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자의 표적을 보고 하나님 아들임을 알라

[요한복음 10장 31절~42절]
31절 -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32절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33절 -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34절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35절 -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36절 -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
37절 -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38절 -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
39절 - 그들이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
40절 - 다시 요단 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베풀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41절 -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42절 -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신성 모독을 이유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돌로 치려 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가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스스로 하나님 아들이라 함은 신성 모독이 아니라 하십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아버지 일을 그들이 믿었다면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아버지 안에 예수님이 계심을 알았을 것입니다.

1. 신성 모독에 대한 반문 (31~36절)
유대인들에게 신성 모독은 그 무엇보다 큰 죄입니다. 그들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하신 예수님 말씀이 신성 모독에 해당한다고 주장합니다. 사람인데 하나님 행세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시편 82편 6절에서 보듯 하나님의 사람들을 신이라고 칭하는 것이 허용되었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특별한 사자인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 것이 어떻게 신성 모독이 되느냐고 반문하십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없이 성경을 해석한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표적과 말씀을 통해 자신을 계속해서 계시하셨음에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지 않고 성경을 해석하면 그들과 똑같은 실수를 범할 수 있습니다.
*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해도 왜 신성 모독이 되지 않을까요? 하나님과 관계없이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요?

2. 아버지의 일을 보고 믿는 믿음 (37~42절)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은 그분이 누구신지를 분명히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신성 모독 의혹을 해소할 방도를 제공하십니다. 예수님의 정체를 판단할 수 있는 객관적인 잣대는 바로 그분이 하시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역사가 하나님의 역사와 다르다면 예수님의 역사를 믿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행하시는 치유와 말씀이 창조자 하나님의 역사와 똑같음에도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도 끝내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결국 하나님의 역사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완악함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심을 고백하고, 예수님의 역사를 하나님의 역사로 인정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 예수님의 말씀과 표적, 하나님의 말씀과 표적은 어떤 점에서 부합하나요? 아들과 아버지가 하나님이심을 알지 못하면 성경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요?

오늘의 기도
은혜 아니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을 수 없는 어리석은 인생임을 깨닫습니다. 항상 하나님 일을 하신 예수님처럼 지나가는 삶의 자리마다 제가 하나님과 동거함을 보이게 하소서. 말씀대로 순전히 믿고, 믿음대로 오롯이 살아 내신 예수님을 닮아 가게 하소서.


출처 : 생명의 삶 (큐티)

하나님을 알면 예수님을 알게 됩니다

[요한복음 10장 22절~30절]
22절 -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23절 -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거니시니
24절 -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이르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하니
25절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26절 -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27절 -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28절 -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절 -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30절 -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예수님이 수전절에 성전을 거니시니 유대인들이 에워싸 자신들을 의혹하게 하지 말고 그리스도면 밝히 말씀하시라 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말씀하셨고 아버지 이름으로 행하시는 일들이 예수님을 증언하지만, 그들이 예수님의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아버지는 하나이십니다.

1.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유 (22~29절)
듣고 순종할 마음이 없으면 믿음도 생기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표적도 보고 말씀도 들었지만, 여전히 그분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지를 밝히 말씀해 달라는 그들의 요청에 예수님이 주신 대답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그들이 예수님과 그분의 표적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들이 예수님의 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양이 아닌 것은 그들의 운명이 그렇게 정해져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표적을 믿지 않았기에 예수님의 양이 아니며, 예수님의 양이 아닌 상태로 계속 남아 있기에 계속 예수님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운명은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과 그분 말씀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결정됩니다.
*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예수님의 양은 그분의 음성을 듣는 자인데, 나는 어떠한가요?

2. 나와 아버지는 하나 (30절)
아버지를 아는 것과 아들을 아는 것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정체를 밝히라는 요청에 대한 예수님의 최종 답변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는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하나'는 일치를 뜻하며, 아버지와 아들이 '앎'이라는 깊은 교제 관계에 있다는 의미입니다(10:15). 이는 아버지와 아들이 상호 내주하는 관계임을 말합니다(17:21). 서로 구별되면서도 상대의 인격을 자신 안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데 예수님을 모를 수 없고, 예수님을 아는데 하나님 아버지를 모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과 성령님이 완전히 하나를 이룬다는 진리를 받아들여야 올바로 믿는 것입니다.

