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udy

 

Ⅰ. 바울의 드로아 도착 20:1-6

1. 바울의 에베소 출발(1)

그는 그가 활동했던 다른 어떤 장소보다 이곳 에베소에서 더 오랫동안 머물렀다. 이제 그가 장소를 옮겨야 하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다른 도시들에서도 복음을 전파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에베소를 떠난 이후 다시 새로운 활동 무대를 개척한 사실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왜냐하면 다음 장(章)의 끝부분에서 그가 죄수의 입장에 처한 모습을 발견하게 되며, 이 책의 끝에서도 그가 계속 그러한 상태로 남아있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소요 사태가 종식된 직후 에베소를 떠났다(1절). 그의 이동은 적대자들의 분노를 다소 진정시켰을뿐 아니라, 그곳의 신자들에게 유리한 고지를 확보해 준 것이기도 하였다. 어떤 학자들은 바울이 에베소를 출발하기 이전에 고린도 사람들에게 보낸 첫번째 서신을 썼다고 주장하며, 에베소에 언급된 바울과 에베소의 맹수들과의 싸움이 이 소요 사태의 비유적 설명이었음을 주장한다. 제자들과 작별하던 바울의 모습은 사무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엄숙한 것이었다. 바울이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1절, 참조, 시리아 사본에는 '사랑의 입맞춤으로'란 구절이 첨가됨). 사랑하는 친구들은 서로 헤어지기 전에는 서로가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따라서 헤어질때에야 비로소 그들은 서로가 얼마나 가깝게 마음을 주고받았는지를 알게 된다.

2. 바울의 헬라 교회들에 대한 방문(2)

그는 헬라 교회들을 개척했으며, 이 교회들에 대한 생각을 항상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그가 먼저 마게도냐로 떠난 것은(1절) 소요 사태의 발발 이전에 그가 마음먹었던 것이었다(행 19:21). 거기서 그는 빌립보 교회와 데살로니가 교회들을 방문했으며 그들에게 많은 권면을 하였다(2절). 그는 그들에게 많은 말씀을 전했으며, 그들과 함께 시간 보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그는 아가야 지방 즉 헬라에서 석달 동안 머물렀던 반면(2,3절), 고린도와 그 부근에 가서도 복음을 전파하기로 작정하였다(행 19:21).

3. 바울의 여행 일정 변경(3)

바울은 수리아로 항해하여 안디옥에 갈 계획이었으나 생각을 바꾸어 그가 왔던 길, 즉 '마게도냐로 다녀 돌아가기로' 결정하였다. 그 이유는 바울이 예전에 다녔던 길로 올 것을 예측한 유대인들이 그곳에 매복하여 그를 죽이려고 공보했기 때문이었다.

4. 바울의 아시아 여행에 동반한 그의 동료들(4)

그들의 이름은 4절에서 언급된다. 베뢰아 사람 소바더는 로마서 16:21절에 언급된 소시바더와 동일 인물인 것 같다. 디모데란 이름이 그들 사이에 포함되어 있었다. 바울은 에베소를 떠날 때 디모데를 그곳에 남겨두었지만, 그는 곧 바울을 뒤쫓아 이 명단에 나온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과 동행하였다. 이제 바울이 이 모든 훌륭한 인물들과 함께 동행한 사실이 전혀 쓸모없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다음의 두가지 교훈을 가져다준다.

(1) 그들이 바울의 복음 전파와 그가 가르치는 일에 눈부신 도움을 줄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가는 곳마다 물이 요동했으며, 거기에는 불구자들을 도울 많은 손길이 필요했던 것이다.

