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부자들에 대한 경고 (5:1-11절)
야고보 사도는 여기서 먼저 죄인들에게 경책을 하고 다음에 성도들에게 당부를 한다.
1. 죄인에게 한 말을 살펴 보자. 사도 야고보는 여기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에 동의하고 있다.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눅 6:24).' 유대인 중 가난한 사람들은 복음을 받았고 그들 중 많은 수가 믿고 나왔으나 부자들의 대다수는 기독교를 배척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였다.
1) 사도 야고보는 이런 부자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하였다(1-3절). 그들에게 비참한 재난이 임할 것이다. 그런데 그 재난은 그들이 행복을 얻으려 했던 바로 그 일로부터 발생할 것이다. 들으라 부한 자들아(1절). 그들은 먹고 마시고 혼인하자고 말하나 하나님께서는 울고 통곡하라고 하신다. 짐승처럼 사는 자는 짐승처럼 부르짖게 될 것이다. 부패와 쇠퇴와 녹슬고 파멸함이 너희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 위에 임할 것이다(2절). 현재 너희가 특별히 사랑하는 것들이 그 날에는 아무런 가치도 소용도 없게 될 것이다(3절). 그들은 말년을 대비하여 보화를 쌓으려 하지만 슬프게도 그들은 오직 진노의 재물로 판명될 재물을 쌓고있는 것이다.
2) 이러한 비참한 재난을 가져올 죄들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다. 이 사람들이 범한 죄는 탐욕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이웃에게 선행을 하는데 필요한 세상의 재물을 주신다. 그러나 우리가 이같은 뜻을 저버리고 재물을 죄악된 방법으로 쌓는데만 혈안이 된다면 이것은 아주 큰 범죄 행위이며 이 쌓아둔 재물에 녹과 좀이 그 죄를 증거할 것이다. 또 다른 죄는 억압의 죄이다(4절). 부를 소유한 자는 권력도 소유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자기 수하에 있는 사람들을 탄압하는데 그 권력을 휘두르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그들은 자기의 권력을 이용하여 될 수 있는 한 나쁜 고용 계약을 가난한 자들과 체결하고 이 계약마저도 정당하게 이행하지 않으려 한다. 또다른 부자들의 죄는 육욕과 관능에 빠지는 죄이다(5절).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즐기는 것을 금하지는 않으셨다. 그러나 오직 그 즐거움을 취하는 것 외는 다른 일이 없는 것처럼 사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시키는 큰 죄이다. 사치스러움은 사람들을 방종하게 한다. 방종과 사치는 주체할 수 없게 많이 소유한 결과에서 나오는 것이다.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였도다(5절). 즉 매일 매일을 마치 제삿날이나 축제일처럼 살았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자기가 소유한 것으로 즐긴다는 것이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하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다. 인간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것을 자비롭고 경건한 행동을 하는데 풍성하게 사용하지 않고, 자기의 배로 하나님을 삼고 모든 것을 이 배를 채우는데만 사용하는 것이 왜 죄가 되지 않는다는 말인가? 교만과 게으름과 풍부한 양식들은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마음을 살지게 하는 것과 꼭 같은 것을 의미한다. 부자의 또다른 죄는 핍박하는 것이다(6절). 의인에 대한 핍박의 죄가 그들에게 가득하다. 의인들이 고통을 당하며 핍박자들의 불의의 처벌에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굴복할 때 하나님께서는 고통을 당하는 자에게는 영광을, 핍박하는 자에게는 치욕을 내리도록 정하실 것이다.
2. 다음에 사도 야고보는 성도들에게 말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의인을 핍박하는 사악한 부자들에 대한 언급으로부터 고난받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위로의 교훈을 주고 있다.
1) 너희의 의무에 충실하라. 첫째, 비록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즉시 나타나지 않으셔도 '길이 참으라'(7절). 그리고 조금만 더 기다리라. 우리가 우리의 사명을 다 완수했을 때는 상을 받기까지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하다. 이런 그리스도인의 인내는 어떤 철학자들이 가르치는 도덕적인 인내와 같이 단순히 필요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지혜와 뜻 가운데서 겸손히 순종하는 것이다.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7절). 이 말씀은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배워야 할 과제이므로 8절에서 다시 반복되고 있다. 둘째, 마음을 굳게 하라(8절). "너희 믿음을 견고히 하고 너희 선행을 꾸준히 실행하고 어떤 고난과 시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따르기로 한 너희 결심을 바꾸지 말도록 해야 한다." 셋째, 서로 원망하지 말라(9절). "너희들 자신이 불안해 하거나 서로 불평함으로 서로간에 거북한 사이가 되지 않도록 하라." 사방이 공동의 적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고난의 환경에 처해있는 사람들은 서로간에 원망하는 일이 없도록 특별히 주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에게도 원수들과 마찬가지로 심판이 임하게 될 것이다.
