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udy

Ⅰ. 기쁜소식을 전파하라 40:1-2
하나님의 백성을 위로하라는 이임무와 지시는 비단 이사야 선지자에게 뿐만아니라 여호와의 모든 선지자들과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자들에게 내려진 것이다. 이말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이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자비를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확신시키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특히 예루살렘이 파괴되어 포로로 잡혀갔던 당시의 선지자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지시이다. 포로된 자들을 격려하여 희망을 갖게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였다. 또한 이말은 성령께서 위로자와 그리스도인들의 기쁨의 조력자로 세우신 복음의 사역자들에게 자신들의 임무를 상기시키는 말씀이다.
(1)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전체적으로 주신 위로의 말씀이다(1절). 선지자들은 하나님께로부터 그의 백성을 위로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이세상에는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 최악의 환경가운데서도 위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가 이사야서 전반부에서 본것과 같은 정죄의 말씀뒤에는 반드시 본문에 나타나있는 것과 같은 위로의 말씀이 따라온다. 그이유는 우리를 지으신 그분이 우리를 치료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2) 이것은 특별히 예루살렘에서 하신 위로의 말씀이다(2절).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이것을 속삭이지 말고,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즉 죄인들에게 그들의 죄악을 보여주고, 또한 성도들에게 위로를 보여주라. 예루살렘으로 이것을 듣게하라." '그 복역의 때' 즉 정해진 노예생활의 기간이 끝났다. 이제 전쟁이 종료되었다. 인생은 전쟁이다(욥 7:1). 성도의 생활은 더욱더 그렇다. 그러나 전투가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며, 언젠가는 끝이날 것이다. 그때 선한 군사들은 안식에 들어갈뿐만 아니라 보상을 받게될 것이 분명하다. 그들의 고통의 원인이 제거될 것이다. 그리고 원인이 제거되었을때 결과도 끝나게될 것이다. 예루살렘에게 '그죄악의 사함을 입었다'고, 하나님께서 그와 화해하셨다고 말하라. "아들아 즐거워하라 너의 죄가 사함을 받았느니라"하는 이말보다 더 큰위로의 말은 있을수 없다. 죄사함을 받는 그때에 사랑안에서 여러가지 어려움이 제거된다. 그모든 죄를 인하여(즉 예루살렘이 그모든 죄를 치유하기위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우상숭배는 큰죄악이며,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바벨론의 포로가 되게하심으로 이죄악에서 깨끗케하시기를 작정하셨다. 그런데 이제 그들은 우상숭배에서 격리될만큼 충분한 처벌을 받을 것이다. 포로생활의 고통은 그들의 마음속에 우상에 대한 강한 반감을 심어놓았으며, 이죄악을 깨끗하게 하는데 필요한 것보다 훨씬 강한 처방이었던 것이다. 진실하게 회개하는 자들은 참으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여러가지 고난안에서 '그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는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써 이루신 속죄가 죄의 대가보다 두배이상, 무한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신 것이다.

Ⅱ. 구속을 위한 준비 40:3-8
시온에 은혜베푸실 때가 다가왔을때, 회개와 믿음으로 그들을 위해 마련해두신 은혜에 알맞게 준비시킬 사람이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는 글을 보는데, 우리는 이말을 포로시대의 선지자들 즉 구원의 여명이 밝아오는 것을 보고 포로된 자들에게 이구원에 대한 준비를 하라고 외치던 선지자들에게 적용시킬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세례요한에게 적용되는 말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말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그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일수 있도록 그들의 마음을 정돈시키기위하여 즉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이기 때문이다.