(2) 그들이 바울에게 훈련을 받음으로써 미래의 사역에 적합한 인물로 발탁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5. 바울의 드로아 도착(5,6)

바울의 동역자들은 먼저 드로아에 당도하여 바울을 기다렸다(5절). 우리는 어떤 여행길에서 훌륭한 동료를 잠시 기다리는 것을 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바울의 드로아 여행은 순탄하였다. 이제 누가도 바울과 함께 동행하였다. 왜냐하면 누가가 '우리는 빌립보에서 배로 떠났다'(6절)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누가가 바울과 처음 동행한 장소가 이곳 드로아였음을 알 수 있다(참조, 행 16:11). 무교절이란 말은 단지 그 시기를 설명하기 위해 언급되었다. 바울은 배를 타고 '닷새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물렀다. 바울은 아무런 실효를 거두지 못한 채, 선한 사업에 나선 자들과 이곳저곳으로 여행하느라 엄청난 시간만 허비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의 손실만을 탓할 성질의 것이 못된다. 바울은 비록 드로아에서 이레 동안 체류할 기회밖에 얻지 못했으나, 그는 그곳으로 가는 도중에 숙박한 닷새의 기간을 매우 값진 것으로 생각했다.

 

Ⅱ. 유두고의 소생 20:7-12

우리는 여기서 바울이 드로아에서 체류한 이레의 마지막 날 그곳에서 발생한 사건의 기사를 보게된다.

1. 그곳에서 있었던 현지 그리스도인들의 엄숙한 종교 집회(7)

(1) 제자들이 모였다(7절). 그들은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와 찬송을 부르고 각자 따로 떨어져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함께 모여 하나님께 찬양 예배를 드리고 서로간의 친교를 나누어야만 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함께 모일 시간이 정해져야만 했다. 그래서 비록 그들 모두가 한장소에 모일 수는 없었으나 가능한 한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2) 그들은 주의 날(계1:10)인 안식후 첫날에 함께 모였다. 여기서 우리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든 교회에서 함께 모인 날이 바로 그 날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들은 일주일의 첫날을 경건한 마음으로 지켜야 한다. 그러므로 그날은 그리스도와 그들 사이의 징표가 된다.

(3) 그들은 윗 다락에 함께 모였다(8절). 그들은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는 웅장한 예배실을 갖고있지 않았으므로 가정집이나 다락방에 모여 예배를 드렸다. 그들은 교인의 숫자도 적었으므로 그렇게 넓은 장소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또한 그들은 가난했으므로 커다란 집회 장소를 건축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비좁고 불편한 장소에 함께 모였다. 그들의 집회 장소가 현재 우리의 예배당처럼 예배드리기에 알맞고 넓은 장소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우리가 예배에 불참하는 것은 아무런 변명도 있을 수 없다.

(4) 그들이 '함께 모여 떡을 떼었다'는 말은 주의 만찬의식을 베풀었음을 의미한다. 떡을 뗀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우리에게 떼어줌으로써 우리의 죄사함을 기념할뿐 아니라, 우리 영혼을 위한 양식과 잔치를 상징하는 것이다. 매주일 엄숙한 집회 장소에 함께 모여 주의 만찬을 베풀고 같은 신앙과 예배로써 그들의 일치를 확인하는 것이 수많은 교회들의 관례였다.

2. 바울이 이 집회 장소에서 행한 긴 고별 설교(8)

(1) 바울은 그들에게 강론하였다. 복음전파는 필히 성례전을 수반해야 한다.

(2) 그 설교는 그가 '바울이 떠나기로 작정했으므로' 고별 설교였다. 바울이 떠나게 되면, 그들은 비록 그가 가르쳤던 수준으로는 아니더라도 그가 전한 것과 똑같은 복음이 전파되도록 해야만 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바울이 그곳에 머물고 있는 동안 할 수 있는한 많은 것을 그에게서 배워야 했다.

