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udy

 

Ⅰ. 갈릴리인의 죽음과 회개의 부르심 13:1-5

(1) 최근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을 죽이고 그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소식이 그리스도에게 고해졌다(1절).

1)이것은 실로 비통한 소식이었다. 이 사실은 이곳에 간단하게 언급되었을뿐 그 당시의 어떠한 역사 기록에서도 이것을 찾아볼 수가 없다. 갈릴리는 헤롯의 통치구역이었으므로, 빌라도에 의하여 저질러진 이 불법 살인으로 인해 누가복음 23:12절에서 볼수 있는 빌라도와 헤롯사이의 분쟁이 일어났음을 추측할수 있다. 살해된 갈릴리인들의 수는 얼마인지 기록이 없고 다만 '어떤'이란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주목할 상황은 빌라도가 그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것이었다. 비록 그들은 빌라도의 학살을 두려워할만한 이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도망치지 않았던 것이다. 율법은 그들에게 제물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것을 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전이나 제사의 성스러움 그 어떤것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인간을 무시하는' 불의한 재판관의 광포로부터 그들을 보호해줄수 없었다. 성역이고 안식처였던 제단이 이제 함정이 되고 위험과 살육의 장소로 변하였다.

2)왜 지금 "이 시각에" 그 이야기가 우리 주 예수께 보고되었는가. 아마도 단순히 그가 전에 이 사건을 듣지못했으며 그들이 애통해하는 일이었으므로 그 역시 애통해하리라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또는 적당한 시간에 하나님과 화해할 필요성에 관해 앞장 끝부분에서 말씀하셨던 것의 한 증거로써 제시한 것인지도 모른다. 즉, "선생님 갑자기 '관속에 넘겨져' 전혀 예기치 못한 죽임을 당한 산증거가 여기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준비할 필요를 느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그 말씀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봄으로 우리 자신이 힘을 얻게됨은 참으로 유익하다. 혹은 그 자신이 갈릴리인이고 예언자인고로 그를 충동시켜, 이 갈릴리인들의 죽음에 대해 헤롯에게 보복할 방법을 찾기위해서 였는지도 모른다. 혹은 빌라도가 앞서 그들 갈릴리인들에게 했듯이 그리스도를 해하지 않도록,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으로 예배하러 올라가시는 것을 막기위해서 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제 누그러진 빌라도가 더이상 진노를 일으키지 않게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잠깐동안 그 길에서 피하시는 것이 현명하다고 그들은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대답은 그들이 마음속으로 악의에 차서 빗대어 이것을 그에게 말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즉 살해된 갈릴리인들은 남모르게 죄를 지은 자들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혹 아니라면 하나님께서는 빌라도가 그들을 그처럼 잔인하게 죽이도록 허락하시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들은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매우 불쾌한 일이었다. 오히려 그들을 순교자로 인정하는 대신 뚜렷한 증거없이 행악자라고 낙인찍어 버렸던 것이다. 갈릴리인들의 이러한 운명은 아름다울뿐 아니라 영광스러운 본이었다.

(2) 이 보고를 들으신 그리스도께서 다음과 같이 답하신다(2-5절).

1)그는 이 사건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갑작스런 죽음을 당한 또다른 사건을 말씀하셨다. 당시는 실로암의 망대가 무너져 열여덟 사람이 치어 죽은지 얼마되지 않았던 때였다. 이 사건 역시 슬픈 것으로 우리는 종종 이와같이 침울한 얘기를 듣는다. 안전을 위해 세운 망대가 때로는 인간의 파멸을 가져오는 것이다.

2)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 이와 유사한 사건들을 악용하지 말 것을, 그리하여 마치 그들이 받는 큰 고통으로 보아 그들을 흉악한 죄를 지은 자들로 단정하여 그러한 큰 고통받는 저들을 비난할 기회로 삼지말 것을 경고하셨다.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2,3절). 아마도 그리스도께 갈릴리인들의 이야기를 한 자들은 유대인으로 그들은 이처럼 갈릴리인들을 비난할 그 어떤 문제를 가진 것을 기뻐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때아닌 결말을 가져온 예루살렘 사람들의 이야기로 응수하셨던 것이다. "이제 너희는 실로암 연못가에서 치료받기를 기다리고 있는동안 실로암의 망대가 무너져 죽임을 당한 그들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하나님께 더빚진 자들이었다고 생각하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들이 받는 고난으로 그 사람들의 죄를 판단할수 없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불에 타서 없어질 가치없는 찌꺼기나 쓰레기로써가 아니라 불에 단련되어지는 정금으로써 용광로에 던지우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슬픔에 슬픔을 더하지않도록, 이웃보다 더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가혹하게 비난해서는 안된다. 만일 우리가 심판할 능력이 있다면 바로 우리 자신을 심판하는 것으로 충분하게 여겨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권력을 소유한 박해자들과 성공한 자들을 훌륭한 성인으로, 반면 박해받는 자들을 흉악한 죄인들로 단정하기도 한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바로 그 비난으로 우리 자신도 비난받는 것을 알아야 한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 7:1).

3)이 이야기를 근거로 다음과 같은 각성의 말씀을 더하여 회개의 부름을 선포하셨다.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같이 망하리라(3-5절).

①이 말씀은 우리 모두가 그들이 당했던만큼 당연히 멸망하여야함을 의미하고 있다. 우리도 죄인일뿐만 아니라 그들보다 더나을 것도 없는 큰 죄인으로 그들이 고난받은것 못지않게 회개해야할 큰 죄를 지은 자들이기에 다른 사람들에 대한 비난을 누그러뜨릴수 있어야 한다.

