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이론적인 권면에 이어 고린도 교인들에게 실제적인 권면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있다. 즉 이 권면은 고린도인들의 비난에 대해 바울이 형제의 사랑을 가지고 부모 같은 관용으로 화해를 요청함으로써 시작하고 있다.

1. 고린도 교인을 향한 두가지 권면(고후6:11-18)
하나님의 일꾼으로써의 자신의 참된 사도권을 자신이 겪은 고난과 영광의 사역으로 적극적으로 증거한 바울은 이제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무엇이라고 권면하고 있는가? 그리고 바울은 성도의 성결한 삶과 불신자와의 단절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는데 이 관계는 어떠한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전'으로써 성도가 취해야할 태도는 무엇인가?

1) 바울의 권면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을 변덕쟁이(고후1:17,18 ; 고후10:2-4), 군림하려는자(고후1:24), 스스로 천거한 자(고후4:2,5 ; 고후5:12), 미친 자(고후5:13 ; 고후11:1) 등으로 비난하였다. 그러므로 바울은 "보답하는 양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고 그들의 잘못된 행위들을 훈계하였다(고후6:11-13). 왜냐하면 마음을 넓게 가지고 바울에게 뜨거운 애정을 쏟는 것은 그들의 문제 자체를 해결하는 열쇠이자 동시에 바울의 사랑에 보답하는 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성도와 불신자는 결코 섞일수 없는 물과 기름의 관계이므로 성도는 공명정대하고 진실되며 날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령의 열매를 맺는 구별된 삶이어야 한다고 하였다(갈5:22-26).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성전으로써의 성도는 거룩함과 순결함을 유지하기 위하여는 먼저 자신을 불신자들이 행하는 음행, 토색, 우상숭배 등과 같은 죄악에서 완전히 분리될 것을 명한 것이다.

2) 진실된 성도의 자세
하나님이 보시기에 결코 중간 지대란 존재하지 않는다(계3:15,16). 그러므로 빛의 자녀된 성도는 마땅히 빛되신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그 빛을 어두움 가운데 비쳐 어두움에 거하는 자들을 빛의 자녀가 되게해야 할 적극적인 책임이 있는 것이다(마5:14 ; 요8:12). 이러기 위해서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여 죄악을 저지르지 않도록 온전히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할 것이다(엡6:10-18).

2. 성결과 화해의 호소(고후7:1-4)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약속을 받은 성도들이 취해야할 것으로 바울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그리고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의 잘못을 지적한 목적은 무엇이며 그에 대한 바울의 심정은 어떠한 것이었나?

1) 바울의 호소
하나님께서는 모든 성도들에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19:2)라고 명하셨다. 이는 곧 성도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두려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바울의 명령과 일맥상통하고 있다(고후7:1). 하지만 이같은 바울의 말은 고린도 교인들을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 스스로 자신들의 잘못된 모습들을 깨닫고 돌이켜 마음의 문을 열게하기 위해서이다(고후7:3). 한편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애정은 바로 영혼에 대한 전도자의 심정에 그 기원을 두고있다. 즉 고린도 교회와 바울의 관계는 운명 공동체라고 할 정도로 밀접하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는 고린도 교회를 향한 바울의 무조건적인 사랑임을 알수 있다.

2) 올바른 성도의 삶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신앙 생활의 가장 핵심되는 내용이다. 왜냐하면 참된 지식과 지혜의 근본인 하나님은 창조주이자, 만물의 주재자시요, 죄인들을 패망케하시는 심판주이시기 때문이다(잠1:7 ; 잠9:10). 따라서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성도들은 자신들의 온전한 거룩함을 이루어 나가야할 것이다. 하지만 이 작업은 한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삶을 마감하는 그 시간까지 계속되어야만 한다.

3. 화해로 인한 기쁨(고후7:5-16)
바울이 디도를 통하여 얻게된 기쁨의 이유와 그 내용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러한 화해로 인하여 얻게되는 바울의 유익은 무엇인가?

