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udy

 

Ⅰ. 유대를 떠나심 4:1-3

추수기 사개월전 예수께서는 유대땅을 떠나셨다(35절).

(1) 제자를 삼으셨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반대에 부딪쳤지만 성공적이었다. 제자를 삼고(1절). 자신의 뜻에 맞추어 사람들을 단련시키고 형성시키는 것은 그리스도의 권한에 속한 일이다. 그리스도인이란 그와 같이 만들어지는 사람들이지 애초부터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2) 제자된 자들에게 세례를 베푸셨다. 그러나 손수 베푸시지 않으시고 제자들의 손을 빌어 세례를 베푸셨다(2절). 제자들을 통하여 베푸셨던 자신의 세례와 손수 모든 이들에게 직접 세례를 베풀었던 요한의 세례를 구별하시고자 하셨기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을 명예롭게 하시며 장차의 일을 위해 훈련시키고자 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에서 자신의 지시를 좇아 자신의 일꾼들이 이루어 놓은 일은 자신이 하신일로 인정하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치시고자 하셨다.

(3) 그리스도께서는 요한보다 더많이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셨다. 또한 그리스도의 설교는 요한의 것보다 훨씬 인기가 좋았다.

(4) 바리새인들이 이 소식을 들었다. 이때에 요한은 감옥에 갇혔기때문에 요한을 제거했다고 생각했던 마당에 예수께서 나타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토록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게 되었다는 사실이 그들에게는 분통터지는 일이었다. 복음의 득세는 복음의 대적들의 노를 자극하게 마련이다.

(5) 우리 주 예수께서는 그를 반대하는 자들의 귀에 그 소식이 들어갔음을 아주 잘알고 계셨다. 이 세상에 우리 주님께 그 의중을 감출만큼 깊은 속을 가지고있는 사람은 없다.

(6) 이제 여기에서 우리 주 예수께서는 유대를 떠나 다시 갈릴리로 가시고자 길을 떠나셨다. 주님께서는 유혈까지 불러올만한 핍박을 예상하시고 유대땅을 떠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고장을 떠나 그가 하는 일을 그들이 직접 목격하게 하는 것보다는 덜 자극을 주는 그러한 장소에 가셨다. 그의 때는 아직 오지않았다. 아직 자신의 증거가 끝나지 않았기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항복하거나 자신을 노출시키고자 하지않으셨다. 또한 유대땅에서 모집한 그의 제자들이 아직은 고난을 견디기에 연약했으므로 그러한 제자들을 적에게 노출시키시려 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여기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이 가르쳐주셨던 법칙의 한 예를 보이시고 계신다.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마 10:23). 우리는 핍박받기 위해 부름받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죄없이도 그 핍박을 피해야할 때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장소로 갈 경우도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갈릴리에서 해야할 일들도 있었고 적은 소수인데 비하여 많은 친구들이 있었으므로 갈릴리로 떠나셨다.

 

Ⅱ.사마리아 여인 4:4-26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사마리아에서 행하셨던 사건에 접하게 된다. 사마리아인들은 그 혈통으로 보나 종교로 보나 혼혈 유대인이었다. 사마리아인들이 섬기는 신은 오직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었으며 그 하나님께 경배드리기 위하여 이들은 그리심 산에 예배당을 세웠었다. 예루살렘으로 가시고자 하는 예수를 보았을때 사마리아인들은 그를 허락지 않았었다(눅 9:53).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이라고 불리우는 것보다 더 큰 욕이 없다고 생각했다.

1. 그리스도께서 사마리아로 들어가심(4-6)

예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라고 당부하고 계시며(마 10:5) 그의 눈길을 오직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만 돌리셨으므로, 이곳에서도 공공연하게 전도하지 않으셨으며 아무런 기적도 행하시지 않으셨다. 그리스도께서 이곳 사마리아인들에게 베푸신 친절은 이따금씩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 같은 것이었다(마 15:27).

(1) 유대 지방에서 갈릴리로 가는 길은 사마리아 지역을 관통하여 나 있었다(4절).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4절). 만일 요르단 지역으로 상당히 우회해야 하는 길을 진로로 잡지않는다면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가는 다른 길은 없었다. 우리는 유혹과 시험의 장소에 들어가서는 안되는 법이지만 들어가야만 할경우에는 거기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되며 서둘러 빠져나와야 한다. 사마리아가 그리스도께서 가시고자 하신 길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은 사마리아로써는 매우 다행한 일이었다.

(2) 그리스도께서는 길을 재촉하시다가 쉬게된 것은 사마리아성 근처였다. 그 장소가 기술되어 있다. 그곳은 수가라 불리는 곳으로 세겜과 동일 지역으로 추정된다. 세겜이란 이 장소는 이스라엘 신앙안으로 들어오고자한 첫개종자를 낳았던 장소였으며(창 34:24) 이제 지금은 복음이 이스라엘 나라밖으로 전파되는 첫장소가 되었다. 이곳은 아비멜렉이 왕으로 추대되었던 곳이었으며(삿 9:6) 여로보암이 도읍지로 정했던 장소였다. 그러나 복음서 기자는 그 장소와 야곱과의 관계에 더욱 주의를 기울였다. 그 땅과 야곱과의 관계야말로 여타 왕들과의 관계보다 더욱 영광스런 것이었다. 여기에는 야곱의 토지, 곧 야곱이 그의 아들 요셉에게 주었던 땅이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또 야곱의 우물이 있었다. 예수께서는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셨다. 우리는 여기에서 평범한 여행자의 모습으로 땀을 흘리시며 애쓰시는 우리 주님의 모습을 볼수 있다. 예수께서는 여로에 곤하셨다. 그때가 한낮의 불볕 더위가 내리쬐는 제육시였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지치셨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참인간이셨으며, 인간 본성의 공통적인 연약함에 복종하셨다. 또한 예수께서는 말을 타고 다니시지도, 마차를 타고 다니시지도 못할만큼 가난한 분이셨다. 우리가 편히 다니고있을때 우리 주님의 그 곤비하심을 생각하도록 하자. 예수께서는 몸이 강건하시지는 않으셨던것 같다. 반면에 제자들은 그들이 별 어려움없이 마을로 내려간 것으로 보아 피곤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흙으로 빚어진 사람의 몸은 피곤에는 대단히 예민하여 피곤을 거의 견딜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도 보통 여행자들이 쉬듯이 쉬셨음을 볼수 있다.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6절). 예수께서는 피곤에 지쳐서 그대로 앉으셨다.

2.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7-26)

예수 그리스도와 제사장들 사이의 논쟁, 그리고 변화산상에서 있었던 모세와 엘리야와 그리스도와의 대화는 침묵속에 가리워졌지만 여기 이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는 기록되어 있다. 이 대화는 네 제목으로 분류할수 있다.

(1) 생수에 관한 주님의 교훈(7-15절)

1)생수에 관한 이 대화가 있게된 상황에 주의해 보자. 거기에는 물을 길으려고 온 사마리아 여인이 등장하고 있다. 그 여인은 물을 긷게할 종이 없었다. 그 여인은 자기 혼자 힘으로 그 일을 해야했다. 우리에겐 그야말로 우연한 것처럼 보이는 사건에 의해 어떻게 거룩한 신적 섭리가 영광의 목적을 달성하는가 보라!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다. 그리스도께서는 동네에 들어가시지 않으셨으며 제자들을 보내어 음식을 마련해오게 하셨다. 이는 사마리아 읍내에 들어가 음식 드시는 일이 내키지않아서가 아니라 그 샘가에서 좋은 일을 하나 하시고자 했기때문이요, 음식을 먹으러 읍내에 들어가는 것보다 그곳에 가져오게 하심으로써 더욱 호젓하게 간섭을 받지않고 더욱 값싸게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드실수 있기때문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마을 가장 좋은 여관에서 드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물 긷는 샘가에서 자신의 식사를 하실수 있었다(요 4:31-34). 대체로 그리스도께서는 대중을 행하여 전파하셨으나, 여기에서는 비록 단 한사람의 영혼일지라도 죽음에서 건져내는 일이 얼마나 영광스러운가를 깨닫게하여 이와같이 하도록 그의 사역자들을 가르치시기 위해 자신을 겸비하게 낮추셔서 단 한사람, 단 한여인, 가난하고 불쌍한 여인, 그것도 이방 여인, 사마리아 여인을 가르치시고 계신 것이다.