②따라서 우리는 회개하기를 힘써 잘못했던 모든 것을 뉘우치고 더이상 죄를 범하지않도록 해야한다. 다른 사람에게 임한 하나님의 심판이 큰 소리로 우리에게 회개할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③이 회개만이 멸망으로부터 구원받을수 있는 길이며 가장 확실한 길이다.

④만일 우리가 회개치 않으면 우리 전에 당했던 다른 사람들처럼 우리 또한 멸망당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이 세상에서 죽은 것처럼 우리도 영원히 죽을수밖에 없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음으로 회개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바로 그 예수께서 또한 우리에게 멸망하지 않으려면 회개하라고 명하시고 계신다. 이처럼 그는 우리앞에 죽음과 생명, 선과 악을 놓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선택하도록 요구하신다.

 

Ⅱ. 열매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 13:6-9

이 비유는 바로 앞서하신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같이 망하리라'는 경고의 말씀을 강조하시려는 의도로 행해졌다.

(1) 이 비유는 본래 유대 민족과 백성을 가리켜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의 소유로 택하시어 자기 백성으로 삼아 곁에 가까이 두셨으며 그들로부터 의무와 순종이라는 합당한 보답을 기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열매'라고 여기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그들의 이러한 의무를 다하는 대신 오히려 책망을 들었다. 이로써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그들을 포기하시려고 작정하셨으나 그리스도의 중재로 인해 그들에게 더 크신 자비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시간적 여유를 은혜롭게 베푸셨다. 말하자면 또다른 유예기간을 그들에게 주어 그들가운데 자신의 사도들을 보내어 회개하도록 권고하시고 더나아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게하시려고 그들을 찾으셨던 것이다. 그들가운데 얼마는 회개하고 돌아와 열매를 맺었으며 이들에게는 더할나위 없는 축복이었다. 그러나 유대 민족의 다수는 계속해서 뉘우치지 않고 열매맺지 못한고로 그들에게는 돌이킬수 없는 파멸만이 있었던 것이다.

(2) 그러나 이 비유는 다음과 더 중요한 교훈을 담고있다. 즉 은혜의 덕을 누리는 모든 자들을 깨우쳐 그들을 부르신 그 부르심에 합당한 마음의 온유함과 삶의 방향을 알게하기 위한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요구되는 '열매'이기 때문이다.

1)이 무화과 나무는 유리한 점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보다 비옥한 땅인, 그리고 보통 길가에서 자라는 다른 무화과 나무들(마 21:19)과는 달리 알뜰한 보살핌을 받는 포도원의 심겨진 것이었다(6절). 이 무화과나무는 어떤 '한사람'의 소유였다. 하나님의 교회는 그의 '포도원'이다 우리는 이 포도원에 심겨진 무화과나무들인 것이다. 이것은 특별한 은총이다.

2)무화과나무로부터 주인의 기대는 어떠했나.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다. 그는 다른 사람을 보내지않고 자신이 직접왔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으로 열매를 구하려 그 자신의 백성에게 직접 오셨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포도원에 심겨진 그들로부터 '열매'를 요구하시며 기대하고 계신다. "주여, 주여"라고 울부짖는 잎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처음이 좋고 장래 유망해 보이는 꽃들로도 안된다. 열매가 있어야만 한다. 우리의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이 복음과 빛과 사랑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

3)주인의 기대에 대한 실망은 어떠했나. 얻지 못한지라. 단 한개도 없었다. 복음의 특권을 누리는 그 많은 사람들가운데 어느누구도 전혀 하나님께 영광돌리지 못함을 생각할때 참으로 슬픈 일이다.

①주인은 여기서 포도원지기에게 열매없음을 책망하고 있다. "열매를 구하러 내가 왔지만 그러나 실망하고 말았다. 즉 하나도 얻지 못했다."

②주인은 두가지 이유로 열매없음을 더욱 책망하고 있다.

첫째, 오랫동안 기다렸으나 그것이 헛수고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는 많은 열매를 구한 것이 아니라 다만 열매 맺기만을 기대하였는데 그 기대가 그처럼 크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매년 '삼년'을 급하게 오지않았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 이 말씀은 복음을 받았지만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못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오래참으시는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하나님께서 삼년동안 우리를 찾아오시어 열매를 구하셨으나 하나도 얻지 못하신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둘째, 이 무화과나무는 열매를 맺지못할뿐만 아니라 손해를 끼쳤다. 즉 그것은 '땅만 버렸던' 것이다(7절). 그것은 과실을 맺는 나무가 들어설 자리를 차지하고 그 주위에 있는 모든 나무들에게 해를 끼치고 있었다. 선을 행하지않는 자들은 보통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의 나쁜 행실로 영향을 끼쳐 해를 입힌다. 그러한 나무가 높고 크며 넓게 퍼져있을수록 그리고 그 나무의 수명이 길수록 손해는 커지며 땅은 더욱 버려지는 것이다.

4)그 무화과나무에 대한 판결은 내려졌다. 찍어버리라. 열매맺지 못하는 나무가 기대할 것은 찍혀버림을 당하는 것밖에는 없다. 어찌 땅만 버리느냐. 이는 마땅한바로 아무 목적없이 포도원 안에 자리해야할 이유가 없다.

