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32장 - study
# Study
Ⅰ. 엘리후의 출현 32:1-5
노인들이 논쟁하고 있을때 한젊은이가 그들이 부당하게 노를 발하고있다고 비난하며 중재자로 나섰다.
(1) 욥의 세친구가 잠잠해진 이유 : 욥이 스스로 의롭게 여기므로 그 세사람의 대답이 그치매. 그렇게 고집이 센 사람과 논쟁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기 때문이다(1절). 그러나 그들은 욥에 대해서 바르게 판단치 못하였다. 욥은 스스로에게만 의로운 자가 아니라 진정 하나님앞에서 의로운 자였기 때문이다.
(2) 네번째 사람 엘리후가 나선 이유 : 그의 이름 엘리후는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라'는 의미이다. 그는 나홀의 둘째아들 부스의 후손으로서 부스 사람이라 일컬어진다(창 22:21). 또 그는 람 족속 즉 그 후손이 시리아인 또는 아람인인 아람 족속이었다(창 22:21). 갈대아 역본에 따르면 '아브람 족속'으로 되어있는데 이는 아마 다음과 같이 변천해 온듯싶다. 그는 처음에 "높다"라는 뜻의 람이었다. 그후에 "높은 아버지"라는 아브람이 되었다가 마지막에 "만민의 높은 아버지"라는 아브라함이 되었다.
1) 엘리후는 화가나서 입을 열었다. 또 자신이 화를낼 타당한 원인이 있다고 생각했기에 입을 열었다. 그는 욥이 마땅히 갖추어야할 경건을 하나님께 갖추지 않는다고 즉 스스로를 너무 의롭게 여긴다고 생각했기때문에 욥에게 노를 발하였다(2절).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함이요. 즉 욥이 하나님이 그를 괴롭힌다는 누명을 벗기보다 그가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 불의하다는 것을 밝히려고 더애썼다는 것이다. 엘리후는 욥이 선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였다. 그는 욥의 친구들이 마땅히 갖추어야할 자비를 욥에게 갖추지 않았다고 생각했기에 친구들에게도 노를 발하였다(3절). 또 세친구에게 노를 발함은 그들이 능히 대답지는 못하여도 욥을 정죄함이라. 이처럼 긴논쟁도 없다. 그 이유는 양측에 아무런 잘못도 없기때문이다. 중재자로서의 엘리후는 누구의 편도 들지않았다.
2) 엘리후는 욥의 말을 기다렸고 그의 말이 끝날때까지 참을성있게 경청하였다.
Ⅱ. 엘리후의 인품 32:6-14
엘리후는 다음과 같은 사람으로 나타나 있다.
(1) 엘리후는 매우 겸손하고 겸허한 사람이었다. 나는 연소하고 당신들은 연로하므로 참고 나의 의견을 감히 진술치 못하였노라. "이는 실수치 않기위해서와 무례히 행치않기 위해서였노라."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데는 빠르고, 자신의 말을 하는데는 느려야 한다. 이는 특히 학식이나 신앙에 있어 우리가 마땅히 섬겨야할 자들의 판단과 우리의 판단이 서로 대치될때는 더욱 그러하다. 내가 말하기를 나이가 많은 자가 말을 낼 것이요(7절). 나이와 경험을 통해 사람은 사물을 판단하는데에 많은 도움을 얻는다. 이것들을 통해 사람들은 사고의 보다많은 소재를 얻기도 하고 사고기능을 성숙시키고 발전시키기도 한다. 나이많은 제자와 함께 유함은 좋다('한 오랜제자...를 데리고 가니 이는 우리가 그의 집에 유하려 함이라', 행 21:16;딛 2:4). 엘리후의 겸손은 그가 연장자들의 말에 기울였던 주의에 나타난다(11,12절). 그는 성실히 또 조심성있게 그들에게 주의를 기울였다. 그들은 때때로 머뭇거리고 주저했으나 그는 '그 변론에 귀를 기울였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것에도 귀기울일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않으면 우리는 많은 진리를 깨달을수 없다. 들어야만 말할수 있고 배워야만 가르칠수 있다.
