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욥기 15장 - study

산호석 2020. 11. 26. 14:59

# Study

Ⅰ. 엘리바스의 두번째 연설〔1〕 15:1-6
엘리바스는 여기서 욥과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다. 이는 욥이 엘리바스와 그의 동료들이 말했던 것을 반박하였기 때문이다. 욥이 단지 자신을 사곡한 자가 아니라고 말한 것을 가지고 엘리바스는 몇가지 큰죄목을 들어서 욥을 비난한다.
(1) 엘리바스는 욥의 어리석음과 불합리함을 비난한다(2,3절). 즉 과거에는 욥이 현자라는 명성을 얻고 있었지만 지금은 자기의 명성을 완전히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화가난 논쟁자가 이렇게 상대방의 이론전개에 대해 주제넘고 가소로운 것으로 여기는 것은 흔히있는 일이다. 세상에는 이른바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잘못 불리우고 있는 헛된 지식이 많이 있다. 이것은 인간을 우쭐하게 만드는 지식이며 이 지식을 가지고 사람들은 자신의 성취를 보고 좋아하면서 자만에 빠진다. 헛된 지식이나 무익한 말은 책망받아야 하며 저지되어야 한다. 특히 이것은 지혜로운 사람에게 있어서 더욱 그러한데, 이는 헛된 지식이나 무익한 말은 지혜로운 자에게 가장 해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2) 엘리바스는 욥이 경건치 못하며 믿음이 없다고 비난한다(4절). 네가 하나님 경외하는 일을 폐하여(네가 마땅히 갖추어야 하는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과 경외심을 폐하여) 하나님앞에 묵도하기를 그치게 하는구나. 여기서 믿음의 요약이 무엇인지를 주목하라. 그것은 곧 하나님을 경외함과 하나님께 기도함인데, 전자는 가장 필요한 원칙이고 후자는 가장 필요한 실행이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경외심도 없고 하나님의 은혜도 없다. 기도를 간과하거나 생략하고 빠뜨리는 이들은 양자의 영을 소멸하며, 의무의 이행속에서 그들이 취할 자유를 스스로 부인하면서 기도를 억제하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당연히 악한 일이다. 그런데 다니엘 6:7절의 다리우스처럼 다른 사람이 기도를 못하도록 금하고 억압하며 기도를 좌절시키는 것은 더욱 악한 일이다. 엘리바스는 바로 이 죄악을 들어서 욥을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마치 하나님과 동등한 자인 것처럼 욥이 하나님께 대해서 방자하게 이야기했으며, 하나님께 대한 모든 믿음을 완전히 저버렸다고 생각했다. 이 비난은 완전히 그릇된 것이긴 했지만, 거기에도 어떤 구실이 전혀없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며 언제나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주의해야 할뿐만 아니라, 우리의 신앙의 진실성과 끈기에 의문을 제기할 기회를 찾는 자들에게 혹시 어떤 구실을 제공해줄지도 모르는 경솔한 말이라도 입밖에 내지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만일 이처럼 심한 고통을 당하는데도 그가 선한 자일수 있다는 욥의 말이 사실이라면(엘리바스의 생각에), 모든 믿음과 기도와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은 끝장이 나고 말것이다. 네 죄악이 네 입을 가르치나니. 즉 이는 다음과 같은 말이다. "너는 다른 사람들도 네 자신처럼 하나님과 믿음에 대해 가혹한 생각을 하도록 가르치는구나." 네가 간사한 자의 혀를 택하였구나. 즉 "상인들이 나쁜 물건을 좋은 물건에 섞어서 함께 파는 것처럼 네가 좋은 말과 나쁜 말을 섞어서 경건을 보이도록 가장하면서 네 죄악을 말하는구나." 엘리바스는 처음의 연설에서는 단순한 추측위에서 욥을 비난하더니, 이제는 욥 자신의 연설속에서 욥을 칠 증거를 찾고있다(6절). 너를 정죄한 것은 내가 아니요 네 입이라. 그러나 엘리바스는 자기들이 지금 이용하고 있는 바로 그 증거를 욥으로하여금 발설하게 한 자들이 바로 자기와 자기 동료들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했어야 했다. 따라서 이것은 공평한 처사가 아니었다.
