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udy
Ⅰ. 백성의 죄로인한 슬픔 9:1-11
선지자는 멸망을 예고하고 죄를 지적하라는 임무를 위임받았다. 이 두가지에 대해 그가 말한바는 진정에서 우러나온 것이기에 누구의 마음에나 와닿았을 것이다.
(1) 그는 자기 백성이 처한 비참한 상황을 생각하며 슬픔에 잠긴다.
1) 그는 살육과 그로인해 잃어버린 생명을 애곡한다(1절).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근원이 될꼬. "어찌하면 그들을 위하여 울어야할 새로운 일이 생길때마다 계속하여 눈물의 홍수를 흘려보낼수 있을까?" 히브리어에서는 동일한 한단어가 동시에 눈과 샘(근원)이라는 말을 의미한다. 이는 마치 이슬픔의 땅에서는 우리의 눈이 보기보다는 울기위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이 그러한 죄의 근원임을 아는한, 우리의 눈은 눈물의 근원이 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예레미야의 슬픔은 공적인 이유때문이다. 그는 전쟁의 칼에 의해서 쓰러진 무수한 동포들, '살륙당했다는 소식을 들을때, 우리의 마음에 마땅히 와닿는 것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어떤 민족이든지 그들은 우리와 동일한 인간이며, 우리에게 생명이 귀중하듯이 그들에게 있어서도 그렇게 귀중한 많은 생명들이 잃어버려진바 되었기 때문이다.
2) 그는 나라가 황폐해짐을 애곡한다. "크고 작은 성읍들을 위해서뿐만이 아니라 '산들을 위하여 곡하며 (유다에 가득한 비옥한 구릉지들을 위하여 곡하며) 부르짖으며, 광야 목장을' 위하여 슬퍼하리라." 그곳은 양떼들과 곡식들로 뒤덮여있었으나 이제는 갈대아 군대에 의해서 불에 탔기 때문이다. '가축의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기'때문에 모든 것이 음울하게 보인다. 나라를 크게 황폐화시키는 전쟁을 모든 여린 심령들로하여금 애통해하지 않을수 없게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현재 상연되고 있는 무대를 망치는 그러한 비극이기 때문이다.
(2) 그는 외로움에 빠진다. 모든 이웃들이 견고한 성읍으로 피하고 있는데(참조. 4:5,6) 그는 자기 백성의 죄를 혐오하여 어느 광야로 은둔할 궁리를 하고있다(2절). 어찌하면 내가 광야에서 나그네의 유할 곳을 얻을꼬 그렇게되면 내 백성을 떠나가리니. 그는 아라비아 사막에 길손을 위하여 지어진것 같은 쉴곳을 원하고 있다. 우리는 세상이 악하다고해서 우리의 때가 다하기전에 세상밖으로 나가서는 안된다. 그는 많은 무리들에게 선을 행할수는 없다고해도 몇몇 사람들에게 유익을 줄수는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고 저희 자신들을 파멸시키는 그들을 보는 것은 그로하여금 사는 것을 곤비케 만들었다. 하나님의 전뜰에 서서, 예레미야는 자신이 광야에 있기를 원하고 있다.
1) 예레미야는 그들이 고난에 처해있기때문에 그들을 떠나려는 것이 아니라 저희가 악하기때문에 떠나고 싶어한 것이다. 그들은 부정하였다. 그들은 다 행음하는 자요. 즉 그들은 보편적으로 다 행음하였다(8절). 그들은 또한 거짓되었다. 하나님께 충실하지 못했던 자들은 저희 상호간에도 신실하지 아니했다. 교회로 가보라. 법정으로, 거래소를 가보라. 그들은 '패역한 자의 무리'이므로 악의에 차서는 계획적으로 속일 것이다. '그들은 활을 당김같이 그혀를 놀려 거짓을 말하기'때문이다(3절). 활이 시위에 대해 굽는 것처럼 그들의 혀는 거짓말을 하기위해 자연스럽게 굽는다. 그들이 이땅에서 강성하나 진실하지 아니하고. 저희의 그토록 능한 기술과 굳은 결의를 진실된 일에 사용하려고 하기만한다면 좋은 봉사를 할수 있을 터이었다. 그렇지만 그렇게하려고 하지않을 것이다. 진실에 충실하려는 자들은 용감해야만 하며 그에 맞선다고해서 기세가 꺾여서는 안된다. 우리는 어느날엔가는 진실에 대항했던 우리의 적의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진실을 옹호하지 못했던 우리의 비겁함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만 한다. 그들은 자신의 형제들을 속일 것이다. 형제마다 온전히 속이며(원래의 의미는 밀어낸다는 뜻이다-역주). 야곱은 일찍이 속임수로 형을 밀어내고 대신 들어앉음으로써 그의 이름을 얻었다. 여기에서 사용된 것은 바로 그단어이다. 무리가운데 가보라. 저희가운데서 신실함이나 보편적인 정직함같은 것은 전혀 찾아볼수 없을 것이다. 자기가 감사를 나타내거나 성실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웃마다 다니며 비방함이니라. 그들은 이웃에게 아무리 거짓된 험구를 하더라도 개의치 않았다. 비방이 가는 곳에 그들도 따라갈 것이다. 그들은 비방하며 다닐 것이다. 그들은 그혀로 거짓말하기를 가르치며 악을 행하기에 수고하거늘. 그들은 죄악을 행하기에 피곤하였지만 죄 그자체에 피곤해진 것은 아니다. 그들은 더욱더 악해졌다(3절). 그들이…악에서 악으로 진행하며. 곧 악의 한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나아간다. 아무도 한번에 악의 정상에 이르지는 못한다. 그들은 얼버무려 속여 넘김으로 시작하여 마침내는 노골적인 거짓말에까지 이르렀다.
