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14장 - study
# Study
Ⅰ. 인생의 무상함과 연약함 14:1-6
우리는 여기서 다음의 사실들을 생각하게 된다.
1. 인간생명의 기원(1)
하나님은 진실로 생명의 큰근원이시다. 이는 그가 생기를 코에 불어넣으셨고, 우리는 그의 안에서 살기 때문이다. 우리는 태어날때부터 호흡을 시작하며 동시에 그때부터 그 생명의 취약성과 오염을 함께 받는다.
(1) 그 취약성 : 여인에게서 난 사람은 사는날이 적고(1절). 여기의 여인이란 '하와'라고 불리운 최초의 여인을 지칭한 것일수도 있고,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어머니를 지칭하는 것일수도 있다.
(2) 그 오염 :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것 가운데서 낼수 있으리이까(4절). 우리의 피는 법의 선고에 의하여 더럽혀졌을뿐만 아니라 유전적인 질병으로 더럽혀져 있다. 우리를 위해 죄의 몸이 되신 우리 주 예수는 '여자에게서 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갈 4:4).
2. 인간생명의 본성(2)
인간의 생명은 '꽃'과 같고 '그림자'와 같다(2절). 꽃은 시들며 그 모든 아름다움은 곧 희미해지고 사라져버린다. 그림자는 빨리 지나가며, 그림자의 존재는 밤의 음영속에서 곧 사라지고 묻혀버린다.
3. 인간생명의 짧음과 불확실함(2)
사람은 그 '사는 날이 적다.' 여기서는 인생이 달수나 햇수로 계산되지 않고 날수로 계산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느날이 우리의 종말이 될지 확신할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때때로 이세상에 나자마자 죽기도 한다. 곧 이세상에 태어나서 자기 일에 착수하려고 손에 쟁기를 잡자마자 땅에서 끊어짐을 당하기도 한다. 곧 이세상에 태어나서 자기 일에 착수하려고 손에 쟁기를 잡자마자 땅에서 끊어짐을 당하기도 한다. 설사 곧 죽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는 '그림자같이 신속하여서' 어떤 상태에도 그대로 머물러있지 못한다.
4. 인간생명의 불행한 상태(2)
인간은 그 생애가 짧을뿐 아니라 슬픈 생애를 산다. 이 적은날 동안에 '괴로움이 가득하다.' 즉 수고하거나 투덜거리면서, 슬퍼하거나 두려워하면서 늘 걱정에 가득차 있다. 하늘나라에서는 우리의 날들이 많을 것이며, 더욱이 고생이란 전혀 없을 것이며, 현세의 슬픔만큼이나 그곳에서는 믿음, 소망, 사랑이 가득할 것이다.
5. 인간생명의 죄악성(4)
이것은 인간본성의 죄악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것 가운데서 낼수 있으리이까(4절). 이 질문을 인간본성의 죄악성에 관한 말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많다. 욥은 하나님께 자비를 구하기위하여 이 말을 하고있다. "주여, 주께서는 나의 연약함을 아시므로, 인간의 연약과 결점에 따른 나의 죄를 극단적으로 주목하지 마시옵소서. 내가 육체임을 기억하옵소서." 갈대아 역본에서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흥미있게 의역해 놓았다. "죄로 오염된 인간을 누가 정결케 할수 있으리요? 오직 하나님만 그 일을 하실수 있지 않은가?"
6. 인간생명의 정해진 기간(5)
이세상에 우연히 일어나는 일은 없으며, 되는대로 쏘아진 화살에 의한 처형도 실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금욕주의의 맹목적 운명에 의해서 지배받지 않는 것처럼 쾌락주의의 맹목적 운수에 의해서도 지배받지 않는다. 하나님과 다툴수 없는 우리 자신의 무능함, 우리의 죄악성과 연약함에 대한 생각은 우리로하여금 '주여 주의 종을 심문하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게 만든다. 우리는 이처럼 우리의 체질로인한 우리의 존재까지도 고려하실 하나님의 긍휼에 우리를 의탁함으로써 큰고난 아래에서도 어느정도의 위로를 발견할수 있을 것이다.
Ⅱ. 죽음에 대한 예상 14:7-15
욥은 여기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보여준다.