(2) 엘리후는 사려깊고 용기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잠잠할때와 그 방법뿐 아니라, 말하여야 할때와 그 방법도 잘아는 사람이었다. 친구들을 생각했기에 친구들의 말을 중간에 방해하지 않았지만(그의 더좋은 친구인) 진리와 정의를 생각했기에 잠잠함으로 진리와 정의를 배반할수도 없었다.
1) 인간은 이성적인 피조물이다. 따라서 혼자서 판단하여야 한다. 또 인간은 표현의 자유도 갖고있다. 엘리후가 '사람의 속에는 심령이 있고'(8절)라고 말한 것은 욥이 '나도 너희같이 총명이 있어'(12:3)라고 말하였던 것과 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 단지 그는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만큼 지각이 있고 어느누구도 이성을 혼자서만 가지고 있는체할수 없다는 사실을 좀더 완곡하게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내 말을 들으라. 심령은 영이다. 그 자체가 물질도 아니며 물질에 의존하는 것도 아닌 영이다. 그것은 깨닫는 영이다. 이는 진리를 발견하고 수용할수 있으며, 진리에 관해 논의하고 논증할수 있는 영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는 진리를 통제하고 지배할수 있다. 이 깨닫는 영은 모든 사람안에 있다. 그것은 바로 '각사람에게 비취는 빛'이다(요 1:9). 우리에게 이 깨닫는 영을 주시는 것은 바로 '전능자의 기운'이다.
2) 다른 사람보다 위엄있고 위풍당당한 사람이라해서, 언제나 다른 사람보다 지식이나 지혜에 있어서도 뛰어난 것은 아니다(9절). 대인이라고 지혜로운 것이 아니요. 그들이 지혜롭지 못하다는 것은 참으로 유감천만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위대함은 조금도 손상시키기를 원치않고, 지혜로움은 더욱더 더하기를 원하는 이들이었다. 노인이라고 공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 노인도 실수할수 있다. 따라서 그들은 젊은이가 반박하는 것을 무례하다고 여겨서는 안된다. 이를 오히려 교훈의 호의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내 말을 들으라(10절). 눈이 밝은 사람은 높은 산꼭대기에서 눈이 어두운 사람이 볼수 있는 것보다 훨씬더 넓게 볼수 있다.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소년은 늙고 둔하여 간함을 받을줄 모르는 왕보다 나으니라'(전 4:13).
3) 이 논쟁이 해결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말하여져야 했다. 당신들이 혹시라도 말하기를 우리가 지혜를 깨달았었구나...하지 말지니라. "당신들은 욥에 대한 당신들의 논거가 결정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또 당신들의 주장이외의 논거에 의해서는 욥이 설득될수도, 겸허해질수도 없다고 생각하지도 말라." 그를 이길 자는 하나님이시오 사람이 아니라 하지 말지니라. "그의 유별난 고난이 그가 하나님의 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고해서 그를 사악한 자로 여기지 말지니라. 내가 확실히 당신들에게 말하노니 이것은 잘못된 가정이라. 욥은 그렇지않고도 설득될수 있느니라."
4) 엘리후는 새로운 것을 제시하였다. 그는 자신의 결백에 대한 욥의 항변에 답하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항변의 옳음을 인정하였다. 따라서 그는 욥의 적으로 끼어든 것이 아니었다. 그가 내게 말을 내지 아니하였으니(14절). 그는 친구들의 주장을 되풀이하려 하지않았고, 그 원리를 견지하려 하지도 않았다. 나도 당신들의 말처럼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리라. "같은 말을 되풀이하지 않으리라. 왜냐하면 내가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보다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것이 무례를 범치않는 것이기 때문이라. 또 같은방식으로도 말하지 않으리라. 나는 욥을 성급히 다루는 죄를 범치않으리라. 그것은 내가 싫어하는 바이라."
Ⅲ. 엘리후의 개입이유 32:15-22
여기에 박식한 논객들에 의해 이미 세밀히 논증된 이 논쟁에 엘리후가 개입하는 이유 세가지가 있다.