2)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그들에 대해 결정하신 일이 무엇인지 말한다. 하나님은 저희의 죄를 주목하셨다. 그는 저희가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 선지자에게 말씀해주실수 있는 분이었기에 이렇게 말씀하신다(6절). "네 처소는 궤휼에 빠져있다. 그러므로 경계를 굳게하라." 그들의 죄과는 상세히 설명된다(8절). 저희의 혀는 행악을 도모하고 쓸준비를 하는 굽은 활, 곧 당겨지는 활이었는데(3절) 이제는 시위를 떠난 쏜살이 되었다. 그것은 '죽이는 살'이다. 그들의 혀는 수없이 사람을 죽이는 도구가 되어왔다. 그들은 입으로는 이웃에게 평화를 말하나 동시에 마음으로는 해를 도모하고 있다. 이는 흡사 요압이 아브넬을 죽이려한 때에 그에게 입맞추었던 것과 같다. 선한 뜻이 담겨있지 않으면 아름다운 말들도 야비한 말이 되며, 악한 뜻을 위장하고 가리고자 하였다면 그말은 가증스런 말이 된다. 죄인들은 여호와에 대한 선한 지식을 가르침 받을수도 있었으나 배우려고 하지를 않았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곳에서 무슨 선한 것을 기대할수 있겠는가(호 4:1)? 하나님께서 저희의 입법자이심을 알려고 하지않는 자들은 이제 그가 저희의 재판관이심을 알게될 것이다. 어떤 자들은 연단되어질 것이다(7절). 그들이 이와같이 타락하였으므로 '보라, 내가 그들을 녹이고 연단하리라.' 그리고 고난의 용광로가 그들을 불순물로부터 정제시킬지, 그들이 녹으면 보다 나은 형상으로 새로이 만들어질지 여부를 알아보리라. 단련하는 자의 일이 헛되게 되기전까지는 그들은 내어버린 은으로 칭하여지지 않을 것이다(참조. 렘 6:29,30). 그는 그들을 회개로 돌이킬수 있음직한 모든 가능한 수단을 먼저 시험해보시기 전에는, 버려 멸하실 마음이 없는 분처럼 말씀하신다. 남은 자들은 멸하여질 것이다(9절). 내가 이일들을 인하여…보수하지 않겠느냐. 사기와 허위는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며 장차 셈하실 죄악이다. 선고가 이미 내려졌으며 명령이 떨어졌다(11절). 내가 예루살렘으로 무더기를 만들며. 예루살렘은 '사랑의 굴혈'이 되는 것외에는 아무것도 적합치 않게될 것이다. 그리고 '유다 성읍들은 황폐케'될 것이다.
Ⅱ. 유다를 위하여 애곡함 9:12-22
본문에서 선지자는 임박한 유다와 예루살렘의 파멸에 대해 말하면서 다음 두가지를 의도하고 있다.
첫째로, 백성들에게 죄로 말미암아 스스로 자초한 파멸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공의를 확신시키는 것이다.
둘째로, 장차 닥쳐올 파멸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려줌으로써 저희의 마음을 움직여 회개와 개혁에 이를수 있도록 각성시키는 것이다.
