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감사할 수 있는 자리 (공재영 목사님)
[갈라디아서 6장 6절~10절]
6절 -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7절 -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절 -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9절 -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10절 -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유대인들의 지혜서「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를 소개해 봅니다.「임금님이 어떤 사람을 호출을 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나하고 두려워서 혼자 갈 수가 없었습니다. 고민 끝에 친구에게 찾아갔습니다. 가장 친한 친구에게 찾아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는 같이 가 줄 수 있느냐고 했더니 이유도 말하지 않고 한 마디로 거절해 버렸습니다. 두 번째 친구에게 갔더니 궁궐 대문 앞까지만 따라가고 그 이상은 못 간다고 했습니다. 세 번째 친구에게 갔더니 그 친구는 말하기를 “자네는 나쁜 짓을 안 했으니 내가 가서 임금님에게 너를 변호하겠다고 따라 나섰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해석하기를 첫 번째 친구는 재산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나와 함께 가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친구는 가족이나 친척이라는 것입니다. 이 친구는 나의 무덤까지는 갈 수 있어도 그 이상은 못간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친구는 나 자신이 살아오면서 삶 속에 뿌려놓은 선한 흔적이라는 것입니다. 이 친구는 천국까지 함께 간다는 것입니다.」현대 과학의 위력은 인간 세계를 최첨단의 자리에 세워 놓았고 인간의 삶 속에 엄청난 속도의 변화를 가져오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 과학의 위력도 결코 바꿔놓지 못하는 것은 가장 평범한 진리인 심는 대로 거둔다는 법칙입니다. 이것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체에게 적용되어지는 기본적인 원리인 것입니다. 심는 대로 거둔다고 하는 자리에서 우리가 반드시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은 나 자신에게도 가진 것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가진 것이 있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 고백해 봅시다. 이것이 감사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본문은 그 자리를 열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1. 심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 감사할 수가 있습니다(7절).
인간의 자리에는 살아온 자리에 후회할 것이 많은 것입니다. 안타까운 자리는 후회하는 그 자리에서 좋은 해답을 얻지 못하므로 또 다시 반복하면서 자신의 삶 속에 다른 이유를 들어 원망하는 자리에 자신을 세운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땅은 결코 사람을 속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심든지 그것과 똑같은 것을 거두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라지를 뿌려놓고 알곡을 기대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자리는 없습니다. 본문의 말씀이 우리를 향하여 지적하기를「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는 법칙을 하나님이 만드셨기에 어떤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을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복되게 열어가는 자리는 자신이 심은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지혜를 가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후회하는 자리에서 좋은 해답을 얻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 심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는 통찰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무지함이요 연약함의 실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인간의 자리를 행복하게 열어가게 하시려고 하나님 아버지께 구하여 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어 우리와 영원히 함께 있게 하시겠다고 했습니다(요14:16). 그 보혜사가 곧 성령님이신 것입니다. 그 성령님이 우리를 위해 하시는 일을 성경은 증거하기를「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고 했습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는 연약함을 성령님이 도와주신다는 것은 우리가 삶 속에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 무엇을 심어야 하는 것을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처럼 좋은 일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우리가 행복해야 하는 자리를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 성령님을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께 우리를 위해 구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그 예수님을 내 마음에 모셔들여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우리 속에서 나의 연약함을 아시고 내가 구하지 않는 것까지도 열려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으로 우리의 삶이 세워지게 되면 하나님을 업신여기지 않고 기쁘게 좋은 것을 심게 되고 감사해야 하는 자리가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감사할 수 있는 성도로 살아갑시다.
