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udy
Ⅰ. 중풍병자를 고치심 2:1-12
그리스도께서 얼마동안 변방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시다 그의 본거지인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셨다.
1. 그리스도에게 몰려온 많은 사람들(1,2)
그리스도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리자 곧 사람들이 그를 찾아왔다. 수일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신 소문이 들린지라 많은 사람이 모여서(1,2절). 왕이 있는 곳에는 알현실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문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을만큼 그리스도를 알현하려는 무리들의 수효가 많아서 그들을 모두 영접할만한 공간이 없을 정도였다.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계신 집으로 구름같이 몰려드는 것을 생각해 볼때 이는 매우 복된 광경이 아닐수 없다.
2. 그리스도가 몰려온 사람들에게 베푼 환대(2)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아마 그들 가운데는 병만 치유받으러온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것이고 또 단지 그의 모습을 보려는 호기심때문에 나온 사람들도 많이 있겠지만 그리스도는 그들이 모두 모이고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들 중엔 평일에 집에서 도를 전하는 것이 시간과 장소를 적당하게 선택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그리스도는 그것을 전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으셨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생명의 빛이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3. 병고침을 받고자 사람들에게 들려온 불쌍한 중풍병자(3,4)
그 병든 자는 중풍병자로서 전혀 치료가 불가능했으므로 마치 시체처럼 침상에 실려 네 사람에 의해 운반되었다. 이렇게 운반되어야할 정도로 그 중풍병자는 가련했지만 그를 침상에 실어서라도 운반한 것은 그 운반한 사람들에게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정많은 이들, 친척 또는 이웃들은 그 중풍병자를 그리스도에게 한번만이라도 데려갈 수 있다면 더이상 그를 운반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상당히 힘든 일이지만 중풍병자를 그리스도에게 데려왔던 것이다. 그들은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낼 정도로 열심이었다. 이 집은 다락방이 없는 단층집으로 지붕이 올려졌다. 그래서 중풍병자를 운반해온 사람들은 문앞에 모인 많은 무리때문에 집안으로 들어갈 수 없음을 알고 모든 방법을 동원한 끝에 그 중풍병자를 그집 지붕으로 들어올렸다. 그런 다음 그들은 지붕을 뜯어내고 중풍병자의 침상을 끈에 매달아 그리스도가 말씀을 전하고 있는 집안으로 내렸던 것이다. 이 사실을 통해 우리는 그들의 믿음과 열심을 알 수 있다. 이 사실에 의하면 그들은 열심때문에 그냥 가지는 않았을 것이며 또 축복하지 아니하면 그리스도를 가게하지 않았을 믿음을 가진 것이 분명하다(참조. 창 32:26).
4. 불쌍한 중풍병자에게 다정한 말씀을 해주시는 그리스도(5)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저희의 믿음이란 그들이 중풍병자를 데려온 일을 가리킨다. 그리스도는 그들이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 병든 자를 데려왔기 때문에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칭찬했다. 참되고 강한 신앙은 다양하게 작용하여 이성의 결함을 극복하기도 하고 또 감각의 결함을 극복하기도 하므로, 어떠한 믿음으로 나타나든지 예수 그리스도는 이 믿음을 받아들이고 인정해 주실 것이다.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여기서 사용된 '소자'라는 호칭은 매우 다정한 표현이다. 그리스도는 참된 믿음을 지닌 자들을 자기 아들로 삼으시기 때문에 중풍병자라도 아들이 될 수 있다. 그리스도는 그들이 매우 간절했으므로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가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죄의 결과로 병이 생겼다는 생각을 없애고 병의 원인인 죄를 깨닫게하여 죄를 용서받는데 더욱 관심을 쏟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병에서 회복된 것이 죄의 용서를 받아 비롯된 것일때 그것은 진실로 은혜가 아닐수 없다. 어떤 결과를 없애는 길은 그 원인을 제거하는데 있다. 죄를 용서받는 것은 모든 병의 뿌리를 뽑아내는 것이므로 결국 병이 치유되거나 그 병의 상태가 호전된다.
