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도가 찾아가야 할 고향 (박한응 목사)

 

[창세기 32장 9절~10절]

9절 - 야곱이 또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10절 -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디모데후서 4장 7절~8절]

7절 - 나는 선한 싸움을 사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절 -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우리 성도들이 꼭 찾아가야 할 고향이 있다. 바로 하나님이 계신 천국이다.
우리의 영원한 고향은 이 땅에 있는 그 어느 곳도 아니고 오직 하늘나라이다.

  - 빌립보서 3:20~21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 골로새서 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인간은 누구나 고향을 그리는 마음이 있듯이 우리의 영혼은 영원한 천국을 사모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이 사모해야 할 곳은 바로 영원한 안식처요 우리 영혼의 고향인 저 천국 하늘나라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영원한 고향인 하늘나라를 어떻게 갈 수가 있는가?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말씀인 딤후 4:7-8 말씀에서 세가지를 가르쳐 주고 있다.

1.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하였다.
사도 바울은 딤후 2:3-4절 말씀에서 성도를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비유하였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영적인 싸움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것을 의미한다. 또한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라고 하였다.

  - 디모데후서 2:3~4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전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들과 싸우던 사람이다. 그런데 이제는 예수를 위하여 선한 싸움을 싸운다고 하였다. 오늘의 우리들도 전에는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를 핍박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선한 싸움을 싸우는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었다. 참으로 우리가 하늘나라에 갈때까지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되어 마귀와 싸워야 한다.
그런데 싸움을 하려면 무슨 싸움이든지 무기가 필요하다. 이 세상에는 가공할만한 엄청난 무기들이 있다. 지금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핵무기만 하여도 지구를 수백번이라도 파괴시킬 수 있는 많은 양이 비축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가 싸워야할 대상은 이러한 눈에 보이는 대상이 아니라 마귀와 싸우는 것이다. 이런 마귀와 싸우려면 어떤 무기가 필요한가?
  - 에베소서 6:10~12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 고린도후서 10:4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육의 싸움을 위해서는 수많은 돈을 드려서 무장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그리스도의 군대로서 영적싸움을 위해서는 너무나 소홀히 하고 있다. 우리의 선한 싸움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입지 않고는 승리할 수가 없다. 승리하지 못하면 죽음이다. 전쟁에는 2등이란 없다. 사느냐 죽느냐의 싸움이다. 만약에 우리가 사탄 마귀와의 영적 싸움에서 패배한다면 우리의 영원한 고향인 천국에는 영원히 들어갈 수가 없게 된다.

2. 우리의 달려갈 길을 달려가야 한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길과 자기의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간 성도의 본이 된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에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라고 하였다. 
  - 사도행전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도 바울은 전도자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였다. 그러나 그의 반면에 자기의 해야할 일도 잘하였다는 것이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일도 잘해야 하지만 자기의 처한 위치에서 자기가 해야할 일도 잘해야 한다. 가장은 가장으로서, 주부는 주부로서, 직장인은 직장인으로서, 학생은 학생으로서, 자신이 해야할 일을 잘 수행해 나가야 한다.
이 세상은 비록 죄악이 관영하고 패역한 세상이 되었지만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이 주신 생애를 헛되이 보내서는 안된다. “나의 달려갈 길 곧 주 예수께 받은 사명” 이말은 우리의 생명은 곧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생을 잘 살아야 한다는 목적이 있다. 
우리는 신앙의 경주와 삶의 경주에 충실한 사람이 되어서 주님 앞에 설때에 의의 면류관을 받아쓰는 축복을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란다.

3. 우리가 우리의 영적 고향인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얻기 위해서는 믿음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라고 하였다. 그리고 8절에는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라고 하였다.
아무리 선한 싸움을 잘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하였어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지 못한다면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을수 없다. 우리의 고향인 하늘나라에 가지 못한다면 예비되었던 의의 면류관도 아무 소용이 없다.
  - 마태복음 24: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 마가복음 13:13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우리는 믿음을 끝까지 지켜서 하나님의 약속의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란다.
  - 히브리서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우리에게 이 믿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끝까지 믿음의 정절을 지키는 신앙의 열녀가 되시기 바란다.

그런데 오늘날의 성도들은 너무나 쉽게 믿음을 배반한다. 너무나 값싸게 믿음을 저버린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을 비롯하여 성도들은 사자의 이빨과 발톱에 갈기갈기 찢기면서도 믿음을 지켰고, 화형을 당하고, 교수형을 당해도, 돌에 맞아도, 톱으로 켜서 죽임을 당해도, 믿음을 지켰다.

 

결 론 
우리의 고향인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시기 바란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순교를 당할때에 그의 영안이 열려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았다. 그가 순교의 면류관을 쓰고 오는 것을 맞이하려고 주님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벌떡 일어나 서 계신 것을 보았다.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서 그의 영안이 열리고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가서 장차 될 것을 친히 보고 기록을 하였다. 
  - 요한복음 14:2~3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 히브리서 11: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더 낳은 본향 즉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시기 바란다.

  - 시편 107:9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우리가 돌아갈 영원한 하늘나라, 그곳이 바로 우리가 가야할 참 고향인줄로 믿으시기 바란다.
그러므로 우리의 가족 중 한사람도 한심령도 낙오자 없이 모두 하나님의 나라에 갈수 있도록 부지런히 복음을 증거해야 한다.

요셉과 그 형제들 (김희보 前 총신대 신대원 교수)

요셉이 감옥 중에 있을때 술 맡은 관원장에게 다시 복직하면 꼭 자기를 기억하여 줄 것을 부탁했으나 그는 2년 동안이나 잊어버렸다가 창41:1에 보면 "만 2년 후에 바로 왕이 꿈을 꾼 때에 비로소 요셉을 생각하게 됐다"고 했다. 이것도 성경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기묘한 섭리였다고 믿을수 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2년이란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2년이란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는 년령을 기다린 것이라고 본다.
창41:46에 보면 "요셉이 바로 앞에 설 때에 그 나이 30세라"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이 30세가 되기를 기다리신 줄 안다. 왜 그런가 하면 30세란 것은 한 국가의 지도자가 되기 위한 공적년령이다. 민수기 4:3에 보면 "곧 30세에서 50세까지 회막의 일을 하기위하여 그 역사에 참가할만한 모든 자를 계수하라"고 한 것을 본다.
구약시대에 성전에서 봉사하려는 자도 30세부터 였음을 보여주는 말씀이다.
삼하 5:4에 보면 다윗도 왕위에 나아갈 때에 그 나이 30세라고 했다. 예수께서 공생애에 들어가신 것이 30세인 것도 이러한 관례를 따른 것인줄 안다.
하나님께서는 그때를 기다리시면서 요셉을 2년간이나 더 감옥에 머물러 두게하신 것이 분명한것 같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섭리가 얼마나 기묘한가? 요셉이 그것을 알았을리 없다. 그러나 후일 요셉도 이런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의지하는 신앙이 더욱 깊어졌다. 창45:5~8에 보면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께서 생명을 구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하나님의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들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에 보내셨나이다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하신 말씀이 있다. 이것은 그가 애굽의 총리가 된 후 자기의 형들 앞에서 한 말이다.
형들이 요셉을 만나고 옛날의 죄악을 생각하고 당황해 할때에 요셉은 그들을 위로하면서 하는 말이 "나를 이 애굽으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고 했다. "우리의 생명을 구하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이곳에 보내셨다"고 하면서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음을 근심하지 말고 한탄하지 말라고 오히려 위로했다. 이것은 모든 불행까지도 다 합동하여 유익하게 하신다는 하나님의 섭리로 요셉이 굳게 믿은 증거가 되는줄 안다. 요셉의 형들도 요셉의 그말을 듣고는 진정으로 과거를 뉘우치며 회개했다. 요셉은 또한 그들이 회개하는 것을 오히려 그들을 측은히 여겨서 슬피 울었다.

 
여기에서 특별히 요셉이 그 형들에 대한 애정과 또 진정으로 회개한 형들이 어떻게 되었는가를 생각해 보자.
창 42장이하에 요셉이 슬피 울었다는 기록이 7번이나 나타나 있다. 네번은 자기 형들을 만나후 울었고, 한번은 자기 동생 베냐민을 만나고 울었고, 한번은 자기 아버지를 처음 만났을 때요, 또 한번은 자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때 울었다.
이것은 요셉의 애정이 얼마나 두터운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제 그것을 몇가지로 생각해 보자.
창 42:24에 보면 "요셉이 형들을 떠나가서 울다가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더니"라고 한 말이 있다. 그 내용은 잘 아는대로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요셉의 형들은 곡식을 구하려고 애굽의 총리 요셉에게로 갔다. 그들은 요셉을 몰랐으나 요셉은 그들을 알았다. 거기에서 요셉은 그 형들을 시험해 보았다. 창42:9에 보면 "너희는 정탐꾼이라 이 나라를 엿보러 왔느니라"고 요셉은 말했다. 그는 그들을 3일 동안 가두어 두었다가 풀어주면서 또 하는 말이 창42:19이하에 보면 "너희 한 사람만이 인질로 남아있고 다른 형제들은 양곡을 가지고 가서 가족들의 주림을 구하고 마지막 아우 베냐민을 데려오라. 그리해야 너희들이 죽지 아니하리라"고 했다. 그때 그 형들이 서로 하는 말이 "우리가 아우 요셉을 인하여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그러므로 그의 피값을 치르게 되었도다"라고 했다. 그들은 옛날 요셉을 팔아버린 그 일을 크게 뉘우치게 됐던 것이다. 어린 요셉이 애걸하던 그 모습이 그들에게는 생생하게 되살아나게 되었다. 그들이 통역을 세웠으므로 요셉이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줄 알고 서로 말하며 탄식했다. 이렇게 그 형들의 슬퍼하는 말을 들은 요셉은 더 참을수가 없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물러가서 42:24에 있는 그대로 골방에 들어가서 홀로 목놓아 슬피 울었던 것이다. 그러나 요셉은 자기의 눈물을 그 형들에게 보이지 않았다. 자기의 정체를 알리지 않았다. 자기 형들의 철저한 회개를 시험해 보려했던 것이다. 창44:17에 보면 그들은 가고 베냐민을 종으로 남겨두라고 했겠는가? 그것은 이유가 있다. 베냐민은 그 어머니 라헬의 소생으로 요셉과 같은 어머니의 아들이다. 과거에 요셉을 미워하던 그 형들이 이제 자기의 친동생인 베냐민에 대해서는 그 태도가 어떠한가를 보려했던 것이다.
그때에 그 형제들 중에 특별히 우리는 유다를 기억할 것이다. 창44:33에 보면 유다는 애굽의 재상 요셉에게 말하기를 "베냐민 대신에 자기가 종이 되겠다"고 했다. 그때 유다의 말이 "우리에게 아버지가 있으니 노인이요, 그 노년에 얻은 아들이 있으니 그 형 요셉은 죽고 그 동생 하나 뿐이므로 그 아버지가 그를 사랑하나이다"라고 했다. 과거에 그들은 요셉을 아버지가 유달리 사랑하는 아들이기 때문에 죽이려 했지만 이번에는 아버지가 특별히 사랑하기 때문에 베냐민을 살리려 했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회개가 아니겠는가. 과거의 태도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 형 유다는 다시 말하기를 아버지를 더이상 슬프게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이 아이를 데려가지 못하면 아버지가 그 아들이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우리 아버지의 흰 머리로 슬피 음부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라고 했다. 유다는 이처럼 아버지에게 더이상 죄는 범할 수 없으니 나를 가두어 종으로 삼아달라고 애걸했다. 창 45:1~2에 보면 이 말을 들은 요셉은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물리친 후에 그 형의 목을 안고 방성대곡하니 그 우는 소리가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고 했다.
창 45:15에 보면 "그 형들과 입을 맞추며 안고 우니"라는 말이 또 있다. 여기의 요셉의 애정도 애정이려니와 회개한 형들은 얼마나 큰 복을 받았는지 모른다. 특별히 그처럼 철저히 회개한 유다가 받은 복이 무엇인지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주고 있다.