2) 길이 참아야 하는 그리스도인을 위한 격려가 무엇인지 살펴 보자. "농부의 예를 보자 너희가 땅에 옥수수 씨를 뿌렸으면 너희는 몇 달 동안이나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고 또 너희 수고의 열매를 거둘 때까지 계속 비가 내리기를 바랄 것이다. 옥수수 열매를 생각해 보라. 너희가 어찌 그 좋은 영광의 면류관을 기다리지 못하겠느냐? 만일 너희가 농부의 기다림보다 조금만 더 기다리라는 명령을 받았다면 그것은 참으로 더 위대하고 무한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한 너희가 기다려야 하는 그 시간이 매우 임박해 있음을 생각해 보라(8, 9절). 조급해 하지 말고 서로 싸우지 말라. 위대한 심판자께서 가까이에 계신다. 그분은 바로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계실만큼 가까이 와 계신다." 또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9절). 조급함과 불만은 우리를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하고 우리가 서로 불평하고 원망하면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재난을 당하게 될 것이다. 또 우리에게 선지자의 본을 받아서 인내할 용기를 얻으리라고 격려하고 있다(10절).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 가장 혹독한 취급을 받았다는 것을 생각하고 우리도 고난을 기꺼이 용납해야 한다. 또한 가장 큰 고난을 당한 사람은 인내의 가장 좋은 본이 되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11절). 그 고난받은 사람의 본보기로 욥이 제시되고 있다. 모진 고통 중에서도 욥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는데 그 결과로 그는 무엇을 얻었는가?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이심을 분명히 입증하는 일들을 그에게 성취해 보이셨다. 끝날에 면류관을 받을 것을 믿었던 사람들과 같이 하나님을 섬기며 우리의 시련을 참고 견디자.
Ⅱ. 믿음의 기도 (5:12-20절)
1. 맹세하는 죄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다(12절). 여기의 '무엇보다도'를 어떤 학자는 모든 것에 앞서라고 번역했다. 즉 일상의 대화에서 그들에 모든 것을 말하기 전에 맹세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또한 성경은 불필요한 모든 습관적인 맹세를 매우 중한 죄로 취급하고 있다. 당시 유대인 사이에는 불경한 맹세가 성행하였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자들 중 신실치 못한 자들이 또한 이런 죄를 범했던 것이다.
1)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12 절).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든 일에 이 말씀을 거의 염두에 두지 않고 있으며 신성모독하는 맹세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기고 있는가! 그런데 이런 행위야말로 가장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명예를 훼손시키는 일이며 하나님의 이름과 권고를 멸시하기 쉬운 죄이다. 그러나 한 번 버릇이 들면 떼어버리기가 가장 힘들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먼저 항상 경계를 해야 하는 죄이다.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그러나 그 맹세에 합당한 경외를 표하고 또 그것을 확실히 해 두어야 할 필요가 있는 모든 맹세까지도 다 금하라는 것은 아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만 맹세하지 않으면 죄가 되지 않으며 별 탈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피조물이 마치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기에 이르렀다. 반면에 하나님의 이름을 들어서 맹세하는 것을 보통으로 여겼던 신성모독자들은 결국 하나님과 피조물을 동일한 위치에 놓고야만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2) 오직 너희의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 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죄 정함을 면하라(12절). 의사 표시를 확실하게 하고 또 진실되게 하여 우리가 무슨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의심을 받을만한 경우를 초래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사람을 맹세케 하는 동기는 거짓말에 대한 의심이다.
2.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에 순응하며 살도록 가르치고 있다(13절). 이 세상에서 우리가 처해야 하는 여건은 다양하다. 우리는 우리 앞에 닥친 환경에 순응하도록 지혜를 발휘해야 하며 번영할 때든지 고난을 당할 때든지 항상 그리스도인답게 행해야 한다. 고난을 당할 때는 기도를 해야 할 것이며 번영시에는 찬양으로 충만케 되어야만 한다.
1) 환난의 때에는 기도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일이다. 고난의 때는 기도하는 때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므로 우리는 좀더 빨리 하나님을 구하고 나서게 될 것이며 평소에 하나님께 대하여 무관심하던 사람들도 하나님께 대하여 경각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 고난을 당할 때면 저절로 불평이 나오게 되는데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불평만 해야 되겠는가? 고난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믿음과 소망을 단련하는 일이 필요하다. 또 기도는 이러한 은혜를 얻고 키워 나갈 수 있는 약속된 방법이다.
2) 즐겁고 번영할 때 찬양을 드리는 것은 매우 합당한 일이다. 확실히 이 때 찬송을 부르는 것은 복음적인 의식이며, 이 기쁨은 하나님께 바쳐지는 거룩한 기쁨인 것이다. 이 거룩한 기쁨은 공적인 집회에서 뿐만 아니라 가족과 함께라든지 혹은 혼자 고요히 있을때도 맛볼 수 있다.
