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와 사랑의 하나님 (욥 34:1~20)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
[욥기 34장 1절~20절]
1절 - 엘리후가 말하여 이르되
2절 - 지혜 있는 자들아 내 말을 들으며 지식 있는 자들아 내게 귀를 기울이라
3절 - 입이 음식물의 맛을 분별함 같이 귀가 말을 분별하나니
4절 - 우리가 정의를 가려내고 무엇이 선한가 우리끼리 알아보자
5절 - 욥이 말하기를 내가 의로우나 하나님이 내 의를 부인하셨고
6절 - 내가 정당함에도 거짓말쟁이라 하였고 나는 허물이 없으나 화살로 상처를 입었노라 하니
7절 - 어떤 사람이 욥과 같으랴 욥이 비방하기를 물마시듯 하며
8절 - 악한 일을 하는 자들과 한패가 되어 악인과 함께 다니면서
9절 - 이르기를 사람이 하나님을 기뻐하나 무익하다 하는구나
10절 - 그러므로 너희 총명한 자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결코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고
11절 - 사람의 행위를 따라 갚으사 각각 그의 행위대로 받게 하시나니
12절 - 진실로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시느니라
13절 - 누가 땅을 그에게 맡겼느냐 누가 온 세상을 그에게 맡겼느냐
14절 - 그가 만일 뜻을 정하시고 그의 영과 목숨을 거두실진대
15절 - 모든 육체가 다 함께 죽으며 사람은 흙으로 돌아가리라
16절 - 만일 네가 총명이 있거든 이것을 들으며 내 말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17절 - 정의를 미워하시는 이시라면 어찌 그대를 다스리시겠느냐 의롭고 전능하신 이를 그대가 정죄하겠느냐
18절 - 그는 왕에게라도 무용지물이라 하시며 지도자들에게라도 악하다 하시며
19절 - 고관을 외모로 대하지 아니하시며 가난한 자들 앞에서 부자의 낯을 세워주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그들이 다 그의 손으로 지으신 바가 됨이라
20절 - 그들은 한밤중에 순식간에 죽나니 백성은 떨며 사라지고 세력 있는 자도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고 제거함을 당하느니라
[배경 이해하기]
본문은 엘리후의 4차 변론(32~37장) 가운데 두 번째 변론입니다. 34장 서두에 나오는 ‘말하여 이르되’(1절)의 히브리어 ‘아나’(hn"['')는 어떤 질문이나 말에 ‘대답하다, 응답하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말은 욥이 엘리후에게 직접 질문했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하지만 욥은 엘리후의 말에 어떠한 반론이나 질문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는 욥이 예기치 못한 극심한 재앙으로 당혹해하며 그 고통을 하나님께 호소한 내용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인용하며, 마치 욥이 ‘하나님을 비방하기를 물 마시듯 한다’(7절)면서 하나님을 조롱하고 저주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는 자처럼 매도합니다. 그러나 욥은 극한의 고난 가운데서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로 인해 탄식했을 뿐 하나님을 비방하거나 공의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소망을 저버린 적이 없었습니다. 엘리후의 변론이 객관성을 잃은 것은 자기 의에 대한 욥의 주장을 하나님의 의를 훼손하는 것으로 보고 하나님의 의를 옹호하려 했던 열심히 지나쳤기 때문입니다.
[관찰과 묵상]
1. “우리가 정의를 가려내고 무엇이 선한가 우리끼리 알아보자”라는 말에서 엘리후의 어떤 마음을 엿볼 수 있나요?(4절)
엘리후의 말에는 하나님의 공의를 다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자기들끼리 욥을 정죄하고 심판하려 하는 교만이 숨겨져 있습니다.
4절은 엘리후의 말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진위를 구별해야 하는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밝혀내자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정의’에 해당하는 ‘미쉬파트’(jP''v.mi)의 원형은 ‘샤파트’(jp;v'')로, ‘심판하다, 판결하다’란 뜻입니다. 이는 법정에서 공개적으로 옳다고 판결하는 것을 의미하는 법정 용어입니다. 4절의 ‘우리’에 해당하는 무리는 지혜 있는 자들과 지식 있는 자들(2절)을 포함합니다. 그들의 주장에는 정의를 가려내고, 무엇이 선한 것인지 자기들끼리 알아보고 판결하려는 교만이 숨겨져 있습니다. 엘리후는 자신의 변론이 지혜와 공의에 기초해 있음을 확신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이 정의와 선악에 대한 판결을 온전히 내릴 수 없는 존재임을 인식해야 했습니다. 결국 엘리후는 자기 관점과 생각에 근거해 욥의 세 친구처럼 욥을 악한 자로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비록 친구들과 논쟁하는 과정에서 자기 의를 지나치게 주장하는 과오를 범하긴 했지만, 사실 욥은 하나님이 인정하실 만큼 의로운 사람입니다(1:8). 정의와 선의 판단 기준은 절대자이신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적용과 나눔
고난 당하는 지체를 내 기준대로 판단하진 않았나요? 지금 내가 아픔을 공감하고 함께 울어 주며 기도해 줄 사람은 누구인가요?
