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02편 - study
# Study
Ⅰ. 심한 고통에 대한 탄원 102:1-11
이 시편의 표제는 '곤고한 자의 기도'이다. 따라서 이 본문을 통하여 언급될 내용도 고난을 당하는 자의 손에 들린 기도이다. 고난을 당하는 자들은 그들의 손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 손에 심령을 담아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우리의 형편과 심령이 곤고할때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주님앞에 우리의 불평을 토로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로하여금 자신과 자유롭게 교제하도록 허락하셨으며 또 우리가 그앞에서 자유롭게 말할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것은 또한 고난을 당하는 자가 그 슬픔을 겸손하게 표현하도록 함으로써 고난의 짐을 경감하는 것이 얼마나 쉬운 일인가를 암시해 준다.
(1) 시편 기자는 자신의 고난과 그 고난중에 드리는 자기의 기도에 주의를 기울여주시도록 하나님께 겸손히 간구하고 있다(1,2절).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뿐 아니라 아울러 우리의 영혼도 드려야 한다. 만일 우리가 믿음으로 기도를 드린다면 우리는 믿음으로 "주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라고도 말할수 있을 것이다. "나를 위하여 주님의 모습을 드러내주소서. 곧 내 기도를 들으실뿐 아니라 기도의 응답도 해주소서. 또한 내가 필요로하며 내가 구하고 있는 구원을 허락해주소서. 그리고 내가 부르짖을때에 응답해주소서."
(2) 그는 자기가 당하고있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생긴 침울한 상태를 비통하게 하소연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몸까지 쇠약해졌다. 번영과 기쁨을 누리면 뼈가 윤택해지는 것처럼(잠 15:30), 큰고통과 슬픔을 당하면 그와 반대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내 뼈가 냉과리같이 탔나이다(3절). 나의 살이 뼈에 붙었나이다(5절). 내마음이 풀같이 쇠잔하였사오며(4절). 내가 풀의 쇠잔함같으니이다(11절). 여기에서 '내가 풀의 쇠잔함같다'고 한말은 "내가 타오르는듯한 고통의 열기로 말라 죽게되었다"는 뜻이다. 그는 너무도 자기의 고난을 생각하고 있었기때문에 음식을 먹는 것도 잊어버렸다(4절). 그것은 그의 고통이 너무 심해서 아무런 식욕도 생기지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우울증에 걸린 사람처럼 고독에 잠겨있었다. 그의 친구들은 그를 떠났으며 그와 대면하는 것까지도 수치스럽게 생각했다(6,7절). "나는 광야에서 쓸쓸하게 부르짖는 당아새같고 황폐한 건물속에 살기를 좋아하는 부엉이같이 되었나이다. 내가 밤을 새우니 지붕위에 외로운 참새같이 되었나이다. 나는 다락방에 거하면서 내 고통을 깊이 생각하며 나 자신을 한탄하는 것으로 모든 시간을 보내고 있나이다." 친구들이 그에게서 떠나가자 원수들이 그를 대적하기 시작했다(8절). 친구들이 그를 떠나기전에는 그 원수들이 그에게 접근할수도 없었으므로 그들은 그에게 화살을 쏘거나 악담을 하는 것으로 그쳤다. 그는 이제 하나님의 노로인하여 당한 고통때문에 금식을 하면서 한탄하고 있다. 그런데 그를 고통스럽게 했던 것은 고난 자체라기보다는 오히려 고난의 원인으로서 그가 염려하던 하나님의 진노였다. 대저 내 날이 연기같이 소멸하며. 그의 날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린다는 뜻이다. 그날들은 '기울어지는 그림자' 곧 저녁의 어둠과 같이 된다. 이 모든 내용은 고난을 받는 개개인의 기도로도 어울리나 하나님의 교회가 당하는 고난을 묘사하는 것으로도 생각될수 있다. 다시말해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교회가 당하고있는 고난을 동정하면서 공적인 슬픔을 자기자신의 슬픔으로 돌리고 있는 것이다.
Ⅱ. 하나님의 적절하신 구원 102:12-22
앞에서 언급된 불평들을 상쇄시킬만큼 매우 크고 귀한 위로들이 여기에서 많이 언급되고 있다. '정직한 자에게는 흑암중에 빛이 일어나나니'(112:4).
(1) 우리는 죽을수밖에 없는 피조물들이며 우리의 관심과 위로도 소멸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살아계시며 변하지않는 하나님이시다(12절). "내 날은 그림자같아서 구제받을 도리가 전혀 없나이다. 밤이 결국 나에게 다가오리이다.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계셔서 그의 교회를 신실하게 보호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를 소홀히하시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신할수 있다.
