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아를 통해 세워지는 평화의 나라

 

[이사야 11장 1절~9절]
1절 -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2절 -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3절 -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4절 -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5절 -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6절 -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7절 -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8절 -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9절 -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새의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입니다. 그의 위에 하나님의 영이 강림하시고 그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입니다. 그는 공의로 세상을 심판할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으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입니다.

 

1. 평화의 나라 (1~5절)

하나님 언약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아의 탄생과 그가 다스리실 나라에 대해 예언합니다. 메시아는 이새의 줄기, 즉 다윗의 후손으로 오십니다(1절). 그 약속 아래 다윗의 왕위를 이어 만왕의 왕으로 오실 이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이 다윗과 맺으신 언약은 예수님을 통해 궁극적으로 성취됩니다. 예수님의 역할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침 없는 공명정대한 통치를 베푸시는 것입니다(3~5절). 그분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해 이 땅에 임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공의와 정직으로 백성을 다스리실 것입니다. 그 나라는 온갖 거짓과 불의, 폭력과 억압이 가득한 세상 나라와 달리, 모든 백성이 즐거워할 평화의 나라입니다.

* 이새의 줄기에서 나신 이(메시아)는 이 땅을 어떻게 다스리시나요? 그분의 통치 방식이 내게 주는 위로와 소망은 무엇인가요?

 

2. 창조 세계의 회복 (6~9절)

하나님은 위기 상황에서 소망의 메시지를 주시는 분입니다. 이사야가 예언하던 시기에 유다는 위기 상황에 처했습니다. 이리, 표범, 사자, 독사는 유다를 위협하는 앗수르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그분의 나라를 대망하게 하십니다. '평강의 왕'(9:6)이 이 땅에 임하시는 '그때에'(6절)는 놀라운 회복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해 다투며 원수로 지내던 세상이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질 것입니다. 강한 힘으로 압도하려는 세상 속에서 참신앙인은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대망하며 믿음으로 인내합니다.

* 예수님이 회복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은 어떠한가요? 내가 기대하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요?

 

오늘의 기도

이 땅에 주님이 처음 오셨던 때를 기념하며, 다시 오실 주님을 전심으로 고대합니다. 서로 해함 없이 어우러지는 평화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질 그날을 소망합니다. 구원의 주님을 아는 지식으로 제 영이 충만히 채워져, 누구에게든 복된 소식을 담대히 전하게 하소서.

 

 

출처 : 생명의 삶 (큐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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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진정한 예배와 가증한 예배 66:1-4
(1) 은혜로운 심령이 성전보다 훨씬 귀한 것이다(1,2절). 선지자들과 그리스도는 성전의 파멸을 예언하며 하나님께서 성전을 버리심으로 곧 황폐해지리라고 하였다. 성전은 갈대아인들에 의하여 훼파된후 곧 다시 재건되고 예배의식도 그와 함께 부활되었다. 그러나 로마인들에 의해서 다시 영원히 멸하여졌으며 예배법 역시 소멸되었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과 통치의 보좌이며 땅은 그의 발등상이다. 그는 거기에 서사 자기뜻에 따라 땅의 모든 문제들을 다스리신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밝게 빛나는 보좌를 가지고 계시며 그토록 광대한 발등상을 가지고 계시다면 "그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어디에 무슨 집을 지을수 있겠는가? 무엇이 그의 영광의 거처가 될수 있으며 어디가 그의 안식할 처소가 될수 있으랴." 영원하신 마음이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에서 어떤 만족을 얻을수 있겠는가? 만일 그가 스스로를 위하여 거할 집을 필요로하신다면 세상을 지으셨을때 친히 하나 만드시지 아니하셨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손으로 지은 성전을 필요로하지 않으신다. 그는 겸손하게 참회하는 은혜로운 심령에게 하는만큼 성전을 주목하지는 아니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지으신 하늘과 땅을 가지고 계시며 사람이 만든 성전도 가지고 계시다. 그렇지만 그것들 모두를 하찮게 여기신다. 심령이 가난하고 겸손하고 진지하며 자기를 낮추고 부인하는 자, 마음으로 진실로 죄를 통회하며 회개하고 사함받기위하여 애통하는 자에게 은총으로 응하시기 위해서이다. 그러한 마음이야말로 하나님을 위한 산 성전이다. 그는 거기에 거하시며 그곳이 그의 안식하는 처소이다. 그것은 마치 하늘과 땅과 같고, 그의 보좌에 발등상과 같다.
(2) 은혜롭지 못한 손으로 드려진 제사는 경시된다. '악의 제사'는 열납되지 못할뿐만 아니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이다(잠15:8). 이것이 본문 말씀의 대개의 뜻이다(3,4절). 포로생활에서 귀향한후 세속적인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데 점차로 소홀하게 되었다. 그들은 희생을 드리기위하여 '토색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다'(말 1:8,13). 그리고 이것은 그들의 예배를 하나님께 가증한 것이 되게 하였다. 자기 식탁에 올리기위하여 '소를 잡는 것'은 쾌히 해도 좋은 일이었으나 하나님의 제단에 놓기위하여 소를 잡는 자는 마치 사람을 죽이는 것과 다름이 없다. 소를 죽이는 자는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의 희생을 도외시하는 것이 된다. '어린양으로 제사를 드리는 것'은 만일 그것이 자기가 가진 가장 좋은 것이 아니라 흠이 있는 것이라면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는커녕 하나님께 대한 모독이 된다. 그것은 마치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다.' 개는 율법에서 몹시 비천한 동물로 간직된 것이다. 나귀는 속전제물로 열납되는반면 개같은 자의 소득은 결코 성전에 바쳐질수 없었으며(신23:18) 마치 '돼지의 피'를 드림과 다름이 없었다. 돼지는 먹거나 만져서도 안되는 동물이었으며 그 국물조차도 가증스럽게 여겨졌었다(65:4). 하물며 그피는 더말할 것도 없었다. 하나님께 '분향하는' 자들,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중보의 향을 경멸하는 자들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다.' 그들의 악함은 제사를 가증스러운 것이 되게 하였다.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즉, 저희 자신의 악한 마음이 기뻐하는 길을 택하였다.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그들은 악하고 부도덕하였으며, 하나님이 명하신 길보다는 죄의 길을 택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의 제사를 하나님께 가증한 것이 되게 만들었다(1:11-15). 그들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모든 경고와 은혜로우신 모든 제안들에 대해 귀먹은 자와 같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나도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리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은 자기들의 좋은대로 선택하였도다. 그러므로 나도 이제 나의 선택을 하리라. 그들은 내게 대하여 자기들이 하고싶은 길을 택하였으니 나도 그들에게 내가 하고싶은 길을 택하리라." 그들은 저희 스스로를 미혹한 저 헛된 확신으로 말미암아 기만당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로 징벌을 받게하실 것이다. 그들은 저희 자신이 미혹됨으로인하여 파멸로 급히 달려갈 것이다.

Ⅱ. 신실한 자들의 위로 66:5-14
하나님의 말씀을 조롱한 위선적인 민족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던 선지자는 여기에서 그의 설교를 '여호와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들'에게 돌려 그들을 위로하며 격려하고 있다. 그들은 불신하는 민족에게 임박한 심판에 포함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죄로인하여 진실로 겸비케되어 그말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자들에게는 위로의 곳간이 된다. 하나님께서 '말하여도 청종하지 않으려' 하는 자들이 있었다(4절). 그러나 만일 마음이 '여호와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그들의 귀는 말씀을 듣고자 활짝 열려질 것이다.
(1) 하나님께서는 올바르면서도 해를 당하는 자들을 그들의 핍박자들에 대하여 신원해주실 것이다(5절). 너희 형제가 너희를 미워하며...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영광을 나타내사 너희 기쁨을 우리에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라 하였으나. 사도들은 날때부터 유대인들이었다. 그렇지만 이방인들의 도성가운데 있을때에조차 저희가 만난 유대인들은 저희를 가장 가혹하게 괴롭히는 대적이었으며 그들에게 맞서도록 이방인들을 선동하였다. 사도들이 하는 일에 대해서 사도들을 사랑하고 격려해야할 형제들이 오히려 그들을 미워하였으며 회장에서 내어쫓았다. 우리 구주께서는 이렇게 설명하신다(요 16:2).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그들은 이 박해아래서 격려를 받았었다. "네 믿음과 인내를 잠시만 더지키라. 너희 형제가 너희를 미워하며 압제하고 너희 형제가 너희를 싫어하여 쫓아내지만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는 너희를 사랑하시느니라. 따라서 어떠한 다른 사람도 감히 나타나지 못할때 너희를 위하여 나타나시리라." 이것은 예루살렘에 임박한 멸망의 표적을 보고 유대인들의 마음이 두려움으로 엎드러졌을때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들이 미워하고 핍박하였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저희 구속의 날이 가까웠음을 알고 기쁨으로 저희 머리를 들었다"(눅21:26,28).
(2)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나타나실때 세상에 큰소리가 있을 것이다(6절). 소리가 성읍에서부터 오며 목소리가 성전에서부터 들리니. 어떤이들은 이것을 교회의 친구들이 기뻐하여 부르짖는 환호성으로 해석하며 또 어떤이들은 교회를 대적하는 자들의 애곡하는 소리로 해석한다. 곧 대적하는 자들이 성전으로 도피하려하나 소용이 없어 내는 비명이다. 이 목소리들은 이제 '그대적에게 보응하시는' 여호와의 목소리의 반향이라고 하겠다. 예루살렘이 오랜 포위끝에 로마인들에 의해 함락되었을때에 그도성과 성전에서 들렸던 혼란의 소리이었다. 혹자는 이예언이 예루살렘의 패망전에 있었던 불가사의한 일로 성취되었다고 생각한다. 그일은 요세푸스의 "유대전쟁" 7권 31장에 기록되어 있다. 즉, 그때 성전문들이 저절로 갑자기 열렸으며 제사장들은 지성소에서 움직이는 소리내지 떠드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곧 "우리가 여기서 떠나자"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후에 예수 바안나스라는 사람이 나타나 초막절에 도성을 오르내리면서 "동방에서도 소리, 세상에서도 소리, 사면팔방에서도 소리, 예루살렘과 성전을 치는 소리, 이모든 백성을 치는 소리"라고 계속하여 외쳤다는 것이다.
(3)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 이세상에 교회를 세우실 것이다(7절). 시온은 구로하기전에 생산하며 이것은 유대인들이 바벨론에서의 포로생활로부터 구속받은 것에 적용된다. 이구속은 어떠한 수고나 투쟁도 없이 매우 쉽고 조용하게 이루어졌다. 태어난 남자아이는 기쁨의 대상에 되고있는데 산모는 결코 해산으로인하여 수고하지 않았다. 고통을 당하기전에 남자를 낳았으니. 애굽 산파들이 히브리 여인들에 대해 한 말만 없었다면 이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 될것이다(출1:19). '히브리 여인은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전에 해산하였더이다.' 그러나 땅이 어찌 하루에 결실을 내겠는가? 그렇다. 봄이 되어 지면을 새롭게 하는데도 수주일이 걸렸다. 나라가 어찌 하루에 생기겠으며 민족이 어찌 순식간에 나겠느냐.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돌연히 행하지 않으신다. 그렇지만 이경우에 '시온을 구로하는 즉시에 그자민을 순산하였다.' 고레스의 칙령이 반포되자마자 포로들은 고국땅에 돌아갈 최선의 방책이 무엇인지 모색하였다. 그리고 그이유가 주어지고 있다(9절). 그것은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이다. 만일 그가 자기 백성의 해방을 준비하셨다면 그해방의 성취도 이루시지 않겠는가? 모든 것이 준비되었을때, 그가 결실을 이루도록 힘을 주시지 않겠는가? 하나님은 인간과 생물들을 땅에 번성하게 하시는 분인데 그가 어찌 시온을 금하시겠는가? 하나님께서 교회가 널리 퍼지도록 축복받은 후손들에게 풍성한 결실을 맺게하지 아니하시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세상에 그리스도 교회가 세워지는 것에 대한 비유이었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이름을 얻은 자녀들이 있는 가정이 융성해지는 모습에 대한 비유였다. 성령이 강림하신 때에 수많은 무리가 순식간에 별수고없이도 회심하였다. 복음의 성공은 놀라운 것이었다. 성령께서 임하신 이같은 날에 삼천명의 영혼이 교회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와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4) 그들이 현재 당하고 있는 슬픔은 곧 충만한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10,11절). 교회의 친구들은 그를 위하여 그를 '사랑하며 함께 기뻐하는' 자들이다. 교회에 대하여 신실한 애정을 가진 자들은 그에 대하여 진실에서 우러나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격려를 받고있다. 다 그와 함께 기뻐하라. "거듭 말하노니 다 그와 함께 즐거워하라." 예루살렘은 즐거워하게될 것이다. 슬픔의 날은 이제 끝이 날것이다. "교회의 슬픔의 날에 그를 위하여 슬퍼하였던 너희는 같은 원리로 그기쁨의 날에 교회와 함께 즐거워해야할 것이라." 우리는 ‘젖을 빠는것 같이 그위로하는 품에서 만족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의 언약(특히 그언약의 약속들), 하나님의 규례들, 그리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온갖 기회들은 곧 그의 '품'이다. 그리고 교회는 바로 '그위로하는 품'을 찾는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기뻐해야 한다. 교회의 영광은 무엇이든지 우리의 영광과 기쁨이 되어야 한다. 특히 교회의 순결과 연합과 증대는 우리가 기뻐하고 영광으로 삼아야 한다.
(5) 그들에게 기뻐하라고 부르신 분이 기뻐할만한 일과 기쁜 마음을 주실 것이다(12-14절). 내가 그에게 평강을(즉, 모든 좋은 것)을...주리니. 끊임없이 흐르는 '강같이 주리라.' 복음은 이와같아서 그권능을 어디서 받든지 평화를 강같이 흐르게 하고 온갖 선한 것을 영혼에 공급하며 마치 강이 그통과하는 땅을 비옥하게 하듯, 영혼으로 많은 열매를 맺게한다. 또한 '열방의 영광'이 '넘치는 시내'같이 그들에게 올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만유중에서 영화롭게 되실 것이며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도 그것을 기뻐하여야할 것이다(14절). 여호와의 손은 그 종들에게 나타나겠고. 그는 동시에 원수에게 그의 진노를 알게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가 둘다 나타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그들로 즐거워하게 할뿐만 아니라 그들의 마음에 위로의 말씀을 주실 것이다. 그들의 땅은 자애로운 양육지가 될것이다. 너희가 옆에 안기며. 어린자녀들과 같이 그 팔아래 안길 것이다. 그리고 '그무릎에서 놀것이다.' 위임받은 목자들은 저들이 용기를 잃고 낙심하지 않도록 그렇게하여야 한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의 능력있는 위로자가 되실 것이다. 자식이 슬퍼하거나 병중에 있을때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같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로할 것이다. 지혜롭고 신중한 아버지가 하듯이 합리적인 변론으로뿐만이 아니라 자애로운 어머니처럼 부드러운 애정과 동정하는 마음으로 그렇게할 것이다. 그들 자신의 영혼은 이위로의 복된 효력을 느끼게될 것이다(13절). 이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사역을 성공함으로 그놀라운 만족감에서 성취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신다(요 16:22). 그때에 마르고 시들었던 '너희 뼈'가 젊은 청년의 기력을 회복하고 활기있게될 것이요, '연한 풀의 무성함같을' 것이다.

Ⅲ. 심판과 자비 66:15-24
이말씀은 하나님의 왕국에 대하여 대적하는 자들에게 어두운면을 지니는 반면에 그의 사랑스런 신실한 종복들에게는 밝은 면을 지닌다. 아마도 이것은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을 가리킨다고 할수 있다. 그들가운데 개혁되기를 거부하였던 자들, 그러므로 재난으로 멸망되어 마땅한 자들을 가리킨다(렘 24:9). 그외 다른 사람들은 저희의 유익을 위하여 바벨론으로 보냄을 당하였으며 정해진 시간이 이르면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의심할 여지없이 이예언을 좀더 나아가 그리스도께서 한번 오셨었고 또다시 오실 그심판을 말하는 것이다.
(1)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대항하는 모든 자들을 혼란속에 넣기위하여 나타나실 것이다. 때때로 그는 일시적인 심판으로 나타나실 것이다. 불신을 고집했던 유대인들은 그의 '불과 칼'에 의하여 멸절되었다. 그때 '여호와께서 모든 혈육에게 심판을 베푸셨다.' 그들을 멸절시킨 것은 그의 칼이었으며 그들은 '여호와께 살육당하였다'고 기록되었다. 우상숭배자들은 특히 진노의 날에 괴로움이 있을 것이다(17절). 아마도 바벨론에서 돌아온 자들가운데 어떤이들은 저희동산에 우상들을 두고 우상의 의식을 행하고자 할때 '스스로 거룩히 구별하며 스스로 정결케 하였던' 듯하다. 그들은 차례차례로, 본문에 기록된대로 '그가운데 있는 자를 따라', 아하드나 예하드같이 그들이 경배하던 목상뒤에서 '돼지고기와 가증한 물건과 쥐를', 혹은 그와 비슷한 다른 짐승들을 먹었다. 그러나 이예언은 하나님께서 세상과 육신에 몰두하는 죄인들에게 내리실 모든 심판들을 말하는 것일수도 있다. 그들은 '다함께 망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지, 그들이 어떤 계획으로 그일을 하는지 알고계시다.
(2) 그리스도는 은혜의 왕국을 세우는데 있어서 그에게 충실한 모든 자들 곧 영광의 왕국의 첫열매들의 위로와 기쁨을 위하여 나타나실 것이다. 그가 '열방과 열족을 모을'때가 올것이다. 그들은 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빛나는 그의 '영광을 볼것이다'(18절). 이것은 열방이 제자가 되며 그로인하여 방언의 은사가 주어졌을때 성취되었다. 교회는 그때까지 한나라에 국한되었었고 하나님은 오직 한언어로 예배되었었다.
1) 유대 민족가운데 일부는 하나님의 은혜로인하여 나머지 유대인들과 구별되며 구원의 표를 얻게될 것이다. "내가 그들중에 모으는 ‘징조'를 세울 것이며 그들중에는 내가 다르게하는 징조를 세울 자도 있으리라." 비록 그들이 부패하고 타락한 민족일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중 남은 자들을 구분하실 것이며 그들은 하나님께 성별되고 그를 위해 일하게될 것이다.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확실히 인정하신 표가 세워질 것이다(겔9:4). 그리스도의 양무리들은 징표를 지니고 있다.
2) 이와같이 스스로 구별된 이들은 복음을 전하도록 열방에 보내심을 받으며 모든 피조물들에게 전파하도록 보내심을 받을 것이다. 그들은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다시스와 뿔과 룻등 여러 열방에 보내워질 것이다. 여기에서 가리키는 곳이 어디인지는 불확실하다. '다시스’는 일반적으로 대양을 의미한다. 혹자는 그것을 길리기아의 다소로 해석한다. '뿔'은 앗수르의 왕들가운데 한사람의 이름이다. 아마도 그나라의 어떤 지역에 그이름을 가진 곳이 있었던 듯하다. '룻'은 활로 유명했던 호전적인 민족, 루디아를 의미하는 듯하다(렘46:9). '두발'을, 혹자는 이태리나 스페인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리고 '야완'은 그리스, 즉 이오네스로 여겨진다. '먼섬'들이란 야벳의 후손이 거주하는 곳으로(창10:5) 아마도 멀리 떨어져있는 섬들일 것이다. 유대에서만 흑암가운데 앉아있었다. 기쁜 소리를 듣지못했으며 즐거운 빛을 보지도 못하였다. 어떠한 사람이 저희 조물주의 이름을 듣지도 못하고 그의 영광을 보지도 못할만큼 그렇게 멀리 떨어져있어야 한다는 것은 가련한 일이다. 열방들에 보내심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심부름으로 그의 '영광을 열방에 전파하기'위하여 가는 것이다. 열방가운데 흩어질 유대인들은 계속하여 저희 민족에 관한 하나님의 섭리의 영광을 선포할 것이다. 열방 백성가운데 어떤이들은 유대인들의 옷자락을 붙들고 자기들에게 관심을 보여달라고 간청할 것이다.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하노라'(슥8:23).
3) 이로인하여 많은 자들이 회심할 것이다(20절). 그들이 너희 모든 형제를(개종자들은 형제로서 인정되고 환영되어야 하기 때문이다)...태워다가 여호와께 예물로 드릴 것이요. 어떤 자들은 말을 타고 올것이다. 이는 그들이 멀리서부터 오기 때문이다. 어떤이들은 수레를 타고 올것이다. 그리고 나이들고 병든 사람들과 어떤 아이들은 교자나 휘장쳐진 마차를 타고 올것이며 젊은 사람들은 발이 빠른 짐승이나 노새를 타고 올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예루살렘에 도착하기위하여 수고와 비용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이전에 예루살렘에 오던 목적과는 달리 예물을 드리는 자들로서, 혹은 자기 자신들을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기위하여 올것이다. 이것은 영적인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즉 그들은 하나님께 자신을 산제사로 드리는 것이다(롬12:1). 이스라엘 자손이 예물을 깨끗한 그릇에 담아 드림같이 그들은 드려질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거룩하게 되고 죄로부터 정화되어질 것이다. 저희 마음이 믿음으로 깨끗게 되었다는(행15:9) 것은 개심한 이방인을 일컫는 표현이다. 사도바울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에 이른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히12:22). 그말씀이 본문의 이구절을 설명해주며, 여기에 나오는 이행렬의 의미는 마치 그들이 수레와 교자를 타고오듯 조심스럽게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로 나아오게 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4) 복음의 사역자들이 교회에 세워질 것이다(21절). 거룩한 일을 담당하도록 하나님이 '그중에서 택하여 제사장과 레위인을' 삼을 것이다. 이제까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모두 유대인들가운데서, 그리고 한지파 중에서 나왔었다. 그러나 복음시대에는 하나님께서 개심한 이방인들로 사람들을 가르치게 하시며 율법아래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비밀을 받은 청지기가 되게 하신다. 그들은 목사와 교사(혹은 감독)들이 될것이며 말씀전파와 기도하는 일을 전담할 것이다. 그리고 식탁을 공궤할 집사가 될것이며 레위인들처럼 하나님의 전의 외부적인 소임을 맡을 것이다(빌1:1;행6:2-4). 사도들은 모두 유대인들이었으며 70명의 제자들도 그러하였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한 위대한 사도바울은 히브리인중의 히브리인이었다. 그러나 교회들이 이방에 심겨졌을때 각교회에서는 장로들을 택하여 관장하게 하였다(행14:23;딛1:5). 하나님께서는 '그중에서 택하리라'고 말씀하신다. 사역자들을 택하여 그들로 봉사할 자격을 구비케하고 봉사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하는 것은 그들에게 위임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본래 하나님의 일이다.
5) 이와같이 세워진 교회와 사역자들은 한세대에서 다른세대로 대대로 계승될 것이다(22절). 메시야의 왕국은 새로운 세상이 될것이다(65:17).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옛적의 특별한 언약은 지나가고 새언약이 세워졌으니 은혜의 언약이다(히8:13). 새로운 계명들이 하늘과 땅에 연관되어 주어지고 있으며, 하늘과 땅 모두에 관련된 새로운 약속들과 함께 신약을 이루고 있다. 그것은 영원히 변치않는 변화요, 새세계는 항상 새로울 것이다. 즉 복음의 세대는 끝까지 지속될 것이며 그세대는 그리스도를 섬길 것이며 그세대는 그리스도를 섬길 후손들로 지속되어질 것이다. '너희 자손과' 그들가운데 있는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한세대가 지나가면 또다른 세대가 올것이다. 그리고 음부의 권세가 비록 교회에 대항하여 싸울지라도 이기지 못할 것이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을 괴롭게하지 못할 것이다.
6) 하나님께 드리는 공적인 예배가 이같이 여호와께 예물로 드려진 모든 자들에 의해서 경건한 집회에서 드려질 것이다(23절). 이것은 구약의 시대에 적합한 표현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는 비록 의식법이 소멸되고 성전의 예배가 철폐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정규적으로 예배를 받으시리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이때까지는 오직 유대인들만이 하나님앞에 나아갔었으며 그들은 단지 일년에 세번만 참석하도록 규정되어 있었고 그것도 남자들에게만 한하여졌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혈육이, 유대인이나 이방인들이나, 남자들이나 여자들이나 '하나님앞에 경배할'것이다. 그의 존전앞에서, 비록 예루살렘에 있는 그의 성전에서는 아닐지라도 전세계에 퍼져있는 집회처에서 예배드릴 것이며, 그들에게 있어 그것은 유대인들의 장막과 같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가운데 자기 이름을 기록하실 것이다. 단지 두세 사람만 함께 모일지라도 그들가운데 계셔서 축복하실 것이다. 옛적의 성전과 같이 어떤 특정한 한장소가 더이상 필요하지 않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성전이시다. 모든 성도들은 그안에서 믿음으로 만난다. 그러나 예배를 확실하게 그리고 자주 드리기위하여 일정한 시간을 정하는 것이 적합하다.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신령한 교제를 하기위해서는 한상징이 있어야 한다. 주의 날이 매주 성수되고 주의 만찬이 매달 지켜지는 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월삭과 안식일이 지켜지게될 것이다.
7) 저희의 불경건을 고집함으로 멸망에 이르게된 자들을 생각해봄으로써 자기들에 대한 하나님의 탁월한 은총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더욱 커질 것이다(24절). 악인은 하나님께 대하여 '패역한 자'들이다. 그들은 그의 율법을 어겼을뿐만 아니라 그와 맺은 언약을 파기하였다. 이것은 특히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하고 믿지않은 유대인들을 의미하는 것일수도 있다. 그들의 비참한 처지가 전쟁터의 광경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곳은 살육당한 자의 시체로 뒤덮어져 있으며 그들은 '모든 혈육에게 가증함이 된다.' 아무도 그들가까이 오려고 하지 않는다. 이예언의 말씀은 로마인들에 의한 예루살렘과 유대의 패망때에 성취되었다. 그것은 또한 마찬가지로 믿지않는 유대인들에게 임할 영적심판을 가리키는 것일수 있다. 사도바울은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바 있다(롬11:8이하). 그리고 자신들이 저 꺼지지않는 불에서 끄집어내진 그슬린 나무임을 깨닫게 되는 것은 복된 자의 기쁨과 영광을 예증해줄 것이다.