(3) 그의 설교는 너무나 길었다. 그는 밤중까지 강론을 계속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말할 것도 많았으며, 또한 또다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가 그에게 언제 주어질 것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역자들은 기회가 좋거나 나쁘거나 간에 수시로 복음을 전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바울이 청중을 피곤하게 만드는 장황한 설교자였다고 비난한 어떤 사람을 보게된다. 그러나 그들은 기꺼이 바울의 설교에 귀를 기울였다. 바울은 청중의 진지한 모습을 목격했으므로 그의 강론을 계속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이 긴 설교의 주제에 대하여 알기를 원하지만, 다만 그의 서신들과 동일한 본질에 관한 내용이었을 것으로 추론할 뿐이다. 그 집회가 밤중까지 계속되었으므로 촛대들이 세워져 있었으며 수많은 등불이 켜져 있었다(8절). 이것은 그들이 밤중에 모여 악한 일을 꾸민다고 비방하는 적대자들의 비난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3. 죽었다가 살아난 유두고(9-12)

그의 이름은 행운을 지닌 자라는 의미를 지녔으며, 그것이 자기 이름이라고 그는 대답했다.

(1) 그의 나약한 의지 : 그는 유리가 없었던 것으로 보이는 창문에 앉아 있었다. 만일 그가 마루 위에 앉았었더라면, 그는 안전했을 것이다. 그는 졸았다기보다는 바울이 설교를 행하고 있었을 때 깊은 잠에 취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가 바울의 이야기에 제대로 집중하지 않았다는 표시였다. 우리는 그가 잠에 취한 사실을 각별히 주시함으로써 나머지 청중 모두는 졸음을 원치 않았다는 사실- 비록 시간상으로 보아 취침시간이었고 만찬을 베푼 이후였지만-을 알 수 있다.

(2) 사고를 당한 유두고 : 그는 삼층 누에서 떨어져 목숨을 잃었다. 어떤 학자들은 사탄의 손이 개입하여 이 집회를 방해하고 바울을 비방하기 위해 그러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면에 다른 학자들은 "그들이 설교의 말씀을 듣고 있을때 모든 사람들에게 졸음을 경계하도록 경고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이 사건을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나쁜 징조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가능한 한 졸음을 억제해야 하며, 우리가 말씀을 경청함으로써 감화를 받게 될때 그 졸음을 멀리 쫓아낼 수 있을 것이다.

(3) 기적의 은총이 임함으로써 다시 살아남(10절) : 이 사건은 바울의 설교를 확증시킨 계기가 되었음을 입증하였다.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았다'는 말은 이 청년에 대한 극진한 동정심과 애정을 표현한 것이다. 바울처럼 유순한 심령을 간직한 자들은 이같은 불행한 사고를 당한 자들에게 동정심을 아끼지 않으며, 그러한 사고를 당한 자들을 책망하거나 심판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이 사건은 하나의 징표로서 죽은 자의 몸에 하나님의 권능이 임했음을 나타냈다. 왜냐하면 생명이 다시 소생했다는 것은 동시에 그가 신앙을 갖고 내적으로 진지하게 기도드렸다는 사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 청년이 다시 소생하였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확증하였다. 이 불행한 사고가 발생함으로써 회중속에서는 구구한 억측들이 나돌았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 모두에게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라는 말로써 결론을 맺었다. 바울은 도중에 발생한 이 사건을 매듭지은 다음 즉시 자신의 임무로 돌아갔다(11절). '그는 그 집회 장소로 다시 올라갔다.' 거기서 그들은 애찬식에 참여하여 떡을 떼었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11절). 바울은 이전처럼 계속되는 담화를 중단하고 그와 그의 친구들만의 자유로운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그들은 바울의 동료들과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할 수 없었으므로 그들의 설교시간을 최대한 이용했으며 그러한 목적으로 밤잠을 새웠다. 바울의 일행이 떠나기 전에 사람들은 살아난 아이를 회중에게로 데려왔으며 적지않은 위로를 받았다(12절). 그것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물론이고 이 아이의 친척과 전체 시회에 있어서도 커다란 기쁨이 되었다.

  

Ⅲ.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상에서의 바울의 순회 방문 20:13-16

바울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발길을 재촉하였다. 드로아를 방문했던 바울이 이제는 일종의 연안 항해를 시도하였다. 이 시도는 그가 모든 장소를 편리하게 방문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인 것임에 분명하다.

