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42장 - study
# Study
Ⅰ. 욥의 대답 42:1-6
자신을 변호하는 욥의 말은 이미 끝이나고(31:40) 스스로를 심판하고 자탄하는 말이 시작되었었다(40:4,5절). 여기서 욥은 바로 이러한 말을 계속하고 있다. 그의 인내는 완전한 것이 아니었지만 그의 회개는 완전한 것이었다. 여기서 욥은 자신의 어리석음과 분별없는 언동에 대하여 완전히 겸손해졌다. 따라서 그는 이를 용서받았다. 하나님이 그에게 피조물에 대한 자신의 위대함과 능력에 관하여 모든것을 말씀하셨을때, 욥은 순종함으로 '여호와께 대답하였던' 것이다(1절).
(1) 욥은 하나님의 무한한 권능과 지혜 그리고 그 절대주권의 진리에 동의한다. 이는 하나님이 광풍으로 말씀하신 것의 의도이다(2절).
1) 그는 하나님이 모든것을 하실수 있음을 인정한다. 하마와 악어를 지으셨고 그것들을 마음대로 부리시는 이에게 벅찬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는 이것을 이전에도 알았었기때문에 자주 입에 올렸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이것을 보다 실제적으로 깨달았다.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따라서 주께서는 내가 어리석게도 종종 불가능하다고 절망하곤하던 이 낮은 처지로부터 나를 건져올리실수 있으시나이다."
2) 무슨 경영이든지 못이루실 것이 없는줄 아오니. 하나님과 함께하면 우리 마음속에 불안, 불만, 불신 이러한 것들이 있을수 없다.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면 안되는 일이 없다. 욥은 이말을 불만에 차서 격정적으로 하였었다(23:13). '그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그러나 지금 그는 이를 기쁨과 만족속에서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이치는 일정하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상밖의 것을 주시더라도 우리에 관한 그의 생각이 선할 것일진대 그는 자신의 은혜로운 경영은 반드시 이루실 것이다.
(2) 욥은 하나님이 말씀을 시작하시며 그를 책망하셨던 바로 그 죄를 자신이 범하였다고 자백하고 있다(3절). "주여, 주께서 하신 첫말씀은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냐'이온대 그 말씀이 나를 깨우쳤나이다. 이제 내가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이었음을 자백하나이다. 그 말씀이 내 양심에 닿아 내 죄를 드러내나이다. 나는 무지하게도 나를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이치와 계획을 간과하였나이다. 따라서 하나님과 대적하며 나 자신의 옳음을 주장하였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깨달을수 없는 일을 말하였나이다. 즉 나는 하나님의 섭리를 전혀 알지못하면서도 그 섭리하심을 마음대로 판단하였나이다." 욥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무지함을 자인하고 있다. 이는 우리 모두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는지는 안다. 그러나 그것을 왜 하시는지 어떻게 하시는지는 모른다.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에 대적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욥은 자신이 깨닫지못한 것을 말하고, 판단할수 없는 것을 판단함으로인해 주제넘는 짓을 하였다고 자백하고 있다. "듣기전에 답한 것은 어리석고 수치스러운 일이나이다."
(3) 욥은 대답하려 하지않았다. 그는 9:15절에서 말하였던 것처럼 '심판하실 그에게 간구하였을' 뿐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여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하옵소서(4절). "원고나 피고로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13:22) 겸손한 탄원자로서 말하겠나이다."
(4) 욥은 참회자의 태도를 취하고 있다. 진정한 회개는 스스로 죄인임을 확신하는 것일뿐만 아니라 그 죄를 참회하고 경건한 슬픔에 잠기는 것, 즉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는' 것이다(고후 7:9).
1)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나는 주의 위대함과 권능 그리고 절대주권에 대해 들어서 아는 정도였나이다. 그러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주님은 영광스런 위엄으로 내게 나타나셨나이다. 그래서 이제 회개하고 내가 어리석게 말하였던 것을 취소하나이다." 좋은 교훈을 듣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자들의 설교를 통해 하나님에 대해 깨닫는 것은 대단히 은혜스러운 일이다. 우리의 지각이 은총의 성령에 의해 깨우쳐질때, 우리가 하나님의 것에 대해 알수 있는 것은 이전에 우리가 알던 것보다 훨씬 큰것이다. 이는 눈으로 직접보는 것이 소문을 통해 듣거나, 남의 글을 읽는 것보다 훨씬 확실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하여 교훈하사 우리에게 그의 아들을 알게하시지만 성령의 교훈을 통하여 우리안에 있는 그의 아들을 우리에게 밝히신다(갈 1:16). 이로써 우리를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게' 하신다(고후 3:18). 하나님은 때때로 자신의 백성들에게 말씀과 섭리를 통해 자신을 확실하게 드러내신다.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5:17).