(1) 죽음은 이세상에서 영원히 떠나는 것이다. 잘려진 나무가 다시는 소생할수 없는것 같이 죽음에 의하여 쓰러진 사람은 다시는 살아날수 없다. 욥은 나무가 가진 소망을 매우 유창하게 묘사하고 있다(7-9절). 만약 나무의 몸체는 잘려지고 그루터기나 뿌리만 땅속에 남아있다면, 비록 그것이 말라버린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마치 새로 심겨진 나무처럼 다시 어린가지를 낸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생명으로 다시 돌아오리라는 아무런 전망도 없다. 식물의 생명은 값싸고 흔한 것이다. 물기만으로도 그 생명을 회복시키기에 충분한 것이다. 동물의 생명, 곤충들과 새들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즉 태양열이 그 생명을 재생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성적인 인간은 일단 세상을 떠났을때에는 그것이 너무나 위대하고 고귀한 까닭에, 어떤 자연의 힘도 그를 다시 불러내지는 못한다. 인간은 태양이나 비가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어 전능자의 직접적인 작용이 아니고는 회복될수가 없다(10절). 사람은 죽으면 소멸되나니 그 기운이 끊어진즉 그가 어디 있느뇨. 여기서 두개의 단어가 사람을 가리키는데에 사용되고 있다.
첫째는 게벨 곧 강한 자인데, 비록 강하지만 그는 죽는다.
둘째는 아담 곧 흙으로 지어진 자인데 그는 흙과 같기때문에 그 생기가 끊어진다. 그가 어디 있느뇨. 죽은후에 그는 이전에 있던 곳에 있지않다. 그가 있던 처소는 더이상 그를 알지못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그는 아무곳에도 없느뇨"라는 의미로 읽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어디엔가 있다. 이미 생기가 끊어진 자들은 어디에 있으며 우리의 생기가 끊어졌을때에 우리는 어디에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것은 영들의 세계, 곧 영원속으로 들어가서 다시는 이세상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2) 그러나 인간은 다른 세상에서 다시 생명을 회복할 것이다. 이때는 마지막때, 곧 하늘이 없어질 때이다. 그때에 사람들은 다시 일어나며 잠에서 깨어날 것이다. 19:26절에 나타난바와 같이 죽은 자의 부활은 욥의 신조의 한 항목이었음이 분명하다.
1) 무덤속의 숨을 곳을 구하는 겸손한 탄원(13절). 욥이 죽기를 바란 것은 이생에 대한 격렬한 혐오 때문만이 아니라, 마침내 그가 다시 살아나서 누리게될 더나은 삶에 대한 경건한 확신 때문이었다.
2) 자기의 죽음과 부활 모두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끈기있게 주목하고자 하는 거룩한 결의(14절).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나는 나의 싸우는 모든날 동안을 참고 놓이기를 기다렸겠나이다. 욥은 친구들이 자기를 괴롭게하는 위로자들임을 알았으므로 차라리 자기 자신이 자기의 위로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는 지금은 자기의 상태가 나쁘지만, 변화가 오리라는 기대로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다.
3) 그 변화속에서의 즐거움과 만족에 대한 기쁜 기대(15절). 주께서는 나를 부르셨겠고 나는 대답하였겠나이다. 그러나 지금 그는 너무 암담한 상태에 있으므로 대답할수도 없고 감히 대답하려 하지도 않았다(9:15,35;13:22). 그러나 욥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부르시고 자기는 대답할때가 오리라는 생각으로 자신을 위로하고 있었다. 주께서는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아껴 보셨겠나이다. "주께서는 나를 위하여 긍휼을 예비하고 계시는데, 이 긍휼은 섭리에 의해서 마련된 것일뿐만 아니라 은혜에 의하여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니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을 만드신 주께서 그들을 구원하지 않으실 것이니이다." 인간에 대한 은혜는 하나님께서 직접하시는 일이므로 이세상에서 인간을 저버리지 않으시고(시 138:8) 아끼시며, 저세상에서 인간을 온전케하시며, 무한한 영광으로 관을 씌우실 것이다.
Ⅲ. 욥의 불평들 14:16-22
욥은 다시 자신의 원망을 시작하고 있다. 비록 그에게 미래의 기쁨에 대한 소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현재의 슬픔을 극복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생각한다.
(1) 그는 하나님의 공의의 엄격함때문에 자기가 처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그 특별한 역경을 원망하고 있다(16,17절). 그러므로 욥은 하나님의 진노가 이미 지나간 저세상으로 나아가기를 갈망한다. 이는 그가 회초리의 엄한 징계아래에 있으면서 어서 빨리 어른이 되기를 바라는 어린아이 같이, 끊임없이 하나님의 징계의 표징아래에 있는 까닭이다. "언제 나에게 변화가 일어날 것이니이까. 이제 주께서 나의 걸음을 세시고 나의 죄를 살피시며 죄수에 대한 증거로 제출하기위하여 고소장을 잘보관하는 것같이 내 허물을 주머니에 봉하시는 것처럼 보이나이다(참조. 신 32:34).