*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어떤 면을 강조하나요?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이시듯, 내가 하나 되기에 힘써야 할 지체는 누구인가요?


오늘의 기도

연약하고 무지한 저를 주님의 양으로 품어 주신 은혜가 얼마나 감격스러운지요. 주님이 인도하시지 않으면 저는 한 걸음도 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세상 모든 것보다 크신 하나님의 손이 저를 완벽히 붙드심을 신뢰하며, 빼앗길 수 없는 기쁨으로 노래하는 하루 되게 하소서.



출처 : 생명의 삶 (큐티)


자기 양을 위해 목숨 버리는 선한 목자

[요한복음 10장 11절~21절]
11절 -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절 -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13절 -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14절 -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절 -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6절 -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17절 -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18절 -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19절 -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20절 -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그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21절 -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삯꾼은 목자가 아니어서 이리가 오면 양을 버리고 달아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선한 목자시며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십니다. 예수님이 목숨을 버리심은 그것을 다시 얻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는 스스로 버릴 권세도, 다시 얻을 권세도 있습니다. 이 말씀으로 인해 유대인들이 분쟁합니다.

●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
성도는 참목자와 거짓 목자를 구별해야 합니다. 그러면 참목자는 누구일까요? 첫째, 참목자는 짐승이 양을 공격할 때 양을 위해 목숨을 바쳐 싸웁니다. 그러나 거짓 목자(삯꾼)는 위기에 처한 양을 버리고 달아납니다. 둘째, 참목자는 양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합니다. 이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에서 나오는 친밀함과 같은 것입니다. 셋째, 참목자는 양을 위해 자원해서 목숨을 바칩니다. 이렇듯 참목자와 거짓 목자는 쉽게 구별됩니다.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신 예수님이 '선한 목자'시고, 하나님 백성인 양을 버리고 헤치는 바리새인들이 '삯꾼'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직접 택하신 제자들뿐만 아니라 이후에 제자 될 모든 이의 목자십니다. 민족과 문화가 달라도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 아래 모든 제자는 하나의 양 무리가 될 것입니다.

* 선한 목자와 삯꾼의 차이는 무엇으로 드러나나요? 예수님 닮은 선한 목자가 되기 위해 내가 갖추어야 할 부분은 무엇인가요?


출처 : 생명의 삶 (큐티)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는 제자

[요한복음 10장 1절~10절]
1절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절 -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3절 -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절 -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5절 -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6절 -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7절 -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절 -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절 -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절 -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강도입니다. 문지기는 목자를 위해 문을 열고,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릅니다. 누구든지 양의 문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받고,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습니다. 예수님은 양이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십니다.

1. 목자와 강도 (1~5절)
주님과 우리는 목자와 양의 관계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논쟁을 이어 가시며 양과 목자의 비유를 드십니다. 논점은 '누가 참으로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使者)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판단하는 기준은 첫째, 양의 문을 통해 들어가느냐 여부입니다. 즉, 하나님의 보내심(파송)을 받았느냐는 것입니다. 그가 목자인지는 문지기(세례 요한 혹은 선지자들)가 확인해 줍니다. 둘째, 양과 음성으로 소통하는가 여부입니다. 하나님 백성인 양은 하나님이 보내신 목자의 음성을 듣습니다. 이런 점을 볼 때 예수님이 목자시고 바리새인들은 강도입니다. 우리가 따르는 이는 누구인지가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강도를 따라가는 사람은 강도입니다. 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만이 그분의 양이요 그분의 제자입니다.
* 예수님이 양의 목자이심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나는 목자이신 주님의 음성을 얼마나 잘 알아 듣는 양인가요?

