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udy
(1~9절)
재건될 성전의 영광 - 비록 제1성전(솔로몬)의 위용보다는 못하지만 지금 재건하는 제2성전(스룹바벨)은 하나님의 영광이 더 찬연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격려의 메시지이다. 사실 인간의 판단은 그 대상의 외모를 기준 삼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제2성전의 기초석이 놓일 때 솔로몬 성전의 장엄함을 기억하고 있던 유다 백성들은 기쁨과 환희 이상으로 슬픔과 우울함을 나타내었다(스 3:12, 13). 그들은 이제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을 떠나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때 하나님께서 주신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는 메시지는 계시의 점진성이라는 면에서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는 구속사의 큰 흐름이라는 측면에서도 희망찬 메시지가 아닐 수 없다<행 7:6, 구속사의 이해>.
[1절]
칠월 곧 그 달 이십일일. 학개의 두 번째 설교는 7월 15일부터 한 주간 동안 계속된 초막절의 마지막 날에 선포되었다. 따라서 그의 설교는 어려움 가운데서도(1:6, 10, 11) 무사히 추수를 마치고 예루살렘에 모여 감사하는 축제 분위기 속에서 백성들을 위로하는 데 큰 성과를 거두었을 것이다. 또한 이것은 예수께서 초막절의 끝날에 보혜사 성령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신 상황을 바라보게 한다(요 7:37~39). 추악한 죄인들이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인하여 거룩한 성령의 전이라 불리게 된 것은 그 무엇보다도 즐겁고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고전 3:16, 17; 고전 6:19, 20).
[3~4절]
보잘것이 없지 아니하냐. 성전이란 외형적 건물 뿐 아니라 그 속에 필수적인 성전의 기구들이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그런데 탈무드<마 15:2, 탈무드의 이해와 그 제한성>에 의하면 스룹바벨 성전에는 솔로몬 성전에 있었던 제단의 거룩한 불, 하나님의 영광, 법궤와 스랍, 우림과 둠밈, 예언의 영 등이 빠져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스룹바벨의 성전을 지은 백성들이 솔로몬 성전의 영광을 사모하는 향수에 젖어 허무함까지 느꼈던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와 모든 백성에게 이 전이 장차 누리게 될 영광을 일러주시며(9절), 또한 다시금 그들과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셨으니 이것이야말로 그들에게 있어서 큰 기쁨과 용기, 힘의 원천이 되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다.
[5절]
머물러 있나니. 이 말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망라하여 계속 함께 계셔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이다. 즉 하나님께서 영원토록 그들의 통치자요, 인도자요, 공급자 및 보호자로서 일하시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백성들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강조한다. 이러한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 가운데 머물러 계시며 역사하고 계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어두워진 영성과 탐욕과 성급함 때문이다.
[7절]
만국의 보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기독교적 해석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이르리니'(히, 바우)라는 동사가 3인칭 복수 동사라는 사실에 근거하여 '귀중한 제물들'이라 해석한다. 결국 이 견해는 각국의 수많은 이방인들이 많은 보화들을 가지고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게 될 것을 가리킨다. '보배'(히, 헴다)라는 말이 소원하는 것(the desirable thing)이라는 의미도 내포하며, 삼상 9:20절에서 사울을 가리켜 동일한 단어가 '사모하는 자'라고 사용되기 때문에 이 말은 이방인의 흠모하는 자, 유일한 소원이 되신 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는 견해이다. 이방인 중에서 선택된 영적 이스라엘을 뜻한다는 견해도 있다. 이렇게 다양한 견해들은 서로 상충되는 듯하지만 구속사적인 흐름에서 그 모두는 함께 수용될 수 있다. 결국 '만국의 보배'란 인류의 유일한 소망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방인 중에서 선택된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차 하나님의 교회에 소속될 것을 바라보게 하는 희망찬 메시지를 담고 있는 단어이다.
[8절]
은도...금도 내 것. 은과 금으로 화려하게 장식했던 솔로몬의 성전(왕상 10:21, 27; 대상 22:14; 대하 4:7, 8)을 회상하며 현재의 초라함에 실망해 있던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물질적 풍부는 당신으로부터 연유된 것이며 당신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우쳐 주셨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귀한 '복'이 되신다(시 16:2).
[9절]
성전을 가치 있게 하는 것은 외부 장식들이 아니라 성전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이시다(마 23:16~22). 이런 점에서 스룹바벨의 성전이 영광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본절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사모하는 언약의 사자, 곧 말씀이 육신이 되신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통하여 증거될 예언적 선포이다.