(1) 그는 백성들에게 죄에 대하여 회개할 것을 요구함으로 그들을 준비시켰다. 세례요한은 이것을 온유대와 예루살렘에 전파하고(마 3:2,5), 이렇게함으로써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였다'(눅 1:17). 하나님은 지금 자비의 길로 오신다(3-5절). 그러므로 우리는 그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한다. 이것을 이스라엘의 포로생활에 적용시킨다면, 아무리 많은 어려움이 그들앞에 가로놓여있다 하더라도 그들이 돌아올때에 이모든 어려움이 제거되리라는 약속으로 간주할수 있을 것이다. 이광야의 소리는 선구자들로하여금 길을 고르는 작업을 하게한다.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가 우리 영혼속으로 들어오시도록 준비하라고 우리를 부르시는 부르심이다. 우리는 이와같은 마음의 자세를 갖추고, 자신을 정돈하여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여호와께서 들어오심에 방해가 될만한 것은 전부 없애버려라. 그리스도를 위한 자리를 만들어라."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하라. 실의와 좌절때문에 그리스도안에 있는 위로를 얻지못하는 자들은 '돋우어야' 되는 골짜기들이며 자고한 마음때문에 그리스도안에 있는 위로를 얻지못하는 자들은 반드시 '낮아져야' 되는 언덕이며 산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도에 대하여 편견을 가지며 불순종하는 자들은 곧게되어야 하는 굽은 길이다. 이일이 이루어졌을때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다'(5절). 포로된 자들이 구원을 받을 준비가 되었을때 고레스 왕이 구원을 선포할 것이다. 세례요한이 일정기간동안 회개를 전파하여 백성들이 여호와를 맞이할 준비를 갖추었을때(눅 1:17) 메시야가 직접 그의 영광가운데 나타나셔서 여러가지 이적을 행하실 것이며, 요한이 죄인이라고 선언함으로 상처입혔던 자들을 은혜로써 안위하시고 싸매고 치료해주실 것이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남은 이방을 비추는 빛이 될것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포로생활에서 돌아오는 것은 이웃 백성들이 주목하여 보았던 것처럼(시 126:2), 유대인뿐만 아니라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볼 것이다.'
(2) 그는 어떤 피조물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믿게함으로 백성들을 준비시켰다. 구원에 관한 여러가지 예언과 약속이 성취될때, 여호와의 언약이 확실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사람의 능력이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을 방해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앞에서 풀과 같이 될것이며, 시들어서 땅에 떨어지게될 것이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바벨론 사람들도 풀과 같을 뿐이다. 또한 사람의 능력이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을 돕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것을 의뢰하여서는 안된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풀과 같을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구원하려 하실때에는 그들이 피조물을 의지하던 행위와 산과 언덕에서 구원을 찾던 행위를 모두 끊어버리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 곧 이제 나타날 여호와의 영광과 그의 은혜 곧 영광과 함께 우리에게 보내주시며 또한 우리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영원히 있을 것이다.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려는 우리는 '모든 육체는 풀과 같이 약하며 시들어져 버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우리는 자신을 스스로 구원할수 없다. 피조물의 모든 아름다움은 풀과 꽃과 같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행복을 공급해 주시는데 이행복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Ⅲ.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남 40:9-11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리라'는 약속을 주셨다(5절).
(1) 이 영광이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9절). 여호와의 영광에 대한 소식이 시온과 예루살렘에 나아있는 자들, 곧 전에 그땅의 포도원지기와 농부들이었던 가난한 자들에게 공포될 것이다. 그들은 형제들이 돌아올 것이라는 소식을 듣게될 것이다. 또한 전에는 시온과 예루살렘에 속해있었지만 지금은 포로된 자들도 이소식을 듣게될 것이다. 시온이 '바벨론의 딸과 함께 거한다'고 표현되어 있다(슥 2:7). 시온은 거기에서 고레스의 관대한 정책발표를 들었다. 그리고 시온과 예루살렘이 이소식을 공포할 것이다(본문을 이렇게 해석할수도 있다). 그곳에 남아있는 자들, 이미 돌아온 자들은 이소식을 가능한한 크게 외쳐야 한다. 힘써 소리를 높이라. "유다의 성읍들과 그땅의 모든 거민들에게 말하라." 너희 하나님을 보라. "이는 우리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도다." 후에 유대 백성들이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즉시 제단을 세우고, 예루살렘에서 다른 유다 성읍들에게 통지하여 와서 희생드리는 일에 그들과 동참하라고 초청하였다(스 3:2-4). 본문의 이 예언은 이 초청의 말이라고 볼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공공연하게 담대히 전파할때 완전히 성취될 예언이었다.