본래 유다는 복을 받을만한 인물이 되지 못했다. 창38:2에 보면 그는 그 부모가 그렇게 금하는 이방의 여자를 아내로 얻어서 아버지의 마음을 슬프게 한 아들이었다. 그렇게해서 낳은 아들인 "엘"과 "오난"은 악한 아들들로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었다. 또 유다 자신도 부끄러운 음란한 죄를 범하고 벌을 받았다. 그러므로 역대상5:12에 보면 자기에게로 돌아오는 장자의 명분을 잃어버리게 됐다. 갑절의 기업을 받는 그 장자의 명분은 드디어 요셉에게 돌아가고 유다는 그것을 잃어버렸다. 꼭 유다의 행동은 에서와 같이 망령되었다고 볼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러한 유다가 앞서 본대로 크게 회개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얼마나 크게 축복했는지 모른다. 참으로 회개하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유다에게서 볼수 있다.
창 49:9-12까지는 그에게 내린 하나님의 축복이 기록되어 있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찌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 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감히 그를 범하리요, 홀(권세)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여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라고 했다. 이것이 유다의 받는 축복인데 그 축복의 내용인즉 그와 그 후손은 12지파 중에서 가장 강한 지파가 될 것을 약속한 것이다.
이것은 사실 장자의 기업 이상의 큰 축복이다. 이처럼 유다는 요셉에게 대해서 지은 죄를 회개함으로 큰 복을 받은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요셉의 영광 (김희보 前 총신대 신대원 교수)

요셉이 비록 감옥에 갇힌 몸이 되었지만 그런중에도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 그에게 임한 모든 환난이 오히려 그에게 유익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는 창41장을 중심으로 해서 이제부터 그의 앞길이 어떻게 형통했으며 그가 어떻게 애굽의 큰 주권자인 재상이 되었는가를 말하고자 한다.
창40-41장에 보면 거기에 꿈 이야기 두개가 있다. 하나는 옥중에 갇힌 애굽의 두 관원장이 본 꿈이요, 다른 하나는 그후 애굽의 바로왕이 꾼 꿈이다.
먼저 옥중에서 되어진 일이다. 어떤 아침 감옥에 갇히 두 관원장이 근심하며 수심에 잠겨 있었다. "당신들이 어찌하여 근심 빛이 있나이까?" 요셉이 물었다.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나이까 청컨대 내게 고하소서" 성경 본문에 자세히 기록된대로 요셉은 그 꿈을 해석해 주었고 그 꿈 그대로 떡 맡은 관원장은 죽었고 술 맡은 관원장은 해방되어 다시 복직하게 되었다. 창 41장에 보면 그로부터 만 2년후 바로왕이 또 한 꿈을 꾸게 되었다.
본문에 기록된대로 꿈에 그가 나일강 가에 섰는데 "보니 아름답고 살찐 일곱 암소가 강가에서 올라와 갈밭에서 뜯어먹고, 그 뒤에 또 흉악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가 그 아름답고 살찐 소를 먹은지라..... 바로가 곧 깨었다가 다시 잠이 들어 꿈을 꾸니 한 줄기에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그후에 또 가늘고 약하고 마른 일곱 이삭이 나오더니 그것들이 오히려 무성하고 충실한 이삭들을 삼킨지라"
이 꿈은 바로에게 큰 충격을 주었던 것이다. 그는 애굽의 지혜있는 자들을 다 불러들였으나 그 꿈을 해석하는 자가 없었다. 그 꿈의 뜻은 온 천하에 7년간의 큰 풍년이 있고 다음 7년에 또 큰 흉년이 있으리라는 하나님의 계시인 것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제서야 술 맡은 관원장이 잊어버렸던 옥중의 요셉을 생각했다. 요셉은 그 꿈을 해석했다. 이로써 그는 바로왕의 사랑을 받아 드디어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 창41:38 이하에 보면 바로의 말이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 하나님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있는 자가 없도다" 또 계속하는 말이 "너는 내 집을 치리하라. 내 백성이 다 네 명령에 복종하리니 나는 너보다 놓음이 오직 보좌 뿐이니라 내가 너로 애굽의 온 땅의 총리가 되게 하노라" 하면서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금사슬을 그의 목에 걸고 세마포 옷을 입혀 바로의 수레에 그를 태우고 온 백성이 엎드리게 했다고 했다. 이 사실은 애굽의 왕이 요셉에게 그의 전권을 이양한 것임을 보여주는 말이다. 이처럼 요셉은 전무후무한 영광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여기에서 이 사건 자체보다도 그 배후에 숨은 성경진리 한가지를 말하고자 한다. 그것은 곧 본문 배후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상주권과 그의 섭리라고 할 것이다.

본문 창41:7~8에 보면 "바로가 깬즉 꿈이라. 아침에 그 마음이 번민하여" 하는 말이 있다. 꿈을 꾸고 난 바로의 마음을 그렇게 번민케 한 자는 누구인가? 온 천하에 두려운 것이 없는 그 마음을 그처럼 고민케 한 자는 누구겠는가? 잠언 21:1에 보면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으로 인도하시느니라"고 했다.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다고 했다. 마치 하나님께서 왕의 마음을 주장하시기를 봇물과 같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고 쏟을수도 있다고 했다. 잠언에는 왜 사람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다고 하지 않고 "왕의 마음" 이라고 했겠는가? 그것은 왕의 주권보다 더 높으신 만왕의 왕이 되신 하나님의 주권을 표현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말은 성경 다른 곳에도 있다. 에스더 6:1에 보면 "이 밤에 왕이 잠이 오지 아니하므로 명하여 역대일기를 가져다가 자기 앞에 읽게 하더니"라고 하신 말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유명한 바사왕 아하수에로가 유대인 모르드개와 그의 백성 유대인들을 전부 학살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바야흐로 그것을 실천하려는 찰나에 어떻게 그들을 구원하게 되셨던가 하는 동기를 말해주는 것이다. 만일 이때 아하수에로왕이 잠이 들었다면 모르드개와 온 유대인들은 벌써 다 전멸됐을 것이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그날 그 밤따라 왕에게는 잠이 오지않게 했다. 성경은 이것을 가리켜 유대인들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가르쳐주고 있다.

요컨대 천하를 호령하는 이 왕들로 하여금 잠을 자지 못하게 하고 잠이 들어 꿈을 꾸게도 하고 그들의 마음을 번민케도 하고 괴롭게도 하시는 분이 계시는데 그는 곧 여호와 하나님이시라고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다.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으로 인도 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바로왕으로 하여금 꿈을 꾸고 번민케 하심으로 드디어 그로 하여금 요셉을 찾게 하고, 요셉을 사랑하게 했고, 요셉으로 하여금 드디어 애굽의 재상의 자리에 오르도록 길을 열어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지상의 권세를 잡은 왕의 마음만 주관하시는 것이 아니다. 공중의 권세를 잡은 악령(악한 마귀)들을 주관하시면서 요셉을 어떻게 보호하신 것을 오늘의 본문 또한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제 이 사실을 생각해 보자. 먼저 마귀 사탄은 보디발의 아내를 통하여 요셉을 유혹하려 했고 또 범죄케 해서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되지 못하게 하려 했다. 요셉을 넘어뜨리려고 했다. 그러나 사탄은 그의 계획이 실패되자 이번에는 그를 감옥에 넣도록 했다. 그것으로 요셉을 망하게 하려 했다.
그러나 창 39:21에 보면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매"라고 했다. 사탄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을 이기지 못했다.
그러나 사탄의 행동은 중지하지 않았다. 요셉이 감옥 안에서 떡 맡은 관원장과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하고 그것이 그대로 성취됐을때 요셉은 더욱 유명해졌다. 술 맡은 관원장은 얼마나 기뻐했을까. 그러나 그 관원장이 감옥에서 나온 후에 사탄은 그로 하여금 요셉을 잊어버리게 했다. 분명히 창40:23에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치 않고 잊었더라"고 했다.
그렇게 기뻐하던 관원장이 어떻게 요셉을 잊어버릴 수 있었겠는가. 만일 그가 요셉을 잊지않고 기억했더라면 그는 요셉을 감옥에서 나올 수 있게 했을 것이다.
그러한 권세가 그에게 있었던 것이다. 분명히 요셉은 그렇게 해주기를 그 관원장에게 청원했던 것이다. 창40:14에 요셉이 그 술 맡은 관원장에게 청하기를 "당신이 나가서 출세하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고하여 이 감옥에서 나를 건져내소서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만한 일은 행치 아니하였나이다" 이것이 바로 요셉이 그 관원장에게 요구한 청원이었다. 그러나 사탄은 관원장의 마음에 역사하여 요셉을 기억치 못하게 했고 잊어버리게 했다. 그렇게 함으로 요셉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두려 했다. 이것은 분명히 요셉에게는 큰 불행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후일의 역사를 보면 이것까지도 얼마나 다행한 일이었는가. 그때에 만일 그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고 곧 그를 감옥에서 나오게 했더라면 요셉은 애굽의 총리는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 그가 만일에 자유의 몸이 되어 세상으로 나오게 되었다면 요셉은 애굽에 머물지 않고 그곳을 떠났을 것이다. 당시의 교통이나 지리적 조건으로 보아서 바로는 다시 요셉을 찾을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 바로가 꿈을 꿀때까지 요셉이 감옥에 그대로 남아있게 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필요한 일이요, 유익했던 일인지 모른다.
사탄이 요셉의 발에 영원한 쇠사슬을 묶어 감옥에 가두어 두려했던 바로 그 시간 그때에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악을 다스리는 방법이요, 사탄의 계획을 지배하는 방법이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하여 모든 것이 합하여 유익케 되도록 섭리하신다. 이렇게해서 마침내 요셉은 애굽의 위대한 재상이 된 것이다. 영광의 권좌에 오르게 된 것이다.


요셉의 환난 (김희보 前 총신대 신대원 교수)

세겜에서 양을 치고있는 형들의 안부를 염려하는 아버지의 명령을 받아서 형들을 찾아간 요셉은 세겜에서 형들을 만나지 못하고 더 멀리 북쪽 도단이라는 곳까지 찾아갔다. 그처럼 수고로이 찾아오는 요셉을 그 형들은 어떻게 대했을까? 창37:18~20에 보면 "요셉이 형들을 찾아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서로 말하기를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 먹었다 하자. 그 꿈이 어떻게 되는 것을 우리가 볼 것이니라" 이렇게 기록된 말이 있다. 그들은 사실 그 말 그대로 실천했다. 그들은 요셉을 잡아서 그의 입은 채색옷을 벗기고 구덩이에 던졌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장남 르우벤과 유다라는 형은 좀 나은 편이었다. 다른 형제들은 요셉을 당장 죽이려 했으나 르우벤은 요셉이 피를 흘리지 않게하기 위하여 구덩이에 빠치기로 제안한 것이요, 또 그후 유다는 그를 다시 건져서 애굽으로 가는 사람들에게 종으로 팔자고 했던 것이다.
창 37:28에 보면 그들은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올리고 은 20개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았다고 했다. 창42:21에 보면 그때에 요셉은 형들에게 살려달라고 애걸하면서 괴로워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 형들은 그의 최후의 애걸도 들어주지 않았다. 얼마나 잔인한 형제들이었는가? 그렇게 되어서 요셉의 고난은 시작됐다.