2. 더 풍성한 생명 (6~10절)
예수님은 목자시고 동시에 양의 문이십니다. 양은 문을 통과해 우리로 들어가 그 안에 머물러야 짐승의 위협에서 보호받습니다. 절도요 강도요 도둑인 바리새인들은 양들을 죽이고 헤치려 하지만, 문을 통해 들어간 양들은 보호받고 생명을 얻습니다. 예수님만이 양의 문이라는 것은 그분만이 유일한 구원자 되심을 의미합니다. 놀라운 일은 이 생명을 이 땅에서 얻을 수 있고, 더 풍성히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생명'은 주님과 올바르게 관계 맺음을 의미합니다(17:3). 그 생명이 더욱 풍성해짐은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얻는 기쁨과 복이 풍성해진다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우리는 주님께 생명을 얻고 또 더 풍성한 생명을 얻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 예수님이 목자시면서 동시에 양의 문이시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나는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은 후 얼마나 더 풍성한 생명을 누리고 있나요?

오늘의 기도
선한 목자이신 주님이 친히 돌보시니 제겐 부족함이 없습니다! 세상의 소리를 좇아 마음대로 앞서가지 않고 주님 음성만 따르게 하소서.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 주시며 저를 인도하시는 주님 사랑에 반응하면서 녹록지 않은 오늘도 풍성한 생명의 꼴로 만족하게 하소서.


출처 : 생명의 삼 (큐티)

자신이 영적 맹인임을 모르는 것이 죄입니다

[요한복음 9장 35절~41절]
35절 -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36절 -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37절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38절 -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39절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40절 -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41절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유대인들이 맹인이었던 사람을 쫓아낸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이 그를 만나십니다. 예수님이 인자를 믿느냐 물으시자 그는 인자가 누구신지 모르나 믿고자 한다 말합니다. 예수님 자신이 인자라 말씀하시니 그가 믿고 예수님께 절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본다 하니 죄가 그대로 있습니다.

1. 찾아오시는 예수님 (35~38절)
주님은 순전한 마음과 믿음을 가진 이를 찾으십니다. 치유받은 사람이 바리새인들에게 박해받고 쫓겨났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이 일부러 그를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자신을 '인자'로 계시하십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유대인 남자-선지자-그리스도'로 알아 갔듯이 치유받은 사람도 그분을 '사람-선지자-인자'로 알아 갑니다. 그는 마침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신 인자로 고백하며 경배합니다. 치유받은 사람은 마음이 깨끗해 알고 있는 그대로 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바리새인들의 박해를 받았지만, 한편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친히 그분을 계시해 주시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순전한 마음은 주님을 보게 하고 진리를 알게 합니다.
* 치유받은 사람은 자신을 인자로 계시하시는 예수님께 어떻게 반응했나요? 괴롭고 힘들때 먼저 나를 찾아오신 주님을 어떻게 경험했나요?

2. 영적 맹인인 바리새인들 (39~41절)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신 사역은 새 창조입니다. 예수님은 육체의 환자도, 영혼의 환자도 치유해 건강하게 만드십니다. 먼저 환자가 자신의 병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환자가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환자 취급하면서 자신은 건강하다고 생각해 의사인 예수님께 치유해 달라고 요청하지 않는다면, 그의 병은 치유될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영혼의 환자라는 것을 전혀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것을 보지 못하면서 본다 하는 사람들을 영적 맹인으로 만드는 심판을 하러 오셨다는 예수님 말씀에 움찔합니다. 예수님은 보지 못하면서 본다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죄라고 하십니다. 모든 질병과 죄는 주님 안에서 해결받을 수 있지만, 병과 죄가 없다고 하면 치유받거나 용서받을 길이 없습니다.
* 예수님은 보지 못하면서 본다고 하는 죄가 왜 용서받지 못한다고 하실까요? 말씀의 의미를 알지 못하면서 아는 척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까요?

오늘의 기도
세상에서 어떤 것을 보고 누릴지라도 주님을 믿지 않으면 심판의 흑암에 갇힌 영적 맹인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을 부인하는 죄를 범하지 않게 하시고, 삶의 순간순간 감았던 눈을 떠서 주님을 바라 보게 하소서. 온 세상의 구원자요 심판자이신 주님께만 엎드려 경배하게 하소서.


