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놀라운 사랑의 섭리 (옥한흠 목사)

[요한복음 18장 33절~38절]
33절 -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34절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
35절 -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36절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37절 -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38절 -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단호한 뜻이었습니다.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이 미리 알고 정하신 뜻에 따라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행2:23).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이 오래 전부터 알고 미리 작정하신 일입니다.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지 아니하면 안된다는 분명한 판단 아래 하나님께서 내린 결론입니다.

왜 저주의 죽음을 죽으셔야 하는가? 우리 모두가 율법의 저주 아래 갇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율법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했지만 우리는 자신만을 사랑했습니다. 결국 율법이 명령하는 하나님의 뜻에 철저하게 불복종했기 때문에 그 불복종에 뒤따르는 죄의 값을 물으시는 저주만이 우리에게 남아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저주의 죽음을 십자가에서 대신 당하신 것입니다. 오늘 읽은 빌라도의 재판 과정과 대제사장과 그 무리들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끌고 갈 때 한 일들과 행동을 보면 하나님의 섭리가 십자가를 통해서 어떻게 나타났는가 하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강압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게 하려고 대제사장들을 충동질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자발적으로 행동하도록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러므로 가야바, 대제사장과 그 추종자들은 자기들이 원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기를 원했고 하나님이 무슨 뜻을 갖고 계시느냐 하는 것은 전혀 상관이 없는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 사람들의 증오와 잔인성이 하나님의 뜻을 성취시키는 도구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놓고 우리가 몇 가지 정리를 해야 될 은혜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아무도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너무 사랑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외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기로 작정하셨어요. 이것은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잔인하게 죽이려고 했던 대제사장들의 행동이 거꾸로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의 홍수를 가져다 주었고 그들이 악하게 행동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사랑은 더 이 세상에 넘치고 넘치게 되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바꾸신다는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악을 선용하십니다. 악인들이 가장 악한 짓을 하도록 하심으로 자기의 선한 뜻을 이루실 때가 많이 있습니다. 사탄도 악인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악인도 쓸모가 있고 목적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세상에 남겨 놓고 계십니다.

셋째는 예수님 그분 만이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하실 구원자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다는 것이 재판 상에서 드러났습니다. 죄가 없는 분이라야 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실오라기만한 죄가 있어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데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사실을 누가 증명했습니까? 예수님의 원수들이 증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십자가의 주님을 생각할 때마다 십자가를 자랑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기뻐해야 합니다. 십자가 앞에 우리의 마음을 쏟아 놓아야 합니다. 우리의 가슴에 십자가로 인한 뜨거운 감격과 찬양이 있기를 바랍니다.

<본 말씀은 옥한흠 목사의 주일설교(1999.3.28)를 요약,정리한 것 입니다.>

제목 : 주님은 지금도 기도하신다 (옥한흠 목사)

[요한복음 17장 6절~17절]
6절 -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7절 - 지금 그들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로부터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8절 -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9절 -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10절 -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11절 -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12절 -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13절 -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14절 -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15절 -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16절 -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17절 -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시기 바로 직전 마지막으로 하신 아주 유명한 기도입니다. 이 마지막 기도를 보면서 제자들을 세상에 두고 떠나시면서 기도하신 예수님이라면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기도하고 계실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를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예수님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유의 주가 되신 하나님의 아들이 구더기 같은 존재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향하여 ‘내 것’이라고 하면서 굉장한 은혜와 영광을 안겨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신 그 내용은 어떤 것일까요?
첫째, ‘하나되게 하옵소서’ 하는 기도입니다. 11절의 ‘우리’는 누굽니까?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입니다. 바로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처럼 우리들도 진리와 사랑으로 하나되기를 기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 되지 못하면 우리는 세상을 복음으로 이길 수가 없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둘째, ‘악에 빠지지 않게 하옵소서’ 하는 기도입니다. 세상은 악한 세력이 여전히 건재하고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하고 공격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악한 세상은 우리를 표적으로 삼아 가지고 24시간 쉬지 않고 공격합니다. 우리를 유혹해서 죄에 빠지게 합니다. 우리 자신이 신앙 생활을 건강하게 할 수 없도록 갖가지 함정을 파 놓고 기다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악을 피해야 되고, 대적해서 막아야 합니다.

셋째,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하는 기도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거룩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는 성령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넷째, ‘자기의 영광에 우리 모두가 참여 하게 해달라’하는 기도입니다. 24절에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심으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지금 누리고 계시는 영광은 우리가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세계입니다.