애굽에 팔려간 요셉은 17세의 소년으로서 그곳 관리인 보디발의 집의 종이 되었다. 그가 그 주인에게 얼마나 충성했는지 성경에 잘 나타나 있다. 창39:4에 보면 "요셉이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으로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 소유를 다 그 손에 위임하니"라고 한 말씀이 있다. 이 말은 요셉이 어떻게 그 주인에게 충성했는가를 보여주는 말이다.
특별히 여기 "요셉이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라고 하는 말 중에서 [섬기매]라는 원어(솰라하)는 최대의 봉사와 충성으로 섬기는데 사용된 말이다.
열왕기서에 보면 "엘리사가 엘리야를 수종들더라"고 했는데 여기에 수종든다는 말이 똑같은 말이다. 엘리사가 엘리야를 어떻게 충성스럽게 섬기며 봉사했는가. 겉으로만 섬긴 것이 아니다. 진심으로 섬겼다.
요셉이 보디발의 가정에서 그와 같이 진심으로 충성을 다하여 섬겼다는 말이다. 시편 103:21에 보면 "여호와를 봉사하며 그 뜻을 행하는 너희 모든 천군이여"라는 말이 있다. 여기 천사들이 "여호와의 뜻을 행하며 봉사한다"는 이 말이 또한 같은 말이다. 천군천사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섬기듯이 요셉도 자기 주인에게 그렇게 섬겼다는 말이다. 히브리어[Oxford 사전]에 의하면 요셉이 그 주인 보디발에게 "섬겼다"는 그 말은 본래 인간이 하나님을 섬긴다는 종교적 봉사에 사용되는 말이라고 했다.
이처럼 요셉은 보디발의 가정에 종이 된 후에 그 가정을 섬기기를 꼭 하나님을 섬기듯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충성을 다하여 섬겼던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요셉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본문 창39:2에 보면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심으로 여호와께서 범사에 형통케 하셨음을 보았더라"고 했다. 이처럼 그 주인까지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하심을 알고 그에게 모든 소유를 맡겼고 그로 그 가정의 총무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요셉에게 또 다른 어려운 환난이 닥쳤다. 창39:7 이하에 보면 요셉은 그 모양이 준수함으로 그 주인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받게 되었다. 처음에는 눈짓으로 유혹을 받았으나 다음에는 날마다 말로 청했다고 했다.
창39:12에 보면 마침내는 옷을 잡고 강요하게 되었다. 그때 요셉이 그에게 거절하는 말이 "나의 주인께서 주인의 가정의 모든 것을 다 내 손에 맡기고... 나를 그처럼 신임했는데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얻겠나이까" 하면서 옷을 벗기운채 도망을 쳤다.
성경은 요셉의 받은 이 유혹을 아무런 숨김없이 구체적으로 기록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당시 사회의 도덕적인 부패상을 여실히 나타내 보였고 또 그러한 환경중에서 어떻게 요셉이 타락하지 않고 순결을 지켰던가 하는 것을 잘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

말이 좀 달라지지만 창38장에 보면 요셉의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그 형 유다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가 자기의 며느리를 기생으로 잘못 알고 범한 죄를 구체적으로 기록했다. 이런 말들은 성경에 있을수 없는 음탕한 이야기들이지만 성경은 사양치않고 그런 것을 기록했다. 이것은 다 요셉의 살던 시대의 부패상을 보여주는 말이다.
유다는 그 형제들 중에 그래도 어진 편이요, 순진한 편이다. 그러나 그러한 성적 범죄를 저질렀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에게 돌아오는 장자의 명분을 잃게 되었다(대상5:2). 창세기 38장은 유다가 성적 시험에 넘어진 것을 기록한 것이라면 창세기 39장은 요셉이 어떻게 그러한 성적 시험을 이기고 순결을 지켰는가를 기록해 준 것이다.
그처럼해서 그는 하나님 앞에서는 범죄하지 않았으나 세상 편으로는 그만 죄인이 되어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가 왜 감옥에 갇히게 되었던가는 이제 더 말할 필요가 없는줄 안다. 그는 그만 보디발의 아내의 거짓 고발을 당하여 감옥의 죄수가 됐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가 갇히 감옥은 보통 감옥이 아니라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라고 했다. 창39:20에 보면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넘으니 그 감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이 감옥은 보통 잡범을 가두는 감옥이 아니라 왕의 직속되는 고급관리들이 범죄할 때에 가두는 감옥이었다. 요셉이 이처럼 특별 대우를 받게된 것이 이상한 일이다. 본래 옛날 애굽의 법률에서는 강간 미수범은 1,000대의 태장을 맞고 만일에 피해자의 고발이 있는 경우에는 사형에 처했다고 한다. 그런데 요셉은 태장도 맞지않았고 물론 사형도 당하지 않았다. 감옥에 갇혀도 고급관리들의 미결범들이 갇히는 곳에 같이 갇혔다.
물론 여기에는 여러가지 설명이 있다. 그 설명중 하나는 애굽의 재판관은 보디발의 아내의 고발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재판관의 조사의 결과로는 요셉에게 큰 혐의와 증거가 없었으나 고급관리의 고발이기 때문에 부득이 그 사건을 취급하고 요셉을 동정하여 특별 감옥에 그를 수용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마치 후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여야 한다는 무서운 죄명으로 고발을 당했을때 총독 빌라도는 그에게서 그럴만한 허물을 발견하지 못했으나 유대인들의 마음을 사기 위하여 예수를 넘겨주었던 것과 흡사한데가 있다.
사실 요셉의 당한 고난은 예수님의 당한 고난과 유사한데가 많다. 그는 불순한 가정의 죄로 말미암아 형제들의 시기를 받았고 또 형제들의 죄로 말미암아 깊은 구덩이에 빠져 죽을뻔 했고 또 다시 팔리워서 이방의 종이 되었으나 그 주인의 아내의 음란한 죄로 말미암아 그는 애매하게 옥중 죄수가 되었다. 그는 순결하게 살고자 하면할수록 더욱 큰 시련을 당해야 했던 것이다. 이런 고난을 가리켜 성경은 십자가의 고난이라고 한다.

요셉은 자기에게 당한 이러한 고난을 어떻게 감당했는가?
그는 애매히 감옥에 갇히게 되었어도 누구를 원망한 일이 없다. 구태어 자기를 변명하지도 않았다. 또 형들의 모함에 빠져서 구덩이에 빠치우고 종으로 팔리우게 될때에도 형들에게 울며 애원한 일은 있어도(창42:21) 형들을 원망한 일은 없었다. 불평한 일도 없었다. 그는 끝까지 고요히 참았었다.
슬픔도 참고 억울함도 참았었다. 그는 후일 큰 권세를 잡은 후에도 형들에게 원수를 갚으려 한 일이 없었고, 보디발의 아내에게도 그러한 일이 없었다.
그는 오히려 끝까지 그렇게도 고약했던 형들을 위하여 살았던 사람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요셉과 함께하셨다. 본문 창39:21이하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전옥에게 은혜를 입혀서 요셉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모든 죄수를 요셉의 손에 맡기고 모든 사무를 그에게 맡겨 처리케 했다고 했다. 이것도 생각해 보면 얼마나 큰 은혜인가. 요셉은 보디발의 한 가정의 일에 충성했더니 마침내 그 가정의 총무가 되었고 그가 거기에서 쫓겨나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으나 그 감옥에서 충성하니 이번에는 그 감옥 안의 큰 일들을 맡게 되었다.
마침내 그는 한 나라의 큰 일을 맡게 되었고 큰 영광을 받게 됐던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유익케 하신 것이다.


요셉의 유년 시절 (김희보 前 총신대 신대원 교수)

창세기를 크게 두부분으로 나누다면 1장-11장까지는 하나님께서 우주와 만물과 인류를 창조하신 것을 그 인류들이 어떻게 타락하게 된 것을 기록했다. 그리고 둘째 부분인 12장-50장까지는 그 타락한 세대에서 한사람 아브라함을 택했고 그의 자손들인 이삭과 야곱과 요셉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한민족을 이루게 하시고 그 이스라엘을 통해서 온 인류의 구속이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기록한 것이다.
흔히 이스라엘 4대 족장이라고 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을 말한다. 이 사대에 걸친 네 사람의 시대를 가리켜서 족장시대라고 한다.
창세기 12장-50장까지는 이 4대 족장들의 생애를 기록한 역사이다. 여기에서는 이 4대족장 중 맨마지막 족장인 요셉의 역사 중에서 특별히 어린 시절의 환난과 슬픔에 대해서 말하려고 한다.