2)이제 이 대화를 상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예수께서는 이 대화를 물 한잔 달라는 정중한 청으로 시작하신다. 물을 좀 달라(7절). 우리를 위해서 가난하게 되신 그 이가 이곳에서는 청하는 자가 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의 말문을 트시고자 물 한잔을 청하셨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여전히 가난한 그 지체들(가난한 성도들) 안에서 냉수 한그릇을 청하고 계신다. 가난한 지체들에게 그의 이름으로 냉수 한잔이라도 주는 자는 결단코 그 상을 잃지않을 것이다. 예수께서 통상적인 유대 민족의 기질대로 행하지 않으셨으므로 그 여인은 그의 어투에 대하여 말꼬리를 잡는다. 어찌하여 물을 달라 하나이까(9절).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는 불구대천의 앙숙 관계였다.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이 사마리아 여인은 이 사람의 옷차림으로 보나 말씨로 보나 유대인임에 분명한데 다른 유대인들처럼 처신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상스러웠다. 모든 면에 온화한 사람들은 도리어 이상스럽다는 눈초리를 받는 것이다. 이 여인은 두가지 점에 대해 의아하게 여기고 있다. 그 하나는 유대인으로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 한잔 떠주는 친절을 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사마리아인들에게 신세를 지느니 차라리 어떤 고난이라도 감수한다는 정신을 자랑스럽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비록 우리 국가의 방침이나, 우리 정당의 강령이 대단히 까다롭거나 옳지 못한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 주님과 같이 먼저 친절과 선심을 보여야 한다. 이 여인은 예수께서도 여타 다른 유대인과 똑같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하였다. 그러나 어디에서나 예외는 있는 법이다. 이 여인이 놀란 또하나의 사실은 이 사람이 단지 청할뿐만 아니라 사마리아인인 자기에게서 받기를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기회를 신적인 일에 대하여 그 여인에게 가르치는 절호의 기회로 삼으셨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알았더면 네가 구하였으리라(10절). 그리스도께서는 그 여인이 제기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의 반목 따위는 아예 문제거리로 삼지도 않으셨다. 어떤류의 견해 차이의 문제들에 있어서는 그 견해 차이가 말싸움으로 번질 가능성이 있는 모든 경우를 피함으로써 가장 잘 해결될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여인에게 구주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시사하심으로써 이 여인을 회심시키고자 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여인이 말할수 없는 유익을 얻을수 있는 기회를 지금 맞이하고 있음을 그 여인에게 충분히 인지시키고 계신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녀가 지금 은혜의 때를 맞이했음을 명확하게 말씀해 주신다.

①그리스도께서는 그녀에게 그녀가 알아야 하지만 무지한 사실에 대하여 암시를 주고 계신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좀 달라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이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를 단지 한사람의 유대인, 가난하고 피로에 지친 여행자로 보았지만 예수께서는 그녀가 자신에 관하여 좀더 많은 것을 알기를 원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오신 하나님의 선물이요,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이다. 우리에게 베푸심으로 보내진 이 하나님의 선물을 소유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형용할수 없는 특권이다. 이 선물은 물 좀 달라하신 바로 그 분이시다. 이 선물이 바로 당신에게 오셔서 청하고 계시는 것이다.

②이 사마리아 여인이 그가 누구신가를 알았더라면 어떻게 하기를 그리스도께서는 기대하시고 계신가?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리스도로부터 무엇인가 유익을 얻고자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구해야만 한다. 그리스도께 대하여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그에게 구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지식의 부를 결여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 지식이라는 자산을 소유했었더라면 어떻게 했을 것인지를 알고 계신다.

③그리스도께서는 만일 그녀가 자기에게 청하였다면 자신이 그녀를 위해 무엇을 해주었을 것인지 그녀에게 보증하고 계신다.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이 생수는 샘, 우물 밑바닥에 고여있는 물이 아니라 흘러내리는 물과 같은 성령을 의미한다. 은혜의 성령은 생수와 같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구하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실수 있으며 주시고자 하신다. 그러나 이 여자는 그리스도께서 넌지시 전해주시는 은혜의 말씀을 비꼬고 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은 그리스도께 "당신은 물 길을 그릇도 없지 않소?"라고 말하고 게다가 "당신이 우리 조상 야곱보다도 크니이까?"라고 말하지 않는가! 그리스도께서 비유적으로 말씀하신 내용을 이 여인은 문자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니고데모 역시 그랬었다. 이 여인은 자기 앞에서 얘기하고 있는 이 나그네가 자기에게 물을 조금이라도 줄수 있으리라고 생각지 않는다.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11절)' 게다가 '이 우물은 깊습니다.' 마치 물 양동이가 없이는 물을 전혀 길을수 없다는듯이 세상에는 약속을 이행할 수단이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그 약속을 믿지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여인은 비웃다시피 말한다. "당신이 그 생수를 어디서고 가져올수가 없다는 사실을 내가 뻔히 알고 있는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생명의 샘은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는 샘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어디에 그 샘을 감추어 두셨는지 볼수 없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충분한 샘물을 가지고 계신다. 이 사마리아 여인은 그리스도께서 그녀에게 어떤 더좋은 물을 줄수 있으리라 생각할수 없었다. "당신이 우리에게 그 우물을 준 우리 조상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④여기서 우리는 야곱과 야곱의 아들들과 그 가축이 이 우물 물을 마셨다는 전승이 사실임을 가정할수 있다. 그리고 그런 사실에서 우리는 샘물들을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지도록 보존하는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권능과 섭리를 살펴볼수 있다 하겠다.

⑤그런 사실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몇가지 점에서 그녀는 그릇되었다. 야곱을 자기들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점에서 그녀는 잘못을 범하고 있는데 순수한 이스라엘 혈통이 아닌 혼혈족으로서 사마리아인들이 어떻게 자신들을 야곱의 후손이라 자처할수 있겠는가! 또 이 우물이 야곱이 준 선물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점에서 잘못되었다. 그렇지만 우리도 하나님의 선물을 전달해 주는 심부름꾼을 그 선물을 제공한 사람으로 여겨 그 선물들이 어디로부터 왔는지는 잊어버리고 전해주는 손길만을 바라보는 경우가 너무도 비일비재하다. 그리고 그녀는 그리스도를 조상 야곱에 비교될 가치가 없는 자로 말함으로써 잘못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선량한 사람들 간에도 옛것을 지나치게 숭상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가볍게 취급하는 일이 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주는 물인 생수가 여기 이 야곱의 우물의 것보다 훨씬 좋은 것임을 이해시키신다(13-14절). 그리스도께서는 그녀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녀를 더욱 권면하고 계신다. 예수께서는 이 야곱의 우물 물이 단지 일시적인 해갈만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그녀에게 보이신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13절). 야곱의 우물 물도 다른 물과 마찬가지로 당면한 갈증을 해결시켜줄지 모르나 곧 다시 목마르게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현재 우리의 육신의 상태가 연약하다는 사실과 이세상에서는 결코 만족이 없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우리의 육신은 끊임없이 소모되는 것이다. 생명이란 등잔불같아서 기름이나 연료가 계속해서 공급되지 않으면 곧 꺼져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모든 안락이란 언제나 완전하지 못하며 지속되지 않는다. 어제의 식사와 음료가 오늘의 것이 될수 없는 법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주시고자 하는 생수는 지치지않는 만족과 지복을 가져다 줄 것이다(14절).

㉠은혜의 성령을 소유한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사람에게 있는 애타는 갈증은 오로지 하나님께 대한 것이요 여전히 하나님께 대한 갈망인 것이다. 그러나 절망적이지는 않다 하겠다.

㉡은혜의 성령을 소유한 자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이 물이 그의 안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될 것이기 때문에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 자신 안에 모든 것을 공급해주고 만족케하는 샘을 가지고 있으므로 결코 궁지에 몰리는 일이 없다. 그는 위안을 구하고자 세상으로 갈 필요가 없다. 믿는 자들은 자신 안에 샘물, 넘쳐흐르며 계속해서 솟아오르는 샘물을 가지고 있다. 그 샘물은 계속하여 솟아오르고 있다. 만일 선한 진리가 마치 고여있는 물처럼 우리의 심령속에 고여만 있다면 그 진리는 우리가 그 진리를 받은 목적에 부합되지 못한다. 또한 그 샘물은 모든 은혜의 목적이 되는 영원한 생명에게 솟구쳐 흘러간다. 신령한 생명은 영원한 생명 안에서만 있을수 있는 생명의 완성을 향하여 솟구쳐 올라가는 것이다. 믿는 자들의 심령속에 예수께서 주신 샘물은 완성 곧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솟아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분명 이 샘물이 야곱의 샘보다 더 낫지 않는가? 이제 이 여인은 이 물을 달라고 이 낯선 나그네에게 애걸한다.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에 물길러 오지도 않게 하소서(15절). 이에 대하여 어떤 학자들은 그녀가 냉소적으로 말하고 있으며 그리스도가 한 말을 부질없는 것으로 비웃고 있다고 보기도 한다. 즉 "아, 그것 참 희귀한 발상입니다. 내가 목마르지 않게 된다면 갈증을 겪는 그 수많은 고통에서 나를 빼내줄 것이요, 예까지 물길러 오는 수고도 덜게 되겠군요."라고 했다는 것이다. 다른 학자들은 그 말이 선의에서 우러나온 것이며 다만 힘없이 나약하게 그리고 정확한 사실을 잘 모르고서 하는 간청이라고 생각한다. 즉"그것이 어떤 것이든 그것을 내게 좀 주십시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노동을 좀 덜게 하고, 좀 편하게 하는 것은 불쌍한 일꾼들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좋은 일이다. 나약하고 무식한 사람들일지라도 그리스도와 그의 선물에 대한 연약하고 바람결에 흔들리는듯한 소망을 가지고 있을수 있는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 이 여인과 나누신 대화의 다음 주제는 그녀의 남편에 관한 것이었다(16-18절)

그리스도께서 이 얘기로 넘어가신다고해서 생명의 물에 대한 강론을 포기하신 것이 아니다. 이렇게 하신 것에는 그만한 은혜로운 계획이 있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생수에 관한 대화를 중단하시고 그녀의 양심을 일깨워 그녀가 보다 쉽게 은혜에 의한 그 죄책을 깨달을수 있도록 계획하셨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영혼을 다루는 방법인 것이다. 즉 영혼으로 하여금 우선 죄의 무거운 짐아래 고통당하며 신음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후 그짐을 그리스도에게로 가져갈수 있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이 과정이 곧 신령한 영적 치유의 과정이다.

