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애가
고난 중에도 소망은 있다
하나님이 그분의 이름을 두려고 택하신 예루살렘을 버리셨다. 숱한 경고에도 하나님을 거역하고, 돌이키지 않은 백성의 죄가 결국 수치와 치욕을 불러왔다. 참담한 고난의 광경에 눈물이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신 분이다. 고아와 과부같이 버려진 백성을 돌아보시고 다시 일으키실 것이다. 심판자 하나님이 곧 구원자 하나님이시기에 소망이 있다.
예레미야애가 한눈에 보기
본문
| 1:1~22
| 2:1~22
| 3:1~66
| 4:1~22
| 5: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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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점
| 버림받은 도성
| 하나님의 심판
| 희망의 염원
| 예루살렘 포위
| 회복을 위한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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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본문에서 저자가 누구인지 드러나지 않지만, 전통적으로 예레미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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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
| 예루살렘 함락(주전 586년) 직후 |
목적
| 애가는 말 그대로 슬픔을 담은 노래다. 예루살렘이 무너지는 혼돈과 패망의 현장을 아픈 마음으로 그리고 있다. 하나님의 경고로 예상된 고난이지만, 너무 끔찍해서 이것이 어찌 된 일인지 의아할 뿐이다.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셨다는 점이다. 하나님이 그들 원수의 편에 서서 예루살렘이 짓밟히게 두셨던 것이다. 놀라운 것은 그 가운데서도 소망의 찬송이 있다는 점이다(3:21~41). 하나님은 환난 중에도 자비하신 분이다. 하나님이 계시기에 절망적인 현실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품을 수 있다. 하나님은 징계라는 정련의 과정을 거쳐 정결하게 하신 후, 예루살렘과 그분의 백성을 다시 일으키실 것이다. 폐허 속에서도 희망은 피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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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류
| 예언서, 애가 |
예레미야가 쓴 애가인가?
예레미야는 요시야 왕이 죽었을 때 애가를 지은 적이 있기에(대하 35:25), 이런 형식을 익숙하게 사용할 줄 알았을 것이다. 그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다가 구덩이에 갇혔던 경험을 이 애가에 담은 것으로 보인다(애 3:53~63), 반면, 예레미야가 저자가 아닐 가능성도 있다. 그는 시드기야 왕에게 애굽을 의지하지 말고 바벨론에 투항하라고 예언했는데(렘 38:17~19), 본문에서 '우리' 안에 포함된 저자는 애굽이 구원해 주리라 기대한 듯하다(애 4:17). 또 예레미야는 시드기야 왕을 썩은 무화과처럼 여겼지만(렘 24:8~10), 저자는 시드기야를 여호와께서 기름 부으시고 택하신 지도자라 여겼다(애 4:20).
버림받은 도성 (1:1~22)
완전히 짓밟힌 도성은 텅 비어 있다. 하나님이 그들 원수의 편에 서 계신 듯하다. 화려하던 도성이 적막하고 을씨년스러운 곳으로 바뀐 풍경 앞에서 끝없는 탄식만 흘러나온다. 이렇게 참담한 일을 당했는데도 위로할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반복해서 나온다(2, 9, 16~17, 21절).
하나님의 심판 (2:1~22)
선지자는 예루살렘에 일어난 일이 바벨론 군대의 공격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 모든 일의 원인은 여호와의 진노에 있다. 하나님이 백성의 죄악 때문에 예루살렘을 공격하신 것이다. 심지어 주님이 거하시는 성전까지도 노략당하게 하셨다. 하나님이 시온에게 주셨던 모든 절기와 안식일의 기쁨이 사라졌다. 아이들은 거리에서 죽어 간다.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린 사람들은 심지어 인육을 먹는다(2:20). 하나님의 심판을 당한 백성은 망연자실한다. 선지자는 여호와의 진노의 날에 피하거나 살아남은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진술한다.
