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를 자랑할 이유
[갈라디아서 6장 14절]
14절 -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오늘은 '십자가를 자랑할 이유'에 관하여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편에서 볼 때,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은 사도 바울이라고 해도 별 이의가 없는 줄 압니다. 바울은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며, 가장 위대한 설교자이며, 기독교 역사상 하나님의 은혜를 가장 많이 받은 은혜의 최고봉을 이룬 사람이라고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위대한 크리스챤이며 훌륭한 설교가이며 커다란 하나님의 사람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감하는 날이 가까웠을 때 그의 전 생애를 되돌아보며 고백한 말씀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세상에 자랑할 것이 많았습니다. 그의 훌륭한 가문도 자랑할 수 있었고 그의 많은 학문과 지식, 혹은 각처에 오르내리며 많은 사람을 구원한 것과 많은 교회를 세운 것 등을 얼마든지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또 그는 위대한 문필가로서 신약성경의 삼분의 이 이상이나 기록하여 다가오는 후대의 많은 사람을 감동하여 은혜를 받게 했으므로 이것도 자랑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가 내세울 수 있었던 이 세상 모든 것 중에 어느 하나도 자랑하지 않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고 영광을 돌렸습니다. 또한 바울은 물론 믿었지만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자랑하지도 않았으며 예수님의 기적 행하심을 자랑하지도 않았고 예수님의 훌륭한 설교를 자랑하지도 않았습니다. 오로지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가장 중심 사건에다 마음을 두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노라'고 외쳤습니다.
이제 그러면 우리가 왜 그토록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해야 하며, 왜 십자가를 설교해야 하며, 왜 십자가를 그렇게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가를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그때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다는 것은 가장 수치스러운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가장 수치스러운 십자가를 가장 영광스러운 십자가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후 십자가는 전인류의 구원과 영생을 이룬 최대 영광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의 능력은 실로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능력이 되었고 그날 갈보리 산상에서 태우신 작은 빛이 온 세상의 빛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님의 그 십자가 사랑 아래 겸손히 무릎을 끓고 마음 깊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생각하며 우리가 항상 십자가를 자랑할 이유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십자가는 인간의 죄의 깊이를 나타내 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죄를 조금은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신문이나 방송으로 보도되는 끔찍한 사건들이나 우리 주변에서 보게되는 사람들의 비도덕적이며 비양심적인 행위들로부터 인간의 죄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그러한 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비난하며 죄인 취급하지만 자신에 대해서는 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십자가 앞에 나가서 우리의 죄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에는 자신이 근본 죄인이라는 사실이나 인간의 죄의 깊이를 다 알 수 없습니다.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기 전까지는 죄의 흉악함과 그 깊이를 결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분을 바라보고 '이 분이 누구며, 왜 죽느냐?'고 묻는다면 하늘에서 대답이 들려 오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외아들이요, 자기의 죄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죽어가고 있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을 겁니다. 바로 우리의 죄가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을 그 아버지의 품에서 빼앗아 이 세상으로 끌어내려 잔혹한 로마인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했다는 사실을 저와 여러분이 깨달을 때 비로소 우리 자신의 죄의 크기와 깊이를 알게 될 것입니다. 죄는 결코 가볍고 작은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 생명을 대가로 지불하실 만큼 크고 심각한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큰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전에 시카고에 한 부자가 있었는데 그의 딸이 몹시 아팠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입원시켜 많은 의사의 치료를 받으며 애를 썼지만 별로 진전되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의 아버지가 최후로 20,000불짜리 수표를 끊어서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의사 로렌스씨를 초청해 그분에게 수술을 부탁했습니다. 그 결과 그 의사의 치료가 성공해서 그의 어린 딸이 회복되고 건강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볼 때 그 아버지가 얼마나 그 딸을 사랑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지불하신 엄청난 대가를 우리가 깨닫게 될 때, 죄는 크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죄보다 얼마나 더 큰 것인가를 깨달을 줄 믿습니다. 우리의 죄는 하나님의 가장 귀중한 독생자를 희생시켰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인간의 죄가 어마나 크고 깊은가를 알게 해 줍니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인간의 깊은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내놓으심으로써 그 깊고 큰 인간의 죄를 도말하여 주신 것입니다.
2. 십자가는 천지간에 최고의 사랑을 나타내 줍니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우리가 십자가를 대할 때 인간의 죄가 얼마나 깊은가를 알게될 뿐 아니라 그것을 해결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가도 깨닫게 됩니다.