1)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신중하고 분별있게 이 대화를 시작하고 계신가!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16절). 그리스도께서 그녀에게 내린 지시는 매우 독특한 묘미를 함축하고 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와라, 네 남편이 너를 가르쳐 주고 이 사실들을 깨닫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와라, 그가 너와 함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며, 생명의 은혜를 함께 상속할 상속자가 될 것이다. 이 명령이 그렇듯 좋게 보여지는만큼 여기에는 이러한 선한 계획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예수께서는 그녀의 죄를 생각나게 하는 기회로 삼고 계시기 때문이다. 꾸지람을 내릴때에도 신중함과 기술이 요하는 것이다.

2)이 여인은 양심에 대한 선고를 피하려고 얼마나 애쓰는가! 그러나 자기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자신에게 선고를 내리고 있다. 이 여인이 말했다.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17절).

3)예수께서는 이 선고를 그녀의 양심에 뼈져리게 느끼게 하신다. 예수께서는 여기에 기록된 것보다 더많은 얘기를 하셨던것 같다. 왜냐하면 이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이 전에 행했던 모든 일을 예수께서 말씀하셨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29절).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간단히 말해서 그녀가 음란하게 살아왔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녀에게 얼마나 온화하게, 부드럽게 그 사실을 말하시는가? 지금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그리고 다시 말씀하신다. 네 말이 참되도다. 그녀가 사실을 은폐하려고 의도한 말을 예수께서는 다정스럽게 잘못에 대한 고백으로 해석해 주셨다. 사람들의 영혼을 구하고자 하는 자들은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해 주도록 해야한다. 그렇게함으로써 그들은 그 사람들의 좋은 성품을 자극하여 선한 열매를 맺을 소망을 바라보게될 것이지만, 좋지않게 대해 버린다면 그들의 반대 감정만 부채질하게될 것이다.

(3) 예배할 장소(19-24절).

이제 다시 화제는 예배 장소로 넘어간다.

1) 예배 장소에 관한 양심 문제(19-20절).

①그녀가 이 문제로 넘어가게 된 동기 :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19절). 그녀는 그리스도께서 그녀에 대하여 얘기했던 사실의 진실됨을 부정하지 않는다. 쓰라린 상처를 건드렸을때 많은 사람들이 반응하듯이 격분하지도 않았으며 자기의 실책을, 오점을 듣는 것을 감내할수 있었다(이런 경우는 흔치않은 일이다). 그리고 그녀는 거기에서 더나아간다.

첫째, 이 낯선 나그네를 "주여"라고 부르며 그에게 존경스럽게 얘기한다. 이것은 그녀를 질책함에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온유하셨던 결과이다. 예수께서는 그녀에게 전혀 거친 말을 사용하시지 않으셨으며 그녀 역시 그런 말은 전혀 하지않았던 것이다.

둘째,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를 선지자로 인식한다.

셋째, 그녀는 그로부터 무엇인가 좀더 배우기를 원하고 있다.

②그녀가 제기한 공공 예배의 장소 문제 : 이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이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바르게 예배하기를 열망했다. 그러므로 선지자를 만나자 곧 그의 가르침을 구하게 된 것이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 구하게 된 것이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 일치되는 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은 경배받으셔야할 분이시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었다. (심지어 거짓 신들을 예배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일지라도, 예배할 신은 아무데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야수같은 자들과는 다르다) 그러나 어디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들 상호간의 차이점이 있었다. 어떻게 이 여인이 그 문제를 설명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사마리아인의 입장에서―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20절). 과거 산발랏은 그 장소에 사마리아인들의 성전을 건축했었다. 성전이 어디에 있건 그곳은 거룩한 곳이다. 산발랏이 사마리아인들을 위해 세웠던 장소는 그리심산이었다. 그 산 위에서 축복이 베풀어져 나갔었던 것이다. 그것은 관습을 옹호하는 입장이라 할수 있다. 그녀는 자기네들 사마리아인들이 그들 나름의 유물과 전통과 계승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유대인의 입장에서―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사마리아인들도 모세오경에 근거해서 자신들을 관장해 왔었다. 모세오경에는 하나님께서 택하실 처소에 대한 언급이 많이 있지만 그 명칭이 나타난 곳은 없었으므로 그들은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장소에 자유롭게 성전을 세울수 있다고 생각했다.

2)이러한 자각에 대한 그리스도의 답변(21절 이하).

그리스도께서는 예배장소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리 중시하시지 않는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21절). "네가 여태껏 대단히 중요하다고 가르침을 받아왔던 것은 매우 사소한 문제이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때가 이르리라. 그때가 되면 예배드리는 장소는 두장소 중 어느 곳에서 어느 사람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건 전혀 문제가 되지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배드리는 자들은 전혀 장소에 구애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여기나 저기도 아니고 그 두곳 모두에서, 또한 어느 곳에서든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게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장소가 아니라 다른 것들에 대하여 강조를 하신다. 예수께서 그렇게 예배의 장소 문제를 가볍게 취급하셨다고해서 예배라는 문제 자체를 소홀히해도 좋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예수께서는 사마리아인들의 예배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하신다(22절). 사마리아인들은 예배의 대상의 문제에 있어서 그릇되어 있었던 것이다. "어느 곳에서 예배해도 좋으나 너희는 너희가 알고있지 못한 것을 예배하고 있다." 사마리아인들은 분명 참된 신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예배하였다(스 4:2; 왕하 17:32). 그러나 그들은 엄청난 무지에 빠져들어갔다. 하나님께서는 우주를 만드신 우주의 하나님으로, 우주의 주인으로 섬김을 받으셔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러 민족의 민족심과 같이 지방신으로, 그 땅의 신으로 하나님께 경배하였던 것이다. 무지는 결코 올바른 헌신을 낳을수 없으며 오히려 헌신을 무의미하게 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유대인들은 확실히 옳았다. "우리는 우리가 예배해야할 대상의 어떠하심을 안다." 즉 예배의 문제에 있어 경에 근거해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은 사람들은 안심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릴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예배를 드릴수 있다. 이는 이들이 자신이 예배해야할 대상을 알고있기 때문이다. 장소가 순결하고 온전치 못하더라도 예배는 진실할수 있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우리는…예배한다"고 말씀하심으로써 기꺼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들가운데 자신을 포함시키고자 하신다.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하찮게 여겨서는 안되는 법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자신도 그렇게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난다. 구원이 유대인으로부터 나기때문에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예배하는 대상을 알고 있었으며 어떤 근거에서 자신들이 예배하는지를 알고있었다. 영원한 구원의 주권자는 유대인에게서 나오시며 먼저 유대인들에게 복주시기 위해 보냄을 받으셨던 것이다. 영원한 구원의 방도가 유대인들에게 제공되어 있었다. 구원의 말씀은 유대인에게 속해 있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장소는 별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시사하시면서 무엇이 보다 필수적이며 본질적인 것인가를 보이신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영으로 그리고 진리로 예배하는 것이다(23,24절).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는 마음의 상태에 강조를 두고 계신다. 그 말은 예배의 대상뿐 아니라 예배하는 태도도 정당해야함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여기에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사실은 바로 이것이다.

①이러한 변화를 초래할 대변혁 :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23절). 완성의 날이 오고있으며 지금 그 여명이 밝아오고 있는 것이다.

②축복받은 자들의 변화 : 아버지께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게될 것이다. 피조물로서 우리는 만유의 아버지께 예배하러 신자로서 우리는 우리 주 예수님의 아버지께 예배하는 것이다. 이제 예배의 본질에 변화가 올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모세 제도의 의식법을 준수함으로써가 아니라 신령한 제도 안에서, 예배자의 변화된 심정과 성품으로 예배하게될 것이다. 모든 이는 신령과 진리로 하나님께 예배해야 하며, 그렇게 할 것이다. 이 말은 예배하는 자들의 특성과(23절) 의무를(24절) 가리키는 말이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 모두에게 요구되는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신령으로 즉 성령으로(빌 3:3) 예배해야만 한다. 우리는 예배할때도 하나님의 성령의 힘과 도움을 의지해야만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하되 우리의 모든 생각을 하나님께만 집중시키고 불길같이 타오르는 사랑으로, 우리안에 있는 모든 것을 합하여 예배해야 한다. 진정으로 즉 진리안에서라는 말은 곧 겉과 속이 똑같이, 표리가 없이 신실하게라는 말이다. 우리는 형식 이상으로 내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와같이 예배받으시며 또한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만이 참예배자들인 것이다. 복음은 예배의 신령한 방법, 곧 신령한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는다면 자기들이 고백하는 복음의 빛과 법도에 따라 살고있지 않는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느니라. 이와같이 예배하는 자는 매우 드물다. 신령하게 예배드리는 문은 매우 좁다. 하늘의 하나님께서는 이와같은 예배를 강력히 원하시며 이와같은 예배는 필수적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와같은 예배와 이와같이 예배하는 자들을 대단히 흡족하게, 은혜로 받아들이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와같이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는 말은 믿는 자들을 그와 같이 만드신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영이시므로 또 이와같이 예배받으셔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나타내려 오셨다(요 1:18).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 관하여 바로 이 사실을 나타내셨으며 이 비천한 사마리아 여인에게 나타내시고 계신다. 가장 미천한 자라도 하나님을 알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불멸하시며 이성적인 존재자이시며, 일시적이 아니요, 물질적이 아니며 보이지 않으시며 늙지도 않으신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은 하나님이외의 어떤 분도 아니시다. 이러한 영적인 신적 본질은 영적인 신적 예배에 대한 가장 좋은 이유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되 영이신 하나님을 신령으로 예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배의 목적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4) 메시야(25-26절).