주님이 누리는 그 영광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사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날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최상의 행복은 아직 도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앞에 있습니다. 뒤에 지나간 것보다도 우리 앞에 있는 것은 굉장히 기분 좋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결국은 우리가 그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자기가 누리는 그 영광을 함께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힘을 내세요. 예수님의 기도가 우리 배후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우리를 뒤에서 보호하고 있습니다. 이 기도가 있는 이상 우리를 세상에서 당할 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절대로 낙망하지 마세요. 세상을 두려워 하지 마세요. 비겁하게 인생을 살지 마세요. 하늘에 계시는 우리 주님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본 말씀은 옥한흠 목사의 주일설교(1999.2.28)를 요약,정리한 것 입니다.>

제목 : 최고의 소원, 하나님께 영광 (옥한흠 목사)

[요한복음 17장 1절~5절]
1절 -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누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2절 -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3절 -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4절 -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5절 -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혼자 죽음의 길을 떠나시면서 염려와 불안에 떨고 있는 제자들을 격려하시기 위해서 매우 긴 설교를 하신 후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시면서 기도하시기 시작합니다. 17장 모두가 예수님의 기도를 담고 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1절), 그의 기도의 첫마디예요. ‘때가 이르렀사오니’ 이제 십자가의 죽음을 맞을 시간이 임박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드리는 소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은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옵소서’ 였습니다.

‘영화롭게 하다’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드러내고 그 분에게 합당한 경배와 찬양을 돌리는 모든 행동’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죠. 이 사랑을 우리가 어떻게 드러낼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높이 드러내고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 바로 영광 돌리는 것이요. 우리 하나님은 선하신 뜻을 갖고 계신다지요. 그 뜻을 우리가 밝히 드러내면서 그 하나님이 찬양을 받으시도록 한다면 이것 모두가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평소에 아버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하신 일을 예수님이 다 성취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세상에서 해야 될 일이 뭡니까? 바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이 영생을 이 세상에 주시는 일을 책임지고 오셨어요. 그래서 주님은 3년 동안 그 일을 위해서 있는 힘을 다해서 정성을 다 쏟아서 그는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십자가의 죽음이 남은 것입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는 죽음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원수 된 것을 다 처리하시고 하나님과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이 되게 하신 것이 바로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이 십자가의 죽음을 자기가 스스로 죽을 때, 비로소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령하신 모든 일을 이제는 완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님의 마음의 소원,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기를 정말 원했다면 이 십자가의 죽음을 피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죽음이기 때문에 자기 십자가를 놓고 영광이라고 해석을 하셨어요.

여러분 우리의 최고의 소원, 마지막 소원은 무엇입니까?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을 예수님처럼 최선을 다해서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복음을 전하여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영생을 얻도록 하는 이 일을 위해서 세상에 보냄을 받았어요.

오직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의 소원이 어디에 있느냐 입니다. 예수님처럼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에 있다면 여러분의 모든 생은 그 소원을 중심으로 해서 이어질 것이고, 전개될 것입니다. 우리 내면에 기쁨이 솟을 것입니다. 이 기쁨을 가지고 우리가 이 세상을 밝히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 말씀은 옥한흠 목사의 주일설교(1999.2.21)를 요약,정리한 것 입니다.>



제목 : 믿음의 인프라를 구축하라 (오정현 목사)

 

[요한복음 2장 1절~11절]

1절 -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2절 -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3절 -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4절 -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5절 -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6절 -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7절 -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8절 -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9절 -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10절 -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11절 -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오늘 본문은 잘 알고 있듯이 요한이 기록한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심정을 잘 이해한 사람입니다. 그 요한이 ‘예수께서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안에서 행하셨다…’고 합니다.

기적이 아니라 표적입니다. 기적은 결과가 중요하지만 표적은 그 표적 뒤에 담긴 목적과 동기가 중요합니다. 이 사건은 요한에게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신앙의 인프라를 구축할 수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첫번째 표적을 가나안 혼인잔치에서 포도주 표적으로 행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땅에 펼쳐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려면 먼저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줘야 합니다. 제자들을 부른 것은 하나님 나라 건설에 동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먼저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의 관이 분명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인프라를 구축하려면 천국의 관이 분명해야 합니다.

이유는 그 당시 유대사람 정신 구조가 아주 잘못되었습니다. 천국이 아니라 지옥 같았습니다.
첫째는 바리새인들, (유대지도자들로 율법주의자,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사람들입니다.)
또하나는 사두개인들(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람, 성경의 기적을 믿지 않는 이들, 자유주의자)
세번째는 에센(Essenes)파, (잘못된 신비주의자, 금욕주의자, 하나님을 위해 희생한다고 하면서 스스로 고행하는 것)
이럴 때 주님께서 혼인잔치 집을 통해 천국관의 시각을 갖도록 해주셨습니다.
혼인집은 기대와 설레임, 기쁨이 있는 곳입니다. 이곳에서는 즐거워해야 합니다.
바울은 ‘천국은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조용한 성격이라도 예수믿고 구원받은 집은 기쁨이 넘쳐야 합니다.

