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udy
Ⅰ. 엘리바스의 세번째 연설 22:1-4
엘리바스가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욥에게 정당하게 적용되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 내용자체는 매우 진실되고 선하다.
(1)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유익을 베푸시는 것은 그가 우리에게 도움을 받고 계시기때문이 아니다. 엘리바스는 여기에서 이세상에서 가장 선한 자의 의로움과 온전함이라해도 하나님께 진정한 이익이나 도움이 되지 못하므로 그것들로인하여서는 하나님께 아무것도 바랄수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믿음으로인한 이익은 믿음으로인한 손실보다도 무한히 크다. 그러므로 그것들이 균형을 유지할때 믿음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이로인해 사람이 하나님께 도움을 줄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온전하심은 사람들의 도움이나 이익을 받아들일수 없다. 무한한 것에 무엇이 더해질수 있겠는가? 네 행위가 온전한들 그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참으로 그의 영광이나 부귀에 어떤것을 더해줄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의인을 기뻐하신다고 직접 말씀하셨다. 즉 하나님은 의인들을 지지하시고, 의인과 그들의 기도를 기뻐하신다. 그러나 그 어느것도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스스로 가지고 계신 무한한 만족에 아무도움을 주지못한다.
(2) 하나님께서 우리를 제어하시거나 책망하시는 것은 그가 우리를 두려워하시거나 시기하셔서가 아니다(4절). 하나님이 너를 책망하시며 심문하심이 너의 경외함을 인함이냐. 사단은 실제로 우리들의 첫번째 조상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이 신처럼 되어 자신과 경쟁자가 될까봐 두려워하사 그들에게 지식의 나무를 금하신 것이라고 암시했다. 그러나 그것은 정당하지 못한 암시였다. 하나님께서 선한 사람을 책망하시는 것은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위대한 사람이 두려워서 그들을 책망하시지는 않는다.
Ⅱ. 여러가지 죄명으로 고소당한 욥 22:5-14
엘리바스와 그의 동료들은 일반적으로 욥을 악하고 위선적인 자로 정리하고 있다. 엘리바스는 여기에서 적극적으로 그리고 명백하게 매우 사악한 많은 비행과 허물을 들어 욥을 책망하고 있다. 엘리바스는 "자,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둘러서 이야기만 했고 욥에게 너무 관대하였노라. 이제야말로 욥에게 태도를 분명히 해야할 때라. 우리는 욥에게 분명하게 네가 바로 우리가 이제껏 말해왔던 자, 곧 포학자이고 압제자이며 또한 무신론자라고 말하지 않을수 없노라." 네 악이 크지 아니하냐. "분명히 크도다. 그렇지않다면 네가 그처럼 큰고통을 당하지 않으리라"라고 말하였다. 엘리바스가 여기에서처럼 욥을 그릇되어 책망하는 것은 그의 소유를 약탈해간 스바인이나 갈대아인과 마찬가지로 욥에게 큰죄를 범하는 것이며 큰잘못을 행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선한 이름은 재산보다 귀하고 가치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엘리바스는 이에 대한 세부적인 죄목을 열거할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대담하게 욥을 비방하고자하여 할수 있는 모든 책망을 욥에게 퍼부었으며 거의 모두가 자기와 같은 생각이라는 것을 확신하였던것 같다. 하나님께서 친히 이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자로 칭찬해주신 욥을 그리고 지혜롭고 선한 욥을 여기에서는 그의 한친구가 본래부터 최고로 악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1) 엘리바스는 욥이 부유하였을때 재물과 권세로 선을 행하지 않았을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크게 해하였다고 말하면서 포학하고 부당하게 욥을 책망한다. 그러나 그의 책망은 욥이 자신에 대해 언급해놓은 내용과(24:12절 이하) 하나님께서 욥의 품성에 대해서 언급하신 것(1장)을 비추어볼때 명백한 잘못임이 드러난다. 엘리바스는 욥이 가난한 자들에게 잔인하였고 자비를 베풀지않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까닭없이 형제의 물건을 볼모잡으며. 또는 70인역에서와 같이 '너는 볼모로 너의 형제를 잡으며' 까닭없이 사람들을 감금하고 그들이 빌려간 돈을 갚을 능력이 없다고하여 노예로 삼았다. 