(3) 엘리바스는 욥의 참을수 없는 오만과 자만을 들어서 욥을 책망하고 있다. 욥의 요구는 공정하고 합당하며 온당한 요구였다(12:3). '나도 너희같이 총명이 있어'라고 하였다. 그렇더라도 그들이 어떻게 욥을 칠 구실을 찾았는가를 주의해 보라. 그 구실은 바로 욥이 자신을 다른 모든 사람보다도 더욱 지혜로운 것처럼 꾸몄다는 것이다. 네가 제일 처음 난 사람이냐 산들이 있기전에 네가 출생하였느냐. 즉 "마치 네가 그 지혜 자체와 같이 제일 먼저 출생하였느냐(잠 8:23 이하). 네가 우리들중 모든 사람들보다도 이세상을 더많이 알고있느냐? 아니다, 너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어제부터 있던 자에 불과하도다"(8:9). 또한 하나님과 친숙한 문제를 가지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의 모의를 네가 들었느냐(8절). 엘리바스는 또한 욥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1) 다른 어떤 사람도 갖지못한 지식을 자기는 가진체하는 자로 묘사한다. "자기이외의 다른 사람은 아무도 현명하지 않은양 지혜를 혼자 가졌느냐." 그러나 욥은 단지 '너희 아는 것을 나도 아노니'라고 말했을 따름이다(13:2).
2) 모든 논쟁하는 무리들이 서로 자기네들의 은신처로 삼으려하는 옛사람들 곧 존경할만한 사람들의 흐름을 거역하는 자로 묘사한다. 우리중에는 머리가 세기도 하고 연로하기도 하여 네 부친보다 나이 많은 자가 있느니라(10절). 즉 "조상들이 우리편에 속해 있느니라."
(4) 엘리바스는 욥이 친구들의 권고와 위로를 비웃었다고해서 그를 책망하고 있다(11절). 하나님의 위로...을 네가 어찌 작다 하느냐. 엘리바스는 자기와 자기 동료들이 욥에게 준 위로를 욥이 자기의 생각보다 못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다. 엘리바스는 욥이 실상은 중요한 하나님의 일반적인 위로를 욥이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처럼 묘사한다. 그러나 만약 욥이 하나님의 일반적인 위로를 높이 생각지 아니하였다면 그는 그런 고통아래서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5) 엘리바스는 욥이 하나님과 믿음에 대항한다고 비난한다(12,13절). 어찌하여 네가 마음에 끌리며. "어찌하여 이처럼 점잖지 못한 불신앙적인 이야기를 하느냐?" 엘리바스는 욥의 마음이 하나님을 싫어하여 이전의 상태에서 돌아섰으며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처사에 분노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엘리바스에게는 공정함과 자비가 부족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엘리바스는 그토록 경건하기로 명망이 높으면서도 지금 극한 시련가운데 처해있는 사람의 말을 그토록 무자비하게 판단해 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6) 엘리바스는 욥이 심지어 자신을 인간본성의 공통된 부패와 오염에서 제외시키고 있다고 욥을 비난한다(14절). 사람이 무엇이관대 깨끗하겠느냐. 즉 사람이 어찌 깨끗한 체할수 있으며, 어디서 사람이 깨끗한 것을 발견할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여인에게서 난 자가 무엇이관대 의롭겠느냐. 욥은 바로 조금전에 이와 똑같은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14:4) 엘리바스는 이 단순한 진리를 가지고 욥을 설득하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14:4절에서 욥은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것 가운데에서 낼수 있으리이까'라고 말했던 것이다. 욥 자신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욥을 사곡하며 악한 자라고 할수 있는가? 결코 그럴수 없다. 비록 여인에게서 난 인간은 깨끗하지 않지만 성령으로 거듭난 인간은 깨끗한 것이다. 엘리바스는 자기의 주장을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하여 다음의 사실들을 제시한다.