출처 : 생명의 삶 (큐티)

두려움과 인습을 넘어선 진실한 믿음의 고백

[요한복음 9장 13절~34절]
13절 - 그들이 전에 맹인이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
14절 -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15절 - 그러므로 바리새인들도 그가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를 물으니 이르되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 하니
16절 - 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그들 중에 분쟁이 있었더니
17절 - 이에 맹인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하니
18절 - 유대인들이 그가 맹인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
19절 - 이는 너희 말에 맹인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해서 보느냐
20절 - 그 부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우리 아들인 것과 맹인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21절 -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그에게 물어 보소서 그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22절 -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
23절 - 이러므로 그 부모가 말하기를 그가 장성하였으니 그에게 물어 보소서 하였더라
24절 - 이에 그들이 맹인이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25절 -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26절 - 그들이 이르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27절 -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28절 - 그들이 욕하여 이르되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29절 -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30절 - 그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31절 -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32절 -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33절 -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34절 -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맹인이었던 사람이 안식일에 눈을 뜨니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 묻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에게서 온 자인지, 죄인인지를 두고 분쟁합니다. 맹인이었던 사람이 예수님이 하나님에게서 오지 않았다면 눈을 뜨게 할 수 없었으리라고 말하자 바리새인들이 그를 쫓아냅니다.

1. 바리새인들의 심문과 상반된 반응 (13~23절)
참된 신앙은 결코 주변 상황에 좌지우지되지 않습니다. 선천성 맹인 치유 사건에 대해 바리새인들이 심문하자 치유받은 사람과 그 부모는 대조되는 답변을 합니다. 치유받은 사람은 처음에 말한 것과 똑같이, 예수님 말씀대로 했더니 치유되었다고 말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안식일 계명을 어긴 것이라고 주장해도 그는 예수님을 '선지자'로 고백합니다. 이에 반해 그 부모는 아들이 예수님께 치유받았음을 알고도 출교당할 것이 두려워 사실대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아들과는 달리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지 못한 것입니다. 사람이나 인습, 세상 권력을 두려워하면 예수님의 좋은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 치유받은 사람과 그의 부모는 각각 바리새인들 앞에서 어떠한 고백을 했나요? 내게 닥칠 손해를 두려워해 믿음을 저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2. 안식일 치유 기적의 두 가지 해석 (24~34절)
교리나 인습에 매이면 바른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안식일 치유 기적에 대해 바리새인들과 치유받은 사람의 해석이 극명하게 갈립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 계명을 어겼기에 죄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어디서 왔는지 불분명하지만 자신들은 모세의 제자라고 강조합니다. 치유받은 사람은 자신이 예수님을 통해 치유받은 사실과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자만이 놀라운 기적을 행한다는 것을 안다고 말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치유받은 자가 맹인으로 태어난 것을 죄 가운데서 태어난 것으로 규정하고는 감히 죄인이 의인인 자신들을 가르치려 든다고 윽박지릅니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특정 이념과 교리에 사로잡혀서 보면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도, 인정할 수도 없습니다.
* 치유받은 사람의 확고한 믿음의 고백에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반응했나요? 특정 이념에 사로잡혀 상대방을 판단하는 것이 왜 옳지 않을까요?

오늘의 기도
주변 분위기와 작은 불이익이 두려워 주님의 은혜를 저버렸던 저는 참 연약한 죄인입니다. 진리를 알렸다가 욕먹고 따돌림당할까 봐 뒤로 물러섰던 저를 용서하소서. 놀라운 치유와 안식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용기 있게 전할 수 있도록 제 마음과 입술을 크게 열어 주소서.