(10~19절)
하나님과 인간의 올바른 관계 - 이것은 두 번째 설교보다 약 2개월 후에 선포된 세 번째 설교이다. 특히 여기서는 의식법에 얽매여 참된 경건을 상실하고 물질의 노예가 되어 하나님과 인간과의 바른 관계를 이루지 못했던 지난날을 경책하고, 나아가 유다 전체의 죄의 오염이 하나님의 축복을 가로막는 결정적 원인이었음을 깨우쳐 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허물을 경책하는 것으로 마치지 않으시고 당신을 경외하고 성전 재건을 시작하는 유다 백성에게 '복'을 주실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즉 하나님께서는 과거의 허물에 집착하시는 것이 아니라 현재 그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가는가를 중요시 하신다. 이와 같이 인간이 하나님의 축복을 덧입느냐, 그렇지 못하냐는 현재 그분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느냐, 맺고 있지 못하느냐는 문제에 기초한다. 과거에 연연해 있는 자는 현재를 충실히 살아갈 수 없다(엡 4:22).
[10절]
구월 이십사일. 9월(기슬르월)은 양력으로 11월과 12월에 해당하는 달인데, 새해의 농사를 준비하기 위하여 이른 비를 기다리는 시기이다.
[14절]
이 백성. 학개가 '내 백성'(히, 암미; 호 2:1)이라 하지 않고 '이 백성'(히, 하암하쩨)이라 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고집과 인간적인 욕심에 따라 살아가던 유다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실망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렘 6:19, 21; 렘 14:10, 11).
[15절]
오늘부터...추억하라. 여기서 '오늘'이 강조된 것은 성전 건축을 재개하여 하나님께 순종한 일이 과거의 징계와 미래의 축복을 나누는 전환점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은 '돌이 돌 위에 첩 놓이지 않았던 때' 곧 성전 재건의 기초석만 놓고 중단해 버린 16년 동안을 돌이켜 보라는 말씀에서도 찾을 수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을 향해 무관심했을 때에 오직 곤고와 슬픔과 탄식만이 그들에게 주어졌던 사실을 회상케 한다. 이처럼 하나님께 대한 무관심은 필연적으로 인간을 고난으로 이끈다. 그러나 무관심을 청산하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열심을 회복하는 심령에게는 하나님께서 측량할 수 없는 은혜로 채워 주실 것이다(욜 2:14).
[17절]
내가...쳤으나. 하나님은 자신의 허물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에게 여러 가지 방법(육체, 물질, 환경 등)을 통해 회개할 것을 종용하신다. 이것은 죄인을 멸망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행동이다. 만약 이러한 요구를 계속적으로 거부한다면 그 영혼은 더 큰 역경과 시련을 겪게 될 것이다(호 4:14; 마 24:39).
[18~19절]
여호와의 전 지대를 쌓던 날. 여기서 '쌓는다'는 말은 '기초를 놓은다'(found)또는 '건축하다'(build), '보수하다'(fix)라는 뜻이 있는데, 여기서는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유다 백성들이 성전 재건을 중단하고 있다가 다시 지대를 놓는 사건을 의미한다(스 3:10~13).
(20~23절)
미래의 축복에 대한 약속 - 학개의 네 번째 설교는 스룹바벨 개인에게 대한 약속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한 개인에게 국한된 약속과 예언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속사의 새로운 장이 전개되고, 하나님 나라의 완성 및 악에 대한 완전한 승리가 이루어질 것을 보여 주는 이중적 성격을 띤 메시지이다. 더욱이 스룹바벨 성전의 재건은 장차 오실 메시야를 대망하고 영접할 준비 작업으로서 그 의미하는 바가 크다.
[21~22절]
여기에 나오는 징조는 '만국의 보배'가 임하여 성전의 영광이 충만케 될 것(7절)과 하나님의 종말론적 심판을 예고하는 표현이다(단 2:44; 미 5:10; 슥 12:9; 마 24:7). 특별히 하나님께서 열국의 보좌와 열방의 세력을 엎드러뜨린다는 말은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실 때에 사용하신 말씀과 유사한 것으로(창 19:29; 사 13:19; 애 4:6; 암 4:11), 악에 대한 완전한 승리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악에 대한 철저한 심판과 승리를 토대로 건설된다. 왜냐하면 그 나라는 절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통치하는 곳이기 때문이다<막 1:15, 하나님 나라의 개념>.
