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udy
(1~26절)
참된 믿음 - 본서 전체의 주제이기도 한 본장의 주제는 참된 믿음에 대한 철저한 규명이다. 참된 믿음은 이웃과의 관계에서 사랑을 동반하며, 살아 있는 행위로 나타난다. 특별히 여기에서 야고보는 믿음과 행위의 관계성을 강조하면서 믿음을 두 가지로 구분한다. 첫째는 야고보가 염려했던 것으로서 단지 교회에 출석하고 교리를 인정하지만 진정한 생활이 없는 형식적인 믿음이며, 둘째는 중심으로 믿고 거듭나서 그리스도와 영적인 일체가 되어 지식과 양심, 즉 지적 신앙과 실천적 신앙이 일체가 되어 지식과 양심, 즉 지적 신앙과 실천적 신앙이 일체가 된 믿음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말씀과 성령에 의한 내적인 변화없이 생활하는 외형적인 믿음의 허무성과 참된 믿음이란 교리를 시인하는 데 있지 않고 행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한편 본장은 다음과 같은 구조로 되어 있다.
1) 사랑으로 입증되는 믿음(1~13절)
2) 행함으로 입증되는 믿음(14~26절)
(1~13절)
차별의 금지 - 본서는 참 믿음은 지식과 행동이 일치된 것이라는 원칙론적 진술과 그러면 그 원칙을 생활의 구체적 측면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설명을 번갈아 진술하는 방법으로 편지를 진행하고 있다. 이 부분은 그 첫번째로 세상적 기준에서 인간을 차별 대우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늘나라 시민이기 때문에 하늘나라 기준으로 인간을 보아야 하며 또 하늘나라는 인간을 결코 차별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할 때 차별이 얼마나 가증한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공공연히 자행되는 차별을 금해야 할 구체적 이유는 주님이 차별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며, 가난한 자에게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이며, 차별은 이웃 사랑의 계명에 어긋나고,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이웃을 대하는 우리의 행동을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으며 그것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요일 4:20).
[1절]
영광의 주가 의미하는 바는 숭고하신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너희들이 사람을 외모로 취한다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마 22:16).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에서 헬, '프로소포렘피시아'(겉으로 판단하다)란 말은 본래 법정에서 재판장이 한 편에만 유리하게 치우친 판결을 내린다는 뜻으로 후에 '편견'이나 '차별 대우'라는 일반적 의미로 사용되었다(마 22:16; 눅 20:21; 롬 2:11; 엡 6:9; 골 3:25). 이러한 차별 대우는 하나님의 판단과 반대되며 세상적인 기준에 의한다. 예수께서 이러한 편견에 의해 죽임을 당하셨음을 생각할 때 우리는 이러한 죄의 심각성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2절]
금가락지를 끼는 것은 부자의 사치스러움을 나타내는 당시의 관습이며 아름다운의 헬, '람프라'는 부유한 사람이나 고관의 옷을 가리킬 때 자주 사용되었던 용어이다.
[3절]
좋은 자리. 회당의 높은 자리를 노리는 장로와 서기관을 책망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연상된다(마 23:6; 막 12:39; 눅 11:43).
[5절]
본문은 차별을 금하는 이유로서 하나님의 은혜와 선택을 강조한다.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는 문자적으로 세상의 가난한 자로서 물질 면에서 가난한 자를 의미한다. 이는 하나님의 선택에는 민족적인 차별이나(행 10:34) 사회적인 차별(엡 6:9)이 없음을 보여 준다. 따라서 이 말씀은 교회 안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며 아무리 비천한 자일지라도 그의 인간성은 존중되고 사랑 안에서 교제해야 한다는 진리를 가르쳐 준다.
[6절]
부자는...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이는 사회적 현상으로 부자들이 부채의 미불, 소작료의 미납 등의 이유로 가난한 자들을 법정으로 끌고 가는 것을 의미한다. 야고보가 여기에서 죄로 지적하는 것은 부유함 자체가 아니라 부유한 자의 악덕 곧 가난한 자들에 대한 착취와 그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불평등 구조를 심화, 존속시키는 것이다<욥 42:12, 성경의 부(富)>.
