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눈으로보는 성경 - 욥기 ①
한눈으로보는 성경 - 욥기 ①
신앙과 고난에 관한 묵상
왜 죄 없는 사람이 고난 당하는가? 인생의 근원적인 질문을 붙들고 다섯 명의 사람이 씨름한다. 그러나 답을 얻지 못한 채 고난을 설명하는 경박한 이론들이 고발당한다. 욥기는 고난 자체보다는 고난의 상황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부족함과 하나님의 깊은 지혜를 밝히고 있다. 의인이라 칭함 받은 욥조차도 하나님의 깊은 뜻을 파악할 수 없는 불완전한 인간에 불과하다.
욥기 한눈에 보기
본 문 | 서문 | 욥과 세 친구의 대화 | 엘리후의 연설 | 하나님의 등장 | 결말 | |||
1:1~2:13 | 3:1~14:22 | 15:1~21:34 | 22:1~27:23 | 28:1~31:40 | 32:1~37:24 | 38:1~42:6 | 42:7~17 | |
사탄의 시험 | 첫 번째 논쟁 | 두 번째 논쟁 | 세 번째 논쟁 | 마지막 논쟁 | 엘리후의 답변 | 하나님의 말씀 | 하나님의 축복 | |
문 체 | 산문 | 대화체 (3장 : 시, 연설) | 시, 연설 | 시 | 산문 | |||
저 자 | 성숙한 영적 통찰력과 뛰어난 문화적 재능을 가진 익명의 저자 | |||||||
배경적 시기 | 욥은 아브라함에 비견되는 인물이다. 가축을 많이 거느린 족장이고, 대가족의 가장이며, 장수한 인물이다. 따라서 이야기의 배경은 BC 2000~1500년경으로 보아야 한다. | |||||||
장 르 | 지혜문학 |
욥과 지혜문학
욥은 온전하고 흠이 없으며 정직한 사람으로 우스 땅에 살았다. 우스 땅은 이스라엘을 기준으로 동방 어딘가에 있는 곳이지만,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다만 이 공간적인 배경은 욥이 히브리인이 아니고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 즉, 욥이 경험한 일과 하나님과 인생을 향해 던진 그의 질문은 이스라엘에 국한되지 않는 전 인류의 보편적인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 교훈을 자신들의 지혜문학(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의 범주에서 받아들였다. '지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삶의 기술'에 가까운 개념이다. 즉, 유대인들에게 지혜란 매우 실천적이고 실제적인 개념으로, 삶을 올바로 살게 해주는 무언가에 해당한다. 그러나 가벼운 처세술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지혜문학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바탕으로, 하나님이 펼쳐 나가시는 일에 초점을 기울인다.
욥의 몰락 (1:1~2:13)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인이다. 그의 정직함과 선함이 두드러진다. 그런데 지상에 살고 있는 욥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하늘의 회의장이다. 하나님이 사탄에게 욥에 대해 물으신다. 이어서 하나님은 욥에 대한 평가를 확증하시기 위해 욥을 재앙 속으로 밀어 넣는 사탄의 시험에 동의하신다. 그래서 사탄은 욥의 소유를 모조리 거두어 가고, 자녀들도 모두 죽였다. 욥의 몸을 상하게도 했다. 이렇게 서문이 끝날 때 욥은 잿더미 위에 앉아서 가려운 몸을 긁고 있는 처지로 전락한다. 이 비통함을 목격한 욥의 아내는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라고 한다. 그냥 죽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을 '욕(저주)'하라고 촉구한다. 그러나 욥은 구차한 목숨을 부지하려고 한다. 단순히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이 모든 일에 대한 하나님의 답을 듣고자 한다.