2) 욥은 자신을 심하게 책한다(6절).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회개해야할 큰죄를 범치않은 선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교만, 정욕, 불평, 불만, 그리고 성급하고 불손한 언동으로인해 심한 영혼의 고통을 겪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을 대하면 대할수록 죄의 간악함과 가증함에 대해, 또 죄투성이인 우리 자신에 대해 더많이 깨닫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더욱더 겸손해지고 더욱더 자신을 한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세상을 통치하시도록 또한 그의 은총의 권능안에 우리 자신과 우리 마음이 통치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Ⅱ. 여호와의 지시 42:7-9
하나님이 광풍중에 욥을 교훈하셨으므로 오직 욥만이 악하고 하나님께 거스리는 자였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욥의 덕을 칭찬하는 문장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성급히 판단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앞에서 참으로 의로운 자라 할지라도 그들의 의가 크고 특별한 편견, 사람들의 비난, 양심의 자책 등에 의해 가리워지는 수가 많다. 그러나 때가오면 그 가리웠던 것은 밝혀지고 만다. 그때 하나님은 '그의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그의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실' 것이다(시 37:6).
(1) 욥과 세친구간의 논쟁에 관해 세친구들에게 심판이 주어진다. 엘리후는 여기에서 책망받지 않는다. 이는 그가 중재자로 행하였을뿐 그들 무리의 일원으로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욥은 칭송되고 그의 세친구는 굴욕을 당하게 된다. 우리가 생각하는 진리중 어떤것은 양편에 다있었다. 그러나 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따라야 한다.
1) 욥은 크게 칭찬받았고 명예를 회복하였다. 하나님이 그에게 임하셨을때 그는 자신이 잘못 말한것에 대해 회개하였다. 그제서야 그는 하나님앞에 옳게 말한 것이다. 참으로 회개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될 것이고 그들이 말하였던 것, 또 잘못 말하였던 것은 더이상 언급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욥을 거듭거듭 '내 종 욥'이라고 부르신다. 두절(7,8절)에서 네번을 부르셨다. 하나님은 그렇게 욥을 부르기를 기뻐하셨던 듯싶다. 욥이 고통을 받기이전에도 그렇게 부르셨었다(1:8).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는 비록 가난하고 멸시를 당하였으나 내 종이라. 그가 부유했을때처럼 나를 기쁘게 하였도다. 그는 흠있는 인간이었고 또한 다른사람처럼 정욕의 지배하에 있는 사람이었도다. 그는 나를 대적하였고 나의 심판을 거역하였으며, 무지한 말로 나의 이치를 가렸으나 그는 자신의 잘못을 깨달아 알았고 이를 돌이켰으니 그는 여전히 내 종 욥이니라." 하나님이 '착하고 신실된 종'아 하고 말씀하시기만 하면 다른사람이 뭐라고 말하든 그것은 중요치 않다. 하나님은 욥의 말이 정당하다고 말씀하신다. 이는 그의 적들이 말하였던 모든것을 뒤엎는 것이었다. 욥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그의 친구들이 하였던 것보다 훨씬 옳으며 타당한 설명을 하였다. 욥의 친구들은 재물의 부요를 참성도의 증거라 하고 고난을 하나님의 진노의 징표라함으로 하나님을 잘못 판단하였다. 욥은 장래의 심판, 장래의 상황에 대해 말함으로써 그의 친구들보다 정당하게 하나님에 대해 말하였다. 물론 그도 때로는 잘못 말하였다. 심지어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잘못 말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당하게 말하였다고 칭찬받은 것이다. 욥은 옳았고 그의 친구들은 옳지 못했다. 그럼에도 욥은 고난을 당하였고 친구들은 평안을 누렸다. 이는 우리가 사람을 외모나 돈으로 판단할수 없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사람의 마음을 꿰뚫을수 있는 오직 그분만이 실수없이 사람을 판단할수 있다. 그의 친구들이 그에게 부당히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욥은 이에 유념치 않을만큼 선한 사람이었으며, 겸손하고 온화하며 관용심깊은 심령을 가진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는 기꺼이 기도할 차비가 되어있었다.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진정으로 회개하는 사람은 스스로 은혜를 간구하는 자일뿐만 아니라, 다른사람의 중재자로써의 역할까지 담당하는 자이다. 욥이 자신의 심령을 상하게 하고 슬프게 하였던 이들을 위해 희생을 드리고 기도를 올렸던 것은 그리스도가 자신을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간구하고 돌아가셨던 것과 같다. 그는 '죄인들의 중보자'로 돌아가셨다.