[7절]
그 아름다운 이름은 '그리스도' 혹은 '그리스도인'을 의미하며 그 이름이 훼방당한다는 말은 그 당시 교회 안에 많은 비율을 차지했던 가난한 성도들이 부자들의 멸시를 받았다는 의미로서 이는 곧 그리스도의 이름을 욕되게 한 신성 모독죄이다(사 52:5; 롬 2:24). 우리는 본절에서 가난한 그리스도인의 영적 부유함과 그를 멸시하는 죄의 심각성을 엿볼 수 있다.
[8절]
외모로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되는 또 다른 이유가 언급되고 있다. 그 이유는 이웃 사랑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 때문이다. 사랑이 최고의 법인 까닭은 성부께서 율법으로 주시고 성자께서 제일 되는 계명이라고 강조하시고(요 13:34)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사랑으로 채우셨기 때문이요(롬 13:10), 사랑은 이기주의로부터 나를 자유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랑은 간직되어서는 안 되며 행동으로 표출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다.
[12절]
자유의 율법은 결코 방종의 무법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생활에 있어서 말과 행실에 책임을 지고 성취해야 할 그리스도의 법(갈 6:2)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도덕과 윤리적 책임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닌 죄로부터의 자유로서 거룩과 사랑의 실제적인 실천이 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14~26절)
믿음과 행함의 연속성 - 본문에서 야고보는 참 믿음은 생활의 열매로 나타나는 것인바, 믿음이라고 다 옳은 믿음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믿음에는 죽은 믿음, 사탄적 믿음, 살아 있는 믿음이 있다고 그는 역설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참 믿음은 흥분된 막연한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오는 축복에 대한 확신 속에서 생활하는 실제적인 삶인 것을 알 수 있다.
[15절]
행동이 없는 믿음의 허위성을 실례를 들어 설명한다. 형제나 자매. 매우 궁핍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다름아닌 같은 성도임을 보여준다. 헐벗고의 헬, '굼노이'는 실제로 벌거벗은 것을 의미하는 과장된 표현이며, 이러한 표현법은 지금 성도가 절망적인 형편에 처해 있음을 묘사하기 위해 쓰였다.
[17절]
행함이 없는 믿음은 앞절의 내용을 한마디로 정의한 것으로서 말로써 행위를 대신하는 거짓 믿음을 가리킨다. 우리는 여기에서 믿음과 행위의 불가분리성과 참된 믿음은 지식이나 마음에 독존(獨存)하지 않으며 봉사와 선행으로 나타나는 실천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마 7:21; 마 25:40; 갈 5:6; 갈 6:10; 요일 3:17, 18).
[19절]
본절에서 야고보는 귀신들의 믿음을 소개하면서 교리적인 믿음의 위험성을 지적한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내용은 그 유명한 유대교의 정통적 교리인 쉐마(신 6:4)에 나오는 진리이다. 그러나 이처럼 단순히 교리를 인정하는 지식적인 믿음만으로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믿음은 하나님의 유일성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막 3:11, 12)과 지옥의 실제(눅 8:31)를 알고 있는 사탄에게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정한 구원의 믿음은 신학적인 어떤 명제에 대한 지적 승인이 아니라 더욱 깊어져 안으로는 온전한 속 사람이 형성되고 밖으로는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실천적인 믿음이란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다.
(21~26절)
참 믿음의 실례 - 지금까지 부정적인 측면에서 믿음을 설명하던 야고보는 여기에서 아브라함과 라합의 예를 들어 살아 있는 믿음의 진수를 보여 준다.
[21절]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은 바울의 칭의 교리와 모순되는 듯이 보이나 사실 야고보가 주장하는 행함은 믿음에 근거한 것이므로 양자는 서로 조화를 이룬다(롬 4:13; 롬 5:1; 롬 9:30; 엡 2:8).