희망의 염원 (3:1~66)
선지자는 마치 자신이 어둠 속에서 뼈가 부서지고 살이 찢겨 피 흘리고 있는 것처럼 느낀다. 그는 여호와의 분노의 매로 인해 자신이 화살을 맞는 과녁 신세가 되었다고 한탄한다. 어찌나 속이 상하고 고통스러운지 쓴 것을 잔뜩 먹은 것 같다. 그러나 그는 기억한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기 때문에, 택하신 백성이 절대 진멸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게다가 영원하신 주님의 인자와 긍휼은 아침마다 새롭고 주님의 성실은 크고도 크시다(22~23절). 선지자는 연약한 인생으로 고통받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본래 의도가 아니시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희망을 구하는 짧은 순간이 지나고, 선지자는 또다시 자신을 둘러싼 위험을 직시한다. 모든 것을 보고 아시는 하나님께 보호를 요청한다. 하나님은 비방과 모해를 당하는 이들의 원통함을 풀어 주시고 생명을 지켜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포위 (4:1~22)
차라리 하늘에서 불벼락을 맞아 타 버린 소돔 성이 나을 뻔했다. 예루살렘은 삽시간에 뒤엎어졌고, 시온의 백성은 극심한 고난에 처했다. 순금 같던 보배로운 백성은 질항아리같이 여겨지고, 광야의 타조같이 잔인해져 자녀도 돌보지 않는다. 대적과 원수가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갈 줄은 아무도 몰랐다. 선지자는 굶어 죽는 것처럼 천천히 쇠약해지느니 차라리 칼에 맞아 죽는 것이 낫겠다고 한탄한다. 그러나 시온에 임한 죄악의 형벌이 다한 후에는 다시는 백성이 사로잡혀 가는 일이 없을 것이다.
회복을 위한 기도 (5:1~22)
선지자는 하나님께 이 백성이 당한 고난과 치욕을 기억해 달라고 호소한다. 심판하신 하나님이 속량도 해 주실 것이다. 정의도 없고 자비도 없는 멸망의 도시에서 선지자는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두려움을 피력하며 애가를 마친다. 선지자는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을 영원히 잊지 않으시고 오래 버려두지 않으시는 신실하신 분임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돌아보시는 날에는 그들이 새롭게 되어 옛적의 영화로운 모습으로 회복될 것을 소망한다.
예루살렘을 지배한 역사 속 주인들
시기
| 정복자
| 시대적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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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전 586년
| 바벨론
|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바벨론과 애굽 사이에서 위험한 곡예를 벌이다가 바벨론의 대대적인 침공을 받는다. 바벨론 군대는 봉신 의무를 저버린 유다를 응징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과 왕궁을 비롯한 모든 집을 불사르고 성벽을 헐고 백성을 사로잡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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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전 540 / 539년
| 메대 - 바사
| 메대를 차지한 고레스 왕은 바벨론을 무너뜨리고, 정복지의 백성에게 자기 땅으로 돌아가라고 명한다(스 6:3). 여러 차례에 걸쳐 고향으로 돌아온 유다 백성은 성벽을 쌓고 성전(2차 성전)을 재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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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후 70년
| 로마
| 예루살렘의 통치자는 알렉산더 대왕과 셀레우코스 왕조를 거쳐 로마가 되었다. 유대인들은 로마의 분봉 왕들에 대항해 여러 차례 봉기를 일으켰고, 이를 골칫거리로 여긴 티투스 장군을 보내 예루살렘을 함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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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4년
| 페르시아
| 비잔틴 제국과 힘을 겨루던 페르시아(현재 이란)의 사산 왕조가 예루살렘을 차지한다. 632년 무함마드가 죽고 세계 정복에 나선 이슬람 세력은 이집트를 비롯해 북아프리카에 이르는 제국을 건설한다(칼리파 제국, 637년). 지중해 연안에서 비잔틴 제국이 물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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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9년
| 십자군
| 1차 십자군은 그나마 성공적으로 예루살렘을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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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7년
| 살라딘 (이집트,시리아의 술탄)
|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의 배경. 십자군은 포로 석방 등을 조건으로 협상한 끝에 예루살렘을 살라딘에게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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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 영국
| 제1차 세계 대전 동맹국인 오토만 제국을 제압하고 난 후, 영국의 통치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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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 요르단, 이스라엘
| 이스라엘 독립을 두고 아랍 동맹과의 전쟁이 계속된다. 그 결과 예루살렘에 대한 요르단과 이스라엘의 분할 점령이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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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 이스라엘
| 6일 전쟁을 일으킨 이스라엘은 두 번째 날 요르단이 점령하고 있던 동 예루살렘을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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