이 여인과의 마지막 대화의 주제는 메시야에 관한 내용이다.

1)여인의 신앙 : 그 신앙으로 그녀는 메시야를 대망하고 있었다.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25절). 이 여인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을 반대할 것이 전혀 없었다. 잘은 모르지만 자기 앞에서 얘기하고 있는 사람의 얘기가 기대해왔던 메시야와 어울린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녀는 기대했던 메시야로부터 사실을 듣고자 했으며 적절한 시기까지 자신의 믿음을 보류하는 것이 최선책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와같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들은 더좋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여 자기들 수중에 들어온 가치있는 것에는 전혀 마음을 기울이지 않는 것이다. 그 여인은 누구를 대망하고 있었는가?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줄을 내가 아노니(25절).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공히 메시야와 그의 왕국을 대망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일치했다. 아무리 모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 사실, 메시야가 장차 임하리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메시야는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시다. 복음서 기자는 히브리어인 메시야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그리스도 곧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동리한 의미를 지닌 헬라어로 번역해 주는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 그녀는 그 메시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가?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충분히 명확하게 말해주실 것이요, 숨김없이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라는 말이다. 이 말은 그녀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식했다는 점을 함축하고 있다.

첫째로 자신들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데도 한도가 있으며 하나님께 예배하는 법도 역시 불완전하다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다.

둘째로 이러한 전환을 이루시기에 메시야께서는 충족하신다는 사실에 대한 깨들음이다. "우리가 알고 싶어하며 우리가 무지속에서 다투고 있는 문제에 대하여 메시야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게 하시리이다."

2)자신이 메시야이심을 나타내시는 우리 주 예수의 후의 :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26절). 그리스도께서는 여기 이 비천한 사마리아 여인에게와 소경에게(요 9:37) 하신 것을 제외하고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이렇게 분명하게 자신을 나타내신 적이 결코 없었다. 이와같이 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가난하고 멸시받은 사람들에게 큰 영예를 안겨주시고자 하셨다. 이 여인은 일반적인 확신의 수단인 그리스도의 기적을 볼 기회도 전혀 없었던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의 빛을 눈으로 대하지 않게한 지역에서도 은혜의 빛을 마음속에 비추실수 있으신 분이다. 이 여인은 다른 사람들보다 이러한 계시를 받아들이기에 훨씬 잘 예비되어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과 사귀기를 원하는 정직하고 겸손한 심령을 소유한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나타내실 것이다. 네게 말하는 내가 곧 그로라. 여기에서 우리는 이 여인이 그가 누구신지도 모르고있는 그때에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얼마나 그녀 가까이에 계셨는지 보게된다(창 28:16). 예수께서 지금 자신들과 말씀을 나누고 계신 그 순간에도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안계시다고 슬퍼하면서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시기를 바라고 있다.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라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심으로써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신다.

 

Ⅲ. 사마리아와 추수 4:27-42

1. 제자들이 돌아옴(27)

제자들이 돌아옴으로써 대화는 중단된다. 그때 대화는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돌아온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이 여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음을 기이히 여겼으며 낯선 여인과 그것도 사마리아 여인과 이와같이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 제자들은 처음에 예수께서 자신들을 부르셨을때 자신들이 그렇게 보잘것없는 인간들이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예수께서 이와같이 자신을 낮추셔서 불쌍하고, 대화할 상대도 못되는 여인과 얘기를 나누셨다는 사실을 의아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것을 묵묵히 바라만 보았다. 그 제자들은 거기에 어떤 상당한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해서 아무도 나서서 "무엇하십니까, 왜 이런 여인과 말씀을 나누십니까"라고 묻지않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시는 것은 모두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무엇을 생각했건 그들은 아무말도 하지않았던 것이다.

2. 소식의 전파(28-30)

그 여인은 곧장 그 소식을 곧바로 이웃들에게 알렸다.

(1) 그녀는 자기가 우물에 온 목적조차도 잊었을 정도였다(28절). 그녀는 그 자리를 비켜주었다. 예수께서 식사를 드실수 있도록 그리스도께 대한 예의로 물러났던 것이다. 그녀는 예수님의 말씀에 싫증을 느낄수 없었지만 무례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예수께서 곧장 떠나시리라 생각하여 급히 가서 자기 이웃들에게 알렸다. 그녀가 얼마나 시간을 잘 이용하고 있는지 살펴보라. 유익을 획득할 기회가 끝났을때 우리는 곧 선을 행할 기회를 찾아야할 것이다. 여기에 그녀가 물동이 또는 물 항아리도 버려두고 갔다는 사실이 지적되어 있다. 그녀는 예수께서 식사하시면서 사용하시라고 친절하게도 그리스도를 위해 그 물동이를 남겨두었을 수도 있으며 자기가 사는 읍내로 더욱 서둘러서 가기위하여 거추장스러운 항아리를 남겨놓았을 수도 있다. 어쨌든 그녀는 보다 훌륭한 일을 완수하기 위하여 물동이 따위에는 전혀 신경도 쓰지않은채 그것을 버려두고 떠났던 것이다.

(2) 그러나 그녀는 마을에 가서 전해야할 자신의 사명은 심중에 곧게 간직하고 있었다. 그녀는 마을에 내려가서 사람들에게, 그녀가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붙잡고 얘기했다.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29절).

1)그녀의 친구와 이웃들이 그리스도와 사귀게 되기를 그녀가 얼마나 열망하고 있는지 살펴보라. 그녀는 보화를 발견하자, 자기와 함께 즐거워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자기와 함께 나누기위해 자신의 친구들과 이웃들을 초청하였다(눅 15:9).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도 자신을 알게하는 영광을 주시지 않으셨는가? 우리도 다른이들에게 그리스도를 드러냄으로써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려드리자. 아마도 우리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 큰 영예가 있을수 없을 것이다. 이 여인은 일종의 사도가 된 것이다. 나라는 존재는 내 가까이에 살고있는 이웃들에게 선을 행할 기회를 많이 가지고 있을뿐만 아니라 그러한 큰 의무를 지니고있는 존재인 것이다.

2)그녀가 이 낯선 사람을 소개하는데 있어서 얼마나 공정하고 솔직한지 살펴보라. 그녀는 어떤 사실들로 인하여 자신이 그렇게 그 사람을 평가하게 되었는지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그 사람이 나의 행해왔던 모든 일을 내게 말했다." 여기에 그녀의 남편에 대하여 그 사람이 그녀에게 말했던것 이상의 기록은 없다. 그러나 그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실수 있는 일과 그리고 그녀의 속마음, 속양심도 그녀에게 얘기했던 것이다. 그녀는 두가지 사실로 큰 감동을 하고 있는데 첫째, 그의 지식의 범위였다. 우리들 인간으로서는 우리가 여태까지 행해왔던 모든 것을 말할수 없기때문이다. 둘째, 그의 말씀의 권능이었다. 예수께서 그녀의 은밀한 죄까지도 말씀하셨다는 즉 그녀의 외침은 "모두 와서 내가 숨겼었던 내 죄를 내게 지적한 사람을 와서 보라"는 얘기였다. 그녀는 "그 말을 자꾸 반복하면 매우 부끄러울텐데"라고 사람들이 생각할 그런 얘기, 곧 예수님과의 대화의 그러한 부분을 더욱 강조하여 전했던 것이다. 우리의 죄에 대한 그리고 우리의 비천한 처지에 대한 확신으로 말미암아 알게되는 그리스도께 대한 그러한 지식이야말로 가장 건전한 것이요 구원하는 지식인 것이다. 그녀는 그를 와서 보라고 사람들을 초청한다. 겨우 "와서 구경해 봐라"가 아니라(그녀는 쇼를 구경시키듯 그에게 사람들을 초대한 것이 아니다), "와서 그와 대화를 나누라, 와서 그의 지혜를 들으라, 내가 들었던 것처럼, 내가 대화했던 것처럼, 와서 그와 대화하라, 그의 지혜를 들어보라"는 초청인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설득당했던 것을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는 방법으로 논쟁하려 하지는 않았다. 진리의 증거를 보여줄수는 없다. 그때 예수께서는 마을 어귀에 와 계셨다. "자, 와서 그분을 보라." 그의 얼굴보기를 선지자들도 임금들도 그렇게 열망했던 그 사람을 보러 마을 어귀로 함께 가보지 않겠는가? 그녀는 독단적으로 "그가 메시야다"라고 말하지않고 그들에게 호소한다.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그녀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신앙을 부과하려 하지않고 믿음을 제시한다. 때때로 이와같이 공정한 그러나 힘있는 호소는 사람들이 미처 깨닫기도 전에 그들의 판단과 양심을 사로잡는 것이다.