(2) 장차 나타날 그영광은 무엇인가.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그는 매우 강하기때문에 누가 대항한다 할지라도 전혀 방해받지 않으실 것이다. 그리고 의로우신 재판장으로서 모든 사람의 업적에 따라 보상하실 것이다.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앞에 있으며. 하나님은 행하신바를 친히 아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이시다(시 80:1). 또한 그리스도는 선한 목자이시다(요 10:11). 그는 목자같이 양무리를 먹이시며. 그의 말씀은 양떼를 먹이는 꼴이며, 그의 법은 양들이 뛰노는 들판이다. 그리고 그의 사역자들은 작은 목자들이다. 그는 약하여 스스로 어떻게 할수 없는 양들과 '젖먹이는 암컷들을' 돌보신다. 선한 목자는 어린이들, 연약한 초신자들, 믿음이 약한 신자들과 슬픈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세밀한 관심을 기울이신다. 이들은 그의 양떼들이다. 그는 이 양들이 방황할때 모아들이시며 넘어질때 일으키시며 흩어질때 함께있게 하심으로 결국 함께 모아 안전하게 자기에게로 이끌어 주신다. 그리고 이모든 일을 손수하시므로 양들을 그의 손에서 빼앗아갈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요 10:28). 그는 양들을 자상하게 인도하실 것이다.

Ⅳ. 하나님의 크심 40:12-17
이본문은 이스라엘의 주 여호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영광을 묘사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기록한 목적은 바벨론에 포로된 자들을 격려하여 희망을 가지게 하고 구원을 위해 하나님을 의뢰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구원에 관한 기쁜소식을 받는 자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과 신앙심으로 가득차게 하기 위함이다.
(1) 하나님의 능력은 한이 없다(12절).
1) 하나님의 영역은 광대하다. 광활한 하늘을 바라보라. 그러나 위대하신 하나님은 '뼘으로 하늘을 재신다.' 그는 이세상에 있는 모든 물을 '손바닥으로' 헤아릴수 있으며, '땅의 티끌을 (한)되에 담으신다.' 혹은 세손가락으로 집는것 이상의 분량밖에 되지않는다.
2) 하나님의 힘은 무한히 커서, 상인들이 물건을 저울에 달아보는 것처럼 쉽게 산들을 옮기실수 있다. 하나님은 산들을 평형 저울에 달아놓으신 것처럼 정확하게 균형을 잡아놓으셨다.
(2) 하나님의 지혜는 헤아릴수가 없다(13,14절).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아무도 따라할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생각하지 않으신 어떤 것을 제안할수 있는 사람도 아무도 없다. 여호와께서 세상을 만드실때(요 26:13) 그에게 충고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또한 그에게는 이세상 통치에 대하여 조언하는 어떤 묘사도 필요하지 않다.
(3) 비교해보면 세상의 열국들은 아무것도 아니다(15,17절). 모든 크고 강력한 나라들과 가장 호사스러운 왕들과 가장 인구많은 왕국들을 보라. 많은 섬들 열방의 무수한 섬들을 보라. 하나님앞에서는 이것들이 광대한 바다에 비하여 '통의 한방울 물'같고, 땅의 모든 티끌에 비하여 '저울의 적은 티끌'(너무 적어서 저울이 움직이지도 않아, 무시될 정도의 양) 같다. 그가 '섬들을 먼지같이' 드시며 열방들을 '없는 것같이 빈 것같이' 여기시므로 우리도 이것들을 이와같이 여겨야 한다. 하나님은 태초에 이모든 것을 아무것도 없는데서 이끌어내신 것처럼, 또한 쉽게 없이 하실수도 있다. 이것들은 모두 '빈 것'이다. 이단어는 창1:2절의 공허한 상태를 묘사하는 단어와 동일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이와같이 하찮은 것이지만, 이세상을 구원하시기위해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셨다(요 3:16)는 사실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웅변적으로 대변하는 것이라 할수 있다.
(4) 우리가 아무리 교회에서 봉사한다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께 무엇을 더해드리는 것은 아니다(16절). 레바논 짐승들은 번제 소용에도 부족하겠고 그삼림은 그화목 소용에도 부족할 것이라. 하나님은 모든 찬양과 송축, 모든 번제와 희생보다 훨씬 높이 계시는 분이시다.