욥의 소유와 사탄의 시험
대 상 | 숫 자 | 공격 도구 | 피해 방법 |
자 녀 | 아들 7명과 딸 3명 | 거친 들에서 불어온 큰 바람 | 집이 무너져 모두 죽음 |
소와 나귀 | 소 500겨리(1,000마리)와 암나귀 500마리 | 스바 사람들 | 가축을 빼앗고 종들을 죽임 |
양 떼 | 7,000마리 | 하나님의 불 | 양 떼와 종들을 모두 불사름 |
낙 타 | 3,000마리 | 갈대아 사람들 | 가축을 빼앗고 종들을 죽임 |
종 | 다수 | 가축을 지키다가 죽임 당함 |
사탄이 욥의 소유를 거두어 가는 과정은 상당히 역동적이다. 소유물에 따라 공격 방식도 다양하다. 우스 땅의 위치가 모호한 것과 달리 스바 사람과 갈대아 사람 같은 구체적인 명칭이 동원되었다는 점도 특이하다. 스바는 창세기에서 힘의 자손인 구스의 아들로 알려졌고(창 10:7), 솔로몬 왕 시대에 스바 여왕이 이스라엘을 방문하는 등 구약성경에서 자주 언급되는 지명이다(왕상 10장; 대상 1:9; 대하 9장; 시 72:10; 사 60:6). 갈대아는 역사적으로 주전 9세기경에 이스라엘에 알려진 이름으로, 여기에서는 약탈을 일삼는 유목민의 대표 격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이 매우 먼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상기할 때 이들의 등장은 독특한 의미가 있다. 즉, 사탄이 욥에게 가져온 재앙은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어앙이 벙벙할 만큼 놀라운 일이다.
하나님은 사탄과 내기를 하시는가
욥기에 등장하는 사탄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사탄과 다를 수도 있다. 욥기의 사탄은 하나님께 복종하고 있는 종으로, 지상에서 특별한 시찰 업무를 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탄은 순전하다는 사람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하나님과 대치한다. 그는 하나님께 질문한다. "현실적인 이해관계를 초월한 믿음이 있겠습니까? 돈 때문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미처 모르고 계시던 일에 호기심이 동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욥을 통해 이 문제에 답변하려 하신다. 그래서 사탄의 도전을 받아들이신다. 하나님이 욥에게 고난을 허용하신 까닭은 그것만이 진리를 입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사탄이 더 이상 욥을 고소할 수 없도록, 욥의 믿음이 시험을 통과하도록 두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욥의 고난이 선한 결과를 가져올 것을 아셨다. 욥의 믿음은 고난 가운데 깊어질 것이다. 고난은 분명 시험이다. 또 하나님을 배신하라는 유혹 앞에 직면하는 일이다. 하나님이 일부러 고난을 만드셨는지는 여전히 신비로 남아 있지만, 고난의 이유와 상관없이 우리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고난의 관점
사 탄 | 사람들은 고난 없이 잘살고 축복받을 때에만 하나님을 믿는다. → 이것은 전적으로 틀린 생각이다. |
욥의 세 친구 | 고난은 하나님이 죄를 심판하시는 것이다. → 때로는 그런 경우도 있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다. |
엘 리 후 | 고난은 하나님이 우리를 가르치시고 단련시키시는 방법이다. → 이것은 사실이긴 하지만 완전한 설명은 아니다. |
하 나 님 |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이해함으로 그분을 믿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 그분 자체를 전적으로 믿도록 해 주는 것이다. |
욥의 세 친구
욥의 친구들이 찾아온다. 욥의 소문을 듣고 그를 위로하기 위해 제각기 자기 집을 떠나 욥에게 온 것이다. 청하지 않은 친구들인 만큼 해 줄 말에 대한 자신감과 책임감이 분명했을 것이다. 아마도 욥의 상태는 이들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비참했던 모양이다. 이들은 선뜻 입을 열지 못하고 이레 동안이나 욥과 함께 땅바닥에 앉아 있었다. 데만 사람 엘리바스는 에서의 첫째 아들로 알려진 만큼(창 36:10) 에돔과 상관이 있다. 데만이라는 단어 자체는 오른쪽이란 의미를 담고 있는데, 이스라엘 지형에서 오른쪽은 남쪽을 지칭한다. 따라서 데만은 남쪽 지방에 있는 에돔의 어디쯤일 것이다. 유세비우스는 데만을 페트라에서 멀지 않은 나바티안 영토로 보았다. 전통적으로 에돔이나 데만 사람은 지혜로 명성이 자자했다(렘 49:7). 빌닷(Bildad)은 아카드어에서 유추하면 아다드의 아들(Bil Hadad), 즉 아람을 의미한다는 견해가 있다. 수아는 아브라함과 그두라의 아들 중 하나로(창 25:2) 미디안의 형제이자 스바와 드단의 삼촌이 된다. 아들과 연관 지어 보면 에돔보다 더 남쪽에 자리 잡은 민족일 수 있다. 소발은 히브리어로 '어린 새'를 의미하는데, 욥기에만 등장하는 이름이다. 70인경은 소발을 엘리바스의 아들 중 하나인 스보(창 36:11)로 읽는다. 나아마는 여호수아서에서 유다 산간 지방의 성읍 중 하나로 나오지만(수 15:41) 가능성이 별로 없다. 70인경은 '나아마'의 자음을 바꾸어 '미네아'로 읽고, 소발을 미네아 왕으로 본다.