3)이러한 초대의 성공 :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30절). 그 마을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갔다. 사람을 시켜 예수를 마을 안으로 불러들인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직접 그에게로 갔다. 그리스도를 알고자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이름을 기록해 놓으신 곳에서 그분을 만나뵈어야 하는 것이다.

3. 여인이 가버린 사이에 있었던 제자들과의 대화(31-38)

우리 주님께서는 시간을 대단히 잘 활용하셨으며 순간순간을 아끼셨다. 만일 우리가 이와같이 시간을 틈틈이 모아 활용할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이 대화에서는 두가지 사실을 살펴볼수 있다.

(1) 그리스도께서는 그 자신이 행하신 일을 대단히 흡족히 여기셨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이 일에 전심을 기울이셨음을 볼수 있다.

1)이는 예수께서 이 일을 하시느라 식음조차 잊으셨다는 사실에서 알수 있다. 우물가에 앉으셨을때 예수께서는 피곤하셔서 원기를 회복해야할 필요가 있으셨다. 그러나 영혼을 구원해야할 기회가 오자 예수께서는 피곤도 기갈도 다 잊으셨다. 그리고 제자들이 음식을 권했을때도 음식에는 전혀 마음을 두지 않으셨다. 랍비여 잡수소서(31절). 이 권유는 예수께 대한 제자들의 사랑의 일례라 하겠으나,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초청을 원하셨으며 그 사실은 영혼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의 보다 위대한 본보기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기들이 없는 사이에 누군가 대접해 드린 음식을 예수께서 드셨을 것이라는 제자들의 추측 따위에는 거의 관심이 없으셨다.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33절). 예수께서 식사하실 의향이 없으시자 제자들은 예수께서 이미 식사를 하신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2)예수께서 전심으로 자기의 일을 수행하셨다는 사실을 발견할수 있는 또하나의 이유는 예수께서 자신의 사역을 자신의 양식으로 삼으셨다는 사실에서 발견하게 된다. 사마리아 여인을 가르치심으로써 예수께서 행하셨던 사역은 사마리아인들 사이에서 그가 행하셔야할 사역이었으며 이것이 바로 그에게 양식이며 음료가 되었던 것이다. 아무리 굶주린 사람이나 쾌락을 즐기는 사람이라도 우리 주 예수께서 영혼들을 위해 선을 행하실 기회를 바라고 찾는 것만큼 그렇게 큰 욕구로 만찬을 기대하지도, 그렇게 흥에 겨워 진미를 먹지도 못할 것이다. 예수께서 드시는 음식은 제자들도 알지못했던 그러한 음식이었다. 이 말은 선한 그리스도인에게도 역시 해당되는 말이라 하겠다.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은 다른이들이 알지못하는 것을 먹으며, 낯선 자는 넘볼수도 없는 희락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제자들은 이렇게 묻게 되었다.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그리스도의 하시는 사역이 그의 양식이 되는 이유는 그 사역이 성부의 뜻이요, 성부의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34절). 죄인들을 구원하는 일이 하나님의 뜻이며, 그러기위하여 죄인들을 교훈하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다. 예수께서는 이 일을 자신의 사업이요 기쁨으로 삼으셨다. 그리스도의 육체는 곤하여 음식을 드셔야 했지만 그 마음은 갈증도 허기도 다 잊고 이일에 온통 집중되어 있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는 일에 진지하셨다. 예수께서는 '다 이루었도다'라고 말씀하실수 있기 전까지는 자신의 과업을 결코 포기하시거나 중도에서 그만 두시고자 하지 않으셨다. 많은이들은 처음에는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겠다고 열심을 갖지만 동일한 열심으로 끝까지 나아가지는 못하는것 같다.

(2) 계속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들 각자의 임무에 근면할 것을 주지시키신다. 제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일꾼된 자들이었으므로 그와 같은 일꾼이 되어야 했다. 제자들이 해야했던 임무는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었다. 이제 예수께서는 이 일을 가을 추수에 비유하신다(35-38절). 추수 시기는 매우 분주한 시기이다. 모든 손이 추수 일에 동원되어야 한다. 그리고 추수 기간을 놓쳐서는 안된다. 그 기간은 짧고 제한된 시간이다. 그리고 추수하는 일은 즉시 해야만 하는 일이다. 예수께서는 여기에서 열심을 내어야 하는 세가지 이유를 제시하신다.

1)그 일은 필요한 일이며 때가 매우 급박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넉달이 지나야 추수할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35절). 〔실제 곡물 추수는 아직도 넉달이 지나야 추수때가 온다. "너희가 파종기에 씨 뿌리는 사람을 격려하기 위해 추수까지는 넉달 밖에 남지않았다 하지 않느냐"〕하나님께서는 매년 추수를 기약하셨을뿐만 아니라 추수 기간도 정해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시기를 알고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복음의 추수에 관한 말씀이시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여기 이곳 사마리아에 그리스도께서 거두셔야할 곡식들이 있었다. 제자들은 그리스도께 잡수시라고 하였었다(31절). 그러나 예수께서는 "내게는 먹을 양식 즉 더욱 긴요히 해야할 일이 있다. 복음을 영접하고자 오고있는 사마리아인들의 무리를 보아라"고 말씀하셨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앞을 다투어 모여들때 복음을 전파하는 주의 일꾼들은 더욱 활기를 얻어 애쓰게될 것이다. 세상에는 충분히 익어 거두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들녘의 알곡과 같이 복음을 영접할 준비가 되어있는만큼 희어져 있었다. 만일 지금이 어떤 일을 할 적기라는 표징이 확실하다면 우리는 큰 용기를 가지고 어떤 일이라도 하나님을 위해서 일할 것이다. 세례 요한은 주님을 위하여 예비하도록 백성들을 준비시켰었다.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기 시작한 이래로 모든 사람은 그리로 밀려 들어가고 있었다(눅 16:16). 따라서 지금이야말로 낫을 댈 때이다. 지금이 일을 해야할 적기이다. 익은 알곡을 거두어 들이지 않으면 알곡이 떨어져 손해를 보게될 것이다. 양심의 가책을 받고있는 영혼들을 지금 돌보지 않는다면 그 영혼들의 잘 준비된 출발도 헛되이 돌아가고 말 것이다.

2)그 일은 제자들 자신이 '이미 삯을 받은'(36절) 득이 되고 유익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 고용되어 일하는 추수꾼은 절대로 가혹한 주인 밑에서 혹사당한다고 말할 이유가 없다. 그리스도의 일이 곧 그 일에 대한 품삯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추수꾼은 열매를 거두되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열매를 거두어 들인다. 다시말해서 그는 자신을 구할뿐 아니라 자기 말을 듣는 사람도 구원하다. 신실한 사역자들에게 있어서는 자신들의 과업이 귀중한 영혼들을 영원히 구원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곧 위로가 된다. 이리하여 그들은 '뿌리는 사람이나 거두는 자들이 함께 즐거워하는' 기쁨을 누린다. 뿌리는 자란 선한 일을 시작하기위해 복된 도구로 쓰인 일꾼이요, 거두는 자란 시작된 선한 일을 이룩하고 완성시키기 위해 고용된 일꾼을 말한다. 그래서 이 둘은 함께 기뻐할 것이다. 추수하는 자들은 서로 그 추수하는 즐거움을 나누어 갖는다.

3)그 일은 손쉬운 일이요, 그들보다 앞서 지나간 사람들의 손길에 의해 절반이나 성취된 일이기 때문이다. 한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37절). 모세와 선지자들과 세례 요한이 복음의 길을 기경해 놓았다.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려 보내었노니(38절). 이 말에서 우리는 구약적 사역에 관한 두가지 사실을 알게 된다. 구약의 사역은 신약적 사역에 비해 많은 점을 결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모세와 선지자들은 뿌리기는 뿌렸으나 거두었다고는 말할수 없다. 그들의 기록은 그 기록이 우리에게 전해져 내려오면서 그들이 직접 선포했던것 이상의 훨씬 많은 선을 이룩하였다. 또하나의 사실은 구약의 사역이 신약의 사역을 보조하며 신약의 사역이 나아갈수 있는 통로를 제공했다. 만일 구약의 선지자들에 의해 뿌려진 씨가 없었다면 이 사마리아 여인이 "메시야가 오시리란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할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구절은 또한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사역에 관하여 두가지 사실을 나타내준다 하겠다. 그 사역은 결실이 풍성한 사역이라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사도들은 큰 추수기에 거두어 모아들이는 추수꾼들이었다. 그 일은 선지자들의 기록에 의해 대단히 쉬워졌다. 선지자들은 '우리가 헛되이 수고하는구나'라고 외치면서 눈물로 씨를 뿌렸다. 그러나 사도들은 '우리에게 이김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고 말하면서 기쁨으로 단을 거두어 들였다. 수고하면서 죽어간 사역자들의 노고로해서 그들 뒤에 살아남은 그들을 승계한 사람들은 선한 열매를 많이 거둘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앞서간 사람들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 우리는 그들의 수고속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4. 그리스도의 방문의 결과(39-42)

그리스도께서 사마리아 마을을 방문하시므로해서 사마리아인들은 큰 선한 영향을 받았다. 그 영향이 어떤 것이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1) 그리스도에 관한 여인의 증거에 대한 그들의 반응. 이 증거는 '그가 내게 내가 여태까지 행했던 모든 것을 말했다'는 바로 그 증거였다. 이들은 이에 대하여 두가지 반응을 나타내었다.