출처 : 생명의 삶 (큐티)

보시는 주님, 보게 하시는 주님

[요한복음 9장 1절~12절]
1절 -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2절 -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3절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4절 -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5절 -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6절 -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7절 -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8절 - 이웃 사람들과 전에 그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이르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9절 -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자기 말은 내가 그라 하니
10절 - 그들이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11절 -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12절 - 그들이 이르되 그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

[배경 이해하기]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신성을 가진 분으로 묘사됩니다. 이를 위해 사도 요한은 공생애 기간에 예수님이 행하신 일곱 가지 표적을 기록합니다. 첫째, 가나 혼인 잔치의 기적(2:1~11), 둘째,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기적(4:46~54), 셋째, 38년 된 병자를 치유하신 기적(5:1~9), 넷째,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6:1~13), 다섯째, 물 위를 걸으신 기적(6:16~21), 여섯째, 날 때부터 맹인 된 자를 고치신 기적(9:1~12), 일곱째,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11:1~44)이 그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여섯 번째 표적은 유대 종교력으로 7월(7:2; 초막절 또는 장막절, 태양력으로는 10월경)과 9월(10:22; 수전절, 태양력으로는 12월경) 사이에 역사하신 일입니다. 이때는 예수님이 십자가 수난을 당하시기 약 6개월 전입니다. 얼마 남지 않은 공생애 기간에 예수님은 자신이 신적 권능을 지니신 메시아임을 사람들 앞에서 확증하십니다. 구약성경은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기록합니다(출 4:11; 시 146:8). 따라서 예수님이 날 때부터 맹인 된 자를 고치신 이 표적은 그분이 하나님 아들이심을 대중 앞에 확실하게 드러내신 사건입니다.   

[관찰과 묵상]
1. 예수님이 길 가실 때 주목하신 사람은 누구인가요?(1절) 그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요?(8절)

예수님이 길을 가시다가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셨습니다. 그는 길거리에 앉아 구걸하는 걸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길을 가시다가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셨습니다(1절). 예수님의 사역에서 ‘보시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행동입니다. 요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일곱 가지 표적 중 세 번째 표적도 예수님이 예루살렘성 베데스다못을 지나시다가 근처 행각에 누워 있던 38년 된 병자를 ‘보시고’ 그에게 치유 의지를 물으신 데서 시작되었습니다(5:6). 세리 레위를 부르신 장면에서도 예수님은 세관에 앉아 있는 레위를 ‘보시고’ 그에게 “나를 따르라”라고 명하셨습니다(막 2:14). 또한 예수님은 뽕나무에 올라간 세리장 삭개오를 ‘쳐다보시고’ 속히 내려오라 하시며 그의 집에 유하겠다 하십니다(눅 19:5). 예수님은 육신이 병들고 연약한 이들, 당시 유대인들의 경멸 어린 시선을 받던 세리 같은 이들에게 관심을 가지시고 그들을 바라보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날 때부터 맹인이 된 사람을 치유하신 시기는 그분의 십자가 수난이 얼마 남지 않은 때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까지 사랑의 눈빛으로, 긍휼의 마음으로 소외되고 병든 사람들 곧 이 땅의 약자들을 바라보시고 권능의 손으로 치유하셨습니다.
적용과 나눔
나를 향한 주님의 따뜻한 사랑의 시선을 느낀 적이 있나요? 내가 관심과 사랑을 기울여야 할 이웃은 누구인가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고통을 간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종살이로 고통 받으며 신음하는 백성을 ‘보시고’ 당신의 종 모세를 통해 백성을 구원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출 3:7).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관심을 기울이십니다. 특히 고통 가운데 어려움을 겪는 백성을 바라보시고 감찰하십니다(느 9:9). 시선을 멈추고 바라본다는 것은 관심을 가진다는 증거입니다. 관심이 없으면 그냥 지나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 시선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시고, 특히 고통 가운데서 신음하는 자기 백성에게서 그 눈을 떼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어려움을 겪을 때 하나님의 부재를 느끼지만, 그 순간도 하나님이 여전히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는 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시련을 이겨 내고 소망 가운데로 나아갈 수 있도록 힘을 주십니다. 또한 우리도 그러한 하나님의 시선을 갖고 주변의 소외되고 처절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을 바라보도록 우리에게 도전하십니다. 자녀는 부모를 닮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자녀인 우리는 하나님을 닮아 가야 합니다. 연약한 이들을 향해 따스한 시선을 보내며 사랑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 된 이들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2. 날 때부터 앞 못 보던 사람을 두고 제자들은 예수님께 어떤 질문을 했나요? 이에 예수님은 어떻게 답변하셨나요?(2~3절)
제자들은 그가 맹인으로 난 것이 그 사람의 죄 때문인지 혹은 그의 부모의 죄 때문인지를 질문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맹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기 위해서라고 대답하십니다.
당시 유대 사회는 인간의 질병이나 불행의 원인을 죄의 결과로 이해했습니다. 심지어 사람이 아직 모태에 있을 때도 죄를 범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자들 역시 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이 자기 죄든 부모의 죄든 죄의 결과로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이리라 생각했습니다(2절). 그러나 예수님은 당시 전통적 견해와는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3절). 즉 그가 앞을 보지 못하는 상황을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 사회의 관심은 맹인으로 태어난 원인과 배경에 있었기에 제자들은 “왜 맹인이 되었는가?”라는 과거 지향적인 질문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사람을 통해 하나님이 행하실 일이 무엇인가?”라며 미래 지향적으로 답변하십니다. 예수님은 맹인을 통해 전능하신 하나님이 행하실 일에 대한 큰 기대감으로 차 있으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의 빛’(8:12; 9:5)이라 말씀하시고, 맹인의 눈을 뜨게 해 그가 새로운 인생을 살도록 하십니다(6~12절).  
적용과 나눔
내 삶에 고난과 아픔을 허락하신 하나님 뜻은 무엇일까요? 고난당하는 이웃을 어떻게 위로하고 격려하면 좋을까요?