Ⅴ. 하나님과 우상비교 40:18-26
여기에서 선지자는 첫째, 우상들을 만들어놓고 이것들이 하나님을 닮았다고 말하며 충성을 바치는 사람들을 책망한다. 둘째, 피조물들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고 이들을 하나님보다 더두려워하고 더사랑하는 사람들을 책망한다. 선지자는 여기에서 같은 질문을 두번 한다.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하겠으며(18절).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25절). 이질문은 눈에 보이지않는 하나님에 대한 눈에 보이는 형상을 만들고 또 거기에 신성이 깃들어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보여준다. 또한 피조물을 하나님과 동일하게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보여준다. 교만한 사람들은 자신을 하나님과 같이 여기며 탐심이 많은 사람들은 돈을 하나님과 같게 만들어 버린다. 우리가 어떤 것을 하나님보다 더귀중하게 생각하거나 사랑하며 두려워하거나 그안에 희망을 둔다면, 그피조물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만드는 결과가 되며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최고의 모독이 된다.
(1) 이제 선지자는 우상이란 한낱 경멸의 대상일뿐이라고 설명해준다(19,20절). 우상들가운데 좀나은 종류를 생각해보자. 이것도 어떤 형편없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제작자가 원하는 모양대로 주물한후, 금신상이 되도록 하기위해 도금하였거나 겉에 금박을 입힌 것이다. 이것은 직공이 만든 것이기때문에 사람의 제작물이지 '참신이 아니다'(호8:6). 이것은 겉은 금이지만 속은 납이나 동이다. 따라서 비록 신성을 나타낸다하더라도 드러나보이는 것과 본질이 다르기때문에 이것은 기만이다. 너무 '궁핍하여' 자기 신에게 희생하나 제대로 드리지 못하는 자도 비록 청동이나 대리석으로 신상을 만들지는 못한다할지라도, 없는 것보다는 차라리 목상이라도 가지기를 원한다. 따라서 '썩지않는 나무를 택하고' 그것을 조각하여 자기의 신상을 만들 것이다. 좀나은 부류의 사람들은 사슬을 가지고 자기 신상들을 장식한다. 그리고 비록 나무우상을 가진 자들도 우상이 '흔들리지않도록' 배려한다. 이 우상숭배자들은 자기 자신들이 만든 그신상들('느후스단', 놋조각 혹은 나무 막대기)이 자기들에게 어떤 행복을 줄수 있으리라고 허황된 꿈을 꿈으로써 자신들의 이성을 얼마나 부끄럽게 만드는가! 또한 이들이 유일하시고 참되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애하는 우리들을 얼마나 부끄럽게 만드는가! 이들은 자신의 우상들을 위해 어떤 지출도 아끼지 않는데, 우리는 우리 하나님을 섬기는데 사용되는 것을 낭비하는 것으로 여기고 얼마나 인색하게 굴었는가.
(2) 선지자는 하나님을 무한히 크시고 최고의 경배를 받으실만한 분으로 증명하기위하여 다음의 사실들을 제시한다.
1) 그는 사람들이 '주께 대하여 귀로 들은 것'을 증거로 제시한다(21절). "너희는 직관적으로 '알지못하느냐.' 태초로부터 조상들과 선진들에게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전승에 의해 아버지들과 선생님들에게서 '듣지 못하였느냐.' 땅의 기초가 창조될때부터 항상 인정되어온 사상, 즉 하나님은 크신 하나님이시며, 모든 신들위에 크신 왕이시라는 사실을 너희가 깨닫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에 관한 보이지않는 것들이 '창세로부터 분명히 보여 알게되어 있다'(롬 1:20). 우리는 조상들과 장로들에게 물을수 있을뿐만 아니라(신 32:7), '길가는 사람들'에게(욥 21:29) 맨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물어볼수 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통치하신다. 하늘과 땅도 그의 관할하에 있다. 그는 땅위 궁창에 앉으시나니(22절). 그는 지금도 여전히 하늘을 펴고 계시며, 또한 하늘이 두루마리같이 말려질 그날이 오기까지 계속 그렇게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커튼을 아침에는 열고 저녁에는 닫는 것처럼 쉽게 하늘을 펴신다. 그리고 이땅에 대하여 하늘은 '거할 천막' 같은데, 우리 머리위에 씌운 유리덮개와 같다. 하나님의 눈에는 수많은 이땅 거민들이 우리 눈의 메뚜기같이 작고 또 쉽게 부수어버릴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탐꾼들이 아낙 자손들앞에서 자신들을 메뚜기로 생각했다면(민 13:33), 그크신 하나님앞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이 되겠는가? 메뚜기는 잠깐동안밖에 살지못하며 개미와는 달리 아무렇게나 생활한다. 대부분의 사람들도 이와같이 살아간다. 하나님을 거역하며 생동하는 사람들을 그의 능하신 손으로 반드시 끌어내리실 것이다(23,24절). 그들은 겨우 심기웠고 겨우 뿌리웠고. (흠정역에는 '하나님이 심으시지도 않고 씨를 뿌리시지도 않고'로 되어있다-역주.) 씨를 뿌리거나 묘목을 심는 것은 식물을 번식시키는 두가지 방법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씨를 뿌리시지도 심으시지도 않으신다면, 그리고 '그줄기가 겨우 땅에 뿌리를' 박는다면 그들은 권력을 오랫동안 유지하지 못할 것이다.