(1) 바울은 그의 동료들을 배에 태워 앗소로 보냈으나, 자신은 도보로 가려고 마음먹었다(13절). 그는 도보로 앗소까지 걸어가기를 원했다. 만일 바울이 택한 길이 지름길이었다면 그 길은 옛날 사람들에게 알려졌던 험한 길이었을 것이다. 바울이 육로를 택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도로의 주변에 있는 그의 친구들을 방문할 목적.

2) 혹은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황량한 곳에서 하나님과의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눌 목적.

3) 아니면 자신을 강하게 단련시키고 자신의 안일함을 탈피하려는 의도.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자신들을 부정할 수 있어야 한다.

(2) 바울은 앗소에서 친구들과 함께 행선한다. 거기서 그들은 '바울을 태우기 위해 그리로 행선하였다'.

(3) 바울은 그의 예루살렘 방문 길을 최대로 활용하였다. 바울을 태운 배는 기오를 경유하여(15절) 사모에 도착하였다. 바울의 일행은 사모 다음 항구인 트로길리움에 잠시 체류하였다. 그리고 이튿날 그들은 에베소 다음 항구인 밀레도에 도착하였다. 이처럼 여행 일정을 잡은 이유는 바울이 이 시기에 에베소에 가지 않기로 결정한 것과(16절) 가능한 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위해서였다. 바울은 대략 4-5년 전에 예루살렘을 방문한 적이 있으며(행 18:21,22) 이제 그가 다시 그곳을 방문하는 목적은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그의 계속적인 관심을 표명하기 위한 것이다. 그가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기로 작정한 이유는 그날에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모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오순절은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특별히 잘 알려진 명절이었다. 일을 하는 사람들은 계획에 따라 시간을 정해놓고 그것을 변경함으로 어려움을 겪는 일이 없도록 잘 지키려고 힘써야 할 것이다. 우리가 친구들과 함께 있는 것은 기쁜일이다. 그것은 우리의 기분을 전환시켜줄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 때문에 우리의 본분을 이탈해서는 안 된다.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했을때 그는 아시아에서-비록 아시아에는 친절한 많은 친구들이 있었지만-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내지 않으려 했다.

 

Ⅳ. 에베소 장로들에게 행한 바울의 고별 설교 20:17-35

바울이 밀레도에 갔을 때, 그는 사람을 보내어 에베소 장로들을 불러올 동안 바닷가에서 체류하였다. 그 이유는 만일 바울이 에베소에 일단 들어간다면, 그가 그곳에서 전혀 빠져나올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바울이 사람들을 보낸 목적은 그들이 당면한 과업을 계속 수행할 수 있도록 그들을 훈육하고 격려하기 위함이었다. 여기서 바울이 장로들과 작별하면서 남긴 담화는 매우 감동적이고도 실제적인 것으로서 바울 자신의 뛰어난 정신이 담긴 내용이었다.

(1) 바울은 그 장로들에게 자신의 삶과 가르침에 관해 언급하면서 그가 이때까지 에베소에 대해 관심을 품어왔음을 호소한다(18절). 그들 모두는 바울이 결코 자기 본위적인 사람이 아닌, 진지하고 자상하며 천상의 영혼을 간직한 자임을 알고 있었다. 만일 하나님의 은총의 힘이 아니었다면 그는 자신의 사역과 고통속에서 침착성과 성실성을 잃지 않고 그 엄청난 과업을 결코 수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사상적 기질과 설교 및 대화의 방향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셨음을 분명히 입증할 수 있는 그러한 것들이었다. 더욱이 그는 자기를 본받으려는 그들에게 일종의 훈시로서 자신의 행동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18절). 이와같이 내가 간 후에, 너희는 너희의 책임을 떠맡은 자들과 함께 거하라"

1) 바울의 정신과 그의 대화는 뛰어나고 모범적인 것이었다.