개인적 차이는 있겠지만, 삶에서 고난과 고통은 모든 사람이 경험하는 것입니다. 현재 내가 겪는 고난의 원인이 단순히 죄만은 아닙니다. 물론 죄로부터 돌이키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방법일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욥 2:1~10; 벧전 4:12~13). 하나님은 인생의 어려움을 통해 그분의 선하심을 나타내시기도 하고, 인간이 생각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을 이루시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인생의 어려움을 겪을 때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며, 그 어려운 일을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영광을 기대하며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건강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또한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난과 고통을 보면서 무조건 죄의 결과라고 판단하고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선하신 하나님(시 34:8), 우리가 측량할 수 없고 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사 55:8)이 이루실 놀라운 역사를 함께 바라보며 위로하며 격려하는 것(롬 12:15)이 신앙 공동체 안에서 성도의 바른 태도입니다.


* 예수님은 소외되고 연약한 이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주목하십니다. 예수님의 시선이 머무는 자리에서 회복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질병은 죄의 결과’라는 당시 유대 사회의 관념을 깨뜨리시고 하나님의 바른 뜻을 선포하셨습니다. 나의 연약함이나 다른 사람의 연약함에 대해 죄 때문이라고 쉽게 정죄해선 안 됩니다. 인간의 고통과 연약함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담겨 있으며, 하나님은 그 연약함을 통해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길 기뻐하십니다. 참된 신앙인은 문제 속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일하심이 나타날 것이라는 소망을 잃지 않습니다.  


[말씀으로 기도하기]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고 쉽게 그를 정죄했던 저의 허물을 용서하소서. 고통 속에서도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보며, 항상 소망 가운데서 행하고 소망을 주는 자가 되게 하소서.    



출처 : 생명의 삶

질병의 근원을 따지기보다 주님의 일을 기대하십시오

[요한복음 9장 1절~12절]
1절 -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2절 -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3절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4절 -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5절 -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6절 -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7절 -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8절 - 이웃 사람들과 전에 그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이르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9절 -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자기 말은 내가 그라 하니
10절 - 그들이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11절 -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12절 - 그들이 이르되 그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이 누구의 죄로 그리되었는지 제자들이 묻자,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 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에 있는 동안 세상의 빛이라 하시고, 진흙을 침과 이겨 맹인의 눈에 바르신 후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십니다. 그가 씻자 밝은 눈으로 보게 됩니다.