2) 그는 '주께 대하여 그들이 눈으로' 본것을 증거로 제시한다(26절). 너희는 눈을 높이들어. "항상 이땅만 살피지 말고, 가끔 위를 보라. 하늘의 찬란한 빛들을 보고 누가 이것들을 창조하셨는지 생각해보라." 우리가 피조물중에서 보는 것이 우리를 창조주에게로 인도할 것이다. 우상숭배자들은 '하늘의 군중'들을 볼때, 그이상의 것을 보지못하고 일월성신에게 경배할 뿐이었다(신 4:19). 창조주께서는 마치 장군이 자기부대 병력을 출동시키듯이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내신다.' '저가 저희를 다 이름대로 부르시는도다'(시 147:4). 그의 권세가 크고...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이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일을 수행하는 것이다.

Ⅵ. 야곱을 꾸짖으심 40:27-31
(1)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 곧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과 불신앙때문에 바벨론에 포로된 자들을 책망한다(27절).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네 자신과 네 적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하느냐.
1) 선지자는 여기에서 그들을 '야곱아', '이스라엘아'라는 이름으로 불렀는데 이것이 그들로하여금 불신앙을 부끄러워하게 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내 백성이라고 공인하신 백성으로서, 즉 하나님의 언약안에 있는 백성으로서 이러한 이름을 지니고 있었다.
2) 선지자는 그들과 변론하는 방법을 택하여 그들을 책망하였다. 우리가 어리석기때문에 생기는 두려움의 대부분은 그원인을 냉철하게 따져볼때 사라지게 된다.
3) 그들은 하나님에 관하여 마치 하나님께서 그들을 내팽개치신 것처럼 말하였다.
4) 그들이 자신들의 상황을 절망적이라고 이야기 한것은 좋지않은 말이었다. 그들은 이렇게 결론내리려고 하였다.
①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기를 원치않으신다.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현재 우리 경우에도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라도 어떻게 할수 없을것 같은 그러한 어려움들이 많이있다.
② 하나님은 우리를 도울 능력이 없으시다.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못한다 하느냐. "내 소송사건은 일단 재판이 끝난 것이며 하나님 자신도 그원통함을 보상하실수 없는 것이라."
(2) 선지자는 그들에게 이모든 두려움과 불신앙을 잠잠하게 할수 있는 충분한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그는 그들이 이미 알고있는 사실을 바탕으로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우쳐주었다(21절). 야곱과 이스라엘은 지식이 있는 백성이며, 이지식은 들음에서 얻은 것이다. 여러가지 다른 지식들가운데 그들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한두번 말씀하신 것을 들은적이 있었다. 그들은 '권능이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말을 여러차례 들었다(시 62:11).
1)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며 부패가 도무지 없기때문에 전능하신 분이다. 그는 시작과 끝을 초월해 계시므로 그에게는 변화가 도무지 없다. 그는 또한 '땅끝까지 창조하신 자'이시다. 따라서 만물의 의로운 통치자이시며, 처음에 세상을 만드실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 그의 교회를 구원하실 능력도 있으시다.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따라서 그의 명철의 끝으로 찾는 자들의 의도를 꺾어버리실수 있다. 누구도 감히 "하나님의 명철은 여기까지이며 더이상은 아니라"라고 말할수 없다. 곤비치 아니하겠고...피곤치 아니하리로다. 그는 모든 창조세계를 주관하시며 모든 피조물을 통치하신다. 그리고 그의 교회가 약해 쓰러졌을때 구원할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
2)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시며 그들이 스스로 도울수 있도록 도우신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힘이 되신다.
① 하나님은 약한 자를 도우실수 있다(29절).
