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한눈으로보는 성경 - 창세기 ③

산호석 2020. 5. 11. 11:15

한눈으로보는 성경 - 창세기 ③

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열정
하나님은 야곱이라는 한 인물을 오랜 시간에 걸쳐 새롭게 빚으신다. 야곱은 이름이 의미하는 대로 거짓말에 능한 간사한 자인데, 하나님은 그를 선택하시고 연단하신다. 야곱은 자신이 행했던 대로 삼촌과 아내와 자식들에게 고스란히 되갚음을 받지만,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그분과 씨름한 끝에 결국 아브라함과 이삭에 이어 믿음의 조상 대열에 드는 영광을 얻는다.

 

라헬의 불임과 출산(30:1~24)

사라와 리브가에 이어 라헬도 불임으로 고통 당한다. 사라가 하갈을 통해 자식을 얻은 것처럼, 라헬도 자신의 여종 빌하를 야곱에게 주어 자식을 얻는다. 이를 계기로 레아도 자신의 여종을 통해 자식을 낳는데, 이들 여종이 야곱의 아내(히브리어로 '이샤')로 불린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30:4, 9).

 

야곱의 자녀들

  이름 이름의 뜻 어머니
첫째 아들 르우벤 보라 아들이라 레아
둘째 아들 시므온 들으심 레아
셋째 아들 레위 연합 레아
넷째 아들 유다 찬송 레아
다섯째 아들 송사, 재판 빌하(라헬의 여종)
여섯째 아들 납달리 경쟁 빌하(라헬의 여종)
일곱째 아들 실바(레아의 여종)
여덟째 아들 아셀 기쁨 실바(레아의 여종)
아홉째 아들 잇사갈 값(합환채로 얻은 아들) 레아
열째 아들 스불론 편만히 거하다 레아
디나 '단'의 여성형 레아
열한째 아들 요셉 더하다 라헬
열두째 아들 베냐민 오른손의 아들(가나안으로 돌아오는 길에 낳은 아들) 라헬

 

야곱의 품삯(30:25~43)

야곱이 자기 몫으로 특정 모양을 가진 양과 염소를 얻어 낸 방법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버드나무, 살구나무, 신풍나무를 벗긴 흰 무늬 앞에서 양과 염소가 새끼를 배면 얼룩얼룩하고 점이 있고 아롱지게 되는가? 그것은 아니다. 하지만 야곱은 이것이 하나님이 꿈을 통해 자신에게 일러주신 방법이라고 확신한다(31:4~13). 이는 거짓말에 능한 야곱이 둘러댄 것일 수도 있지만, 사건의 진위 여부보다는 이야기 속에 담긴 절묘한 언어유희가 주목할 만하다. 즉, 야곱의 삼촌 라반은 히브리어로 '희다'는 뜻이다. 야곱은 흰 가지를 세워 놓았더니 양과 염소가 얼룩얼룩해졌다고 말하며 은근히 라반을 희롱하는 것이다. '붉다'라는 뜻의 에서가 붉은 죽에 속아 아우에게 장자권을 넘긴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드라빔을 훔친 라헬(31:19~35)

드라빔이 정확히 어떤 모양이며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구약성경의 다른 곳에서 사용된 예를 보면 여호와 신앙과 함께 내려온 미신적 요소를 지닌 민간신앙쯤으로 짐작할 수 있다. 사사 시대 단 지파의 제사장은 이를 제의적 용도로 사용했고(삿 18장), 미갈과 다윗의 집에도 있었으며(삼상 19장의 '우상'), 요시야 왕은 이를 종교개혁의 대상으로 보았다(왕하 23장). 스가랴 선지자는 드라빔이 허탄한 것을 말한다고 비판한다(슥 10:2). 본문에서 드라빔을 언급하는 이유는 라반 가정의 민간신앙이나 우상숭배를 지적하기 위함이 아닌 듯하다. 아마도 라헬은 드라빔이 아버지 집에 행운이나 복을 가져다주었다고 믿고, 그것을 남편의 집으로 옮겨 올 욕심이었던 듯하다. 라헬은 훔친 신상을 깔고 앉아 생리 중이므로 움직일 수 없다고 둘어댔는데, 생리 중인 여성은 제의적으로 부정하다고 여겨 가까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갈사하두다(31:47)

구약성경에는 히브리어만 아니라 아람어도 쓰였다. 아람어는 시리아 지역에 분포한 아람 왕국의 언어로 주전 9세기에 등장했는데, 앗수르와 바사 제국이 통치할 때도 메소포타미아 전역에서 공용어로 사용되었다. 구약성경에서 아람어가 사용된 곳은 에스라(4:8~6:18; 7:12~26), 다니엘(2:4~7:28) 등이 대표적이고, 예레미야(10:11)에서도 발견된다. 아람어 '여갈사하두다'는 '무더기'를 의미하는 '여갈'과 '증거'를 의미하는 '사하두다'의 결합으로 히브리어 '갈르엣'처럼 '증거의 무더기'를 의미한다. 아람 사람인 라반은 아람어로, 히브리 사람인 야곱은 히브리어로 각각 증거를 삼은 것이다.