1) 가장 뛰어난 피조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앞에서는 부족하고 불결하다(15절). 하나님은 천군들에 대해서도 만족하지 않으신다. 우리 눈에는 그것들이 아무리 깨끗하게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결점과 흠투성이다. 하늘이라도 그의 보시기에 부정하거든. 해가 볼때에 별이 빛을 발하지 않는것 같다면, 하나님께서 보실때에 해의 빛은 어떠하겠는가.
2) 인간은 훨씬더 그러하다(16절). 하물며...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이겠느냐. 성자들이라도 신뢰할만하지 못하거든, 죄인이야 더이상 말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하나님께서 만드신 그대로의 하늘이라도 깨끗하지 못하거든, 하물며 타락한 인간은 어떠하겠는가.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하고 부패한 존재이며, 설사 그가 회개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마찬가지이다. 그로 말미암아 사람은 자기 자신을 미워하게 된다.

Ⅱ. 엘리바스의 두번째 연설〔2〕 15:17-35
엘리바스는 이제 자기가 욥을 비난한 근거로 삼은 자기 자신의 주장을 이야기하고 있다. 악한 사람들은 반드시 비참하게 되고, 비참하게 된 사람들은 반드시 악하므로 욥도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1. 엘리바스의 엄숙한 서론(17,18)
"들을만한 가치가 있는 이야기를 '내가 네게 보이며' 너처럼 무익한 말로 논란하지는 않을 것이라." 엘리바스는 욥에게 이런 것을 가르쳐주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1) 자신의 경험과 관찰로부터 가르쳐주려고 한다. "여러가지 경우를 들어서 직접 내가 본것을 설명하리라."
(2) 옛선인들의 지혜로부터 가르쳐주려고 한다(18절). 지혜로운 자들이 그 열조에게서 받아 전하여 온 것이라. 현대인들의 지혜와 학식은 그많은 부분이 고대인들의 지혜와 학식에서 연유된 것이다. 선한 자녀들은 그들의 선한 부모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것이다. 또한 우리는 우리가 선조로부터 배운 것을 우리 후손에게 전해주어야 한다.
2. 그의 연설(19-35)
(1) 지혜롭고 선한 사람들은 대개 이세상에서 번영한다. 그는 여기서 지혜롭고 선한 사람들에게만 땅이 주어진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19절). 그들은 온전하고 평화롭게 그것을 향유했다. 욥은 '세상이 악인의 손에 붙이웠고'라고 말했다(9:24). 이에 대해서 엘리바스는 "그렇지도 않도다. 세상은 성도들의 손에 맡겨졌으며, 네가 스바 사람들과 갈대아 사람들에게 당했던 것처럼, 이방인들에 의해서 도적맞거나 약탈당하지 않았도다."