5)이에 대해 과원지기가 중재하고 나섰다. 그리스도께서는 크신 중보자이시다. 목회자들도 중보자들이다. 우리 또한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①그가 기도한 것은 집행유예이다.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8절). 이것은 "주인이여 결코 찍어버려서는 안됩니다"라는 기도가 아니라 "주인이여, 지금 찍어버리지 마소서"라는 기도이다. 열매맺지 못하는 나무는 잠시 그대로 두는 것이 바람직스럽다. 아직 회개의 은총을 입지못한 자들에게 회개할 여유를 주는 것이 자비롭다. 열매맺지 못하는 나무된 우리가 즉시 찍혀버리우지 않는 것은 위대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덕택이다. 열매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들을 다시 얼마동안 유예하신 하나님의 자비에 힘입어 우리는 기도할수 있다. "주인이여 그들을 그대로 두소서. 조금만 더 그들을 참으시고 그들이 은혜를 입기까지 기다리소서." 이와같이 우리는 진노를 돌이키도록 몸소 막아야 한다. 그러나 자비의 집행유예도 잠간뿐이다.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그가 조금더 참으실 것과 그가 항상 참으시리라고는 기대할수 없다. 우리를 위하여 다른 사람이 기도해줌으로 유예는 가능할지 모르나 용서만은 얻을수가 없다. 우리 자신의 믿음과 회개 그리고 기도로써만 용서함 받을수 있는 것이다.

②중재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이 유예를 개선시키기 위해 무엇을 약속하셨나. 내가 두루파고 거름을 주리니. 간단히 말해 우리의 기도는 항상 우리의 수고한바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처럼 최선을 다하겠다는 겸허한 결심으로 우리의 모든 기도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구해야 한다. 만일 그렇지않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 되며 또한 우리가 간구한 자비를 스스로 정당하게 받을가치가 없음을 보이는 것이 된다. 포도원의 과원지기는 자기의 본분에 충실한 것을 약속하였고 이점에서 목회자들 또한 각자 맡은바 임무에 충성해야할 것을 배운다. 그는 나무 주위를 파고 그곳에 거름을 줄 것이다. 열매맺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묵힌 땅을 파서 일으키는 율법의 엄중함에 의해 각성되어져야 하며 그리고나서 나무에 거름을 주듯이 따뜻하게 하고 기름지게 감싸주는 복음의 약속들에 의해 힘을 얻어야 한다. 이 두가지 방법은 모두 시도되어야 한다. 전자는 후자를 위한 준비이며 둘로써 모두 충분하다.

③유예후에 남겨진 조건은 무엇인가. "일년만 더 우리가 할수 있는한 모든 것을 해보도록 하지요(9절)." '이어니와'라는 단어는 원본에는 없으나 그 표현은 뜻밖이다. '만일 실과가 열면.' 이 말은 주인과 과원지기가 얼마나 기뻐할 것인지를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열매맺지 못하던 신앙인들이 오랜 세월이 지난후 열매없음을 회개하고 치유받아 열매를 맺게된다면 모든 것이 잘되었다고 말할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실 것이고 목회자들의 손은 더욱 강해질 것이다. 뿐만아니라 그로인해 하늘에서는 즐거워할 것이고 땅도 더이상 버려지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옥토가 되어 포도원은 아름다워지고 좋은 나무들로 가득차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나무 그 자신으로도 참으로 잘된 일이다. 그 나무는 '하나님께 복을 받게'(히 6:7)될 것이며 깨끗해져서 더많은 열매를 맺게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에 덧붙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계신다. 그렇지않으면 찍어버리소서. 비록 하나님께서는 오래 기다리시면 기다릴수록 그들이 당할 멸망도 더욱 클 것이다. '이 후에' 찍혀버림을 당하는 것은 실로 슬픈 일일 것이다. 비록 하나님께서 마지막날에 직접 찍어버린다 하실지라도 그일 자체는 결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일이다. 지금 열매맺지 못하는 나무들을 위해 탄원하는 자들도 그들이 끝까지 열매를 맺지못해 결국 찍혀버림을 당할 그때에는 오히려 그들의 찍힘을 보고 만족해할 것이다. 그들의 가장 친한 친구들조차도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에 묵묵히 따를 것이다.

 

Ⅲ. 안식일에 한여자을 고치심 13:10-17

1. 한여인을 고치심(10-13)

우리 주 예수께서는 오랫동안 사단의 영에 사로잡혀 있던 한여인을 치료하시는 기적을 베푸셨다. 그는 그의 안식일을 회당에서 보내고 계셨다(10절). 우리도 이와같이 하도록 명심해야 하며 집에서 성경을 읽음으로 마찬가지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그는 안식일에 회당에 계시면서 거기서 가르치셨다. 가르치시는 것이 그의 본분이었다. 또한 그가 가르치신 바를 확증시키기 위해 이제 하나의 이적, 자비 이적을 행하셨다.

(1) 이 자비의 대상은 회당안에 있던 '십팔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던' 한여인이었다(11절). 그 여인은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못할'만큼 병약했으며 따라서 바로 설수가 없었다. 비록 그 여인은 이런 질병에 걸려있었지만 안식일마다 회당에 갔다. 육체적인 질병조차도 그렇게 심하지 않는한 안식일에 공중 예배를 빠지게 하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기대이상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도우실수 있기 때문이다.

(2) 치유를 구하지도 않은 자에게 이처럼 치유해 주심은 항상 인간들의 소망에 앞서시는 그리스도의 자비와 은혜를 잘 나타내준다.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20절). 그녀가 호소하기 전에 그가 대답하셨던 것이다. 그 여인은 가르침을 받기위해 그리고 영혼에 유익을 얻기위해 그에게 갔다. 바로 그때 그리스도께서는 그녀가 육체적인 질병으로부터 놓임받는 것을 허락하셨다. 자신의 영혼을 위해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관심을 두고있는 자들에게는 이와같이 그들의 육체에 대해서도 진정한 보살핌이 따르게 된다.