5. 그리스도가 하신 말씀에 대한 서기관들의 트집(6-11)
서기관들은 율법을 설명하는 사람들로서 그들의 교훈은 틀림없이 옳았다. 그러나 그들은 이 율법을 잘못 적용했다. 그들이 '오직 하나님 한분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57절)고 말한 것은 옳았지만 그것때문에 그리스도가 죄를 사할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리스도께서 '저희가 속으로 이렇게 의논하는 줄을 곧 중심에 아셨다'는 사실이 그가 하나님이심을 입증한다. 하나님의 왕권은 분리될 수 없으므로 사람들의 생각을 알 수 있는 자는 죄도 용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중풍병자를 고치는 권세를 보임으로써(9-11절) 죄도 용서할 수 있는 권세를 입증하신다. 만일 그가 어떤 것을 할 수 없었다면 그는 다른 일도 하려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줄을 너희로 알게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가라'(10,11절)고 말씀하셨다. 만일 그가 병의 원인인 죄를 물리칠 수 없었다면 죄의 결과인 병도 치유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말씀 한마디로 기적을 이룰수 있는 그리스도께서 그 기적속에 담긴 뜻대로 행할수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 어느 것이 쉽겠느냐고 반문한 것은 그들의 트집에 대한 매우 적절한 대답이었다. 이와같이 그리스도가 책망하지 않은 것은 죄를 용서한다는 뜻이므로 병을 고치는데 매우 뛰어나신 그리스도가 그 병을 완전히 치유할 수 있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6. 중풍병자가 치유되는 것을 보고 느낀 사람들의 인상(12)
중풍병자가 완전히 회복되어 자기 침상에서 일어났을뿐 아니라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앞에서 나가거늘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가로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못하였다 하더라'. 그리스도가 행하신 사역은 전례없는 일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고치실때 행한 일을 직접보면 우리도 그런 일을 도무지 보지못했다고 말할 것이 분명하다.
Ⅱ. 레위를 부르심 2:13-17
1. 바닷가에서 말씀을 전파하는 그리스도(13)
그리스도는 복음을 전파할만한 공간을 얻으려고 바닷가로 가셨다. 바닷가에는 얼마든지 많은 사람들이 올 수 있었다. 이 사실을 생각해 볼때 우리 주 예수께서는 강한 음성을 지니셔서 크게 말할 수 있었을뿐 아니라 직접 크게 말하셨던 것 같다.
2. 그리스도께서 레위를 부르심(14)
레위는 가버나움에서 세관에 있던 마태와 동일 인물인데 이 사실로 미루어보아 그는 세리였던 것 같다. 그런 그가 바닷가에 있는 세관에 앉아있었는데 그리스도께서 그곳을 지나다 우연히 그를 만났다. 아마 마태는 돈을 마구 쓰는 젊은이거나 아니면 유대인으로서 세리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여하튼 그리스도는 마태에게 이르시기를 나를 좇으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가장 큰 죄를 용서하는 사랑과 가장 큰 죄인들의 죄를 씻어주는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세리였던 마태도 복음 전하는 사도가 되었다. 개종하기 전에 아무리 큰 죄를 범하고 악평을 받았다고해도 그것은 회심한 후 하나님의 은사와 은혜를 받는데 아무런 지장을 주지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더 영광을 받으신다. 육체의 병을 고칠때는 의례히 많은 사람들이 그를 좇았으나 영적인 병들을 치료할때는 그를 좇던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영적인 병인 죄의 병은 매우 악하고 위험하다. 그 이유는 이 병을 앓고있는 사람들이 그 병을 고치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3. 세리와 죄인들과 친밀한 대화를 나누시는 그리스도(15)
이 구절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된다.
(1) 그리스도께서 레위의 집에 앉아 잡수셨다. 그런데 이 레위는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하여 모든 사람과 헤어질때 친구들에게 베푼 송별연에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을 초대했다.
(2)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레위의 집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앉았으며 그들은 그를 좇았다. 이말에 대해 혹자는 그들이 레위를 좇은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이 그의 말을 들었다는 내용으로봐서 그 구절은 '그들이 예수를 좇았다'고 보는 것이 좋은것 같다. 그들은 모두 양심때문에 그를 따른 것이 아니고 호기심때문에 그를 보러 레위의 집에서 벌어진 향연에 나온 것이다. 세리들은 어디를 가도 죄인 중에 가장 악한 죄인으로 인정되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들 때문이다.
첫째, 대개의 세리들이 그랬듯이 이들은 세관업무를 보면서 많은 부정을 저질렀다. 곧 백성들을 억압, 착취하여 뇌물을 받고 통과료를 강탈했으며 거짓으로 송사하기까지 했다.