욥의 생일 저주 (3:1~26)
욥의 첫 번째 연설에는 욥기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들이 담겨 있다. 그는 순수한 논리적 사고만으로 현실을 인식하려 하거나 철학적인 탐구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가슴 찢어지는 애끓는 호소를 한다. 욥은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며 모태에서 이미 죽었거나 나자마자 죽었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극도로 괴로운 상태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는 않는다. 그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오직 하나님만이 답하실 수 있는 질문을 던진다. "왜 이 고통을 겪어야 합니까?"
왜 친구들과 논쟁하는가
욥기의 상당 부분(4~31장)은 욥과 세 친구인 엘리바스, 빌닷, 소발 사이에 벌어진 논쟁을 담고 있다. 욥은 각 친구와 세 차례에 걸쳐 논쟁하는데, 소발과는 세 번째 논쟁이 없다. 논쟁은 각 논점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식으로 전개된다. 세 친구는 고난에 정통한 식견과 경험이 있는 듯하다. 모든 고난은 죄 때문에 발생하므로, 욥의 고난도 죄를 지었기 때문에 비롯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욥이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고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으실 것이라고 충고한다. 아마도 현대 종교의 대부분이 이런 입장을 취할 것이다. 즉, 운명은 자기 행동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기독교 일각에서도 성공과 번영은 하나님이 복 주신 증거라며 고난의 십자가를 무색하게 한다. 욥은 이 이론에 반발한다. 결코 죄를 짓지 않았으므로 자신의 고난은 죄의 결과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하지도 않은 일을 회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고난에 관해 장담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뿐이다. 고난은 반드시 일어난다는 것이다.
욥과 친구들의 첫 번째 대화 (4:1~14:22)
왜 친구들은 욥과 논쟁을 벌일까? 이들은 하나님에 관한 지혜와 경험이 풍부한 자들이다. 이들의 말이 전적으로 틀린 것도 아니다. 문제는 이들의 말이 의미 자체로는 옳지만,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욥의 현실은 그들이 선포하는 간단명료한 이론과는 달랐다. 결국 대화는 점차 분노와 가시 돋친 말로 치닫는다. 엘리바스는 연장자인 만큼 점잖게 시작했지만, 빌닷은 더 강경하게 말하고, 제일 어린 소발은 친구들 가운데서도 가장 비정한 말로 욥의 마음을 쑤셔 댄다. 욥도 결국 이들에게 빈정거린다. 친구들의 말 중에서 욥이 모르고 있던 것은 하나도 없었다. 욥은 친구들의 말이 '알맹이 없는 말'이라고 쏘아붙인다. 결국 첫 번째 대화가 끝났을 때 욥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을 향해 직접 호소하며 자비를 구하는 것뿐이다(13:20~14:22).