# 핵심
66:1-4
이스라엘의 외식적 예배에 대한 책망의 말씀이다. 하나님을 향한 참된 사랑을 결여한채 불법을 일삼는 자들의 가증스런 악행으로인해 하나님은 그들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지 않으신다.

# 묵상
남자를 낳은 시온 ( 66:7 )
유다땅이 단번에 그의 포로를 차지하리라는 의미입니다. 포로귀환은 마치 진통의 시작과 해산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기적적인 출산에 속한 것입니다. 이는 포로귀환이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것처럼 하나님나라, 교회의 확장도 빠른속도로 이루어질 것임을 시사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연한 풀의 무성함같은 뼈 ( 66:14 )
고통으로 뼈가 마르는 것과는 정반대로 기쁨으로인해서 풀잎이 돋아나고 무성해지는 것처럼 뼈가 회복되리라는 뜻입니다. 뼈는 ‘민족’ 혹은 ‘남은 자’를 가리키는 말로, 여기서는 종말의 날까지 여호와께 대한 경외심을 잃지않는 경건한 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진노대신에 축복을 받게됩니다.
여호와의 심판 ( 66:15-16 )
본문은 악한 자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는 종말론적으로, 주님의 재림으로 말미암은 심판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때 심판의 도구는 불과 검이 될것입니다. 또 모든 혈육이 심판을 받게됩니다. 그러나 의인들은 주님에 의해 심판의 장소로부터 안전한 장소로 옮기워집니다(시31:20;살전4:16, 17).
징조 ( 66:19 )
징조는 표지(標識)로도 해석될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이방 민족들가운데서 하나님이 참된 신이심을 아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표지 곧 선교사로 만듦을 의미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모든 민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기위해 그의 전령을 땅끝까지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증인으로 삼아 땅끝까지 보내셨습니다(눅16:15).
여호와께 예물로 드릴 이스라엘의 형제 ( 66:20 )
주의 영광을 보고 시온에 살아남은 자들이 그 큰소식을 열방에 전하므로, 이소식을 들은 열방이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고국으로 호송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성산 예루살렘으로 금의환향하게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예물입니다. 마찬가지로 영적 이스라엘인 성도들역시 하나님이 흠향하실만한 가장 아름다운 예물이 되어야만 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될 사람 ( 66:21 )
열방이 예물로 바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후사이므로 하나님의 참자녀요, 하나님께 봉사할만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영적후사가 된 모든 사람들은 한분이신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열방에 하나님의 교훈을 알게하는 제사장이 될것입니다.
패역한 자들의 결과 ( 66:24 )
그들은 밖에 던지워져 어둠속에서 이를 가는 불충성한 종들이요, 좌편으로 갈라진 염소들입니다. 구원받은 자들은 새하늘과 새땅에서 영원히 새로운 삶을 살게되지만, 끝까지 죄악에서 떠나지않는 자들은 영원히 불타는 지옥에 던져져 영원히 고통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쭉정이는 모아 불에 던진다고 하셨고, 신랑을 맞을 준비를 하지못한 자에게 잔칫집의 문은 닫혀진다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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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이방인과 유대인 65:1-7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이구절의 의미가 무엇인지 말해준바 있다. 즉 복음의 선포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이 부름받고 유대인들이 거부되었다는 것이다(롬 10:20,21). 그리고 바울사도는 이예언을 유대인들에게 선포함에 있어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였다'는 것을 주목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자기 민족에 대한 큰모욕으로 여겼을 것이기 때문이다.
(1) 여기에서 멀리 떨어져있는 이방인들이 가까이 나아오게 되리라고 예언되고 있다(1절). 바울은 이구절을 이와같이 읽었다.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1) 이세상에서 하나님없이 오랫동안 지내왔던 자들이 이제 그를 찾게될 것이다. "나를 만드신 하나님이 어디계시냐"고 묻지 아니하던 자들이 그에 대하여 묻게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찾아지는 것을 참으로 기뻐하신다. 왜냐하면 죄인들이 회개하면 천국에 큰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2)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에 대하여 축복을 예비하실 것이다. 나는...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하나님과 이방인들의 세계사이의 이 복된 만남과 교제는 하나님편에서 먼저 시작하신 것이었다. 비록 그들과 교제를 시작한후에는 하나님께서 그를 구하는 자에게서 발견될지라도(잠 8:17) 첫번 교제에 있어서는 그를 찾지않은 자들에게서 그가 발견된다. 왜냐하면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고로 우리가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3) 하나님께서는 신앙을 고백해 본적이 없는 자들에게도 거룩한 계시를 주셨다.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자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그들은 유대인들이 오랜 세월동안 누려왔던 그대접을 받았다.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를 보라, 믿음의 눈을 가지고 나를 보라. 나를 의지하라. 그리하면 네가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셨다.
(2) 여기에서 오랫동안 하나님께 가까이 있어왔던 유대인들이 버려지고 멀리 떨어져 나간다는 것이 예언되고 있다(2절). 사도바울은 이말씀을 자기가 살았던 그시대의 유대인들에게 적용시키고 있다(롬 10:21). '이스라엘에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셨느니라.'
1)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을 거룩한 은혜로 인도하시고자 참으로 애쓰셨었다. 그는 그의 선지자들과 그의 아들, 그리고 그의 사도들을 통해서 그들에게 '종일 손을 벌리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변론하시고 그들을 권면하시고자 당신의 손을 그들에게 펴셨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을때 그의 양손은 마치 돌아오는 죄인들을 영접하시려는 것같이 퍼져서 앞으로 향하였다. 그는 은혜롭게 기다리셨다. 그리고 기다리는데 싫증을 내지 않으셨다. 제 11시, 즉 마지막 시간에 온 사람들까지도 거절하지 않으셨다.
2) 그러나 그들은 초청을 대수롭게 여기지않고 무시하였다. 그들은 혼인잔치에 초대되었으나 참석하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에 대한 하나님의 권고를 거절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자의 대로만 행하였다. 옳건 그르건 자기들의 마음먹은대로 행하고자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해주셨다. 그의 뜻하신바가 무엇인지, 그리고 작정하신바가 무엇인지 말씀해주셨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생각을 쫓아' 행하였다. 자기들이 최선이라고 생각한 바로 그대로 행하고자 하였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계속 그들이 그릇되었다고 여기신 점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슬프게 하였다. 그들은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다.' 마치 그들은 하나님을 저희의 적으로 삼고자 도모하는 듯하였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들과 그들의 '열조의 죄악'에 대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신 이유이었다(7절). 그들의 열조가 하나님의 진노를 가장 야기시켰던 죄악은 우상숭배이었다. 바로 이것이 그들로 포로생활을 하게한 죄이었다. 그리고 비록 그들이 포로생활에서 무사히 놓여났다고할지라도 그민족의 마지막 멸망이 이르렀을때 이는 다시금 그들에 대한 심판의 원인이 되었다. 그들 자신들이 다른 신을 섬기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아마도 이죄악은 포로된이래 오랜후까지 여전히 많이 남아있었을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방 여인들과 결혼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전을 버렸다. 그리고 '동산에서 제사하였다.' 그들 자신의 방식대로 그렇게 행하였던 것이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규례대로 행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제단을 버렸다. 그리고 '벽돌위에서 분향하였다.' 이제단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정해주신 구제단과 비교해볼때 저희 자신들이 고안해낸 보잘것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마술을 사용하거나 죽은 사람과 이야기를 하기도 하였다. 이일을 하기위하여 그들은 '무덤사이에 앉으며 은밀한 처소에서 지냈다. 그들은 음식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여겼다. 그리고 그것이 복음으로인하여 없어지기전에, 정한것과 부정한것 사이의 구분을 깨뜨렸다. 그들은 '돼지고기를 먹었다.' 그리고 본문에서 '가증한 물건'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것, 즉 급해진 고기로 된 고깃국물이나 고깃덩이리가 그들의 '그릇에 담겨'있었다. 그러한 것들이 음식을 만드는데 사용되었다. 금지된 고기가 '가증한 물건'이라고 불리워지며 그것에 관여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인하여 자기로 가증하게 되게한다'고 기록되어 있다(레 11:42,43). 본문의 이말씀은 아마도 모든 금해진 쾌락들을 비유적으로 나타내고 있다고 볼수 있겠다. 그러나 이와같이 감히 죄가까이 나아가려고 하는 자만심있는 자들은 죄의 심연에 떨어질 위험에 처해있는 것이다. 우리 구주께서 이땅에 거하시던 시대에 유대인들의 죄악은 교만과 위선이었다. 그리스도께 맞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죄가 몇번에 걸쳐서 책망되고 있다(5절). 그들은 말하기를 "너는 네게 속한 무리들과 함께 '네 자리에 섰고 내게 가까이 하지말라.' 네가 나를 더럽힐까 하노라. 나를 만지지말라. 나는 너보다 거룩함이니라."라고 하였다. 이런 자들은 내 코의 연기요. 이것은 이내 환하게 활활 불타오르면서 나는 연기가 아니라 젖은 나무를 태울때 나는 연기, 곧 '종일 타는 불'에서 나는 연기를 말한다. 그들에 대한 증거는 자명하다. 보라 이것이 내앞에 기록되었으니(6절). '열조의 죄악' 역시 그들에 대해 정죄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자신의 죄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어떠한 심판을 내리시더라도 마땅한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저희 열조의 죄악보다 오히려 승하였다. 이것을 그들은 시인하였다(스9:13). '너희의 죄악과 너희 열조의 죄악을 함께하리니', 그죄악들은 서로 가증되게 만들었다. 내가...그품에 보응하리라.

Ⅱ. 남을 백성의 구원 65:8-10
이말씀을 사도바울은 로마서 11:1-5절에서 설명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배척된 것에 대하여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라고 묻고는 "그럴수 없느니라"고 답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런즉 이와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기' 때문이다. 이예언은 선택된 남은 자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유대인들가운데 일부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지니도록 이끌림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교회로 나아오며 그리하여 구원받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구주께서는 이 택하신 백성을 위하여 유대인의 멸망의 날이 단축되리라고, 그리고 그파멸에 제동이 걸리리라고 말씀하셨다(마 24:22).
(1) 이것이 여기에서 한비유로 예증된다(8절). 포도나무가 마르고 시들어서 거기에 생기도 생명도 없는 것처럼 보일때 포도원지기는 그것을 뽑거나 잘라내고 싶어한다. 그렇지만 혹 포도송이에 조금이라도 즙이 있다면, 그것을 곁에서 지켜보던 이가 말리며 '그것을 상하지 말라. 거기 복이 있느니라'고 말한다. 그뿌리에는 생명이 있는 것이다.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단지 소수의 사람을 위하여 전도시들과 나라들을 보존하신다.
(2) 이 구원되어 남은 자들에 대해 설명되고 있다.
1)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다. 그들이 구원받는 것은 '자기 종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이다(8절). 그리고 그들은 '거기 거할 그의 종들'이다(9절). 하나님의 충실한 종들은 자기 세대에서 하나님을 섬긴다.
2) 그들은 하나님을 찾는 자들이다.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저희 필생의 기업으로 삼는다.
(3) 여기에는 그들을 위해 쌓아두던 하나님의 자비가 나오고 있다. 남은 자들은 저희의 고국땅에 다시 복되게 정착하게될 것이다. 곧 '야곱중에서 씨를 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믿음으로 복음교회에 연합한 야곱의 남은 자들을 상징한다. 그들은 '나의 산들'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다. 그것은 예루살렘성이 있고 성전이 세어져있는 거룩한 산이다. 그들은 저희 양떼를 칠 푸른초장을 소유할 것이다(10절). '사론'과 '아골 골짜기'가 다시 가축들로 가득차게될 것이다. 그들은 온땅에 대한 소유권을 회복할 것이다. 복음에서 꼴을 얻고(요 10:9) 아론 골짜기의 이스라엘 무리처럼(호 2:15) 거기에 눕는(시 23:2) 초장이자 골짜기이다.

Ⅲ. 죄에 대한 심판 65:11-16
경건한 자와 악한 자, 그리고 믿는 유대인들과 여전히 불신을 고집하는 유대인들의 서로 다른 상태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1)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구출된후 우상숭배를 고수하던 자들과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된후 불신앙을 고집하던 자들의 무서운 운명이 예고되고 있다.
1) 파국의 운명이 경고된다. "살륙을 당할 양과 마찬가지로 '내가 너희를 칼에 붙일 것인즉' 피할 길이 없으리라. 너희는 그아래 구푸리리라."(12절).
2) 그들을 칼에 붙이는 죄목이 기록되어 있다.
① 우상숭배는 옛날부터 있던 오래된 죄이었다(11절). "너희는 나의 백성으로서 나를 섬기지 않고 나 여호와를 버렸구나. 다른 신들을 섬기기위하여 나를 내던지고 너희 우상들에게 분향하는 산으로인하여 나의 성산을 잊었구나(7절). 그리하여 살아계신 유일하신 참하나님을 버렸구나." 그들은 이방인들이 섬기는 '갓에게 상을 베풀어놓으며' 그수를 이루 셀수 없는 '섞은 술을 가득히 부었다.' 왜냐하면 한 하나님으로도 너무 적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수십수백의 신으로도 만족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② 불신이 그후의 유대인들의 죄이었다(12절). 내가 불러도 너희가 대답지 아니하며. 이말씀은 2절 말씀과 같은 의미이며, 복음을 거부한 자들에게 적용된다. 우리 주 예수께서 친히 부르셨으나 ('예수께서 서서 외치셨다' 요한복음 7:37) 그들은 응답하려고 하지 않았다. 좋은 것을 택하려고 하지않는 사람들이 악한 것을 따른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2) 회개와 믿음에 이르는 자들의 복된 상태를 고려해보면 이같은 파국의 운명은 더욱 비참해진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의 축복과 그에게 맞서 대항하는 사람들의 비참한 상태가 서로 비교되고 있다(13-16절). 멸망한 자들은 하나님의 종들의 행복을 보고는 슬픔이 더욱 커질 것이다. 특히 저희 자신들의 잘못만 아니었다면 그들도 그축복을 나눌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할때 더더욱 그러하다. 그들의 상태의 차이가 두가지 면에서 나타난다.
1) 위로와 만족이라는 면 : 하나님의 종들은 좋은 것이 조금도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저희 마음을 세상에 두고있는 자들은 굶주리고 목마르며 항상 공허하며 언제나 갈망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떡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물리게 되며 만족시켜 주지를 못한다. 하나님의 종들은 '기뻐할 것이다.' 그들은 마음이 기쁨으로인해 노래할 것이다. 천국은 현재에 눈물로 씨를 뿌리는 모든 자들에게 있어 영원한 기쁨의 세상일 것이다. 그러나 다른한편으로 하나님을 버린 자들은 스스로 모든 참된 기쁨을 차단시킨 자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헛된 확신과 자기 자신의 의와 그것에 근거를 둔 소망을 인해 '수치를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2) 명예와 신망의 면(15,16절) : '의인을 기념할때에는 칭찬하거니와 악인의 이름은 썩으리라.' 우상숭배자들의 이름은 하나님의 '택한 자의 저줏거리가 될'것이다. 즉, 그들에게 경고가 될것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택한 자의 이름은 복이 될것이다. 내 종들은 다른 이름으로 칭하리라. 언약의 자녀들은 그리스도인이라 불리울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그이름 아래서 새로운 언약의 모든 약속들과 특권들이 확보될 것이다. 이 다른이름은 한민족 내지 나라에 국한되지 않을 터이었다. 그이름으로 사람들은 땅에서 곧 온세상에서 축복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나라들마다에 종들을 가지고 계시다. 그들은 '진리의 하나님'안에서 축복을 믿게될 것이다. 기도가 하나님을 영예롭게 할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할 충성이다. 우리는 그안에서 축복을 받아야 한다. 즉, 우리가 우리의 하나님으로 모신다면 우리는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을 소유한 셈이며 우리에게는 더이상 필요한 것이 없는 셈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세상 재물을 풍족히 소유한데서 복을 구한다(시 49:18;눅 12:19). 그러나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안에서 복을 구한다. 하나님께서 곧 그들에게 무엇이든지 충족히 주실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들은 '진리의 하나님', '아멘의 하나님'(이러한 의미이기도 하다)이신 그를 영화롭게 할것이다. 혹자는 이것을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한다. 모든 약속들은 그리스도안에서 '예와 아멘'이 되는 것이다(고후 1:20). 그들은 이 복된 변화의 주인되신, 곧 그들로하여금 이전의 곤경들을 잊게하신 그분을 영화롭게 할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현재의 위안으로 이전의 고통스런 기억들을 그들에게서 말끔히 제거하였다.