첫째, 그는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현재까지 줄곧 잘 처신해 왔다. 그들은 바울이 출현한 첫날부터 그가 현명하게 행동할 뿐 아니라 선을 행하기로 작정한 사람임을 알았다. 바울은 언행이 일치한 사람이었다. 즉, 그는 바람에 흔들리거나 어떠한 기후의 변화에도 변하지 않는 그러한 사람이었다.

둘째, 그는 주님을 섬기고 자신을 인간의 종으로 만들지도 않았으며, 기회주의자도 아니었다.

셋째, 그는 지극히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의 과업을 완수하였다. 다만 그는 가장 비천한 자들과 더불어 그들과의 동등한 입장에서 그들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어떤 일에 있어서도 기꺼이 자기를 낮추었다.

넷째, 그는 항상 그들에게 매우 부드럽고 애정이 깃든 동정적인 자세를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그는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 주님을 섬겼다. 이로써 바울은 그의 주인이신 주님을 닮았으며 종종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거듭 말하기 전에 행한 그의 설교에서 울기까지 하였다(빌 3:18). 그들은 애정이 넘칠 정도로 바울과 매우 가깝게 마음을 주고받았으므로 바울은 우는 자들과 함께 울었다.

다섯째, 바울은 그들 앞에 놓인 많은 어려움을 갖고서 고민하였다. 그는 엄청난 반대와 유혹과 시련을 무릅쓰고 인내와 용기로써 자신의 과업을 계속 수행하였다. 여전히 바울을 헤치거나 다른 보복 조치를 강구하려고 음모를 꾸민 유대인들이 매복해 있었다. 고통과 위험속에서도 계속 주님을 섬기며 어떠한 원수도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만을 인정하면서 그분을 친구로 삼는 자들이 바로 주님의 신실한 종들이다.

2) 바울의 설교 내용은 다음과 같다(20,21절).

첫째, 그는 평범한 설교자였다. 그러므로 전달된 그의 메시지는 쉽게 이해될 수 있었다. 이 메시지는 '내가 너희에게 전하였고, 너희를 가르쳤다'는 두마디 말로써 선포되었다. 그는 흥미위주의 잡담으로 그들을 기쁘게 하지도 않았으며, 고상한 개념이나 표현으로 그들이 갈피를 못 잡아 어리둥절하도록하게 만들지도 않았다.

둘째, 그는 자신의 증언을 통해서 그들에게 말씀을 선포한 능력있는 설교자였다. 그러므로 그는 서약자로서 설교하였다. 그는 행상인이 거리에서 소식을 외치듯(그 말의 진위 여부는 그 사람외에 아무도 모른다) 복음을 선포한 것이 아니라, 양심적인 증인이 법정에서 증거를 제시하듯 복음을 선포하였다.

셋째, 그는 유익한 설교자였다. 그는 '그들에게 유익한 것'이 무엇인가를 연구했으며, 그들이 날마다 더욱 현명하고 훌륭해질 수 있도록 노력함으로써 그들의 마음과 삶이 개조되기를 원했다. 그는 그들의 영혼에 거룩한 빛과 열과 힘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그러한 것들에 관하여 설교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마음에 상처를 주는 설교는 가급적 피하고 유익을 가져다주는 설교를 전해야 한다. 바울은 단지 유익을 주기 위해 호감을 얻으려고 하였다.

넷째, 그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 설교자였다. 그는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 설교하였다. 그는 공중 앞에서 복음전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부끄럽게 여기지도 않았으며, 유대인들 가운데서 복음을 전할 기회가 주어질 때에 개인적으로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였다. 사역자들은 집집마다 방문하는 개인적인 접촉을 통하여 그들이 공중 앞에서 가르친 사실들에 대해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특히 사역자들은 사람들이 진리를 자신들과 자신의 경우에 적용시킬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

다섯째, 그는 신실한 설교자였다. 그는 자신이 유익하다고 생각한 모든 것을 전했으며, 억제한 것은 전혀 없었다. 설사 유행에 뒤떨어지고 다소 인정받지 못할 것이라고해도 그가 유익하다고 생각한 것은 무엇이든지 주저하지 않고 설교하였다. 또한 그는 책망할 필요가 있을때 범죄의 무서움에 대하여 과감히 책망하였다. 그리고 그는 십자가가 유대인들에게는 장애물이 되며 헬라인들에게는 어리석음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 십자가에 관한 설교를 억제하지 않았다.