1) 바울이 얻은 위로와 기쁨
바울은 디도와 만날 장소인 마게도냐에 도착할때까지 마음이 편치 못하였다(고후7:5). 왜냐하면 그는 마음속으로 고린도 교인들이 디도를 통해 보낸 '준엄한 편지'를 받고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는 염려와 디도의 안부에 대해 걱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역자인 디도를 만나 개인적인 위로와 기쁨을 얻게될뿐 아니라 고린도 성도들이 바울의 훈계와 권면을 받아들이고 그와의 교제가 회복되었다는 더 큰 위로와 기쁨의 소식을 접하게 된다. 한편 이 소식은 드로아에서 열린 복음 증거의 문을 스스로 포기하게 할 정도로 깊은 좌절과 염려에 빠지게 하였던 바울에게 모든 문제가 해결됨과 동시에 복음 증거에 관한 새로운 힘과 용기를 불어넣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2) 신앙의 연단
성도들은 때때로 환경적인 어려움과 마음속의 갈등 등으로 인하여 삶의 기쁨을 잃어버릴때가 종종 있다. 그러나 이 기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인내를 배운다면 이 기회는 신앙의 연단기요, 성숙기가 될수 있을 것이다(말3:3,4 ; 약1:3,4,12 ; 벧전1:6-9). 이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겸손히 하나님을 바라본 바울에게 위로를 전해주셨듯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환경적인 문제와 마음의 근심으로 실망하며 겸손해진 성도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하시고 참된 기쁨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사51:3).

고린도 교회를 향한 바울의 권면은 불신자들과 연합하거나 함께하지 말라고 권하고 있다. 그러면서 악에서 떠난 그리스도의 순결한 생활이 무엇인지를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되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함을 교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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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울의 사도직

사도라 불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들 중에 그의 공생에 기간동안 그를 뵙지 못하고 직접 가르침을 받지도 않았던 유일한 인물이 있다면 바울이다. 그는 엄격한 바리새인으로서의 훈련과 교육을 받았을뿐이지만 회심과 아울러 그리스도의 사도로 여겨졌다. 따라서 어떤 사람들은 그의 사도권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하였으며 그의 가르침을 무시하려고도 하였다. 그러나 바울이 그리스도의 공생에 동안 함께 동행하지 않았으며 얼굴을 대면하여 가르침을 받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가 주의 열두 사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위치의 사도로 임명을 받았다는 사실은 성삼위의 사역으로도 뚜렷이 나타난다.
첫째, 바울의 사도직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되었다는 사실이다. 고후5:18과 갈1:16에는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에 의해 바울이 사도로 임명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둘째, 바울의 사도직은 그리스도로부터 수여되었다. 바울은 롬1:5에서 자기는 그리스도로부터 사도직을 받아 이방인들을 위하여 사역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증거한다. 더나아가 그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직접 대면하여 사도로 임명되었다고 주장한다(고전9:1 ; 고전15:8). 여타의 사도들이 모두 그리스도를 직접 뵙고 따르던 사람이었던 것처럼 바울 자신도 그리스도를 직접 뵈었다는 것은 그의 사도직의 정당성을 확실히 입증해주는 것이라 할수 있다.
셋째, 바울의 사도직은 성령의 선별하심에 의해 주어진 것이다. 그는 당시에 그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가진 많은 사도와 제자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특별한 선별에 의해 이방을 위한 사도로 택함을 받았다(행13:1-3). 이는 그의 사도권이 정당하며 틀림없음을 나타내주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2. 사도직

사도(Apostle)의 직접적 어원은 헬라어 ajpovstolo"(아포스톨로스; 보냄을 받은 자)로써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고 공적인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을 뜻한다. 이와 같은 의미의 히브리어는 jylv(샬리아흐)로써 '보냄을 받다'라는 의미이다. 사도와 동일한 의미는 구약에서는 바로에게로 보내심을 받은 모세(출6:11)와 아합에게 보내심을 받은 엘리야(왕상18:1)에게 적용되었다. 신약에서는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았음을 증거하기도 하였다(막9:37, 요13:20).
사도라는 개념이 보다 확고하게 정착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따르던 무리들 중 12명을 선발하여 사도라 명명하신 것에 있다. 그런데 제자들이 그들에게 주어진 사도직에 대하여 올바른 자각과 사명감을 갖게된 것은 십자가 사건과 부활이 있은 이후였다(마28:16-20).
사도직의 자격은 가룟 유다의 배교 이전까지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임명하시는 것에 전적인 권한이 위임되어 있었지만 그 이후에는 교회의 선출과 임명(행 2장)으로 혹은 권위의 부여와 인정에 의해 다른 사람들에게도 부여되었다(고전15:7 ; 갈1:19 ; 갈2:8,9).