두번째는 기적의 관한 우리의 시각입니다.
언제 기적을 경험하나요? 3절에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라고 합니다. 당시에 포도주가 모자라면 잔치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심지어 법정에 서야 할 위기입니다. 그럴 때 기적이 이루어 집니다. 모든 기적은 어려움 다음에 생깁니다. 문제 없이는 기적이 없습니다. 모든 문제 다음에는 기적이 온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날마다 햇볕 같은 날은 언젠가는 사막이 됩니다. 문제 없는 인생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4절을 보면 언뜻 마리아의 청을 거절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런데 기적관이 분명하면 문제를 문제로 알지 않습니다. 문제를 지혜롭게 예수님께로 들고 갑니다. 그리고 준비를 합니다. 5절을 보면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합니다. 기적에 대한 분명한 뿌리를 내린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문제를 문제로 보지 않고, 주님께로 들고 가는 마음, 무슨 말씀을 하시던지 거절로 알지 않고 매달리는 심정, 그럴 때 우리가 상상도 못할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기적관입니다.

세번째는 변화관입니다.
물이 포도주가 된 사건은 맹물 같은 인생이 성령의 폭발력 있는 인생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껍데기의 변화가 아니라 근본적인 변화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뿌리입니다. 제자훈련의 목표는 변화입니다. 다락방의 목표는 영적변화의 산실입니다.
저는 제자훈련을 통하여도 바뀌지 않는 분들을 볼 때 정말 마음이 아픕니다. ‘변화’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을 통해 보여주신 신앙의 토대입니다.

천국관, 기적관, 변화관이 자리를 잡히면, 이제 부수로 얻어지는 축복이 있는데, 그것은 10절입니다. 세상의 방법과 주님의 방법이 다릅니다. 세상은 처음에는 좋지만 나중에는 안 좋은 것을 내 놓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방법은 처음보다 끝이 더 좋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가면 갈수록 더 축복을 받습니다. 이것이 마음에 와닿기를 바랍니다.

세상은 처음에 좋지만 나중에는 독침으로 쏩니다. 하나님은 가면 갈수록 향기롭습니다.
요한의 변화를 아십니까? 요한은 변화되기 전, 성격은 벼락의 아들로 불릴만큼 거칠었는데, 갈수록 그는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요한은 말년에 에베소 감독이 되어 설교를 했는데, 날마다 사랑에 대해서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베드로 역시 다혈질 사람이 후에는 고난을 받아서 하나님을 생각하며 참으면 아름답다고 할 정도로 성품이 바뀌었습니다. 인격이 변화된 것입니다. 바울 역시 그렇습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주님의 방법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의 깊이에 들어가면 이런 축복을 받습니다.

<본 말씀은 오정현 목사의 주일설교(2003.10.26)를 요약,정리한 것 입니다.>  

제목 : 지금은 서로 사랑할 때 (옥한흠 목사)

 

[요한복음 13장 31절~35절]

31절 -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32절 -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33절 -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34절 -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절 -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향하여 지금은 서로 사랑할 때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은 얼마나 아름답고 강한 것입니까?

십자가의 죽음을 피부로 느끼는 긴장된 순간 예수님이 제일 먼저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바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와 같이 마지막 떠나는 장면에서 서로 사랑하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3년을 따라다녔던 제자들이 예수님이 처참하게 십자가에서 처형되는 것을 보는 순간 받을 충격은 너무나 큰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정신적인 위기와 영적인 위기에서 그들로 하여금 꿋꿋하게 버틸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총체적 위기가 닥쳤을 때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다음 세 가지를 꼭 실천에 옮겨야 됩니다.

첫째, 위로하는 것입니다. 골고다 현장에서 넋을 잃고 돌아온 제자들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너나 가릴 것 없이 그들은 다 실패자요, 배신자요, 비겁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지탱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한 상처와 좌절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뭘까요?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입니다. 때로는 위로의 말, 격려의 말 한마디가 사랑의 전부를 대변할 때가 있습니다.

둘째, 용서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공동체 생활의 접착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정이라는 공동체가 끊어지지 않도록 묶어주는 것이 용서입니다. 우리 모두는 완전한 사랑을 갈구하고 있지만 사실은 한 사람도 완전한 사랑을 줄 수도 없고 받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서로가 용서해 주어야 될 빚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인내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13장에 보면 진정한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인내를 여러 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참을 인(認)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는 옛 속담이 있습니다. 참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요. 험하고 가파른 길을 오르면서 함께 참는 것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랑은 은혜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고 하는 사랑이기 때문에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은혜를 받으면 서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묵상하면서 감격하는 사람은 서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의 은혜를 놓치지 않고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 말씀은 옥한흠 목사의 설교를 요약,정리한 것 입니다.>

제목 : 정말 구원 받으셨나요? (홍문수 목사)

[요한복음 3장 16절~18절]
16절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절 -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절 -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구원의 정확한 의미를 모르면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구원의 의미를 안다고해도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한채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없지 않다.