여섯째, 그는 보편적인 설교자였다. 그는 유대인과 헬라인 모두에게 증거하였다. 비록 그가 유대인으로 태어나 양육받고 이방인들에 대한 편견속에서 훈련을 받았으나, 그는 자신을 유대인에 한정하지도 않았으며 이방인들을 회피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는 이방인들에 대해서도 유대인들을 대하는 것과 똑같이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한편 바울이 이방인들의 사도로 불리게 되었으므로 유대인들은 그를 철천지 원수로 간주했다. 그러나 그는 그 사악한 자들을 포기하지 않았다. 사역자들은 편견없이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주적 교회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이기 때문이다.

일곱째, 그는 참된 기독교인인 복음전도자였다. 그는 철학적 개념이나 정치학을 설교한 것이 아니라 믿음과 회개만을 설교하였다. 그가 모든 경우에 강조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하나님께 대한 회개 : 바울은 회개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행 26:20)는 하나님의 위대한 명령(행 27:30)임을 설교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회개는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설교하였다(행 5:31).

②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 우리는 회개함으로써 우리의 궁극적 목표인 하나님을 향하여 바라보아야 한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 되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써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회개는 충분한 것이 못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구속자이시며 구세주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신앙을 간직해야 한다. 따라서 아버지께 죄를 회개한 탕자로서가 아니라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이다.

(2) 바울은 현재 예루살렘 여행길에서 당하게 될 고통과 역경에 대한 그의 예상을 이야기 한다(22-24절).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노라'(22절)는 바울의 진술은 다음의 두가지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1) 장차 다가올 고난을 예견한다는 의미 : 그는 고난받게 될 것을 분명히 예상했으며, 자신의 일상 업무를 그것에 대비하는 것으로 만들었다.

2) 강한 충동으로 인해 이 여행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의미 : 즉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전진하기로 결심을 굳혔으므로 나의 어떤 기분이나 계획에 따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갈 것이며, 그가 나를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나는 그를 따라갈 것이다". 특히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어떤 일들이 자신에게 닥칠 것인가를 알지 못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일들을 바울에게 계시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하나님을 고대하고 그를 열망하기 위해서는 미래의 사건들에 관한 한 무지의 상태속에 그냥 놔두는 것이 좋다. 우리는 장차 우리에게 닥칠 일들에 대해서 그리고 그 일이 낮인지 밤인지 아니면 몇 시에 닥칠 것인지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속해 있어야 하며, 그분을 우리와 함께 관련을 맺게 함으로써 우리를 그의 눈에 선하게 보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에게 폭풍이 닥칠 것을 대략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가 통과한 모든 성의 예언자들이 결박과 환난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성령을 통해 그에게 전했기 때문이었다. 바울은 용감한 영웅적 결의로써 그의 활동을 계속하기로 결심하였다. '결박과 환난이 바울을 기다리고 있다'는 침울한 울림소리가 각 성으로부터 그에게 들려왔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써 자신의 활동을 계속 진행할 수 있었다. 여기서 '이 모든 것들도 결단코 나를 사로잡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도 바울의 입에서 나온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바울은 여기서 다음의 세가지 모본을 보여주었다.