1. 질병과 죄에 관한 관점 (1~5절)
진리에 대한 훌륭한 탐구자는 좋은 질문을 하는 사람입니다. 질문 안에 답이 예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탐구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천성 질병의 원인을 죄라고 여긴 유대인들에게는 그 죄가 부모의 죄인지 병자의 죄인지가 논쟁거리였습니다. 이 논쟁에서 어떤 대답도 명쾌한 성경적.이성적 근거를 제시할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선천성 시각 장애인(맹인)으로 태어난 사람을 보고 누구의 죄 때문인지 질문하자 예수님은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하십니다. 어떤 사람의 질병을 볼 때 질병의 근원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실까 질문해야 한다고 것입니다. 성도는 타인의 고난을 보고 그 사람을 정죄하기보다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일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 예수님은 날 때부터 앞 못 보는 사람에 대해 어떤 관점으로 말씀하셨나요? 나는 다른 사람의 질병이나 고난을 볼 때 어떤 생각을 하나요?

2. 치유받은 사람의 바른 대답 (6~12절)
예수님은 관습과 전통에 매이지 않으시고 한 생명을 위해 일하십니다. 당시 유대교의 안식일 규정을 타파하시고 안식일에 진흙과 침을 섞어 그의 눈에 발라 선천성 맹인을 치유하십니다(9:14). 맹인은 예수님이 창조자라는 것을 알지 못했지만 그분의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치유받은 후 의심하는 주변 사람들의 질문에 그는 사실 그대로 말합니다. '어떻게 치유되었는가'라는 질문에 예수님이 하라는 대로 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처소를 묻는 말에는 모른다고 답합니다. 그는 알고 있는 그대로 말하는 진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에게 유리한지 불리한지 따지지 않고 사실대로 말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좋은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 예수님은 날 때부터 앞 못 보는 사람을 어떤 방법으로 고치셨나요? 내게 불리할 수 있음에도 보고 들은 것을 사실 그대로 말하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오늘의 기도
눈앞에 놓인 캄캄하고 답답한 상황에 함몰되지 않고, 하나님이 이루실 일을 기대하며 기도하게 하소서. 날 때부터 볼 수 없는 자와 같던 저를 완전히 새롭게 하신 은혜로 제 삶을 붙드소서. 이제 어둠을 헤매는 자들을 주님께 인도하는 복음의 통로로 살게 하소서.


출처 : 생명의 삶 (큐티)

창세전부터 존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요한복음 8장 48절~59절]
48절 -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49절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는 귀신 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거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
50절 - 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
51절 -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52절 - 유대인들이 이르되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53절 -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54절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거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55절 -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 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
56절 -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57절 - 유대인들이 이르되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58절 -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59절 - 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귀신 들렸다 하자 예수님은 오직 아버지를 공경한다 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영광 돌리시고, 예수님은 아버지 말씀을 지키십니다. 아브라함이 나기 전에 예수님 자신이 계셨고 그가 예수님의 때 볼 것을 보고 기뻐했다고 하시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돌로 치려 합니다.

1. 누가 귀신 들린 자인가 (48~50절)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모욕적으로 비방해도 진리를 가르치십니다. '너희 아비가 마귀'라는 예수님 말씀에 유대인들은 감정적으로 대응합니다. 예수님께 모욕을 주기 위해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욕설을 하고, 미쳤다는 뜻으로 '귀신이 들렸다'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진정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가 누구인가'라는 논제를 꺼내십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과 행동은 하나님을 공경하는(헬, 티마오) 마음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들의 말과 행동은 하나님이 보내신 이를 공경하지 않고 무시하는(헬, 아티마조)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십니다(49절). 그렇다면 귀신 들린 자는 예수님이 아니라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 유대인들입니다(8:44). 하나님 백성이라고 자처하면서 하나님 아들의 말씀을 받지 않는 자가 귀신 들린 자입니다.
* 예수님은 귀신 들렸다는 모욕의 말에 어떻게 대응하시나요? 다른 사람을 욕하는 그 내용이 바로 나 자신의 상태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나요?