(1) 선지자는 하나님의 처사가 가혹하게 보이나 실상은 참으로 공정하다는 사실을 백성들에게 설명하기위해 지각있는 사람을 부르고 있다(12절). "여호와의 '입이 말씀을 받아서 광포할' 지혜자, 혹은 선지자가 누구인가, 어디에 있는가? 너희는 지혜를 자랑하며 너희가운데 선지자들이 있음을 자랑한다. 그들중 아무라도 이백성과 논쟁하시는 하나님의 정당성을 이내 깨달을 것이다." 이지혜자들이 '이땅이 어찌하여 멸망하는가'라고 물어보는가?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 확실한 대답을 주시고 있다.
1) 그들에 대한 기소장이 제출되었으며 이에 의하여 그들은 유죄임이 밝혀졌다(13,14절).
① 그들은 의로우신 주권자에 대한 충성심을 버리고 반역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땅을 버리셨다. 이는 그들이 내가 그들의 앞에 세운 나의 법을 버리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며 그대로 행치 아니하고.
② 그들은 강탈자의 일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단지 저희의 군주에 대한 복종심을 버리는 것에 그치지않고 그에게 대항하여 무기를 들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여 저희 자신의 뜻, 즉 정욕과 세속적인 마음의 뜻을 취하였다. 그들은 '그마음의 강퍅함을 따랐다.' 하나님과 양심이 그반대의 말을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이 하기 기쁜대로 행하려 하였다. 그들은 '바알들을 좇았다.' 본문의 이단어는 복수형이다. 그들은 여러 바알들을 섬겼다. 그중에는 바알브올이라든가 바알브릿이 있었고 이곳, 저곳의 바알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저희의 열조가 섬기라고 가르쳐준 주인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그열조의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몇번이고 되풀이하여 금하셨었다. 이것이 그땅이 멸망하게된 이유였다.
2) 이 기소된 반역자들에 대한 선고는 이제 집행되어져야 한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말하노라(15,16절). 그런데 누가 그것을 번복시킬수 있겠는가? 저희 땅에 있어 저희를 즐겁게 해주던 것들이 독이 되며 저희를 쓰라리게 만들 것이다. 내가 그들 곧 이백성에게 쑥(혹은 늑대 독이라는 독초나 해롭고 유독한 어떤 풀)을 먹이며 독한 물(혹은 독한 인진의 즙이나 어떤 독초즙)을 마시고. 그들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은 그들에게 고통이 될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저희의 복을 저주하실 것이다(말 2:2). 그들은 멸망당해 자기들의 땅밖으로 분산될 것이다(16절). 그들과 그들의 조상이 알지못하던 열국중에 그들을 헤치고. 그들은 이제 길을 잃고 헤매며 이방 열국중에서 저희의 미덕을 상실하게될 것이다. 그들은 사회와 산업의 유대관계를 결속시키는 진리를 짓밟았었다. 그러므로 가루로 부스러뜨려져서 이방 열국중에 흩어짐을 당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제 우리는 어찌하여 그땅이 멸망하게 되었는지 알수 있다. 즉 이모든 파멸은 저희의 행위에 대한 응분의 보상이다.
(2) 선지자는 저희에게 이미 임한, 혹은 임하고 있는 이슬픈 재난들을 애곡하도록 '곡하는 부녀'들을 부르고 있다. 이는 이 민족으로하여금 재난을 대비하게끔 하기위한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곡하는 부녀를 불러오며(17절). 여기에서 곡장이들에 대해 언급되고 있다. 진정으로 애곡하는 사람들의 부족을 메꾸기위해 장례식에 고용되곤 하였던 '지혜로운 부녀들(본래는 재주있는 부녀들이라는 뜻임)을 불러오라.' 그들로…우리를 위하여 애곡하게 하여(18절). 혹은 이말씀이 백성들의 우둔함을 암시하는 말이라고 볼수 있다. 그들은 심판을 유념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애곡하는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자기 백성들이 애통해하도록 촉구하셨으나,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전해진 그의 말씀은 저희의 신앙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저들을 웃으면서 저희의 파멸을 향해 달려가도록 버려두기보다는 차라리 곡장이 여자들을 불러다가 각성시키라는 말씀이다. 여기에 진정으로 애곡하는 사람들도 언급되고 있다. 이장면은 참으로 비극적이다(19절). 시온에서 호곡하는 소리가 들려. 혹자는 이것을 곡장이 여자들의 애곡소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그에 대한 반향, 즉 곡장이 여자들의 애곡소리에 마음이 움직인 사람들의 반향이라고 할수 있다. 백성들이 하나님과 가까이 있던동안에는 시온에서 기쁨과 찬송소리가 들려오곤 하였었다. 그러나 죄는 그음조를 바꾸어 이제 그것은 '호곡하는 소리'가 되었다. 