(3) 완전하고도 즉각적으로 이루어질 그 치유는 그의 전능하신 권세를 말해준다. 그는 '안수하시고' 말씀하시기를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라고 하셨다(13절). 비록 그녀는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못하였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녀를 일으켜 세우셔서 그녀 스스로 설수 있도록 하실수 있었다. 꼬부라져 있던 여인이 곧 펼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 치유는 죄인들의 회개에서 볼수 있는 인간의 영혼에 대한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사역을 나타내고 있다 죄를 씻음받지 못한 마음은 이러한 사단의 영의 지배를 받아 왜곡된다. 그들은 하나님이나 하늘을 향해 전혀 스스로 설수 없는 자들이다. 영혼의 구부러짐은 전혀 어긋난 길을 낳는다. 이처럼 뒤틀린 영혼은 그리스도를 찾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자기에게 부르시고 치유의 말씀을 들려주시어 그들이 그들의 병에서 놓임을 얻게하시고 그들의 영혼을 바르게 하신다. 인간의 죄로 구부러졌던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바르게 할수 있다. 또한 선한 백성들에게 내리시는 위안으로, 그의 사역을 말해주고 있다. 대단히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오랫동안 노예의 영인 사단의 영에 사로잡혀 왔다. 그러나 때가되면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양자의 영으로 이러한 질병에서 그들을 해방시키실 것이다.

(4) 이 치유의 효과는 그녀의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에도 나타났다. 그녀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13절). 구부러진 영혼들이 바르게 될때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으로 그것을 드러낼 것이다.

2. 회당장의 공격(14)

그는 이것을 보고 '분내었다.' 그 날이 안식일이기 때문이었다(14절). 그는 그리스도를 비난하면서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말것이니라'고 하였다. 여기서 그는 그 일이 일상적인 일이듯 가볍게 처리하고 있다. 엿새 중 어느날이라도 와서 치료받으라고 하였다. 그의 눈에는 그리스도의 치유가 값싸고 평범한 것으로 비춰졌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역사였다. 그를 풀어주셨는데 그가 스스로 묶을수 있겠는가? 히브리어에서는 경건함과 자비로움이라는 두가지 의미가 한단어에 같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자비와 자선 행위가 어느 의미에서는 경건한 일임을 암시하는 것으로 따라서 그와 같은 일은 안식일에 매우 알맞는 일인 것이다.

3. 그리스도께서 그 정당성을 변호하심(15,16)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15절). 우리는 관대하게 심판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 의해서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회당장이 그와 그의 복음에 대해 적의를 가지고 있으며 이것을 안식일의 거짓 열심으로 위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이러한 속마음을 지적하실수도 있었으나 굳이 그와 논쟁하여 주셨다.

(1)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인정되지 않으나 유대인들 사이에 보통 행하고 있는 일, 즉 안식일에 가축에게 물을 먹이는 사실에 호소하고 계신다. 우리안에 가두어 두었던 가축들을 안식일에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고는 했던 것이다. 그렇게 하지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잔인한 짓일 것이다. 만일 그날이 안식일이라고해서 가축을 굶겨야한다면, 가축을 쉬도록 가두어 두는 것이 차라리 일을 시키는 것보다 더욱 못할 짓일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실례를 바로 지금의 상황에 적용시키고 계신다(16절). "소나 나귀같은 짐승에게도 안식일에 자비를 베풀어야하거늘, 하물며 이 여인을 훨씬더 큰 고통에서 풀어주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 이 여인은 아브라함의 딸로서 너희의 누이라. 그러한 딸에게 너희가 소나 나귀에게도 당연히 베푸는 자비를 베풀어서는 안된다는 것인가? 이 여인은 아브라함의 딸인 것이다. 그러므로 메시야의 축복을 받을 자격이 있다. 이 여인은 사단에 매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단의 권세를 깨뜨리는 것이야말로 그 불쌍한 여인에게 자비의 행위가 되는 것이다. 이 여인은 이와같이 비참한 상태에 무려 십팔년이나 매여있었다. 이제 그녀를 풀어줄 기회가 왔는데 다시 하루라도 그 일을 연기시키겠는가. 십팔년간의 고통으로 이미 충분하다고 너희는 생각지 않는가?"

4. 무리의 서로 다른 반응(17)

(1) 이 말씀은 그를 박해하는 자들의 적의를 당황하게 했는가.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17절). 그러나 이 부끄러움은 회개로 인함이 아니라 오히려 분노로 인한 것이었다.

(2) 이 말씀은 또한 그를 따르는 자들의 믿음을 얼마나 굳게 하였는가. 온 무리는 그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 그의 적들의 부끄러움은 그를 따르는 자들의 기쁨이었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므로 우리는 그로인해 기뻐하는 것이다.

