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udy

 

Ⅰ. 백부장의 종을 고치심 7:1-10

여기 기록된 백부장의 종의 치유에 대한 기사와 마태복음 8:5절이하의 기사 간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마태복음에는 백부장이 그리스도에게 온 것으로 되어있으나, 여기 본문에는 백부장이 처음에는 유대인 장로 몇을(3절), 그리고 다음으로 벗들을 그리스도에게로(6절) 보냈다고 되어있다. 이 기적은 본문에 우리 주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행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1절). 그리스도는 공개적으로 말씀하셨다. '내가…은밀히는 아무것도 말하지 아니하였다'(요 18:20).

(1) 백부장의 병든 종은 주인에게 사랑받는 자였다(2절). 그가 부지런하고 성실하여 그의 주인에게서 존중과 사랑을 받았다는 것은 칭찬할만하다. 종은 자기 주인에게 사랑을 받도록 애써야 한다. 마찬가지로 선한 종을 둔 주인이 그 종을 소중게 여길줄 안다면 그것또한 칭찬받을만한 일이다. 많은 주인들이 가장 훌륭한 종을 나무라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들에게 충분한 호의를 베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주인은 그들에게 친절하고 부드럽게 하며, 그들의 복지와 안락을 누릴수 있게 해주려고 노력해야 한다.

(2) 그 주인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그리스도가 오셔서 그 종을 구해줄 것을 청하였다(3절).

(3) 그는 유대인의 장로 몇을 그리스도에게 보냈다. 이는 그렇게 하는 것이 그 자신이 가는 것보다 그리스도에게 더 큰 경의를 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에서 그는 유대인들을 보낸 것이다. 그리고 그가 보낸 유대인들은 보통의 유대인이 아니라 유대인의 장로들이었다. 그는 권위있는 사자들을 보냄으로써 그들을 맞는 그리스도에게 경의를 표하고자 했던 것이다.

(4) 유대인의 장로들은 백부장의 충실한 중재자들이었다. '이에 저희가 예수께 나아와' 그를 위해 '간절히 구하였다'(4절). 백부장은 결코 스스로 구하지는 않았지만 '이 일을 하시는 것이 그 사람에게 합당하니이다'라는 말을 듣는 자격이 있는 자였다. 백부장은 '나는 주의 방문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했지만(마8:8), 유대인의 장로들은 그가 치료받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특별히 주장한 것은 백부장이 비록 이방인이지만 유대민족과 그들의 종교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라는 사실이었다.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5절). (유대 민족을 사랑하는 이방인은 거의 없었다.) 정복자들과 권세를 잡은 자들이라도 피정복자들과 지배를 받는 자들에게 호의를 가져야 한다. 백부장은 유대인들의 예배에 대해 호의를 가졌다. 그는 그들을 위하여 가버나움에 새로운 회당을 지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의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숭배한다는 것과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기도를 통해 이득을 얻고자한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경건한 예배를 드릴 집회소를 짓는 것은 매우 선한 사업이며, 그러한 종류의 선한 사업을 하는 자들은 배로 존경받을만한 자들이다.

(5) 예수 그리스도는 백부장에게 기꺼이 자비를 베풀고자 하였다. 백부장은 이방인이었는데도 그리스도는 곧 그들과 함께 가셨다(6절). 백부장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다(7절)'.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가 자기의 방문을 받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셨다.

(6) 백부장은 그외에도 자기의 믿음과 겸손을 보여주었다. 그리스도께서 그 집에서 멀지않은 곳에 오시자 백부장은 벗들을 보내 기이한 말로써 그를 영접하였다.

1) 그의 겸손의 말 :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6절). "나는 그러한 영광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이말은 그가 권세가의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낮게 생각했으며 그리스도의 신분이 이 세상에서 비천하였는데도 그를 높이 생각했다는 것을 나타내준다.

2) 그의 믿음의 말 :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당신께서는 제 집에 들어오시지 않고도 제 종을 고칠수 있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7절). 그는 자기 직업에서 한가지 비유를 들어보임으로써 자신의 이러한 믿음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그가 자신의 군병들에게 명령할수도 있으며 심부름을 보낼수도 있듯이 그리스도도 이와같이 질병을 물러가라고 쉽사리 명령하실수 있음을 확신하였다(8절).

(7) 우리 주 예수께서는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감탄하여 매우 기뻐하셨으며 그가 이방인이었다는 사실때문에 더욱 기이히 여기셨다. 백부장의 믿음이 이처럼 그리스도를 영예롭게 했을때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얼마나 존귀하게 여기셨는지 살펴보자. 예수께서…저를 기이히 여겨 돌이키사 좇는 무리에게 이르시되…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9절). 그리스도는 그를 좇는 자들로 하여금 훌륭한 믿음의 본보기를 관찰하고 주목하게 하신다. 특히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처럼 가까이 그리스도를 따르지않는 자들가운데서 그렇게 훌륭한 믿음을 가진 자를 보게 될때 그들에게 주의를 환기시키신다. 그리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그들의 신앙의 깊이를 보고 부끄러워져서 우리의 믿음의 나약함과 불안정함을 고치게 하신다.