그런데 그 아들 요셉은 어릴때부터 그 아버지에 못지않은 많은 환난과 곤고를 겪어야 했던 족장이었다. 그러나 요셉의 환난은 그 아버지의 환난과 비교해 볼때 근본적으로 그 다른점을 발견하게 된다. 즉 야곱의 환난은 그의 죄값으로 온 환난이었다. 그는 본래 모태에서부터 형의 발뒤꿈치를 잡은 사람이요, 그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여서 그 형의 기업을 빼앗은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자기의 외삼촌을 속이고 그 재산을 탐내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많은 환난의 징계를 주었던 것이다. 그러한 징계와 환난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오히려 그는 거룩히 살고자 하면 할수록 더 많은 고생을 참아야 했던 것이다.
참으로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이 세상이란 묘하다. 사람들은 자기가 범한 죄값으로 환난을 겪어야 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아무런 죄없이 오히려 더 진실하고 더 순결하기 때문에 환난과 곤고를 겪어야 하는 수도 있다. 우리는 요셉의 생애에서 특별히 그것을 발견하게 된다. 흔히 성경에서는 그러한 고난을 십자가의 고난 혹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다고 말하고 있다.
요셉은 벌써 일찌기 십자가의 고난을 짊어지고 환난을 겪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고난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마침내 요셉은 큰 영광의 면류관을 얻은 사람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러한 영광을 얻기까지 그는 많은 슬픔을 당한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의 그는 자기의 형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아 큰 우울에 빠졌다. 꼭 죽을 자리에서 구원을 받았으나 다시 그 형들은 그를 먼 나라 애굽의 종으로 팔아 버렸다. 종살이를 하던 그는 다시 애매하게 큰 죄의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면 그는 무엇 때문에 그런 고생을 겪어야 했을까? 결론부터 말한다면 그는 자기의 죄때문이 아니라 자기의 가정의 죄 또는 전혀 관계없는 다른 사람의 죄때문에 당한 환난이요, 희생이었다. 이제 몇 가지로 그것을 살펴 보자.
첫째, 그는 그 가정의 죄를 짊어진 희생제물이었다. 그의 아버지 야곱의 가정에는 죄가 많았다. 우선 그 아버지 야곱은 첩이 많았다. 그들 중에는 말할수 없는 시기와 질투가 있었다. 그 가정은 늘 평안치 않았다. 그들은 자녀들을 낳는 것도 서로 경쟁했다. 창29:35에 보면 그 아내 레아는 계속해서 네 아들을 낳았다.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이렇게 경쟁적으로 네 아들을 낳았다.
둘째, 아내 라헬은 그것을 시기하여 자기의 몸종인 빌하를 남편에게 주어 두 아들을 낳게 했다. 단과 납달리, 두아들이다.
여기에서 네 아들을 낳은 첫 아내 레아는 다시 그것을 시기하여 자기의 몸종 실바를 남편에게 주어 첩을 삼게하고 두 아들을 또 낳게 했다.
갓과 아셀이 그들이다. 그후 레아 자신도 또 두 아들 잇사갈과 스불론을 낳았다. 그후 끝으로 라헬 자신이 또 두 아들 요셉과 베냐민을 낳았다. 그러한 가정이 평안할 수는 없다. 물론 신앙적으로도 볼 것이 없었다. 
창 35:2에 보면 야곱의 아내들과 자녀들은 이방과 각종 우상을 다 섬기고 있었다. 야곱은 그것을 알면서도 가정을 신앙적으로 다스리지 않았다.
그 아들도 또 자기 어머니들 같이 서로 시기하였다. 마침내 그 형들은 어린 요셉을 죽이려고 했다. 이 얼마나 살벌한 가정이었는가. 이처럼 도덕적으로, 신앙적으로 타락한 야곱의 가정의 죄를 어린 요셉이 그것을 담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죄없는 요셉은 자기의 가정의 죄를 짊어지고 소위 아사셀의 어린 양과 같이 제물이 되어 멀리 멀리 버림을 받게된 것이다.
세째로, 요셉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은 아들이요, 또 그 자신은 죽임을 당하는 자리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을 받은 아들이었다.
창 37:3에 보면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야곱(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라고 했다. 야곱이 그를 그처럼 사랑한 이유는 성경에 보면 노년에 얻은 아들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물론 그 말에는 좀 분명치 않은데가 있다. 요셉보다 더 늦게 얻은 아들 베냐민이 있었다. 그러나 야곱은 베냐민보다 요셉을 더 사랑했다.
히브리 원문에는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라는 이 말이 어떤 사본에는 "요셉은 지혜가 있는 아들이므로" 이렇게도 되어 있다. 야곱이 요셉을 특별히 사랑한 이유는 그가 노년에 얻은 아들일뿐더러 그는 특별히 지혜가 있고 총명했기 때문인줄 안다.
물론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자연히 느껴지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가장 사랑하는 아내 라헬의 첫 아들이기 때문이다.
사실 야곱은 그 어느 아내 보다도 라헬을 더 사랑했다. 라헬보다 레아는 물론 먼저 얻은 아내였지만 마음으로 라헬을 레아보다 앞서 먼저 사랑했고 또한 후에도 그를 더욱 사랑했다. 마음으로는 라헬을 정처로 생각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그는 오랫동안 생산을 하지 못하다가 드디어 첫 아들을 낳았다.
그러므로 그가 낳은 요셉을 그 어느 아들보다도 귀히 생각했고 사랑했던 것으로 안다. 그는 요셉을 마음의 장자로 생각한것 같다. 그 증거로써 창37:3에 보면 "야곱은 요셉에게 특별히 채색옷을 지어 입혔다"고 했다.
여기 이 채색옷이란 말은 그저 어여쁜 옷이란 뜻만이 아니다. 삼하 13:18에 보면 "다말이 채색옷을 입었으니 출가하지 아니한 공주는 이런 옷으로 단장하는 법이니라" 한 말이 있다. 채색옷이란 어린 공주들이 입는 긴 옷이었다.
특별회 공주가 아니라도 다른 사람과 구별하기 위해서 귀한 자녀에게 그의 단장으로 입히는 옷이 채색옷이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요셉이 입은 채색옷은 장자의 예복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야곱은 요셉을 마음에 장자로 구별하여 키운 모양이다.
또 이런 일이 있다. 창37:11에 보면 요셉이 꿈을 꾸고 하는 말이 "형들이 묶은 곡식단이 요셉의 자기가 묶은 곡식단에 와서 절하더라" 하는 말을 했을때 그 형들은 그 말을 듣고 분히여기며 시기하되 그 아비 야곱은 "그 말을 마음에 두더라"라고 했다. 이것은 분명히 야곱의 마음에 장차 요셉은 장자의 권위를 갖게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증거가 되는줄 안다. 이 모든 일들이 있으면 있을수록 그 아버지는 요셉을 더욱 사랑하게 됐고 그 형제들은 더욱 그를 시기하게 됐던 것이다.
본문 창 37:4에 보면 "그 형들이...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언사가 불평하였더라"고 했는데 이것은 우리의 번역이고 히브리 원문에는 "그에게 평안하냐고 인사도 않더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불평 정도가 아니라 그 형들은 요셉과 한 집에 살아도 인사말도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날이 갈수록 그 형들은 요셉을 미워했다는 것을 성경은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반대로 요셉은 그렇지 않았다. 형들을 사랑했다. 창37장 이하의 요셉의 역사를 보면 그가 그 형들을 어떻게 사랑했는가 하는 말로 가득차 있다. 물론 후일의 일이었지만 그는 초라한 형들의 모습을 보고 골방에 뛰어들어 가서 슬피 목놓아 울었다는 기록이 있다. 사실 요셉은 형들을 사랑했다. 본문 37:13에 보면 "야곱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 형들이 세겜에서 양을 치고 있으니 너를 그들에게 보내리라" 그때 요셉이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아버지요, 내가 가겠나이다"라고 했다. 그는 아버지의 명령이 떨어지자 지체하지 않고 멀리 형들의 소식을 알기위하여 세겜으로 찾아갔다. 그러나 형들을 찾지못하고 세겜 광야에서 그가 방황하며 있을때 어떤 사람이 그의 헤매는 모습을 불쌍히 여겨서 그 내용을 물었다. 그 사람의 말이 "그들이 여기를 떠나 더 멀리 도단으로 갔느니라"라고 했을때 그는 다시 멀리 그곳으로 찾아갔다. 형들은 그를 그렇게 미워했건만 요셉은 형들을 그렇게 염려했고 생각했다.


야곱의 고난과 그의 성화 (김희보 前 총신대 신대원 교수)

야곱이 당한 고난과 요셉이 당한 고난을 생각해 볼때 그 양자는 전혀 판이한 의미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야곱은 자기의 많은 허물과 죄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였으나 요셉은 허물없이 당한 고난이었다. 요셉이 당한 고난은 일종의 대속적 성격을 띠고있는 십자가의 고난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수난은 자기 가정의 불순한 형제들의 죄를 짊어진 결과로 온 것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고난이라는 인간적 비극이 지니고 있는 성경적 의미를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자기의 죄로 인하여 당하는 고난은 그로 하여금 성화에 이르게 하고 대속적인 고난은 그로 하여금 영화에 이르게 한다는 사실이다.
요셉은 그의 모든 수난을 통하여 마침내 영화에 이르렀고 야곱은 성화에 이르렀다. 필자가 적은 논문에서는 요셉의 고난은 보류하고 야곱의 고난만을 취급하는데 그가 어떻게 그 고난을 통하여 성화에 이르렀는가함을 살펴보려 한다.
먼저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그의 어린 시절의 교육과 신앙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 한다.

1. 야곱의 받은 교육
창 25:27에 "에서는 익숙한 사냥군인고로 들사람이 되었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인고로 장막에 거하니"라 하신 말씀이 있다. 여기에서 보는대로 에서는 외향적인 성격이요 남성적이었으나, 야곱은 내향적인 성격에 그 무슨 우열을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야곱은 그 내향적인 성격때문에 그 신앙에 결정적인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인것 같다.
에서의 남성적인 성격은 그로 하여금 "들사람"을 만들었으나 야곱은 조용한 성격에 장막에 거하기를 좋아하였기 때문에 부모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았을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그는 그의 부모를 통하여 아브라함과 이삭과 자기의 가문에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이 얼마나 존귀한 것임을 배웠을 것이다. 특별히 그 어머니 리브가는 아직 그 아들이 모태에 있을때에 받은 계시 즉 "... 큰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창25:23)"한 그 말에 따라서 어린 아들 야곱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교육했을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야곱이 하나님의 언약의 존귀성을 알고 어떻게 해서든지 그 언약이 자기에게 이루어지기를 사모하게 되었음은 그의 일찍부터 받은 교육의 결과이었을 것이다.

2. 야곱의 잘못된 방법
창25:23에 "여호와께서 그(리브가)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자를 섬기리라."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을 야곱은 인내로써 기다렸어야 할 것이었다. 하나님의 언약을 인간적인 사기적 방법으로 성취하려한 야곱과 리브가의 태도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야곱의 환난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어머니 리브가도 슬픔을 당한다. 에서의 분노를 본 리브가의 말이 "내 아들아 내 말을 쫓아 일어나 하란으로 가서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 피하여 네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날 동안 그와 함께 거하라"(창27:43) 했으나 야곱은 " 몇날"이 아니라 20년의 피난생활을 해야했고(창31:41), 그 어머니 리브가는 다시 그 사랑하는 아들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이것은 곧 리브가가 받은 하나님의 징계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또 한편 장막에만 있기를 좋아하던 조용한 성격의 야곱이 20년동안 아니 거의 일평생을 "들사람"으로 살아야 했던 것도 육신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의 잘못된 방법은 이러한 곤고를 자초하게 되었다.

3. 은혜를 잊어버린 야곱
창28:16에 "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 말씀은 야곱이 천사들의 현현을 본 후에 잠이 깨어나서 한 말이다. 위험한 지경에서 하나님의 보호를 체험하고 그는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는 꿈 속에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이 자기에게 계승될 것을 계시로 받게 되었다(창28:13~14).
또 그가 어디에 가든지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키시며 인도하실 것을 약속하였다(창28:15). 그는 거기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돌을 가져다 기둥으로 세우며 하나님 앞에 서약했다. 그의 서약이 어떻게 간절한 것임을 그가 그위에 기름을 부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 기름은 그 어머니가 피난 길에 나선 아들에게 준 유일한 노자일지도 모른다. 그것을 아낌없이 부었다는 것은 그의 간절한 헌신을 의미한다고 본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의 감격과 그 헌신과 서약이 오래 지속된 흔적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소원대로 (창28:20) 어디에 가나 그와 함께계셨고 그의 길을 지키었고 먹을 양식을 주었고 입을 옷을 주셨다. 마침내는 아비의 집으로 평안히 돌아가게도 하셨다. 그러나 그는 그 서약을 오랫동안 지키지 않았다.
그가 서약한대로(창28:21~22) 우선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했지만 그의 가정에는 20년 내지 30년간이나 우상을 그대로 두고 처자들이 그것을 섬겨도 방치했던 것이다.
또 야곱은 "벧엘에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라고 했지만(창28:22) 그는 그후 30년 가까이 지나면서도 그곳 벧엘을 찾은 흔적이 없다가 디나 사건 이후 비로소 벧엘을 찾게 되었던 것이다(창35:1).
물론 그가 하나님 앞에 약속한 십일조를 (창28:22) 약속대로 실천했다는 기록도 성경에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요구를 채우셨고 그에게 은혜를 계속 베푸셨건만 그는 그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살았던 것이다. 디나 사건은 진실로 그러한 야곱의 영혼을 깨우치기 위한 하나의 징계였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사실 야곱은 그때에 비로소 영안이 열려 벧엘을 다시 찾게되었던 것이다(창35:1). 물론 그 가정의 모든 우상을 청산하고(창35:2).

 

4. 하나님과 대항한 야곱

창32:24에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라고 하신 말씀이 있다. 여기에서 야곱이 씨름했다는 말을 성경 해석자들은 흔히 야곱의 간절한 기도와 상징으로 보는 경향이 있으나 그것은 오해인 것이다. 호12:2~3에 보면 그것은 온전히 하나님을 대항한 악한 소행이라고 했다.
가시채를 차는 자의 발이 상할수 밖에 없는것 같이 하나님을 대항한 그에게 평안이 있을 수 없었다. 그는 환도뼈가 상하고야 그 싸움은 끝이 났다.
여호와의 사자가 밤새도록 져주었다는 사실은 야곱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기 위함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위골이 되기까지는 그의 영안이 열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그 위골로 인하여 장구한 세월 치료를 요했던 것도 짐작이 된다. 그 기간은 그에게 있어서 깊은 반성의 기간이요, 회개의 기회였을 것이다.
그가 환도뼈가 부러진후 울며 간구했다(
호12:4)고 했으니 그때부터 그의 회개는 시작되었음이 분명하고 그때에 이스라엘이란 복된 이름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에게 회개의 열매를 볼 수 없었던 것은 그의 세겜에서의 10년간의 생활이(가정의 우상을 청산치 못한) 충분히 증명한다고 생각된다. 그는 세겜에 그처럼 오래 살면서도 옛날에 벌써 하나님의 전을 세우겠다고 그렇게 서약했던 그곳(벧엘)을 찾아가 본 흔적조차도 없다. 그럴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 무서운 디나의 사건을 당하게 한 것이다(창34장).
그것은 그에게 준 가장 큰 징계의 하나였다고 본다. 그러나 그가 얍복강에서 울며 간구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크게 응답하여 주신 것이 사실이다(
창32:28, 호12:4-6).