둘째, 유대인들은 유대나라의 자유를 모욕하는 세관과 세리에게 특별히 반감을 품고 있었으며 세리들과 친구로 사귀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우리의 거룩한 주님은 죄로 가득찬 육신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셔서 바로 이런 사람들과 기꺼이 대화를 나누셨다.
4. 이 일을 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공격(16)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전하는 복음을 들으러오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으러왔다면 그의 말씀을 듣고서 죄를 깨달아 교화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냥 왔다가 예수님이 많은 세리및 죄인들과 함께 앉아있는 것을 보고 화가 치민것 같다. 그들은 제자들을 기만하여 예수님을 제자들과 이간시키려 했다. 그래서 그들은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라고 질문했던 것이다.
5. 자기의 입장을 변호하시는 그리스도(17)
그리스도는 자기가 행한 일을 철회하지않고 계속 고수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명성을 지키려고 몇몇 교양인들에게는 아주 공손한 태도를 보이지만 선한 일을 하지않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들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그들은 세리들이 증오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리스도는 이르시기를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동정받아야할 사람들이다. 그들은 병들었기 때문에 의원이 필요하며 죄인들이기 때문에 구원자를 필요로 한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들은 그리스도가 세리들을 멀리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마찬가지로 "그렇지 않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느니라. 나는 죄로 가득찬 세상에 보내졌으므로 나의 일은 세상에서 가장 큰 죄인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바꿔말하면 다음과 같은 말이다. "나는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거만한 바리새인들같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고 또 회개할 수 있도록 초대받으며 격려받은 것을 기뻐하는 불쌍한 세리같은 자들을 부르러 왔다." 이처럼 불쌍한 죄인들에게도 소망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Ⅲ. 금식과 안식일에 대한 논쟁 2:18-28
이 본문에서 나타나는 내용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제자들의 입장을 변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이 자기 뜻대로 행했기 때문에 그들의 입장을 변호하셨고 또 그들의 말을 지지하셨다.
(1)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변호하신다(18-22절). 바리새인들과 요한의 제자들은 왜 금식할까? 그들은 늘 금식하곤 했다. 바리새인들은 한 주일에 두 번씩 금식했으며(눅 18:12) 세례 요한의 제자들도 아마 한 주일에 두 번씩은 금식한 것 같다. 이처럼 엄한 선생들은 자신의 행동을 기준으로 정해놓고 거기까지 따라오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을 비난하고 책망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죄인들에게 선을 행하기위해 가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의 제자들은 배를 채우기위해 가는 것이라는 불쾌한 암시를 던졌는데 그것은 그들이 금식의 의미를 전혀 몰랐기 때문이었다. 악한 뜻은 항상 가장 악한 것을 생각 한다. 그리스도는 자기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았던 이유를 다음의 두 가지로 변론한다.
1) 지금은 제자들에게 평안한 날이므로 금식할 시기가 아니지만 앞으로 금식할 날이 올 것이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기 때문이다.
2) 지금은 제자들의 경험이 적기때문에 훗날 당하게될 믿음에 대한 혹독한 시련을 그들이 견딜 수 없다. 바리새인들은 오랫동안 그런 내핍생활에 익숙해져 있었으며 세례 요한의 경우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의 선생인 그리스도께서 직접 먹고 마셨으며 또 그들은 힘든 종교의식을 거행할 정도로 양육되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들에게 금식을 자주 시키면 그들이 좌절하게 될 것이고 그것은 곧 새 포도주를 낡은 옷에 붙이는 것과 같아 나쁜 결과만 초래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약하고 민감한 젊은 그리스도인들의 기분을 인자하게 살피시는 것처럼 우리도 그래야 한다. 그리고 그날 할 수 있는 일보다 더많은 일을 하려고 해서는 안되며 그날 할 일도 자기 역량에 맞추어 정해야 한다. 믿음이 약한 그리스도인들은 지나치게 많은 일을 떠맡지않도록 주의해야 하며 그리스도의 멍에가 쉽고 기분좋으며 즐겁도록 신경써야 한다.