(8) 치유는 즉각적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행해졌다.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보매 종이 이미 강건하여졌더라(10절). 그리스도는 불쌍한 종들이 당하는 처지를 인정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차별대우하는 일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Ⅱ.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심 7:11-18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가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기사를 읽게 된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이 내용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1) 이 기적은 언제 어디서 행해졌나? 그것은 그리스도가 백부장의 종을 치유한 다음날이었다(11절). 이 일은 가버나움에서 그다지 멀지않은 나인이라는 작은 성 또는 마을의 성문에서 행해졌다.

(2) 누가 그 기적을 목격하였나? 그 일은 성문안, 혹은 가까이에서 마주친 두무리들이 보는 앞에서 행해졌다. 한무리는 그리스도와 동행한 제자들과 다른 사람들이었으며(11절), 또 한무리는 청년의 장례에 참석한 친척들과 이웃들이었다(12절).

(3) 우리 주 예수께서는 어떻게 그 기적을 행하셨나? 생명을 되찾은 사람은 청년이었다. 그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였다. 그녀는 노년의 지팡이로서 아들을 의지하였으나 그는 꺾인 갈대가 되었다. 독자에 대한 이 불쌍한 어머니의 슬픔이 얼마나 깊었는지는 잘 알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과부였으므로 슬픔은 더욱 깊었을 것이다.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녀와 함께 나와 그녀가 아들을 잃은데 대해 애도를 표하고 그녀를 위로하였다. 그리스도는 청년을 살리시면서 긍휼과 권세를 보여주셨다. 고통당하는 자들에 대한 그 동정이 얼마나 애틋한가를 보라.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말라 하시고(13절). 주께서는 장례 행렬을 따라 묘지로 가는 가련한 과부를 보시고 그녀를 불쌍히 여기셨다. 여기서 그녀는 그리스도에게 어떠한 요청도 하지않았다. 주께서는 오로지 그의 타고난 인정으로 그녀를 염려하셨다. 사정은 딱하였으며, 그리스도는 그것을 연민의 눈으로 보셨다. 그리스도는 그녀에게 울지말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의 연민과 그의 무한한 자비에 대해 얼마나 만족스러운 생각을 하도록 해주는가? 그리스도는 울지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는 그녀에게 다른 어느 누구도 제시할수 없는 그 이유를 설명해 줄수 있었다. "죽은 아들때문에 울지말라. 그는 곧 산 자가 될 것이다." 이것은 특별히 그 과부의 경우에 해당되는 이유였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모든 자에게 공통되는 이유가 있다. 그들은 다시 일어날 것이며, 영광되게 일어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망이 없는 자들처럼 슬퍼해서는 안된다'(살전 4:13). 그런즉 그리스도의 긍휼히 여기심을 생각하여 그런때 우리의 격정을 억제하고 진정시키자. 그의 명령은 죽음조차 이긴다는 것을 유념하라.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14절). 그렇게 하심으로써 죽은 자를 멘 자들에게 나아가지 말것을 암시하셨다. 그러자 멘 자들은 섰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권능을 가진 자답게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엄숙하게 말씀하셨다. 그 말씀에 능력이 함께하여 그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리스도가 죽음을 지배한다는 사실은 그의 말씀이 즉각적으로 효력을 나타냄으로써 입증되었다. 죽었던 자가 일어나고(15절).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은혜를 입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것을 나타내 보이자. 생명을 얻었다는 또다른 증거는 청년이 말을 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영적 생명을 주실때는 언제나 기도하고 찬양하도록 입을 열어 주신다. 그리스도는 청년을 어미에게 주어 어미를 섬기며 충실한 아들이 되게 하셨다. 이제 그 과부는 고통을 받았던 시간에 뒤따라오는 위로를 받았다.