3. 사도적 계승

사도란 한마디로 예수그리스도의 사역과 부활의 증인이다. 따라서 사도의 권위와 영향력은 교회에 있어 지대하다. 결국 사도들은 그리스도와 그 이후의 기독교 신앙세대 사이에 서있는 가교라 할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성도들은 사도들의 증언인 신약을 통해서만 예수그리스도의 실체를 볼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체 교회는 '사도들의 터 위'에 서 있는 것이라 정의될 수 있다(마16:18 ; 엡2:20 ; 계21:14). 위와 같은 사실들로 인해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교회의 사도직이 교황에게 전이된다고 해석한다. 그들에 의하면 교황은 주의 수제자 베드로의 후계자이며 교회내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특별히 관리하는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로마 교회의 지나친 확대 해석으로서 갖가지 부작용을 낳는 온상의 역할을 하였다. 사도 베드로의 수위성은 단지 초대교회에서의 특정한 활동 기간에 국한되어질 뿐이었다. 아울러 베드로의 사도직의 수위성도 의심스러운데가 있다.
교회가 예루살렘으로부터 타지역으로 확대되어 나가는 과정에 있어서의 베드로의 역할은 뛰어난 것이었지만 그 이후에 있어서는 바울이나 주의 형제 야고보의 그늘에 눌려 있었던 흔적을 성경 여러곳에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행15장 ; 갈2장).
결국 사도적 계승을 특정사도나 여타사도의 권위를 교회의 특정한 사람이나 집단이 물려받는다고 생각될 수 없는 것이다. 다시말해 사도적 계승은 '사도적 복음의 계승'을 뜻함을 알수 있다. 이는 사도들이 전한 복음이 한세대에서 다른세대로 전달되는 것을 뜻함인 것이다.
사도들의 복음을 전수받으며 그러한 사역을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교회는 사도성을 가진 것이요 사도적 계승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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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서는 목회자적 서신이라 할만큼 현실 문제를 붙잡고 씨름하는 사도 바울의 인간적인 면모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다. 따라서 본문도 그러한 바울의 모습을 크게 세가지로 나누고 있는데, 1,2장에서는 고린도 교회의 문제에 대하여 중재를 하는중 자신의 사도직의 정당성을 언급하고 있으며, 3,4장에서는 고린도의 실제적인 문제를 교리적인 색채로 연결시키려하는 바울의 노력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5장과 6장의 전반부에서는 사도권의 참됨과 신적 기원은 오로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화해의 직분이라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결국 거짓 사도들과 그들의 가르침을 멀리하라는 권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있다.

1. 바울의 고뇌(고후1,2장)
바울이 에베소에 머물면서 고린도전서를 쓸때 그의 원래 계획은 마게도냐를 지나서 고린도를 방문하여 겨울을 나는 것이었다(고전4:19;고전16:5-7). 그런데 왜 바울은 그의 계획대로 실행할 수 없었는가? 또한 바울이 준엄한 편지를 쓴 목적은 무엇인가?

1) 바울의 변론
바울은 원래 에베소-고린도-마게도냐-고린도-예루살렘의 여정을 계획 했었다. 이 계획에 따르면 바울은 고린도를 두번 방문하게 되어 있었는데, 바울은 이를 "너희로 두번 은혜를 얻게하기 위하여"라고 표현하였다(고후1:15). 하지만 주후 55년 봄 에베소에서 그는 팔레스틴으로부터 들어온 유대주의자들로 인해 고린도 교회의 어지러운 소식이 접해지자(고전1:11 ; 고전5:1,2; 고전8:1-8), 디모데를 통하여 고린도전서를 보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의 상황이 호전되지 않자 할수 없이 원래의 계획을 수정해 고린도 교회에 대한 '가슴 아픈 방문'을 하고 다시 에베소로 돌아오게 되었다. 따라서 바울의 실제 여정은 에베소-고린도-에베소-드로아-마게도냐의 순이 되었다(행19:21-20:2). 한편 바울이 마게도냐의 이를때(고후7:5)까지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오히려 점점 더 악화되어 갔기 때문에 준엄한 편지(고후2:3,4)를 다시 고린도 교회에 보내게 되었다. 하지만 이 편지는 고린도 교인들을 위협한다거나 그 위에 군림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즉 고린도 교인들이 이 편지를 읽고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며 올바른 판단력과 이해력을 회복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2) 사랑과 용서
디도가 전달한 바울의 편지로 인하여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게 되어 교회내의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처벌하는 등 새로운 각성을 하게 되었다. 이는 결국 상대방의 잘못에 대하여 안타까워하며 순수한 사랑의 동기에서 나온 충고와 견책만이 상대방의 마음을 변화시킬수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2. 교회의 실제적인 문제(고후3,4장)
바울이 자신의 사도직에 대한 추천서를 언급한 배경은 무엇이며, 왜 필요없다고 하였는가? 그리고 바울은 누구를 위하여 일한다고 고백하였는가?