우리가 크게 수욕을 당하였구나. "이는 우리가 원수들에 의해 강제로 그땅을 떠났기 때문이로다." 그들은 자신의 정욕에 빠져 여호와를 버렸기때문에 수욕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땅에서 쫓겨났음으로 인하여 수욕을 당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저희를 쫓아내셨음으로 말마암아서가 아니라 '그들이 우리 주택을 헐었음'으로 수욕을 당하였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이 겸비치못한 심령들은 저희가 당한 재난 그자체를 애곡할뿐이며 그재난의 원인인 저희의 죄를 애곡하지는 않고있다. 자기 땅에서 쫓겨난 자들(그땅은 선주민 가나안인들을 토해낸 것처럼 그들을 토해냈는데 이는 그들도 그선주민의 전철을 밟았기때문에 당연한 귀결인 것이다;레1 8;28)은 저희가 성앞으로 몰려들어온 것을 한탄하고 있지만 잠시후면 그들은 본래 성안에 있던 자들과 함께 그성에서도 쫓겨나게될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20절). 그런데 '부녀들'로하여금 듣게하라. 왜냐하면 남자들은 그말씀을 주의하지 않을 것이며 인내심있게 귀기울이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두려워 떠는 '부녀들'에게 설교하기를 좋아할 것이다. 부녀들로하여금 '저희 딸들에게 애곡을 가르치게'하라.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각기 이웃에게 애가를 가르치게'하라. 이말씀은 환난이 멀리까지 파급되며 이웃에서 이웃으로 퍼질 것을 암시하고 있다. 여기에서 경고되는 심판은 무섭게 보여지고 있다. 즉 많은 무리들이 살육당할 것이다(21절). 죽음이 기세를 올리게 되며 그손아귀에서 벗어날수 있는 도피처는 전혀 없을 것이다. 죽음은 서민들의 주택을 공략할뿐만 아니라 '우리 궁실에도 들어올' 것이다. 그리고 살육당한 자들은 매장되지도 못한채 버려질 것이다(22절).
Ⅲ. 여호와만을 의지해야 함 9:23-26
선지자는 이백성이 하나님과 그의 심판에 대한 경외심에 사로잡히게 하려고 애썼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은 저희의 완악함을 변명하고자 이런저런 구실과 핑계를 의지해왔다. 그러므로 그는 여기에서 저희를 이와같은 거짓된 도피처에서 몰아내고자 한다.
(1) 심판이 불가피하다는 말씀을 들었을때 그들은 저희 자신의 정책과 힘, 그리고 아울러서 자신들의 부와 재물에 의한 방어를 주장하였다. 즉 그들은 위와같은 요인들로써 저희의 성이 공략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대한 답변으로 선지자는 저희가 하나님과 언약관계를 유지하고 있지않는한 이와같은 것들을 의지하는 일은 어리석다는 점을 알려주고 있다(23,24절). 지혜로운 자는 그지혜를 자랑치말라. 곧 지혜의 도움으로 어떤 돌파구를 찾을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만일 사람이 책략으로 실패할지라도 확실히 힘과 용맹으로 성공을 거둘수 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않다. 용사는 그용맹을 자랑치말라. 왜냐하면 전쟁은 항상 강한 자의 편은 아니기 때문이다. 풋내기 다윗이 거인 골리앗에게 너무도 힘든 상대였음이 증명되었었다. 모든 인간적인 힘은 하나님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며 그를 대항하는 것은 힘이 없느니만도 못하다. 그렇지만 돈은 만사의 해결책이므로 부자의 재물은 견고한 성이 될수도 있지 않을까? 결코 아니다. 부자는 그부함을 자랑치말라. 다시말하여 전쟁에 관한 책략을 짜낼 지혜로운 자와 전장에 나가 싸울 용사, 그리고 전비를 담당할 부자가 저희에게 있다하더라도 저희가 갈대아 군을 물리칠수 있으리라고 생각해서는 아니되었다. 환난을 당할때 우리의 유일한 위로는 우리가 임무를 다하였다는 점이다. 하나님을 '알기를 싫어한'(6절) 자들은 헛되이 저희의 지혜와 재물을 자랑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자들, 곧 명철하여 그가 여호와이심을 바르게 깨달은 자들은 '이것으로 자랑하게' 될것이며 그것이 환난날에 저희의 기쁨이 될것이다. 환난중에 우리의 유일한 확신은 은혜로인하여 우리가 임무를 수행하였으므로, 온전히 풍족하신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리라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디에 있든지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있다는 사실을 자랑할수 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에게 공의로우시고 자신의 모든 자녀들에게 자비로우셔서 그들을 보호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예비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그들이 충실하게 따르는 하나님을 그들은 기꺼이 신뢰할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선지자는 이백성들중 대부분이 이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2) 자기들의 죄가 얼마나 하나님을 진노케하였는지에 대해 들었을때도 그들은 헛되이 할례의 언약을 주장하였다. 