(4) 이 기적은 사람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 하더라(16절). 그들은 모두 이 기적을 보고 두려워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우리는 주님의 위대하심뿐만 아니라 자비하심도 두려워해야 한다. 그들이 그 기적을 보고 얻은 결론은 '큰 선지자가 우리가운데 일어나셨다'는 것과 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는 것이었다. 이 일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모든 자들에게 참으로 죽음에서 살아나는 일이 될 것이었다. 기적에 대한 소문은 온나라에 다퍼졌다(17절).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멀리 떨어져있던 온유대와 그 사방인 갈릴리에 두루퍼졌다. 많은 사람들은 그 맛과 향기를 그들의 영혼속에 지닐수 없었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특히 감옥에 있던 세례 요한에게도 그 소문은 조심스럽게 전달되었다(18절). 그의 제사들이 와서 이 모든 일들을 그에게 고하였다. 그래서 그는 비록 자신은 매여있었지만, 주의 말씀은 매여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비록 일을 못하였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Ⅲ. 예수께 보낸 세례 요한의 메시지 7:19-35

(1)우리는 본문에서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께 보낸 메시지와 그리스도가 보내신 답변을 보게된다. 우리가 그리스도에 관하여 묻게되는 가장 큰 질문은 그가 오실 그이인지,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하는지의 여부이다(19, 20절). 하나님께서 구주가 오리라고 약속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확신한다. 그런만큼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일을 수행하시리라고 약속하셨다는 것도 믿는다. 만약 이 예수가 약속된 메시야라면 우리는 그를 영접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않다면 우리는 계속 기대를 가지고 메시야를 기다릴 것이다. 세례 요한 자신은 이 문제에서 자신의 믿음을 확증받고 싶었다. 유대교의 높은 자들은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메시야는 권세와 위엄을 가지고 나타날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그에게는 그러한 것들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당신이 오실 메시야이니까"라고 묻는 것은 행한 일에 맡겼다. 요한의 제자들이 그와 함께있었을 마침 그시에 그는 많은 기적적인 치료를 행하셨다.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소경을 보게 하신지라(21절). 그는 많은 치료를 행하셨으며, 거기에는 속일만하다고 생각되는 의심할만한 어떠한 근거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하고나서 그리스도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라'고 명령하셨다(22절). 요한과 그의 제자들은 일반 사람들조차 그러했듯이(요 7:31),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의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고 어렵지않게 주장할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예수께서 사람들의 몸에다 이 일을 행하셨다는 것을 알고있다. 그러므로 사람의 영혼에 그 일을 행하기위해 오실 자도 이 사람이라고 결론지어야 하며, 다른 이를 기다려서는 안된다. 그는 육체에 행한 이 기적에다가 은혜의 왕국에서 행해지는 기적을 첨가시킨다(22절). 그들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일이 메시야에 의해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메시야의 특성에 더욱 안전하게 부합될 다른 사람을 기다릴수 있을지 없을지를 판단해야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그에 대해 좋지않은 편견을 가질 위험성이 있다는 것을 그들에게 암시해 주셨다(23절). 그리스도가 나사렛에서 자라난 것, 갈릴리에서 거주한 것, 그의 가족과 친족의 빈천한 신분, 그의 가난, 그를 따르는 자들의 천박함, 이와같은 것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거침돌이 되었다. 이러한 편견들을 극복하는 자는 지혜롭고 겸손하며 성품이 좋은 자이므로 복을 받는다.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축복하시며,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으로 복될 것이라는 표시이다.

(2) 우리는 본문에서 그리스도가 세례 요한에 대해서 말씀하신 지극히 높은 찬사를 대하게 된다(24절). 그들은 이제 광야에 나가서 본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말씀하셨다. "오라, 내가 너희에게 말해 주리라".

1)세례 요한은 확고부동하고 지조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아니었다. 그는 갈대처럼 변덕스럽지 않고 반석처럼 확고한 사람이었다.

2)그는 비할데 없는 자기부인의 사람이었다. 그는 부드러운 옷을 입지도 사치하게 지내지도 않는 자였다(25절). 반대로 그는 광야에서 지냈으며 입는 것과 먹는 것도 거기에 어울리게 하였다.

3)그는 선지자였다. 아니 그는 구약의 다른 어떤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였다(26절). 이전의 선지자들은 그리스도를 멀리있는 자라고 말했지만, 요한은 그를 문앞에 있는 자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4)요한은 메시야의 선구자요, 그 자신이 구약에서 예언된 자였다(27절). 기록된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예비하리라(27절).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보내시기 전에 그의 오심을 알리기위하여 사자를 보내셨던 것이다. 주님께서 앞서 그의 길을 예비하시고자 보내신 사자가 회개와 회심을 선포함으로써 그 일을 완수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왕국의 영적 특성에 대한 매우 뚜렷한 전조였다. 이처럼 예고된 나라는 분명히 이 세상의 나라가 아니었다.

5)그는 지극히 위대하여 실로 그보다 위대한 자가 없었다. 선지자들은 여자에게서 난 자들가운데 가장 위대한 자들이었지만, 요한은 그러한 모든 선지자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자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28절). 어린양을 따르는 자는 지극히 비천한 자라 하더라도, 그보다 앞서 간 지극히 큰 자들을 훨씬 능가한다. 그러므로 복음시대에 사는 자들이 책임져야할 일은 그만큼 더많은 것이다.

(3) 우리는 본문에서 그 당시의 사람들에 대한 정당한 책망을 보게된다.