3. 병든 자들에게 대한 특별한 지시가 있다(14, 15절). 사역자를 청하고 그들의 도움과 기도를 바라는 것은 병든 자들에게 주어진 의무이다. 또 병든 자들의 청함을 받았을 때 그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는 것은 사역자의 의무이다.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14절). 이런 기적의 은사가 중단된 다음에는 이 의식도 중단되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이 의식은 어느 시대에나 행해져야 하고 기름을 바르는 자에게나 기름을 바름을 입은 자에게 특별한 믿음이 있을 경우에는 특별한 축복이 이들에게 내려서 병이 치료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병을 낫게 하는 것은 기름을 바르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함에 있다는 사실이다(15절). 병든 자를 위한 기도는 살아있는 믿음에서 시작해야 하며 또 계속해서 이 믿음을 가지고 해야 할 것이다. 또 기도를 하는 사람과 기도를 받는 사람 모두가 확실한 믿음을 견지해야 한다.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15절). 그러므로 우리나 혹 다른 사람이 병이 들어 기도할 때 하나님께 간구해야 할 가장 큰 문제는 죄를 사하여 줄 것을 구하는 일이다. 죄는 병의 근원이며 동시에 찌르는 가시이기도 하다. 만일 죄를 사함 받으면 그 긍휼 속에서 고통이 사라지거나 혹 그 고통이 지속된다 해도 하나님의 은총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4. 죄를 서로 고하라(16절). 여기서 말하는 고백은 교인 상호간에 하는 것을 말한다. 교인 상호간에 해를 입혔을 때 서로 자기 책임을 고백하고 회개하도록 서로 권고해 주는 일이 필요하다. 우리가 고백하는 일이 서로 다툰 친구와 화해하는 일에, 또 어떤 이에게 잘못한 일에 대한 배상으로 그리고 우리의 양심에 가책받은 일로부터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를 취하기 위하여 필요하다면 우리는 언제든지 우리의 잘못을 고백할 줄 알아야 한다. 또한 때로 기독교인들이 서로 자신의 연약함과 결점을 고백하는 일은 유사하다. 또한 이렇게 자신의 약점과 잘못을 서로 고백하는 자들은 서로를 위하여 기도를 해 주어야만 한다.
5. 기도의 위해한 효력과 유익이 선포되고 입증되었다(17, 18절). 기도하는 자는 의로운 사람이어야 한다. 또 기도 자체도 열렬하고 내용이 충실하며 정성이 깃들여진 기도이어야 한다. 이러한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 즉 우리 자신에게 유익하며 우리 이웃에게도 유익을 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으신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17절)이었다. 그는 하나님께 대한 열심히 불타고 있었고 또 매우 위대한 사람이었지만 그에게도 결점은 있었다.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의 의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한다. 엘리야는 솔직히 기도했다. 원문에는 '간절히 기도했다'고 되어 있다. 우리도 기도할 때 단순히 무어라고 말로만 외어대는 것은 기도로서 불충분하며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엘리야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셔서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않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셨다(17절). 이같이 기도의 능력을 기록한 것은 평범한 그리스도인들라도 열심히 그리고 항상 기도해야 함을 권고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많은 기적으로 응답하시지는 않을지 몰라도 풍성한 은혜로써 응답하시리라는 것은 틀림없다.
6. 이 서신은 우리에게 믿지않는 사람들은 회심과 구원을 위하여 더욱 박차를 가하라는 권고함으로 끝을 맺고 있다(19, 20절). 만일 잘못을 저지른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여 그에게 선을 행하도록 하면 그를 돌이킨 사람은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해낸 도구인 것이다. 만일 누가 잘못을 범하면 그가 아무리 지위가 높은 세도가라 할지라도 그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반면에 아무리 보잘 것 없고 가난한 사람일지라도 그들을 좀더 지혜롭고 훌륭하게 행동하도록 격려하는 일을 주저해서는 안된다. 또 사람들이 실제 생활에서든 사고 방식에서든 진리를 떠나면 그들이 이 복음의 법 가운데로 다시 돌아오도록 우리는 우리의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판단의 착오와 생활의 실수는 항상 병행한다. 만일 우리가 어떤 사람을 돌아서게 하는데 있어서 도구가 된다면, 비록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일지라도 우리가 그들을 회심시켰다고 말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를 회심시키는데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생각될 때도 우리는 그의 회심과 변화를 위하여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영이 그에게 임하도록 기도해야만 할 것이다. 19절에 '진리를 떠났다'고 지적된 사람은 20절에서는 '미혹한 길'에 처한 사람이라고 묘사되어 있으며, 이들에 대하여 우리가 그들의 길을 수정하고 교정해 주지 않고, 단순히 그들의 생각만 좀 바꾸어 놓고 그들을 회심시켰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진리를 떠나있는 자신의 길에서 돌아서는 것 이것이 바로 회심인 것이다. 죄인을 미혹의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는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게 하는 것이다. 마음과 생명의 구원으로 인하여 허다한 죄가 덮어질 것이다. 즉 회심으로 인하여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죄라 할지라도 그 모든 죄가 덮어지고 용서를 받게 되리라는 것이다. 사람들로 자기의 죄를 덮힘받을 방도를 궁리케 하자. 그러나 스스로 죄를 짓지 않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고 최종적인 방법은 없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의 의미를 회심이 허다한 죄를 덮는 것을 말한다고 이해하고 있다. 사실 회심한 사람들이 더이상 죄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함을 입었다는 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는 진리이며 또한 이들의 영향을 받아 회심하게 될 사람들에게도 똑같은 은혜가 내려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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