인간에게는 양심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것을 통해 선악을 구별합니다. 그리고 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장려하고, 악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경계합니다. 권선징악(勸善懲惡)이나, 상선벌악(賞善罰惡)이라는 개념은 인간에게도 선악을 판단하는 나름의 기준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인간의 양심은 선악의 절대적인 판단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양심은 사회의 환경과 문화 등에 따라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인간의 마음은 부패해 선악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선악을 판단할 진정한 기준은 바로 절대자이신 하나님입니다. 인간적인 기준을 가지고 선악을 함부로 판단하면 욥의 친구들이나 엘리후처럼 심각한 오류를 범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난을 쉽게 판단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판단은 접어 두고 그 사람의 고난을 품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중보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며 행위를 따라 갚으신다는 엘리후의 주장 이면에는 욥에 대한 어떤 전제가 내포되어 있을까요?(10~12절)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며 행위를 따라 갚으신다는 엘리후의 주장 이면에는 욥이 악인이기에 고난 받는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1~9절이 배심원 역할을 하는 지혜자들에게 욥의 잘못을 확정하는 판결을 요구한다면, 10~20절은 그러한 판결이 불가피함을 논증합니다. 그중에서 10~12절은 선과 악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공의의 시행을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11절에서 ‘사람의 행위를 따라 갚으사’는 사람의 일에 따라 보응하시는 하나님이 각각의 행위대로 얻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완벽한 이해로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한량없는 사랑으로 죄인을 용서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엘리후의 주장은 하나님의 공의를 지나치게 현실적으로 해석했다는 문제점을 지닙니다. 12절에서 엘리후는 부정문을 사용해 하나님의 절대 공의를 강조합니다. 원문에는 ‘진실로’ 앞에 의미를 강조하는 ‘실로’가 있습니다. 이중적인 확신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아프 오므남’은 엘리후의 절대적인 확신을 나타냅니다. 또한 ‘악을 행하지 아니하시며’에 해당하는 ‘로 야르쉬아’는 강한 부정어 ‘로’(al{)와 미완료 동사가 결합해 영원한 부정을 나타냅니다. 즉, 하나님은 과거에도 악을 행치 아니하셨으며, 미래에도 악을 행치 않으신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엘리후가 선과 악에 대해 보응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공의를 반복해 말하는 것은 욥이 죄인임을 전제한 것이며, 그의 고난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라는 신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후의 변론은 인과 관계론에만 집착된 잘못된 판단으로 욥에게 아무 도움도 줄 수 없었습니다.
적용과 나눔
나의 잘못된 신념을 기준으로 친구를 위로하거나 권면한 적은 없나요? 그때 그 친구에게는 어떤 말이 필요했을까요?
엘리후는 하나님의 절대 공의와 선하심을 변론하며 욥을 위로합니다. 욥의 고난은 그가 지은 죄로 인해 하나님께 받은 고난이므로 불평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결국 공의의 하나님만 강조하는 엘리후는 욥의 고난을 제대로 공감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정죄하는 분으로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며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사랑과 공의는 하나님 성품의 양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이에 대한 분명한 증거가 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에 인간의 죄를 속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죽어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에 따른 것입니다.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그분의 공의도 만족시키고 사랑도 만족시키기 위해 성자 하나님을 이 세상에 보내 인간들을 위해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상징이 됩니다. 엘리후의 변론에는 이 같은 하나님의 사랑이 부족했습니다. 우리 모두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을 기억하며 참된 위로자로 서길 소망합니다.
* ‘엘리후’라는 이름에는 ‘그는 나의 하나님’이란 신앙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엘리후는 친구 욥을 위로하기 위해 하나님의 공의를 강조하며 변론했지만, 결국 욥을 위로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엘리후의 변론을 통해 공의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다양한 교훈을 얻을 수 있었지만 정작 친구 욥의 심적 고통은 더 가중되기만 했습니다. 엘리후는 그 이름대로 ‘나의 하나님’에 갇혀 ‘욥의 하나님’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고난 당하는 이를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로 바르게 위로하는 공동체가 되길 소망합니다.
[말씀으로 기도하기]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마음 깊이 새깁니다. 율법적 공의가 아닌 사랑에 기초한 공의를 베풀도록 훈련해 이웃을 진정으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자가 되게 하소서.
출처 : 생명의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