1) 새 언약의 일꾼된 바울
초대교회 당시 천거서는 곧 교회가 인정하는 것을 나타내는 소개장이었다. 사실 이 소개장은 예루살렘뿐만이 아니라 여러교회에서 이미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 그 한예로 에베소 교회가 아볼로를 아가야 지방으로 보낼때 그 지방 교인들에게 편지를 써준 것을 들수 있다. 그런데 바울의 대적자들은 고린도 교회내에서 바울의 소개장 문제를 제기하였다. 바울은 소개장의 기능을 불필요하다거나 나쁘다고 비방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소개장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 자신들임을 나타내려 한 것이었다. 한편 바울은 자신이 '예수를 위하여' 고린도 교인들의 종이 되었다고 밝힌바 있다(고후4:5). 따라서 그는 모든 것을 고린도 교인들을 위하여 일한다고 고백하였다. 그러므로 바울 자신은 모든 환난과 역경을 오히려 기쁨으로 여기며 참아냈던 것이다(골1:24 ; 딤후2:10).

2) 성도의 확신
복음 증거자에게 가장 먼저 요구되는 사항은 '새 언약에 대한 확신'이다. 왜냐하면 언약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있어야만 담대한 복음의 증인이 될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기 한몸을 희생 봉사하는 태도는 곧 그리스도를 위한 것으로 마땅히 그리스도의 종된 모든 성도들이 취해야할 태도일 것이다(마6:24 ; 행20:19 ; 갈5:12 ; 빌3:3).

3. 사도직의 정당성(고후5:1-6:10)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예비되어 있음을 알고있는 바울의 탄식은 어떠한 것인가? 바울에게 있어 최대의 목표는 무엇인가? 바울이 말한 인내와 시련 간에는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1) 하나님의 사도된 바울
바울의 탄식은 현실에서 자신의 기쁨을 찾지못한 염세주의자들의 탄식과는 그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고후5:4). 즉 그의 탄식은 고통스러운 지상 생활로부터의 자유와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를 너무나도 갈망하는 마음에서 나온 탄식이었다. 그러므로 지상에 있어서 그의 목표는 살든지 죽든지 간에 언제나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는 것이었다. 이것은 결국 그가 그리스도 중심적인 삶을 살았으며 모든 일을 자신의 판단 기준에 의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보실까' 하는 그리스도의 가치 판단 기준에 의하여 모든 행동을 하였다는 것을 의미해 주고있다(갈1:10 ; 빌1:20 ; 골1:10 ; 살전4:1). 한편 인내는 믿음의 시련을 통하여 만들어진다(롬5:3 ; 약1:3). 그러므로 인내는 궁극적으로 소망, 즉 예수그리스도께서 심판의 주로 재림하실때에 성도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알수 있다(눅21:19).

2) 지상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의 태도
성도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현재의 이 구원은 영혼의 구원이요 해방일 뿐으로 불완전한 것이다. 왜냐하면 육체는 여전히 죽음의 종된 상태이기 때문이다(롬7:25).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변화된 육체를 가지고 완전히 양자의 영광을 받을때까지는 육체의 죽음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롬8:22,23).

성도들은 이 땅을 살면서 믿음의 시련이 닥칠때 소망을 가지고 기뻐해야할 뿐만 아니라 환난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롬5:3,4).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도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히10:36)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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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자

본 서가 바울의 저자가 아니라는 다른 이견은 거의 없다. 19세기 독일의 튀빙겐 학파의 창시자인 바우르(F.C.Baur)는 많은 바울 서신은 부정하면서 본 서는 바울의 저작으로 인정하고 있다. 본 서신서가 바울의 저작이라는 증거로는 첫째 본 서에서 바울이 쓰고 있음을 두번이나 언급하고 있으며, 둘째 이레나이우스(Irenaeus), 폴리갑(Polycarp) 등과 같은 교부들이 바울 서신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2. 수신자