Ⅳ. 새예루살렘의 예고 65:17-25
이약속의 말씀은 유대인들이 포로생활로부터 귀향하여 저희 고국땅에 평화로이 정착하였을때, 그리하여 마치 새로운 세상에 온듯이 여겨졌을때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다. 그러나 그 완전한 성취는 복음의 교회에서 이루어졌다.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은혜와 위로가운데서 새하늘과 새땅을 보아야 한다.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것이 된것은 복음안에서이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들은 새로운 피조물이다(고후 5:17). 여기에 묘사된 것은 강력하고도 복된 변화이다(16절). 이전 환난이 잊어졌고. 그러나 여기에서 그것은 한단계 더나아간다. 이전의 세상은 잊어질 것이며 더이상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화해하사 새하늘을 주실때 피조물들 역시 우리와 화해하여 새땅을 주는 것이다.
(1) 그때에는 새로운 기쁨이 있는 것이다. 교회의 모든 벗들과 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기뻐할 것이다(18절).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 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즐거움을 창조하며 그백성으로 기쁨을 삼고. 교회는 즐거워할뿐만 아니라 즐거움의 대상이 되기도 할것이다. 교회의 번영은 하나님께 즐거움이 될것이다. 그는 자기 종들이 번영을 누리는 것을 기뻐하신다(19절).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왜냐하면 그들의 모든 고통가운데서 그분도 괴로워하시기 때문이다. 이기쁨은 약화되지 않을 것이다.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가운데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이전과 같이 슬프고 고통스런 상황은 되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모든 것은 하늘에서야 완전히 성취될 것이다. 거기에서는 모든 눈물이 사라질 것이다.
(2) 그때에는 새로운 삶이 있을 것이다(20절). 또한 칼이나 병으로인한 불시의 죽음은 더이상 없을 것이다(19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들은 지상에서의 삶이 아무리 짧다고 할지라도 그에 만족할 것이다. 심지어는 어린애조차 '백세에 죽는 자'로 헤아려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다시 일어나 완전한 수명을 누리게 될것이기 때문이며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노인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들의 의의열매로 수한을 채우리라고 약속되고 있다. 그들은 '늙어도 결심한 것이다.' 지혜롭고 선하고 유익을 끼치는 노인은 그의 수한을 채운 노인이라고 진실로 말할수 있다. 세상에 저의 마음을 둔 노인들은 결코 저희 수한을 채우지 못한다. 왜냐하면 불신자들은 수명이 제아무리 길다고 할지라도 저희 삶에 만족하지 못하여 행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죄인은 비록 백세를 산다고 할지라도 '저주받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긴수명은 단지 긴유예기간일 뿐이다. 땅에서의 우리의 삶이 길건 짧건 그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도의 삶을 사느냐, 죄인의 삶을 사느냐는 참으로 중대한 문제이다.
(3) 생의 기쁨을 새로이 누리게될 것이다. 이전에는 매우 불확실하고 불안정하였으나 이제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가옥을 건축하고 그것에 거하겠고 포도원을 재배하고 열매를 먹을 것이다'(21,22절). 이방인들이 침해하지 못할 것이며 이전에 때때로 하였던 것과 같이 그들을 내쫓지 못할 것이다. 나의 택한 자가 그손으로 일한 것을 길이 누릴 것임이여. 그것은 정직하게 얻은 것이며, 잘유지될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그손으로 일한 것'이다. 그들 스스로가 그것을 얻기위하여 수고하였으며 "게으름의 양식이나 거짓의 떡"을 먹지 않았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오래도록 즐기면서 산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의 선물이다. 그것이 여기에서 약속되고 있다. 내 백성의 수한이 나무의 수한과 같겠고. 즉 상수리나무의 수한과 같을 것이다(6:13). 그 상수리나무는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있다.' 그나무는 매년 겨울마다 헐벗을지라도 오랜 세월동안 살아있다. 이는 또한 "생명나무"의 수한과 같다고 해석할수도 있다(70인역에는 그렇게 되어있다).
(4) 그들을 대신하여 새로운 세대가 일어나 이같은 축복을 유업으로 받고 누리게될 것이다(23절).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왜냐하면 그들은 그손으로 일한 것을 길이 누릴뿐 아니라 그것을 그들 후대에 오는 자들에게 만족하게 남겨주게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위안이 되는 자녀들을 주실 것이다. 저희는 진리를 따라 행하는 자녀들을 보는 기쁨을 얻게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저희 자녀들이 평온한 세월을 만나게 하실 것이다.
(5) 그들과 하나님사이에 좋은 교제가 있을 것이다(24절). 그들이 부르기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하나님께서는 선하신 축복으로 그들의 기도에 응하실 것이다. 탕자의 아버지는 그가 돌아올때에 기쁘게 맞이하였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심이, 율법아래서 보다도 복음의 은혜안에서 훨씬더 잘나타난다.
(6) 그들과 이웃사이에 좋은 교제가 이루어질 것이다(25절).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은 설혹 이리들의 무리가운데 양과 같이 앉아있다 할지라도 다치지 아니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예전처럼 대적들의 세력을 깨뜨리지 아니하시지만, 그들의 마음을 돌리시며 은혜로 그들의 속성을 바꾸실 것이다. 제자들의 핍박자이었던 바울은(그는 베냐민 지파에 속했으므로 이리처럼 물어뜯었다; 창 49:27) 이 제자들에게 결합하여 그들의 한사람이 되었을때 '이리와 양이 함께 먹은' 것이 되는 셈이다. 사람들은 변화될 것이다. 사자는 더이상 먹이를 찾는 맹수가 되지않고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소가 그러하듯이 자기 주인을 알고 자기 주인이 주는 여물통을 알게될 것이다. 자기 자신을 부요케 하기위하여 옳건 그르건 강탈과 약탈을 일삼았던 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정직한 수고를 함으로써 살게 되었을때, 다시말해서 더이상 남의 것을 훔치지 아니하며 자기 손으로 좋은 수고를 할때, 이것이 성취되어지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다.' 사단은 사슬에 묶일 것이며 용은 얽어매일 것이다. 왜냐하면 다시 '뱀은 흙으로 식물을 삼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강한 대적은 성도들의 귀한 피를 탐욕스럽게 먹었다. 성도들은 사단의 선동으로인하여 핍박을 받아왔다. 그리고 죄인들의 고귀한 영혼도 게걸스레 먹었다. 죄인들은 사단의 선동으로 스스로 영원히 파멸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제 사단은 선고된 판결에 따라 흙을 먹도록 구속받게 되었다. '네가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창 3:14).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왕국에 대한 모든 대적들이 그의 발등상이 되기까지 시온의 왕으로서 다스리실 것이다.

# 핵심
65:1-7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패역한 길에서 돌이켜 회개하기를 기다리셨으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능욕하였으므로 이에 대해 보응하신다는 내용.
새하늘과 새땅(65:17)
옛하늘과 옛땅이 새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롭게 창조되는 하나님나라를 의미한다. 이 사상은 만유의 회복이라는 주제와 연관을 맺으며(행 3: 21), 벧후 3:13절과 계 21:1절에 다시 나타난다. 새하늘과 새땅의 창조는 죄로인해 더러워진 세상에 대한 하나님주권의 완전한 회복을 의미한다. 신약적인 견지에서의 새하늘과 새땅은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은 자들이 살게될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이다(계 21:1-5).

# 묵상
코의 연기요, 종일타는 불 ( 65:5 )
우상숭배자들의 종교의식은 여호와의 진노에서 일어나는 연기(시18:8)요, 종일타는 불(신32:22; 렘17:4)과 같다는 뜻입니다. 코의 연기와 불은 진노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상숭배자들은 스스로가 다른 사람에 비해 거룩하여 사람들이 범접할수 없는 존재라고 착각하며, 그우상에 의해서 은총을 받고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 있어서는 다만 순식간에 멸망당할 진노의 대상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 ( 65:6 )
하나님께서는 선악간에 심판하십니다. 유다인들의 죄가 하나님앞에 기록되어졌으니,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를 갚아주시되 풍성히 갚아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성도들도 마지막때 선악간의 심판을 받게됩니다(롬14:10).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약2:12).
갓과 므니 ( 65:11 )
이들은 운명의 신입니다. 갓은 시리아의 신으로 바알가드(수13:17)나 믹달가드(수15:37) 같은 지명에 그흔적이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므니는 이슬람교 이전에 아랍인들이 숭배하던 세 주신(主神)중에 하나였습니다. 이와같이 포로기이후에도 우상숭배는 백성들에게 만연했던 죄악중 하나였던 것입니다.
택한 자의 저줏거리가 될 이름 ( 65:15 )
죄지은 자들의 더러운 이름은 저주의 대상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임을 과신하여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통해서만 영광받으신다는 착각에 빠졌고, 결국에는 그분께 영광을 돌리지도 않았습니다(호7:10).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남은 자, 끝까지 그의 이름을 지킨 그의 참된 종에게는 새이름 곧 저주가 아닌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진리의 하나님 ( 65:16 )
본문에서 진리의 하나님은 “엘로헤 아멘”으로 “아멘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곧 참하나님이라는 의미인 동시에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불변의 하나님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와 약속하신 모든 것은 다 지키십니다.
기억되거나 생각나지 않는 이전 것 ( 65:17 )
하나님께서 새하늘과 새땅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전 것은 죄에 물든 옛성품이며,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복역의 때가 지난 자들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며 또한 사람과 온 만물을 새롭게하심으로 새사람이 된 우리는 옛것을 기억할수 없게될 것입니다.
수명이 늘어나는 새예루살렘 ( 65:20 )
‘백세에 죽은 자가 아이겠고’라는 말은 사람의 수명이 다시 길어짐을 뜻하는 말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장수가 축복의 결과로 간주되었습니다. 따라서 천수를 다 누리지 못하고 죽는 것을 저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시 사람의 수명이 나무의 수한과 같이 길어지는 복이 임하므로 백세가 되어도 아이요, 소년이라고 불릴 것입니다(22절).
부르기전에 응답하시는 여호와 ( 65:24 )
이스라엘의 가장 큰슬픔은 바로 하나님의 응답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아무리 호소해도 하나님께서 잠잠하시다고 한탄했습니다. 그런데 구원의 때가 이른후에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기도하기도전에 미리 아시고 구할 것을 이루어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렇기때문에 그날이 되면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것이므로 기도가 필요없고, 필요한 모든 것을 즉시 채워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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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주의 강림에 대한 간청 64:1-5
여기에서 다음 사실들을 살펴볼수 있다.
(1) 하나님께서 지금 그들을 위하여 놀라웁게 나타나시기를 청하고 있다(1,2절).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위하여 어떤 특별한 일을 하실때에는 '빛을 발하사' 스스로를 강하게 나타내 보이신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기'를 기도하신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재림, 곧 주께서 환호와 함께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그때에 적용될수 있다. 그들은 '주의 앞에서 산들이 진동하기를' 바라고 있다. 주의 진노의 불이 바위산을 녹이듯이 대적들을 사르시며 용광로에 있는 금속과 같이 그들을 녹이시기를 바란다. 불이 섶을 사르며(2절). 교회를 사랑하셔서 영광스러운 개혁을 하도록 모든 것을 들끓게 하시리라는 의미이다. 불이 물을 끓임같게 하사. 그들은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잘드러내고 '주의 이름을 알게'하기를 바랐다. 그의 친구들뿐만 아니라 그의 대적들까지 주의 이름을 알고 주의 앞에서 두려워 떨기를 원하였다. 만일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가 달려들어가 안전을 구하는 요새가 되지않는다면 그때에는 우리를 대항하는 요새가 된다. 그것은 우리가 달려들어가 안전을 도모할수 없는 우리의 범위밖에 있는 강력한 요새일 것이다.
(2) 하나님께서 예전처럼 그의 백성을 위하여 놀라웁게 나타나시기를 청하고 있다.
1) 그들은 주께서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셨을때 행하셨던 일을 들어 간청한다(3절). 그때 하나님께서는 애굽인들에게 역병을 내리심으로 그들의 '생각밖에 두려운 일을 행하셨다.' 그때에 그는 두려운 모습으로 시내산에 강림하셔서 산들로 주의 앞에서 진동하고 양처럼 뛰게 하셨다(시 114:4). 혹자는 이말씀을 산헤립의 강한 군대의 패퇴에 연관시킨다. 이군대는 바위와 산을 녹일수 있을만큼 놀랄만한 신적인 힘을 나타내 보였었다.
2)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안전과 행복을 위하여 예비하셨던 일을 들어 간청한다.
① 이 예비하심은 매우 풍성하다(4절). 사람들은 '자기를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이런 일을 행한 신을' 들은적도 없고 본적도 없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두신 은혜 곧 인생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이자 선하심이다(시 31:19). 그 대부분이 이전시대에는 감추어져 있었다. 그들은 그것을 알지못했었다. 왜냐하면 측량할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이 하나님안에 감추어져 있고 지혜롭고 총명한 사람들에게 숨겨져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에 그것은 복음에 의하여 드러나게 되었다. 사도바울도 그렇게 적용하고 있다(고전 2:9). 왜냐하면 바로 그다음 절에서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태초이래로 듣지못했던 것을 마지막날이 되기전에 들어야 했다. 그것은 인간의 지각으로는 완전히 이해될수 없다. 그것은 영적인 것이며 우리의 기대를 훨씬 능가할 것이다. 믿는 자들의 장차의 축복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는 현재의 평강조차도 모든 표현이 미치지 못한다(빌 4:7).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의 역사뿐 아니라 그의 경이로운 은혜의 역사에서도, 그리고 그가 행하신 위대한 일들에서뿐 아니라 그의 자비로운 일들에서까지도 "그와 같은 다른 신이 없다"는 사실을 추론해 내야만 한다.
② 그것은 매우 준비가 잘되어 있다(5절). 주께서 기쁘게 의를 행하는 자와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를 선대하시거늘. 즉 저희를 위해 예비해둔 자비로 저희에게 응하신다(4절).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은혜로운 영혼사이에는 진정한 교제가 있다. 우리는 우리의 의무를 이행하기를 기뻐해야 하며 '기쁘게 의를 행해야' 한다. 스스로 하나님을 기뻐하고 우리의 일을 즐거워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허락하신 우정과 교제와 친밀성을 암시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선한 축복으로 그들에게 응하실 것이며 '기쁘게 의를 행하는' 자들을 선대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를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은혜롭게 기다리실 것이다. 그는 돌아오는 탕자를 맞이하는 아버지와 같이 회개한 자기 백성을 용서함으로써 만나신다(눅 15:20). 그는 백성들이 아직 구하고 있는동안 기도하는 백성에게 평화로운 응답으로 응하신다(55:24).
3)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불변함과 그의 약속의 확고함을 들어 청원한다. 우리가 범죄하므로 주께서 진노하셨사오며. "우리는 주의 진노와 표징아래 있나이다. 그러나 주의 길, 곧 우리가 주를 기억하는 자비의 길에서 '이 현상이 이미 오랬사오니', 그길에서 주는 항상 같으시니이다. 그리고 이언약의 동일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구원될 것을 바라나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원한 계약이 우리를 구원하기 때문이니이다."

Ⅱ. 죄의 고백 64:6-12
여기에는 갈대아인들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파멸된 것에 대한 이사야의 애곡과 그파멸을 초래한 이스라엘의 죄가 언급되고 있다.
(1) 하나님의 백성은 곤경에 처하여 저희의 죄를 고백하고 슬퍼한다. 이제 그들은 죄로인한 하나님의 질책아래 있으며 오로지 하나님의 자비이외에는 아무것도 의뢰할 것이 없다.
1) 그들가운데 전반적인 타락이 만연하여 있었다(6절).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즉 거처에서 쫓김당한 문둥병걸린 사람과 같이 되었다.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같으며. "우리중 가장 선한 자도 그러하거니와 우리도 모두 타락하고 부패하였도다. 우리의 가장 선한행위도 역시 마찬가지로다. 일반적 도의가 타락했을뿐 아니라 예배를 행함에 있어서도 전반적으로 그릇되었도다."
2) 그들은 전반적으로 신앙에 대하여 냉담하였다(7절). 기도는 어느면에서 소홀히 여겨졌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아무도 주께 우리를 고쳐주시도록 은혜를 구하지 않나이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의 죄로인하여 초래된 심판을 주시도록 자비를 구하는 자도 없나이다." 만일 여기저기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었다면 그것은 기도에 대해 아주 무관심하였다는 것이다.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붙잡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을 믿음으로 붙잡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씨름하는 상대편을 붙잡듯이 그를 붙잡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붙잡았을때 그것은 마치 선원이 선창에 닻줄을 매어 해변을 끌어당기는 듯하지만 실상은 자기가 해병으로 끌려가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을 우리 마음으로 당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그에게 내어놓는 것이다. 기도로써 하나님을 붙잡으려고 하는 자는 스스로 그렇게하도록 유발되어야 한다. 우리안에 있는 모든 것을 의무를 이행하는 일에 사용해야 하며 우리의 생각을 흔들리지 않게 고정시키고 우리의 애정이 불타오르도록 해야 한다.
(2) 그들은 저희가 당하는 고난이 저희 자신의 죄의 대가이자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임을 시인한다.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6절). "우리는 시들고 우리의 미쁨을 잃어버렸을뿐 아니라 떨어져서 구르게 되었나이다(이렇게도 읽을수 있다). 가을철의 낙엽과도 같이 우리의 신앙고백은 메말랐으며 점차 시들과 활기없게 되었나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고 우리를 재촉하여 포로가 되게 하였나이다. 곧 가을에 바람이 불면 굴러가 시들고 마르는 잎사귀와 같이 되었나이다"(시 1:3,4).
(3) 그들은 하나님께서 저희의 하나님되심을 이유로 들어 겸손하게 그에게 청원한다(8절).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어리석고 분별없는 자들이며, 대적들로인하여 비천하고 경멸받게 되었나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 우리가 회개함으로 주께 돌아가나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아버지이시다. 그는 그들을 존재하게 하셨으며 한민족을 이루게 하셨고 자신의 기쁘신 뜻대로 그들을 이루셨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빚으신 주께서 새로이 우리를 지으시기를 원하나이다. 비록 우리가 완성되지 않았고 스스로 훼파되었을지라도 우리를 새로이 지어 주시옵소서.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으나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 그러므로 우리를 버리지 마옵소서"(시 138:8). 우리는 주의 백성이다.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8:19). 우리는 '주의 것이오니 우리를 구원하소서'(시 119:94).
(4)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진노를 돌이키시고 저희 죄를 사하시기를 끈덕지게 간청한다(9절). 그들은 하나님께서 저희와 화해하시기를, 그리하여 저희의 고난이 계속되든지 사라지든지간에 평안을 누릴수 있기를 기도한다. 여호와여 과히 분노하지 마옵시며. "아버지의 인자하심과 긍휼히 여기심으로 노를 누그러뜨리시옵소서."
(5) 그들은 비참한 지경에 처해있다.
1) 그들의 집들이 황폐하게 되었다(10절). 유다 성읍들은 갈대아인들에 의해서 파괴되었으며 거민들은 포로로 끌려갔다. 주의 거룩한 성읍들이 광야가 되었으며. 유다의 성읍들은 '거룩한 성읍'이라 일컬어졌었다. 그백성들은 하나님께 있어 제사장들의 나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성읍들의 황폐함을 애통해하고 있다. 시온이 광야가 되었으며. "다윗의 성은 폐허가 되었으며 아름답던 '예루살렘이 황폐하여' 온세상의 조롱거리와 비웃음거리가 되었나이다. 거룩한 성읍이 이제 쓰레기더미가 되었나이다."
2) 하나님의 집도 폐허가 되었다(11절). 그들이 무엇보다도 애통해하는 점은 저희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전이 불에 탔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보기에는 성전의 거룩함이 성전의 가장 큰아름다움이었다. 그렇기때문에 성전에 대해 가해진 모독은 다른 모든 황폐하게 된것가운데 가장 큰슬픔이었다. 그곳은 제사와 노래로 저희 '열조가 주를 찬송하던' 곳이었다. 그토록 오랜 세월동안 저희나라의 영광이었던 것이 재가 되어버렸다는 것은 얼마나 가련한 일인가. 그들의 모든 '즐거워하던 곳이 다 황무하였다.' 이모든 것들은 그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데 사용하던 것들이었다. 성전 기구와 재단, 탁자뿐만 아니라 그들이 기쁨으로 고수하던 안식일과 모든 신앙의 절기들까지 다 황무하게 되었다.
(6) 그들이 현재의 황폐함에 대하여 겸손히 하나님과 변론함으로써 끝맺고 있다(12절). 여호와여 일이 이러하거늘 주께서 오히려 스스로 억제하시리이까. 해를 입었을때 우리는 잠잠하다. 이는 보복이 우리에게 있지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명예를 손상당하셨을때에 그가 그것을 보수하시리라고 마땅히 기대될수 있다. 그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셔야할지 명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기도를 드린다(시 83:1). "하나님이여 침묵치 마소서. 주의 대적들에 대한 징벌을 말하소서. 주의 백성들에 대한 위로와 구원을 말하소서." 주께서...우리로 심한 괴로움을 받게 하시리이까.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족히 여기지 아니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그의 백성은 저희의 고난이 극도에 달하지도 아니할 것이며 영원하지도 아니하리라는 것을 믿을수 있다. 저희의 고난은 잠시 비추는 빛인 것이다.