그런데 그가 그때에 그처럼 울며 간구한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생각컨데 그것은 형 에서의 손에서 구원하여 달라는 애원이었을 것이다. 창 32:6에 보면 에서는 벌써 야곱이 오는 것을 알고 400명을 거느리고 출발하였음을 본다. 그 400명이란 야곱을 치기위해 인솔하고 떠난 하나의 부대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야곱은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믿음으로 그를 맞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야곱에게는 그러한 믿음이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에서의 부대를 두려워하지 말도록 벌써 가르쳐 주신 일이 있다.
창 32:12에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더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나지라 약보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이 얼마나 놀라운 계시였던가? 여기 "마하나임"이란 이중부대(double camps)를 의미한다. 에서의 400명 부대를 이기고도 남을수 있는 여호와의 부대를 의미한다.
이러한 놀라운 계시를 받은 야곱이 그처럼 에서의 부대를 두려워서 처자를 먼저 앞세우고(
창32:22) 자기만이 홀로 남아 얍복나루를 건너지 못하고 하회를 보려함은 참으로 비겁한 행위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그러한 야곱에게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셨다. 에서의 부대는 야곱을 치지 않았다. 형 에서는 오히려 울며 그를 만났다(
창33:4). 아, 어찌된 일일까?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인줄 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위하여 에서의 마음을 감동시킨 것이라고 본다. 창31:29에 "너를 해할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 너희 아버지 하나님이 어젯밤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고 라반의 마음을 감동시킨 하나님께서 에서의 마음을 또한 감동시킨 것이 아니겠는가? 크게 분노한 외삼촌의 마음을 감화시킨 하나님께서는 에서의 마음을 또한 감화시켜 저를 해하지 않게 하심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지키시며 보호하셨다.
그러나 야곱에게는 그에 합당한 신앙의 열매가 없었다. 디나 사건뿐만 아니라 요셉을 잃어버리는 비극도 어떤 의미에서는 야곱에게 준 하나님의 징계였다.
그의 130년의 일생이 "험악한 세월을 보낸"(
창47:9) 것도 그의 간악한 성품과 불신앙을 깨우치기 위한 하나님의 징계라고 보아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러한 징계들을 통하여 야곱은 점차 성화의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그는 어느 정도의 성화에 이르렀던가 이제 그것을 살펴보기로 한다.

 

5. 야곱의 성화

많은 고난을 통하여 노년기에 이르러서 야곱의 인격은 성화되고 신앙은 크게 심화된 것을 우리는 여러가지 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1) 노년기의 그에게서는 우선 탐심이 없어진 것을 본다.
창43:12에 "그 땅에 기근이 심하고 그들이 애굽에서 가져온 곡식을 다 먹으매 그 아비가 그들에게 이르되 양식을 조금 사라"고 했다. 히브리 원문 성경에서는 "양식을 조금 사라"가 아니라 "적은 양식"을 사라로 되어 있다. 이 말은 곧 앞의 "큰 기근"과 잘 조화되며 대구되는 말이냐. 이 말에서 우리는 야곱의 인격의 변화를 찾아본다. 그는 본래 탐심이 많은 사람이었다(창30:37~43). 그러나 그러한 탐심은 이제 그에게서 온전히 떠났음을 상상할 수 있다. 이제 생각해 보라. 그의 가족은 70인이었다(창 46:27). 또 그에게는 많은 우양이 있었다(창46:32). 이러한 그의 "큰 기근"을 넘기 위해서는 "많은 양식"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 그러한 양식을 원한 것이 아니라 "적은 양식"을 사오라고 했다. 그에게 많은 양식을 살 수 있는 교환물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앞서 말한대로 그에게는 많은 우양이 남아 있었다. 그밖에도 많은 재물이 있었다 (창46:6). 그리고 요셉의 창고에서는 얼마든지 양식을 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야곱이 적은 양식을 요구한 것은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에게 탐심이 없어졌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제 자기만을 생각하는 이기심에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남을 생각하는 동정심이 얼마나 깊어졌음을 우리는 이 적은 문구(적은 양식이란)에서 찾아본다.

 

(2) 하나님의 섭리를 의지하는 그의 믿음이 깊어졌다.
과거에 요셉을 잃어버리고 슬퍼하던 그는 (
창37:33) 이제 온전히 범사에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의지했다.
창43:14에 "전능한 하나님이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되면 잃으리로다" 했음을 본다. 물론 우리는 창42:36의 탄식의 말을 기억한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 시험이었다. 그후 그는 온전히 하나님의 섭리에 의지했음을 상기의 창43:14에서 본다.
거기에서 특별히 그는 하나님을 엘사다이(우리 한국어는 전능하신 하나님)로 불렀다. 하나님에 대한 이 호칭은 야곱의 입에서는 지금 처음 나오는 말이었다. 엘사다이의 이 명칭은 이른바 야웨와 대립되는 말로서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깊은 신앙을 표현하는 말이다. 이 호칭은 본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을 세우실 때에 계시된 하나님의 명칭이다(
창17:148:3, 28:343:14, 출6:3). 물론 이 명칭은 하나님의 능력을 강하게 표현하는 말로써 그의 은혜의 확실성을 계시하는 호칭이다. 이처럼 엘사다이의 호칭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세우시고 그것을 그의 능력으로서 성취하실 것을 믿게하는 이름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여호와라고 할 때에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것과 같이 엘사다이라고 할때 또한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야곱이 처음으로 (창43:14) 하나님을 엘사다이라고 부르면서 은혜 베푸시기를 원한 것은 자기의 받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확실한 신앙을 고백한 것으로 본다. 그는 하나님의 그 언약을 생각하면서 "내가 자식을 잃게되면 잃으리라"고 했다. 이것은 옛날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던 "여호와 이레"의 신앙을 (창22:8-14, 히11:18~19) 방불케 한다.
그가 이러한 신앙을 가지게 될때 하나님께서는 시므온과 베냐민을 도로 돌릴뿐만 아니라 요셉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게 했고 그가 어떻게 영화롭게 된 것을 비로소 알게 했다(
창45:25-28).

 

(3) 노년기의 그는 아브라함같이 먼저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는 족장이 되었다.
창45:28-46:1에 "이스라엘이 가로되 족하도다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았으니 내가 죽기 전에 가서 보리라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발행하여 브엘세바에 이르러 아비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니" 했음을 본다. 이처럼 그는 요셉의 살아있음을 알고 그를 만나고자 애굽으로 가려할때 먼저 브엘세바로 가서 하나님 앞에 희생 제물로 드리는 제단을 쌓았다.
이것은 그의 많은 환난을 통하여 얻은 신앙의 열매인줄 안다. 그가 애굽을 향하여 떠나려 한것은 옛날 아브라함이나 이삭같이(
창12:1~4, 26:1~2) 기근을 피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다만 아들 요셉을 죽기전에 보려고 가려했던 것이다(
창45:28). 그러나 그는 마음에 두려움이 있었다. 약속의 땅을 잠시나마 떠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그는 알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애굽으로 가려할때 그것을 두려워한 것은 당연한 일인줄 안다. 그의 그 마음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애굽에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창46:3)"고 했고 다시 올라올 것을 약속했다. 야곱이 애굽으로 떠나기를 두려워했다는 그 사실만도(그때의 그의 의도는 잠간 아들 요셉을 만나보려는것 뿐이었지만) 그의 신앙의 깊이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이러한 신앙의 태도는 일찌기 아브라함이나 이삭에게서 볼 수 없었던 것이다(창12:10, 창26:1참고).

 

(4) 노년기에 있어서 그의 육신의 눈은 어두웠으나 그의 심령의 눈은 밝았음을 본다.
창 48:10에 "이스라엘의 눈이 나이로 인하여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하셨는데 말년의 야곱은 옛날 그 아버지 이삭과 같이 눈이 어두워졌다(창27:1참고). 그러나 그는 이삭과는 크게 달랐다. 창48:17에서 보는대로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에게 축복할 때에 작은 아들 에브라임에게 오른손을 얹고 큰 아들 므낫세에게는 왼손을 얹었다. 요셉은 말하기를 "아버지여 그리 마소서"(창48:18 ) 하면서 아버지의 손을 바꾸려 할 때에 야곱은 허락치 않으며 하는 말이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면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창 48:19~20)고 했다.
이처럼 야곱의 영안은 밝아서 두 아들 중 누구에게 축복해야 할 것을 알았다.
이 한가지만 보아도 야곱은 이삭과 다르다(
창27:21-32참고). 창 27:33에 보면 이삭은 야곱에게 축복한후 에서가 들어왔을때 "심히 크게 떨었다"고 했다. 그것은 에서가 두려웠던 것은 아니었다. 자칫하면 하나님의 뜻을 크게 어길뻔 했던 자기의 실수를 하나님 앞에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러나 야곱은 이삭같지 않았다. 야곱은 그 권속들의 제사장으로서도 허물없는 제사장이었다. 육신의 눈이 어두웠음에도 그처럼 영안이 밝았던 것은 그의 신앙의 깊이와 성화의 수준을 넉넉히 보여주고도 남음이 있다(히11:21 참고).

 

(5) 노년기의 그는 또 위대한 선지자였다.
창49:1에 "야곱이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의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고 하면서 그 아들들에게 예언적인 축복을 한 것이 있다. 그는 현실의 눈은 어두웠으나 "먼 후일"을 보는 믿음의 눈이 열린 선지자였다. 특별히 창49:18에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라고 했는데 이는 곧 하나님의 구원을 사모한 사람이었던 것을 보여 준다.

 

(6) 노년기의 그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심히 사모한 사람이었다.
창48:21에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시려니와"라 하신 말씀이 있다. 자, 생각해 보라. 요셉은 지금 애굽의 최고의 권좌에 올라 있다. 그러나 야곱은 요셉의 받은 애굽의 그 영화를 기뻐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그를 인도하여 약속의 땅에 돌아가게 하실 것을 고대했다. 이것은 애굽의 보화보다도 하나님의 나라와 그 약속을 더 사모한 모세의 믿음을 (히11:24-26) 방불케 한다.

말년에 그는 성경에 나타난 어느 족장보다도 어느 지도자보다도 더욱 경건했고 신앙과 성화의 최고의 수준에 이르렀다고 생각된다. 본래 간교한 성품의 그가(창27:35) 어떻게 그처럼 성화될 수 있었을까? 그것은 곧 그의 당한 환난이었다. 성도의 당하는 환난은 그들로 성화에 이르게 하는 길이기도 하다.

야곱의 말년 (김희보 前 총신대 신대원 교수)

우리가 야곱의 일생을 더듬어 볼 때 장년기에 이르기까지 그의 반생은 심히 세속적이요, 계략적인 사람이었다. 얍복강에서 그는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한 일이 있는데 설교자들은 흔히 해석하기를 그것은 야곱의 간절한 기도라고 하지마는 그가 하나님 앞에 간곡히 기도한 것은 환도뼈가 부러진 후의 일이요, 그 전까지의 일은 하나님께 대적한 악한 행위라고 선지자 호세아는 말했다.
호세아 12:2~3에 보면 "여호와께서.... 야곱의 소행대로 벌 주시며 그 소원대로 보응하시리라. 야곱은 태에서 그 형의 발꿈치를 잡았고, 또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었다"고 했다. 그가 모태에서 그 형의 발꿈치를 잡을 것이 악했던것 같이 천사와 씨름한 것은 하나님과 대적한 악한 소행리라고 했다. 가시채를 차는 자의 발이 상할수 밖에 없는것 같이 하나님의 뜻에 대적하는 자가 평안할 수 없다.
그는 환도뼈가 부러지고야 말았다. 이처럼 그는 모태에서부터 장년에 이르기까지 그의 인격이나 신앙은 몹시 혈육적이요, 세속적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성도의 당하는 모든 징계와 환난은 오히려 그 인격과 신앙을 정금같이 빛나게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야곱의 역사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이제 그의 말기의 인격이 얼마나 경건하여진 것을 다음 몇가지로 창 43장이하의 본문 중에서 찾아보려 한다.