그리고 파산한 소작인과 빚진 자들의 옷을 빼앗으려고 그들의 의복을 벗겼으며, 가난한 자에게 자비를 베풀지않았다고 말한다. "너는 갈한 자에게 냉수 한그릇도 마시게 아니하였을뿐만 아니라 극도로 주린 자에게 식물을 주지 아니하였으며 불쌍한 과부로하여금 슬픔에 빠지도록 문전박대하였도다(9절). 너는 공의를 묻기위하여 찾아온 사람들의 말을 듣지도 않았고 그들을 돕지도 않고 돌려보내었도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극악한 것은 고아의 팔을 꺾은 것이니 즉 스스로 아무것도 할수 없는 자들을 너는 완전히 무능하게 들어버렸도다." 가장 혹독한 비방인 이 구절이 비유적으로 암시되고 있다. 고아의 팔을 꺾는구나. 즉 "네 종들이 고아의 팔을 꺾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묵인하였으니 네가 죄를 범한 것이니라." 욥은 부유하고 권세있는 자들만 편애하였다는 말을 듣는다(8절). "부유한 자들이 너의 식탁에서 잔치를 즐기고 있을때, 가난한 자들은 너의 문간에서 얻어먹지도 못하였도다." 엘리바스는 욥이 현재 당하고있는 모든 고통은 다음과 같은 죄때문이라고 추측하고 있다(10,1절). 올무들이 너를 둘러있고. "네가 가난한 자들에게 냉정하게 대했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네게 그와 같이 행하리라. 무자비함보다 더높은 원성을 불러일으키는 죄는 없도다. 그러므로 두려움이 홀연히 너를 침범하리라." 자비를 베풀지아니한 자들이 자비로인한 위로를 얻지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올무와 어두움과 끊임없는 두려움이외에 무엇을 기대할수 있겠는가?
(2) 엘리바스는 욥의 무신론과 불신과 아주 사악한 행위를 들어 욥을 꾸짖었다. 즉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고 사람을 존중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엘리바스는 욥이 쾌락주의자로서 하나님의 존재를 실제로 시인하긴 했으나 하나님의 섭리는 부정하였다고 생각한것 같다.
1) 엘리바스는 한가지 중요한 진리를 언급하였는데, 만일 욥이 그 진리를 충분히 고려했다면 그처럼 격하게 원망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그처럼 대담하게 자기 자신을 변명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12절). 하나님이 높은 하늘에 계시지 아니하냐. 거기에서 하나님은 위엣 세상에는 특별한 방법으로 자신을 나타내시고, 아랫 세상에는 거기에 부합하는 방법으로 자신을 드러내신다. '별의 높음이 얼마나 높은가' 볼때에 우리는 동시에 별보다 높은 곳에 계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생각해보고 그가 얼마나 높으신가를 깨달아야 한다.
2) 엘리바스는 욥이 이 이론을 선하게 사용할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악용하였다고하여 욥을 책망하였다(13절). "이것은 불의속에서 진리를 잡는 것이로다. 너는 하나님이 높은 하늘에 계시다는 사실을 기꺼이 시인하고 있으나 '하나님이 무엇을 아시느냐'고 반문하고 있도다." 엘리바스는 욥이 하나님에 대해 이러한 견해를 가지고있다고 생각하였던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높은 하늘에 계시기때문에 이렇게 멀리 떨어져있는 이땅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행하고 있는가를 보거나 들을수도 없으며 특히 하나님의 눈이 마치 '육신의 눈'(10:4)인 것처럼 생각하여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흑암'(13절)과 '빽빽한 구름'이 가리우고 있을때에는 더욱 볼수 없으리라고 보았다. 그러나 무한한 공간을 충만케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공간의 거리가 아무런 장애가 될수 없으며, 그와 동시에 시간의 거리도 영원하신 하나님께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가 궁창으로 걸어다니실 뿐이라. 하나님께서는 밝고 조용한 세계에서 자신과 자신의 완전하심과 영광을 마음껏 즐기시는 분이시니 우리때문에 왜 고통을 받으시겠는가라는 의미이다. 이는 매우 불합리하고 경건치못한 말이다. 엘리바스는 여기에서 욥에게 그 책임을 지우고 있다. 왜냐하면 최고의 권력자에게 있어서는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 귀찮고 부담스러운 일이며, 무한히 지혜롭고 거룩하며 선한 마음을 지닌 분에게는 공의와 자비의 행위가 노역이 될줄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일 생명도 없는 피조물인 태양의 빛과 영향이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의 가장 높은곳 곧 그가 걸어다니시는 궁창에서 나와서 어둡고 빽빽한 구름을 뚫고 이땅 이곳 저곳에 다 미친다면(시 19:6) 그것을 창조하신 분에 대해 무슨 물어볼 말이 있겠는가?