# 핵심
64:1-4
하나님의 강림으로 악인에게 심판이 임하기를 간절히 호소하는 기도이다.

# 묵상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신 주님 ( 64:7 )
얼굴을 가리운다는 것은 자비를 베풀지않는다는 뜻입니다. 즉 백성의 죄로인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떠나셨으므로, 그들에게는 더이상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며 희망이 사라졌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굽어 살피시고 그분의 얼굴을 우리에게 향하실때, 우리가 비록 죄인이지만 그분의 은혜안에서 구원받을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용서를 구하는 근거 ( 64:8 )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자요, 창조주라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친히 만드신 민족이며, 또 그들의 열조를 위해 출애굽 사건을 통하여 구속하신 사실에 호소했던 것입니다. 우리역시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 되심과 창조주되심에 인류전체의 희망을 두어야합니다. 우리의 의로써는 도저히 하나님께 용서를 구할수 없으나, 그분은 우리의 아바 아버지이시므로 우리가 죄에서 돌이키면 돌아온 자식과도 같이 받아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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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메시야의 임재와 구속 63:1-6
이스라엘의 대적들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로 말미암아 영광스러운 승리가 얻어진다. 이승리는 갈대아인들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훼파되어졌을때 승리감에 도취하였고(시 137:7), 온힘을 다하여 대적을 피해 에돔으로 도망쳐오는 유대인들을 멸절시켰던(옵 1:12,13) 에돔 족속에 대한 승리이다. 바벨론이 멸망될때 그들도 셈을 치루게된 것이다. 에돔에 대한 이승리는 이스라엘의 대적이 되었던 다른 나라들에 대해 얻은 유사한 승리들의 한 예일 뿐이다. 그리고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의 영적인 대적들에 대해 획득한 승리를 말하고 있다. 우리는 '피뿌린 옷'을 입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는 자를 보게된다(계 19:13). 이승리에 대한 표현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볼수 있다.
(1) 정복자에 대하여 찬미하는 질문이 던져지고 있다(1,2절). 이것은 교회 혹은 교회의 이름으로 하는 선지자의 질문이다. 그는 피흘린 전장에서 승리하여 돌아오는 한 강한 영웅을 보고, 담대하게 두가지 질문을 던지고 있다.
1) 그정복자는 누구인가. 그는 에돔에서 돌아오는 정복자를 바라보고 있다. 그정복자는 군인으로서 피와 얼룩으로 더럽혀진 영광스러운 의복을 입고 있다. 그는 그정복자가 겁에 질리거나 지쳐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큰능력으로 걷고' 있음을 본다. "이 자가 누구뇨?"라는 이질문은 아마도 "당신은 우리편인가, 아니면 우리 대적의 편인가?"라는 뜻이라고 하겠다.
2) 또다른 질문은 '어찌하여 네 의복이 붉으뇨'라는 것이다. "이수고와 위험의 표적들을 남기고 있음을 보건대 너는 얼마나 어려운 일을 행하였는가?" 이와같은 위엄을 지닌 분이 '포도즙틀을 밟는' 그러한 비천한 노예의 일을 수행하였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2) 그정복자가 하는 감탄할만한 대답이 의를 말하는 자요 구원하기에 능한 자니라.

1) 그는 구세주이시며 의를 말하는 자이시다. 그렇기때문에 그의 모든 말은 선을 낳을 것이다. 그는 '구원하기에 능한 자'이시다. 그러므로 약속하신 구원을 성취하실수 있다.
2) 그는 자기가 어찌하여 이같이 핏빛으로 나타났는지를 말한다(3절). 내가 홀로 포도즙틀을 밟았는데.
① 그는 오로지 그자신의 힘으로 순전하게 승리를 쟁취하신다(3절). 그러나 구원을 받게된 그의 백성들은 연약하고 무력하다. 그들은 낙심가운데 있으며 불안해하고 어떤 일을 도모할 마음도 없다(5절). 내가 본즉 도와주는 자도 없고 붙들어주는 자도 없으므로. 압제자들에게 대항하여 고레스와 연합할 용기를 가진 자가 하나도 없었다. 내 팔이 나를 구원하며 내 분이 나를 붙들었음이라. 피조물의 힘이나 권능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자신의 팔, 곧 만군의 주 여호와의 신에 의하여 구원이 이르렀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다른 조력자들이 엎드러질때라도 도와주실수 있다. 바로 그때야말로 그가 도우시는 때인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영적인 대적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에 완전하게 적용된다. 그리스도께서는 혼자 싸우심으로 승리를 얻으셨던 것이다. 그는 홀로 포도즙틀을 밟으셨으며 혼자 '십자가로 정사와 권세자'에게 승리하셨다(골 2:15). 그가 흑암 권세와 싸우러 가셨을때, 그의 제자들은 모두 그를 버리고 도망쳤었다.
② 그는 순전히 그자신의 열의로 이전투에 참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압제받는 유대인들을 위하여 구원을 행하셨다. 이는 하나님께서 압제하는 바벨론 사람들에게 노하셨기 때문이며, 바벨론 사람들의 우상숭배와 교만과 잔인성, 그리고 그들이 그의 백성에게 가한 위해에 대해 노하셨기 때문이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과 인류의 행복을 위한 거룩한 열망과 그 둘다에 대하여 행해지는 사단의 대담한 기도에 대한 거룩한 분개로, 우리의 구속사업을 이루셨다. 그는 그의 대적과 자기 백성의 대적들을 치시려는 열망을 지니고 있었다. 내 원수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4절). 그는 자기 백성과 구원에 참여하도록 예정된 모든 자들에 대하여 열정을 갖고 계셨다. 내 구속할 해가 왔으나. 그해는 그들을 구속하기로 정해진 해이다. 그는 이백성들에 대하여 참으로 큰기쁨을 가지고 말한다. 그들은 그의 구속한 자들이다. 그들은 그의 소유이며 그에게 소중한 자들이다. 비록 그들의 구속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그는 그들을 구속한 자라고 부른다. 마치 이미 구원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그구원이 확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③ 그는 그들 모두로부터 완전한 승리를 쟁취하실 것이다. 많은 일이 이미 벌어졌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 '홍의를 입고' 나타나시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적그리스도 세력이 파멸할 당시에는 굉장한 유혈이 있다는 것을 읽게된다(계 14:20;19:13). 그렇지만 예언의 말투로 미루어봐 이부분이 영적으로 이해될수 있을진대 본문의 말씀도 의심할 여지없이 그러할 것이다.

Ⅱ.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감사 63:7-14
본문에서 선지자는 그의 교회에 대한 지금까지의 하나님의 처사를 인지하며 감사하고 있다. 이장의 마지막 끝부분과 다음장에서 선지자는 성벽위에 있는 파수꾼으로써, 현재 비참한 상태에 처해있는 교회에 대해 자비를 베푸시기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1)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내내 베푸신 선하심에 대한 일반적인 감사가 나온다(7절). 선지자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말한다. 원문에서 선지자가 하나님의 자비과 긍휼을 복수형으로 말할정도로 하나님의 자비의 샘들은 그렇게 풍성하다. 선지자는 그의 '찬송을 말한다'. 즉 그의 긍휼에 대한 감사의 고백이다. 또는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선하심에 대해 말한다. 우리의 개인적인 그리고 가족적인 범위에 있어서 생명과 경건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이 향유한 자비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이 누린 자비에 대해서도 하나님을 찬미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선을 행하시는 분이시다. 이는 그가 선하시기 때문이다. 그가 우리에게 베푸신 것이 무엇인지 그근원을 추적해 보라. 그것은 우리의 공로를 따라서가 아니라 그의 '긍휼을 따라, 그많은 자비를 따라서' 온것이다.
(2) 이스라엘이 한민족을 이루게된 이후로 하나님께서 베푸신 이스라엘에 대한 자비로운 조처들이 나오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에게 인도하여 내셨을때, 그리고 언약을 맺으셨을때 이같이 말씀하셨었다.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요 거짓을 행치 아니하는 자녀라. 그들은 저희와 언약을 맺은 하나님을 모르는체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그들을 애굽의 속박으로부터 구원하는 '그들의 구원자가 되셨으니' 그후에도 매번 그들의 구원자가 되셨다. 그로하여금 그들을 위하여 구원을 행하게 한 원리는 '그사랑과 그긍휼'에 있었다. 이것이 본문에서 기이하게 표현되고 있다.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이렇게까지 그는 그들을 동정하시며 그들에게 가해진 해를 마치 자기 자신에게 행해진 것으로 간주하신다. 그들의 부르짖음은 그의 마음을 움직인다(출 3:7). 그는 그들이 고통받는 것을 마치 자기가 고통받는 것같이 여기신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나님께서는 자의로 고통받게 하시지 아니하신다(애 3:33). 만일 그들이 스스로 겸비케된다면 그는 그들의 환난에 동참하실 것이다. 자애로운 부모들이 병든 자녀들에게 하는바와 마찬가지이다. 원문의 이말씀은 다음과 같이 읽을수도 있다. "그들의 모든 환난에는 고통이 없었다." 비록 그들이 큰환난에 처해있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유익하도록 변경되었다. 따라서 그고통은 대단히 경감되고 자비와 균형을 이루게 되었기때문에 그들은 참으로 놀랍게 유지하였으며 끝까지 잘견디어냈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아무런 고통도 없었다. 성도들의 환난은 고통이 아니라 치료약이다. 성도들은 환난을 빛이라고, 곧 잠시동안만 비추는 빛이라고 일컬을수 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사는 자들에게 이러한 환난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자기앞의 사자로 그들을 구원하시고(9절). 하늘에서 가장 높은 천사, 심지어 하나님의 존전에 있는 천사라고 할지라도 이 심부름을 행하도록 보내심을 받기에는 너무 크다고 여겨지지 않았다. 소자의 천사들도 마찬가지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는 자들이라고 말해지고 있다(마 18:10). 그렇지만 이말씀은 그보다도 예수 그리스도, 영원하신 말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던 바로 그천사(출 23:20,21)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스라엘은 그의 음성을 따라야 한다. 그는 언약의 사자이며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신이다(말 3:1). 그는 하나님앞의 사자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을 표현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은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빛난다. 영원한 구원을 이루실 그분은 먼저 현세적인 구원을 이루셨다. 그는 단지 그들을 저희 속박에서 구원하셨을뿐만 아니라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다.' 그들이 열방들과 행한 전쟁에서도 그는 그들의 편에 서셨었다. 비록 그들이 투정을 부릴지라도 그는 그들의 소행을 참으셨다(행 13:18). 그러나 '그들은 반역하여 주의 성신을 근심케하였다.' 그들은 믿지못하고 불평하였던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그의 자녀들의 배은망덕한 반역은 그의 성신을 근심하게 하였다. 그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정당하게 자신의 보호를 철회하셨다. 참으로 오랫동안 그들의 친구이었던 하나님께서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다.' 광야에서, 그리고 후에는 가나안에서 차례차례로 심판을 내리셨다. 죄는 하나님을 적으로 만들었으며 사랑과 자비이셨던 그를 진노케하였다. 죄인들은 자의로 친구인 그를 버렸다. 이말씀은 특히 우상숭배와 다른 죄들로인하여 바벨론에서 포로생활하는 중에 그들에게 임한 저 재난들을 가리키고 있다. 그때에 그는 '옛적 날을 추억'하였다.
1) 이말씀은 백성의 추억이나 하나님의 추억으로 이해될수 있다.
① 먼저 백성의 추억으로 해석할수 있다. 그때에 이스라엘 '백성이(한사람으로 지칭되어져서) 옛적 날을 추억하여' 물었다. "우리 열조가 우리에게 말한 모든 기이한 일들이 어디에 있는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가 어디계시뇨? 그가 우리를 바벨론에서 이끌어 내실수 있지 아니한가? 엘리야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디계시뇨? 우리 열조들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디계시뇨?" 그들의 열조들은 진노를 유발하는 백성들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였었다. 만일 그들이 그에게로 돌아온다면 왜 그를 발견하지 못하겠는가? 그들은 저희의 포로생활에서 다시 되돌아가기 위한 기도에서 그것을 하나님께 대한 청원으로 이용한다(51:9,10).
② 한편 하나님의 추억으로 해석할수도 있다. 그는 친히 아브라함과 맺었던 자신의 언약, 그옛적 날들을 기억하셨다(레 26:42). "지금보다 더가치없고 벌을 받아 마땅한 저희 열조를 위하여서도 나타났던 내가 어찌하여 지금 너희들에게는 나타나지 않겠는가?" 그는 이렇게 말씀하셨을 법하다. "나는 이전에 그들을 구원하였었도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금 스스로 고난을 자초하였도다(잠 19:19). 그러므로 나는 그들을 더이상 구원하지 않을 것이라"(삿 10:13). 그렇지만 하나님의 자비는 이논쟁을 다른 방향으로 돌려놓는다. "나는 이전에 그들을 구원하였었느니라. 그러므로 이제도 구원할 것이라."
2) 이말씀은 하나님께 대한 백성들의 청원으로 해석하든 하나님 자신의 말씀으로 해석하든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자기 백성에게 행하신 일, 특히 홍해를 건너 그들을 인도해내신 일을 상기시켜 주고있다. 그는 '모세의 오른손'을 통하여 그들을 인도해내셨다. 그리고 이적을 행하는 지팡이가 그의 손에 있었다. 그들을 먹인 자가 모세가 아니었듯이 그들을 인도한 이도 모세가 아니었다(요 6:32). 그것은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로서 하나님께서는 그 양무리들의 소유주이셨다. 모세는 오로지 그의 손안에 있는 목자였다. 수고와 인내로 단련되었고, 또한 그의 장인 이드로로부터 양을 지키는 일에 훈련을 잘받았기 때문에 양을 돌보기에 적합한 목자이었다. 여기에서 그는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인 그리스도에 대한 한 예표이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성신을 두심으로' '여호와의 신이' 그들가운데 있었다. 그리고 그는 섭리로뿐만 아니라 은혜로 그들을 위하여 행하셨다. 그는 그들을 홍해를 통하여 안전하게 인도해내셨다. 그는 '그들앞에서 물로 갈라지게 하셨다'(12절). 그렇게하여 그들에게 길을 만들어 주었을뿐만 아니라 양쪽으로 벽을 세워 보호해 주었다. 그들을 깊음으로 인도하시되 말이 광야에서 행함과 같이 넘어지지 않게하신(13절).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길을 만들어주신다면 그는 평탄하고 반듯한 길을 만들어주실 것이다. 그는 그들을 안전하게 쉴곳으로 인도하셨다. 여호와의 신이 그들로(조심스럽게 주의하여)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축같이 편히 쉬게 하셨도다. 광야로 나아갈때 그들은 매번 안식처를 제공받았었다(14절). 그리고 마침내는 가나안 땅에서 안식하게 되었다. 여호와의 신이 약속에 따라 그들에게 안식을 제공하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의 팔로, 즉 용맹하고 힘센 팔로 그일을 행하셨다.

Ⅲ. 하나님께 대한 간청 63:15-19
다음장 끝부분까지 계속되어지는 이기도는 애정에 넘치면서도 끈질기게 간청하는 기도이다. 이시기는 포로생활 시기로 측정되어진다. 그들에게는 약속이 있었듯이 기도도 있었다. 그것은 곤경의 때를 이겨내도록 그들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었다. 몇몇 훌륭한 성경해석가들은 이기도가 더욱 나아가 하나님께로부터 마침내 배척받고 로마인들에게 멸망한 유대인들의 하소연을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1) 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청원이다. 하늘에서 굽어 살피시며...보옵소서(15절). 주의 거룩하고 영화로운 처소에서 보옵소서. 하나님의 거룩함은 곧 그의 영광이다. 하늘은 그의 거처이며 그의 영광의 보좌이다(17절). 돌아오시옵소서. "우리를 향한 주의 길을 변경하시옵고 자비로 돌아오소서. 그리고 우리로하여금 주의 은혜로우신 존재와 더불어 있게하소서." 하나님의 백성은 그가 그들을 떠나시는 것외에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그가 그들에게 돌아오시는 것외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2) 그들이 하나님께 하는 하소연이다.
1) 그들은 하나님께서 저희를 버려두시며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시키지 아니하신다고 불평한다(17절). 이는 기이한 하소연이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우리로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강퍅케하사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 혹자는 이말을 불경건한 타락한 자들의 말로 생각한다. 선지자들이 그들의 잘못된 길을 질책하였을때에 그들은 뻔뻔스럽게도 자기들의 죄를 하나님께 전가하며 하나님께서 그렇게 유발하셨다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오히려 이것을 저희 백성의 불신앙과 회개치않는 강퍅함을 한탄하는 자의 말로 보는편이 더타당할 것이다. 저희를 사악하게 만든 이가 하나님이라고 기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그것을 하소연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주의 길에서 떠난' 것을 인정하였다. 저희 '마음이 강퍅해져 주를 경외하지 않게'되었음을 시인하였다. 이것이 그들의 탈선의 원인이었다. 주를 경외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진정한 예배로부터 떠났다는 것을 의미할수 있다. 그들이 여기에서 큰불행과 무거운 짐처럼 불평하고 있는 일은 하나님께서 저희를 죄가운데 버려두시며 주의 길을 떠나도록 허용하시고 그의 은혜를 정당하게 회수하심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강퍅하게하여 주를 경외하지 않게하셨다는 것이다. 그들이 "어찌하여 이같이 행하셨나이까?"라고 물을때, 그것은 그에게 잘못을 추궁하는 것이 아니라 혹심한 심판을 한탄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셨으며 그들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다(10절). 이것은 정당한 판결에 의해서였다. 곤경과 환난은 많은 사람들로 하나님을 떠나게 만들었으며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대하여 편견을 갖게하였다. 그들의 환난은 그들의 시험, 곧 그들가운데 많은 자들에게 있어 극복하기 매우 어려운 시험이었다.
2) 그들은 자기들이 대적들에게 버려진바 되었다고 호소한다(18절). 우리의 대적이 주의 성소를 유린하였사오니. 그들은 대적들이 저희 자신의 집과 성읍을 짓밟았다고 하소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소를 유린한 것에 대하여 호소하였다. 왜냐하면 이로인하여 곧 하나님께서 모욕을 당하셨으며 그들이 가장 귀히 여기던 위안이 되는 것들이 약탈당했기 때문이다.
(3) 자비와 구원을 간청하는 기도가 이어진다.
1)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보여주시곤 하시던 자비로운 긍휼을 간청하였다(15절). 기도에 있어 가장 설득력있는 논증은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취하는 것들이다. 무한히 지혜롭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열성이 식어질리 없으며 전능하신 하나님의 힘이 약해질리 없다. 그렇게도 번번히 은혜로우신 하나님으로 기억되었었는데 이제 그것이 잊혀졌겠는가? "주의 간곡한 자비와 긍휼이 진노하심으로 이제 그쳤나이까?" 그런 일은 결코 있을수 없다.
2)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아버지되심을 이유로 내세운다(16절). "주의 지극한 자비는 그치지 않나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버지로서의 지극한 자비이기 때문이니이다." 무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선하시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의 아버지되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죽으면 '그아들이 존귀할지라도 그가 알지못한다'(욥 14:21).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우리 육신의 아버지들이 영원한 사랑으로 일컬어질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영원한 생명이 아니다. 불멸의 아버지, 항상 우리를 알고계시며 결코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있지 않는 아버지는 오로지 하나님뿐이시다). "그러므로 '상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나이다. 그이름에 의해서 우리는 주를 알고 인정하게 되리이다. 우리는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이 우리를 후손으로 인정하지 않을정도로 타락하였고 변절되었나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아버지되시는 여호와께로 이제 달려가나이다."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 이스마엘을 버렸으며 야곱은 그의 아들 르우벤의 상속권을 박탈하였으며 시므온과 레위를 저주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는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다'(호 11:9).
3)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주인이셨음을 이유로 청원하였다. "우리는 주의 종들이오니 우리가 할수 있는 섬기는 일에 대한 권한을 주께서 가지고 계시니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방의 왕이나 이방 신들을 섬겨서는 아니됨을 알고 있사오니 주의 종들을 위하사 돌아오시옵소서." "우리는 '주의 산업인 지파들'이니이다. 주의 종일뿐 아니라 주의 소작인이온데 이같이 능욕받도록 주께서는 내버려 두시겠나이까?"
4) 그들은 약속의 땅의 즐거움과 성소의 특권을 잠시동안 밖에 향유하지 못했음을 하소연하였다(18절). 주의 거룩한 백성이 땅을 차지한지 오래지 아니하여서. 아브라함으로부터 다윗에 이르기까지가 단지 열네 대요, 다윗으로부터 바벨론 포로생활까지가 단지 열네 대에 불과하였다(마 1:17). 가나안땅을 영원한 기업이 되게한다는 약속과 비교해볼때 그것은 잠깐에 지나지 않았다(창 17:8).
5) 그들은 저희의 땅을 소유한 자들이 하나님을 알지못하는 이방인들임을 이유로 내세워 호소하였다. "주께서는 결코 그들을 다스리지 않으셨으며 그들은 주께 복종하지도 않았었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자들이 하나님과 관계있는 자들을 짓밟도록 내버려두시겠나이까?"

# 핵심
63:1-6
하나님의 원수들에 대한 심판예언이다. 이심판은 그리스도 재림의 날에 완성될 것이다.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63:16)
옛언약하에서 하나님과 그백성의 관계가 부자관계로 정립된 경우는 많지않다. 그들은 대부분 하나님을 창조주나 언약의 주라는 관점에서 이해했으며, 아버지라는 관점으로 이해했던 적은 드물었던 것이다. 하지만 새언약하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이해하는 개념이 확고해졌다(마 6:9).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 말미암아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직접 부를수 있게되었고(롬 8:15), 하나님은 자녀들의 간구를 들어주시는 자상하신 아버지로 묘사된다(마 7:11).