(2) 가련한 시온은 지금 고통을 당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구원을 받게될 것이다(13절). 구원의 소망은 하나님의 선과 하나님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생겨난다. 하나님은 교회를 구원하기위하여 때를 정해 놓으셨다. 곧 교회의 구원은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로 정하시고, 그러므로 가장 선한 하나님의 영원하신 진리로 확고하게 세우신 날에 이루어질 것이다. 따라서 그날은 잊혀지거나 더이상 연기되지 않을 것이다. 시온, 즉 다윗성에 세워진 성전은 폐허가 되어있었다. 시온에 대해 은혜를 베푸는 것은 16절에 설명되어 있는 것처럼 다시 성전을 건축하는 일이다. '주의 종들'은 시온의 돌들이 비록 부서졌거나 흩어져있다 할지라도 그 시온의 돌들을 즐거워하며 '그 티끌', 곧 시온의 폐물과 폐허도 '연휼히' 여긴다(14절). 성전이 황폐해졌을때라도 그 성전의 돌들은 새건물을 짓기위하여 보전되어야 한다. 그 사실로 용기를 받는 사람들도 있다. 하나님께서 섭리를 통하여 그의 교회를 영광스럽게 하실때 '열방이 여호와의 이름을 경외할' 것이다. 곧 그들은 하나님의 교회에 대해 과거에 품었던 생각보다 더선한 생각을 하게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가 너와 함께가리라.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하시는 것을 우리가 보았기 때문이라"(슥 8:23).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을 최고의 목적으로 삼고있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며 그것을 위하여 기도한다.
(3) 하나님의 백성들이 드리는 기도가 경시되고 있거나 아무런 주목도 받지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시 재검토되고 큰격려를 받을 것이다(17절). 여호와께서 빈궁한 자의 기도를 돌아보시며. 하나님의 백성들은 빈궁한 자들이다. 그들은 광야에서 자라는 관목같이 비천한 처지에 놓여 고난을 받고있지만 영적인 축복으로인하여 부유해진 사람들이다. 그들은 단지 세상적으로 좋은 것들에 대해서 빈궁할 뿐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천박하고 무지하며 무감각한 면과 기도할때 나타나는 우리의 많은 결점들을 생각할때, 우리의 기도가 하늘에서 멸시당하지는 않을까 의심하지 않을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 반대의 결과가 생길 것으로 확신할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옹호를 받고있으며 율법이 아닌 은혜아래 있기 때문이다. 이 일이 장래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이것은 어느누구도 빈궁하다고해서 절망하지도 않고 또 기도의 응답을 즉시 못받았다는 이유로 자기의 기도가 잊혀졌다는 생각을 하지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결국 후대의 많은 사람들은 교회의 역사를 살펴봄으로써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를 찬양하게될 것이다.
(4) 부당하게 유죄판결을 받고 옥에 갇힌 자들은 죽이기로 정한 양처럼 보일지라도 그옥에서 풀려날 것이다(19,20절). 하나님께서는 '갇힌 자의 탄식을 들으시며 죽이기로 정한 자를 해방'하기 위하여 '그 높은 성소', 곧 '하늘'에서 하감하셨다. 하나님은 고난을 당하는 자기 백성들의 기도뿐 아니라 그들의 신음소리까지도 주시하신다. 우리는 베드로에게서 그 실례를 찾아볼수 있다(행 12:6). 만일 하나님께서 섭리를 통하여 자기의 이름을 선포하신다면 우리는 그의 이름이 울려퍼지도록 그 섭리를 인정함으로써 그를 찬양해야 한다. 진정 하나님은 옥에 갇혔거나 바벨론에 사로잡혀 있던 백성들을 풀어주실 것이다. 이것은 그들로하여금 하나님이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선택한 장소인 시온에서 그의 이름을 선포하고 예루살렘에서 그를 찬양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들은 또한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께 경배를 드릴수 있도록 도움을 줄 것이다(22절). 하나님의 백성들이 마침내 예루살렘으로 다시 모이자(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귀환할수 있었기 때문이다) 열방으로부터 온 많은 사람들도 함께 여호와를 섬겼다(스 6:21). 그러나 훗날 이방인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개종한 사실을 통해 우리는 그것을 더분명하게 깨달을수 있다. 그때 그리스도는 포로로 잡힌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하셨고 옥에 갇힌 자들에게 그 옥문을 열어주셨다. 이는 그들로하여금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연합하게될 복음교회에서 주의 이름을 선포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Ⅲ. 하나님의 영원성 102:23-28
(1) 바벨론 유수로 말미암아 뿌리째 뽑힐수밖에 없는 유대교회의 절박한 위험(23절) : 저가 내힘을 중도에 쇠약케하시며. 시편 기자는 이것을 자기의 일과 관련시켜 언급하고 있다. 신체의 병은 곧 우리의 힘을 중도에서 약화시키고 만다. 우리가 한창 시절에 쇠약해진다면 우리의 날수가 중도에 소멸되리라는 것외에 무엇을 기대할수 있겠는가? 대부분 열심히 수고한 사람들은 힘이 쇠약해지고, 수고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 날수가 줄어든다.