① 거룩한 용기와 결단 : 바울은 그 결박과 환난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그는 '이 모든 것들도 결단코 나를 사로잡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것들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러한 것들은 마음에 두지도 않았으며, 다만 그리스도와 하늘나라를 마음에 간직하였다. 이 결박과 환난은 바울 자신의 활동을 방해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폭풍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비틀거리면서 되돌아 간 것이 아니라 단호히 계속 진행하였다. 그것들은 바울에게서 마음의 평온함을 빼앗지 못하였다. 바울은 환난 중에서도 태연하였다. 천국에서 대화를 나눈 자들은 이 세상의 일상적인 고통뿐만 아니라 위협적인 격노와 지옥 자체의 악의에 대해서도 경멸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은 이 모든 것들이 자신들을 해칠 수 없음을 인식하면서 자신들을 사로잡을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② 생명에 대한 거룩한 경멸 :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24절). 생명은 감미로운 것이며 본래 우리에게 귀한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볼때 생명은 상대적으로 비열한 것이다. 즉 생명은 그렇게 귀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는 즐거운 마음으로 포기될 수 있는 것이다.

③ 생명의 사역을 완성할만한 거룩한 관심 : 이 생명의 사역은 삶의 형식적인 즐거움이나 외형적인 삶을 확보하기보다는 보다 큰 우리의 관심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 위대하고 선한 사람인 바울에게서 다음의 두가지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이 두가지를 확보하는 자는 삶속에서 어떤 일이 발생하더라도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 두가지는 다음과 같다.

㉠ 바울에게서 신실한 믿음을 찾아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즉 그는 주 예수를 영접함으로써 사역을 완수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세상으로 또는 교회로 파송됨으로서 사역을 수행할 수 있었다. 더구나 그는 자신의 사역을 불완전하게 수행해서는 안되었다. 사도직은 그리스도나 인간의 영혼에 있어서 하나의 사역이었다. 그러므로 사도로서 부름받은 자들은 사도직의 존엄성이나 지배권보다는 사도로서의 사역에보다 심혈을 기울여 왔다. 이 사역은 주 예수를 통하여 받게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사역을 사역자들에게 위임하셨고 그들은 그분에게서 자신들의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분의 이름과 힘에 의지하여 그분을 위한 사역을 수행해야한다. 이 사역의 활동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우리에게 베푼 하나님의 호의의 증거인 동시에 우리안에서 역사하시는 그의 선한 활동의 수단이다. 또한 그것은 그리스도가 은혜로운 분임을 우리에게 보여주며 우리를 은혜롭게 성장시킴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 되는 것이다. 바울은 단지 이 복음 지식을 전파하는 도구로서 사는 것을 만족스럽게 생각했다.

㉡ 바울이 자신의 임무를 잘 마쳤다는 사실이다. 그는 자신이 언제 어떠한 방법으로 죽게될 것인가에 대하여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길을 기쁨으로 마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생애를 길 또는 경주로 간주하였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에게 지정된 수고와 한계성을 보냄받은 것은 항상 이곳에 머물러 있기 위함이 아니라 세상을 통과하도록, 아니 세상을 헤쳐 나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로써 세상의 여정은 곧 끝나게 된다. 바울은 그의 여정이 끝나게 될 것을 기대하면서 그날이 가까운 장래에 도래할 것을 확신한다고 말한다. 죽음은 우리가 명예를 얻든지 불명예를 얻든지 간에 경주의 종착점이다. 바울은 그 경주를 잘 마치는데에 전적으로 관심을 쏟았다. 그는 아무리 엄청나고 감당하기 어려운 것일망정 그것을 완수하고야 말겠다고 생각한다. 이리하여 그는 기쁨으로 그 일을 잘 완수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우리의 생애의 사명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걱정없이 편안하게 죽을 수 있도록 환희에 찬 죽음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3) 바울은 이번 기회를 그들과의 마지막 만남의 기회로 간주하고 자신의 고결함을 그들의 양심에 호소한다.