그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하나님의 백성이었으며 그의 자녀라는 징표를 저희의 몸에 지니고 있었다. 이에 대해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할례자이든 무할례자이든 구분하지 않으시고 모든 악한 백성들을 징벌하시리라고 대답한다(25,26절). 그들은 할례받지 않은 민족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살았다. 그러므로 그들이 가졌던 특별한 혜택을 몰수당하는 것은 마땅하다. 이세상의 심판자 되시는 분은 공평하시며, 그의 재판정에서 어떤 외적인 이점으로인하여 보다 나은 대우를 받을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세례받았으나 회개치않은 죄인에 대한 정죄와 세례받지 않고서 회개치않은 죄인에 대한 정죄가 다르지 않을 것은 확실하다. '세상끝에 거하는 자들과(한글개역에는 없음) 광야에 거하는' 자들은 49:28-32절와 비교해볼때 게달 사람과 하솔 왕국인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추측된다. 혹자는 그들이 세상의 한쪽 구석에 살았기때문에 그렇게 불리워졌다고 생각하며, 또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그머리털을 모지게 깍았기'때문에 세상끝에 사는 자들로 일컬어졌다고 추측한다. 어쨌거나 그들은 육신에 할례받지 못한 자들이었으며, 유대인들은 그들과 같은 부류로 취급당하였다.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느니라. 그들은 징표는 지니고 있었으나 그징표가 의미하는 것은 지니지 못하였다(참조. 렘 4:4).
# 핵심
9:1-26
거듭된 회개촉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반역을 일삼는 백성들의 비참한 종말을 보여준다.
곡하는 자(9:17)
일정한 삯을 받고 초상집에서 소리내어 울어주는 일을 하는 직업적인 조문객을 가리킨다(마 9:23). 이들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슬픔을 표현했으며, 개개인의 감정과 슬픔을 더하게 하기위해 고인의 가족들의 이름을 불렀다고 한다. 이런 관습은 지금도 근동에서 계속되고 있다.
# 묵상
시련과 연단 ( 9:1-9 )
백성의 죄악을 한탄하는 선지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수 없는 이스라엘을 위해서 심히 슬퍼합니다. 그러면서도 이제는 그들의 죄상이 돌이킬수 없는 상태임을 선포하게 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철처히 연단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을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시련과 연단은 구원받은 백성을 강하고 순결하게 하여 하나님나라의 흔들리지 않는 시민으로 성장시킬 것입니다.
시랑의 굴혈이 될 예루살렘 ( 9:11 )
본문의 시랑은 쟈칼을 뜻하는것 같은데, 이것은 늑대나 이리 등과 같은 짐승들입니다. 예루살렘이 무더기가 되며 시랑의 굴혈이 되게하겠다는 본문은, 예루살렘이 더이상 사람이 살수 없는 폐허가 됨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는 장차 예루살렘에 임할 심판에 대한 예언으로, 예루살렘이 심한 전쟁을 겪게되어 아주 조그마한 희망도 없을 것임을 보여줍니다.
거두지못한 뭇같이 될 시체들 ( 9:22 )
뭇은 추수하면서 여기저기 흘려놓은 곡식이삭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시체가 분토같이 들에 떨어져 마치 추수때 추수꾼뒤에 떨어지고 거두지못한 뭇같이 되리라는 본문의 말씀은 전쟁으로인해 죽임을 당한 자가 살아남은 자보다 많아서 거두어줄 사람도 없이 곳곳에 시체가 널려있는 참혹한 상황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시체가 무덤에 장사되지 않는 것을 가장 큰수치요, 저주로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죽음보다 더큰 부끄러움이었던 것입니다.
할례받은 자와 할례받지 못한 자 ( 9:25, 26 )
여기서 할례받지 못한 자들이란 이스라엘을 제외한 고대 근동의 여러나라들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선민으로서 할례를 행했는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할례받지 못한 이방과 동일하게 간주하시고 함께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육신의 할례를 받지못한 것이나 마음의 할례를 받지못한 것이나, 하나님앞에서는 모두 할례받지 못한 자로 간주되어 멸망당하게 됩니다(롬2:25; 고전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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