1. 구원의 의미 : 죄, 고통, 사망, 심판에서 건져냄
모든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한다. 심판을 받고 영원한 사망을 겪게 된다. 마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과 같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주셨다. 밧줄을 내려준 것이다. 이게 바로 기독교의 구원이다.
기독교와 세상 종교들과의 근본적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세상 종교는 마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죽어가는 사람에게 열심히 노력해서 빠져나오라는 것과 같다. 기독교는 밧줄을 던져주고 그걸 잡으면 산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밧줄을 잡지 않으면, 다시 말해서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별 수 없다.
인류의 시조 아담 이후 모든 인간은 죄인이다. 그로 인해 사망을 당할 운명에 처해 있다.
-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여기에서 사망은 우선 영적인 사망이다. 죄는 분리시키는 작용을 한다. 육체가 멀쩡히 살아 있어도 영혼이 하나님과 분리된다. 이게 영적 사망 상태이다. 그러면 하나님에게서 오는 영적인 기쁨과 평안, 만족이 가로막힌다. 그래서 온갖 고통 가운데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육체의 수명을 다하면 육체적 사망이 오고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
-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심판 후에는 영원한 내세이다. 천국이냐, 지옥이냐? 구원 받으면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 영생복락, 구원받지 못하면 영원한 지옥에 들어가는 영벌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이제 사망과는 결별하고 생명으로 옮겨 간다.
-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성경을 보면 구원과 비슷한 용어들이 여럿 나온다.
구속이란 값을 주고 산다는 의미이다. 속량은 값을 주고 사서 풀어주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 흘리신 값으로 구원하는 것을 가리켜 구속 혹은 속량이라 부른다.
- 에베소서 1: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 로마서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구원을 생명과 관련해서 설명하는 용어도 있다. 중생, 거듭남이다.
죄로 인해 죽어 있던 영혼이 성령으로 다시 새 생명을 얻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로 중생 혹은 거듭남이라 부르는 것이다.
- 요한복음 3:5~6 예수껫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2. 구원의 확증 : 성경의 약속, 성령의 내적 증거, 인격과 삶의 변화
1) 성경의 약속 (16절)
- 로마서 10:9~10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 요한일서 5:12~13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 하나님의 약속은 불변하다. 하나님은 절대로 펑크를 내지 않는다.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니까 의심되면 걱정하지 말고 성결에서 확인하면 된다.
2) 성령의 내적 증거
-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그 속에 성령이 와 계시다. 이를 가리켜 '성령의 내주'라고 한다. 그리고 성령은 우리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믿고 고백하게 해 준다.
- 로마서 8:15~16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성령이 내 속에 오셔서 증거해 주시는 결과임을 기억하시기 바란다.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것은 이미 구원받은 증거이다. 그러므로 절대 의심하지 마시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시기 바란다.

  3) 인격과 삶의 변화

    -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 변화된 모습이 있으면 그게 바로 구원받은 증거이다. 자식은 부모를 닮기 마련이다.

    -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됐다면 당연히 하나님을 닮아야 한다. 예수 믿기 전과 후의 모습은 반드시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예수님과 똑같이 변화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차가 있지만 점진적으로라도 변화된 인격과 삶의 모습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게 있어야 참 믿음이고, 그래야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이다.

    - 야고보서 2:19~20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 야고보서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 귀신도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다. 아는게 중요하지 않다. 정말 하나님을 믿으면 구체적인 행동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마태복음 7:20~21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 구원 받은 사람은 뭔가 변화된 모습이 반드시 나타나게 되어 있다.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신앙생활에 힘이 있다. 기도도 잘되고, 생활에 활력이 있고, 하나님의 승리와 축복을 경험한다.

세상에 아무리 좋은 것을 많이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구원받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 마태복음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부디 흔들리지 않는 구원의 확신으로 세상에서 승리하시기 바란다.  


제목 :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 (옥한흠 목사)

 

[요한복음 8장 31절~32절]

31절 -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32절 -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자유는 성경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주제입니다. 우선 하나님은 자신을 자유를 주시는 해방자로 계시하고 계십니다. 갇힌 자를 놓아주시고 포로에게 자유를 선언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노예, 압박, 포로라는 좋지 못한 개념을 하나님도 혐오하신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우리에게 영원한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곧 자유를 의미한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영적인 자유입니다. 그것은 죄의 권세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사단은 오늘도 죄를 가지고 인간을 속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자유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가 죄로부터 자유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은 참 제자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유한 사람입니다. 이 놀라운 자유를 주시기 위해 주님은 한 가지 조건을 말씀하십니다. "내 말에 거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집안에 들어오면 집에 거한다고 말합니다. 거기에는 '떠나지 않고 머문다', '교제한다', '순종한다'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의 말씀에 거할 수 있을까요? 첫째로 항상 말씀을 청종해야 합니다. 이것은 말씀에 대해 항상 마음을 열어놓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기분 좋다고 듣고 아니면 안듣는 것은 말씀에 거하는 자의 태도가 아닙니다.