1)그리스도는 여기서 세례 요한이 설교하고 세례를 베풀면서 받은 모욕에 대해서 설명해 주신다. 요한에게 존경을 표한 자들은 일반 백성들뿐이었다(29절). 이들은 참으로 속된 무리로서 '율법을 알지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받은 자로다'라고 칭하여진 자들이었다(요7:49). 그리고 요한의 세례를 받은 세리들도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들은 회개하고 회심함으로써, 세례 요한 같은 자를 메시야의 선구자로 임명하신 하나님을 의롭다고 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을 명백하게 해주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헛된 일이었다하더라도 그들에게는 그렇지않았기 때문이다. 교회와 나라의 큰 자들은 실로 세례 요한의 말을 듣기는 했지만, '그에게서 세례를 받지 않았다'(30절).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뜻에 응했다면 그것은 그들 자신을 위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고, 그것은 스스로를 거스르는 일이었으며, 그들을 파멸시키는 일이었다.

2)그리스도는 본문에서 그 당시 사람들의 사악함을 설명하고 계신다. 그들은 편견을 품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유익을 주기위하여 택하신 방법을 단지 조롱거리로 삼았다.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꼬(31절). 그들은 장터에 앉은 아이들처럼 심각한 생각은 조금도 하지않고 놀고싶은 마음으로 가득해 있다. 마치 장터에서 노는 아이들처럼 하나님께서 그들과 장난이나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모든 일을 웃음거리로 돌려버렸다.(32절) 이로인해 그들은 파멸한다. 그들은 자신의 영혼의 일이 중대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오! 눈멀고 사악한 세상의 헛됨과 어리석음이여! 주께서는 그들을 안일함에서 깨우신다. 그들은 여전히 트집잡을 일을 이모저모로 찾았다. 세례 요한은 과묵하고 엄격한 사람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고립되어 살았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사상가이며 명상가였던 그의 말을 마땅히 경청했어야 했다. 그러나 칭찬받아야할 이러한 사실이 오히려 비난거리가 되어버렸다.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하더니(33절). 즉, 그는 침울하고 귀신들린 자라고 사람들은 말했다. 우리 주 예수님은 보다 자유롭고 개방적이셨다. 그는 '오셔서 먹고 마시셨다'(34절). 그는 바리새인들과 세리들에게 가서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곤 하셨다. 그는 이들에게 선을 베풀고자 하셨으므로 그들과 친하게 사귀셨다. 이일로써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매우 다양한 기질과 성향 그리고 가지가지의 전도방법과 생활방식을 가질수 있다는 사실과 이 모든 것들이 선하고 유용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수 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모든 다른 사람들의 표준으로 삼아서도 자기들과 똑같이 행하지않는 사람들을 혹독하게 비판해서도 안된다.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를 증거하였고, 그리스도는 세례 요한을 칭찬하셨다. 그들 각자의 생활방식이 서로 달랐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이 두사람 공동의 적들은 그들을 모두 비난하였다. 요한을 미쳤다라고 했던 바로 그 사람들이 우리 주 예수를 품행이 타락한 자라고 말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비난하였다. 악의를 품은 자들은 결코 좋게 말하는 법이 없다.

3)이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선택된 남은 자들을 구원하심으로써 영광을 받으시리라는 것을 보여주신다.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함을 얻느니라(35절). 지혜의 자녀들은 이점에 있어서 이의가 없으며, 하나님이 지혜로써 택하신 은혜의 방법에 만족해 한다. 또한 어떤 사람들에게 조소를 당한다고해서 그 방법에 대해 나쁘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Ⅳ. 바리새인의 집에 계신 그리스도의 발에 한 여인이 향유를 부음 7:36-50

이 본문에 나오는 사건이 언제 어디서 일어난 일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그리스도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고 비난받으시던 때를 즈음하여 본문의 기사가 나온다. 여기서 그리스도에게 극진한 사랑을 보여준 이 여인이 누구인지는 나타나있지 않다.

(1) 한 바리새인이 그리스도를 정중하게 대접하였다.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36절). 이 바리새인은 그리스도를 믿지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 바리새인은 그를 선지자로 인정하려 하지않았기 때문이다(39절). 그런데도 우리 주 예수께서는 그의 초대에 응하여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다'. 그리스도에 대해 편견을 가진 자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담대하게 그러한 사람들과 교제할수 있을 것이다.

(2) 불쌍한 죄인이 그리스도에게 큰 경의를 표하였다. 그 동네에 사는 그 여인은 '죄인이요 창기로' 불명예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녀는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식사하시기 위해) 앉으셨음을 알고(37절) 그의 은혜에 감사하기위해 왔다. 그녀는 다른 방법으로는 감사를 드릴 기회가 없었으므로 그리스도의 발을 씻기고, 가지고 온 향유를 그 발에 부었다. 여기서 이 여인은 그리스도를 정면에서 보지않고 그 뒤로 가서 여종의 일을 감당하였다. 이 선한 여인이 행한 일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수 있다.