Ⅲ. 악인에 대한 심판 22:15-20
엘리바스는 욥으로하여금 죄를 깨닫게하려고 노력한뒤에, 여기에서는 그 죄의 대가로 빠지게될 위험에 관하여 일깨워주고자 애쓰고 있다. 엘리바스는 이 이야기를 욥의 경우와 옛날 죄인들의 경우를 비교하면서 전개하고 있다. 그런데 옛날 죄인들은 '하수로인하여 함몰되었던' 자들이며(16절) '남은 것도 불사른 못된' 자들(20절)을 의미한다. 고대 역사와 비교해볼때에 소돔 사람들이야말로 본문의 '남은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된다. 엘리바스는 욥에게 '악인의 밟던 옛적길을 지키려한다'고 하였다(15절). 그들이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또 말하기를 전능자가(우리를 죽이시는 것이외에)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실수 있으랴(17절). 하나님의 황금률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은 그의 철장으로 산산이 부서질 것을 각오해야 한다. 어떤사람들은 이 구절을 이렇게 이해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은혜를 베푸셨는가? 우리를 비참하게 만드는 진노의 방법으로 혹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은혜의 방법으로 그가 하실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여호와께서는 선을 행하시지도 악을 행하시지도 아니하시리라." 엘리바스는 '전능자'라고 부르는 한마디 말에서 이에 대한 모순성을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만일 전능자시라면 그가 무엇인들 못하시겠는가? 하나님이 좋은 것으로 그집에 채우셨느니라(8절). 많은 사람들의 집에 재물이 가득하나 그들에게는 은총을 감사하는 마음이 없으므로 멸망할수밖에 없었다. 악인의 계획은 나와 판이하니라. 욥이 이전에 그렇게 말했고(21:16), 엘리바스도 그 사실에는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하나님에 대한 각자의 원리가 서로 일치할수는 없다하더라도, 그들은 이세상에서 하나님없이 살아가는 자들의 원리를 부인한다는 사실에는 일치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죄인들의 우매함을 드러내고 죄인들의 원리가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보여줄 기회를 얻고있다. "너와 죄인들의 재산이 없어지는 것과는 달리 우리의 재산은 없어지지 않고 앞으로도 계속 형통하리라.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로서 의인의 편에 있다는 증표이라." 엘리바스는 욥을 정죄하는데 사용한 그 계율을 자신과 자신의 친구들을 잘난체하는데 이용하였다. 욥은 끊어짐을 당하므로 악인이고 자기들은 끊어지지 않으므로 의인이라는 논리이다.
Ⅳ. 엘리바스의 훌륭한 조언 22:21-30
엘리바스는 욥에게 악인의 비참한 상태를 말해줌으로써 두려움을 느껴 회개하도록 만들고자 하였다. 그러는 한편 엘리바스는 여기에서 진실로 회개하는 자들이 얻게되는 행복을 욥에게 알려주어 회개하도록 격려하고 있다. 목회자들은 사람들을 대하는데 있어서 이 두가지 방법을 모두 사용해야 한다. 즉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의 두려움으로 사람들에게 경고해야 하는가 하며, 시온산에서 누릴 복음의 위로로 사람들을 격려해야 한다. 그리고 삶과 죽음, 선과 악, 그리고 축복과 저주를 사람들에게 모두 제시해주어야 한다.