둘째로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오직 성경 안에서 자기를 계시하므로 예수님을 알려면 성경을 배워야 합니다. 배운다는 것은 끌린다는 말과 통합니다. 끌리는 바가 있어야 알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보면 그 마음이 이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배우고 싶지 않다는 사람은 보지 못한 자요, 관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셋째로 말씀을 마음에 담고 묵상하며 즐거워해야 합니다(시1:2, 119:103). 어린아이가 단 사탕을 입에 물고 즐거워하듯이 말씀을 사랑하고 즐거워하는 것, 그것이 말씀 안에 거하는 삶입니다.

넷째로 순종해야 합니다. 성경은 지적인 만족을 주기 위해 주어진 책이 아닙니다. 항상 듣고 배우는 말씀은 우리의 생각과 사상과 삶을 지배하는 원리가 되어야 하며 그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한번 인격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종하는 자를 통해 세상은 작은 예수를 보게 됩니다. 이렇게 청종하고, 배우고, 묵상하고, 순종하면 말씀 안에 거하는 참 제자가 되고 주님이 주시는 자유를 누릴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자유는 실제적이고 체험적인 것입니다. 마음으로만 자유롭다고 생각하면서 실제로는 감옥에 앉아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닙니다.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까? 마음으로 "이러면 안되는데.. " 하면서도 끌려가고 있다면 여러분은 아직 자유인이 아닙니다. 진리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자유케 하십니다.

말씀안에 거하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선을 행할 자유도 있고 악을 거절할 자유도 있습니다. 육신의 소욕을 거절할 자유도 있고 성령의 소욕을 좇을 자유도 있습니다. 이 자유를 주신 주님께 감사합시다. 그리고 말씀안에 거하는 참 제자가 됩시다.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이 그것을 바라고 계십니다.

<본 말씀은 옥한흠 목사님의 요한복음강해(1996.7. 21)를 요약,정리한 것 입니다.>

제목 : 응답 받는 비결 (피종진 목사)

[요한복음 15장 16절~17절]

16절 -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17절 -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의 기도에는 분명한 응답이 있다.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주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어떤 문제가 있어도, 어떤 사건이 있어도, 어떤 요구사항이 있어도 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응답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응답을 받지못하는 기도도 있다. 그러면 기도의 응답을 받는 비결이란 무엇일까? 

1. 열매 맺는 생활을 해야 한다. (16절)
우리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신다.
우리가 생활 가운데 맺어야 할 열매는

  ① 손의 열매이다.

    - 잠언 31:31 그 손의 열매가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그 행한 일로 말미암아 성문에서 칭찬을 받으리라 (손의 열매란 구제를 하면서 선한 것을 심는 것이다)

  ② 행위의 열매이다.

    - 이사야 3:10 너희는 의인에게 복이 있으리라 말하라 그들은 그들의 행위의 열매를 먹을 것임이요 (행위의 열매란 현실이 아무리 왜곡되어 있고 거짓과 죄악이 난무하며 죄를 합리화하고 또 의인이 고난 받고 악인이 형통한 것처럼 보여도 의로운 삶, 불의를 멀리하는 삶, 악에 대해 단호하게 거부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③ 입의 열매이다.

    - 잠언 12:14 사람은 입의 열매로 말미암아 복록에 족하며 그 손이 행하는 대로 자기가 받느니라 (악하고 더러운 말을 버리고, 정직하고 의로운 말, 축복된 말, 은혜로운 말, 복음을 전하는 말, 평안의 말을 할때 기도의 응답을 받게 된다)

  ④ 긍휼과 선한 열매이다.

    - 야고보서 3: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⑤ 평강의 열매이다.

    - 히브리서 12: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⑥ 성령의 열매이다.

    - 갈라디아서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
  - 요한복음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하는 삶을 살 때 기도의 응답을 받게 된다. 사무엘하 6장 11절을 보면 여호와의 궤가 오벧에돔의 집에 3개월 동안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 온 집에 복을 주셨다고 말씀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함께하는 곳에 축복이 있다.
시편 기자는 시편 119편에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했는지 말씀을 종일 묵상한다(97절)고 했고, 주의 말씀의 맛이 어찌 그리 단지 꿀보다 더 달콤한 기쁨과 즐거움을 가져다 준다(103절)고 했으며, 주의 말씀은 어두움을 밝혀주는 등과 빛이라(105절)고 했고, 주의 말씀을 준행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소원했으며(116절), 주의 말씀을 사랑하는 자에게 큰 평안이 있고 장애물이 없다(165절)고 고백했다. 