1)그녀는 자신의 죄에 대해 몹시 부끄러워함 : 그녀는 울며 그리스도의 뒤에 서있었다. 그녀의 눈은 죄가 들고나는 곳이었지만, 이제는 눈물의 샘이 되었다. 아마도 과거에는 화장되어 있었을 그녀의 얼굴은 지금 눈물로 얼룩져 있다. 전에는 예쁘게 땋아 치장되었던 그녀의 머리털은 이제 수건이 되었다. 그녀가 전에는 죄때문에 슬퍼했지만 이제 그리스도에게로 올 기회를 얻어 그 슬픔을 이기게 되었다고 우리는 당연히 생각하게 된다.

2)주 예수에 대한 그녀의 강한 애정 : 그녀가 사랑이 많다는 사실은 주 예수께서 주목하신 점이었다(42,47절). 그녀는 그의 발을 씻겼다. 눈물 곧 기쁨의 눈물로 씻겼다. 그녀는 자신의 영혼이 사모하는 구주와 그토록 가깝게있다는 것을 느끼며 도취경에 빠져 있었다. 그녀는 그의 발에 입을 맞추었다. 그것은 사랑의 입맞춤인 동시에 경모의 입맞춤이었다. 그녀는 그의 발을 자기의 머리털로 닦았다. 그녀의 눈에서는 그 발을 씻길 물이 나왔으며 그녀의 머리털은 그것을 닦을 수건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발에 향유를 부었다. 진정으로 회개하는 사람에게는 주 예수에 대한 진한 사랑이 있다.

(3) 그리스도가 이 불쌍한 여인이 표하는 경의를 받아들인데 대해 그 바리새인들은 화가 났다(39절). 그는 그 마음에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이 여자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만큼 지식이 있고, 성결할 것이며 따라서 그녀가 자기에게 그토록 가까이 가게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교만하고 편협한 마음을 가진 자는 다른 사람들도 자기들처럼 거만하고 비판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기가 쉽다는 것에 주목하자.

(4) 그리스도는 그 여인이 자기에게 행한 일과 자신이 그 일을 받아들였던 것이 정당하다고 하셨다. 그리스도는 그 바리새인이 마음속으로 말한 것을 알고 그에 대해 답변하였다.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말이 있다(40절). 시몬은 기꺼이 그리스도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자 하였다. 저가 가로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이제 그리스도는 그 바리새인에게 답변해 주시면서, 다음과 같이 이치를 따져 설득하셨다. 이 여인이 죄인이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도 그것을 알고있다. 그러나 그녀는 용서받은 죄인이며, 이러한 사실은 그녀가 회개한 죄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녀가 그에게 행한 일은 구세주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었다. 만약 그토록 큰 죄인이었던 그녀가 용서받았다면 그녀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자신의 구주를 사랑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녀의 사랑의 결실이고 그녀의 죄를 용서받았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다면 그리스도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하며 바리새인이 그 일에 화를 내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1)그리스도는 하나의 이유를 들어 이 여인의 죄가 크면 클수록 그녀가 죄사함을 받았을때 그리스도에게 보여주는 사랑도 그만큼 커야 마땅하다는 것을 시몬이 인정하도록 설득하셨다(41-43절). 어떤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 있었는데 두사람 다 빚을 갚을 능력이 없었다. 그중 한사람은 다른 한사람의 열배를 빚지고 있었다. 빚을 준 사람은 아주 너그럽게 그 두사람의 빚을 탕감해 주었으며, 그들을 대상으로 소송하지도 않았다. 이제 그 두사람은 자기들이 받은 큰 호의를 깨달았다. 그렇다면 이들 중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는가? 그 바리새인은 분명히 대답하였다. '많이 탕감받은 자니이다.' 여기서 우리는 빚진 자와 빚을 준 자 간의 도리를 배우게 된다.

①빚진 자는 갚을 것이 있으면 배상해야 한다.

②하나님의 섭리로 빚진 자가 그의 빚을 갚을수 없게 되었을때, 빚을 준 자는 빚진 자를 혹독하게 대하지 말고 너그럽게 그를 용서해야 한다.

③채권자가 자비롭다는 것을 깨닫은 채무자는 그에게 감사해야 한다. 그리고 마땅히 그를 사랑해야 한다. 빚을 갚을수 없게된 채무자들 중에는 자기들때문에 손해를 입은 채권자들에게 감사하기는 커녕 원한을 품고, 그들을 좋게 대하지 못하는 자들도 있다. 이 비유는 하나님을 채권자로(또는 주 예수 자신을 채권자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탕감해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죄인은 채무자로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들을 배우게 된다.