1)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신뢰(39절) :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예수를 믿은 많은 사람들은 이스라엘 집의 사람들이 아니라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신앙은 이방인들의 신앙의 전조라 볼수 있다. 이 사마리아인들은 무슨 근거로 믿었는가? 바로 '그 여인이 증거하므로' 믿게 되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볼수 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선한 일을 시작하시고 이루시는 도구로써 매우 연약하며, 잘 될것 같지도 않은 도구조차 기쁘게 사용하신다는 사실이며, 둘째로 작은 불꽃이 얼마나 큰 불을 일으킬수 있는가 하는 사실이다. 우리 구주께서는 한 비천한 여인을 가르치심으로써 온동네를 가르치셨다. 사역자들은 그들의 말을 청종하는 이들이 소수요 미천하다 하더라도 전파하는 일에 소홀히해서도, 용기를 잃어서도 안된다. 그 적고 미흡한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함으로써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선이 옮겨질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서 그리스도에 대하여 실증적으로 얘기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를 보게된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영혼을 위하여 무엇을 행하셨는가 얘기할수 있는 사람들이 좋은 일을 하기에 가장 적합하다.

2)오셔서 자기들 사이에 머무실 것을 간청함(40절) : 사마리아인들은 예수께 찾아와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했다. 전령과 같은 그 여인의 보고에 의지하여 저들은 그리스도가 선지자이심을 믿고 그에게 나아왔으며, 와서 만났을때에는 선지자로서 대접하였다. 예수께 나아온 사마리아인들은 예수께 대한 자기들의 존경을 증명하고 싶어서 그리고 그로부터 교훈을 얻고자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간청하였다. 흔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운수를 얘기해주는 사람에게 떼거리로 모여들지만 이 사마리아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자기들의 잘못을 지적해주는 사람에게 모여들었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내쫓았지만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를 자신들에게 초청하였다. 복음이 성공한 증거를 보면 그것은 항상 어떤 개연성에 따르는 것도 아니며 기대한대로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저들의 청을 허락하셨다. 그리고 그곳에서 유하셨다.

(2) 그리스도 자신의 말씀이 저들에게 어떤 인상을 주었는가에 대해서는 알수 있으나(41,42절) 예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고 어떤 행동을 하셨는지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저들이 그가 곧 그리스도임을 확신할수 있는 언행을 보이셨다. 이와같이 한사역자의 수고는 그 수고의 선한 열매들에 의해서 가장 확실히 입증된다. 그들이 자신들의 눈으로 그리스도를 직접본 결과는 이것이다.

1) 믿는 자의 수가 늘어났다. 예수의 말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41절).

2) 저들의 신앙이 자라났다. 그 여인의 말에 의해 믿게되었던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말할수 있게 되었다.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42절). 우리는 여기에서 저들의 믿음이 세가지 측면에서 더욱 공고해졌음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 믿음의 내용에 있어서 공고해졌다. 여인의 증거에 의지하여 사마리아인들은 예수께서 선지자이심을 믿었지만 이제 그와 대화해 본 지금은 그가 그리스도, 곧 기름부음 받은 자임을 믿게되었으며 세상의 구주가 되심을 믿게되었다. 그들은 예수께서 유대인의 구주가 되실뿐만 아니라 세상의 구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믿었다. 그리하여 그들이 비록 사마리아인이었지만 온세상의 구주께서 자신들속에 오셔서 유하시기를 소망했다.

둘째, 믿음의 확실성에 있어서 공고해졌다. 이제 그들은 이 사람이 실로 그 그리스도임을 우리가 안다고 말할정도로 큰 확신, 충만한 확신에 도달하였다.

셋째, 믿음의 근거에 있어서 더욱 공고해졌다.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그의 말을 듣고…앎이니라(42절). 그들은 전에 여인의 말을 듣고 믿었으나, 이제는 그들 스스로 직접 들어봄으로써 믿는다. 우리는 이 사람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으며 확신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예에서 우리는 어떻게 믿음이 들음으로써 시작된다. 부모님들과 설교자들의 가르침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친숙해지도록 권면해 주는 것이요, 신앙은 그리스도 자신의 직접적인 증거를 들음으로 성장하게 된다. 그리고 더나아가 이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우리가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들속에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발견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성경을 조사해 보고 싶어진다. 이리하여 우리는 우리에게 전해준 사람들의 말때문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성경을 찾아봄으로써 믿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은 사람의 지혜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으로 세워지게 되는 것이다. 이와같이 하여 복음의 씨앗들이 사마리아 땅에 뿌려지게 되었다.

 

Ⅳ. 갈릴리에서의 두번째 표적 4:43-54

1. 갈릴리로 가심(43-45)

이틀후에 예수께서는 다른 동네에서 전파하셔야 하기때문에 사마리아를 떠나셨다(눅 4:43). 예수께서는 갈릴리로 가셨다.

(1) 갈릴리 : 예수께서는 엄격한 의미에서 그의 고향인 나사렛으로 가시지 않으시고 갈릴리로 가셨다. 예수께서는 여러 고장을 다니셨지만 나사렛에는 거의 다니지 않으셨는데 그 이유는 예수께서 직접 증거하신데로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하기때문(44절)'이었다. 주 여호와의 선지자들은 거의 높임을 받아오지 못했으며, 특히 그들의 고향에서 그리하였다. 그리스도의 경우에도 그의 가까운 형제들이 가장 그를 무시하였다(7:5). 사람들은 그 자존심과 시기심으로 말미암이 한때 자기 학교 동료나 소꿉 친구였던 사람들의 가르침은 비꼬기 쉽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들은 멸시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이 가리워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복음 전파자들을 비웃는 사람들은 그 메시지가 줄 유익을 전혀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2) 갈릴리에서 받으신 환영(45절) : 갈릴리 지방 사람들은 예수를 영접하였다.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은 결코 헛되이 전해지지 않는다. 혹 어떤 사람이 마땅한 대접을 하지않더라도 다른 사람에게서 영접을 받는 법이다.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렇게 예수를 맞을 준비가 잘되어 있었던 이유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행하셨던 이적을 저들이 목격했던 까닭이었다(45절). 갈릴리 사람들도 절기 즉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상경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거기에서 그리스도를 알게되었다. 공공 행사에 부지런히 찾아 참석하는 사람들은 때때로 기대이상의 신령한 혜택을 누리게 된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의 행하신 모든 일을 목격하였다. 그 모든 일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베풀어졌던 것이었으나, 그들보다는 갈릴리 사람들이 그 이적들에 의해 훨씬 유익을 얻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여러 사람이 뒤섞인 대중속에 전해진 말씀은 그때까지 끊임없이 들어왔던 청중보다는 우연히 참석했던 사람에게 더 큰 감동을 주기도 하는 것이다.

(3) 갈릴리 가나 : 예수께서는 갈릴리 지방의 가나로 가셨는데 그곳은 예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었다(46절). 복음서 기자는 우리가 보아왔던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하여 잘 기억해두어야 한다는 점을 가르치기 위해서 이 기적을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다.

2.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심(46-54)

이 기사는 다른 복음서에는 나타나있지 않다.

(1) 환자의 보호자와 환자 : 환자의 보호자는 왕의 신하였으며 환자는 그의 아들이었다. 왕의 신하가 있어(46절). 그 아버지는 귀족이었으나 그 아들은 병이 들어있었다. 명예로운 직위나 직책도 이와같이 병마와 죽음의 공격에는 속수무책이다. 환자가 있는 가버나움에서 지금 그리스도께서 계신 가나까지의 거리는 약 15마일 정도였다. 가족의 병으로해서 이 귀족은 이렇게 멀리에 계신 그리스도께 찾아왔던 것이다.

(2) 이 보호자는 어떻게 의사에게 청을 드렸는가? 그는 자신이 직접 예수께 찾아와 자기 아들을 고쳐달라고 애원하였다(47절).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볼수 있다. 그 하나는 아들에 대한 그의 애정이다. 아들이 아프자 그는 어떤 수고도 아끼지 않고 아들의 병을 고치고자 하였다. 또한 우리 주 예수께 대한 그의 크나큰 존경심이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오시기를 명령할수도 있는 당국의 관원이면서도 자기가 직접 찾아와 기다려 예수께 간청을 올렸던 것이다. 하나님께 나아갈때는 아무리 위대한 사람들일지라도 간청하는 처지가 되어야 하는 법이다. 여기까지 달려온 그 관원의 믿음에서 우리는 혼합된 요소를 관찰할수 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아들을 고쳐주시리라 확실하게 믿고 있지만 자기 아들이 아파서 누워있는 곳까지는 오셔서 고쳐주시기를 간구하고 있다. 그의 신앙은 확실한 부분도 있었지만 연약한 부분도 있었다. 우리는 기도할수는 있으나 처방을 내릴수는 없는 존재들이다. 즉 우리는 "주여 저를 고쳐 주옵소서. 그러나 말씀으로 하시든 만져서 하시든 주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한다.