# 묵상
붉은 의복 ( 63:2, 3 )
의복이 붉게 되었다는 말은 옷에 피가 묻었음을 의미하며, 이는 그가 격렬한 전투를 치렀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포도즙틀은 곧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주의 종은 백성들의 죄악을 위해 사단의 세력과 홀로 무서운 싸움을 치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들을 구속하시기위해 십자가위에서 선혈을 흘리셨던 것입니다. 이렇게해서 주님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붉은 의복은 구속의 은총을 나타내고 있는 메시야의 성의입니다.
이스라엘의 적이 되신 하나님 ( 63:10 )
그이유는 이스라엘이 주의 성신을 근심케하는 죄악을 범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불순종함으로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총과 자비를 모독했습니다. 이처럼 거룩함을 모독당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구원자에서 대적으로 돌아섰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해서는 안되겠습니다(엡4:30).
주는 우리 아버지 ( 63:16 )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예임을 자랑했습니다(마3:9). 그러나 아브라함과 야곱은 어디까지나 인간이므로 전적으로 신뢰할수는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만이 그들의 아버지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그들을 은총으로 구해내실수 있는 이스라엘 민족의 살아계신 진정한 아버지이십니다(말2:10). 그렇기때문에 선지자는 조상들의 도움을 바라지않고 오로지 하나님의 능하신 구원만을 간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여호와께 있으니 그분께 구하는 자는 승리하며 풍족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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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교회의 번성 62:1-5
(1) 선지자는 교회를 위하여 무엇을 할것인가. 선지자는 앞일을 내다보는 선견자인 동시에 대변자이다. 그는 '잠잠하지 아니하며 쉬지아니할 것이다.'
1) 선지자의 결심은 무엇인가. 잠잠하지 아니하며. 그는 말씀을 선포하기를 계속할 것이며 기도하기를 계속할 것이다.
2) 이러한 결심의 원리는 무엇인가. 시온을 위하여...예루살렘을 위하여. 즉 선지자 자신의 어떤 사적인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를 위해서이다. 이는 그가 시온에 대해 애정과 관심을 갖고있기 때문이며 시온이 항상 그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시온이며 그의 예루살렘이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께 소중하기때문에 그에게도 소중하다.
3) 그는 이일을 앞장에서 주어진 교회의 의와 구원에 대한 약속이 성취되어지기까지 계속하기로 결심한다. 그의 예언은 이런 것들에 대하여 계속 말할 것이며 시대마다 남은 자가 있어 기도를 계속할 것이다. 그때에 교회의 '구원과 의'는 '빛같이, 횃불같이' 나타날 것이며 그것은 눈뿐만 아니라 발등 상에도 빛이 될것이다. 그리고 이전에는 어둠속에, 죽음의 그늘에 앉아있는 자들의 길에 빛이 될것이다.
(2)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위하여 무슨 일을 하실 것인가.
1) 교회는 크게 찬미받게될 것이다. 교회의 구원의 의와 찬양과 영광의 의가 나타날때에 그것을 '열방이 볼것이다.' "열왕이 다 그것을 볼것이요, 너의 의의 영광을 사모하게 되리라"(2절).
2) 교회는 진정으로 찬미받을 만하게 될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영광의 원천이시며 그로부터 교회의 영광이 나오는 것이다. 너는...새이름으로 일컬음이 될것이며. 그리고 네 주위에 있는 자들이 너에 대하여 새로운 견해를 갖게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두이름을 주실 것이다.
① 그는 교회를 그의 면류관이라 일컬으실 것이다(3절).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면류관...이 될것이라. 그의 머리의 면류관(면류관을 쓰는 자에게는 면류관이 지닌 실제적인 영예와 권세가 더해지지만)이 아니라 그의 손에 있는 면류관이다. 즉, 그에게 더해지는 영광과 아름다움으로 간주된다. "너는 네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 선하신 손을 통하여 영광의 면류관이 되며 왕관이 될것이라."
②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자신의 배우자로 부르실 것이다(4,5절). 교회가 이전에 처해있던 외로운 처지를 생각해볼때 이것은 훨씬 큰영광이 된다. 교회는 '버리운 자'라 칭함받았었으며 포로생활동안 '황무지'라 칭해졌었다. 마치 수치스럽게 이혼당한 여인과 같았으며 위로받지 못하는 과부와 같았다. 그것이 바로 복음이 전파되기전의 신앙상태이었다. 수치스러운 이 두가지 칭함대신에 교회는 '나의 기쁨이 그에게 있다'는 의미인 '헵시바'로 불리워질 것이다. 이것은 아내에게 적합한 이름이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자신의 교회가운데서 역사하사 교회가 그의 기쁨이 되게 하셨다. 그리하여 교회는 정화되었으며 개혁되었고 그에게로 돌아오게 되었다. 교회는 또한 '뿔라'라고 일컬어질 것이다. 이것은 '결혼한 여자'라는 의미로서 이전에 교회가 황무지라고 칭함받았던 것과 대조를 이룬다. 네 땅이 결혼한바가 될것임이라. 교회의 자녀들은 저희의 딸과 진실하게 맺어질 것이다.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즉 "그들이 너와 함께 살며 너를 기뻐할 것이라." 바벨론에 있었을때 그들은 그땅과 결합한 것처럼 여겨졌었다(렘 29:5-7). 그러나 이제 그들은 다시 저희 고토와 결혼할 것이다.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같이' 그러할 것이다. 그땅의 하나님은 자신의 교회를 기뻐하실 것이다.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같이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Ⅱ. 하나님의 격려와 약속 62:6-9
예루살렘에 대하여 다음 두가지 사항이 본문에 약속되고 있다.
(1) 선한 설교와 선한 기도가 풍성하리라고 약속되고 있다(6,7절). 다음과 같은 섭리가 준비되고 있다.
1) 사역자들은 파수꾼으로서의 저희의 의무를 다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저희 '성벽위에 파수꾼을 세우고 그들로 종일종야에 잠잠치 않게 하셨다.' 그들은 때를 만나든지 못만나든지 죄인들에게 경고를 줄 모든 기회를 포착해야 한다. 그리고 배역한 혹은 비겁한 침묵으로 결코 그리스도의 일을 배신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은혜의 보좌에서 결코 침묵을 지켜서는 안된다. 오로지 기도하며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2) 백성들은 저희 의무를 다할 것이다. 그들은 저희를 위하여 파수꾼들이 기도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서는 아니되며 스스로를 위하여 자신들이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기도하는 백성들이어야 하며 기도함에 있어서 서로 영혼이 교통해야 한다.
(2) 그들의 양식은 저희 대적들의 식량이 되었었다. 여기에는 이중의 슬픔이 있었다. 즉, 그들은 저희의 생명을 지속하기위한 필수적인 식물이 부족하였고 그들의 대적들은 빼앗은 그양식으로 강해졌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저희 원수들에게 저희 양식을 주리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그들이 저희의 풍부를 남용한 것에 대한 징벌이었다. 그들이 수고하여 얻은 포도주를 이방인들이 자신들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마셨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회복할 크고도 충만한 만족을 보게된다(9절). 오직 추수한 자가 그것을 먹고 나 여호와를 찬송할 것이요.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주의하며 근면하게 거두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마음껏 기쁘게 먹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얻은 풍성함으로 그를 섬기며 경건하고 자비로운 일에 그것을 사용해야 한다. '여호와의 성소뜰에서' 그것을 먹고 마셔야 한다. 거기에서 제단과 제사장과 가난한 자 모두가 저희 몫을 가져야 한다. 여호와께서 그 오른손, 그능력의 팔로 맹세하시되. 그는 이일들을 자기 백성을 위하여 행하리라고 하셨다. 소망을 하나님의 약속에 둔 자들에게 있어 그가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줄을 확신하는' 것은 커다란 만족을 준다(롬 4:21).

Ⅲ. 큰구원에 대한 약속 62:10-12
앞의 구절들과 마찬가지로 이말씀은 유대인들의 바벨론에서의 해방을 가리키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실 위대한 구원, 그리고 그를 통한 복음의 은혜와 자유의 선포를 암시한다.
(1) 이구원을 위해 길이 만들어질 것이다(10절). 바벨론의 성문은 활짝 열려질 것이며 바벨론으로부터 이스라엘 땅으로 가는 길이 예비될 것이다. 걸어야할 도로들이 잘 준비될 것이다. 진흙투성이의 진창길은 메워질 것이며 울퉁불퉁하고 바위투성이의 길의 돌들은 한데 모아질 것이다.
(2) 이구원은 반포될 것이다(11,12절). 포로들이 자유로이 해방되리라고 선포될 것이다. 시온을 위로하기 위하여 시온에서 '보라, 네 구원이 임하느니라'고 말해지고 있다(즉, 구원을 가져다줄 너의 구주가 임하시고 있다). 그에 따라서 그들은 '거룩한 백성' 내지 '여호와의 구속하신 자'라 일컬어질 것이다. 보응이 그앞에 있느니라. 보응이 그들가운데 그들에 대하여 이루어질 것이며 그들은 거룩한 백성이라 칭하여질 것이다. 그리고 우상숭배를 향하여 이끌리던 마음은 오로지 하나님께만 전념하게될 것이다. 그리고 '상급이 그에게 있을 것이다.' 그들을 위하여 행하여진 구속은 그들을 '여호와의 구속하신 자'라 칭함받게할 것이다. 예루살렘은 그때에 '찾은바된 자요 버리지 아니한 성읍'이라 일컬어질 것이다. 일찍이 그랬던 것과 같이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찾을 것이며, 방문할 것이다. 예루살렘이 '거룩한 성'이라 일컬어질때, 그때에 그것은 '찾은바된 자'라 칭함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거룩함은 존경하는 마음을 낳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세상끝날까지 선포되어진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언급하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것은 즉시 교회에 선포되었고 모든 나라에 반향되고 있다. 보라 네 구원이 임하느니라. 그리스도는 구세주이실뿐만 아니라 구원 그자체이시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도'라 부르심을 입을 것이며(고전 1:2), '거룩한 백성'이라 일컬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호와의 구속하신 자'라 칭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 핵심
62:1-12
예루살렘이 여호와의 영광과 의로 가득할 날에 관한 묘사이다.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62:6)
하나님이 우리의 이웃과 사회, 민족에 대해 관심을 가지시도록 기도하는 자를 가리킨다. 제사장적 사명을 지닌 성도의 간구는 하나님의 긍휼을 불러일으키고 부패한 사회를 정화시키는 능력이 있다. 예컨대 아브라함의 간구로인해 하나님은 불의한 소돔성에도 구원을 베푸시려는 관심을 가지셨고, 그결과 롯과 그의 가정을 구해주셨다(창 19:12-23).

# 묵상
시온의 의미 ( 62:1 )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말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시온은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곳입니다. 시온으로서의 성도는 그자신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임을 알고 스스로를 거룩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또한 시온은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나라, 교회 등의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시온으로서의 성도는 모든 삶의 기준을 주님께 두고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통해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시73:25, 26).
헵시바와 뿔라 ( 62:4 )
구원받은 자들은 옛이름을 버리고 새이름을 갖게되는데 옛이름이 ‘버리운 자’, ‘황무지’라면 새이름은 헵시바 곧 ‘나의 기쁨이 그녀안에 있다’, 뿔라 곧 ‘결혼한 여자’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신랑이 신부를 보고 기뻐함같이 새이스라엘을 기뻐하신다는 의미를 담고있으며,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가 수립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새언약을 맺어 새로운 관계에 들어간 새사람입니다.
예비해야할 백성의 길 ( 62:10 )
이는 원래 예루살렘에서 살고있는 사람들에게 앞으로 돌아올 포로들을 위해서 길을 닦고 돌을 제거하라는 말씀입니다. 즉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제거하라는 의미입니다. 이와같이 먼저 믿은 사람들은 믿지않는 자들이 주님께 돌아오도록 복음을 선포할뿐 아니라, 의와 사랑을 행함으로써 그들이 주님께 돌아오는 길을 닦고 예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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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그리스도의 약속 61:1-3
성경의 최상의 해설자께서 이구절들에 대한 가장 좋은 해석을 우리에게 주셨다. 나사렛이 있는 회당에서 이말씀을 읽으신(아마도 이말씀은 그날의 가르침이었을 것이다) 우리 주 예수 자신이 그말씀을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적용시켜 말씀하시기를 '이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하셨다(눅 4:17,18,21). 이사야 선지자가 바벨론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자유를 선포하도록 지시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자인 그리스도께서도 잃어버린바된 세계에 보다 기쁜 대사면의 해를 선포하셨다.
(1) 그는 이일을 행하시기에 적합하며 참으로 자격이 있는 분이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였으니(1절). 선지자들은 때에 알맞게 그들을 감동시키며 그들이 무엇을 말할지 가르쳐주는 동시에 그들로하여금 그것을 말하게끔 인도하는 하나님의 성령을 받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한량없이 그위에 머무르시는 성령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선지자적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하였을때에 비둘기와 같은 성령이 그에게 임하였다(마 3:16). 그는 동일한 기쁜 소식, 복음을 선포하도록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그들에게 이성령을 주셨다. 그는 그들에게 이사명을 위임하시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2) 그리스도께서는 이일에 임명되고 위임받으신 분이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1절). 그렇기때문에 구속자는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칭하여졌다. 왜냐하면 그는 즐거움의 기름으로 부음받으셨으며 그리하여 그의 동류보다 승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나를 보내셨노라."
(3) 그는 무슨 일을 위하여 이같이 기름부음 받고 임명되셨는가.
1) 그는 선포자가 되어야했으며 선지자의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그는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복음)을 전해야' 했다. 회개한 자, 겸손한 자, 그리고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그소식을 선포해야 했으며 그들에게 있어서 구속자의 소식은 실로 좋은 소식일 것이다.
2) 그는 치유자가 되어야 했다. 그는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도록' 보내심을 받았다. 죄로인하여 마음이 상한 자들, 죄를 깨닫고 진노를 두려워함으로 말미암아 진실로 겸비케된 자들은 저희를 편안케 만들고 저희의 두려움을 가라앉혀줄 것들을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얻는다.
3) 그는 구원자가 되어야 했다. 그는 선포하는 선지자로서, 치유하는 제사장으로서 보내심받았음과 동시에 또한 다음과 같은 포고문을 공표하는 왕으로서 보내심받았다.
① 그의 친구들에 대한 화평의 선포이다. 그는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고레스가 포로된 유대인들에게 했던 것과 같이).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할' 것이다. 죄로인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묶여지고, 죄에 팔려진바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빚에 대하여 그자신이 하나님의 공의에 만족할만한 대속물이 되셨으며 그의 대속은 받아들여졌음을 우리에게 알려주신다. 그리하여 만일 우리가 그것을 간청하고 우리 자신과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그에게 양도한다면,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용서를 청구할수 있으며 거기에는 더이상 우리를 정죄하는 아무것도 없으리라는 사실을 알려주신다. 우리가 우리안에 있는 죄의 지배를 받아 사단의 세력가운데 놓여있었던 반면에,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사단을 정복하셨으며 그리하여 죄의 멍에를 꺾고 우리 목에 매인 띠를 스스로 풀어버릴수 있을만큼 충분한 은혜를 우리를 위해 예비하셨음을 알려주신다. 그아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유롭게 하실' 준비가 되어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선포이다. 그것은 속죄일을 선포하는 사면의 나팔소리와 같은 것이다(레 25:9,40). 그것에 빗대어 본문에서는 '여호와의 은혜의 해'라고 말해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날에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가 선포되기 때문이다. 그날은 우리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가져다주기때문에 '은혜의 해'이다. 그리고 저희 자신의 영혼의 능력과 필요성을 아는 자들에게 있어 그날은 받아들이지 않을수 없는 날이다.
② 그의 대적들에 대한 전쟁의 선포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선포하신다.
첫째로, 죄와 사단, 죽음과 지옥, 그리고 어둠의 모든 권세들이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멸하여질 것이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위에서 이것들에게 승리하셨다.
둘째로, 이 복된 제안을 거부하는 자들에게 전쟁이 선포되어질 것이다.
4) 그는 선포자요, 치유자요, 구속자임과 아울러 위로자가 되어야 한다. 그는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도록' 보내심을 받았다. 이는 슬퍼하는 가운데 위로를 받으려고, 세상을 찾지않고 그를 찾는 자들을 위해서이다. 시온에서 나는 축복이 영적인 축복인 것과 마찬가지로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들은 거룩한 애도자들이다. 그들은 은혜의 보좌앞으로 저희의 슬픔을 가져오는 자들이다. 그들에게 그리스도는 그의 복음으로 약속하신 위로를 그의 성령으로 주실 것이다(3절). 그의 위로는 그들을 슬픔을 견디게 할뿐만 아니라 또한 그슬픔을 찬미로 바뀌게할 것이다. 그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주실 것이다.
① '화관을 주어 그재를 대신'하게할 것이다. 원문의 이구절에는 멋진 대구법이 쓰여있다. 즉 그는 그들에게 pheer(아름다움-화관)을 주어 epher(재)를 대신하게 하실 것이다. 그는 그들의 슬픔을 마치 글자를 바꾸는 것만큼이나 빠르고도 쉽게 기쁨으로 변하게 하실 것이다. 그가 말하나 곧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②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사랑스럽지 못하게 만드는 '슬픔을 대신하여' 얼굴을 빛나게 하는 '희락의 기름'을 주실 것이다.
③ 추수감사절에 입는 것과 같은 아름다운 '찬송의 옷으로' 근심과 어두움과 고통의 영을 대신하게 하실 것이다. 은밀하게 슬퍼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쁨이 내리워질 것이다.
5) 그는 심는 자가 되어야 했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농장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일은 곧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의 심으신바' 하나님의 성전뜰에서 번성하는 살아있는 나무들로서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것이다. 또한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비추시는 그의 은총과 그의 백성안에서 빛나는 그의 은혜로부터 기회를 얻어 그를 찬양할수 있게되며 그는 성도들에게서 영원토록 영광을 받으시게 된다.

Ⅱ. 그리스도 교회의 영광 61:4-9
여기에서 포로생활에서 나온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약속은 은혜를 통하여 영적인 노예신분으로부터 구원을 얻은 복음의 교회들에게 확대 적용된다.
(1) 그들의 집이 다시 재건되리라고 약속되고 있다(4절). 그들의 성읍들은 폐허가운데서 다시 세워질 것이다. 세상에 기독교를 세우는 일은 자연종교의 부패를 보수하는 것이며 오랜세대에 걸쳐 인류의 비난의 대상이었던 경건과 정직의 파멸을 다시 일으키는 것이다. 성화되지 않은 영혼은 부서져 훼파된 성읍과 같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과 은혜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그영혼은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거민이 되기에 적합하게 되었다.
(2) 저희를 압제하는 자들을 위하여 일하는 종이었던 자들이 이제는 저희의 일을 대신 해줄 종을 소유하게될 것이다. 외인은 서서 너희 양떼를 칠것이요 이방 사람은 너희 농부와 포도원지기가 될것이나(5절).
(3) 그들은 해방될 것이며 영광스러운 일에 참여하게 될것이다(6절). "이방 사람들이 너희 양떼를 치는동안에 너희는 성소의 임무를 행하게 되리라. 너희는 노예가 되는 대신에 지극히 높고도 거룩한 소명을 받아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얻을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자유케하신 그들을 일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입게' 하사 그를 '섬기게 하신다'(눅 1:74,75;시 116:16).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완전한 자유이다. 그리고 복음 교회는 '왕같은 제사장'이다(벧전 2:9).
(4) 회심한 이방인들의 재물과 명예가 교회의 이익과 신만에 기여하게될 것이다(6절). 외인이었던 자들이 성도들과 같은 동료 시민들의 것이 될것이다.
1) 그들은 영예롭게 저희앞에 제공된 '열방의 재물을 먹을' 것이다. 즉, 그것들이 제단에 예물로서 바쳐지게될 것이다.
2) 그들은 '영광을 얻어 자랑할 것이다.' 회심한 이방인들이 회심전에 소유했던 영예들은 모두 그들이 스스로 합류한 교회의 명성이 될것이다. 개심후에 얻을 그들의 영광 즉 거룩한 열심, 오래참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복된 변화 등도 하나님의 영광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5) 그들은 풍성한 위로를 얻을 것이다(7절). 유대인들은 귀향후에 이 특혜를 누리게 되었었다. 그들은 새로운 세상에 있었으며 저희가 누리는 자유의 가치가 얼마나 큰지 알게 되었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를 허락해주신 사람들은 더 큰기쁨을 누릴 것이다. 특히 하나님의 양자된 그들의 육신이 부활하는 특권을 허락받았을때에 그기쁨은 더할나위가 없는 것이다.
1) 그들은 '분깃을 인하여 즐거워할 것이다.' 저희의 성전이 그러하듯이 비록 저희 집들이 전보다 훨씬 보잘것없게 되었을지라도 그들은 저희 자신의 '고토에' 즉 거룩한 땅 임마누엘의 땅에 있게될 것이며 그곳에서 즐거워할 것이다.
2) 포로생활이 지속되었던 것보다도 훨씬더 오래도록 '영영한 기쁨'이 지속될 것이다. 우리는 이약속의 성취를 믿는 자들이 하나님안에서 갖는 영적인 기쁨과 천국에서 가지게 되리라고 바라는 영원한 기쁨을 보아야 한다.
3) 이위로는 그들이 포로생활하였던 땅에서 받았던 모든 능욕과 고통에 대해 배로 보상해줄 것이다. 너희가 수치대신에(영예를) 배나 얻으며...고토에서 (부를) 배나 얻고. 그에 대해 하나님의 축복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정받았을뿐 아니라 그의 '장자'로서 인정될 것이다(출 4:22). 그리하여 두배의 분깃을 얻을 권한이 주어질 것이다. 그들의 포로생활이 나무도 비참하였던 까닭에 자신들이 '그 모든 죄를 인하여 배나 받았느니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40:2) 또한 저희의 귀향의 기쁨도 '수치대신에 배나 얻었다'고 말할만큼 그렇게 클것이다. 전자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온전함에 적용되어진다.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하여 두배나 받으시게 되었다. 그리고 후자는 천국의 기쁨의 온전함에 적용된다. 거기에서 우리는 모든 봉사와 고난에 대하여 배나 기쁨을 얻게될 것이다. 욥의 경우가 이것을 예증해준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셨다.'
(6)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언약을 맺은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8절). 대저 나 여호와는...성실히 그들에게 갚아주고. 하나님께서는 섭리에 따라 그들의 일들을 최선의 것이 되도록 명하실 것이다. 이약속과 앞의 약속에 대한 이유로서 바로 앞부분에서 '나 여호와는 공의를 사랑한다'는 말씀이 나오고 있다. 그는 공의가 사람들사이에서, 이웃과 이웃들간에, 그리고 치리자와 치리받는 자들간에 행해지는 것을 기뻐하신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불의를 미워하신다. 만일 사람들이 공의를 행하지 않는다면 그는 고통을 당하는 자들을 고쳐주시고 악을 행하는 자들을 징벌하심으로써 스스로 공의를 행하시기를 기뻐하신다. 의식적인 예배가 도덕적으로 계명을 어긴 것을 결코 보상할수 없을뿐 아니라 또한 '번제를 위한 것'이라는 말이나 "고르반 즉 하나님께 대한 예물"이라는 말로 어떤 사람의 약탈을 정당화시킬수 없다는 것은 진리이다.
(7)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후손에게도 축복하실 것이다(9절). 그들의 후손(여호와께 복받은 자들의 자녀 혹은 교회의 자손)이 '대대에 주를 전할 것이다'(시 2:30).
1) '그자손은 열방중에' 알려질 것이며 특히 모든 사람들이, 그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임을 알아보게될 그형제애로 말미암아 스스로 구별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존귀케 만드실 것이며 그시대의 축복이 되게하시고 그의 영광의 도구로 삼으실 것이다.
2) 하나님께서 이로인해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을 보는 모든 사람들이 그들가운데 풍성하게 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을 보는 자들이 '그들은 여호와께 복받은 자손이라 인정하며' 지금도 복받고 있음을 인정하게될 것이기 때문이다.