㉠죄는 빚이요 죄인은 전능하신 하나님께 빚진 자이다. 피조물로서 우리는 빚, 곧 순종의 빚을 지고 있다. 우리는 임대료를 지불하지 않았다. 아니 우리는 우리 주의 소유물을 허비하였고, 그럼으로써 채무자가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죄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보다 하나님께 더많은 빚을 지고 있다.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41절). 그 바리새인은 보다 조금 빚진 자였지만, 그 역시 자신이 생각하는것 이상으로 빚진 자였다. 이 여인은 많이 빚진 자였다. 어떤 죄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많은 빚을 짊어지고 있다.

㉢우리의 빚이 많건 적건 간에 그것은 우리가 지불할수 있는 이상의 것이다. 그들은 갚을 것이 없었으며 타협할만한 것도 전혀 없었다. 우리 자신이 행한 의로도 우리의 빚을 갚을수는 없다. 아니 앞으로 회개하고 복종한다해도 갚지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그 빚에 묶여있기 때문이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불쌍한 죄인들을 숨김없이 용서하시고자 하신다. 우리가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가 저지른 죄악은 우리의 책임이 되지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은혜롭고 자비로운 분으로서, 그리고 기꺼이 죄를 사해 주시는 분으로서 선포하셨다.

㉤죄를 용서받은 자들은 그들을 사해주신 분을 사랑해야 한다. 많이 용서받은 자일수록 그를 많이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다. 회개하기 전에 죄가 많았던 자일수록 나중에 더 훌륭한 성도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핍박하던 사울이 전도하는 바울이 되었을때, 그는 더욱 많은 수고를 담당하였다.

2)그는 이 비유를 그 바리새인과 그 죄인의 상이한 태도와 행동에 적용하였다. 그리스도는 그가 적게 탕감받기는 했지만 탕감받은 자라는 것을 인정케 하시려는것 같다. 물론 그도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었지만 이 불쌍한 여인이 보여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살펴보라"고 그리스도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이 여인은 많이 탕감받은 자이기 때문에 너보다 더많이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며, 또 그 사랑을 보여준 것이다" 네가 이 여자를 보느냐(44절). "이 여자가 내게는 너보다 얼마나 더 친절한 친구인지를 보라. 내가 너의 친절은 받아들이고 그녀의 친절은 거절해야 하겠느냐? 너는 내 발을 씻을 물대야조차 가져오라고 명하지 않았지만 이 여인은 더많은 일을 하였다. 이 여자는 나를 크게 사랑한다는 표시로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다. 너는 나에게 입맞추지 않았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너는 평소 머리에 바르는 보통의 기름조차 내게 주지않았지만 이 여인은 옥합에 든 값진 향유를 내 발에 부었다." 몇몇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열성적인 그리스도인이 수고하고 많은 비용을 들이는 것을 비난하는 이유는 그들 자신은 그런데까지 도달하기를 원치않으며 값싸고 안일한 신앙생활에 안주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3)그리스도는 바리새인이 트집잡는 것을 잠잠하게 하셨다.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47절). 그리스도는 그 여인이 죄많은 자라는 것을 시인하셨다. 그러나 저의 사랑이 많으므로 그 많은 죄가 사하여졌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는 말은 '그러므로 저가 많이 사랑하게 되었다'로 해석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녀의 사랑이 많음은 죄사함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였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은 아니다. "사함받은 일이 너처럼 적은 자는 네가 하듯이 적게 사랑하느니라." 우리는 큰 죄인들이 그리스도에게서 자비를 얻는 것을 불평하지 말고, 그들의 본보기를 보면서 자극을 받아 우리도 진정으로 죄사함을 받았는지 그리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지를 되돌아봐야 한다.

4)그리스도는 그녀의 두려움을 없애 주셨다. 그는 그 여인에게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고 말씀하셨다(48절). 그녀는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과 더불어 사죄를 받은 것이다. 이 말은 그녀가 다시 죄짓지 않게하는 얼마나 효과적인 예방책인가. 그 자리에는 그리스도가 죄를 사해주고 죄인들을 용서한다고 선언한데 대해 마음속으로 비난하는 자들도 있었지만(49절), 그리스도는 자신이 하신 말씀을 고수하셨다. 이제 그는 기쁨을 가지고 죄를 사해주신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신다. 그는 참회하는 자들에게 즐겨 용서와 평안을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50절). 죄에 대한 슬픔과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의 모든 표현들은 믿음의 결과요 그 소산물이었다. 모든 은혜에 대한 믿음이 하나님을 지극히 영예롭게 하듯이 그리스도도 그 믿음을 지극히 존귀하게 여긴다.