2) 욥의 친구들은 크게 책망받았을뿐만 아니라 창피까지 당하였다. 그러나 그들도 선한 사람들이었고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욥에게 하셨던 것처럼 그들도 죄가운데 버려두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광풍중에 말씀하심을 통해 그들을 겸손케 만드셨다. 하나님은 다른방법으로 그들을 겸손케 하셨던 것이다. 대부분의 논쟁과 쟁론에는 양측 모두의 잘못이 들어있다. 설사 양측은 아니라하더라도, 한쪽편은 반드시 논쟁의 원인이나 과정중에 잘못을 범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양측이 다 잘못을 시인하고 서로의 부족을 깨닫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극히 평이하게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8절). 즉 그들은 잘못된 가정에 따라 욥을 비난하고 책망하였다. 하나님은 욥을 오로지 친구로서 시험하셨을 뿐이나 그들은 하나님이 적으로서 욥과 싸우고 있다고 말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이 욥을, 아버지가 자녀를 꾸중하는 것과 같이 다루셨던 것을 심판의 징벌로 표현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해 정당하게 말하지 못하였다. 다른사람의 심령을 무자비하게 심판하는 것은 위험스런 일이다. 이는 하나님이 인정하는 자를 정죄하는 우를 범할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너와 네 두친구에게 노하나니(7절). 하나님은 그들에게 희생제물을 요구하셨다. 이는 그들의 죄를 속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기위해 각기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취하여야 했다. 하나님은 그것들을 욥에게로 가져갈 것을 명하셨다. 또 욥에게 희생을 대신 드려주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줄 것을 간청하라고 명하셨다. 그렇지않으면 용서받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자신들만이 하늘의 축복을 받은 자들이고 욥은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하였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보다 욥이 더 축복받은 자이라는 것을 그들에게 깨우쳐주셨다. 욥과 친구들은 많은 문제에 있어 견해를 달리했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다시 친구가 되어야 했다. 그들은 같이 희생을 드리고 기도함으로써 반드시 화해하여야 했다. 사소한 일에 있어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들도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 즉 하나님의 대속제물앞에서 하나이다. 그들은 같은 은혜의 면류관을 쓸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서로 참아야 한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싸움은 언제나 우리편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그것의 화해는 언제나 하나님편에서 시작된다.
(2) 욥의 친구들은 이 심판의 말씀을 그대로 따랐다(9절). 그들은 선한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자마자, 그의 명령대로 행하였다.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만은 그들이 선택할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그들은 은혜를 받을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는 자들이었다. 욥의 친구들은 서로 연합하여 욥을 비난하였었다. 이제 그들은 서로 연합하여 용서를 빌고있다. 같이 범죄한 이들은 회개도 같이하여야 한다.
Ⅲ. 욥이 받은 축복 42:10-17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약 5:11). 즉 주께서 그의 고난을 어떻게 끝나게 하셨는지를 보았다는 의미이다. 욥기의 처음부분에서 우리는 고통중의 욥의 인내를 보았다. 그리고 이 마지막부분에서 그의 고난의 복된 결말과 그가 회복한 번영을 봄으로써 커다란 용기를 얻는다. 아마도 고난후에 받은 욥의 특별한 축복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주는 하나의 교훈일 것이다. 즉 이세상의 모든 고난은 우리에게 이와같은 하늘의 영광과 축복을 가져다줄 것임을 보여주는 일례이다. 시험을 당할때 굳굳하게 유혹을 이기는 자는 '생명의 면류관'(약 1:12)을 받을 것이다.