(2) 악한 백성, 그리고 특히 압제하는 통치자들은 계속되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으며, 매우 비참하게 멸망한다. 심지어 하나님의 심판을 무례하게 대적하는 자들까지도 마침내는 그것을 알게될 것이다. 욥은 '악인'이라고 단수형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엘리바스는 여기서 이 '악인'이라는 말로 욥을 표현하고 있으며, 그에 대해 여기에 묘사된 포학과 비겁함의 죄를 들어서 명백하게 비난하고 있다(22:9,10). 엘리바스는 이 묘사속에서 욥이 자신의 얼굴을 보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1) 엘리바스는 이와같이 비참하게 살고있는 죄인을 묘사하고 있다(25-28절). 그것은 하나님께 그저 도전하는 보통 죄인이 아니다(25절). 그러한 자에게 하나님의 율법과 그 규례들을 말해보라. 그러면 그는 속박을 산산히 부숴버릴 것이다. 그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이야기해 보라. 그러면 그는 전능자에게 가장 악하게 해보라고 대들 것이며, 율법이나 양심에 의해서 제재를 받지않으려고 할것이다. 이는 그 손을 들어 하나님을 대적하며. 이 말씀은 "만약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안에서 있어진 일이라면 그는 하나님을 믿지않으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교만하여 전능자를 배반함이니라. 그들이 전능자와 겨루려하는 것은 곧 교만한 죄인들의 형용할수 없는 미친 것이다. 그는 목을 굳게하고...하나님을 치려고 달려가나니. 이것은 마치 자기 상대에게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는 절망적이 된 병사가 그의 앞에서 도망치다가 자기의 칼끝에 엎어지거나 방패의 날카로운 못위에 엎어지는 것과 같다. 그는 자기 자신을 방심과 정욕으로 감싼다(27절). 그 얼굴에는 살이 찌고. 이것은 매일 맛있는 음식으로 육신의 정욕을 만족시키면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는 그 마음을 대담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얼굴에 찐 살은 그를 대담하고 교만하게 보이게 하며 허리에 붙은 살은 그를 편안하게 눕게하며 무감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화살앞에서 보잘것없는 은신처로 드러날 것이다. 그는 주위의 모든 것을 약탈하여 자신을 부요케 한다(28절). 그들은 악한 생각을 품고 마음에 궤휼을 예비하고는 그들이 쓰러뜨리고자 하는 자들을 보호하는 척하며 화평의 동맹을 맺음으로써 전쟁을 더욱 효과적으로 수행해간다.
2) 영적인 심판과 현세적인 심판에 있어서 이 악인의 비참한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그의 내적인 평안은 계속적으로 방해를 받는다. 그 자신의 양심이 그를 고소하며 이 진통때문에 그는 '그 일평생에 고통을 당한다'(20절). 그의 죄가 매순간 그의 얼굴을 노려본다. 그는 자기의 부와 권력이 얼마동안이나 계속될지 불확실하므로 초조해한다. 강포자의 햇수는 작정되었으므로. 그는 심판에 대한 두려운 예감을 가지고 있다. 그 귀에는 놀라운 소리가 들리고(21절).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노하고 계시다는 것과 온세상이 자기를 미워한다는 것을 알고있다. 그는 하나님과 세상 그 어느쪽과도 화평을 이루기위한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흑암한 날이 가까운줄을 스스로 아느니라(23절). 즉 그날이 자기에게 정해졌으며, 그것은 취소될수가 없음을 그는 알고있다. '환란과 고통'이 앞으로 닥칠 더 악한 일에 대해 그를 두렵게할지라도 그리 놀랄것이 없다(24절). 그는 언젠가 닥치게될 고난에서 자신이 벗어나지 못할것에 대해 절망하고 있다(22절). 그는 가난에 대해서도 그런 두려움을 가지고 있으며, 자기 재산의 낭비를 매우 예민하게 느끼므로 그는 이미 자기만의 상상속에서 '유리하며 식물을 구하여 이르기를 어디있느냐' 한다. 어떤 사람들은 26절을 "하나님께서 그를 대적하시니 그가 어떻게 번영할수 있겠는가?"라고 이해한다. 하나님께서 그를 치시면 그는 반드시 넘어질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기와 불법으로 많은 것을 얻은듯하나 부유해지지는 못한다. 그것은 들어올때와 마찬가지로 나가버린다. 그것은 한가지 죄로 말미암아 얻어질 것이며, 또한 다른죄로 인하여 소비되어 버린다. 그는 자기가 얻은 것을 잘 남겨두었다가 자기 자녀에게 물려주고자 한다. 그러나 그 집의 가문은 멸망하고 말것이다. 그 가지가 푸르지 못하리니(32절). 불꽃이 그 가지를 말릴 것이라(30절). 많은 사람의 가족이 바로 그 한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멸망한다. 그는 자기가 어려움에 처했을때에 거기서 벗어날 궁리만 한다(그리고 그 어려움에서 어떤 좋은교훈을 얻어야할지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그일에 있어서도 역시 그는 방해를 받는다. 흑암한데를 떠나지 못하리니(30절). 그는 자기 동료들을 안전하게 하려고 애쓰지만 그것도 역시 이루어지지 않는다(34,35절). 그들의 무리, 모든 공모자, 그들과 그들의 장막은 '결실이 없고 불탈 것이다.'