2. 예수님의 선재하심을 모르는 유대인들 (51~59절)
참믿음은 예수님이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임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으니 예수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아브라함보다 크신 분이요 선지자들보다 위대하신 분임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 말씀을 '지키면' 이 땅에서 영생을 맛볼 수 있다는 말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선재(先在)하심을 모르는 유대인들은 인간이 창조되기 전부터 예수님 자신이 존재한다는 말을 신성 모독으로 규정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돌로 치려 합니다. 그들이 예수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사랑으로 섬긴다면 진리를 밝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자신이 언제부터 존재해 오셨다고 말씀하시나요? 나는 예수님을 언제부터 계신 분으로 믿고 있나요?

오늘의 기도
온갖 모욕과 죽음의 위협에도 하나님 말씀을 따르고 지키시는 예수님을 제 삶 중심에 모시기 원합니다. 작은 비판과 손해에도 위축되던 제게 말씀을 깨닫고 담대히 순종하는 힘을 더해 주소서! 하루하루 영원한 생명을 맛보며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걸음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출처 : 생명의 삶 (큐티)

사람의 말과 행동은 그의 근원을 보여 줍니다

[요한복음 8장 31절~47절]
31절 -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32절 -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33절 -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34절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절 -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절 -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37절 -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38절 -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39절 -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
40절 -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1절 - 너희는 너희 아비가 행한 일들을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42절 -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43절 -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44절 -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45절 -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46절 -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도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47절 -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예수님이 그분을 믿은 유대인들에게 진리가 그들을 자유롭게 하리라 하시자, 그들은 종 된 적이 없다 합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아버지가 아브라함이라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거짓의 아비인 마귀에게서 났다 하십니다.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는 진리를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1. 죄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키시는 예수님 (31~36절)

제자도의 기초는 말씀 안에 머물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말씀에 호의를 보인 유대인들에게 참으로 그분의 제자가 되려면 '내 말'에 거해야 한다고 하십니다(31절). 이는 '내 말'(예수님 말씀)이 그들 안에 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37절). 이렇게 예수님 말씀과 어떤 사람이 상호 내주할 때(15:7) 그 사람은 진정한 제자가 됩니다. 그때 그는 진리를 경험하고 죄의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됩니다. 예수님 말씀이 그 사람 안에 거하지 않는 것은 진공 상태가 아니라 죄가 그를 지배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죄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는 길은 말씀을 마음속에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악은 저절로 물러가고 죄라는 악의 억압에서 해방됩니다.

* 우리가 예수님 말씀 안에 거하고, 예수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요? 말씀 안에 거하는 삶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2. 우리 아버지는 하나님인가, 마귀인가 (37~47절)

사람의 말과 행동의 됨됨이는 그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말조심한다고 좋은 말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원천이 좋아야 좋은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자신을 죽이려는 행동과 자신의 말을 오해하는 원천이 '너희 아비(아버지)'라고 하십니다. 유대인들은 혈통을 따라 자신들의 조상이 아브라함이요 영적 아버지는 하나님이라고 자만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말과 행동을 보시며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의 아버지가 하나님이듯 그들 아버지도 하나님이었다면, 하나님 아들을 죽이려 하거나 그분 말을 거역하는 행동은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첫 단계는 행동의 근원이 누구인지 스스로 확인하는 것입니다. 제자의 말과 행동의 근원은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 예수님은 그분 말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의 영적 아비가 누구라고 하셨나요?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시면 나의 말과 행동은 어떠해야 할까요?


오늘의 기도

거짓과 욕심 때문에 죄의 종이 되어 말씀이 제 안에 없다고 탄식하시는 주님을 음성을 들을까 두렵습니다. 신앙 연수나 직분에 만족하지 않고 주님 말씀으로 충만함을 얻는 제자로 세워 주소서. 저와 공동체가 진리 안에 거하기를 기뻐함으로 참자유를 누리게 하소서.



출처 : 생명의 삶 (큐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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