(1) 하나님은 그에게 축복을 베푸셨다. 즉각적으로 모든상황이 바뀌었다. 이전에 음울하여 두렵게 보이던 모든 것들이 기쁘고 희망적으로 보이게 되었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즉 하나님은 욥의 슬픔을 달래주셨고 그의 모든 고통의 원인을 제거해주셨다. 그는 사단이 매어놓았던 올무 즉 지극히 잠시동안 그를 묶어놓았던 올무를 풀어주셨다. 무엇보다 더좋은 것은 그의 마음의 상태가 변화되었다는 것이다. 모든 혼란이 사라졌다. 두려움이 그의 영혼의 집이었듯이, 이제 하나님의 위로가 그의 영혼을 기쁘게 하였다. 조수가 바뀌었다. 그의 고난은 이제 그것이 몰려왔을 때만큼 빨리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욥이 그 벗들을 위하여 빌매. 즉 욥이 친구들을 위해 기도하자마자 그 조수는 바뀐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친구들을 위해 올바르게 기도할때 그것은 사실상 우리의 일을 하는 것이다. 기도하는 사람들에게는 믿음뿐만이 아니라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할 것을 가르치심으로써 우리에게 서로를 위해 기도할 것을 가르치셨다. 다른사람을 위해 은총을 비는 것은 곧 우리를 위해 은총을 비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소유를 과거의 두배로 불려주셨다. 욥에게 그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그는 하나님의 영광때문에 고난을 당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에게 유익을 베푸셨다. 그에게 이익위에 이익을 베푸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누구도 그로인해 손해입기를 원치않으신다. 욥의 친구들은 말했다. "청결하고 정직하면 정녕 너를 돌아보시고 네 의로운 집으로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8:6). 그런데 그가 너를 돌아보지 않으시니 너는 정직하지 않은 것이라." 이에 대하여 여호와께서는 "너희들의 주장이 옳은 것은 아니지만 나는 너희들의 주장대로 내 종 욥의 무죄함을 증명하리니 그의 결말은 크게 번성하리라"라고 말씀하신다.
(2) 욥의 옛친구들과 이웃들 그리고 친척은 그에게 매우 친절했었다(11절). 그들은 그의 슬픔에 대하여 울었고 그의 기쁨을 즐거워하였다. 그들은 앞서 와서 그에게 간섭하였던 세친구들처럼 서투른 위로자로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은 세친구처럼 위대하고 박식하며 말잘하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훨씬더 친절하고 적절하게 욥을 위로하였던 것으로 나타나있다. 그들은 욥의 손해를 회복시켜주고, 그를 다시 일으키기위해 모금을 하였다. 각각 금 한조각과 금고리 하나씩 주었더라. 이는 그들 각각에게 큰 돈일수도 있다. 하나님이 그에게 친절을 베푸시매 그들 모두도 그에게 친절을 베풀려 하였다(시 119:74,79). 아마 그들중 어떤이들은 욥이 가난하고 매우 고통스러워하며, 극도로 비참해 보였으므로 망설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를 회복시키시매 그들은 모두 욥과 다시 친해지려 하였다. 겨울이면 사라지는 제비같은 우정은 비록 거의 무가치하지만 봄이오면 소생하곤 한다. 욥이 그 벗들을 위하여 빌자 그때에 그들은 욥주위에 몰려들었고 욥의 기도로인해 복받기를 갈망하는 그의 친절에 굴복하였다.
(3) 욥의 친구들이 주었던 조그마한 것에 하나님이 축복하시자, 욥의 재산은 엄청나게 불어났다. 그는 감사함으로 그들의 성의를 받아들였고 그것에 의해 자기 재산이 회복되는 것을 수치라고 생각지도 않았다. 하나님은 그에게 그들의 돈과 금고리보다 훨씬 좋은 것을 주셨다. 즉 그를 축복하셨던 것이다(12절). 하나님께서 그에게 고난을 주셨기때문에 지금은 그를 위로하신다. 하나님은 그에게 '처음 복보다 더하게' 하셨다. 선한 사람에게 있어서 말년은 때때로 그의 생애중 최고의 날이 되며 그때의 업적은 최고의 업적이 되곤 한다. 또 그가 마지막으로 받는 위안은 최고의 위안일 것이다. 이는 그의 길이 새벽빛이 밝아짐처럼 날이 갈수록 밝게 빛날 것이기 때문이다.
(4) 그의 가족이 다시 회복되었고, 그는 자녀로인해 커다란 위안을 받았다(13-15절). 그의 자녀수는 이전과 같이 '아들 일곱과 딸 셋'이 되었다. 어떤이들은 자녀수가 그의 가축들처럼 두배로 되지 않은데에 의미를 부여한다. 이는 죽은 자녀는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이 아니라 더좋은 나라로 옮겨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두 무리의 자녀를 갖게 되었다. 이는 '마하나님'(두 무리)라고 칭하여질수 있다. 즉 하늘에 한무리, 땅에 또 한무리가 있게된 것이다. 그의 딸들의 이름은 여기에 기록되어 있다(14절). 이는 그이름의 의미가 욥의 놀라운 상황 변화속에서 그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크신 선을 기억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욥은 첫딸을 '여미마'라고 불렀다. 이는 "그날"이라는 의미인데 어두운 고통의 밤이 지나 번영이 밝게 빛나오는 날이라는 뜻에서 이렇게 불렀다. 둘째딸은 '긋시아'라 불렀는데, 이는 매우 향기로운 향료의 이름이다. 셋째딸은 '게렌합북'이라 불리워졌는데, 이는 "풍요로이 보상함" 혹은 눈썹을 검고 빛나게 하는 미안료를 넣는 각용기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욥의 얼굴을 더럽히던 눈물을(16:16) 닦아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 딸들을 매우 아름답게 가꾸어주셨다. 전국중에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15절). 욥은 딸들에게도 그 오라비들과 같은 상속을 해주었다.