1) 엘리후는 분명히 어느편 누구의 말도 갑자기 뛰어들어 막지않았다. 그들이 놀라서(15절). 가만히 서서 다시 대답지 아니한즉(16절). 판단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는 하나님에 의해서만 판결날수 있다. "하지만 당신들도 자신의 의향을 밝혔으니, 나도 내 의향을 보이리라. 그리하여 남들로하여금 판단하게 하리라."
2) 엘리후는 이 문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표명하기를 꺼려했으며 심지어는 고통스러워했다. "지금까지 말하여진 모든것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에 대한 나의 견해를 생각하느라 '내게 말이 가득하구나'. 내 심령이 무엇을 말할지를 교훈할뿐만 아니라 내가 말할 것을 강요하기도 하도다." 내 입을 봉한다면 '새포도주 가죽부대가 터지게됨 같으리라'(19절). 내가 말을 발하여야 시원할 것이라. "그래야만 나는 나의 생각을 질식시키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날수 있을 것이고, 또 나의 위치와 능력에 따라 선을 행하였다는 수고의 즐거움을 누리리라."
3) 엘리후는 아첨하고자 하였던 것이 아니라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진실되게 말하고자 하였을뿐이다(21,22절). "편파적인 재판장은 스스로 부해지기위해 불의를 행하나, '나는 결코 사람의 낯을 보지 아니하며 아첨하지' 아니하리라." 우리를 만드신 이는 모든 위선과 아첨을 싫어하시고 거짓말하는 혀로 잠잠케하고 '모든 입술'을 끊으신다(시 12:3).
# 핵심
32:1-22
욥기서의 전환부(32:1-37:24)가 시작되는 내용이다. 욥과 세친구의 대화를 듣고있던 엘리후라는 제3의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욥의 항변에 대해 적절한 대답을 주지못한채 욥을 정죄하기에만 급급했던 친구들을 나무람과 동시에 욥이 악한 삶을 살았다고 정죄할수는 없지만 자신의 의를 지나치게 주장한다고 보고 중재자로 나섰다.
엘리후의 한계성(32-37장)
엘리후의 중재도 두가지 점에서 한계성을 내포하고 있다. 첫째, 고난이 어떤식으로든 특정죄에 대한 결과와 관련되어 있다는 전통적인 생각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다(34:11). 둘째, 그의 말은 다분히 이론적이며 욥의 고통스런 상황에 대한 이해와 배려심이 부족했다. 하지만 그의 중재의 말은 고난의 의미를 연단이라는 각도에서 바라보게 했다는 점에서 대화에 새로운 진전을 가져다주었다.
# 묵상
엘리후의 변론의 한계 ( 32:1-5 )
그는 욥의 고난에 대한 정당한 이해없이, 무죄를 주장하는 욥을 신랄하게 정죄하였습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주신 고난에 대해 불평은 했지만 신앙을 배반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후는 욥을 하나님을 거스리는 사람으로 대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후는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있는 고난을 이해는 했지만, 욥의 고난문제를 풀어줄수는 없었습니다. 이와같이 우리의 신앙도 한계가 있음을 깨닫고, 지혜의 근본이신 하나님께 우리 자신과 모든 문제를 전적으로 맡겨야합니다.
엘리후의 변론이유 ( 32:11-22 )
엘리후는 욥과 그의 세친구들이 변론하는동안 침묵을 지켰습니다. 그것은 그가 다른이들에 비해 나이가 어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나이가 많은 이들이 이 문제를 잘 풀어나가기를 기대했지만, 기대한 것처럼 되지않자 침묵을 깨고 나섰습니다. 욥의 세친구들은 변론을 통해서 욥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깨달은 것을 말하고자 나섰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연소한 사람일지라도 나이가 많은 이들보다 더 지혜로울수 있기 때문입니다. 욥의 세친구들은 인간의 지혜로 욥을 꺾고자 했기때문에 욥의 지혜를 당할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욥이 무조건 옳았던 것은 아닙니다. 엘리후는 하나님이 그에게 깨닫게하신 지혜를 가지고 욥과 변론하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엘리후의 태도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진리를 밝히기위해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를 잘보여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