3) 오만한 죄인들의 번영은 이렇게 비참한 종말을 맞이할 것인가. 그는 스스로 속아 허망한 것을 믿지 말것은(31절). 재물을 얻기위해 악한 방식을 의지하는 자들은 '허망한 것'을 믿는 것이므로 '허망한 것'이 그들의 보응이 될것이다. 특히 그들이 얻은 재물, 곧 부정직하게 얻은 재물을 의지하는 자들은 헛된 것을 믿는 것이다. 이는 그것이 그들에게 만족을 가져다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극한 혼란과 함께 마침내 인정하게 되는 것은 속이는 심령이 자기들을 망쳤으며 자기 오른손의 거짓으로 스스로 속였다는 사실일 것이다.

# 핵심
15:1-35
엘리바스의 두번째 충고가 기록되어 있다. 첫번째 충고때보다 더욱 심하게 욥을 정죄했다. 욥에 대한 일말의 동정심마저도 버리고, 오로지 자신의 변론이 옳다는점을 입증하려는 그의 태도는 신약시대의 바리새인들처럼 폐쇄적인 교리주의자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 묵상
욥을 정죄하는 엘리바스 ( 15:1-35 )
엘리바스는 욥을 불경건하고(1-6절), 교만하며 불손하다고(7-16절) 정죄했습니다. 이렇게 엘리바스는 옛사람의 전통적인 도덕률에 근거하여 욥의 모든 고난을 죄의 결과로 보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엘리바스의 태도는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바리새인의 율법주의적 태도를 연상시킵니다. 우리는 고난에 처한 자에게 필요한 것이 계속적인 차가운 정죄가 아니라 사랑의 위로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위로 ( 15:11 )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어머니의 마음으로 또한 아버지의 연민과 남편의 사랑으로 위로하십니다. 그리고 이 위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알게되고 성령을 통하여 모든 사람에게 풍성히 주어지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위로는 이 위로자체를 이해하고 이 위로가 값없이 거저주어지는 것인줄 믿고 또 구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라 할수 있습니다.
악인의 삶 ( 15:17-25 )
본문은 욥과 그의 친구 엘리바스의 변론가운데 엘리바스의 두번째 변론으로 악인의 불행한 삶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악인은 우선 타인에게 강포하며 그들을 억압하고, 침해하고, 박해하고 피해를 줍니다. 또한 모든 악인은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께 항거한다는 것은 가소로운 일이며 교만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악인은 그 분별력이 없기때문에 죄인의 길을 걸어가고 심판을 받게되는 것입니다.
전통주의자들이 빠질수 있는 폐단 ( 15:18 )
전통주의자들은 완고한 폐쇄성으로 말미암아 전통을 지키기위하여 적절한 개혁을 절대 반대합니다. 또한 형식주의로 말미암아 본래적이고도 실질적인 의를 망각하고 실속이 없는 외형이나 변질된 외식만 내세우게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원리의 근거 ( 15:31 )
하나님의 심판은 개인의 행위에 근거를 둡니다. 뿐만아니라 선을 행한 자와 악을 행한 자에 대한 심판의 내용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 원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자신의 죄를 회피하거나 그 책임을 남에게 전가할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죄를 철저히 회개하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여 주님으로부터 칭찬받는 자가 되어야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