(1) 엘리바스는 욥에게 훌륭한 조언을 한다. 그러나 그 조언은 욥이 악인이라는 그릇된 전제에서 나온 것이다.
1)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버리거나 기도를 중단함으로써 너 자신이 하나님에 대해 생소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의미이다. 우리가 이렇게 교제할수 있는 길을 얻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영광이며, 만일 죄로인해 그 교제할수 있는 길을 잃는다면 그것은 우리의 불행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교제의 길로 다시 돌아올수 있도록 초대받는다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다.
2) 평안하라. "너 스스로 평안하라. 그리고 너의 하나님과 더불어 평안하라. 즉 그와 화목하라."
3) 너는 입에서 교훈을 받고(22절). "네가 하나님과 더불어 평안한후에는 그의 다스리심에 복종하라. 그리고 그의 다스리심에 따르기로 작정함으로써 그의 사랑안에 계속 거하도록 하라."
4) 그 말씀을 네마음에 두라. 그 말씀을 받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는 그 말씀을 지켜 보존해야 한다(잠 3:18).
5) 전능자에게로 돌아가고. (23절). "죄에서 떠날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로 또한 너의 의무로 돌아오라. 선한 뜻으로 선하게 시작함으로써 전능자에게로 돌아설뿐만 아니라 온전히 돌아가라. 그의 집으로 돌아가 그에게 순종하라."
6)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버리면. 이것은 소발이 욥에게 한 충고였다(11:14). "악으로 네 장막에 거하지 못하게 하라. 가슴과 손에서뿐만 아니라 네 집에서도 불의를 털어버리라. 멀리 털어버릴수록 더좋도다."
(2) 엘리바스는 또한 욥을 격려한다. 만일 욥이 엘리바스가 한 훌륭한 조언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매우 행복해지리라는 격려이다. 그 격려를 요약해 본다면 아래와 같다.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너는 지금 파멸하여 몰락한 상태에 있으나 네가 만일 하나님께 돌아간다면 다시 흥하리라. 그리하여 현재의 몰락을 복구할수 있으리라. 네 자손들이 다시 집안을 일으키고 재물이 생겨 가산이 늘어나며 네 영혼은 거룩함속에서 안위를 얻으리라."
1) 현세의 복이 욥에게 풍성히 부어질 것이며, 욥이 매우 부자가 되리라고 약속하고 있다(23절). "네가 지금은 비참하고 모든 것을 빼앗긴 상태지만, 네 보배를 진토에 버릴정도로 매우 부유케되고 전능자가 네게 귀한 은이 되시리라"(25절). '귀한 은'이라 함은 '단단한 은'을 의미한다. 그것은 정직하게 얻은 것으로서 강철같이 단단하여 유용하게 사용될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사랑하는 함정에 빠지지만 않는다면 재물은 우리에게 실제로 복이다. 네 보배를 진토에 버리고...금을 강가의 돌에 버리라. 만일 그것을 귀중히 여기지않거나 원하지않는다면 그것을 마음속에 두지아니하고 발앞에 둘리라는 의미이다(행 4:3). 이렇게 다 버림에도 불구하고 매우 안전하리라고 격려한다. 전능자가 네 보배가 되시며(25절, 흠정역에는 '네 방패'로 되어있다-역주) 또 어떤역본에는 '그가 네게 금이 되신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24절에 쓰인 금과 같은 단어이며 또한 견고한 요새를 의미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돈도 보호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전 7:12). 속인들은 황금을 그들의 신으로 삼지만 성도들은 하나님이야말로 그들의 최대의 보호로 여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총과 은혜로 풍요롭게 된 사람들은 가장 귀한 금을 풍족하게 가졌고 가장 귀한 것을 쌓아두고 있다고 말할수 있다.