Ⅲ. 교회의 의와 찬송 61:10-11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거룩한 기쁨으로 즐거워하도록 가르침 받는다.
(1) 이 선한 일이 시작될때 교회는 '구원의 옷'과 '의의 옷'으로 입혀질 것이다(10절). "이일에 대하여 내가 여호와로인하여 크게 기뻐할 것이라." 복음의 첫노래는 이와같이 시작된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눅 1:46,47).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위하여 행하신 구원과 그들가운데 나타내신 개혁은 마치 훌륭한 예복을 입은양 그들을 영화롭게 보이게 만들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교회를 의롭다 여김을 받고 거룩히 여김을 받는 칭의와 성화의 의로서 입히심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영원한 구원의 옷을 입게하셨다. 이 두가지가 어떻게 함께 부여되었는지 살펴보라. 지금 의의 옷을 입은 자들, 오로지 그들만이 이후에 구원의 옷을 입게된다. 그것은 의의 옷을 입은 자들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미쁘심이다.
(2) 이 선한 일의 진행과 계속은, 현재는 영광스러우나 이내 지나가버리는 승리의 날과는 다르다(11절). 이 측량할수 없는 축복이 장래의 세대에까지 그리고 먼 원방에까지 미칠 것을 생각함으로써 교회는 기뻐하는 것이다. 해마다 산출되는 땅의 결실들처럼 이은혜는 다가올 세대들에도 있을 것이다. 때가되면 '땅이 싹을 내며 동산이 거기 뿌린 것을 움돋게 함같이,' 은혜의 효력에 의하여 '주 여호와께서 의와 찬송이 끊임없이 발생하게 하실 것이다.' 비록 이따금 교회에 겨울이 찾아온듯이 여겨질지라도, 그리하여 그러한 축복들이 시들고 더이상 나타나지 않는듯이 보여질지라도, 그뿌리들은 굳건하며 봄 곧 그들이 다시 번성하게 되는 때가 오고말 것이다. 그들은 멀리까지 퍼지며 '열방앞에 발생하게' 될것이다.

# 핵심
61:1-11
메시아의 구속사역과 그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누릴 구원의 기쁨을 언급한다.
메시아의 사명과 사역(61:1-3)
본문은 구약성경중 메시아의 사명과 사역을 가장 분명하게 제시한다. 예수께서도 공생애사역을 시작하실때 본문을 인용하셨다(눅 4:18,19). 여기 묘사된 메시아의 구속사역은, ①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심. ② 영적, 육적으로 상처입은 자들을 치유하심. ③ 죄악의 사슬을 파하사 죄와 사단의 지배로부터 자유를 선언하심. ④ 죄인들의 영안을 여사 그들로 복음의 빛을 보고 구원을 얻게 하심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골격이 된다. 또한 이는 교회가 이루어 나가야할 사역이기도 하다.

# 묵상
주 여호와의 신 ( 61:1 )
신이 임하거나 기름부음을 받는 것은 성령이 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의 종은 말씀을 선포하기전에 하나님의 영으로 감동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주의 신이 임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나 왕들은 카리스마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신약시대 사도들도 주의 영이 충만히 임했을때 주의 복음을 담대하게 전파했습니다(행2).
끝까지 남은 자들에게 부여될 칭호 ( 61:6 )
여호와의 제사장, 하나님의 봉사자라는 칭호입니다. 옛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제사장 족속이었듯이(벧전2:9) 새이스라엘도 하나님의 종이 아닌 그의 가족으로 여겨지고 대우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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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교회의 확장에 대한 언약 60:1-8
복음의 성전이 대단히 광휘롭고도 광대하리라는 약속이 본문에서 주어지고 있다.
(1) 복음 성전은 매우 빛날 것이다. 네 빛이 이르렀고. 유대인들이 포로생활에서 돌아왔을때, 그들에게는 빛과 즐거움과 기쁨과 영광이 있었다. 그때에 그들은 여호와를 알게되었으며, 또한 그의 크신 인자하심을 즐거워하게 되었다.
1) 이빛은 무엇인가. 그리고 어디로부터 오는가.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2절).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할' 것이다(1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나실때, 그때에 여호와의 영광은 아침 햇살처럼 우리에게 임하신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나타나실때 그의 영광이 우리에게 보여진다. 그리스도께서 의의 태양으로서 나타나셨을때에 그리고 그분안에서 우리에게 저높은 곳으로부터 여명이 비추었을때, 그때에 '여호와의 영광'이 우리에게 나타나며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우리가 보게 된다.
2) 무엇이 이빛을 가로막을수 있을 것인가.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그렇지만 어두움이 깜깜하게 뒤덮일지라도, 그리하여 만민을 가리울지라도 교회는 여전히 빛을 발할 것이다.
3) 이 일어나는 빛이 요구하는 의무는 무엇인가.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다시말하여 이빛을 받아 혼자만 밝아지는데에 그치지 말고 이빛을 반사하라. 일어나 그빛에서 뻗쳐나오는 광선들을 반사하여 발하라.
(2) 복음 성전은 대단히 광대할 것이다. 유대인들이 포로생활에서 돌아와 고토에 정착할때에 그땅의 많은 민족들이 스스로 그들에게 합세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보다 좀더 확장된 의미로 본문을 보아야 한다. 즉 이것은 이방인들이 복음 교회에 들어오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떠한 특징 장소로 모은다는 의미가 아니다. 교회의 연합의 중심지가 되는 특정한 장소는 없다. 이약속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핵심으로하여 모여들며 믿음과 소망과 거룩한 사랑에 의하여 그로부터 이름을 얻은 가족의 일원이 되기위하여 나올 것에 대한 약속이다(엡 3:15).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읍 하늘의 예루살렘이라'는 말씀이 이예언을 해석하는 실마리가 된다(엡 2:19).
1) 무엇이 그렇게 많은 무리를 교회로 인도할 것인가. 열방은 네 빛으로, 열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3절). 이빛은 하나님을 그리고 인간에 대한 그의 선하신 의지를 밝히 나타내 보인다. 그리고 이빛으로 말미암아 생명과 불멸의 삶이 드러나게 되었으며 또한 이빛은 인류가운데 진실로 선하게 감화받은 모든 자들을 교회로 와서 연합하도록 초대할 것이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순전함과 사랑, 천국을 향하는 마음, 그리고 부단한 인내는 교회가 비추는 광명이었고, 이광명은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이끌었다.
2) 얼마나 많은 무리들이 교회로 나아올 것인가. 큰'무리'가 나아올 것이다. 많은 수의 이방인들 혹은 열방들이 구원받을 것이다. 모든 족속들이 제자가 될것이다(마 28:19). 그들은 모든 곳, 사방으로부터 올것이다(4절). 네 눈을 들어 사면을 보라. "그리하여 경건한 사람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오는' 것을 보라"(행 2:5). 가족이 되기로 결심한 자녀들로서, 모든 아들과 딸들이 참으로 진실한 태도로 올것이다. 그리스도의 가족에게 주어지는 존귀와 특권을 누리기 원하는 자들은 마땅히 그가족의 계율에 복종해야만 한다.
3) 그들은 무엇을 가지고 나아올 것이며 교회에 나아오면서 어떤 이익을 끼칠 것인가. 상인들은 '그 무역한 것과 이익을 거룩히 여호와께 돌릴' 것이다(23:18). "바다의 풍부(생선, 진주 등) 혹은 바다를 통해 수입되는 것이 네게로 돌아오며 네가 사용하게 되리라." 부요한 상인들의 재물들이 신앙과 자선행위에 쓰여지게 될것이다. 열방들의 강한 자들이 저희의 힘을 교회를 섬기는 일에 사용할 것이다. "열방의 군대가 너의 해안을 지키고 너의 전투를 대신 치러주기 위하여 네게로 오리라." 미디안과 스바 사람들의 금과 유향을 실은 약대, 곧 젊은 약대가 저희 나라의 가장 풍요한 산물을 가지고 올것인데 이는 서로 무역을 하기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동방 박사들이 그리스도께로 와서 '황금과 몰약과 유향'을 드렸을때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다(마 2:11). 수많은 제사들이 하나님의 제단에 드려질 것이며 그것이 이방인들이 드리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받아들여질 것이다(7절). 게달은 양으로 유명하였으며 아마도 가장 기름진 양들은 느바욧 산이었던 듯하다. 이양들이 하나님의 제단에 열납되기 위하여 드려질 것이다. 이예언의 말씀은 통치자 다리오왕이 강저편에서 칙령을 내려 예루살렘 성전에 '하늘의 하나님께 드릴 번제의 수송아지와 수양과 어린양'을 제공하도록 명하였을때에 성취되었다(스 6:9).
4) 교회의 수가 증가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진정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그들이 황금과 유향을 가지고 나아왔을때 그것은 '여호와의 찬송을 전파하기' 위한 것이다(6절).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의 집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곳에서 백성들에게 자기 영광을 나타내시며 그들이 자기를 영화롭게 하는 것을 통하여 경배를 받으신다. 그리고 이방인들이 교회에 저희 헌물을 가져오는 것은 그집의 영광을 위해서이다(7절).
5) 교회는 저희의 수가 증가됨으로 기뻐할 것이다(5절). 그때에 네가 보고 희색을 발하며. 이 즐거움에는 두려운 마음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무할례자들에게 가서 그들과 함께 먹는 것이 합당한 일인지 아닌지 의심스러워하면서 네 마음이 놀라리라." 베드로는 이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기에 이일에 대하여 그를 도와줄 하늘의 환상과 음성을 필요로 했었다(행 10:28). "이두려움이 극복될때 너희 마음은 모든 개심한 이방인들을 수용할수 있을만큼 넓어질 것이라. 교회로 나아오는 이들 개심한 양무리들은 크게 찬미를 받을 것이라"(8절). 저 구름같이...날아오는 자들이 누구뇨. 개심한 영혼들이 허다한 구름같이 날아올 것이다. 수많은 무리지만 일사불란하게 바람의 날개를 타고 나는 구름같이 몰려올 것이다. 그들은 '비둘기가 그보금자리로 날아오는 것같이 날아올' 것이다. 즉 순결과 겸손을 나타내면서 낮게 날아다니는 순전한 비둘기같이 날아올 것이다. 그들은 본능에 의해서 비둘기가 자기 보금자리로 날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로 그리고 교회로 날아갈 것이다.

Ⅱ. 새로운 개종자에 대한 언약 60:9-14
교회에 대한 약속들이 포로생활에서 귀향하는 유대인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되풀이되고 있다. 그러나 보다 폭넓은 의미에서 이것은 복음의 교회의 확장과 발전에 대한 약속이다.
(1)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대단히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다. "이제 모든 사람들이 너희를 환대하리라. 왜냐하면 너희가 포로로 있는동안에 내가 노하여 너희를 쳤으나 이제는 나의 은혜로 너희를 긍휼히 여기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이모든 자비가 너희를 위하여 예비되고 있는 것이라."
(2)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먼원방에서부터도 교회로 올것이다(9절). '곧 섬들이 나를 앙망하고' 복음을 환영할 것이다. '다시스의 배들이' 곧 수송선들이 복음의 전파를 위하여 교회의 사역자들을 먼지역으로 실어나를 것이다. 그들은 제물로 드릴 양들을 가져오기에는 너무나 먼거리에 떨어져 살고있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을 돈으로 바꾸어 '그 은금을 아울러 싣고올 것이다.'
(3) 교회로 오는 자들은 환영을 받을 것이다. '네 성문이 항상 열려'있을 것이다(11절). "너희의 대적들을 두려워해야할 까닭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희의 친구들을 기다리는 까닭이라." 만일 우리가 어린 자녀들이나 늦게올 손님을 기다린다면 밤새도록 문을 잠그지않고 그들을 위하여 열어두는 것이 상례이다. 자비의 문은 밤이나 낮이나 항상 열려져 있으며, 그렇지않다면 최소한 두드리는 사람에게 이내 열려질 것이다.
(4) 교회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여러가지 방법으로 교회에 도움을 줄것이다. 그래서 여기에서 이같이 말해지고 있다(10절). "너에 대하여 아는바가 없으며 네게 친절하지도 않던 이방인들이 네 성벽을 쌓을 것이요 그왕들이 여러가지 일들에서 너에게 봉사할 것이라." 이약속은 바사왕과 그의 통치아래에 있는 지역의 치리자들이 예루살렘 주변에 성벽을 쌓는 느헤미야를 도와주었을때에 성취되었다. 교회에 속하지 않은 자들까지도 교회를 보호하게 될것이다. 왜냐하면 '교회를 섬기지 아니하는 백성과 나라는 파멸할' 것이기 때문이다(12절).
(5) 풍성한 아름다움이 하나님께 경배드리는 의식에 곁들여질 것이다(13절). '레바논의 영광,' 곧 그곳에서 자라나는 강하고 장중한 삼목들이 옛적에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였을때와 마찬가지로(대하 2:16) '네게 이를' 것이다. 이것들과 함께 다른 목재들도 올것이며 조각하기에 합당한 다른 목재들도 이를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는 거룩한 곳인 성전이 재건될뿐만 아니라 아름답게 꾸며질 것이다. 이와같이 성전은 '미석과 헌물로 꾸며졌었다'(눅 21:15). 거기서 그리스도께서는 그아름다움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말씀하심으로써 우리로하여금 거룩함이 지니는 아름다움안에서 이약속이 완전히 성취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을수 없게끔 하셨다.
(6) 교회는 진정으로 위대하고 영광스럽게 나타날 것이다(14절). 유대인들은 포로생활에서 되돌아온후 점차로 보다 주목할만한 위치에 있게 되었다. 한걸음 나아가 이예언은 교회를 대적했던 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로인하여 자기들의 잘못을 깨닫게 되었을때에 성취되어졌다. "너를 괴롭게 하던 자들이 혹은 그들 자신들이 아니라면 그들의 자손이 너에게 몸을 굽혀 자기들이 우매했음을 사죄할 것이라. 그리고 너의 은혜를 청하며 너의 가족으로 받아들여 주기를 간청할 것이라"(삼상 2:36). 교회의 가난하고 압제받는 자가 저희에게 악을 행하던 자들에게 선을 베풀어줄 기회를 갖게되며 자기를 괴롭히고 멸시하던 자들을 구원시킬 기회를 얻게될 것이다. 자비를 베풀지않았던 자에게 자비를 베푸는 일은 선한 사람에게 즐거움이 되며 그사람은 그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Ⅲ. 교회의 영광과 복락 60:15-22
교회의 복되고 영광스러운 상태가 계속 예언되고 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포로생활로부터 귀향한후 때때로 누렸던 작고 미미한 외부적인 평화를 상징하는 동시에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인의 교회를 언급하고 있다.
(1) 과거와 비교할때 교회의 현재의 형편은 어떠한가.
1) 교회는 종래에는 경시받아왔었다. 그러나 이제는 영광을 받을 것이었다(15,16절). 예루살렘은 버려진바 되었었고 미움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대대로 선한 사람들의 기쁨이 될터이었다. 그렇지만 예루살렘이 구가했던 아름다움이 얼마나 짧은 기간에 불과했는지, 그리고 이약속의 과대함에 비하여 그기간이 너무도 짧았음을 생각해볼때, 우리는 복음 교회의 영속적인 아름다움속에서 이약속이 완전히 성취되었으며 기독교 신앙의 영광스러운 특권과 이익을 얻게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복음 교회는 주위에 있는 자들에게 지지를 받을 것이다. 열방들과 열왕들이 기독교를 포용하게 될뿐 아니라 스스로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전력을 다할 것이다. 네가 열방의 젖을 빨며. 열방의 피를 빠는 것이 아니다. 피를 빠는 것은 복음의 정신이 아니다. 열왕의 유방을 빨고. "열왕들은 너를 양육하는 아버지같으리라." 교회는 또한 하나님의 지지를 받을 것이다. 나 여호와는 네 구원자, 네 구속자...인줄 알리라. 교회는 체험을 통하여 그사실을 알게될 것이다. 그들은 이전에 여호와께서 저희 하나님이심을 알았었다. 이제는 그가 저희의 구원자, 저희의 구속자되심을 알게되는 것이다.
2) 교회는 이전에는 궁핍하였었다. 그러나 굴욕으로부터 일으킴을 받은 자들은 이제 지갑속에 동전대신 금전을 가지며 집에는 놋그릇 대신 은그릇이 있게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신약 교회의 영적인 영광은 유대 교회의 외적인 호사와 광휘를 능가할 것이다. 우리가 할례대신 세례를 받고 유월절대신 주의 만찬을 나누고 레위 제사장직 대신 복음의 성직을 갖게 되었을때, 우리는 놋을 대신하여 금을 갖게된 것이다. 르호보암이 금방패대신 놋방패를 세웠을때 죄는 금을 놋으로 바꾸어 버렸다. 그러나 되돌아왔을때 하나님의 은혜는 놋을 다시 금으로 바꿀 것이다.
3) 교회는 과거에 저희 자신의 방백들에게 압제를 받아왔었다(참조. 59:14). 그러나 이제 그와같은 모든 고통과 슬픔은 제거될 것이다(17절). 내가...화평을 세워 관원을 삼으며. 그들은 '화평을 세울' 것이다. 다시말하여 그들은 신실하게 저희의 복지를 꾀하며 그로 말미암아 저희는 낙을 누리게될 것이다.
4) 교회는 과거에는 주변에 있는 자들에게 모욕을 당했었다. 침략을 받아왔으며 약탈을 당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이상 그렇지 않을 것이다(18절). 다시는 강포한 일이 네 땅에 들리지 않을 것이요.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게 자신의 소유를 즐기게될 것이다. "거기에는 황폐와 파멸이 다시 없을 것이며 네가 네 성벽을 구원이라, 네 성문을 찬송이라 칭할 것이라."
(2) 장차에는 어떻게 될것인지가 비교되고 있다. 이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는 더한층 나아가 천국의 영광과 행복까지 볼수 있게 된다. 이것은 지상에 있는 교회의 융성한 모습으로 상징되고 있다. 선지자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유대 교회의 축복에서 그리스도 교회의 영원한 영적인 축복에 대한 언급으로 넘어가듯이 예언은 때때로 전투적인 교회로부터 승리하는 교회로 진행된다. 승리하는 교회, 오로지 그곳에서 모든 약속된 평화와 기쁨과 영광이 온전하게 될것이다.
1) 하나님께서 여기에 약속된 행복의 전부가 되어주실 것이다(19절).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취지 않을 것이요. "우상숭배자들은 해와 달을 섬겼었느니라(어떤이들은 그것을 가장 오래되고 그럴듯한 우상숭배로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제 이것들은 더이상 네 빛이 되지 아니할 것이라. 이것들은 더이상 우상이 되지 아니할 것이며 오직 여호와께서 번창한 낮에나 역경에 처한 밤에나 네게 영영한 빛이 되실 것이라."
2) 여기에 약속된 행복에는 어떠한 변화도 있을수 없다(20절). 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해가 네게 영원히 비추이리라. 때때로 빛이 가리워지거나 이따금 구름이 끼거나 하는 예전의 해와 같지 아니하리라. 반드시 저물어 이내 너를 어두움과 추위가운데 남겨두는 태양과는 달리 그분 자신이 태양이 되시리라." 그는 스스로 모든 빛들의 아버지이시며 그분에게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다'(약 1:17). 천국의 위로와 기쁨, 그리고 영혼을 위하여 예비된 햇빛과 같은 영광, 영화롭게될 몸을 위해 예비된 달빛과 같은 영광, 그모두가 결코 중지되지 않을 것이다. 네 슬픔의 날이 마칠 것임이니라.
(3) 이행복에 대한 자격을 구비한 자들은 결코 그행복의 소유권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21절). 이 새예루살렘을 기업으로 얻을 그들은 '다 의롭게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모두 의롭게 되기때문에 '영영히 땅을 차지할' 것이다. 왜냐하면 죄이외에는 그무엇도 그들에게서 그땅을 박탈할수 없기 때문이다.
(4) 교회의 영광이 언급되고 있다. "그들은 '나의 심은 가지요 나의 손으로 만든 것'이라. 그리고 나는 그들을 그러한 자로 인정하리라."
(5) 그들은 과거보다 더욱 영광스럽게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그들안에서 과거보다 더욱 영화롭게 되실 것이다. 그작은 자가 천을 이루겠고 그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바벨론에서 돌아온 포로들은 기이하게도 더많은 수를 이루며 강력한 나라를 형성하였다. 그리스도 교회도 처음에는 작은 수, 매우 작은 규모에 불과했었다. 그들 교회의 수는 한때 120여개에 불과했었다. 그렇지만 교회는 '천을 이루었다.' 그들이 하늘나라에 이르렀을때 그들은 애초의 미미했던 시작을 되돌아 보며 어떻게 그렇게 성장하였는지 기이하게 여기며 놀라게될 것이다. 그약속은 지체되는 것처럼 여겨질수도 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약속을 이행하실 것이며 '속히 이루실' 것이다. 그는 자신의 지혜로 정하신 때에 그약속을 이루실 것이다. 그때는 우리의 우매함이 규정하는 시기가 아니다. 그리고 이일은 진정으로 속히 이루어질 것이다. 비록 그시기가 지체되는 것처럼 보여질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때라면 지체되는 것이 아니다.