(2)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이 안식일에 이삭을 자른 입장을 변론하신다(23-28절). 그리스도는 바리새인들의 제자가 감히 할 수 없었던 일을 그의 제자가 하자 "내가 너희를 보증한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그리스도의 교훈이 바리새인 장로들의 전통과 전혀 반대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그들의 선생의 교육원리대로 행하는 것은 곧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이 형식을 선망하여 그 형식을 가장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아주 쉽고 평범하게 비판하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지금부터는 다음의 사실들을 주목해 보자.
1)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안식일 아침에 조반도 제대로 먹지못했다. 그래서 회당으로 가고있을 때 그들이 이삭을 잘랐으며 그 이삭은 그들이 지닌 가장 좋은 아침이었다. 그들은 영적인 진미에 정신이 없었으므로 그들에게 필요한 음식마저 잊고 있었다.
2)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이삭을 자르는 것이 수확하는 것만큼이나 심한 육체적 노동이므로 불법이라고 간주하여 예수님의 제자들을 정죄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저희가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라고 질문했던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금지된 일을 한다면 그리스도에게도 나쁜 영향이 미칠 것이다. 주목할만한 일은 바리새인들이 그리스도가 잘못했다고 생각했을때 그의 제자들에게 말했고 이제 그의 제자들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자 그리스도에게 말했다는 사실이다.
3) 그리스도가 그의 제자들을 변호했던 방법이 몇 가지 있다.
첫째, 예를 통한 방법 : 다윗이 진설병을 먹었던 일은 제자들이 이삭을 딴 것에 어울리는 좋은 선례가 되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너희가 읽지 못하였느냐"라고 반문하였다. 의식을 준수하면서 또한 도덕적 의무도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일은 필요한 경우에 한하며 하지않아도 되는 일까지 도덕적 의무를 존중해야 할 필요는 없다.
둘째, 논쟁을 통한 방법 : 바리새인들에게 제자들이 이삭을 딴 일을 이해시키기 위하여 그리스도는 그들로 하여금 안식일이 누구를 위해 있는지 생각게 하신다(27절). 그러므로 그는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안식일은 성스럽고 거룩한 제도이지만 우리는 이 안식일을 고역이 아닌 특권과 유익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포용해야 한다. 하나님은 결코 안식일이 우리의 부담이 되도록 계획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안식일을 우리에게 부담되는 것으로 만들어선 안된다. 인간은 하나님을 위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고 또 그를 섬기도록 창조되었지 안식일을 위하여 창조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이 우리에게 유익이 되도록 계획하셨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하여 안식일을 두셨다. 하나님은 인간의 육신이 안식을 취하고 세상일로 피곤해지지 않도록 인간의 육신을 참작하여 안식일 제도를 두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에 더 큰 관심을 가지셨다. 안식일은 오직 그날이 경건한 날 즉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고 또 하나님께 찬양드리며 감사하는 날이 되도록 안식하는 날로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이런 경건한 일에 전념하도록 세상일을 그만두고 안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제 다음 몇 가지 사실을 살펴보자. 첫째로 우리는 너무도 좋은 주인을 섬기고 있다. 그의 모든 제도들은 다 우리에게 유익이 된다. 주인을 섬김으로써 유익을 얻는 것은 그 주인이 아니라 우리 자신들이다. 둘째로 우리를 위한 안식일에 우리는 무슨 일을 해야 할까?'라고 자문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이 되도록 규정해 놓은 종교의식이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짐이 되지않도록 매우 주의해야 한다. 안식일이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는지 생각해 보라.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28절). 모든 안식일은 인자의 날이므로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며 안식일엔 그에게 영광을 돌려야 한다. 언제부터인가 안식일을 그 주간의 첫째 날로 옮기게 되었는데 이것은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은 주님의 날로 불려지게 되었다.
# 해설
죄인의 친구이신 예수 ( 2 )
본장에는 계속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역과 함께 그분의 크신 능력과 명성을 질투하는 유대지도자들의 비난과 배척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비난은 율법의 참 뜻을 알지 못한데서 비롯되었습니다. 마가는 본장을 통해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적개심을 품기 시작했고 그 적개심이 자꾸 발전하는 모습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1. 예수와 서기관
1) 중풍병자를 치료해 주심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한 중풍병자를 예수님께로 데려왔습니다. 사람들은 중풍병자를 메고 찾아왔지만 많은 사람들로 인해 주님께 가까이 다가설 수가 없자 급기야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어 주님이 계신 방안에 중풍병자를 들여보냈습니다. 중풍병자를 주님께로 데리고 가기만하면 치료받을 수 있다는 그들의 확신은 모든 것을 가능하도록 했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죄를 사하시고 치료하여 주셨습니다.