본 서는 고린도 교회와 아가야 지역의 성도들에게 보내진 편지이다. 아가야 지방의 행정 도시인 고린도는 바울이 1년 6개월간 머물던 장소이며, 주요 활동 무대이기도 하다(행18:11). 이곳에서 그는 회당장과 디도, 유스도를 회개시켰고, 고린도 교회를 형성케 하였다. 바울의 2차 여행중 조직한 고린도 교회는 주변의 겐그레아 교회나 아덴 교회보다 그 규모나 내실 면에서는 월등하기 때문에 아가야 지방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했다. 이러한 이유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중요시 여겼다.

3. 기록 장소

본 서는 마게도냐에서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간접적 근거로는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고후7:5)를 들수 있다. 또한 예루살렘 교인을 위해 아가야 지역에서 모금 운동이 일어나고 있음과 마게도냐에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모금 운동을 지적하면서 고린도와 아가야 지방의 교인들을 교훈하는 사실에서 엿볼 수 있다. 한편 본 서의 기록 장소가 빌립보서, 데살로니가, 베뢰아 지역으로 보는 설도 있지만, 이들 지역이 광의적 의미에서 모두 마게도냐에 속하기 때문에 마게도냐로 보는데 별 이견이 없다.

4. 편집에 관한 비평

일부 비평학자들은 본 서가 바울의 단편적인 편지를 한데 묶어 편집한 것으로 보고있다. 비평가들의 주장을 살펴보면, 첫째 고후2:14-7:4은 소위 '준엄한 편지' 이전에 보낸 것으로 보고있다. 그리고 고후6:14-7:1를 '이전의 편지'(고전5:9)로 보고 있다. 둘째 9장은 8장의 중복으로 보며 고린도 교회가 아닌 아가야 교인들에게 보낸 독립 서신으로 보고 있다. 셋째 10-13장은 1-9장 이전에 기록된 것으로 보는 견해로 10-13장을 '준엄한 편지'의 일부로 생각하고 있다.

5. 바울이 고린도를 방문한 여정

고린도를 방문한 순서는 본 서를 이해하는데 중요하다. 그러나 바울의 방문을 순서적으로 분류하기란 어렵다. 때문에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를 비교하여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① 바울의 2차 전도여행 중 아덴을 떠나 당시 타락한 고린도에 도착하여 복음 전파(행18:1-17), ② 에베소로 떠난 바울(행18:18-28), ③ 고린도 교회에 서신을 보냄(고전5:9), ④ 글로에의 집편에서 고린도 교회의 분쟁 소식을 들음(고전1:11), ⑤ 고린도 교인의 요청에 따라 고린도전서를 디도편으로 보냄, ⑥ 디모데에게 사명을 주어 고린도로 파송함(고전4:17 ; 16:10) ⑦ 디모데의 보고를 받고 고린도를 방문함, 즉 가슴 아픈 방문임, ⑧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눈물의 편지를 기록함(고후10-13장), ⑨ 바울은 디도를 만나기위해 마게도냐로 떠남, ⑩ 디도로부터 고린도 교회에 대한 기쁜 소식을 들음(고후7:6-16), ⑪ 고린도후서를 마게도냐에서 기록한 바울은 디도 편으로 고린도 교회에 보냄등이다.

6. 눈물의 편지(준엄한 편지)

눈물의 편지로도 알려지게 된것은 "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한 것이 아니요"(고후2:4) 때문이다. 바울이 이런 편지를 쓰게된 목적은 고린도 교회에 대하여 '불의를 행한자'로 바르게 함이 분명하다. 이외에 바울은 고린도 교회로 다시 가슴아픈 마음으로 방문하지 않기 위해서(고후1:2-2:4)이며, 성도를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을 알리려 함(고후2:4)과 성도들의 참된 사랑이 나타나기 위해 썼다고 한다. 이런 눈물의 편지는 매우 긍정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의 가슴아픈 방문 동안 그들의 죄를 뉘우치며, 불의한 자들을 처벌하게 되었다. 또한 자신의 죄를 회개한 자에게 관용을 베풀기를 권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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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록 동기