(3) 이에 대한 온유한 책망 :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48절). 비록 그가 귀족이요 자기 아들의 일로 슬픔에 빠져있는 사람이었지만 예수께서는 그에게 책망을 내리셨다. 먼저 예수께서는 자비를 받을 준비를 시키시기 위해 그에게 그의 죄와 연약함을 보여주시고 그의 청을 들어주신다. 그리스도께서 후의를 베풀어 주시고자 하실때는 불유쾌한 내색을 하심으로 그 사람을 먼저 겸손케 하신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다른 장소에서 행하셨던 기사들에 대하여 신빙성있는 확실한 얘기를 들었다 할지라도 그들이 직접보지 못하면 거의 믿지를 못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후한 대접을 받아 기분이 충족되지 않으면 도무지 확신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님이심을 증명하기에 충분한 다양한 사건들을 목격했지만, 표적과 기사로해서 결국 믿게되는 그 정도였지 더 진보해 나가지 못하였다. 말씀의 신령한 권능도 그들에게는 별 감동이 없었고 매력이 없었으나 기적의 감각적인 힘만은 그들에겐 감동적이요, 매력적이었다.

(4) 끈덕진 간청 :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49절). 이 신하는 예수님의 책망을 인내심있게 받아들이고 그리스도께 정중히 부탁했다. 그리고 그는 그 질책을 모욕으로 여기지 않았으며 따라서 거절로 여기지도 않았다. 그리고 여전히 청을 드렸으며 청을 들어줄때까지 계속 간청하였다. 그는 온 신경을 아이에게 쓰고 있어서 다른 것에 마음을 쓸 여유가 없었다. 여전히 그는 그리스도의 권능에 대한 그의 신앙의 약함을 보였다. 그는 그리스도를 내려오시도록 하지 못한다면 자신이 그 아이에게 아무것도 해줄수 없으리라 생각했기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내려오시도록 해야만 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병든 아이는 고치실수 있지만 죽은 아이는 살려내지 못하리라 믿고 있었다. 그는 너무 때가 늦었다는듯이 "내 아이가 죽기전에 내려오소서"라고 말한다. 그 사람은 엘리야도 엘리사도 죽은 아이들을 살려냈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권능이 저들의 권능보다 못하단 말인가? 그가 얼마나 서두는가 보라. "내 아들이 죽기전에 내려오소서" 이는 마치 그리스도께서 고치실때를 놓치실까봐 두려워하는 듯하다.

(5) 그리스도의 평안의 답변 :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50절).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권능의 일면을 보여주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단지 병을 고치실수 있을뿐 아니라 대단히 쉽게 고칠수 있으시다. 여기에는 병을 고치기위해 언급된 말이나 행위 또는 명령이 전혀 없다. 그러나 병은 이미 나아있었다. 이 신하는 그리스도를 모셔 가서 병을 고치고자 했으나 그리스도께서는 병을 고치시되 내려가지는 않으셨다. 그리고 이와같이 하여 더욱 빨리 치료는 끝났으며 신하의 실수도 고침을 받았고 그의 신앙도 바로 잡아졌다. 이리하여 모든 일은 그리스도의 방식대로 더욱 잘 해결되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청을 거절하실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더욱 합당한 것으로 주신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왕의 신하가 그의 아들의 병으로 몹시 가슴 아파함을 아셨으므로 그를 책망하셨으나 곧 그 아들이 완전히 회복되었음을 확신시켜 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가 자기의 자녀들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잘알고 계신다.

(6)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그 신하의 신앙 :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그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취하신 방법에 만족했다. 그는 지금 어떤 표적이나 기적도 눈에 볼수 없으나 기적이 이루어진 것으로 믿고있다. 그리스도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셨으므로 그 사람은 그분을 믿었다. 그리스도께서 가라고 말씀하셨으므로 그는 자기 길로 갔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의 믿음의 신실함의 증거가 되는 것이다.

(7) 신앙의 확인 : 그는 돌아가는 도중 자기 하인들을 만나 하인들의 보고와 비교해 봄으로써 자기의 신앙을 확인한다. 그의 종들은 그 아들이 나았다는 일치된 뉴스를 가지고 그에게 나아왔다(51절). 그는 자기의 신앙을 확인하고 싶어했다.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분의 말씀을 부지런히 비교해 보는 일은 우리의 믿음을 확증하는 일에 대단히 유익하다. 이것이 바로 그 신하가 취했던 과정이었다. 그 낫기 시작한때를 물은즉(52절). 그 종들이 대답했다. 어제 제 칠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그 아들이 낫기 시작할뿐만 아니라 갑자기 완전히 나았다. 그리하여 그 아버지는 그때가 예수께서 자신에게 네 아들이 살았다고 말씀하셨던 그때임을 알았다. 그 아버지가 믿음을 확증하는데는 두가지 사실이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첫째, 그 아들의 회복이 점차적이 아니라 갑작스러웠다는 점이다. 그 종들은 어제 대략이 아니라 정각 제 칠시에 그에게서 열이 떠났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 효과를 보기위하여는 시간이 걸려야만 하고, 혹은 단지 기대만을 걸게하는 약과 같이 역사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을때 그 말씀은 즉각 이루어졌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은 이루어지기위해 시간을 필요로 하지않는다. 그때가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셨던 바로 그 시간이었다는 점이다. 말씀하신 그때인줄 알고(53절). 이러한 사건의 동시 발생은 하나님의 섭리의 조화와 아름다움을 배가시킨다. 사람이 하는 일은 거리에 따라 시간이 지연되고 일이 늦어지게 되는 법이지만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은 그런 법이 없다.

(8) 이 사건이 행복된 결과 : 이 아들의 치유는 그 가족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었다. 왕의 신하 자신은 믿었다. 그는 앞서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었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를 믿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의 심정을 사로잡는 방법을 다양하게 가지고 계신다. 그리고 일시적인 자비를 허락하시므로 더 고귀한 것을 위한 길을 예비하신다. 이와같이 하여 그 신하의 전가족이 믿게 되었다. 그들 모두 이 기적과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며 이 기적은 그 가족의 소망의 꽃을 되살려 놓았던 것이다. 이 사건은 그들 모두에게 큰 감동을 주었으며 이리하여 그리스도를 더욱 사모하게 되었다. 이 사람은 왕의 신하였으므로 대가족을 거느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으로 들어갈때는 그들 모두를 자기와 함께 데리고 들어간 것이다. 그 아들의 병이 이 집안에 일으킨 변화는 얼마나 축복된 것이었던가! 이러한 사건으로 해서 우리는 환난을 두려워하지 않게된다. 우리는 환난뒤에 어떤 선이 뒤따라올지 알수 없기 때문이다.

(9) 이 사건에 대한 복음서 기자의 언급 : 이것은…두번째 표적이니라(54절). 2장 11절을 참고하라. 유대 지방에서 예수께서는 많은 기적을 행하셨다. 예수께서 유대 땅에서 먼저 기적을 베푸셨으나 그곳에서 내몰리심으로 갈릴리에서 기적을 행하셨다. 이곳에서 그리스도를 환영치 않으면 저곳에서 그리스도께서는 환영을 받으실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원한다면 자기 집의 창문을 닫아 햇살이 들어오지 못하게 할수는 있지만 이 온세상에 비쳐드는 햇살은 막아낼수 없다. 이 기적이 두번째 기적이라고 언급한 것은 우리에게 첫번째 기적을 상기시키기 위해서인 것이다. 이전의 자선이 계속해서 자선이 베풀어지기를 소망하게 하듯이 새로운 자비는 이전의 자비를 기억나게 해준다. 귀족 신분을 지닌 병자, 이러한 상류 사회의 인사가 직접 따라왔을 것이다. 높은 지위의 사람들이 선량하기만 하다면 얼마나 선한 일을 많이 할수 있겠는가!

 

# 해설

예수의 복음 증거 ( 4 )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 복음을 증거하셨고, 병들어 죽게된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쳐주심으로써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증거하셨습니다. 예수는 언제 어디서나 천국 복음을 전파하기위해 힘쓰셨는데, 이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 자신의 양식이라고 말씀하심에서 그 의도를 알수 있습니다. 예수는 언제나 하나님의 보내신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노력하셨던 것입니다.