# 핵심
60:1-22
이스라엘이 맞을 궁극적인 승리와 영광, 나아가서 하나님의 백성이 맞이할 최후 승리와 영광이라는 벅찬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하나님의 빛(60:1)
하나님은 빛이시므로, 그분께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요일 1:5). 빛이신 하나님은 또한 그의 백성을 향해 자신의 빛을 발할 것을 요구하신다. 이는 세상이 아담의 타락후에 하나님의 빛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태양빛을 비롯한 자연계의 빛은 예전 그대로 있지만, 하나님 본래의 빛은 사람들에게 가려지고 말았다. 인간의 심령은 영적 암매상태에 처하게 되었으나 하나님은 때가차매 빛이신 그리스도를 이세상에 보내주셨다(요 8:12). 성도는 이빛을 심령속에 모신 자들이며, 곧 하나님의 빛을 찾은 자들이다.

# 묵상
항상 열려있는 이스라엘의 성문 ( 60:11 )
그이유는 사람들이 열방의 재물을 가져오며 이스라엘이 열방의 왕들을 포로로 끌고오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노를 그치시고 은혜로 긍휼히 여기시는 때가 도래하면, 모든 열방이 하나님께 경배하기 위하여 이스라엘로 나아오며, 하나님의 증인들에게 봉사하기위해 모여오므로 성문을 잠가둘수 없다는 것입니다.
열방의 젖을 빨게될 이스라엘 ( 60:16 )
예전에는 이스라엘을 억압하던 자들이 이제는 그 앞으로 재물을 가져오며 이스라엘을 섬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로 그죄에서 돌이키게 하시기위해 이방 민족을 통해 그들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은혜로 그들을 신원하셨고 만방에 이스라엘의 도우시는 자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성벽을 구원, 성문을 찬송이라 칭함
끊임없이 계속되는 폭력, 재난, 성벽과 성문파괴 등은 환난이 모두 끝남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시온으로 돌아온 자들과 열방중에서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는 자들에 의해서 새로 세워진 성벽과 성문은 이스라엘에게는 곧 구원과 영광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가난과 억압에 찌들린 현재가 아름답고 풍성한 미래로 바뀔 것임을 시사하는 것으로서, 메시야 도래로인한 하나님나라의 완성을 암시합니다.
땅을 차지할 사람 ( 60:21 )
의로운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들입니다. 백성이 다 의롭게 되어 영영히 땅을 차지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보혈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인정된 성도들이 하나님나라를 그기업으로 물려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진정한 후사로서 하나님나라에서 영원한 삶을 살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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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죄의 만연과 그결과〔1〕 59:1-8
이사야 선지자는 여기에서 금식과 기도를 했으나 구원을 얻지못한 것으로인해 하나님과 다투었던 자들의 잘못을 언급하고 있다(58:3).
(1) 그것은 하나님의 탓이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도우실 능력이 있었다. 여호와의 손은 짧아지지 않았다. 즉 그의 능력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조금이라도 약해지거나 줄어들지 않는 강한 손을 가지셨기에 그가 미치지 못하는 곳이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라고 하셨다(민 11:23). 그의 손은 결코 짧아지지 않았다. 그는 그러한 생각조차 들지못하도록 하실 것이다. 시간의 길이나 적의 강함이나 도구의 약함이 하나님의 능력을 줄이지는 못한다. 그는 여전히 기도에 응답하여 도움을 주실 준비가 되어있으며 또 기꺼이 도움을 주고자 하신다.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여기에는 표현된것 이상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즉 그는 귀가 둔하지도 않을뿐 아니라 듣기를 속히 하신다. '그들이 부르기전에 내가 응답하겠다'(65:24). 만일 우리가 기도의 응답을 받지못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듣는데 싫증이 나셨기때문이 아니고 우리가 기도하는 일에 싫증을 내고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그에게 말할때 그의 귀가 둔해서가 아니고 그가 우리에게 말할때 우리의 귀가 둔하기 때문이다.
(2) 그것은 그들 자신의 탓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분별없는 행동을 하여 자기의 문에다 빗장을 지른 꼴이 되었다. '너희 죄가 너희에게 오는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렘 5:25).
1) 죄가 끼치는 해악이 설명되어 있다. 죄는 우리에게로 오는 하나님의 자비를 막는다. 그것은 우리와 하나님사이에 놓여있는 간막이 벽과 같다. 죄는 우리들로부터 하나님의 얼굴을 가리게 한다(하나님께서 그의 얼굴을 가리는 것은 그가 크게 진노하시는 것을 나타낸다, 신 31:17). 죄는 그결과가 너무도 해로와서 우리를 하나님과 갈라놓으며 또 우리를 모든 선으로부터 멀어지게 할뿐 아니라 모든 악으로 인도하기까지 한다(신 29:21).
2) 이제 이사야는 '내 백성에게 그죄를 고하라'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58:1) 그들의 죄악이 얼마나 많고 큰가를 설명하고 있다. 그는 먼저 그들의 생각부터 밝히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죄가 생각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사상은 죄악의 사상이라(7절). 그들의 상상역시 마찬가지다(4절). 잔해를 잉태하여 죄악을 생산하며. 섭리와 양심의 가책을 거스리면서까지 죄악을 범하는 것은 아마도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악한 목적을 달성할경우 마치 사내아이가 태어난 것처럼 그것을 매우 흡족하게 여긴다. 그러므로 신약에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느니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약 1:15). 이것은 본문에서 '독사의 알을 품으며 거미줄을 짜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5절). 거미줄은 빗자루로 순식간에 쓸어버릴수 있을정도로 약할뿐 아니라 아무가치도 없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의 생각도 이처럼 공중누각을 짓는 것과 같다. 그들은 독사 혹은 살모사의 알을 품고있는 자들이다. 독사는 독을 갖고있을뿐 아니라 독액을 분비하는 새끼들까지 생산한다. 악을 행하고도 기뻐하는 사악한 자들의 생각은 이와같다. 그알을 먹는 자는 죽을 것이요(5절). 즉 "그들과 관계를 맺는 자는 어떤 방법으로도 화를 당할 위험에 빠질 것이요." 그알이 밟힌즉 터져서 독사가 나올 것이니라. 그것은 부화하려던 것으로 따라서 그알을 만지는 것은 위험한 일이 아닐수 없다. 그들의 말은 이와같이 마음속에 가득한 악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그들이 항상 아무것도 가리지않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악한 음모를 보다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하여 그럴듯한 말로 그들의 본심을 은폐시킨다(3절).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3절). 거짓을 말하며(4절). 그들은 악한 생각을 품은후에는 친절을 가장하여 그들의 생각을 실행에 옮긴다. 너희 혀는 악독을 발함이라(3절). 뒤에서 험담하는 자들은 '속삭이는 자들'로 불렸다. 그들은 무고한 피를 흘리는 죄를 범했다. 너희 손이 피에...더러웠으며(3절). 피는 더럽게 하는 것이다. 피는 양심에 지워지지 않는 얼룩을 남겨놓는다. 그얼룩은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만 지워질수 있다. 그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7절). 그들의 손가락은 다른 죄악들로 더러워졌다(3절). 그들은 자기들의 손이 닿는 곳에 있는 모든 것을 자기의 소유로 만들어버린다. 허망한 것을 의뢰하며(4절). 그들은 재산을 모으는 자기들의 솜씨에 의지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을 속이는 그들의 솜씨는 그들 자신까지 속이게 될것이다. 그손에는 강포한 행습이 있으며(6절). 그들의 난폭한 행동은 머리속에 들어있는 폭력의 기술과 마음속에 품고있는 폭력적인 사상에 의해 나온다. 이 억울한 일을 시정하고 이러한 학대를 개혁할 조처가 전혀 취해지지 않고 있다(4절). 공의대로 소송하는 자도 없고. 공의가 행해지지 않을때 공의를 행해야할 위정자뿐 아니라 백성들도 비난을 받는다. 각개인들은 숨은 악을 찾아냄으로써 공공의 선에 이바지해야 한다. 진리는 배척을 받으며 진리를 위해 소송하거나 팽배해가는 부정에 대항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 평강의 길도 진리의 길만큼 거의 존경을 받지 못한다. 그들은 그길을 알지못한다. 즉 그들은 결코 평강을 이루는 것들에 대하여 연구하지 않는다. 그들의 행하는 곳에는 공의가 없으며(8절). 그들의 행위속에는 아무런 정의감도 없다. 죄악을 행하는 자들은 '허망한 것을 의뢰'한다(4절). 그들이 상당한 기술과 근면함으로 짠 거미줄은 '옷을 이룰수 없을 것이요, 자기를 가리울수 없을 것이다'(6절). 죄를 통하여 얻어지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손익을 비교해볼때 드러날 것이다. 죄악의 길은 '굽은 길'이다. 이길은 그들을 난처하게 만들며 결코 그들을 그들의 목적지로 인도하지 못할 것이다.

Ⅱ. 죄의 만연과 그결과〔2〕 59:9-15
죄는 매우 큰해악을 끼친다. 본문에서는 백성들이 하나님께 아뢰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말해서 그들이 자기들에 대한 하나님의 처사를 공의로운 것으로 겸손히 승복함을 고백하는 것처럼 보인다.
(1)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다투셨음을 인정한다(9-11절).
1) 그들은 고통을 당하였으며 대적들에게 압제를 받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의와 손상입은 대의를 옹호하러 나타나시지 않으셨던 것이다. 공평이 우리에게서 멀고 의가 우리에게 미치지 못한즉(9절). 즉 "비록 우리편에서 보면 우리가 옳고 우리를 핍박하는 자들이 행악자임이 분명하긴 하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공의를 행치않고 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처럼 부당하게 다루도록 대적들에게 허락하시는도다."
2) 그들의 기대는 비참하게도 무산되어 버렸다. "우리가 아침을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빛을 바라나 어두움뿐이로다." 우리가...공평을 바라나 없고(11절). "우리가 구원을 찾노라. 왜냐하면(우리가 생각하기에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이라.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위해 금식하며 기도하였노라.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캄캄한 가운데 행하는도다."
3) 그들은 어찌할바를 몰랐다(10절). 우리가 소경같이 담을 더듬으며. 빛보다는 오히려 어두움을 좋아하는 자들의 운명은 그에 상응하게 될것이다.
4) 그들은 절망속으로 빠져들었다. 우리는 강장한 자 중에서도 죽은 자 같은지라. 바벨론에 있던 유대인의 상태가 에스겔에서는 죽어서 마른 뼈들로 묘사되며, 거기에 나타난 비유의 설명 곧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는 말은 본문을 설명해주는 말이기도 하다(겔 37:11,12). 우리가 곰같이 부르짖으며(11절). 다른 사람들이 슬퍼하는 모습은 오히려 잠잠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듯 그들은 자신의 영혼을 괴롭혔던 것이다. 우리가...비둘기같이 슬피울며. 즉 "우리가 골짜기의 비둘기처럼 울었도다."
(2)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격동시켰음을 인정한다(12-15절).
1) 그들은 자기들이 범죄했음을 자백하였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증인이다. "우리가 어리석게도 우리의 죄악을 감추려고 애를 썼지만 그죄악을 우리가 아나이다."
2) 그들은 죄의 악함을 시인하였다. 우리가 여호와를 배반하고 인정치 아니하며(13절). 이러한 점, 즉 여호와를 배반하고 인정치 아니한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악은 다른 사람들의 죄악보다 더나쁘다. 그들은 하나님을 잘못 전하며 그와의 언약을 불성실하게 파괴한다. 이것이 바로 그를 '인정치않는' 것이다.
3) 그들은 도덕적인 진실함이 전반적으로 썩어들어갔음을 인정하였다. 하나님께 거짓된 자들이 서로에게 불성실하였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그들은 진리에 대한 반역인줄 알면서도 '포학을 말하였다.' 우리가...거짓말을 마음에 잉태하여 말하니. 많은 거짓말들은 깊은 생각없이 성급히 내뱉어 생긴 것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말할 것들은 마음속에서 잉태하여 발설한 것들이며 심사숙고하고 계획적으로 악의를 품고 내뱉은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그거짓말들은 마음속에서부터 말해진 것들이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마음속에 있는 악의와 사악함에 부합하였으며, 그러한 것들을 나타내는 자연스런 언어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두마음'을 품고있었다(시 12:2).
4) 그들은 그땅을 개혁하고 잘못된 것을 고칠수 있었는데도 아무것도 하지않았음을 시인하였다(14절). "공평은 강처럼, 거센 개울처럼 진로를 따라 흘러야만 하는데, 반대로 뒤로 물리침이 되었도다. 공의로와야할 통치는 매우 큰불의를 은폐시키기 위한 수단이 되어버렸도다." 의가 멀리 섰으며. "의가 우리의 법정에서조차 멀리 떨어져 있도다." 성실이 거리에 엎드러지고. "정직이 모든 대화속에 들어가지 못함으로 누구를 믿으며 누구를 신뢰할 것인지를 모르는도다."
5) 그들은 선한 자들에 대한 적대감이 팽배했음을 시인하였다. "악을 행하는 자가 벌을 받지 아니하고 오히려 악을 떠나는 자가 탈취를 당하는도다." 그들은 어떤 사람이 자기들처럼 행하지 않으면 그것을 죄로 여겼으며, 그를 자기들의 행악에 가담하지 않으려는 대적으로 취급하였다. "악을 떠나는 자를 미친 자로 여겼도다"(어떤 사본에는 그렇게 되어 있다).
6) 그들은 이모든 것들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노엽게 할수밖에 없었음을 인정하였다. 비록 그들이 그러한 악행을 은밀히 저지르고 그럴듯한 은폐물을 입혔지만,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의 눈을 속일수는 없었다. 그러나 비록 죄가 하나님을 노엽게 하였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죄인들과 즉시 화해하셨을 것이다.

Ⅲ. 하나님의 자비로운 중재 59:16-21
본장의 앞부분에는 수많은 죄인들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본문에는 그보다 훨씬 많은 은혜가 기록되어 있다.
(1) 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격동케함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베푸시는 것일까?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인 것이다.
1)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연약함과 사악함을 주목하셨다. 그는 그들가운데는 신앙과 미덕을 뒷받침하기위해 무엇인가를 행하는 '사람이 없음을 보셨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사악하였으며, 악하지 않은 사람들은 힘이 없었다. 중재자 없음을(16절). 하나님께 좋게 말씀드릴 사람이 전혀 없었다. 성실하게 행함으로 인하여 탈취당하는 자들을 위해 변호할만한 옹호자도 없었다(15절).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위해 나타나시지 않는다고 불평하였다(58:3).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스스로 아무 일도 하지않았다고 불평하실만한 이유를 훨씬더 많이 갖고 계셨다.
2)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힘과 의를 그들을 위해 베푸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구원에 있어서 첫째되는 주요 조항인 개혁은 인간의 양식에 하나님의 은혜가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침으로써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힘으로나 능으로가 아닌 만군의 여호와의 신으로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이사 이스라엘 백성을 바벨론에서 이끌어 내셨을때, 그는 결코 짧아지지 않는 자신의 팔로 구원을 베푸셨던 것이다. 그들이 죄로써 무장하고 대항해왔던 하나님의 공의가 은혜를 통하여 그들에게 나타난다. 비록 그들이 죄악때문에 어떤 은혜도 기대할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자신의 백성들의 대적들을 벌하실 것이다. "네가 그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이 아니라 쫓김을 당한 이민족들의 악함을 인함이니라"(신 9:5).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우리의 구속에 있어서, 우리에게는 의가 없으므로 하나님께서는 독생자의 공로와 중재로써 의를 가져오셨다. 그의는 바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서 난 의'(빌 3:9)인 것이다. 의로 호심경을 삼으시며(17절). 호심경이 생명을 보호하듯 하나님께서는 의로 자신의 영광을 보호하신다. 구원을 그머리에 써서 투구를 삼으시며. 의가 그의 갑옷이라면 구원은 그의 투구인 것이다. 이점을 생각해볼때 그리스도의 무장가운데서 우리는 '의의 흉배'를 볼수 있으며, 투구라고 할수 있는 '구원의 소망'을 발견할수 있다(엡 6:14-17;살 5:8). 또한 그무장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라고 불리우는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먼저 그것을 입으셨으며 우리에게도 그것이 꼭 맞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자신을 위해 어떤 일을 할만한 마음이나 열심이 없기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보수로 속옷을 삼으시며 열심을 입어 겉옷을 삼으실' 것이다. 그는 자신의 교회와 백성들의 대적들에 대하여 그의 공의를 분명하게 나타내실 것이다.
(2) 하나님께서는 친히 자신의 공의로서 구원을 베푸실 것이다.
1) 바벨론이나 그외의 지방에서 사로잡혀 고통을 당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현세적인 구원이 베풀어질 것이다. 이것은 그보다 더큰 어떤 일에 대한 예표로서 약속되고 있다(18,19절).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일이 약속되고 있다.
① 하나님께서는 그의 대적과 셈하실 것이며 그들의 행위대로 갚으실 것이다. 그는 백성들을 억압했던 외국의 대적들과 공의와 진리에 대한 대적들에게도 그리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역시 하나님의 대적들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들 모두를 그들이 받을만한 옛날의 응보에 따라서 취급하실 것이다. 또한 그는 예전에 대적들에게 복수하셨던 것처럼 '그대적에게 분노하시며 그원수에게 보응하실' 것이다. 그의 분노는 정당성을 잃지않을 것이다. 그는 매우 멀리 떨어져있는 섬들일지라도 그것들이 만일 그를 대적하였다면 '보복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손은 그의 모든 원수를 발견할' 것이며(시 21:8) 그의 화살이 그들에게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② 이후에 하나님의 백성의 평화를 교란시키려고 대적들이 어떤 시도를 할지라도 그들의 시도는 낭패로 돌아갈 것이다. 서방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두려워하겠고 해돋는 편에서 그의 영광을 두려워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기운에 몰려 급히 흐르는 하수같이 오실 것임이로다(19절).
③ 이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세상에 있어서의 신앙의 증진에 기여할 것이다(19절). 이일은 복음 시대에 완전히 성취되었다. 즉 복음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동과 서에서 와서 쫓겨난 자녀들의 자리를 채웠으며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가 세워졌던 것이다(마 8:11).
2) 때가차면 보다 영광스러운 구원이 메시야로 말미암아 베풀어질 것이다. 구원에 관한 두가지 위대한 약속은 다음과 같다.
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구속자로서 우리에게 오실 것이다(20절). 그리스도께서 구속자로서 오신다는 것은 신약과 구약에 있는 모든 약속들의 요약이다. 또한 이것은 믿는 유대인들이 갈망하던 예루살렘의 구원이었다(눅 2:38).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고엘(Go l), 즉 가난한 채무자의 신분과 재산 모두를 구속해주시는 가장 가까운 혈족이시다.
㉠ 이 구속자께서 나타나실 장소 :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왜냐하면 여호와께서는 그거룩한 산위에서 그를 왕으로 세우려하시기 때문이다(시 2:6). 시온은 복음 교회의 모형이다.
㉡ 구속자의 임재로 자신의 구속이 가까웠음을 알고 위로를 받게될 사람들 : 구속자께서는 '야곱중에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실' 것이다. 야곱중에 있다하더라도 죄에서 돌이켜 회개하고 개심하는 자들에게만 임재하실 것이다.
② 하나님의 신은 우리를 성결케하시는 이로서 우리에게 오실 것이다(21절). 그런데 그약속은 단 한사람과 맺어지고 있다. 네 위에 있는 나의 신. 이것은 다음의 둘가운데 하나를 가리키고 있다.
㉠ 그리스도 :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주시기위해 먼저 받으셨다.
㉡ 교회 : 따라서 그리스도의 보좌와 자손이 영원토록 존속하리라는 약속들(시 89:29,36;22:30)과 병행하여 이것은 교회가 세상에서 시간의 종말까지 영속하리라는 약속이다. '아들들이 열조를 계승할 것이다'(시 45:16). 교회는 '이제부터 영영토록' 세상끝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리스도위에 계셨던 성령은 신실한 자의 심령에 항상 계실 것이다. 모든 세대가운데 성령이 역사하시는 심령이 있을 것이며 성령이 거하시는 심령이 있을 것이다. 또한 이처럼 보혜사께서 영원토록 교회와 함께계실 것이다(요 14:16). 모든 세대에 공의를 진심으로 믿음으로써 구원을 혀로 고백할 심령들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터전위에 그리스도께서 친히 중요한 초석이 되심으로써 교회가 세워지고 굳건히 서며 영원토록 서게될 것이다.