바울은 디모데를 고린도 교회에 파견한 후(고전4:17 ; 고전16:10) 그가 그곳에 도착하기 전에 들려온 소식과 편지에, 고린도에서 심각한 문제가 일어나고 있음을 알고 고린도전서를 써 보낸다. 그러나 바울의 편지는 크게 호응을 받지못하고 교회 내부의 상황은 점점 더 어려워진 것 같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 고린도 교회를 잠깐동안 방문하였다. 이것은 고린도 교회에 대한 바울의 두번째 방문으로 고린도전서를 쓴후 고린도후서를 쓰기 이전 중간기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고후13:2에 이 두번째 방문을 말하고 있는데 그때에 바울과 고린도 교회 사이에 극심한 긴장 관계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고후12:14과 고후13:1에서는 세번째 방문을 예고하고 있다. 그런데 바울이 이 두번째 방문에서 돌아온 후에 고린도 교회에서는 바울의 대적자들을 중심으로 그에 대한 비난의 소리가 높아졌다. 곧 다시 오겠다던 바울이 여행 계획을 변경시키자 그를 허튼 사람으로 공박하고(고후1:15-24), 바울은 아무런 추천장도 없는 자로(고후3:1 ; 고후4:2), 그의 말은 분명치 않고 떨어져 있을때나 큰 소리치지 막상 대면하여서는 보잘것 없는 인물이라고 혹평하였다(고후10:1,10).
또한 그는 다른 위대한 사도들에 비하여 사도의 자격이 없는 자로 그때문에 고린도 교회의 도움을 받지않고 스스로 일한다고 평론하였다(고후11:7 ; 12:13). 이에 대하여 바울은 소위 '눈물의 편지' 혹은 '중간 편지'를 써 보냈다. 그 편지는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심히 마음에 고통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바울은 자신이 직접 가는 것을 그만두고 디도에게 그 엄중한 편지를 주어서 고린도 교회에 가지고 가게 하였다. 그러면서 바울은 그 여정을 자세히 의논하여 디도가 돌아오는 길에 드로아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그러나 정한 시기에 바울이 드로아에서 디도를 기다렸으나 그가 오지 않으므로 바울은 매우 초조하게 되었다. 그러나 마게도냐에서 디도를 만나 보고를 들은 바울은 모든 걱정하는 마음이 풀리게 되었다. 고린도의 대부분의 교인들이 바울의 정책에 굴복하여 회개할뿐 아니라 바울과 화해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음을 들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기쁨과 감사 가운데 다시금 위로와 권면의 글로 고린도후서를 써서 디도로 하여금 고린도 교회에 가지고 가게 하였다.
이 때에 바울은 디도와 함께 다른 두형제를 파송하였는데 그들을 보낸 목적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기 전에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 헌금을 준비케 하기 위함이었다.

2. 저작 연대

고린도전서를 주후 54년이나 55년 여름 전에 썼다고 할때 고린도후서는 그 다음 해인 55년이나 56년 가을쯤에 기록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디모데가 고린도전서 편지를 전하고 돌아온 후 얼마있다 바울이 고린도를 방문했고, 다시 에베소로 돌아와 고린도로부터 전해지는 괴로운 소식을 듣고 '눈물의 편지'를 써서 디도로 하여금 고린도 교회에 전하게 했다. 그리고 나서 바울이 드로아로 갔다. 다시 마게도냐로 건너가 거기서 디도를 만나 고린도 교회의 소식을 듣고 고린도후서를 쓰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을 요하였을 것이다.
고후8:10과 고후9:2에 고린도 교회에서 자진해서 1년전부터 모금을 시작했다고 한것으로 보아 고전16:1에 쓰여진 바울의 지시를 따라 모금을 시작한지 적어도 1년이 지난 후에 고린도후서가 기록되었다고 할수 있다. 그 당시의 달력으로는 새해가 가을에 시작되었음을 감안할때 고린도전서가 쓰여진 1년 후의 새해인 55년이나 56년 가을에 마게도냐에서 고린도후서가 기록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3. 서신의 통일성