 

Ⅳ. 하나님나라의 비유 13:18-22

(1) 우리가 이미 마태복음 13:31-34절에서 보았던 두가지 비유안에 복음이 점진적으로 진척되어 가는 것이 예언되어져 있었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은지'를 보이기위해 시도하신다(18절).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할꼬(20절). 그 나라는 너희가 기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리라. 너희는 그 나라가 굉장한 것으로 나타날 것이며 불시에 완성될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너희는 잘못 생각하고 있다. 마치…겨자씨 한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즉 아주 작은 것으로 보잘것없고 거의 기대할만한 것이 없으나 그것이 뿌려졌을때 큰 나무로 자라리라(19절). 많은 사람들은 복음의 시작이 너무 보잘것없기 때문에 아마도 복음을 잘못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비록 그 시작은 보잘것없이 작으나 나중은 엄청나게 큰 것이 되어, 많은 새들이 날아와 그 가지에 깃들리라는 것을 그들에게 보증함으로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없애려하셨다. "너희는 그나라가 외형적인 방법에 의해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하나 그 나라는 누룩과 같아서 조용하고 은밀하게 그리고 어떠한 힘이나 격력함없이 임할 것이다(21절). " 누룩 조금이 가루덩어리 전부를 부풀게 하듯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신기하게도 그 향기를 전인류에 퍼뜨릴 것이다. 그러나 기다려야만 한다. 그리하면 그것이 즉 복음이 기적을 이루는 것을 보게될 것이다. 점점 '전부 부풀게' 되리라.

(2)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신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 각성 각촌으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22절). 여기서 우리는 그 길이 내키지는 않았으나 겨울에 있을 자신의 희생제를 치르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는 그리스도를 본다.

 

Ⅴ. 구원얻는 수효에 대해서 13:23-30

(1) 하나의 질문이 우리 주 예수께 던져졌다. 이 질문을 한 자가 누구인지 즉 그리스도의 친구인지 혹은 적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나타나있지 않다. 그 질문은 다음과 같았다.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23절). 아마 이것은 흠을 잡으려는 질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구원을 얻는 자가 많다고 대답한다면 그가 너무 무르다고 비난할 것이며, 적다고 대답한다면 엄격하고 딱딱한 자라고 비난할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 다른 사람들의 구원에 대해 스스로 판결을 내리는 것만큼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는 것은 없다. 혹은 이것은 호기심에 연유한 질문 즉 교묘한 투기일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가 구원을 얻기위해서 무엇을 해야할지 그것에는 관심이 없고 누가 구원을 얻고 누가 구원을 받지못할 것인가하는 문제에 더 관심이 있다. 혹은 칭찬받을 질문일수도 있다. 그리스도의 율법이 얼마나 엄한지 그리고 세상이 얼마나 악한지 깨달아 이들을 서로 비교해보면 당연히 "구원받을 자가 과연 얼마나 될까"하고 외칠수밖에 없게 된다. 구원의 말씀을 들은 자들은 많으나 그 말씀을 진정 구원의 말씀으로 받아들인 자들이 심히 적음은 매우 놀랄만하다. 또는 참으로 알고 싶어하는 질문인지도 모른다. "구원을 얻는 자가 적다면, 그 뒤는 어떻게 됩니까? 이 말씀은 저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입니까?"

(2) 그리스도께서는 이 질문에 대해 대답하셨다. 우리의 구세주께서는 이와같은 질문에 직접적인 답변을 하지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는 그들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려 오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양심을 이끄시려 오셨기 때문이다. 그들은 "누구 누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할 것이 아니라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리고 저는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물어야할 것이다.

1)그들을 깨우치시는 권고와 지시 :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24절). 이 말씀은 질문을 한 그 사람에게만 하신 것이 아니라 너희 즉 모든 사람에게 하신 것이다. 구원을 얻고자하는 자들은 모두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하며 또한 엄격한 훈련을 받아야 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자들은 '들어가기를 힘써야' 한다. 하늘에 다다르는 것은 매우 힘든 일로써 굉장한 열심과 주의 그리고 수고없이 그것을 얻을수는 없을 것이다. "열심히 최선을 다하라. 상을 바라고 뛰는 자들처럼 힘쓰라. 끝까지 자신을 채찍질하고 노력해야 한다."

2)이에 대해 여러 예를들어 그들을 각성시키시고 계신다.

①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기위해 수고하였으나 그 수고가 충분하지 못하여 멸망하고 말았는가 생각해 보라. 그들은 구하기는 하나 힘쓰지는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은혜와 영광을 입지못하는 이유는 게으르게 구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행복을 원하고 성결에도 호감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그것들을 위하여 어느 정도 좋은 진전을 보인다. 그러나 그들의 확신은 약하다. 즉 의욕은 식고 노력은 미약해지며 결국 그들의 결심을 붙들어줄 힘과 끈기가 사라지고 만다. 따라서 그들은 그르치게 되는 것이다.

②다가오고 있는 구별의 날과 그날에 있을 판결을 생각하라.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을'것이다(25절). 지금은 아주 시간이 많은듯이 보이나 그가 일어나 문을 닫을 그날은 오고있다. 과연 그것은 어떠한 문인가? 바로 구별의 문이다. 지금은 형식적으로 예배드리는 육에 속한 신앙인들과 진정을 다해 예배드리는 영적인 신앙인이 교회의 성전안에 함께있다. 지금 이들 사이에는 문이 열려있다. 그러나 그 집주인이 일어나면 그들 사이에 있던 자들은 들어오지 못하게될 것이다. 또한 부정한 자들에게도 그 문은 닫히게될 것이다. 안에 있는 자들은 언제까지나 안에 있게될 것이고 거룩한 자들은 계속해서 거룩하게될 것이다. 그 문은 진실한 자와 악한 자를 갈라놓기 위해 이들 사이에 닫히게 된다. 또한 그 문은 거절과 배척의 문이다. 자비와 은혜의 문은 오랫동안 열린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그들은 그 문으로 들어오려 하지않았다. 오히려 그들 자신의 공로로 하늘에 오르기를 바랐으므로 그 집주인이 일어나면 그는 당연히 그 문을 닫을 것이다.

③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자신하였다가 정작 심판날에 이르러 거절을 당할 것인지를 생각하라. 그러면 당연히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다"라고 고백하며 전혀 힘쓰기를 바랄 것이다. 다음 사실을 고찰해 보자.