첫째로, 창세기 43:1-2을 보면 "그 땅 기근이 심하고 그들이 애굽에서 가져온 곡식을 다 먹으매 그 아비가 그들에게 이르되 다시 가서 우리를 위하여 양식을 조금 사라"한 말씀이 있다. 여기에 "양식을 조금 사라"하는 조금이란 말이 있다. 조금이란 말은 필요한대로 조금만 사라는 뜻이다.
많이 사오지 말라는 뜻이다. 여기 이 말은 그의 말년에 큰 흉년이 들어서 먹을 양식을 사려고 그 아들들이 애굽으로 갈때에 한 말이다. 애굽에는 그때 양식이 무진장 있어서 창고 문을 모두 열고 얼마든지 팔고 있을 때이다. 그런데 야곱의 그 가정은 지금 기근으로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야곱의 가정은 창46:6에 보면 그때 그렇게 가난한 것은 아니다. 오직 양식만이 없을 뿐이지 소와 양과 모든 재물이 넉넉했다. 얼마든지 양식을 살 수 있는 재물이 넉넉했다.
또 창46:27에 보면 그때 야곱의 자녀손들이 도합 70인이라고 했다. 그밖에도 많은 종들이 있었다. 그러한 큰 가정이니 양식도 많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야곱은 조금의 양식으로 만족하려 했던 것이다. 이것은 적은일 같지마는 이 한마디 말 속에서도 우리는 그의 인생관이 얼마나 변화된 것을 찾아볼수 있다. 본래 그는 얼마나 탐욕이 많은 사람이었는가. 형의 기업을 탐내고, 외삼촌의 재산을 탐내서 저들을 속이고 그것을 빼앗던 사람이다. 그러나 이제 그의 노경의 형편을 볼 때 그에게는 그러한 모든 탐욕이 없어진 것을 알 수 있다.
본래 창43:1-2의 본문 말씀 중 "그 땅에 기근이 심하고" 하는 말과 또 "가서 우리를 위하여 양식을 조금 사라"하는 말의 히브리 원문은 대구적으로 되어 있다. 그것을 그대로 직역한다면, 즉 [큰 기근]이 있는데 [적은 식량]을 사라고 되었다. [큰 기근]에는 반드시 [많은 식량]이 필요한데 [적은 식량]이란 말을 강조한 것은 읽는 자로 하여금 자연히 야곱의 그 변화된 마음을 느끼게 하기 위함인줄 안다. 그처럼 말년의 야곱에게는 그 모든 탐심이 가셔졌음을 느낄 수 있다. 이것도 그가 많은 환난을 통해서 얻어진 하나의 인격적 변화로 안다.

둘째로, 창43:14에 보면 "전능하신 하나님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되면 잃으리로다" 하는 말씀이 있다. 야곱이 이 말을 하게된 동기는 그의 아들들이 애굽에 양식을 사러갔다가 그곳에 인질로 남게하고 다시 또 마지막 아들 베냐민을 데리고 오라는 엄한 명령을 받았을 때에 야곱이 아들들에게 한 말이다. 그가 처음 그 엄한 명령을 받았을 때는 심히 슬퍼했다. 성경에 보면 "너희가 나로 나의 자식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고 탄식했다. 그러나 그후 그는 곧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맡기게 됐다.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이것은 온전히 그의 모든 것을 하나님게 맡기는 그의 신앙적 태도를 보여주는 말이다. 옛날 그의 조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할 때에 그의 생명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겼던 것이다. 야곱도 드디어는 아브라함의 위대한 신앙을 따르게 됐던 것인줄 안다. 이렇게 그가 전부를 하나님 앞에 내어맡길 때마다 그는 하나님의 놀라운 응답을 보게 됐던 것이다. "내가 잃으면 잃으리로다" 하던 그는 그 아들을 잃지 않을뿐만 아니라 이미 잃었던 아들도 도로 찾았다.
시므온도 돌아왔고 요셉도 다시 찾았던 것이다. 요셉의 살아있다는 소식을 들을뿐만 아니라 그가 어떻게 애굽에서 존귀하게 된 것을 듣게 됐다.
그가 그렇게 큰 기쁜 소식을 듣게된 것은 그저 슬퍼하면서 근심할 때가 아니다. 믿음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고 그 근심과 슬픔을 참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크게 위로 하셨다. 그를 크게 기쁘게 했다. 이 한가지 사실에서도 말년의 그의 신앙이 얼마나 경건해졌는가를 볼 수 있다.

세째로, 노년기의 야곱은 먼저 경건히 제단을 쌓는 하나님 중심의 족장이 된것을 볼 수 있다. 창45:28 이하에 보면 야곱은 자기의 아들 요셉이 죽은줄만 알고 있다가 그가 살아있고 또한 애굽의 위대한 재상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때 그는 그저 기뻐한 것만 아니다. 그의 아들 요셉의 부름을 받고 그저 기뻐서 애굽으로 달려간 것이 아니다. 그는 먼저 하나님 앞에 감사의 제단을 쌓았다.
창 45:28-46:1에 보면 "이스라엘(야곱)이 가로되 족하도다.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았으니 내가 죽기전에 가서 보리라.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발생하여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 아비의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되..."라고 했다. 이런 일은 과거의 젊은 야곱에게서는 보지 못했던 일이다. 그는 오랫동안 신앙의 슬픈 훈련을 통해서 모든 일에 먼저 하나님을 섬겨야 하고, 하나님 앞에 예배해야 할 것을 깨닫게 됐다. 

네째로, 그의 신앙은 드디어 세상의 소망보다도 하늘나라의 소망을 더 소중히 알았고 현재의 일보다도 미래의 일에 더 생각이 깊었던 것이다. 그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령한 것을 더 사모하게 됐던 것이다.
창49:1에 보면 "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의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했다. 그는 먼 후일의 일을 바라보는 신령한 믿음의 눈이 열렸다.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현실만 보지말고 보이지 않는 먼 후일에 오는 세상을 바라볼 것을 일렀던 것이다.
또 창49:18에 보면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니이다"라고 했다. 그는 지금 육신적으로 위대한 애곱 재상의 아버지로서 모든 사람에게 최대의 존경을 받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세상적인 부귀에 도취되는 그러한 사람은 벌써 아니었다. 그는 고요히 자기의 아들들을 불러놓고 하늘을 우러러 간구하기를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라고 했다. 이 얼마나 경건한 신앙인가! 그가 청년기에는 하나님의 뜻을 그저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으로 자기의 뜻을 이루어 보려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이제 그는 먼 후일을 바라보며 주의 구원을 기다리는 경건한 믿음의 족장이 되었던 것이다.
또 48:21에 보면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리라"고 요셉에게 유언을 남겼다. 이 얼마나 은혜스러운 유언인가 생각해 보라. 요셉은 지금 애굽의 바로왕 다음으로 가는 큰 주권자이다. 그러나 요셉의 눈에는 보이는 그 권세를 그렇게 크게 생각했거나 기뻐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너와 함께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너희 기업의 땅 가나안으로 갈 것을 요셉에게 유언으로 남겼다. 이를 볼찌라도 말년의 야곱은 애굽의 권세와 그 보화보다도 하나님의 언약의 나라 가나안을 더 사모한 것을 알 수 있다. 진실로 야곱은 그에게 당했던 모든 환난을 통해서 그의 신앙은 그렇게까지 경건한 자리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 믿음의 눈이 얼마나 밝아졌는가는 또한 창48:17이하에 잘 나타나 있다. 거기에 보면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에게 축복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그 때에 야곱의 눈은 말년의 자기 아버지 이삭의 눈과 같이 어두어졌다.
그는 맏손자 므낫세에게 왼손을 얹고 작은 손자 에브라임에게 바른 손을 얹어 축복하려 했다. 그때에 요셉이 놀라서 하는 말이 "아버지여, 그리마소서" 하면서 그 손을 바꿔놓으려 했다. 그때에 "야곱이 허락지 아니하여 이르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하면서 작은 아들에게 오른손을 얹어 축복했다. 그는 아무리 눈이 어두웠어도 옛날 이삭과 같은 실수를 하지 않았다. 그의 믿음의 눈은 그렇게 밝아져서 하나님의 뜻을 알았던 것이다.
히브리 11:21에 보면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했다. 진실로 야곱이란 이 족장은 많은 환난을 통해서 마침내 그처럼 경건해지고 그처럼 거룩한 자리에 이르게 됐다.


벧엘을 다시 찾은 야곱 (김희보 前 총신대 신대원 교수)

야곱은 지난 20년 동안 그리워 하던 고향을 찾아 길을 떠나기는 했으나 앞으로 형 에서를 만날 생각을 하니 두려운 마음이 앞섰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형의 동정을 살피기 위하여 먼저 사람을 보냈다. 그때 형 에서는 벌써 야곱이 오는 것을 어떻게 알았던지 400명의 사람을 거느리고 떠났다. 이 보고를 들은 야곱은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의 모든 종들과 양과 소와 약대를 두 떼로 나누어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하리라" 하면서 하 나님 앞에 간곡히 기도한 것도 그때의 일이다. 성경에는 그의 기도문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나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를 조금이라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 하옴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냄이니이다.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정녕 네게 은혜를 베풀며 네 씨로 셀 수 없는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이것이 창세기 32장에 기록되어 있는 그의 기도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크게 응답해 주셨다. 과거에 그의 외삼촌 라반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야곱을 해하지 않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에서의 마음을 또한 감동시켜서 그를 해하지 않게할 뿐만 아니라 에서가 야곱의 목을 안고 울게 했던 것이다. 이것이 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택한 백성, 야곱에게 베푸신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창33:12에 보면 기적적으로 마음이 녹아진 에서는 야곱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떠나 가자, 내가 너희 앞잡이가 되리라" 했다. 그러나 야곱은 굳이 그것을 사양했다. 창33:13~14에 보면 "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 주도 아시거니와 자식들은 유약하며 내게 있는 양떼와 소가 새끼를 데리고 있은즉 하루만 과히 몰면 모든 떼가 죽으리니 청컨대 내 주는 종보다 앞서 인도하여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 했다.
이 말을 들은 에서는 다시 그러면 자기의 종 몇사람을 그들의 인도자로 남겨둘 것을 말했으나 야곱은 그것까지도 사양했다. 야곱이 그처럼 다 사양한 이유는 그가 말한 그대로 하나의 겸손한 사양으로 받아들이기는 조금 어려운 점이 있다. 왜냐하면 그는 형을 떠나 보낸후 전혀 길을 달리했다. 창 33:17에 보면 야곱은 길을 돌려 숙곳이란 곳에 이르렀다. 에서가 사는 세일은 먼 남쪽에 있는 땅이요, 숙곳은 북쪽에 있다. 얍복강 북쪽이다. 얍복강을 건너온 야곱은 발을 돌이켜 북쪽을 향하여 건너온 강을 다시 건너 뒤로 물러갔다. 천천히 세일로 가겠다고 했으나 그의 발길은 반대 방향으로 돌리게 된 것이다.