a.예수의 소문을 들은 자들(눅18:35-38)
b.침상에 누운 환자(마9:1-2)
2) 논쟁을 벌이는 서기관들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그 자리에는 서기관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사라고도 불리는 율법 학자들입니다(참조, 마22:35;눅7:30). 그들은 예수님께서 먼저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시는 것에 대해 신성모독죄로 정죄했습니다. '참람하도다'라는 말의 뜻이 그것입니다. 서기관들의 왜곡된 저의를 간파하신 예수님은 곧 중풍병자에게 걸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즉시 주님의 치유의 능력과 권세가 나타났습니다. 중풍병을 말씀으로 고치신 예수님은 바로 인간의 죄를 사하시는 권세를 지니신 하나님이심을 보여주고자 치유 선고를 하신 것입니다.
a.예수를 시험하려는 의중(눅5:21-22)
b.깨닫지 못하는 자들의 의논(막8:17)
3) 세리 레위를 부르심
주님은 바닷가에서 무리들을 가르치신 후 길을 가시다가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레위는 예수님의 제자 마태의 본명입니다. 마태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후의 이름으로 보입니다. 그는 헤롯 안디바의 영토였던 가버나움 근처의 세리였습니다(참조, 눅5:27). 가버나움은 당시 상업과 교통의 중심지로 다메섹, 두로, 예루살렘으로 가는 통로였습니다. 빌립의 영토인 데가볼리에서 헤롯 안타파스의 영토로 들어서는 첫 성이므로 관세를 받는 세관이 있었습니다. 당시 세리는 로마 정부의 세금 징집 사무를 청부 맡은 유대인들로서 억압과 착취로 치부하는 것이 상례였으므로 민중의 미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주님의 권위있는 부르심에 레위는 즉시 순종했습니다.
a.이방인과 같이 취급되는 세리(마18:17)
b.순종은 성도의 의무임(행5:29)
2.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예수
1) 잔치를 벌이는 레위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한 레위는 예수님과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을 위해 잔치를 벌였습니다. 레위가 베푼 잔치에는 세리와 죄인들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자신의 집으로 초청하여 정성스러운 음식으로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기쁨의 자리를 만들어 예수님을 주빈으로 모신 것입니다. 자신의 가정에 주님을 모시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주님을 위한 레위의 잔치는 결코 돈이 많아서 베풀어진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그의 열정이 그것을 가능케 했습니다.
a.예수께 잔치를 베풂(눅5:29)
b.함께 먹고 마심(마11:19)
2)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불만
죄인과 세리와 더불어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행위는 의인으로 자처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있어서는 대단히 심각한 사건이었습니다. 세리란 일반적으로 불의하며 또한 부자였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는 미움과 멸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세리는 창기와 더불어 죄인의 대표격이었습니다(참조, 마21:31). 그래서 그들에게는 죄인과 세리와 함께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행위는 도저히 용납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힐난한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자신이 의인을 부르러 온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왔다고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a.전통을 중시하는 이들(마15:6)
b.영적인 진리에 무지함(요3:11-13)
3) 금식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을때에 어떤 사람이 예수께 나아와서 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신랑 친구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때는 금식하지 않고 신랑을 빼앗길때 금식한다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금식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단지 위선적인 금식에 대해 비판하셨습니다. 금식은 진정 절실한 동기에서 시작해야 하며, 남에게 보이기 위한 금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a.영혼의 순화를 망각한 금식(시69:10)
b.복음전파를 위한 바울의 금식(고후11:27)
3. 예수는 안식일의 주인
1) 새 포도주
금식에 관해 말씀하신 예수님은 이어서 생베 조각과 낡은 옷, 새 포도주와 낡은 부대의 비유를 통하여 낡은 옷으로써의 율법 종교와 복음에 의한 새 종교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종교의 본질은 인간을 구원하는 생명력에 있습니다. 인간을 구원하지 못하는 종교는 본질적으로 종교가 아닙니다. 율법 종교가 인간을 구원하는 생명력을 상실했을때 그 터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시작되었습니다. 복음의 생명력은 예수님에 의해 현실적으로 나타났습니다.