고린도후서의 본문을 연구하는 동안에 학자들은 본 서의 통일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게 되었다. 그 중요한 이유는 10-13장과 1-9장 사이의 내용상의 불일치를 발견케 된다는 것이다. 즉 1-7장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와의 화해를 감사하며 기쁨으로 쓰는 가운데 불의를 행한 자에게 너무 과한 벌을 주지않도록 권면한다.
반면 고후10:1에서 전혀 새로운 어조로 자신을 변호하기 시작하면서 그의 대적자를 향하여 공격을 퍼붓는다. 그리고 그가 고린도에 갈때 그들이 그가 원치않는 상태에 있을까 걱정하며(고후12:20), 죄지은 자들에 대하여는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않으리라고 경고하고 그때에 가서 주께서 주신 권세로 그들을 엄하게 대하지 않기를 원한다고 말한다(고후13:10). 이러한 차이점으로 인하여 10-13장은 1-9장 이전에 쓰여졌거나 혹은 전서와 후서 중간에 기록된 독립적 서신이거나 다른 서신의 일부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어떤 학자들은 고린도후서 10-13장이 바로 이 '눈물의 편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8-9장의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헌금에 관한 부분을 또 다른 별개의 편지로 보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고린도후서가 하나의 통일된 서신이라고 보는 견해가 여전히 가장 큰 지지를 받고있다. 다만 1-9장과 10-13장의 뚜렷한 차이점을 설명하기 위하여 그 두부분이 상당한 시간적 간격을 두고 쓰여졌다는 견해가 제시된다. 즉 1-9장을 쓴 후 얼마를 지나는 동안 고린도로부터 다른 보고를 받고 거기에 대한 경고를 10-13장에 덧붙인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아무튼 1-9장은 교회 전체를 대상으로 쓴 것이고, 10-13장은 고린도 교회의 대적자들과 범죄한 자들에 대하여 쓴 것으로 그 어조에 있어 차이가 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할수 있다.

고린도후서는 고린도 교회에 보낸 바울의 두번째 서신으로 바울은 먼저 고린도에 가지않은 자신의 여정 변경에 대하여 변명하고 자신의 사도직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님을 밝힌다. 그리고 사도의 직분의 역할은 화해의 직책임을 말하면서 고린도 교인들이 넓은 아량을 가지고 화해할 것을 말한다. 이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고린도 교회가 연보에 참여할 것을 가르친다.
교회 내에서 자신의 사도권을 부정하게 하는 적대자들에게 자신의 사도직을 자랑하고 아울러 사도로서 수난받은 사실과 신비한 체험을 부득불 자랑한다. 그리고 회개하지 않을 경우 단호한 처벌이 있을 것을 말한 후 기뻐할 것을 권고하고 축도로 마친다.



출처 : 갓피플 자료&지식

제목 : 겸손히 배우라 (최창범 목사)

[고린도후서 12장 9절]
9절 -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혹시 실패를 했더라도 실패속에서 배워라.
1. 실패를 통해 겸손을 배운다.
  - 자신의 실패 인정, 실패를 털어버리고 일어나라.
2.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해야 한다.
  -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어야 한다.
3. 하나님의 길을 따라가야 한다.

제목 : 나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윤봉원 목사)

[고린도후서 5장 14절~17절]
14절 -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절 -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16절 -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 우상과 하나님을 가장 큰 차이점
  - 우상 - 시편 135:15~18 열국의 우상은 은금이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그들의 입에는 아무 호흡도 없나니 그것을 만든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것과 같으리로다.
  - 하나님 - 말씀하시며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고 우리의 기도와 모든 말들을 다 들으시는 분

 
# 예수님
1. 강권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분 (고후5:12~15)

  -고린도후서5:12~15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로 말미암아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에게 대답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2. 다시는 자신을 위해 살지 않도록 하셨다. (15절)
- 로마서6:6~14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 갈라디아서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골로새서2:20~23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은 한때 쓰이고는 없어지리라)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르느냐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느니라.
- 로마서6: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3. (이유) 새로운 피조물 된 우리임을 알아라 (16~17절)
  - 세상에서 젖이 떨어지는 것이다.
  - 마음의 철저한 변화이다.
# 다시는 자신을 위해 살지말고 오직 주님만 위해 살아가라.

제목 : 보배를 담은 질그릇 (홍문수 목사)

 

[고린도후서 4장 7절~10절]

7절 -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절 -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절 -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절 -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 질그릇 인생 - 연약하고 비천한 인간 (하나님을 바라보라)
2. 보배를 담은 질그릇 - 그리스도의 생명, 능력, 소망을 담은 새사람 (보배 = 복음, 예수그리스도)
  - 생명(고후4:10) 주님을 내 속에 모셔야 한다.
  - 능력(고후4:7~9) 예수능력 내능력으로 승리
  - 소망(고후4:16~18) 세상 것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라.

    → 고린도후서4:16~18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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