 

1.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의 만남

1)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하신 예수

예수께서 유다를 떠나 갈릴리로 향하여 가실때 사마리아로 통과하게 되었습니다. 사마리아 수가에 이르렀을때 예수께서는 야곱의 우물 곁에 앉아 쉬셨고 그때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러 왔습니다. 예수께서 그 여인에게 물을 주실 것을 요구하시자 그 여인은 예수께 어찌하여 유다인이 사마리아 사람인 자신에게 물을 달라고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는 당시 유다인들이 사마리아 사람을 부정하게 여겨 상종치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유다와 이방인의 혼혈족이었기에 유다인들은 그들을 개와 같이 취급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세상 만민을 차별없이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하나님의 메시야였기에 사마리아인에게도 천국 복음을 전파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a.갈증을 느끼신 예수(요19:28)

b.복음 증거의 대상인 사마리아(행8:25)

2) 생수를 주는 예수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자신이 생수를 주는 자임을 밝히셨습니다. 여인은 예수가 누구관대 야곱의 우물보다 더좋은 생수를 줄수 있느냐며 묻습니다. 예수께서는 여인에게 자신이 주는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임을 말씀하시며 자신이 영생수를 주는 자이심을 교훈하셨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그 말씀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오해하여, 다시는 물을 길러오지 않게 그 물을 주실 것을 요구합니다. 그때에 예수께서 그 여인의 숨겨진 사실을 끄집어내며 남편을 데려오라고 하심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그 여인의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나타내심으로써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이심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a.값없이 주시는 생수(사55:1)

b.예루살렘으로부터 나오는 생수(슥14:8)

3) 예수의 자기 증거

남편을 데려오라는 예수의 요구에 대답할 말이 궁색해진 사마리아 여인은 예배에 관한 문제를 꺼내어 예수께 질문하였습니다. 유다인은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인은 그리심 산에서 여호와께 예배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어느 곳에서 예배를 드려야 옳으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예배드리는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림이 중요함을 교훈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메시야가 오시면 모든 것을 일러주실 것이라고 말하였는데, 예수께서는 자신이 바로 그 메시야이심을 증거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신 목적은 바로 자신이 메시야이시라는 복음을 증거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a.성경이 증거하는 그리스도(요5:39)

b.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함(요9:36-37)

 

2. 예수가 소유한 양식

1) 사마리아 여인의 복음 증거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께서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말씀하시는 순간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리고는 즉시 마을로 뛰어가서 사람들에게 자신이 메시야를 만났음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녀는 메시야를 고대하고 있었기에 예수의 자기 증거를 들을때 믿음을 소유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인이 예수께서 자신의 행한 모든 것을 아시고 말씀하셨음을 증거하자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자기들의 집에 초대하여 이틀을 유하시게 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거하시며 복음을 증거하시자 더욱 많은 자가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이는 예수를 배척한 유다인들과는 대조적인 모습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이 세상 모든 자에게 임하게 됨을 암시해준 사건이었습니다.

a.믿음으로 증거함(고후4:13)

b.말씀을 듣고 생명에 이름(요6:63)

c.말씀을 듣고 지킴으로 하나님 백성이 됨(출19:5)

2) 예수의 양식

제자들이 예수께 잡수실 것을 권하였을때 예수께서는 자신에게 제자들이 알지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의 말씀을 오해하여 예수께 누가 떡을 갖다주었는지 의문을 가졌으나,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것이 자신의 양식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뜻은 복음을 세상에 증거하여 영혼들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는 육체가 떡을 먹어야 살수 있듯이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그 영혼이 살게됨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a.세상에 생명을 주는 하늘의 떡(요6:33)

b.하나님의 뜻을 행하심(요6:38-39)

c.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심(마9:37-38)

 

3. 갈릴리에서의 두번째 표적

1) 갈릴리인들의 예수 영접

예수께서 갈릴리로 들어가실때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사람들의 편견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가 명절 중에 행하신 표적을 목격한 자들은 예수를 영접했습니다. 주의 능력은 사람들의 완고한 편견을 깨뜨려 버리셨던 것입니다. 주께서는 어리석고 무지한 자들에게 복음을 믿게하시기 위하여 여러 표적을 베푸셨습니다.

a.배척당한 예수(마13:57-58)

b.목수의 아들이라고 힐난함(마13:54-55)

2) 아들의 병고침을 구하는 왕의 신하

예수께서 가나에 이르셨을때에 병든 아들을 둔 왕의 신하가 찾아와 병치유를 간구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유다인들에 대하여 표적과 기사를 보지못하면 도무지 믿지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신하에게 아들이 살았으니 가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아이에게 가셔서 손을 얹고 기도라도 해주실 것으로 기대하였겠지만 예수께서는 그 자리에서 병고침을 선포하시고 가보라고 명하셨던 것입니다. 이는 예수의 능력이 시공간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증명하여준 것입니다.

a.표적을 구하는 유대인(요2:18)

b.병고침을 간구함(막5:23)

3) 믿음을 갖게된 신하와 가족들

신하가 집에 와보니 병든 아들의 열기가 떨어졌는데 예수께서 말씀하신 시각부터였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신하와 그 모든 집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아들의 병나음을 통하여 영혼이 구원받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와 같은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a.모든 자에 대한 구원 약속(행2:39)

b.온집이 세례를 받음(행16:15).

 

결론

예수께서 표적을 행하시고 말씀을 증거하실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구주로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언제나 영혼을 사랑하셔서 구원하시기 위해 일하셨던 것입니다. 이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이 자신의 양식이라고 말씀하심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성도는 예수께 복음 증거의 사명을 받은 자로서 언제나 영혼구원을 위해 힘써야 합니다.

 

# 핵심

4:1-42

예수님은 유대인들로부터 이방인 취급을 당하던 사마리아 여인과 상종하시며 그녀와 많은 사마리아인을 구원하셨다. 이는 그분이 만백성의 구주이심을 분명히 보여준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간의 반목(4:9)

사마리아인에 대한 유대인의 멸시는 B.C. 722년,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망한후 사마리아에 이방인들이 대거 유입되어 혼혈인이 양산된데서 비롯되었다. 이때부터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개처럼 취급하며 상종하지 않았다. 바벨론 포로이후 예루살렘 성전재건때, 사마리아인들은 협조하려 했지만 거부당했다. 이에 그들이 그리심산에 독자적 성전을 건축하면서 서로간의 반목관계는 더욱 깊어졌다. 유대인들이 경멸 대상을 가리켜 사마리아인으로 취급한 사실만 보아도 그 점을 알수 있다(8:48).

 

# 묵상

사마리아로 통행하신 예수님 ( 4:4 )

이는 목마른 여인을 만나 생수를 주시기 위함이며(7절), 사마리아와 유대 사이에 수백년동안 내려온 반목을 화해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9절). 또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막힌 죄의 담을 허시고 둘을 하나로 만드사 하나님과 화목케하심을 가르치기 위해서였습니다(엡2:14-16).

예수님의 전도과정 ( 4:5-26 )

예수님이 수가성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신 과정은 우리에게 복음전도에 대한 좋은 본이 됩니다. 먼저 자연스럽게 접근하여 일상생활과 관련한 대화를 유도했고, 혼자있는 조용한 시간을 활용해서 전도했으며, 전도받는 자의 특성에 맞게 하나님의 은혜를 제시했습니다. 또한 죄에 대해서 지적하고 하나님을 경배받으실 분으로 소개했으며, 그렇게 하심으로 전도받은 자의 증거를 통해 복음이 확산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속자이심을 소개했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생수의 물 ( 4:14, 15 )

이 물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고백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구원의 물이요(25, 26절), 믿는 사람의 영혼속에서 넘치는 성령의 생명수입니다(요6:37-39). 그리고 믿는 사람에게 구원과 축복을 약속해 주신 말씀의 물이며(엡5:26), 일시적이 아닌 영원히 솟구치는 샘물인 것입니다(14절). 사마리아 여인이 목이 마른 이유는 이 여인이 생수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떠난 생활을 하였기 때문입니다(22절). 또한 스스로 물을 저축하지 못할 웅덩이를 팠기 때문입니다(렘2:13). 그러므로 영원을 갈구하는 마음은 이 여인처럼 많은 남편으로 인하여 만족되어지는 것이 아니요, 오직 영원하신 분, 하나님 한분만으로 넘치게 채워질수 있는 것입니다(전3:11).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 4:23, 24 )

신령한 예배는 인간 구성 요소의 가장 고귀한 부분인 영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영적관계를 회복하게 될때에 이루어집니다(창1:27; 잠20:7; 요15:1-6; 살전5:23).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는 진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을 삶의 구세주로 영접할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요8:31, 32). 이러한 예배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항상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됩니다(21절).

나의 양식 ( 4:34 )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나의 양식이란 말은 자기의 뜻을 포기하고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할때 참평화를 얻게됩니다.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께 대적할때는 마음의 평화가 있을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을 행할때에 그 크신 능력을 얻게됩니다.

사마리아 전도 ( 4:39-42 )

사마리아인들은 그 여인을 통해 예수님께 인도되었습니다. 전도자가 없이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될수 없습니다. 전하는 자가 없으면 들을수가 없습니다(롬10:14). 또한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말씀을 듣고 더 알고싶어 함께 유하기를 청했습니다(40절). 사마리아인들은 남의 증언에서 비롯된 믿음으로부터 자기 자신의 체험위에 세워진 믿음으로 확신을 갖게되었고 그리스도를 세상의 구주라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42절).

신하의 아들 치유 ( 4:46-53 )

신하는 먼저 겸손히 순종했습니다. 왕의 신하는 나사렛 동네 목수를 찾아 하룻길의 거리를 찾아왔습니다. 즉 아들의 병을 고치기위해 자존심을 버리고 자신을 희생하며 겸손히 예수님 앞에 나왔던 것입니다. 또한 인내로써 간구하며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너희는 기사를 보지않으면 믿지 않으리라’는 냉정한 대답을 듣고도 곡해하거나 낙심치않고 성실하고 진지하게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행했습니다. 즉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는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를 듣고 믿음으로 귀가했던 것입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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