1) 욥이 자기가 자기의 죄와 불법으로인하여 고난을 당하며, 자기에게 임한 모든 것은 자기가 마땅히 받을만한 것임을 인정한 점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하여 바른태도를 취하였다.
2) 하나님께서 그가 잘못 행한 것에 대하여 극단적인 태도를 취하셨으며 모든것을 가장 참담하게 만드셨다고 주장한 점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잘못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런 의취로 말했다(13:27). 그러나 우리가 받는 형벌은 우리의 죄에 비해 오히려 가벼운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진노의 날에 대비하여 회개치않는 자들의 불법을 봉하고 간직하시지만 그의 백성의 죄악은 구름처럼 지워버리신다.
(2) 욥은 인간의 일반적인 쇠퇴의 상태를 원망한다. 우리는 죽어가고 있는 세상에서 살고있다.
1) 우리는 땅자체의 쇠퇴를 보고있다.
① 땅의 가장 강한부분도 쇠퇴한다(18절). 어떤것도 영구적으로 지속되지 않는다. 심지어 우리는 산까지라도 무너져내려 없어지는 것을 본다. 산들이 마치 나뭇잎처럼 말라서 떨어진다. 바위들은 바닷물의 계속적인 부딪힘에 의하여 닳아 없어진다. 끊임없는 물방울로써 '물은 돌을 닳게한다.' 이 땅위에 있는 모든것은 닳아지기때문에 점점더 악화된다.
② 땅의 자연적인 산물도 쇠퇴한다. 땅에서 자라나온 것들, 그리고 땅에 굳게 뿌리를 내리고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들이 어떤때에는 과다한 비로인하여 쓸려내려가 버리고 만다(19절).
2) 땅위의 인간의 소멸을 보더라도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는 인간도 땅에서 나왔고 흙으로 지어진 까닭이다. 욥은 자기의 처지가 그렇게 독특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여 자기도 일반적인 운명과 화해하여야겠다고 생각한다. 인생의 즐거움에서 많은 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주께서는 사람의 소망을 끊으시나이다. 즉 "사람이 짜놓았던 모든 계획들과 스스로 기쁘게여겼던 모든 기대들을 끊으시나이다." 죽음은 세상적인 확신위에 세워지고 세상적인 안락에만 한정된 모든 소망의 파멸이 될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과 천국에 대한 소망에 있어서는 죽음이 그 파괴가 아니라 절정이 될것이다. 이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면 우리의 자녀와 가족에 대한 염려는 누그러지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죽었을때에 우리에게 무엇이 닥치리라는 것을 알고계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녀와 가족을 하나님께 의탁하고 그들을 맡길수 있어야하며 그들에 관한 불필요하고 무익한 보호의 짐을 우리가 스스로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며 선한 양심을 지킴으로써, 죽어가는 순간의 고통과 슬픔에 대비하여 우리를 돕고 위로할 평안을 쌓아두는 것이 참된 지혜이다.
# 핵심
14:1-22
욥의 계속되는 기도를 기록하고 있다. 욥은 인생의 무상함에 호소하여 고통에서 해방되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소망은 끊어지고 깊은 슬픔만 느끼게 되었다.
구약시대의 음부와 부활개념(14:13,14)
구약의 성도들은 죽은 자의 영혼이 음부에 거한다고 믿었다. 그곳은 멸절의 장소가 아니라 존재가 지속되는 곳이었다. 따라서 구약 성도들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음부에서 구해내실 것이라는 소망을 피력하기도 했다. 본문에서 욥은 다시 살아나는 일에 대해 부정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지만 19:25-27절에서는 부활소망을 피력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부활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표명한 경우를 구약성경에서 찾아보기란 힘들지만 사 25:8절이나 단 12:2절과 같은 구절들에서는 부활소망이 분명하게 제시되고 있다.
# 묵상
여인에게서 난 사람 ( 14:1 )
여인에게서 난 사람이라는 말에는 욥의 허무주의 인생관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욥은 인간의 연약함때문에 허망함을 보편적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자의 후손’으로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어두움과 억압의 세력들을 물리치사 자신을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승리를 보장하셨습니다(창3:15).
꽃에 비유된 인생 ( 14:1, 2 )
이는 인생의 덧없음과 유한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욥은 여기에서 인생의 장래 보장이나 내세의 소망도 확신하지 못하고 자포자기적인 비관주의에 빠진 모습을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