 

# 해설

구원이 이루어지는 모습 ( 7 )

예수께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복음을 받은 사람들이 구원의 길에 접어들었습니다. 구원의 길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습니다. 예수의 복음을 듣고 응답하는 사람들은 이 길을 걸을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의 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그의 사역은 이제 절정을 향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자신이 이루어 놓을 구원의 일을 미리 선포하시고 맛보시는 것입니다.

 

1. 기적을 행하심

1) 백부장의 청원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지극하시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혈육적인 이스라엘이 아니라 신앙의 혈통을 이은 믿음의 자손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방인 백부장의 이야기는 예수께서 이방인들에게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계신지를 알게 합니다. 백부장이 자기 종을 위해서 예수께 간구하는 것은 진정한 믿음에 기인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를 믿는 믿음이 혈통에 의해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진실한 믿음은 그 사람의 처지와 상관없이 그를 구원의 반열에 이르게 합니다.

a.거룩함(유1:20).

b.보배로움(벧후1:1).

2) 예수님의 칭찬

백부장의 청원을 들은 예수께서는 그의 믿음을 칭찬하십니다. 진정한 믿음의 소유자요, 이스라엘에서도 찾아볼수 없는 믿음의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의 칭찬은 그를 많은 사람들보다 뛰어난 믿음의 소유자로 부각시킵니다. 유대인의 자부심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맙니다. 이제 새로운 믿음의 백성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인도하시는 그의 백성들이 구분되는 시점입니다. 예수께서 중요하게 여기시는 점은 신실한 믿음의 소유 여부에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의 나라를 바라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a.구원에 이르는 것(롬10:9-10).

b.승리의 보증(대하20:20).

3) 과부의 아들을 살리심

인간의 한계를 가장 크게 느끼는 부분이 죽음입니다. 누구나 겪어야 하고 누구도 피할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누구도 진정한 행복을 말할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사건은 그의 능력이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수 있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메시야로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생명을 부여하시는 분임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인간의 문제는 그에 의해서 해결되어질 것입니다. 예수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믿고 확신하는 가운데 진실로 예수를 구주요 하나님으로서 섬기고 경배해야할 것입니다. 메시야의 승리가 선포되었습니다. 기쁨과 즐거움이 우리에게 보장되었습니다. 이것을 받아누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a.믿음으로 삶(롬1:17).

b.믿음을 따라 죽음(히11:13).

 

2. 요한의 증언과 예수의 말씀

1) 세례 요한의 질문

세례 요한은 자신이 선포한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의 행하시는 일들이 그에게 전해지자 그는 예수께 질문을 합니다. 메시야이심을 자신이 선언하시는지 알고싶은 것입니다. 그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이루어지고 있는 일들을 그대로 전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메시야가 하시는 일이 이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곧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누구도 흉내낼수 없는 해방과 구원의 일들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행하는 일을 보고 메시야임을 깨달아 알라는 의미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에 대해 말씀으로 하지않고 직접 삶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은 우리에게도 많은 교훈을 주십니다. 말보다는 실천을 중시해야할 것입니다.

a.언약된 씨(갈3:16).

b.평화를 가져오심(사9:6).

2) 요한에 대한 예수의 말씀

메시야의 오심에 대한 선포는 세례 요한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인간의 죄를 지시고 해방과 구원의 복된 일을 이루실 분이 오실것임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는 다른 어떤 사람들이 감당할수 없는 중요한 일을 감당하였습니다. 구원이 임박한 사실을 널리 알린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요한을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어디에 마음을 두어야하는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육신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진정한 기쁨을 누릴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하고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을 보장받는 길입니다.

a.다윗의 자손(마1:1).

b.복음을 선포하심(사61:1-3).

3) 세대에 대한 말씀

예수께서 많은 기적과 이사를 행하시며 인간을 구원하시는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복음을 들은 사람들은 구원의 길에 기쁨으로 걸어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화인맞은 사람들과 같아서 감각을 잃어버렸고 반응하지않는 사람들입니다. 세례 요한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예수께서 직접 많은 일들로 증거하고 계시는데도 이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우리에게도 일어날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말씀으로 교훈하시고 명령하시는데도 우리는 그 말씀에 귀기울이지 아니하고 자신이 원하는 욕심에 이끌려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께 나아가야할 때입니다.

a.조롱당하심(시22:6-8).

b.침 뱉음을 당하심(사50:6).

 

3.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

1) 마리아가 예수께 향유를 부음

마리아의 행위는 예수의 칭찬을 듣습니다. 마리아가 많은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는 죄인임을 생각하면 그의 마음을 보시는 예수의 능력을 알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판단 기준으로 판단해서 절대적인 진리인양 착각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비범한 판단능력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진실로 겸손히 나아갈수 있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능력을 자랑할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전적인 의뢰를 해야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길이며 하나님의 긍휼을 입는 길입니다.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는 하나님이심을 기억하고 겸손히 주님앞에 무릎을 꿇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a.유일한 구주(행4:12).

b.완전한 은혜(행l5:11).