# 핵심
59:1-21
이스라엘 사회의 죄악상을 지적한다.

# 묵상
여호와께서 기도를 듣지않으시는 이유 ( 59:1-3 )
여호와의 손이 짧아서 구원하지 못하시는 것도 아니고 귀가 둔하여 듣지못하심도 아닙니다. 오직 우리의 죄악이 우리와 하나님사이의 틈을 내었고 우리의 죄가 그얼굴을 가리워서 우리의 기도를 듣지않으시게 하기 때문입니다. 금식하고 기도하면서도 그손이 피로 더러워졌고 입술은 거짓을 말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종교의식보다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이웃사랑으로 표출되는 것을 더욱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박하와 근채 등을 드리며 십일조와 금식을 잊지않는 바리새인의 기도보다는 자기 죄를 통회하는 죄인들의 기도를 들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쳐서 증거하는 우리의 죄 ( 59:12 )
우리의 죄가 우리를 고소한다는 의미입니다. 죄는 그 어느것도 숨기거나 감출수 없습니다. 아무리 작은 죄일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앞에 낱낱이 드러나게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이므로 죄를 지으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되고 스스로가 죄인임을 깨달아 알게됩니다.
‘사람이 없다’고 하는 말씀의 의미 ( 59:16 )
이말씀은 의를 행하는 자 곧 하나님을 돕는 자가 전혀없다고 하는 뜻입니다. 이는 하나님만이 전적으로 홀로 의를 행하시고 인간은 악만 행한다고 하는 것으로, 악함과 불의를 말하는 것입니다(롬3:9-12).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의로 구원받을수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아무흠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로만 가능합니다(행4:12).
급히 흐르는 하수같이 오실 여호와 ( 59:19 )
여호와의 급작스러운 도래를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가 다시 오실때 도적과 같이 이르리라고 하셨는데, 이는 누구도 그가 재림하시는 때를 알지 못하며, 또한 그누구도 예수님의 도래를 막을수 없음을 표현한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구원 행위와 심판은 세상의 어떤 세력도 막을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사건입니다.
구속자가 임하시는 사람 ( 59:20 )
죄과를 떠나는 사람입니다. 즉 자기 죄를 자백하고 그죄에서 돌이키는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구주로 임하십니다. 그리고 죄를 버리지않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거나 시인하지도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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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백성에 대한 책망 58:1,2
우리 주 예수께서 보혜사를 보내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신뒤 '그가 와서 책망하리라'는 말씀을 덧붙이셨다(요 16:7,8). 이는 책망은 위로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백성들에게 위로를 주기위하여 이사야 선지자를 임명하셨다(40:1).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님은 그들을 책망하고 그들에게 그들의 죄를 보여주기 위하여 그를 임명하신다.
(1) 그는 그들이 실제로 얼마나 악한가를 그들에게 말해주어야 했다(1절).
첫째, 그는 신실하고도 솔직하게 그들을 대하여야 했다. 그들이 비록 하나님의 백성이나 야곱의 집안으로 불린다해도 그들에게 아첨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범한 죄를 보여주어야 했다. 즉 그는 그들이 범한 죄가운데 그들이 죄로 인식하지 않았던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어야 했다. 그들은 어떤 점에서는 개혁되었지만 또 어떤 점에서는 전과 같이 악했다.
둘째, 그는 '크게 외치고 아끼지 말아야' 했다(1절). 즉 그는 큰소리로 외쳐서 그들의 악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고 그들로부터 욕설을 듣는다해도 그렇게 하는 것을 주저해서는 안된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얼마나 선하게 보였는지를 인정해야만 했다(2절).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그들은 그들의 죄를 알수 없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부지런하고 꾸준하게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로부터 무엇을 더얻고자 하시는가?
1) 그는 그것을 사실로 인정하신다. 외식하는 자들이라해도 선한 일을 하는한 그것에 대한 칭찬을 받을 것이다. 그들이 경건의 모습을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① 그들은 교회에 참석할뿐 아니라 기도시간을 준수한다.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② 그들은 선한 가르침에 귀기울이기를 좋아한다.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헤롯도 세례요한의 말을 기쁘게 들었다.
③ 그들은 종교행사를 기뻐하는듯이 보인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겨하며. 이는 그들이 가까이 가고자했던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어떤 즐거운 분위기나 교제나 축제를 위한 것이었다.
④ 그들은 자기의 의무에 관하여 알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에 관하여 알기만을 바랬던것 같다.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때 지켜야할 경건한 규례와 사람을 대할때 가져야할 공정한 규율은 모두 의로운 판단에 속한다.
⑤ 그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의무이행을 자각하고 있는 자들처럼 보인다. 마치 의를 행하여 그 하나님의 규례를 폐하지 아니하는 나라같아서. 다른 사람들은 그들을 이와같이 오인했고 그들역시 스스로 그런 사람임을 자처했다. 천국을 향하여 큰길로 가다가 도달하지 못하는 자들도 있다. 즉 사람들중에는 좋은 평판을 얻고도 지옥으로 가는 자들이 있을수 있다.
2) 그는 이것이 결코 그들의 죄를 은폐시키지 않으며 실제로는 그죄를 더악화시키는 것임을 암시하고 계시다.

Ⅱ. 참된 금식의 특성 58:3-7
(1) 하나님께 대항하려는 이위선자들의 욕구(3절) : 이르기를 우리가 금식하되 주께서 보지 아니하심은 어찜이오며. 이처럼 그들은 가인의 길을 갔다. 가인은 자기의 제물이 열납되지 않은 것을 큰모욕으로 생각하고 분개하여 하나님께 화를 냈던 인물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행동을 과장한다. "무리가 금식하고 마음을 괴롭게 하였나이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을 찾았을뿐 아니라 무엇보다 엄숙하게 헌신의 시간을 지켰나이다." 이것이 매년 행해지는 금식일(속죄일로 불린다)로 언급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임의적으로 행해지는 금식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바리새인들은 말하기를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한다'고 했다(눅 18:12). 그들은 자기들의 헌신으로인하여 하나님께서 크게 주목하실 것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불의하고 편파적인 분으로 비난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신앙을 내던지기로 결심한 것처럼 보이며 이렇게 행하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를 해도 아무런 유익을 얻지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함으로 자신들의 입장을 정당화시킨다(욥 21:14,15;말 3:14).
(2) 하나님께서 그들의 금식을 열납하지도 않고 금식일에 드렸던 그들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도 않았던 참된 이유 : 그것은 그들이 올바로 금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금식을 한것은 사실이었지만 니느웨 백성들처럼 각자가 그악한 길에서 돌아서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금식하는 날' 계속 '오락을 찾아'다녔다. 여기에서 오락을 찾아다닌다는 것은 무엇이든 자기들의 눈에 옳게 보이는대로 행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즉 그들 자기들의 기분을 법으로 삼았다.
1) 그들은 여전히 탐욕스럽게 무자비하였다. "너희는 너희 종에게 온갖 일을 시키면서도 율법에 따라 그들을 풀어주거나 혹독한 종살이를 완화시켜 주려하지 않도다." 혹자는 이에 대해 "너희는 너의 모든 대여금 곧 너희가 받아야할 빚을 강요하도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것을 더 자세히 말하면 다음과 같다. "너희는 매년 모든 것을 면해주기로 정해진 금식때가 다가오는데도 과거와 다름없이 불쌍한 사람들에게 엄하고도 가혹한 요구를 하고 있도다."
2) 그들은 다투기를 좋아하며 경멸적인 사람들이었다(4절).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다투며. 그들은 금식을 선포하면서 하나님을 격동케하는 죄들을 찾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런 주장을 통하여 이세벨이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거짓으로 고소했던 것처럼(왕상 21:12) 그들역시 특별한 사람들을 거짓으로 고소했을 것이다. 이처럼 금식일을 맞아 마땅히 자신의 죄를 자복한 것이 아니라 서로서로를 정죄하는데 급급했다. 금식일을 맞아 가장 보기좋은 모습을 보여야할 그들이 악한 마음을 품고 금식을 하여 다투기까지 했다. 그들은 이처럼 죄를 계속 범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거룩한 의식을 악용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다. "너희가 오늘과 같이 너희의 목소리를 높여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고자 한다면 내가 너희로 금식하지 못하게할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는 더이상 이 공허하고 소란스러우며 헛된 제물을 내게 가져오지 말라"(1:3).
(3) 경건한 금식의 참된 특성에 관한 교훈들.
1) 일반적으로 금식의 의도는 다음과 같다.
① 하나님을 영화롭고 기쁘게 하는 것이다.
② 우리 자신을 겸비케 하기위한 것이다. 금식일은 '그마음을 괴롭게하는 날'이다. 그러나 만일 금식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진정으로 죄에 대하여 슬픔을 나타내지않거나 실제로 죄에서 떠나지않는다면 그것은 금식이라 할수 없다.
2) 그러므로 우리는 금식일을 맞아 하나님께 열납되고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괴롭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묻는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① 본문에서는 부정적인 표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금식을 설명하고 있다.
첫째, 우울한 모습을 보이는것 즉 시들고 상한 갈대처럼 머리를 숙이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외식하는 자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슬픈 기색을 내며 얼굴을 흉하게' 한다(마 6:16). 반면에 진실로 겸비한 마음을 갖고있는 자들은 세리처럼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한다'(눅 18:13). 그러나 이본문에 나타난 것처럼 단순히 흉내를 내는 것에 그친다면 그것은 마땅히 웃음거리가 되고말 것이다. 그것은 '그머리를 갈대같이 숙이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둘째, 고행을 하는것 다시말해서 죄를 지은 것에 대해서는 개의치않고 신체를 약간 고통스럽게 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네가 어찌 이것을 금식이라 하겠느냐?" 그것은 결코 금식이 아니라 금식의 모습에 불과하다.
② 본문에서는 긍정적인 표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5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금식은 하루동안 영혼을 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우리의 전생애에 걸쳐 해야만 할일이다. 이를 위하여 이본문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요구되고 있다.
㉠ 우리는 우리가 가혹하게 대했던 사람들을 정당하게 대해주어야 한다(6절).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이결박은 우리가 악한 마음을 품고 묶었으며 또 그것으로 다른 사람들을 구속하는 결박을 나타낸다. "빚을 갚을 능력이 없는 죄인에게는 빚을 탕감해 주고, 남을 괴롭히는 행동을 중단하며, 정해진 기간보다 종살이를 더하도록 강요받은 종은 풀어주는 등 모든 멍에를 끌러주라. 곧 부당한 방법에 의해 멍에를 메고있는 자들을 가게할뿐 아니라 노예제도 자체의 멍에를 없애라."
㉡ 우리는 자비를 필요로하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7절). 즉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억압을 받고있는 자들을 구하고 속량하는 일 곧 포로된 자들을 풀어주고 가난한 자들의 빚을 상환해주는 일에 힘써야 한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이 될것이다.
첫째, 양식이 부족한 자들에게 양식을 공급하는 일 : 금식은 바로 굶주린 자에게 자기의 식물을 나누어주는 것이다. 그것은 정직한 방법을 통하여 자기 몫으로 얻은 식물이어야 한다. 우리는 또한 필요를 느끼는 자에게 베풀어 줄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부인하지 않으면 안된다. 굶주린 자에게 자기의 식물을 주되 부스러기로 주지않고 덩어리채로 주는 것이 참된 금식이다.
둘째, 숙소를 원하는 자들에게 숙소를 제공하는 일 : 금식은 바로 '유리하는 빈민을 자기 집에 들이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공연한 고생을 한다면 그들에게 적당한 숙소를 제공하라. 그리고 필요하다면 그들을 너의 집으로 안내하라. 이것은 단순히 숙소를 제공하는 것보다 더 큰친절을 베푸는 것이라. 나그네 대접하는 일을 잊지말라. 왜냐하면 너는 이런 일을 통하여 그리스도 자신을 대접할수도 있기 때문이라.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나그네 되었을때에 네가 나를 영접하였다'고 말씀하셨다"(마 25:35).
셋째, 헐벗은 자들에게 옷을 입히는 일 :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어떤 사람들은 이말이 친척에게 베푸는 자선행위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들은 이말을 더 일반적인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인간은 누구나 동일한 본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한골육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모두 한 아버지를 섬기고 있기 때문이다.

Ⅲ. 참이스라엘에게 주시는 격려 58:8-12
이본문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을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무 값없고 즐거운 잔치를 베풀어주겠다는 귀한 약속들이 언급되고 있다.
(1) 위에서 언급된 것들이외의 의무들이 나타나 있다(9,10절).
1) 우리는 난폭하고 부정한 모든 행동을 삼가야 한다. "그모든 행동들은 '너희중에서' 곧 너희의 마음, 인격속에서 제거되어야 한다." 즉 "너는 피해를 입히는 행동을 삼갈뿐 아니라 네안에서 그러한 행동을 하고자하는 모든 성향도 버려야 한다." 혹은 "네 백성중에서 그러한 행동들을 삼가게 하라." 권세자들은 자기들의 관할 구역내에서 어떠한 압제도 생겨나지않도록 가능한한 모든 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들은 '멍에를 꺾을'뿐 아니라(6절) 그 멍에를 제거해버려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공갈을 그치고'(엡 6:9) '손가락질'을 하지말아야 한다. 손가락질은 가난한 불쌍한 사람들을 지적하여 그들로하여금 수치스럽게 하는 행동이다. 그리고 그들은 허망한 말을 함으로써 서로를 기만하거나 아첨하지 말고 모든 대화를 진지하게 나누어야 한다.
2) 우리는 자비와 은혜를 풍성하게 베풀어야 한다. 우리는 아무 값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주어야하며 자비를 베풀고자 하는 근본정신에 따라 주어야 한다. 우리는 '주린 자에게 우리의 심정을 동해야 한다.' 즉 우리는 돈을 꺼내줄뿐 아니라 이러한 행동을 할때 비참하게 보이는 자에게 인자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구제할때에는 구제하고자 하는 마음도 수반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기꺼이 구제하는 자를 사랑하시며 도움을 받는 가난한 자 역시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우리 주 예수께서도 수많은 무리들에게 병을 고쳐주고 먹을 것을 주셨을때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괴로와하는 자의 마음을' 애타게 하지않고 '만족케'하기 위하여 아낌없이 풍족하게 주어야 한다.
(2) 이 의무를 수행함으로써 얻는 축복과 은혜가 여기에서 충분히 설명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큰고통을 겪게한 다음 다시 자비를 베풀어주심으로써 그들을 놀라게 하실 것이다. 이것은 길고 어두운 밤이 지난 다음 비치는 햇살처럼 환영을 받을 것이다.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같이 비췰 것이며(8절). 네 빛이 흑암중에서 발하여(10절). 하나님께서는 즐거운 마음으로 선을 행하는 자들로하여금 기쁜 마음으로 선을 누리게 하실 것이다. 이것 또한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이다(전 2:24).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자들은 그들이 고난을 당할때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것이다. 선한 일은 선한 명성을 통해 보상받을 것이다. 이것은 '흑암중에서 발하는' 빛속에 포함되어 있다. "너의 의는 전위에 서서 너를 향하여 돌격해오는 적들로부터 너를 보호하는 선도자의 역할을 할것이다. 그리고 여호와의 영광은 너의 뒤를 지켜주실 것이다. 그는 피곤하여 낙오하는 자들을 끌어모아 아말렉과 같이 네 후미를 치려는 적들로부터 너를 안전하게 지켜주실 것이다." 선한 사람들은 어느 면으로도 안전하다. 그들을 방어해주는 것이 그들의 의라면 여호와의 영광은 그리스도다. 그리스도는 바로 우리의 후미를 지켜주시는 분이시며 우리는 우리의 죄가 우리를 추적하여 잡으려 할때 의지할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정한대로 금식일에 네가 부르짖으면 여호와께서 응답하사 네 간구하는 것들을 베풀어주실 것이다. 너는 어떤 고통을 당하거나 갑작스러운 두려움을 느낄때 부르짖을 것이다. 그러면 그는 '내가 여기있다'고 말씀하실 것이다." 그들이 어디에서 기도하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여기에서 내가 듣고있다. 나는 너희가운데 있다." 그는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신다(신 4:7).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우리는 이세상이란 광야에 머무는동안 하늘로부터 끊임없는 지시를 받아야 한다. 선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지혜와 지식뿐 아니라 기쁨도 주신다. 그는 자기 자신속에서 양심의 증거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확신을 통하여 만족을 얻는다. 이러한 것들은 아무리 괴로울때에도 영혼을 만족시키며 마음을 기쁘게 할것이다. 이들은 '네 뼈를 견고케'하며 몸속에 있는 뼈처럼 힘이 될 기쁨을 네게 줄것이다. "너는 물댄 동산같이 은혜가 충만하며 가뭄이나 서릿발에도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과 같을 것이다. 물샘은 물이 흘러나와도 항상 가득차 있듯이 자비로운 사람역시 선행을 많이 하면서도 선이 충만하며 아무리 도움을 베풀어준다해도 결코 가난해지지 않는다. "네가 너의 세대에게 도움을 주듯 장차 네게서 날 자들 곧 너의 후손도 그들의 세대를 위하여 유익한 자들이 될것이다." 그들은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다.' 이것은 바벨론에서 돌아온 포로들이 유다의 성읍과 이스라엘의 많은 성읍을 다시 세움으로써 성취되었다. 그들은 오래전에 시작된 선한 일을 계속 수행하여 끝낼 것이다. 그들은 오래전에 기초를 놓고 여러 세대동안 쌓았던 건물을 꼭대기까지 세워 완공시킬 것이다. 이것은 성전 건축이 여러해동안 정지되었다가 다시 재개되었을때 성취되었다(스 5:2). 그들은 그것으로인하여 모든 사람들로부터 축복과 찬양을 받을 것이다. 너를 일컬어 무너진데를 수보하는 자라 할것이며. "너는 길 곧 안전하고 조용한 길을 수축하여 여행뿐 아니라 거주할수도 있게 하는 자가 될것이라. 그길은 너무도 안전하고 조용해서 사람들은 아무런 주저도 없이 길가에다 집을 지을 것이라." 결론적으로 말해서 만일 그들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을 한다면 그는 다시 그들에게 이전의 화평과 번영을 누리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어느누구도 그들을 두렵게 하는 자가 없을 것이다.

Ⅳ. 안식일 성수 58:13,14
여기에서는 안식일 엄수가 매우 강조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특별히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던 유대인들에게 요구되고 있다. 왜냐하면 창조주에게 영광을 돌리기위하여 그날을 지킴으로 그들은 자신들과 천지를 창조하지 않은 신들의 숭배자들을 구별했기 때문이다(참조 61:1,2).
(1) 안식일은 어떻게 성별되어야 하나(13절). 이 안식일법은 우리가 지키는 주일을 통하여 아직도 우리에게 구속력을 지닌다.
1) 안식일을 경멸하는 어떤 일도 행해져서는 안된다. 우리는 안식일에 우리의 발을 금하여 안식일을 범하지말아야 한다. 즉 우리는 그거룩한 날에 우리의 발을 금하여 오락을 행치말아야 한다. 즉 우리는 양심의 통제나 절제없이 안식일에 우리가 기뻐하는 것을 마음대로 행해서는 안된다. 안식일에 우리는 우리 길로 행치말며(생업에 종사하지 말며) 우리 자신의 오락을 구하지 말아야 한다(운동이나 오락을 해서는 안된다). 아니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말을 해서도 안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안식일에 신앙적인 일만 해야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집에 있거나 밖으로 나다닐때는 물론이고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언행에 있어서 안식일과 그외의 다른 날을 구별해야 한다.
2) 우리는 안식일을 고된 날이나 부담스러운 날이 아닌 '즐거운 날'로 불러야 한다. 우리는 안식일을 즐거운 날로 생각할뿐 아니라 그렇게 부르기도 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그안식일에 대해 감사를 드리기위하여 그날을 즐거운 날로 불러야 한다. 우리는 또한 다른 사람들을 초대해서 그안식일의 기쁨을 함께 나누도록 하기위해 그날을 즐거운 날로 불러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자신속에서 안식일이 빨리지나 곡식을 팔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않도록 하기위하여 그날을 즐거운 날로 불러야 한다.
(2)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킴으로써 얻는 보상(14절).
1) 우리는 위로를 받을 것이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그자체로서 삯이 된다. 만일...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그는 더욱더 그자신을 우리에게 드러내실 것이다. 만일 우리가 기쁜 마음으로 의무를 행하면 우리는 그의무로부터 만족을 얻게될 것이다.
2) 우리는 영광을 얻을 것이다.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이는 확고한 안전뿐 아니라 큰위엄을 나타내기도 한다. 하나님과 그의 안식일을 존귀하게 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이처럼 존귀하게 하실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우리로하여금 세상의 방해를 받지않도록 세상을 초월하여 살며 세상을 다스릴수 있도록 하신다면 그것은 곧 그가 우리를 '땅의 높은 곳'에 올려놓은 것이 될것이다.
3) 우리는 유익을 얻을 것이다. 내가...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이것은 다시말해서 언약의 모든 축복과 천국을 예표하는 가나안의 모든 귀한 산물들로 기르겠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이 바로 야곱의 기업이기 때문이었다.

# 핵심
58:1-14
이스라엘이 회개해야할 대표적 죄악이라고 할수 있는 외식적인 금식과 안식일 경시 풍조를 책망하고, 참된 신앙을 가질 것을 촉구한다.
금식(58:6)
음식물은 인간의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필수요소이다. 금식은 일정기간 음식물을 먹지않음으로써, 자신이 책임져야할 모든 일에 대해 전적으로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하는 신앙고백이다. 즉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전폭적 신뢰의 뜻이 담긴 것이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은 대속죄일을 거국적인 금식일로 지켰다(레 23:27-32). 이날에는 베옷을 입고 머리에 재를 뿌리며, 자신의 죄를 통회하는 마음을 가져야했으나 점차로 금식의 근본정신이 변질되어 형식적, 위선적인 금식이 만연했다(렘 14:12).

# 묵상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 ( 58:5-7 )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과 주린 자에게 식물을 나눠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입히며, 골육을 피하여 숨지않는 금식입니다. 이는 곧 의를 행하고 사랑을 나누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금식은 곧 우리의 소유와 음식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도적인 행위를 하기위해서는 자기 포기, 자기 부정 곧 십자가를 지는 삶이 실행되어야 합니다.
백성중에서 제해 버려야할 것 ( 58:9-12 )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 등입니다. 멍에란 다른 사람들을 압제하는 행위를 말하며, 손가락질은 멸시와 조소의 표현으로 아람 사람들은 손가락질을 하면 그것은 곧 불행이 임박했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허망한 말은 악한 말, 거짓예언 혹은 싸움과 다툼 또는 허위선전 등의 중상모략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이표현은 불의와 미움과 거짓 등 사회정의를 문란케하는 것을 제하여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안식일 성수의 축복 ( 58:13, 14 )
안식일을 성수할때,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고 땅의 높은 곳에 오르며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양육되는 축복을 받습니다. 즉,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와 안식을 얻게되고 모든 장애물들을 뛰어넘게 되며 땅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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