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 누구인가

[욥기 25장 1절~6절]
1절 -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이르되
2절 - 하나님은 주권과 위엄을 가지셨고 높은 곳에서 화평을 베푸시느니라
3절 - 그의 군대를 어찌 계수할 수 있으랴 그가 비추는 광명을 받지 않은 자가 누구냐
4절 - 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여자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5절 - 보라 그의 눈에는 달이라도 빛을 발하지 못하고 별도 빛나지 못하거든
6절 - 하물며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생이랴

1. 빌닷이 욥을 향해 세 번째 변론을 시작합니다. 그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고 이야기하나요?(1~2절)
하나님은 주권과 위엄을 가지셨고 높은 곳에서 화평을 베푸시는 분이라고 빌닷은 말합니다.
앞서 두 번에 걸친 변론에서 빌닷은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내세우면서 욥은 그의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빌닷의 변론은 인과응보의 원리에 치우친 단순하고 편협한 논리로 드러납니다. 이제 세 번째 변론에서 빌닷은 하나님의 주권과 위엄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빌닷은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통치를 강조하기 위해 하나님이 높은 곳에서 화평을 베푸시는 분임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시고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통치하는 원리로 ‘화평’을 사용하십니다. 빌닷이 하나님의 주권과 의로우심을 강조한 이유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을 찬양하고자 하는 순수한 동기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과 의를 강조함으로써 욥이 죄인인 것을 주장하고 그의 회개를 촉구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로움과 권리를 함부로 주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빌닷은 하나님의 강력한 힘과 완전한 의로움에 대해 무엇이라고 주장하나요?(3~4절)
하나님의 군대는 셀 수 없으며 하나님이 비추는 광명을 받지 않는 자가 없으니, 어찌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의로우며 깨끗하다고 할 수 있는가라고 빌닷은 주장합니다.
이제 빌닷은 하나님의 강력한 힘과 의로움을 주장합니다. 하나님의 군대, 즉 천사들의 능력은 강력할 뿐만 아니라 그 규모가 엄청나기 때문에 인간의 지식으로 셀 수 없습니다. 인간은 무지해서 하늘의 지식에 이를 수 없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의 규모를 파악할 수 없기에,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비추시는 광명에 의존하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빛과 함께 주어지는 인간의 생명 역시 하나님의 손이 주관하십니다. 미약하고 의존적인 인간은 하나님의 빛과 생명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며 살아가도록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그런 연약한 사람이 어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로움과 깨끗함을 자랑할 수 있는가라는 논리로, 빌닷은 자신이 무죄하고 의롭다고 말하는 욥의 주장을 무력화하려고 합니다. 어쨌든 타락한 죄의 본성을 갖고 있는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지 않고서는 결코 자신의 의를 인정받거나 구원받을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3. 빌닷에 의하면 하나님의 눈에 비친 사람은 어떤 존재인가요?(5~6절)
하나님의 눈에는 달이라도 빛을 발하지 못하고 별도 빛나지 못하거든, 하물며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생이 어찌 의로울 수 있겠는가라고 빌닷은 말합니다.
빌닷이 욥에게 이야기할 때 소재로 사용한 ‘달과 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 중 밝고 빛나며 아름다운 것을 상징하는 사물로 등장합니다. 밤에도 환하게 이 땅을 비추는 달과 별은 사람에게 선망의 대상이며,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경이를 느끼게 하는 아름다운 존재입니다. 그러나 이런 달과 별이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빛을 발하지 못하는 지극히 작고 미미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빛을 발하는 달과 별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전능하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 것처럼,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서면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연약하고 미천하다는 사실을 표현하기 위해 ‘먼지’(시 103:14), ‘풀’(사 40:6), ‘티끌’(사 40:15) 같은 단어를 사용합니다. 빌닷은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생’이라고까지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선 사람은 정말 미천하고 형편없이 초라한 존재임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빌닷은 욥이 자기 의를 주장하더라도 여전히 그가 하찮은 존재임을 강조함으로써 욥에게 자기 죄를 인정하고 회개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4. 하나님은 피조 세계를 통해 그분의 사랑과 섭리를 날마다 나타내십니다. 최근 내가 일상 속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에 대해 나누어 보세요.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을 보면서 하나님의 존재와 섭리를 깨닫는 것을 자연주의 영성이라고 합니다. 자연주의 영성가들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와 창조 질서를 통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을 깨닫고 하나님과 친밀히 교제하고자 합니다. 로마서 1:20절에는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라고 말씀합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도 “모든 피조물은 마음이 올바른 사람에게 삶의 거울, 거룩한 교리책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여 주지 못할 만큼 작거나 무가치한 피조물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만물을 통해 하나님의 선하심과 전능하심을 알게 하셨습니다. 또한 우리를 위해 신실하고 세밀하신 사랑의 언어를 우주 만물에 새겨 놓으셨습니다. 해와 달과 수많은 별, 푸른 하늘과 바다, 풀과 나무, 새와 동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신 우리 자신을 보고 있노라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경이로움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하게 됩니다. 자연 만물을 관찰하고 연구할수록 하나님의 깊은 섭리와 뛰어난 지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운행하시는 능력에 감탄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들꽃, 포도밭, 양, 결혼식, 가족 등 평범한 것에서 영적인 교훈을 이끌어 내셨습니다. 우리도 영적인 귀를 열기만 한다면 자연 세계와 일상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주권과 위엄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5. 종종 감정과 생각에 치우쳐 하나님을 함부로 판단하지는 않았나요? 내가 갖추어야 할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세요.
때로 하나님은 우리의 부르짖음과 고통을 외면하시고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침묵은 우리의 연약한 모습과 변덕스러운 간구에도 불구하고 늘 우리를 잠잠히 지켜보시는 하나님 사랑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변덕스러운 감정과 무분별한 판단에 흔들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경거망동하며 쉽게 흔들리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향한 감정도 시시각각으로 변합니다. 무한한 기쁨과 행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서 감격스러워 하다가도, 예기치 않은 고난을 만나면 순식간에 하나님을 의심하고 불안해합니다. 하나님은 늘 변함없는 모습으로 계신데, 우리는 상황이나 감정에 따라 하나님을 마음대로 판단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인자와 자비와 긍휼을 한 번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시 100:5).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 삶을 통해 계속해서 공부하고 알아가야 합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벧후 3:18).


출처 : 생명의 삶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