 

야곱 시대 주요 지명과 사건

 

하나님과 싸우는 야곱(32:13~32)

오늘날 유대인이 세운 나라의 국호가 된 '이스라엘'은 창세기 본문을 배경으로 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맞서 투쟁한다'는 뜻이다. 아브라함과 이삭 등의 열조가 있지만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사기꾼, 거짓말쟁이였던 야곱에게 보다 가깝다. 야곱은 싸움의 명수다. 처음에는 형과 싸웠고 다음에는 외삼촌 라반과 싸웠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야곱의 싸움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의 상대는 바로 하나님이다. 이 순간이 되기 전까지 야곱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은 듯하다. 자신의 운명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믿지 않았다. 하나님이 야곱을 제압하시고 그의 몸에 평생 이 싸움을 기억할 흔적을 남기신다. 그것은 자신의 무능력, 자기 힘으로 어찌해 볼 수 없는 절대자의 힘을 상기시킬 것이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신다. 더 이상 그는 속이는 자 '야곱'이 아니라 하나님과 싸움한 자 '이스라엘'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리지 않으셨는데, 이것은 아마도 하나님이 라헬이 도둑질해서까지 간직하려 한 싸구려 우상과 자신을 구분하신 듯하다. 하나님은 우상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전지전능하신 창조자시다. 야곱의 개명 이야기는 야곱이 디나 사건 후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 벧엘에 이르렀을 때 한 번 더 되풀이된다(35:10).

 

하나님은 왜 이름을 바꿔주시는가?

히브리인에게 이름은 단순히 어떤 사람을 부르는 표식이 아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이름에는 그 사람의 정체성, 하나님이 그에게 바라시는 바가 담겨 있다. 게다가 이름을 바꾸는 것은 주인이 바뀌는 것, 즉 충성의 대상이 바뀌었음을 상징한다. 바벨론과 애굽 왕들은 예루살렘을 함락한 뒤 항복한 유다 왕들의 이름을 자기 나라 식으로 바꾸곤 했다. 이는 그들이 유다를 소유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왕하 23:34; 24:17). 하나님이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사래를 사라로, 야곱을 이스라엘로 이름을 바꾸신 것은 이들 삶에 하나님이 간섭하심을 드러낸다.

 

야곱의 딸 디나(34:1~31)

성경에는 왜 강간 이야기가 많을까? 답은 아주 간단하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우리와 똑같은 죄인이기 때문이다. 특히 강간은 관영한 죄악의 상태를 반영한다(삿 19장). 심지어 동성 사이에서도 일어났고(창 19장),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 다윗의 가계에서조차 번번히 등장할 정도다. 이와 같은 본문에서 특이한 점은 강간당한 피해자들이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지어 분노와 슬픔조차 표시하지 못하고 제삼자가 되어 버리는 경우도 있다. 야곱의 딸 디나가 그렇다. 디나는 세겜에게 강간을 당했지만, 디나를 극진히 사랑해 결혼하고자 한 세겜은 이를 위해 온 가문의 남자들에게 할례를 받게 한다. 순조롭게 결혼이 이루어질 것 같은 상황에서 디나의 오빠인 시므온과 레위가 할례를 받고 누워있는 가나안 일족을 도륙한다. 야곱조차 아들들의 경솔한 행동에 분노하며 저주했을 정도다(차 49:7). 이 사건에서 가장 불쌍한 인물은 누구보다 디나 자신이다. 불명예스럽게 더럽혀진 디나는 그나마 미래의 남편조차 살해당하고 평생을 고독하게 지낸 듯하다. 결혼하지 못한 딸로 기록에 남았기 때문이다(창 46:15).

 

다시 벧엘에 선 야곱(35:1~15)

야곱은 가나안 족속들이 들고일어나 자기를 죽일까봐 두려워한다. 하나님은 이런 야곱에게 처음 하나님을 만났던 벧엘로 올라가라고 명하신다. 하나님 앞에 몸과 마음을 새롭게 하고 나아가려는 야곱 일행을 하나님은 보호하신다. 사면 고을을 두려워하게 하셔서 야곱의 가족이 추격당하지 않게 하신 것이다. 야곱은 벧엘에서 다시 제단을 쌓는다. 여기에서 야곱이 이스라엘로 개명되는 이야기가 한 번 더 언급된다.