2) 빚진 자의 비유

자신이 감당할수 없는 일을 해결받았을때 그의 기쁨과 감사는 배로 더할 것입니다. 자신이 죄로 인해서 해결할수 없는 상태에 있음을 깨달은 사람과 자신이 어느 정도는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 사이에는 구원의 기쁨과 감격이 현격한 차이를 보이게될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전적인 은혜이며, 우리의 공로는 하나도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한 일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을 일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로 겸손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a.죄에서의 구원(마1:21).

b.하늘에서 구원을 찬양함(계7:10).

 

결론

예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며 많은 기적과 이사를 통해서 메시야이심을 나타내 주십니다. 이것을 보고들은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예수께서 이루어주신 길이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기쁨의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분과 그의 하신 일을 생각하며 우리의 삶으로 영광을 드려야 합니다.

 

# 핵심

7:1-17

예수님이 로마 백부장의 종을 치유해 주심으로써, 이방인도 구원 대상에 포함시키셨다. 또한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소생시키신 것은 그분이 ‘생명의 주’요, 영생의 수여자이심을 증거한다.

이적(7:11-16)

일반적인 자연 현상과 법칙을 초월해 일어나는 진기한 사건. 일명 기사(奇事)라고도 한다. 성경에선 대개 하나님의 신적 권능을 드러내는 증거, 즉 표적(sign)으로써 언급되고 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자 메시아임을 증거하기위해 여러 이적을 행하셨다. 곧 병든 자를 고치며, 귀신을 내쫓고, 풍랑을 제어하고, 심지어 죽은 자도 살리셨다. 그런데 사단과 거짓 선지자들도 갖가지 이적을 행할수 있었다. 그러므로 성경의 진리를 도외시한채 이적만 중요시하다 보면 미혹될수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마 24:24).

 

# 묵상

로마 백부장의 믿음 ( 7:2-10 )

백부장은 자기 종의 병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청했습니다. 백부장은 100명의 부하를 거느린 로마 장교로서, 그가 친히 예수님을 찾아온 것을 통해 그가 부하를 얼마나 사랑했으며, 그 종이 얼마나 주인을 정성껏 섬겼는지를 알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상하 관계에서도 적용되어야할 본보기입니다. 백부장의 믿음은 이방인인 자신의 처지를 알았고, 지극히 크신 예수님을 감당치 못한다고 고백하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공적을 내세우거나 자랑하지 않고 오히려 주님 앞에서 자신이 비천한 존재임을 고백했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 ( 7:11-17 )

예수님은 과부의 죽은 아들을 향하여 ‘청년아 일어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금기시하던 시체의 관에 손을 대시고 말씀하셨고, 그러자 죽었던 자가 살아났습니다. 이에 사람들은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으며, 큰 선지자가 일어났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고 말했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죽음과 삶의 한계를 극복하시고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을 보여주셨습니다. 또한 장차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고 부활하셔서 모든 죽은 자의 산 소망이 되실 것을 예표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 ( 7:18-28 )

너희가 가서 보고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서에 예언된 메시야의 이적들이 성취되고 있음을 밝히는 것입니다. 아울러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가리켜 선지자보다 나은 자, 여자가 나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칭찬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장터의 아이들 ( 7:32-35 )

바리새인들이 세례 요한에 대해서는 귀신들렸다고 비난하고, 예수님에 대해서는 먹기를 탐한다고 비난하는 것을 지적하는 비유입니다. 또한 이는 상대방의 진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복음의 진리를 외면하며 비난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지혜는 모든 자녀로 인해서 옳다함을 얻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혜란 그리스도를 뜻하고, 자녀란 성도들을 뜻합니다. 즉, 세상 사람들은 주님을 비방하지만 복음의 진리는 성도들에게 큰 기쁨이 되며 만방에 선포되어 옳다고 인정받게 되는 것입니다.

시몬의 시각과 예수님의 시각 ( 7:36-50 )

시몬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금 회복해야할 구원의 대상으로 보고 새로운 삶의 기회를 주십니다. 특히 시몬의 집에서 향유로 예수님의 발을 씻긴 사람은 죄지은 여자였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음을 공적으로 선포하셨고, 그래서 주변에는 죄인이나 소외된 자들이 많았습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에게 손가락질받는 죄인도 자신의 죄를 주님께 고백하고 용서받은 기쁨으로 주님을 성심껏 섬긴 것입니다. 이를 바라보고 바른 생각을 가지지 못한 시몬에게 예수님은 오백 데나리온 빚진 자와 오십 데나리온 빚진 자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사실 시몬은 자신이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죄사함 받은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죄인이므로 많이 탕감받은 자의 심정을 늘 지녀야 합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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