구 분 | 논 점 | 특 징 |
엘리바스 (4~5장) | 전능자의 훈계를 받아 환난에서 구원받으라. | 연장자답게 타이른다. 자신이 직접 겪은 지혜와 경험에 근거해 충고한다. |
▶ 욥의 답변 (6~7장) | 도대체 내 잘못이 무엇인가? | 손쉽게 죄를 지적하는 친구에게 배신감을 느끼며 분개한다. |
빌닷 (8장) | 욥이 회개하면 하나님이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 자신의 견해는 조상들에게 배운 진리임을 과시한다. |
▶ 욥의 답변 (9~10장) | 이 고통의 의미를 알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 친구에게 반박하는 틈틈이 하나님께 탄원한다. |
소발 (11장) | 네 말은 전부 헛소리이다. | 결백하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 욥에게 화를 낸다. |
▶ 욥의 답변 (12:1~13:19) | 왜 알맹이도 없는 말을 하는가? | 친구들의 공격에 지쳐 하나님께 기도한다. |
엘리바스 : 죄 없이 망한 자가 있는가
욥이 자기 생일을 저주하자, 엘리바스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며 입을 연다. 엘리바스가 볼 때 욥의 절규는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향한 월권행위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 자연도 온전히 하나님께 순종할 뿐이다. 따라서 자기 존재를 놓고 불평하는 욥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도전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욥의 탄식은 신학적 명제를 초월한다. 욥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 괴로워 비명을 지르는 것이다. 엘리바스는 이유 없는 고난은 없으며 이런 비명조차 '죄'라고 규정하고, 죄 없이 망한 자는 없다고 말한다.
빌닷 :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욥기의 시간적, 공간적 배경은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이 아니다. 욥의 친구들은 죄를 인식하거나 해석하는 데 있어 율법 같은 절대 기준을 갖고 있지 않다. 이들이 의지하는 것은 조상들의 경험담이나 자기 눈으로 관찰한 현실이다. 빌닷은 욥에게 벌어진 고통이 그의 죄에 대한 심판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에, 그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거나 예상할 수 없다. 심지어 욥이 겪고 있는 고통이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신을 욥보다 의로운 자라고 내심 자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빌닷은 손쉽게 보상을 거론한다. 욥의 전 존재가 고통의 의미를 발견하려는 실낱같은 희망에 매달려 있는데, 구구한 원인을 따지지 말고 어서 털고 일어나 약속된 복을 받으라고 재촉한다.
소발 :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
충고자에게 보람이 되는 일은 듣는 사람이 자신의 충고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자신의 충고가 통하지 않는다면 분노하는 경우도 있다. 욥의 친구들은 끝까지 결백을 주장하는 욥의 태도에 크게 놀란다. 결국 이들이 에둘러 말하는 비난은 인간이 감히 전능자를 알 수 있느냐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전능자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욥의 친구들도 마찬가지이다. 전능자의 주권에 대한 경외는 남을 공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는 데 사용해야 한다. 소발은 하나님의 뜻을 찾겠다는 욥에게 반발하며 비난에 가까운 폭언을 쏟아놓는다.
욥의 기도 (13:20~14:22)
욥은 사람에게 변명하기를 그치고 하나님께 호소하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갈구한다. 인생의 무상함과 생의 고통을 토로하기 위해 마치 하나님께 소송을 거는 형식으로 기도한다. 하지만 여전히 침묵하시는 하나님 앞에 결국 욥은 아프고 슬픈 마음을 호소하기만 할 따름이다.
욥과 친구들의 두 번째 대화 (15:1~16:22)
두 번째 대화(15:1~21:34)는 짧아진 대신 더욱 신랄하다. 비슷한 논점이 반복된다. 이제 욥의 친구들은 고문관이 된다. 그들의 말은 공허한 희망일 뿐이다. 엘리바스는 욥에게 하나님을 대적하며 교만한 자는 환난을 당한다고 질책한다. 이에 욥은 친구들에게 위로를 주기는커녕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16:2)이라며 탄식한다.
출처 : 생명의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