 

에서 후손이 받은 복(36:1~43)

야곱과 달리 에서는 가나안 족속 여인과 결혼한다(36:2~5). 야곱이 가나안으로 돌아오자 에서와 야곱은 함께 거주한다. 그러나 두 형제 모두 소유가 풍부해 함께 거주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 그래서 에서는 스스로 가나안을 떠나 세일 산에 보금자리를 마련한다(36:6~8). 에서가 가나안을 떠나자 이제 야곱은 유일무이한 약속의 상속자로서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받고 번성해 간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에서에게도 미친다. 에서의 자손들도 번성했으며, 에돔 또한 대국이 되었다. 에서의 자손에서도 왕들이 나온다(36:31). 그렇다면 하나님이 특별히 택하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을 통해 이루어지는 약속의 성취는 얼마나 더 크겠는가?

 

애굽으로 팔려 가는 요셉(37:1~36)

라헬은 야곱이 가장 아끼는 아내였기에, 야곱은 라헬이 낳은 요셉과 베냐민도 애지중지했다. 그렇지 않아도 아버지의 편애로 요셉은 형들에게 눈엣가시였을 텐데, 열일곱 살 요셉은 어지간히 눈치도 없었던 듯하다. 형들의 잘못을 일일이 아버지께 고해바친 것이다. 이복형들은 동생을 대놓고 미워했고 잘난 체하는 요셉의 꿈 이야기에 기어이 분노를 터뜨린다. 요셉이 꿈을 꾼게 죄는 아니지만, 어쨌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요셉은 형들에게 더 큰 미움을 사서 애굽에 노예로 팔려 간다. 성경은 요셉을 사 간 사람들이 이스마엘 사람들이라고도 하고, 미디안 상인들이라고도 기록한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

보디발의 직분이 흥미롭다. 우리말 '신하'로 옮긴 히브리어 '사리스'는 랍사게나 랍사리스처럼 앗수르 궁정에서 일하던 환관(eunuch)을 일컫는 말이다. 애굽 바로의 궁정에서 일하는 환관에게도 같은 용어를 사용했을 수 있다. 환관의 아내(아마도 형식적인 아내였을 것이다)가 용모가 빼어난 노예 요셉에게 음란한 마음을 먹은 것이나, 그런 아내의 됨됨이를 파악하고 아내를 희롱했다는 노예를 죽이는 대신 감옥에 넣는 환관의 너그러움이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장자 유다와 며느리 다말(38:1~30)

야곱의 큰아들 르우벤은 아버지의 소실인 빌하와 동침한 죄로(35:22) 장자권을 잃는다. 다음으로 권한이 있는 시므온과 레위는 혈기를 다스리지 못하고 온 가문을 위기에 몰아넣는 바람에 자격을 잃는다. 이렇게 해서 야곱의 장자권을 이어 갈 네 번째 아들 유다에게 관심이 집중된다. 그런데 유다 역시 만만치 않다. 며느리 다말과의 사이에 자식을 낳은 것이다. 롯과 딸들의 이야기만큼은 아니지만 충격적이긴 매한가지다. 유다는 여러 어머니와 이복형제 등 복잡한 가족 관계를 떠나 가나안 족속 틈에서 살았다. 다말은 유다의 장자인 엘의 아내였다. 엘이 죽자, 관습에 따라 동생 오난이 형의 가문을 이을 책임이 있었다. 그러나 오난은 이 의무를 저버렸다. 의무를 거부한 오난은 하나님께 벌을 받고 죽는다. 유다는 셋째 아들 셀라도 죽을까 두려워서 이번에는 아예 다말을 홀로 버려둔다. 다말은 구약성경의 여느 여인과 달리 행동을 취한다. 창녀로 변장하고 시아버지를 기다렸다가 동침한 것이다. 그 증거물로 시아버지 인장을 취하기까지 한다. 석 달 뒤, 임신이 드러난 다말은 간통 혐의로 끌려 나온다. 다말은 유다에게 인장을 보내 아기 아버지가 유다임을 밝히고, 유다는 '그가 나보다 옳도다'라고 선언한다. 이 장에서 시아버지를 유혹한 다말을 책망하기보다 임신을 위한 다말의 처절한 노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 과부는 아무런 생계 대책이 없었다. 이들이 살아남는 길은 남편의 가장 가까운 친척, 보통 남편의 형제들과 결혼하는 것이었다(신 25:5~6). 이 율법은 여성을 보호하고 자손을 보게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고대사회에서 아들은 여성의 지위, 생존, 미래를 결정짓는 요인이었다. 그래서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것은 큰 수치였다. 다말의 행위는 욕정 때문이 아니라 여자로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자신과 가문의 미래를 보장받으려는 모함이었다. 결국 이 비천한 가나안 여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까지 오른다(마 1:3). 다말의 행동이 결과적으로 다윗 왕과 예수 그리스도의 가계를 이어 가게 한 것이다.

 

 

출처 : 생명의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