[22절]
믿음이...온전케 되었느니라. 믿음은 행함의 근거가 되었고 행함은 믿음을 완성시켰다는 뜻이다. 이처럼 믿음과 행함이 결합되어 있는 아브라함에게서 우리는 단순한 신앙 고백의 차원을 넘어 행함의 근본 원리로서 활동하는 믿음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교회의 아름다움은 지적인 교리나 감정으로가 아니라, 의지적으로 행동하는 실제적인 믿음으로 완성된다(마 7:16~20; 요 15:1~5; 히 6:7, 8).
[25절]
기생 라합이. 이 말은 본래 '카이'란 헬라어 조사가 붙어 있어 '기생 라합조차도'라고 번역된다. 아브라함과 달리 라합은 이방인에다 여자이며 창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예수님의 족보(마 1:5)에 기록되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행동하는 믿음의 중요성을 느낄 수 있다.
# 해설
형제에 대한 바른 태도 (1~13절)
본서의 본론은 1:19~5:6절로 1:19~27절과 2:14~26절은 믿음의 행함을 그 원리적 측면에서 요약한 것이고, 나머지 다섯 문단은 생활의 구체적 측면에서 어떻게 믿음의 행함이라는 원리를 적용할 것인지와 그 실천의 긴박성을 강조하는(4:13~5:6) 부분이다. 본문은 그 다섯 문단 중 첫 문단으로서 형제 사이의 차별 문제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믿음과 행함의 연속성 (14~26절)
히브리서 11:1~3절이 믿음(faith)의 인식론적 특징을 강조했다면, 본문은 믿음의 윤리적 측면을 강조했다. 이처럼 야고보 사도가 성도의 선행에 대한 당위성을 역설함으로써 믿음과 행함의 필연적 연속성을 강조한 이유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일반 철학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인간이란 필연적으로 자신이 바르고 선하다고 믿는 가치 기준에 따라 행동하게 마련이며 또 그럴 때에만 스스로 자기 신뢰와 행복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은 이미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존재 양식이다. 따라서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예수를 믿는다면서 예수가 제시하고 있는 가치관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의 진정성은 성립될 수 없다. 또한 세상의 이데올로기들이나 철학적 신념들은 인간이 고안하거나 발견한 원리로서 그 자체에 아무 생명력이 없다. 그러나 성경이 제시하는 믿음은 그 대상과 결과에 있어서 이와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 대상은 우리가 믿건 안 믿건 우리를 초월하여 스스로 존재하는 예수이시다. 때문에 예수 신앙은 믿어도 그만, 안 믿어도 그만이 아닌, 생명과 형벌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 핵심
1~13절
서로 다른 사회적 지위와 빈부 격차 등의 이유로 성도 간에 차별하는 악습을 책망하면서, 서로가 사랑으로 대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행함과 믿음 (24절)
누구든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이신칭의(以信稱義)의 원리(롬 3:19~28)는 기독교 진리의 핵심이다. 그런데 야고보가 행위를 강조한 이유는 무엇일까? 동전에 앞뒤가 있듯이 믿음에도 양면성이 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아담의 타락 이래 인간은 모두 죄인이므로 자신의 행위로 구원받을 자가 없다. 따라서 구원의 조건은 오직 믿음이다. 주님을 믿고 구원받은 자는 필연적으로 행실이 변하기 마련이므로 바른 행실은 믿음의 진위 여부를 판별하는 시금석이 된다.
# 묵상
공동체 안에서의 성도들 (1~5절)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성도들끼리 차별해서는 안되는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믿음을 소유한 형제이며 하나님으로부터 동일한 약속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자들이기 때문이고, 하나님이 형제 차별을 금하고 형제 사랑을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의 거룩한 몸인 교회 안에서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여 서로 구별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공동체는 한 몸으로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이며 그리스도의 지체임을 알아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외형적인 믿음 (14~26절)
외형적인 믿음이란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도 행함이 없는 믿음을 말합니다. 이러한 믿음으로는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구약의 선조들이 믿음의 위인들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의 믿음을 행위로써 증명했기 때문입니다. 즉, 참된 믿음은 진리에 대한 실천적인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과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 (21~22절)
바울은 율법의 행위와는 무관하게 우리를 믿음으로 의롭다고 칭하심으로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했고, 야고보는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의롭게 된 사실을 입증해 주는 완성된 의로서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순종을 말합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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