a.생명과 평강의 언약임(말2:5)
2) 논쟁을 벌이는 바리새인들
예수님께서 안식일날 그의 제자들과 밀밭 사이로 지나갈때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먹었습니다. 이것을 본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규례를 근거로하여 그리스도와 그 제자들의 위법을 힐난했습니다. 유대교의 지도계층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참조, 마23:2),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쳤으나 스스로는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에게만 거룩하게 보이려한 위선적인 종교로 타락한 것입니다.
a.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먹는 제자들(눅6:1-2)
b.참 신에게서 떠난 자(렘2:35)
3)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바리새인들의 논쟁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예를들어 그들의 주장이 잘못된 것임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은 사람을 위한 것임을 주지시켰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여러 금지 규례를 정하신 것은 곧 인간으로 하여금 영생을 얻게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더나아가 예수님은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심으로 그들의 논쟁을 일축하셨습니다.
a.모든 것이 사람을 위하여 있음(고후4:15)
b.안식일에는 생명을 구하는 인자(막3:4)
결론
우리는 본장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 이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비난하는 유대지도자들을 볼 수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먼저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사역에 협조해야할 자들이 비난을 한 것을 통해 말씀을 올바르게 깨닫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올바르게 깨달을 수 있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 핵심
2:1-12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고치면서 그의 죄도 사하셨음은 그분이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낸다.
침상(2:9)
접어서 들고 다닐수 있는 돗자리나 담요. 따라서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11절)고 명하셨을 때, 그는 얼른 자신의 ‘요’(공동 번역)를 걷어 자리를 뜰수 있었다. 한편 극빈자는 자신의 겉옷을 이불대용으로 사용했다.
가죽 부대(2:22)
주로 염소 가죽으로 만들었다. 물, 우유, 술 따위를 담는 용기로 사용하는 풍습은 오늘날에도 근동 지역에서 볼 수 있다. 하갈이 사용한 가죽 부대도 이런 것이다(창 21:19). 가죽 부대는 기름을 칠해 방수효과를 높이곤 했다. 그런데 이것을 오래 사용하다보면 가죽이 얇아지고 신축성이 떨어진다. 따라서 여기다 새 포도주를 담으면 그것이 발효되면서 생기는 가스의 압력으로 인해 부대가 쉽게 터져버리고 만다.
# 묵상
중풍병자와 네 친구의 믿음 ( 2:3-12 )
이들의 믿음은 장애물을 극복한 불굴의 믿음이었고, 위험을 감수한 담대한 믿음이며, 타인을 위한 이타적 믿음이요, 구원의 열매를 맺은 결실의 믿음이었습니다.
죄인의 친구이신 예수님 ( 2:13-17 )
그분은 죄인을 부르시고 죄인을 위해 죽으셨으며(롬4:25), 피흘리심으로 죄를 사하셨고(히9:22), 죄인을 의롭게 하셨습니다(롬3:28). 또한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셨으나(롬8:3), 그분은 죄가 없으셨으므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식사도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즉, 이는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어울림으로 죄인이 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인들로 하여금 주님께 나아와 구원을 얻게 하기위해 자신이 죄인의 구주이심을 나타내기 위한 의도적인 행동이셨던 것입다. 그런데도 서기관들이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것을 문제삼은 이유는 율법을 범하는 자들과 함께하는 것을 그와 동일한 범법행위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금식의 문제 ( 2:18-20 )
예수님의 제자들은 신랑되신 예수님과 함께있기 때문에 금식을 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야가 아직 도래하지 않았으며, 그날을 예비하기 위해 금식을 해야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바로 그 메시야이시기 때문에 그분과 함께있는 제자들이 슬퍼하며 금식하기보다 오히려 환희에 넘치는 잔치를 벌이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일이었던 것입니다.
사람과 안식일의 관계 ( 2:23-3:4 )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안식일을 주신 목적은 6일간의 노동으로부터 참 쉼을 얻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새로운 영적 활력을 얻도록하기 위한 것이지, 인간을 제도속에 가두어두는데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치유하신 사건은 율법과 위선에 가득찬 사람들에게 참으로 선한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치신 사건이었습니다. 삶에 지친 자는 안식일에 활력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께 손을 내미는 자만이 이러한 축복을 얻는 것입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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