㉠바로 천국 문앞까지 온 그들의 기대는 얼마나 컸는가. 거기서 그들은 '서서 문을 두드렸다'(25절). 마치 자기집에 온듯이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두드렸던 것이다. '주여, 주여, 열어주소서. 우리는 들어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천국의 그릇된 기대에 의해 망한다. 그들은 그 기대 즉 자신이 천국에 들어가리라는 것에 확신을 가지고 한번도 의문을 제기해 본적이 없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주여'라고 부르며, 그들이 전에는 가볍게 여겼던 그 문으로 들어가기를 지금은 간절히 원하고 있다.

㉡그들은 무슨 근거로 이러한 자신을 가지게 되었는가. 그들의 변명이 무엇인지 보자(26절). 그들은 그리스도의 손님으로서 그의 사랑을 함께받았던 자들이었다. 즉 "우리는 당신의 식탁에서, 당신 앞에서 먹고 마셨습니다"라고 했다. 그들은 또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었던 자들이었다.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당신이 우리를 가르치시고 우리를 구하지 않으실수가 있습니까?"

㉢그들의 자신감은 얼마나 그들을 실망시킬 것인가.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25절)'라고 대답하실 것이다. 뿐만아니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나를 떠나가라(27절)"고 하실 것이다.

첫째, 그는 그들을 부인하신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너희는 나의 가족이 아니다. 주님께서는 자기에게 속한 자들을 아신다. 그러나 그에게 속하지 않은 자들은 알지못하시며 그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으시다.

둘째, 그는 그들을 버리신다. 나를 떠나가라. "나의 문에서 떠나가라. 이곳은 너와 전혀 관계가 없다."

셋째, 그는 그들의 이러한 운명에 합당한 명칭을 붙이셨다.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경건의 탈을 쓰고 은밀히 행하였으며,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사단의 일을 한 이것이 바로 그들의 파멸이다.

㉣그들이 받을 형벌은 얼마나 엄청날 것인가. 거기서 슬피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28절). 즉 극도의 슬픔과 분노가 있게될 것이다.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때. 구약의 성도들이 하나님나라에 있음을 본다. 즉 그들은 상당히 멀리서 그리스도의 날을 보고 그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신약시대의 죄인들은 하나님나라 밖으로 쫓겨날 것이다. 그들은 그일에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때문에 부끄러움으로 밖으로 내쫓김을 당할 것이다. 성도들의 영광을 봄으로 죄인들의 비참함은 더욱더 심하게 여겨질 것이다.

④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얻을 자가 누구인지 생각하라.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석하리니 보라 나중된 자로서 먼저될 자도 있고(29,30절).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으로 보아, 오히려 구원을 얻을 자가 적을 것임을 알수 있다. 그렇다고 복음이 헛되이 전파되었다고 성급하게 말해서는 안된다. 이방인들의 세계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와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늘나라에 갔을때 전혀 그곳에서 만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될 것이며 반면에 그곳에서 꼭 보게되리라고 기대했던 수많은 사람들을 보지 못하게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에 앉아있는 자들은 거기에 이르기위해 많은 수고를 했음을 알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먼 곳으로부터 즉 '동서남북으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그 나라에 들어가려는 자들은 그들처럼 힘써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자신했던 많은 자들이 끝까지 이르지 못하게 되고 오히려 뒤로 밀려나 보였던 자들이 이겨서 이 상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그 나라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한다. "가장 먼저 출발해 누구보다 하늘나라에 가깝게 서있던 내가, 나보다 못한듯한 자들이 모두 그 나라에 들어가는데, 들어가지 못하고 말 것인가? 노력해서 될 것이라면 어찌 힘쓰지 않겠는가?"

 

Ⅵ. 헤롯을 무시하심과 예루살렘을 저주하심 13:31-35

(1) 헤롯이 그리스도를 해하려한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헤롯의 통치 구역인 갈릴리에 계셨다(31절).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혹자는 이 바리새인들이 아무 근거없이 그리스도를 갈릴리에서 유대땅으로 쫓아낼 양으로 이러한 거짓말을 꾸몄다고 생각한다. 유대땅, 바로 그곳에는 정말 그의 생명을 노리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이 바리새인들은 알고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대답이 헤롯 자신에게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바리새인들이 말한 것이 근거있는 것임을 알수 있다. 즉, 헤롯은 그리스도에 대해 앙심을 품고 있었으며 그리스도를 해하려 계획하고 있었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헤롯은 기꺼이 그리스도를 없애려하였다. 그렇지 못할경우 이러한 위협의 말을 전함으로 그를 쫓아버릴 심산이었다.