2) 욥은 영적인 복으로 풍성하게될 것이다. 이에 네가 전능자를 기뻐하여. "속인들이 돈을 기뻐함도 너를 기뻐하여 네게 임하시어 네 보배가 되시리라." 네가 하나님께로 얼굴을 들 것이라. 그리고 지금처럼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것이다. 너는 그에게 기도하겠고(원래의 뜻은 '너는 더많이 기도하겠고'라는 의미이다). "너는 기도로써 하나님께 편지하리라. 비록 그것이 많고 길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너의 그 편지를 귀찮게 여기지 않으시리라." 그는 들으실 것이며. "너를 위하여 네안에 행하시는 것으로써 그 응답을 나타내실 것이라." 욥이 그의 모든 외적인 일을 경영하는 가운데서 내적인 만족을 얻게되리라고 격려한다(28절). 네가 무엇을 경영하면 이루어질 것이요. "너는 많은 지혜와 은혜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너의 모든 계획과 목적을 구상할 것이며 그 일의 결과는 너의 마음을 만족시킬 것이라. 너의 행사를 믿음과 기도로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생각하는바가 이루어지리라. 그리하여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너는 편안한 마음으로 즐거워할 것이라(잠 16:3). 지금 너는 네 주위를 흑암이 뒤덮고 있는 것을 불평하고 있으나 그때에는 네 길에 빛이 비취리라. 즉 하나님이 너를 인도하시고 지시하시리라." 재난과 위험속에 있을때에라도 그는 풍성한 기쁨과 소망을 가지게될 것이다(29절). "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낮춤을 받거든 즉 그들이 낙담할때에 너는 그들에게 높아지리라고 말하라."
3) 욥이 나라의 복이 되며 많은 사람들의 유익을 위한 그릇이 되리라고 격려한다(30절). "하나님은 너의 기도에 응답하시어 무죄한 자의 땅을 건지실 것이며 그일에서 네 손의 깨끗함이 입증되리라." 하나님은 무죄한 자가 아니라도 건지시리니 네 손이 깨끗함을 인하여 그런 자가 건지심을 입으리라. 한사람의 의인은 공적인 의인이라는 사실을 주의하라. 죄인들은 그들이 알든 모르든간에 성도들 덕분에 보다나은 것을 얻는다. 엘리바스와 그의 세친구들은 욥의 '손의 깨끗함'을 인하여 구원을 받았다(42:8).
# 핵심
22:1-30
엘리바스의 마지막 충고이다. 그는 보다 강한 어조로 자신의 인과응보 신학을 계속 전개했다. 더욱이 이번에는 욥이 저지르지도 아니한 구체적인 죄악들을 자기 생각으로 넘겨짚어 열거하기까지 했다(5-9절). 그러면서 겸손히 회개하고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하라는 충고를 덧붙였다.
# 묵상
성경이 말하는 죄 ( 22:7 )
성경이 말하는 죄는 선한 일인줄 알면서도 행하지않는 것입니다. 또한 이웃에게 무관심한 것도 죄입니다. 인간이 누리는 부와 건강은 모두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부와 건강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이웃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엘리바스의 3차 변론 ( 22:12-20 )
그는 하나님의 초월성과 능력을 부인한 욥의 고난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악인의 번영과 의인의 고난에 담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뒤로 미룬채 하나님의 의로우신 인과응보의 원리를 단순히 현세에만 적용시킨 것은 옳은 일일수 없습니다.
엘리바스의 변론중의 진리 ( 22:21-30 )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자에게 구원을 베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불변의 진리라고 할지라도 의인을 죄인으로 정죄하고 이를 전제로 하는 것은 옳은 것이 못됩니다.
욥에게 가장 어려웠던 시련 ( 22:22 )
욥에게 가장 어려웠던 시련은 바로 하나님의 침묵이었습니다. 엘리바스는 변론에서 자신이 마치 하나님의 대변인인 것처럼 말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알기란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욥은 산재해있는 인생의 문제를 놓고 해결점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니 이처럼 힘든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생활을 할때 하나님께서 침묵하시지 않도록 진실을 하나님께 아뢰어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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