요 3:16절에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은과 금을 주신 것이 아니라, 지상의 모든 다이아몬드를 주신 것이 아니라, 많은 육축을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그의 독생자를 내어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귀하게 여기시는 것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희생적 사랑을 베푸신 것입니다.
옛날 말수레를 타고 다닐 때, 미국의 어느 청년이 약혼자를 태우고 가다가 어떤 언덕에서 쉬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 말이 그의 애인을 태운 채 언덕 밑으로 달려 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이 청년은 쏜살같이 달려가 말고삐를 붙잡고 매달려 수레를 멈추고 애인을 구출했으나 그는 말발굽에 밟히고 수레 바퀴에 깔려서 죽게 되었습니다. 허겁지겁 달려간 그 애인이 피투성이가 되어 버린 청년의 머리를 두 손으로 잡아 일으키려 했더니 그는 '내가 너를 무척 사랑했어, 그렇지'하고 말하면서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저와 여러분이 죄악의 검은 말을 탄 채 죽음의 지옥으로 달려가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자신을 돌보지 않고 달려 내려와 갈보리 산상에서 우리 위해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확실히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을 향해서 '나는 너희를 무척 사랑했지, 그렇지'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늘의 영광을 떠나 이 세상에 오셔서 고독한 길을 걸으시다가 마침내 갈보리 산상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피흘리시고 죽어주신 것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주님의 그 한없는 사랑을 기억하며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3. 십자가의 메시지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목사님들의 목회 사역에 있어서 여러 측면에서 그 신앙의 사상이 일치하지 않을 때가 많지만 십자가가 우리 목회의 중심이라고 하는 데는 다 일치합니다. 십자가가 모든 설교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에도 일치합니다. 모든 제자들의 설교의 중심도 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었습니다. 바울도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이룬 주님의 십자가의 메시지야말로 우리 기독교의 속죄와 부활의 복음에 있어서 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메시지야말로 구원과 영생에 이르는 유일한 진리의 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전 영국 해군이 사용하는 모든 로프에는 전부 그 가운데 붉은 실이 들어 있어서 그 밧줄이 힘이 있고 일치성을 보여 주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 목사의 모든 목회와 설교의 중심에는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의 붉은 실이 들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부름받고 보내심을 받은 모든 전도자의 복음적 메시지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메시지이어야 합니다.
4. 십자가는 전 인류에게 참된 만족을 줍니다.
여러분, 큰 슬픔을 당하거나 마음이 상하는 비극을 당한 때가 있습니까? 권하노니, 그때는 십자가 앞으로 나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오! 주님 당신께서는 이 세상 어떤 사람보다도 고통을 많이 당하셨습니다. 나를 이 환난에서 건져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면 주님은 분명히 여러분의 상한 심령을 피묻은 손으로 어루만지시며 평안과 위로와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당하신 십자가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리 커다란 고난과 고통을 당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제가 젊었을 때 시골에서 목회하면서 치아가 상해 치과에 가서 이를 뽑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에는 전기로 이를 뽑는 것이 아니라 발로 밟아 가면서 재봉틀 밟듯이 어떤 기구를 사용해서 이를 뽑았는데 그만 뽑다가 이가 부러졌습니다. 그래서 그 속의 뿌리를 뽑아 내려고 칼로 마구 째어서 집게로 뽑다가 그래도 안되겠던지 그 다음에는 구멍을 뚫는데 어찌나 신경을 곤두세우고 아파했던지 그 아픔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 30분 동안 피를 흘리게 하고 갖가지 방법을 다 쓰고도 못뽑겠는지 여기서는 못뽑겠으니 서울의 큰 병원에 가서 뽑으라고 했습니다. 그래 어찌나 화가 나던지, 온 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고 기진맥진해 있는 터라 어떻게 해서든 여기서 뽑으라고 했더니 그 다음에는 망치와 정을 가져다가 입 안에 정을 탁 갔다가 대고 망치로 톡톡 두드리는데 얼마나 고통이 심했든지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 한 번씩 칠 때마다 눈에서는 북두칠성이 번쩍번쩍 했습니다. 그때 문득 생각하기를 '나는 어금니 하나를 뽑는데도 이렇게 아프거늘 예수님은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양손과 양발에 못이 꽝꽝 박히고 옆구리엔 창이 들어 갔으니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러우셨을까'하는 생각이 들면서부터 고통의 십자가를 마음 속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을 참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어떤 고통과 시험이 와도 예수님의 십자가만 믿음으로 바라보면 능히 감당할 위로와 힘과 용기가 솟게 됩니다.