(2) 그리스께서는 이러한 헤롯의 격노를 무시하셨다.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32절). 헤롯을 '여우'라 불러 그의 본성을 폭로하셨다. 왜냐하면 그의 술책과 배신, 그리고 비열함으로 보아 그는 여우같이 교활하였기 때문이다. 비록 이것이 지독하고 추악한 말임에도 그리스도께서 그를 그렇게 부른 것이 전혀 잘못된 것일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예언자이시고 예언자는 항상 제왕이나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일지라도 책망할 자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이 교만한 왕을 그에 합당한 이름으로 불렀던 것이다. "가서 저 여우에게 말하기를 나는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라. 나는 내가 죽어야 하리라는 것을, 그것도 곧 죽어야 하리라는 것을 안다. 오히려 나는 내가 죽어야할 그 삼일째 되는 날을 기대하고 있다." 즉 "곧 나의 때가 온다. 헤롯이 나를 죽이려할지라도 나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 말하기를 나는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라. 나는 죽음으로 완전해질 것이며 그때 비로소 나의 일을 다 마치게될 것이다." " 나는 제물로 바쳐질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심으로 자신이 거룩하게될 것을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드려 그 자신의 피로 제사장적 직무를 수행하셨다. "나는 그뿐 아니라 그 어느 누구라도 내가 내 일을 다 마치기 전에는 나를 죽일수 없음을 안다. 그와 그의 모든 위협에도 불구하고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리라'. 그의 힘으로 나의 길을 막을수는 없다. 나는 오늘과 내일 그리고 그 다음날도 말씀을 전하며 병을 고치며 두루다녀야 한다." 그날의 일을 그날에 하도록 자극받기위해서 우리는 우리앞에 허락된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좋다. 그리고 우리의 적들의 힘과 적의에 관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이 남아있는한 그들이 우리를 전혀 어찌할수 없다는 것은 큰 위안이 된다. "헤롯이 나를 해할수 없음을 안다. 이는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않았을뿐 아니라 내가 죽어야할 곳은 그의 지배하에 있지않은 예루살렘이기 때문이다."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그 당시 예루살렘에 위치하고 있던 대공의회외에는 선지자를 심판할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므로 만일 선지자가 죽임을 당한다면 그곳은 바로 예루살렘이어야 한다.

(3) 그리스도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애도하셨으며 또한 그 도시에 대해 분노에 찬 저주의 예언을 하셨다(34,35절). 이 말씀은 마태복음 23:37-39절에서도 볼수 있다.

1) 특별한 은혜로 다른 어떠한 곳보다 더 잘 하나님에 관해 신앙을 고백해야할 그 장소와 그 사람들이 오히려 악한 것에 대해 주 예수께서는 몹시 분노하셨고 슬퍼하셨다. 그 거룩한 도성의 죄와 이로인한 파멸을 말씀하시는 그의 심정은 어떠했겠는가!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34절).

2) 보다 많은 은혜의 축복을 누리는 자들이 그 축복을 선용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그것이 그들에게 해가 된다. 인간들의 타락이 정복되지 않는한 그들은 항상 자극받게 된다.

3)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오는 불쌍한 영혼들을 기꺼이 기쁨으로 영접하심을 보이셨다. "암닭이 제 새끼를 날개아래 모음같이, 그러한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한 일이 몇 번이냐"

4) 나는 몇번이라도 하려했으나 너희는 하지않으려 하였다. 그리스도의 기꺼움은 오히려 죄인들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5) 그리스도께서 떠난 그 집은 '황폐하여 버린바' 될 것이다(35절). 만일 그리스도께서 성전을 버리신다면 성전은 황폐하여지고 만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집을 그들에게 버려두신다. 그들 스스로 그것을 섬기고 최고의 것으로 만들도록 내버려두시며 그는 더이상 그 집에 관해 상관하시지 않을 것이다.

6)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몰아낸 그들로부터 당연히 물러서신다. 그들은 그의 부르심에 모이려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그는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

7) 마지막날의 심판이 임하면 지금 믿지못했던 자들이 그때서야 비로소 충분히 믿게될 것이다. 너희는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즉 "이미 너무 늦었을 그때서야 너희는 내가 메시야임을 보게될 것이다."

 

# 해설

회개를 촉구하심 ( 13 )

본장은 다섯개의 작은 단막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얼핏보기에 이들 소단락들은 서로 연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나 나름대로 짜임새가 있는 구조를 보여줍니다. 본장의 전개는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반감을 가진 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1. 죄를 회개하라

1) 회개하라

예수님 당시 로마 총독인 빌라도가 성전에서 제물을 드리고 있는 몇몇 갈릴리 사람을 죽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은 죽은 갈릴리 사람들이 그들의 죄악때문에 당연히 죽은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때 마침 두어 사람이 예수께 나아와서 이 사건을 고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갈릴리인이 다른 갈릴리인보다 더악한 죄인이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니며 회개하지 않는 자마다 결국 멸망할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a.각양 더러운 악(고후12:21)

b.화를 당함(마11:21)

2)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

예수님은 빌라도가 제물에 피를 섞은 사건 및 실로암의 망대 사건 등 두가지 실화를 들어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이어서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에 대한 비유로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본서의 독특한 자료에 의한 것으로, 마21:18-22절과 막11:12-14절에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과 병행합니다. 그 내용은 전혀 다르나 취지는 같습니다. 주인이 관심을 갖고 사랑했던 무화과나무는 삼년 동안이나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주인은 과원지기에게 열매를 맺지못하고 땅만 버리는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리라고 명했습니다. 이에 과원지기는 1년만 더 기회를 주도록 간청했습니다. 과원지기의 간청을 들은 주인은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회개할 기회를 더 주신다는 뜻이었습니다.

a.과실을 있게 하려고 성도를 택하신 주님을 교훈해 줌(요15:16)

b.심판을 유보시킴(출34:9)

3) 안식일의 치유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때 그곳에는 십팔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못하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율법주의적 선입관에 얽매여있는 회당장은 안식일에 치유하신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 분을 내었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장과 그를 동조하는 사람들에게 안식일에 대한 설명을 구체적으로 해주셨습니다.

a.예수는 안식일의 주인임(막2:27-28)

b.선행으로 무식한 말을 막음(벧전2:15)

 

