아가야 지방을 다니며 유대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이심을 증거했다(행 18:26~28절).

 

# 묵상

육신에 속한 자 (1~2절)

육신에 속한 자란 그리스도 안에 있으나 성령을 좇아 행하지 않는 자를 가리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과 은혜 안에서,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믿는 영혼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광을 얻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시기와 분쟁을 일삼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으로 육신에 속한 부끄러운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 못한 자로 현실적인 문제와 도덕적 타락을 스스로 해결치 못하며, 자유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깊은 은총을 생활 속에서 맛보지 못할 것입니다.

교회의 사역자들의 태도 (4~9절)

교회의 사역자들은 교회를 세우시고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동역자로 세우신 교회의 일꾼들을 통하여 그 사역을 이루십니다. 영적 성장의 주체자는 하나님이십니다. 교회의 사역자들은 단지 그 일에 쓰임받는 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겸손해야 합니다.

교회의 터 (10~15절)

교회의 터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진정한 교회 공동체는 대속하신 그리스도의 피와 공로로만 그 터를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전 (16~17절)

성령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사람의 심령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도 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성령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곳이므로 성전인 그리스도인은 영혼의 순결함과 기도와 헌신의 열정이 항상 충만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소유 (18~23절)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니 사람은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이 말은 결국 이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 드려야 합니다. 자랑할 만한 모든 선한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므로 모든 영광과 찬송은 당연히 선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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