그러면 어찌하여 야곱은 고향 땅과 아버지 이삭이 사는 곳으로 가지않고 다시 북으로 발길을 돌렸을까? 아무래도 그는 자기의 형 에서가 사는 곳 가까이 가기를 상당히 꺼린것 같다. 그는 차마 아직도 살아계신 자기의 아버지 이삭을 만나러 가지도 못했다. 아마도 옛날의 자기의 죄를 생각할 때에 그의 마음이 불안했고 그의 발걸음은 그렇게 무서워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 현실적으로는 그가 얍복강 나루에서 하나님의 사자와 싸우다가 그의 환도뼈가 부러졌다고 했으니 먼 길을 걸을 수도 없었던 줄 안다.

창 33:17에 보면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짐승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은고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했다고 했다. 숙곳이란 말은 히브리말로 [집을 지었다]는 뜻이다. 거기에서 그는 자기의 부러진 육신의 상처도 치료한 줄 안다. 집을 지었다고 했으니 수년간은 거기에서 병을 치료하며 지냈을 것이다.

본문 창33:18에 보면 그후 그는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성에 이르렀다고 했다. 여기 [평안히]란 말은 [건강한 몸으로]라는 뜻이 있는데 그가 가나안 땅 세겜성에 이르렀을 때는 그의 몸도 온전히 회복되었다는 뜻을 가진 말인줄 안다. 세겜성이라고 하는 곳은 숙곳 서쪽에 있는 가나안 땅으로써 거기에서 그는 땅을 사고 자리를 잡았다. 성경에 읽은대로 거기에서 그는 어린 자녀들을 키우면서 10여년 동안 산 것으로 안다. 10세 전후의 어린 자녀들은 벌써 20대를 넘어섰다. 이제 혈기에 넘치는 그의 자녀들은 그곳에서 그만 무서운 살인사건을 일으키게 됐다. 살인사건의 내용은 성경에 기록된대로 야곱의 딸 디나가 그곳 이방 여자들과 섞이었다가 그만 그곳 하몰 왕의 아들 추장 세겜의 연애를 받아 몸이 더럽혀졌다는 말과 또 뒤이어 청혼이 있었다는 말을 야곱의 아들들이 듣고 심히 분히 여겼다.
드디어 야곱의 아들들은 세겜 사람들이 전부 할례를 받아 누워있는 기회를 타서 그들을 죽였던 것이다.
이 사실을 들은 야곱은 심히 두려워 했다. 본문에 보면 야곱이 그 아들들에게 한 말이 있다.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이 땅 사람 곧 가나안 족속에게 미움을 받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리하면 나와 내집이 멸망하리라"고 하면서 심히 당황해 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 기록을 읽으면서 자연히 느끼게 되는 것이 있다. 야곱에게 왜 이러한 큰 환난과 근심이 또 있게 되었던가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먼저 야곱의 모든 환난은 하나님의 징계였다고 하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아는대로 야곱과 요셉을 비교해 볼 때 그 아들 요셉도 많은 환난을 겪은 사람이다. 그러나 야곱의 환난과 요셉의 환난은 근본적으로 그 성격이 다른다. 셩경에 나타난대로 본다면 요셉의 허물과 죄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는 반대로 죄를 짓지않고 깨끗이 살고자 했기 때문에 많은 환난을 겪기도 하고 감옥에도 갇혀야 했던 것이다. 그는 또 자기의 형들을 위해서 찾아갔지만 형들은 그를 죽이려고 했다.
이처럼 요셉의 환난은 자기의 죄로 온 징계가 아니라, 남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고생하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성격을 띠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의 고난은 마침내 큰 영광에 이르게 한 것이다. 그러나 야곱의 환난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의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당하는 하나님의 징계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점에서도 요셉을 그리스도의 그림자로 본다면 야곱은 어디까지나 허물많은 우리 성도들의 그림자로 보아도 좋을 줄 안다. 이러한 원칙 밑에서 우리는 이제 야곱이 다시금 크게 근심하여 두려워할수 밖에 없는 그러한 환난을 당하게 된 이유를 성경에서 쉽게 읽을수 있다.
그러면 이제 그가 세겜에서 10여년 세월을 살고 있을때 그의 생활이 어떠했는가를 생각해 보자. 창35:2에 보면 그가 큰 환난을 당했을때 자기의 가정 식구들을 불러 하는 말이 있다.
"야곱이 이에 자기 집 사람과 자기와 함께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의 우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 가자"라고 했다. 여기에서 보면 야곱은 그때까지도 자기 집의 우상을 청산하지 못했던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자기의 아내들과 자녀들이 우상을 섬기고 있었던 것이다. 가장으로서의 야곱의 감화가 그 가족들에게 미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가 이미 30여년전 형 에서를 피하여 도망갈 때에 환상중에 하나님의 크신 보호를 체험하고나서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서약한 말이 있다. 창28:20에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라고 했다.
여기에서 우리가 그의 후일 역사를 보면 그의 소원대로 하나님께서는 다 이루어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30여년 동안 그와 같이 했다. 그 소원대로 먹을 양식을 주되 풍성히 주셨고 입을 옷을 주셨고 또 평안히 가나안까지 돌아오게도 했다.
그러나 야곱은 어떠했는가? 자기의 서원대로 한가지도 실천한 것이 없다.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될 것이라"고 했지마는 아직도 그의 가정에서는 우상을 청산한 흔적이 없었고,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약속했으나 그것을 실천한 흔적도 없고, 벧엘에서 돌기둥을 세운 그 자리에 하나님의 전을 세우겠다고 했으나 가나안 땅에 돌아온후 10여년의 세월이 흘러간 그때까지도 벧엘을 찾아간 일도 없었다. 이러한 야곱에게 하나님의 두려운 징계가 있게 된것은 당연하 일일 것이다. 야곱은 하나님의 은혜를 막중하게 받고도 그것을 보답할 줄 몰랐다. 자기가 위급할 때는 하나님의 찾으며 서약도 했으나 평안해질 때는 그 은혜를 모두 잊어버린 사람이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그는 또 얍복강에서 에서가 400명을 거느리고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하나님께 간곡히 기도했고 천사에게 맞아 환도뼈가 부러졌을 때는 울며 간구하던 그런 사람이었지만 그 모든 것이 지나간 후에는 다시 잊어버렸다. 하나님께서도 그러한 야곱의 영혼을 깨우치기 위하여 [디나 사건]을 겪게 한 줄 안다. 사실 그 때에 야곱의 영혼은 깨어 났다. 깨끗이 잊어버렸던 옛날의 벧엘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자기 식구들을 불러 자기 집에서 "우상을 제하고 몸을 정하게 하고 옷을 갈아 입고 이제 벧엘로 가자. 거기에서 나의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자"고 한 것이다. 이러한 일이 있은후 그는 진정 회개하고 그의 생활은 변하게 됐다.


가나안에 돌아온 야곱 (김희보 前 총신대 신대원 교수)

야곱은 밧단아람 땅에서 20년을 지나면서 양 떼와 소 떼를 몰고 들판에서 헤메는 곤고한 목자의 생활을 했다. 본래 그는 성격이 조용한 내성적인 사람으로 장막에 거하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성격에도 맞지않는 20년의 [들 사람]의 생활을 했던 것이다. 마침내 그는 고향이 그리워졌고, 고향에 돌아갈 마음이 생겼다. 벌써 그때는 야곱의 슬하에는 네 아내와 열두 형제의 아들들이 있었고 많은 종들과 우양의 떼를 가지고 있었다. 혹시 어떤 사람은 야곱이 네 아내를 얻은 구약의 다처주의에 대해서 의심을 갖는 사람이 있을줄 안다.
족장중 이삭과 요셉은 첩을 얻지 않았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야곱은 첩을 얻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살았던 시대의 동방 여러나라 사람들의 풍속이었다. 사람이 그 시대의 풍속과 습관을 벗어버리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던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실례가 된다.

사실 아브라함과 야곱은 그의 가정이 불순했기 때문에 받은 가정적 고통이 참으로 많았다. 야곱의 아들들은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고 마침내는 자기들의 동생인 요셉을 죽여버리려 했던 것도 그들이 서로 어머니가 달랐기 때문이었고, 그 어머니들이 서로 시기 질투하는 것을 어릴때부터 보았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처럼 복잡한 가정에서 자라난 그 자녀들이 서로 화평할 수 없었던 것도 결국은 야곱의 죄 때문이었다. 야곱의 가정의 그러한 불화는 하나님께서 그 가정에 내린 하나의 심판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야곱은 지금 네 아내와 그들에 따르는 여러 자녀들과 많은 우양의 떼와 종들을 거느리고 자기의 외삼촌 라반도 알지 못하게 밤중에 길을 떠났다. 그러나 그때 한가지 사건이 있었다. 떠날 때의 야곱의 아내 라헬이 자기 아버지의 집 우상인 드라빔을 훔쳤다.
드라빔은 순금으로 된 인간형태의 우상이라고 한다. 그것은 소위 가정을 지키는 수호신이라고 해서 그 우상을 섬겼다. 그런데 야곱의 아내 라헬은 어찌하여 그 우상을 도둑질 했을까 하는 문제에 대해서 당시의 풍속을 알려주는 좋은 고고학적 자료가 발견되었는데, 그 자료에 의하면 한가정의 우상을 소유한 자녀가 결국 그 가정의 모든 재산을 상속받을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다.
아마도 라헬은 아버지 집의 금 우상이 탐이 나서가 아니라 결국은 아버지 집의 재산이 탐나서 그러한 일을 저지른줄 안다. 한마디로 말해서 야곱의 집의 신앙이란 것은 보잘것 없었던것 같고 한가정의 가장으로서 야곱의 신앙적 감화란 것도 볼 것이 없었던 줄 안다.
그러기에 야곱은 앞으로도 더 많은 환난을 겪어야 했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야 했던 것이다.
야곱이 떠난지 제 3일만에 라반은 그 소식을 들었고 우상을 도둑 맞은 것도 알았다. 라반은 많은 사람을 거느리고 뒤따라 가서 제 7일만에 야곱의 일행을 찾게 되었다. 라반은 심히 분노해서 야곱을 크게 해치려 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창 31:29에 보면 라반의 말에 "너를 해칠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어젯 밤에 내게 꿈에 나타나서 말하기를 너는 삼가 야곱을 해하지 말라고 했기에 너를 용서한다"고 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어떻게 보호해 주셨는지 보여주시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야곱을 크게 해치려는 라반의 마음을 감화시킴으로써 야곱을 보호하셨던 것이다. 야곱은 사실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택한 백성을 그처럼 끝까지 지키시며 보호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창세기 32:1~2를 보아도 이런 말씀이 있다.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더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여기에서 보는대로 야곱은 다시 길을 진행할 때에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났다고 했다. 아마 이것은 그의 환상 중에 되어진 것인줄 안다.
그 하나님의 사자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야곱은 그들을 군대라고 하면서 그 장소 이름을 [마하나임]이라고 했다. [마하나임]이란 말은 두겹으로 둘러싼 큰 부대란 뜻이다. 영어로 "double camps"란 말로 이중부대란 뜻이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이러한 환상을 보여준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이렇게 보호해 주는 것을 믿고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그러나 아직도 야곱은 하나님의 그러한 보호를 온전히 믿을수 있는데까지 그 신앙이 이르지 못했다. 그는 형 에서를 만날 생각을 하니 크게 두려움이 생겼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먼저 그 형 에서에게 사자들을 앞서 보냈다.
형의 동태를 우선 알아보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사자들이 돌아와서 보고하는 그 말은 야곱을 크게 놀라게 했다. 창세기 32:6에 보면 그 사자들의 말이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4백인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라고 했다.
동생을 만나려고 오는 형 에서가 4백인 씩이나 사람을 거느리고 올 필요가 어디 있었겠는가. 야곱은 이 사실에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에서가 4백명이나 되는 하나의 부대를 거느리고 온다는 것은 야곱을 영접하려는 것이 아니라 야곱에게 복수하여 멸하려 오는 것으로 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실 창32:6을 원문에서 보면 야곱의 사자들이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또한 4백인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 여기에서 [또한]이라는 히브리말(메모드)은 벌써란 뜻으로써 야곱의 사자들이 에서에게 이르니 "그는 벌써 4백인을 거느리고 오더라"라는 말이다.
에서가 어떻게 벌써 야곱이 오는 줄을 알고 4백인을 거느리고 떠났겠는가? 야곱은 밧단아람을 떠날때도 밤에 남이 모르게 도망쳐 나온 사람이 아닌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에서가 야곱의 출발을 벌써 알고 4백인을 거느리고 떠났다는 것은 심상한 일이 아닌 것임이 분명하다.
생각컨대 에서는 오랫동안 야곱에 대해서 큰 원한을 품고 그의 동정을 예리하게 살피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야곱의 종들 중에 혹 에서의 정탐군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떠한 방법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야곱의 출발이 가까운 라반은 몰랐어도 멀리있는 에서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얼마나 야곱에 대해서 원한이 컸던가를 보여주는 것으로 안다.