3. 믿음으로 구해야 한다.
  - 마가복음 11: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믿음으로 구할때 기도의 응답을 받게 된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하심을 확실히 믿고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간구를 들어주실 것이기 때문에 이미 받은 것으로 믿어야 한다.
야고보서 1장 6절을 보면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다”고 말씀했다. 기도하고 의심하는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약 1:7).
예수님은 물 위를 걷다가 바람을 보고 두려워하여 물속에 빠져버린 베드로의 손을 붙잡아주시며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마 14:31)라고 책망하셨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어느 정도는 있었지만 분명한 확신이 없어 의심하였기에, 거친 바람이 불자 순식간에 믿음을 상실함으로써 더이상 물 위를 걷지 못하고 깊은 물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의심은 성도로 하여금 아무런 역사도 이루지 못하는 무기력한 삶 속에로 뼈져들게 한다.

‘손의 열매, 행위의 열매, 입의 열매, 긍휼과 선한 열매, 평강의 열매, 성령의 열매’ 등 열매를 맺는 생활을 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하는 생활을 하며, 오직 믿음으로 구하여 기도하는 것마다 다 응답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란다.


제목 : 선한 목자와 충성된 양 (박한응 목사)

 

[요한복음 10장 1절~15절]

1절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절 -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3절 -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절 -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5절 -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6절 -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7절 -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절 -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절 -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절 -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11절 -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절 -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13절 -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14절 -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절 -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목자가 되셔서 양된 우리들을 인도하시는 모습을 보게 된다. 예수님이 사시던 유대 나라에는 당시에도 거짓 선지자나 참 목자를 사칭하는 삯군 목자들이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시에 최고의 전통과 신앙을 자랑하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서기관들과 율법사들을 책망하셨다.
  - 마태복음 23: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 마태복음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 마태복음 23: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이 시대에도 거짓 그리스도와 삯군 목자가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 이 시대는 말세가 가까워서 오히려 더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곳곳에 사이비 종교들이 우후죽순처럼 늘어가고 또 극성을 부리고 있다. 그런가 하면 순수한 우리 기독교의 지도자들도 어쩐 일인지 자꾸만 퇴색되어 가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런가 하면 교인들도 자꾸만 순수성을 잃고 퇴색되어 가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살면 분명 하나님의 약속하신 은혜와 축복을 받을텐데 그렇지를 못하고 자꾸만 인본주의로 흐르고 자기중심적으로 변하고 있다.