2. 예수의 교훈

1) 겨자씨 비유

예수님께서는 메시지의 핵심이 되는 하나님나라를 가르치는데 있어서 겨자씨를 비유로 사용하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겨자씨는 가장 작은 씨앗으로 여겨졌습니다. 예수님이 이처럼 작은 겨자씨에 하나님의 나라를 비유한 것은 그 나라의 시작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수 있습니다. 그 나라는 보잘것없지만 지속적으로 성장한다는데 그 강점이 있습니다. 겨자씨는 크게 자라서 나중에는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이게 됩니다.

a.사람이 밭에 심은 씨(마13:31-32)

b.거할 곳은 전능자의 그늘임(시91:1)

2) 누룩 비유

예수님께서는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누룩에 비유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누룩 비유 역시 겨자씨 비유에서와 같이 큰 결과를 대조하는 의미가 강하게 반영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누룩은 대체로 나쁜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누룩은 그 급속한 활동력으로 음식을 빨리 부패하게 하므로 악의 전염의 상징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이러한 급속한 활동력이 선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즉 적은 누룩이 가루 서말을 부풀리듯이 그와 같은 역동적인 힘을 성도들이 발휘해야 합니다.

a.잘못된 교훈(갈5:7-9)

b.하나님의 나라(마13:33)

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예수님께서 각성과 각촌을 돌아다니시면서 전도 여행을 할때 어떤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구원얻는 자의 수에 대하여 질문을 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좁은 문은 구원으로 들어가는 문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교훈하시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집주인이 한번 문을 닫게되면 그 문은 절대로 다시 열리지않기 때문입니다.

a.문이 좁고 길이 협착함(마7:14)

b.문이 닫히기 전에 들어가야 함(창7:15-16)

 

3. 탄식하시는 그리스도

1) 행악자들

예수님은 슬피울며 이를 갈 자들은 행악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여기서의 행악은 단순한 윤리적 차원의 악이 아닙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않는 것이 행악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잔치의 비유를 통해 먼저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될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특권을 가졌다고 자랑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경고의 말씀입니다. 그들은 언약 백성으로 일찍이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받은 자였지만 교만하여 오히려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습니다.

a.불의한 자는 하나님나라를 얻지못함(고전6:9)

b.구원 축복을 이방인에게 넘겨주었음(롬11:11)

2) 고난을 각오하심

예수님께서 심판에 관하여 가르치시고 있을때 한바리새인이 나아와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려고하므로 여기를 떠나라고 하였습니다. 전언 내용을 들으신 주님은 헤롯을 가리켜 '여우'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헤롯을 통렬하게 경멸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다고 말씀하심으로써 당신께서 헤롯의 손에 의해서가 아니라 유대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죽을 것임을 암시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사역을 멈추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a.죄인의 손에 죽음당함(마17:22-23).

b.미리 예언된 사실임(행3:18)

3) 탄식하시는 예수

주께서 예루살렘을 반복하여 부르신 것은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며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비극의 성읍인 예루살렘에 대한 탄식이십니다. 더나아가서는 전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안타까움의 탄식이십니다. 예루살렘 거민들은 선지자들을 죽이고 파송된 자들을 돌로 쳤습니다. 예루살렘은 주님의 간절한 초청과 호소를 거절한채 의로운 피를 흘린 죄의 대가로 멸망당할 운명에 처하였습니다.

a.선지자를 죽인 성(마23:37)

 

결론

우리는 본장을 통해 회개를 촉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악한 자들이라도 회개하여 구원받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구원받는 일을 하는데 힘써야 하겠습니다.

 

# 핵심

13:1-9

예수님은 누구든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는 자는 멸망당할 것임을 강조하면서 회개를 촉구하기 위해 무화과나무 비유를 드셨다.

 

# 묵상

회개 촉구를 위한 예 ( 13:4, 5 )

예수님은 회개의 촉구를 위해 빌라도의 갈릴리 사람 학살 사건과 실로암 망대 붕괴 사건을 그 예로 드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죽음이나 병, 과부됨, 무자식 등의 모든 불행을 죄의 결과로 보았기 때문에 갈릴리 사람들의 죽음을 죄에 대한 진노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아무런 불행도 당하지 않은 우리들 역시 그들과 똑같은 죄인임을 강조하며 진정한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회당장과 안식일 ( 13:10-16 )

한회당장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십팔년 동안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진 여인을 고치신 것으로 인해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귀신과 질병에서 놓임받는 일이 안식일 준수보다 더 중요한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법조문에 사로잡혀 안식일의 근본정신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회당장을 외식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회당장이 안식일에 자기 육축은 돌보면서 그보다 중한 사람돌보는 일은 비난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율법을 자신들에게는 적용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데만 사용했던 것입니다.

하나님나라 ( 13:18-21 )

겨자씨와 누룩은 하나님나라를 상징합니다. 겨자씨는 아주 작은 것이로되 땅에 심기워 자라면 커다란 나무가 됩니다. 누룩도 적은 양이 가루속에 넣어진 후에는 모든 가루를 부풀게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처음에는 미약해 보이지만 나중에는 크게 창대해짐을 교훈합니다.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은 좁습니다. 주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원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은 혈과 육으로 들어가거나 인간의 노력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함으로만 들어갈수 있습니다. 그렇기때문에 천국을 구하는 자는 많으나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은 적은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충고 ( 13:31-33 )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려하니 유다 지방으로 도망치라고 충고를 합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의 충고뒤에는 교활한 음모, 즉 예루살렘에서 연합하여 예수님을 처치할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통치권 안에서 문제를 야기시키지 않기를 바랐기때문에 이러한 충고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정하신대로 주님의 갈 길을 가셨습니다. 즉 예수님의 구속 사역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그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곧 귀신과 병과 죄악의 추방,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었습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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