또한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는 '내가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고 버리지도 아니하며 너희와 항상 함께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힘과 위로와 은혜를 베풀어 줄 것이며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하리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마음 속에서 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 모든 의문의 해답이 되시면 모든 문제의 해결이 됩니다.
그 전에 한 젊은 부부가 어린 딸을 하나 두고 결혼 생활을 하다가 뜻이 맞지 않아서 결국 이혼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그 어린 딸이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그때 어린 딸의 장례식에 아빠도 엄마도 함께 한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다른 것은 다 맞지 않아도 그 딸을 사랑하는 마음만은 일치했던 것입니다. 바로 그 자리가 그들 부부의 사랑의 공통 지점이었습니다. 그때 이혼했던 부부는 모든 차이점을 버리고 서로 재결합하기로 결심하고 새출발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미워서 보기 싫은 사람이 있습니까? 생각만 해도 기분 나쁜 사람이 있습니까? 의견이 맞지 않아 고통스러운 사람이 있습니까? 이 모든 차이점을 갈보리 십자가의 사랑 아래로 가져 오십시오. 그러면 모든 다툼과 미움이 다 사라짐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모든 질병과 고통과 약함을, 모든 무거운 짐을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사 그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예수의 십자가만이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참된 만족을 준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5. 십자가는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전에 런던 거리에서 점자 성경을 읽으며 구걸해 먹던 소경이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사도행전을 읽다가 읽던 곳을 잊어버렸습니다. 손가락으로 짚으면서 다시 찾으려고 오르락 내리락 손가락을 옮겼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읽던 한 부분이 생각나서 '천하에 다른 이름이 없나니, 천하에 다른 이름이 없나니'를 반복해서 읽으며 찾노라니 지나가던 많은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웃고 지나갔습니다. 그때 한 청년은 웃지 않고 그 소경이 외우는 말을 유심히 들으면서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는 구절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 소경은 그 말씀을 듣고 당장 집으로 돌아가 침대 옆에 무릎을 끓고 앉아 그 마음을 하나님께 쏟아 예수를 구주로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요 1:12절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선행으로 구원얻을 수 없습니다. 구제 사업을 많이 했다고 구원받을 수도 없습니다. 산상수훈이나 그밖에 어떤 훌륭한 말씀을 따라 산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한 길, 내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그분 앞에서 철저히 회개할 때 구원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 대서양 한가운데서 배가 한 척 파선하여 침몰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배엔 구명대가 충분하지 못해서 죽을 사람이 많게 되었습니다. 그때 한 젊은 아버지가 구명대를 자기 아내와 어린 아들에게 하나씩 채워 주면서 아내에게 말하기를 '여보, 나는 물속 무덤으로 들어가오. 그러나 당신과 아들은 구조받기 바라오. 그리고 이 다음에 내 아들이 커서 알아들을만 하거든 아빠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너를 살리기 위해 대신 죽었다고 말해 주구려'하고 물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여러해 지나서 아빠의 사랑으로 구조되어 건강하게 성장한 그 아들이 아빠의 사진을 바라보면서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아빠에 대해서 좀 자세히 얘기해 주세요.' 그때 엄마는 배가 파선되던 당시의 상황을 이야기해 주면서 '아버지는 너를 살리기 위해 대신 돌아가셨다'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바로 당신과 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냐, 안 믿느냐에 따라 우리들 자신이 구원받아 영생에 이르느냐 아니면 구원받지 못해 영원한 멸망에 이르느냐 하는 영원한 운명이 결정됩니다.
요 3:36절에 보면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만이 천국으로 가는 길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떤 부부가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어린 딸을 데리고 대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어린 딸이 기도할 때 가만히 눈을 뜨고 쳐다보니까 강대상 뒤에 커다란 더하기 표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엄마에게 왜 저렇게 큰 더하기 표를 세워 놓았느냐고 물으니까 엄마는 가만히 생각하다가 '얘야, 저것은 십자가라는 것인데 영원한 더하기 표란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사랑을 더해 주시고, 축복을 더해 주시고, 믿음을 더해 주시고, 소망을 더해 주시고, 영생을 더해 주시는 우리의 더하기 표란다'라고 딸에게 설명해 주었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십자가는 예수님의 피값이며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이십니다. 이 십자가를 믿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고 영생의 구원을 주시므로 한 사람도 빠짐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중요성을 꼭 깨닫고 십자가만 자랑하는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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