여기에서 야곱은 자기의 일행을 세 떼로 나누어서 각각 예물을 가지고 앞서가게 했다. 먼저간 일행이 에서를 만나서 예물을 드리며 그의 원한을 풀게하고, 제 3진까지 그렇게 하게하고 그의 처자를 맨 뒤에 따라가게 하고 자기만은 홀로 남아서 에서의 모든 태도를 살피게 했던 것이다. 이것은 야곱이 얼마나 형 에서를 무서워 했던가를 보여 준다.
그런데 창32:24에 보면 떨고있는 야곱에게 [어떤 사람]이 다가왔다. 성경에 보면 야곱은 그와 더불어 밤새도록 씨름했다고 했다. 여기에서 씨름이란 무슨 운동이나 유희같은 오늘날의 씨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마도 야곱이 낯선 어떤 사람이 찾아올 때에 그는 에서가 보낸 한 자객이 아니었던가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와 생사를 결정하는 싸움을 한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마침내 야곱에게는 신령한 눈이 열려서 그가 하나님의 사자인 것을 알게 됐다. 물론 그것은 그의 환도뼈가 부러진 후의 일이다. 그가 천사와 더불어 씨름한 것은 하나님을 크게 대적한 일로써 크게 징계를 받았다. 호세아 12:2~3을 보면 여호와께서 "야곱의 소행대로 벌을 주시며 그 소위대로 보응하시리니 그는 태에서 그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장년에는 하나님과 힘을 겨루었다"라고 한 말씀이 있다.
야곱이 그처럼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한 것은 그가 모태에서 형과 싸운것 같이 그의 악한 소행이라고 선지자 호세아는 말씀했다. 하나님을 대적한 일이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그의 환도뼈를 꺽으신 것은 그에게 큰 징계임이 분명하다. 그는 징계를 통해서야 하나님을 알게 됐던 것이다.
그는 그때 비로소 울며 회개했다고 호세아는 기록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회개를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하나님께서는 그때 이후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했다. 그 뜻은 하나님과 힘을 겨루어 이겼다는 말이다.
그 반대로 말한다면 [이스라엘]이란 말은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졌다는 말이 되겠는데 그러나 그것은 문자적으로 그러한 뜻이 아니라 사람이 아무리 사특하고 악하다할찌라도 그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며 사죄를 간구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진노를 거두시고 축복하신다는 뜻이다.

야곱은 자기의 혈육의 힘과 간교한 지혜로써 승리한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울며 회개할때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로 크게 성공한 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 일이 있은후 드디어 야곱은 에서를 만나게 됐다. 뜻밖에도 형 에서는 야곱을 만나 그의 목을 안고 울었다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원한에 가득찬 에서의 마음도 녹여주고 마침내 한 혈육의 정을 나누게 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라반의 마음을 녹여서 야곱을 해하지 못하게 하신것 같이 이번에는 에서의 마음을 녹여서 야곱을 해하지 않도록 하셨다.


야곱의 피난 (김희보 前 총신대 신대원 교수)

야곱은 고향을 떠났다. 하란의 외숙부의 집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그의 고향 브엘세바에서 밧단아람 땅 하란까지는 장장 1,500리의 먼 길이었다. 그가 집을 떠나 한 곳에 이르니 해가 졌다. 그곳은 곧 벧엘이란 곳이었다. 거기는 야곱의 고향 땅 브엘세바에서 250리 가량 떨어진 곳이었다.
그는 해가 지기까지 250리를 걸었던 것이다. 야곱이 하루에 그렇게 먼 길을 걸어갔다기보다 오히려 뛰었을 것이라고 본다. 이것으로 형을 피하여 가는 그의 마음이 얼마나 조급했던가를 여실히 보여 준다. 창세기28:11에 보면 "한 곳에 이르러 해가 진지라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했음을 보는데, 250리를 달려온 그는 피곤에 지쳐 잠이 들었다. 그가 뛰어온 길은 황막한 광야 길이요, 산 길이었을 것이다. 몸을 감출만한 덮을것 하나없이 산길 들길에 쓰러져 잠든다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일이었던가. 맹수가 덮칠지도 모르고, 에서가 추격할지도 모르는 위험한 길이었다. 그러나 그는 정신없이 잠들었다. 사람이란 본래가 잠든 때가 하루 중에 가장 위험한 때가 아닌가. 그것은 자기가 자기를 스스로 보호할 수 없는 때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잠자는 시간은 문을 닫고 빗장을 잠그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야곱은 위험한 산길에 쓰러져 홀로 깊이 잠들었다. 바로 그때 그는 꿈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를 보호하시며 어떻게 축복하시는지를 환상으로 보았다.

창세기 28:12이하에 "야곱이 꿈에 보니 사닥다리가 땅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 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 너희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 계시를 본후 그는 잠에서 깨어 비로소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하시고 계심을 알고 감격한 마음과 두려운 마음으로 베고자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을 세우고 제단을 쌓아 기름을 부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가 잠에서 깨어 처음 한 말이 무엇이었던가.
창세기 28:16에 보면 "야곱이 잠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계기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하는 말이었다.
이것은 야곱이 잠들기까지는 하나님께서 자기와 같이 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는 말이 된다. 사실 그때까지의 그의 마음은 공포와 불안과 고독과 눈물로 싸여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한 야곱을 하나님께서는 자기 사자들을 보내셔서 밤새도록 지키셨다. 하늘과 땅에 사다리가 놓여지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 내리락 했고 [그 위에 여호와께서 서서] 계셨다는 것을 암시하여 주시는 말씀이다(행7:55 참고).

우리가 여기에서 배우는 진리는 무엇인가? 사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깊어졌을 그때 하나님의 보호와 은혜를 입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그와 반대인 경우가 더 많다. 우리가 사실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있을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우리를 찾아주시고 지켜주심을 우리는 야곱에게서 새삼 배우게 된다.
야곱은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알지 못하고 피곤에 지쳐 쓰러졌으나 하나님은 밤새도록 그를 [서서] 지키셨다.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야곱은 일어나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돌기둥을 세워 기름을 붓고 그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다. [하나님의 집]이란 뜻이다.
그가 다시 그곳을 떠날때 그 마음은 기뻤고 그의 발걸음은 얼마나 가벼웠는지 모른다. 창세기 29:1에 보면 "야곱이 발행하여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러" 한 말씀이 있는데 여기 [발행하여]란 원문 [이ㅆㅑ ]는 공중에 들이어 간다는 뜻이 담긴 말이다. 말하자면 날아간다는 뜻이다. 이것은 그의 발걸음이 얼마나 가벼워 졌음을 보여주는 말이다. 공포와 불안에 떨며 가던 그의 무거운 발걸음은 가볍고 주님을 모신 그 마음은 즐거운 법이다.

어느덧 그는 목적지인 밧단아람 땅 하란에 이르러 어떤 우물가에 서게 되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거기에 라반의 딸 라헬이 양떼를 몰고 나타났다. 그는 그의 외삼촌의 딸이요, 후일에 그의 아내가 될 사람이었다. 창28:2에 이삭이 야곱을 보내면서 "라반의 딸 중에서 아내를 취하라" 했는데 바로 그가 야곱의 아내가 될 라반의 딸이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인도하심이 이처럼 신비스러웠다. 어찌 그뿐인가. 창세기 29:13에 보면 "라반이 그 생질 야곱의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그를 영접하여 안고 입맞추고 자기의 집으로 인도하여 하는 말이 너는 참으로 나의 골육이라" 했다. 이 얼마나 반가운 영접인가. 하나님께서 야곱의 앞길을 형통케함이 이러했다. 야곱은 너무 감격하여 소리내어 울었다(창29:11). 그러나 야곱의 가는 길이 늘 평안할 수만은 없었다. 그는 고난을 받아야할 필요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눈먼 아버지를 속였고, 형을 속이고 도망친 사람이 아니었던가. 하나님의 거룩한 약속을 인간의 속임수로 이루려했던 간교한 사람이 아니었던가. 이제 많은 곤고한 날을 통하여 그의 그러한 성품은 반드시 변화를 받아야할 사람이었다. 그의 간사한 성품은 어떻게 해서든지 성결해져야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었다. 이제부터 그의 앞길에는 고난이 닥쳤다. 먼저 그가 라반의 집에서 겪은 고생을 생각해 보자.

그는 20년 동안 들에서 양치는 사환이 되어야 했는데 그렇게 친절했던 외삼촌 조차도 점점 그 마음이 변했다. 그도 야곱을 이용하려 했지 도우려 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그의 곤고는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졌다. 창세기 31:40에 보면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여 눈 붙일 겨룰도 없이 지내었나이다" 했는데 이것은 라반의 집에서의 그의 20년 동안의 생활을 한마디로 표현한 말이다.
그는 진실로 낮의 더위와 밤의 추위를 참으며 밤낮을 양떼들 곁에서 지새워야 했다. 그뿐만 아니라 라반의 집에서의 부당한 대우를 그는 계속 받아야 했다.
창세기 31:41에 보면 "내가 외삼촌 집에 거한 이 20년 동안에... 외삼촌께서 내 품삯을 열번이나 변역하였나이다" 이렇게 기록되었음을 보는데 참으로 처량한 일이었다. 삼촌에게 열번이나 속아야 했다.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였던 그는 이제 심은대로 그 값을 치루어야 했던 것이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는 심은대로 거두어야 했다. 먼 후일의 일이었지만 그는 자기 아들들에게까지도 속아야 했고 그로 인하여 슬픈 날을 보내야 했던 것이다(창37:31-34).

또 잠언 13:15에 "궤사한 자의 길은 험하니라" 하신 말씀 그대로 야곱의 인생길은 참으로 험악했던 것이다(창47:9 참고). 그가 그렇게 일평생을 험악한 날들로 보내야 했던 것은 그의 성품을 변화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훈련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사실 마침내 그는 그 모든 고난을 겪은 후에 거룩한 족장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밧단아람에서의 곤고한 20년 생활에 드디어 고향 생각이 간절해졌다.
창세기 30:25에 보면 그는 라반에게 드디어 "나를 보내어 내 고향 내 본토에 가게 하소서" 이렇게 애원했으나 그는 여러 말로 그를 머물게 했다.
야곱은 사실 마음대로 떠날수 있는 자유스러운 몸은 아니었다. 그도 매어있는 사환이었다. 허나 마침내 때는 왔다. 창세기 31:2에 "야곱이 라반의 안색을 본즉 자기에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않더라" 했고 그 아들들도 그에게 대하여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았다"는 말로 험하게 수근거렸다(창31:1).
그의 신변에 어떠한 해가 닥칠지도 모를만큼 환경은 험악해 왔다. 바로 그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다. 그는 역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받는 하나님의 택한바 사랑하는 아들이었다.
그는 가만히 도망하여 라반의 집을 벗어났다. 그리운 고향 땅 가나안을 향하여 그러나 그의 앞길에는 여전히 곤고한 날들이 복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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