(5) 욥은 장수하였다. 그는 인생의 위안을 많이 누리며 살았다. 그는 4대에 걸쳐 후손을 보았다(16절). 비록 그의 자녀들은 두배로 늘어나지 않았지만 그의 손자들은(이는 노인의 면류관이다) 배이상으로 번성하였다. 하나님은 손해를 보상해 주신다. 그는 아이가 없는 사람들의 슬픔도 보상해 주신다. 그들은 아이가 없는대신에 욥처럼 자기의 모든 자녀를 매장하는 슬픔을 겪지않아도 된다. 욥은 수를 다하고 죽었다. 또 그는 이세상에서 온갖 만족스런 삶을 다누렸다. 그러므로 그는 기꺼이 이세상을 떠날수 있었다. 즉 고통의 날중에 안타깝게 죽음을 맞지는 않았다. 그는 매우 경건하게 죽음을 맞았다. 엘리바스가 그에게 희망을 가지라고 용기를 북돋기위해 했던 말그대로 그는 죽었다. '네가 장수하다가 무덤에 이르리니 곡식단이 그 기한에 운반되어 올리움 같으리라'(5:26).
# 핵심
42:1-17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욥이 회개한 내용과 하나님이 그를 다시 회복시켜주신 기사이다.
번영신학의 부당함(42:7)
욥의 친구들을 꾸짖으신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면에서 오늘날 종교를 번영과 기복을 위해 사용하려고 하는 모든이들을 질책하시는 말씀이기도 하다. 예수님을 믿어 부자가 되고 모든 삶이 잘 풀리지 않으면 잘못된, 정성이 부족한 신앙이라는식의 주장을 하는 것은 성경적인 신앙을 미신화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만일 하나님의 축복이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축복으로만 나타난다면, 고난당하신 그리스도를 비롯하여 그분의 뒤를 따르며 고난과 가난을 마다하지 않았던 이들이 모두 그릇된 신앙의 소유자로 판단될 것이다.
# 묵상
하나님을 완전히 의지할수 있게된 욥 ( 42:1-6 )
그 원인은 하나님의 현현을 통해서였습니다. 이와같이 고난중에 있을때 하나님의 침묵으로인해 심히 답답하고 고통스럽지만,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섭리를 깨닫게 될때 성도들은 자신의 무지함과 교만함을 회개할수 있게 됩니다.
욥의 세친구에게 노하신 하나님 ( 42:7 )
이는 그들이 하나님을 가리켜 말한 모든것이 욥의 말같이 정당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실수를 범합니다. 특히 자신의 편협한 신앙관, 인생관으로인해 형제를 몰아세우기 쉽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한계성에서 나오는 것이 절대적 진리일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살아계신 말씀만이 진리임을 명심해야할 것입니다.
욥의 중보기도 ( 42:7-9 )
중보기도는 기도대상자에게 커다란 신앙적 축복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성경은 중보기도를 신앙인의 아름다운 미덕이자 의무로 말합니다. 신앙의 위인들 즉 아브라함(창18:23-33), 모세(민12:13), 사무엘(삼상7:5), 다윗(대상21:17) 등이 중보기도를 했고, 그리스도께서는 원수를 위해서까지 중보기도를 하셨습니다(눅23:34). 그러므로 이러한 중보기도는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데 필요하고 성도들에게 마땅히 요구되는 미덕이며, 신앙적인 의무인 것입니다. 한편 욥의 중보기도로 죄사함을 받은 사람들은 그의 세친구였습니다. 즉 욥은 중보자이신 하나님의 복된사역을 친히 감당하였던 것입니다. 중보자로서의 욥은 대제사장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다시 복받는 욥 ( 42:10-17 )
그는 고난의 극복(10절), 형제와 친척과 지인들과의 관계회복(11절), 재물의 갑절회복(12절), 자녀의 회복(13-15절), 장수의 복을 받았습니다(16, 17절). 욥은 이후 140년간 살았고 아들과 손자 4대를 보았으며 그런후 자연스럽게 죽었습니다. 즉 욥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고나서 장수하다가 죽었던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죽음이 죽음자체로만 그치지 아니하고 영원한 생명인 새로운 삶으로 연결됨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와같이 성도들도 궁극적으로는 영원한 복을 누리게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