2. 인내하며 기다렸다면 감사할 수가 있습니다(9절).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간의 비밀을 열어주지 아니하시는 것입니까? 두 가지 큰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하나는 인간의 자리를 지극히 공정하게 세워주시기 위함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신에게 주어지는 자리가 복된 것임을 알게 하는 것인데 그것은 시간을 사람이 조종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 자리를 열어주시는 것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126:5,6)」라고 한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라는 자리에서 우리를 세우시는 것은 어떤 사람도 쉬운 세상을 살아가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자리를 예수님이 확인하신 자리가「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라(마16:24)」고 했습니다. 이것을 세상 사람들이 해석하기를 십자가 없는 면류관은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지극히 공평하고 공정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반론을 제기하는 자들은 십자가 없이 쉽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지 못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한 대답을 주시는 자리가「기쁨으로 거두리라」는 약속의 자리입니다. 세상을 쉽게 살아가는 자리는 자신을 감격하게 하는 기쁨의 자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자리는 행복한 자리가 있어야 좋게 세워지는 법입니다. 그 행복한 자리는 성취감의 기쁨이 아니고 내가 나를 좋게 세우는 기쁨이 있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라는 것은 앞의 행복한 자리와 분명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가지게 된 행복을 지켜주는 자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자신이 뿌렸던 씨의 열매의 곡식단을 가지고 다시 행복의 자리를 새롭게 세워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자리에서 낙심하게 되어 세상을 닫아버리고 싶은 것은 삶이 힘들어서도 그렇게 되지만 자신에게 있었던 행복이 사라지고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행복을 기다리며 인내했는데 결과가 없다고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삶은 하나님이 없는 자리에서의 결론이기에 본문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선한 것은 하나님을 향하는 삶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향하는 삶을 살면서 인내했다면 낙심하려고 하지 말고 시간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거두게 되는 때를 만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감사가 있습니다. 인간은 낙심할 수밖에 없는 약함의 자리가 있습니다. 이 자리를 하나님이 성령님으로 붙들어 주시기 때문에 인내의 자리가 가능하게 하여 감사하는 자로 세워주시는 것입니다.
3. 믿음을 따라 살았으면 감사할 수가 있습니다(10절).
성경에서 말씀하기를「먼저 된 자로서 나중되고 나중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마19:30)」라고 했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자리를 예수님께서 한 마디로 요약한 말씀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좋고 처음되는 자리를 싫어하고 나중된 자리 곧 남에게 끌려 다니면서 눈치만 보는 자리를 좋아하겠습니까. 인간의 자리에 세워지는 모습은 감사다운 감사를 할 수 없고 자신의 삶 속에 누리고 사는 복을 가지고 행복하다고 말 한번 하기도 힘든 자리입니다. 이것을 보여준 사람이 성경 속에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부자입니다. 부자인데도 그 부자의 자리가 불만과 부족함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 자리를 가르쳐 준 것이 더 큰 창고를 짓고 그 곳에 쌓을 것이 없도록 가득 채워진 자리에 세워졌을 때에 비로소 평안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남의 눈치만을 보는 나중된 자리입니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을 정도로 살아가려면 어떤 자리에 세워져야만 가능한 것입니까? 인간 삶의 현장에는 그런 자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복되게 세워져서 자신의 삶 속에 행복을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서 이 정도만 되어도 만족스러워하는 자리가 열려진다면 그 사람은 온 세상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감사할 수 있는 자리를 열어가는 복된 사람인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는 그 자리에 세워진 사람의 자리를 열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기회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자신의 삶을 열어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도가 받고 사는 은혜의 자리의 중심은 나 혼자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진심으로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삶을 복되게 세우는 것은 은혜의 자리를 점점 크게 열어가는 지혜가 열려지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는 모든 사람에게서 받은 은혜를 보게 되면서 그 중에서도 하나님과 관계된 믿음의 자리를 더 크게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지혜의 자리가 가정을 일으키게 되고 교회를 자랑스럽게 세우며 나라를 부강하게 열어가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국 교회가 누리는 복인 것입니다. 즉 성도가 믿음을 따라 살았다면 감사할 수 있는 복된 사람으로 세워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복잡한 세상적 구조 속에서 살아남으려고 하다보니 이 은혜의 자리가 닫혀지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받은 복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아무리 복잡해도 하나님의 은혜는 열어주는 자리가 있습니다. 믿음을 나중으로 세우지 말고 우선하는 처음의 자리에 세워서 하나님이 세워주시는 자리에서 감사하며 사는 복을 누립시다.
결론을 맺습니다. 인간의 눈으로만 보려고 하다보니 세상을 감당하기가 버겁게만 보이게 됩니다. 어린 아이의 눈을 가져 봅시다. 어린 아이는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가 있으면 모든 것을 믿지만 부모가 없으면 매일 매일의 삶이 두려움과 눈물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자리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성도라면 그 어떤 사람보다도 힘 있게 다시 걸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내일 일을 염려부터 하지 말고 그 짐을 하나님께 맡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기는 자리는 자신의 자리에 있는 최상의 삶을 그것보다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더 열심히 열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열어주시는 복을 알고 최상의 자리에서 감사하는 성도로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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