② 하나님은 스스로 하려고하는 자들, 즉 겸손히 하나님께 매달리는 가운데 스스로 돕는 자들을 도우시며, 최선을 다하는 자들이 성공하도록 도우신다(30,31절). '소년'과 '장정'들은 강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을 실제보다 더강하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들도 '피곤하며 곤비해질' 것이며, 문제와 짐에 눌려서 '넘어지며 자빠지게' 될것이다. 즉 자신을 믿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보게될 것이다. 그러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지하며 자신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의탁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깨닫게될 것이다. 이들은 충분한 은혜를 받을 것이다. 새힘을 얻으리니. 하나님께서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실 것이라'(33:2). 그들은 이 은혜를 가장 선한 목적을 위해 쓸것이다. 그들은 위로 곧 하나님을 향하여 위로 치솟아오를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헌신적인 사랑은 은혜를 입은 영혼이 타고오르는 독수리의 날개이다. 그들은 힘차게 앞으로 하늘까지 전진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이 행하고 열심히 그길을 달릴 것이다.

# 핵심
40:1-17
하나님이 이방의 포로생활 가운데 고통받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신다. 그들의 복역기간이 다하여 이제 곧 하나님의 구원과 영광이 그들중에 임할 것이라는 예언이다.
왕의 길을 예비하는 자(40:3,4)
고대 근동에서 왕이 행차할경우에는 왕이 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선발대가 먼저 파송되었다. 고르지않은 곳을 평탄케하고 왕의 여행에 방해가 되는 모든 장애물들과 위험한 요인들을 제거함으로써, 안전하고 확고한 왕의 대로를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광야와 사막지대가 많은 근동 지방에서 왕의 길을 예비하는 일은 필수적으로 행해진 관행이었다. 이와같이 왕의 길을 예비하는 선발대의 임무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했던 세례요한의 임무에도 적용된다(눅 1:17).
인간의 죄로인한 하나님의 침묵(40:27)
유다 백성은 바벨론 포로기간동안 심한 고통으로 하나님께 호소했으나 하나님이 자신들의 고통을 돌아보지 않고 침묵하신다고 원망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은 그들의 죄악때문이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들을 일일이 기억하시며 언약에 따라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므로, 자기 백성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신다. 다만 범죄한 백성은 때가차기까지 자신의 죄에 대한 징벌을 받아야 했다(겔 7:3,4).

# 묵상
복역의 때 ( 40:2 )
바벨론 포로기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즉 유다가 멸망당하여 포로로 끌려간 것은 그들의 군사력이 약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죄를 지었기때문임을 나타내기위해서 이러한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바벨론이 아니라 하나님의 포로였습니다. 유다는 주전 606년부터 바사왕 고레스가 즉위하던 해인 주전 536년까지 포로생활을 하게됩니다. 고레스는 이때 유다의 포로귀환을 명했습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 ( 40:3 )
예언자들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여기서는 선지자가 전할 포로들의 해방소식을 가리키며, 종말론적으로는 메시야 도래를 선포하는 복된소식 즉 복음을 가리킵니다. 또한 신약시대에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천국소식을 전하는 세례요한의 복음선포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게하는 방법 ( 40:4 )
골짜기마다 돋우어지고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않은 곳이 평탄케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되게하는 것입니다. 이는 상하귀천이 없어지고 모두가 동등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례요한 역시 메시야의 도래를 알리면서 이사야의 이말씀을 선포했습니다(눅3:4-6). 이 예언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종과 주인, 남자와 여자사이의 차별이 없어지고 평등한 사회가 되었습니다(갈3:28).
여호와의 신 ( 40:13 )
보편적이고 영적인 존재로서의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또한 이것은 삼위일체중 성령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신을 지도한 자가 없다는 것은, 여호와가 바로 창조의 주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어떤 형상에 비길수 없는 하나님 ( 40:18 )
이는 십계명가운데 제2계명 곧 ‘우상을 섬기지말라’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기때문에 어느것과도 비교할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방 민족의 우상제조법에 따라 하나님의 형상을 만든다는 것은 있을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신을 만들수 없습니다. 오직 신령과 진리안에서 창조주 하나님께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뿐입니다(요4:23).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 ( 40:31 )
이는 자신의 육체적 힘을 믿지않고, 오직 여호와를 고대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즉,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소망을 갖고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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