1. 선한 목자는 어떤 목자인가?
  1) 양의 이름을 불러 인도하는 목자라고 했다. (3절)
참 목자, 곧 선한 목자는 양의 이름을 부른다. 이는 항상 양의 관심을 가지고 양을 잘 보살핀다는 뜻이다. 그래서 목사들은 교인들의 이름을 불러가면서 제단에서 기도한다.
그러다가 어떤 교인이 교회를 등한히 하고 세상길로 가면 더욱 소리 높여 부른다. 그 심정을 누가 알겠는가? 누가복음 15장에는 잃은 양을 찾는 목자에 대한 비유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 누가복음 15:4~7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2) 양들의 앞서가며 양들을 인도하는 목자이다. (4절)
선한 목자는 양들의 뒤에서 모는 것이 아니라 앞서서 간다. 그러면 양들이 목자를 따라간다. 앞서간다는 것은 여러 가지의 의미가 있다. 믿음과 신앙이 앞서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생활도 성도들보다 앞서가야 한다. 경제적으로 앞서가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교인들의 생활을 앞서서 이끌어가야 한다는 말이다. 또 감사 생활도 앞장서서 한다.
  3) 양들에게 꼴을 얻도록 하는 목자이다. (9절)
선한 목자는 양들에게 항상 부드러운 꼴을 먹여주는 목자가 되어야 한다. 오늘의 양된 성도들이 먹는 꼴은 말씀이다. 그래서 예배 시간에 설교가 반을 차지하는 것이다. 성도들은 설교를 들어야 한다. 말씀을 듣지않으면 믿음이 자라지 않는다.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 로마서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 로마서 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그러므로 말씀의 꼴을 먹어야 믿음도 자라고 신앙이 자란다. 우리들의 육신도 영양소를 잘 섭취를 하여야 하는데 편식을 하거나 음식을 잘 먹지 못하면 영양실조에 걸리게 된다. 영양실조에 걸리면 온갖 질병이 침투해 들어온다. 고치기가 어렵게 된다.
우리들의 믿음도 말씀의 꼴을 먹지못하면 영양실조에 걸리게 된다. 믿음이 영양실조에 걸리게 되면 신앙이 병들게 된다. 신앙이 병들면 나태하고 게으름에 빠지게 된다. 또 죄를 짓게 된다. 죄지으면 지옥 간다.
  4) 양들에게 생명을 얻게하는 목자이다. (10절)
선한 목자는 양들에게 생명을 주는 목자이다. 삯군 목자는 오히려 양들의 생명을 빼앗기 위해서 양의 가죽을 쓰고 달려오는 이리와도 같다. 양의 생명을 얻게 한다는 것은 양들로 하여금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영원한 영생을 얻도록 인도한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삯군 목자들은 양들이야 어찌 되었든지간에 목회를 하나의 직업으로 생각을 하고 있다. 그래서 양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양들을 지키는 보호 본능이 없다. (12절) 
  5)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목자이다. (11절)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어린양 된 우리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러므로 선한 목자의 본을 보여 주셨다.
이것이 바로 순교 정신이다. 목자는 양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양이 목자를 위해서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래서 참 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항상 순교 정신으로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2. 착한 양은 어떤 양인가?
양도 양 나름이다. 양이라고 해서 모두가 순진하고 착한 것은 아니다. 교인들 중에서도 목사를 괴롭히고 나중에는 목사를 내쫓는 교인들도 있다. 기왕이면 좋은 양이 되어야 한다. 어떤 양이 좋은 양이 되겠는가?
  1) 목자의 음성을 잘 듣는 양이다. (4절)
좋은 양은 목자의 음성을 잘 들을줄 아는 양이다. 비록 미물의 짐승일지라도 자신을 지켜주는 목자의 음성을 잘 듣는다. 그러나 가끔씩 목자의 음성을 듣지않고 오라고 불러도 오지않고, 앞서가는 양들을 따라가라고 하여도 가지도 않는 양들이 있다. 그래서 목자의 마음을 졸이게 하고 애타게 하는 양들이 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양이다. 우리의 목자는 예수님이시다. 그 예수님을 대신하는 목자가 바로 우리의 목사님이다. 믿음이 온전하고 신앙이 바른 성도는 자기의 교회의 목사의 말씀을 잘 분별하여 듣는다.
지금은 말세가 가까워서 세상에는 비슷한 삯군 목자가 많이 나왔다. 모습도 비슷하고 목소리도 비슷하다. 능력도 행하는 것 같다. 그러나 참 목자와 거짓 목자의 분별을 잘해야 한다. 그리고 목자의 음성을 잘 분별하여 들어야 한다.
  2) 목자를 잘 따라가는 양이다. (5절)
짐승 중에 개나 고양이나 말과 같은 동물들은 본능적으로 방향을 감지하는 기능이 발달이 되어서 길을 잃어도 곧 찾아올 수 있어도 양은 방향감각이 둔한 동물이기 때문에 양처럼 쉽게 길을 잃어버리는 동물도 없다. 그래서 양은 한번 길을 잃으면 다시 길을 찾아오기란 불가능하다. 그러기에 목자의 인도함이 없으면 끝없이 유리방황하다가 결국 맹수들에게 찢겨서 죽기가 십상이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사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참 목자되신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들이 그릇 행하여 죄악의 구렁에 빠진 우리 인간을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셔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다.
그러므로 주님의 양된 우리들은 항상 목자되신 예수님을 잘 따라가는 양이 되어야 한다. 양은 목자를 따라가지 않으면 길을 잃게 된다. 길을 잃게되면 곧 멸망이다.
  3) 삯군 목자를 따라가지 않는 양이다.
세상에는 거짓 선지자도 많이 있고 삯군 목자도 많이 있다. 참 목자와 삯군 목자를 잘 분별하여 삯군 목자를 따라가지 말아야 한다. 어떻게 삯군 목자를 분별할 수 있겠는가?
    ① 삯군 목자는 물질에 집착이 심하다.
      - 그래서 성도들과 물질적인 돈 거래를 많이 한다. 그리고 성도들에게 이런 저런 그럴듯한 이유로 물질의 요구를 많이 한다. 돈을 빌려달라는 등 또는 무엇을 사는데 도와달라는 등, 또는 성도들이 무슨 어려운 일을 당할때에 그 문제를 해결하여 준다는 명목으로 돈을 요구한다. 그렇게 되면 대부분의 성도들은 거절을 하지 못하고 응하게 된다. 성도와 목회자간에는 절대로 물질적인 거래가 있어서는 안된다.
    ② 명예에 집착을 한다.
      - 목사는 하나님이 주신 목사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 외의 모든 명예는 엄격히 말해서 필요치 않다. 오히려 목회에 지장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감리사 선거나 무슨 선거가 있으면 돈을 써가면서 그것을 하고 싶어서 야단들이다.
    ③ 사생활이 투명하지를 못하다.
      - 목사는 항상 사모님과 함께 다니고 함께 행동을 하여야 한다. 그래야 오해도 받지 않는다. 이상한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목사의 행적이 투명하지 못하면 항상 구설수에 오르게 된다. 그래서 참 목자는 항상 사생활이 투명하여야 한다.
이와 같은 목사는 거의 삯군 목자일 가능성이 많이 있다. 그래서 이 마지막 말세 때에는 목자를 잘 따라가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좌우로 치우치거나 딴전을 보면 안된다. 삯군 목자를 따라가면 결국 물질적으로, 심적으로, 신앙적으로 엄청난 피해를 당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헤어나기가 어렵게 된다.