[23절]
네 번째 설교의 결론인 이 구절은 또 한번 스룹바벨이 스알디엘의 아들임을 강조한다. 이것은 스룹바벨이 다윗의 후손임을 강조하며(창 49:8~10), 다윗 후손 곧 메시야를 통하여 성취될 인류 구속과 하나님 나라 건설의 위업은 오직 만군의 여호와의 지혜와 능력으로써만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이다. 내 종 스룹바벨 '내 종'이란 하나님의 거룩한 계획을 받들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선택하신 자라는 의미와 함께, 그는 세상의 종 곧 세상 나라를 위해 봉사하는 인간 총독이 아니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종'의 개념은 하나님 앞에서의 비굴한 위치를 강조하기보다는 하나님과 날마다 인격적 관계를 유지하는 자라는 영광스러움을 담고 있다(스 5:11; 사 42:1; 사 49:3). 이런 의미에서 스룹바벨은 친히 종의 신분(빌 2:7)으로 오셔서 인류 구속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사 41:8, 사 42:1; 사 44:1; 겔 34:23). 그리고 스룹바벨의 지도 아래 성전 재건 공사를 시행하도록 촉구한 것도 결국 성전의 완성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심을 바라보게 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요 2:18~22).
# 해설
재건될 성전의 영광 (1~9절)
학개는 약 한 달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두 번째 메시지를 받았다. 종교력 7월에는 나팔절(레 23:23~25), 속죄일(레 23:26~32), 장막절(레 23:33~43) 등 중요 절기가 밀집되어 있었으므로, 학개는 장막절 마지막 날 백성들이 어려움 가운데서도 추수를 무사히 마치고 감사하는 축제의 분위기 속에서 격려의 메시지를 전달하였던 것이다. 본문은 재건될 성전이 솔로몬의 성전에 비해 외관상으로는 보잘것없으나, 하나님이 성전에 친히 임재하심으로 솔로몬의 성전보다 더욱 영광스럽게 될 것을 말하고 있다. 특히 9절 말씀은 계시의 점진적 발전을 보여 줌과 아울러 그리스도를 향하는 구속사적 흐름을 선명하게 밝혀 주는 말씀이다.
순종에 대한 현세적 축복 (10~19절)
성전 재건에 나태했던 백성들의 죄와 그 결과로 초래된 기근과 재난을 회고하고(14~19a절), 이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성전을 재건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실 현세적 축복을 예언(19b절)하고 있는 학개의 세 번째 설교이다. 여기서 우리는 성전 재건이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회복을 위하여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수행해야 할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인간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며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것으로써 이웃 사랑의 길을 열고 사회의 부조리와 죄악을 척결할 수 있는 것이다.
미래의 축복에 대한 약속 (20~23절)
학개의 마지막 메시지는 스룹바벨 개인에 관한 약속으로 주어졌다. 하지만 본문에는 종말론적 묘사가 두드러지는바, 이 예언은 개인적 차원을 넘어 스룹바벨로서 예표된 메시야의 도래에 관한 약속이라 할 수 있다. 히브리서 기자가 갈파한 바와 같이 스룹바벨 또한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히 11:13)하였던 자들 중 하나였음이 분명하다.
# 핵심
1~9절
포로 이전의 솔로몬 성전과 현재 건축 중인 스룹바벨 성전을 비교하고서 좌절하는 백성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대목이다.
# 묵상
학개의 설교 (1~8절)
이 설교는 초막절 마지막 날 행해졌는 데, 어려움 가운데 추수를 마치고 예루살렘에 모여 감사하는 축제 분위기 속에서 선포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전하시기 위해 적절한 때를 이용하십니다.
성전 건축의 영적 의미 (10~19절)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정립입니다. 성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성실과 부지런함으로 풍성한 삶을 누려야 합니다. 만일 근면하지 못하여 영적 나태함에 빠진다면 더 큰 역경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허물을 깨닫지 못하는 자 (17절)
하나님은 이러한 자에게 물질이나 환경 등의 여러 가지 방법으로 회개할 것을 종용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멸망시키려는 의도가 아니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의지요, 자비로우신 은혜입니다(욥 17:4; 잠 28:5).
내 종 스룹바벨 (23절)
이는 하나님의 거룩한 계획을 진행시키기 위하여 주권적으로 선택한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스룹바벨이 다윗의 후손임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창 49:8~10). 이 말을 통해 다윗의 후손인 메시야에 의해 성취될 인류의 구속과 하나님 나라의 건설은 오직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종'이라는 개념은 하나님 앞에서의 비굴한 위치에 있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유지하는 자라는 영광스러움을 포함하는 단어입니다.
출처 : 바이블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