(2) 유대교회를 끊임없이 보존해달라는 기도(24절) :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중년에 나를 데려가지 마옵소서. 이것은 고난받는 자들을 위한 기도이다. 곧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중년에 우리를 데려가지 말도록 간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은 우리로하여금 그를 더 섬기고 하늘나라를 위하여 더 성숙해지도록 남겨두실 것이다.
(3) 약속된 메시야의 영원성을 통하여 이 기도를 강력히 주장하는 탄원(25-27절) : 사도바울도 히브리서에서 이 구절들을 인용하고 있다(히 1:10-12). 모든 것이 변하며 위험하다는 면에서 볼때 '예수 그리스도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히 13:8)는 사실은 매우 위로가 된다. 주의 연대는 대대에 무궁하니이다. 주의 연대는 짧아질수 없다. 우리의 몸이 죽고 우리의 친구가 우리를 떠나간다는 사실에서 볼때, 하나님께서 영원히 살아계시는 하나님이시고 또 그가 우리의 하나님이실 경우 우리가 그안에서 영원한 위로를 얻는다는 사실은 위로가 되지않을수 없다. 땅과 하늘, 우주와 그것의 충만함은 모두 하나님의 아들을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의 존재를 부여받는다(25절). "주께서 옛적에 세워 두셨던 땅의 기초는 바다와 큰물위에 세워졌음에도 오랫동안 지속되리이다. 그러므로 반석위에 세워진 교회는 이보다 훨씬더 오랫동안 지속되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다시 폐하실 것이다(26,27절).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왜냐하면 주께서 세상을 창조했을때와 같이 전능하신 힘으로 그들을 변화시키실 것이기 때문이다. 주는 영존하시겠고... 주는 여상하시고. 하나님과 세상, 그리스도와 피조물은 서로가 불멸하는 인간의 영혼을 완전히 차지하려는 경쟁자들과 같다.
1) 피조물의 운명은 소멸되고 죽어간다.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우리가 없어지듯이 천지도 영속하지 못할 것이다. 하늘과 땅은 모두 '옷같이 낡을' 것이다. 주께서 그들을 의복같이 바꾸시면 그들은 바뀌어지되 새하늘과 새땅으로 바뀌어질 것이다. 하늘과 땅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지배를 보라. 그는 그가 원하실때뿐 아니라 그가 원하시는대로 하늘과 땅을 변화시킬수 있다. 낮과 밤, 여름과 겨울이 뒤바뀌는 것은 그들의 최종적인 변화를 알리는 확고한 전조들이다. 그때가 되면 하늘과 그 기한은 더이상 연장되지 않을 것이다.
2) 하나님은 영존하시는 분이시다. 주는 여상하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그리스도는 약속하신바를 그대로 실행하는 분이시며, 그의 교회가 자유로왔을때나 속박당하였을때나 변함없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 자신이 교회의 힘이 되시고 생명이 되시는한 그힘이 약해지거나 그날이 줄어들까봐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요 14:19).
(4) 이 기도에 대한 응답의 확신(28절) : 주의 종들의 자손이 항상 있고. 그리스도께서 변함없으시기때문에 교회는 대대로 계속 존재할 것이다. 우리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분께서 영원히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통해 교회의 몸이 되는 우리도 영원히 산다는 것을 추론할수 있다. 그것은 비록 우리가 약하여 병에 걸리고 또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다할지라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괴롭게'(단 7:25)하려는 자들은 실패하게될 것이다.
# 핵심
102:1-28
포로생활을 하는 사람이 망국의 슬픔을 호소하며 국가의 회복을 열망하는 기도이다.
# 묵상
하나님께 상달되는 기도 ( 102:1 )
곤고한 자가 믿음으로 부르짖는 기도는 분향단의 향처럼 반드시 하나님께 상달됩니다(계8:3, 4). 시인은 뼈가 용광로에 타는듯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은 시인의 육신마저 쇠잔하게 하였습니다. 이처럼 영육간의 고통중에 하나님께 매달리는 기도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수 있습니다.
당아새와 부엉이의 비유 ( 102:6 )
시인이 자신을 당아새와 부엉이에 비유한 것은 당아새와 부엉이 모두 광야나 황무지의 한적한 곳에서 외롭게 사는 새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고난받는 자신의 처지가 황무지에 거하는 새처럼 외롭고 비참하다는 것으로서 역사적으로 바벨론에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처지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성도는 어느곳에 있든지 함께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위로받고 힘을 얻어야할 것입니다(살후2:16).
창조로 비유된 해방 ( 102:18 )
포로에서의 해방을 창조에 비유한 이유는 포로에서 회복될 이스라엘 백성이 연단받아 새롭게된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본 구절은 마치 죽은 것처럼 보이는 그때에도 하나님이 원하시면 교회는 새로 태어날수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쳐줍니다. 사탄으로부터 해방된 성도 또한 새롭게 창조된 백성들임을 깨달아야 합니다(고후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