 

그러면 오늘의 말씀을 정리해 보겠다.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린다면 우리들은 모두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좋은 양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선한 목자만 따라가는 양과 같은 성도가 되어야 하겠다.
왜 좋은 양이 되어야 하는가?
하나님은 목자의 음성을 잘 듣고 목자를 잘 따라가는 양을 좋아하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원하신 목자이신 예수님을 잘 따라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란다.
왜 선한 목자만 따라가야 하는가?
선한 목자는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 예수님을 따라가야 한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대신하여 교회마다 세워주신 목사를 따라가야 한다. 양들은 목자를 믿고 따라야 한다. 양이 목자를 의심하면 어찌하는가? 목회를 하면서 가장 어렵고 괴로운 것은 경제적인 어려움이 아니다. 불신자들의 핍박이 어려운 것이 아니다. 바로 교인들이 목사의 진심을 몰라줄때 가장 힘들고 괴로운 것이다.
  - 갈라디아서 6: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성도들은 항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좋은 양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제목 :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 (피종진 목사)

 

[요한복음 16장 12절~15절]

12절 -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13절 -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우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절 -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15절 -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

 

사람이 누구의 인도를 받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성도는 이 땅에 사는동안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을 위한 친절한 안내자로 성령을 보내주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도다운 삶을 살려고 하면 성령과 동행해야 한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인생을 실패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약속도 잃지 않게 된다. 성령님은 항상 우리 곁에 계셔서 낯설고 험한 길을 우리가 잘 갈수 있도록 돕는 분이시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1. 진리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는다. (13절)
성령께서는 우리를 위한 친절한 안내자가 되셔서 진리로 가는 그 길을 보여주신다.
  ① 진리는 예수님이다.

    -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 인간에 대한 성령의 인도하심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절정을 이룬다. 예수님은 길을 보여주는 진리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진리이시다. 우리는 진리이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
  ② 진리는 말씀이다.

    - 시편 119:43 진리의 말씀이 내 입에서 조금도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주의 규례를 바랐음이니이다

    - 우리는 우리의 입에서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이 떠나지 않으며 항상 그 은혜로운 말씀, 생명과 축복을 주는 말씀을 전하는 일을 계속해야 한다.
  ③ 진리는 성령이다.

    - 진리의 성령님은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장래 일을 알게 하신다. 이는 성령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따라 적절하게 모든 준비를 할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는 분이시다.

      → 고린도전서 2: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 성령님은 우리가 진리 안에서 행하기를 기뻐하신다.

      → 요한삼서 1:3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 진리 가운데 행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영생의 은혜를 베풀어주시지만,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가 임하게 된다.

      → 로마서 2:7~8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2.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 (14절)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 성령의 역할이다. 예수께서 죽기까지 복종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셨던 것처럼(빌 2:6~8) 성령 또한 그리스도의 인격 및 사역의 의미를 분명하게 알리심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냈다.

  - 빌립보서 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시편 19편 1절을 보면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했다. 모든 창조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지음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늘도 다 감당할 수 없을만큼 충만하고 풍성하며 높으시다.

  - 시편 19: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 시편 113:4 여호와는 모든 나라보다 높으시며 그의 영광은 하늘보다 높으시도다

하나님의 영광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에게 임하여 빛을 발하는 삶을 살게해 준다.

  - 이사야 60:1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헛된 영광을 구하게 되면 서로 노엽게 하거나 다투고 시기하게 된다.

  - 갈라디아서 5: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헤롯은 하나님께 돌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아니하고 자신이 가로채어 죽음의 형벌을 받게 되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게 된다.

  - 사도행전 12:23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 

3.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된다.
  -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성령께서는 예수에 관해 증언할뿐 아니라 예수를 위해서 증언하는 분이시다. 따라서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예수에 관한 증인이 될뿐 아니라, 예수를 위한 증인이 되어야 한다. 예수의 제자들은 오순절 성령강림이후 복음을 담대히 전하는 자가 되었다.
마가복음 16장 15절을 보면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셨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살리는 가장 중요한 일이다. 복음 증거는 오직 성령의 권능으로만 가능하다.

  -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주님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님께서 주시는 권능을 받아야만 한다. 복음이란 인간의 말과 재주로 증거할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언제 어디서나 항상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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