1) 바울은 이제 그들과의 마지막 이별을 선포한다(25절). 내가 너희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지금은 너희가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줄 아노라. 여기서 바울은 에베소 사람들이 더이상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있게 선포한다. 우리는 스스로 확신하지 못한 사실을 그처럼 미심쩍게 선포한 바울이(22절 참조) 성령의 특별한 보증없이 자신있게 이 말을 전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만일 그가 재회의 불가능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면 그는 결코 '보라 내가 다시 보지 못할줄 아노라'고 엄숙하게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현재 우리에게 하나님나라를 전파하고 있는 자들이 조만간에 사라지게 될 것과 더이상 그들의 얼굴을 보지 못하게 될 것에 대해 종종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들과 우리와의 상면은 일순간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과 함께있는 동안 그들과의 관계를 증진시켜야 한다. 언젠가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들의 얼굴을 더이상 보지 못하게 되더라도 우리는 심판의 날에 기쁜 마음으로 그들과 상면할 것을 고대해야 할 것이다.

2) 바울은 그가 자신의 사역을 충성스럽게 수행하였음을 에베소 사람들에게 피력한다(26절).

① 그는 그들에게 자신이 언제나 신실했었음을 선언한다. 나는 모든 사람의 피, 즉 영혼들의 피에 대하여 깨끗하다. 또한 당신들은 내가 경고한 것외에는 말할 수 없다. 따라서 나는 그 누구의 피도 책임질 수 없다. 만일 어떤 사역자가 자신의 신실함을 입증했다면, 그는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해 내가 깨끗하니'란 말을 기쁨으로 간직할 수 있어야 한다.

② 그러므로 그는 파멸을 자초한 자들의 피를 내버려두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정중한 경고를 받고도 그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③ 그는 이 사역자들에게 그가 행했던 것처럼 관심을 갖고 수고할 것을 당부하였다. 그래서 그는 오늘 너희에게 증거하노니라고 말했다. 우리가 때로 하늘과 땅을 두고 호소하듯 여기서는 이 날이 이별의 날로 증거될 것이다.

3) 바울은 다음의 진술로써 자신의 신실성을 입증한다(27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 그는 그들에게 오직 하나님의 권고만을 전했으며 자신이 꾸며낸 그 어떤 말도 보태지 않았다. 그러므로 바로 그것만이 순수한 복음이었다. 복음은 하나님의 권고이다. 이 하나님의 권고는 계시된 것으로서 선포하는 것이 사역자들의 사명이다.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모든 권고를 전하였다. 그는 그들에게 복음을 순수하고도 온전한 것으로 전파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권고의 어떤 부분을 선포하는 것을 고의적으로나 계획적으로 회피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복음의 가장 난해한 부분과 가장 평이하고 쉬운 부분에 대한 설교를 거절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교리들을 과감하게 전파함으로써 기독교를 경계하는 대적자들의 감정을 유발하거나 기독교에 무관심한 교사들을 불쾌하게 하는 것에 개의치 않았다. 이로써 바울 자신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순결함을 간직했던 것이다.

(4) 바울은 그들이 사역자로서의 임무를 부지런하고 충성스럽게 이행할 것을 당부한다.

1)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돌볼 임무를 그들에게 위임한다. 그들의 숫자가 너무도 많았으므로 그들은 한 장소에 모일 수 없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여기서 그들이 한 떼로 지칭된 것은 그들이 하나의 신앙으로 일치되었을뿐 아니라 수많은 경우에 그들이 상호간의 친교를 간직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이 에베소 교회의 치리를 장로들에게 위임하면서 그들을 감독자 즉, 양떼의 감독으로 삼으신 분은 자신이 아니라 성령이심을 전하였다. 그는 "너희 장로들은 성령께서 택하신 감독자들이다"라고 말했다. 이제 그들은 깃털을 달았으므로 스스로 나는 방법을 배워야 하고, 바울없이 행동을 취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그들을 감독자로 삼으셨기 때문이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행 19:6). 그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께서 그들에게 이 위대한 과업을 수행할 수 있는 힘과 자격을 부여하셨다. 또한 성령께서는 부름받아 임명된 자들에게 기도에 대한 응답속에서 이 사역을 행하도록 지시하셨다.

2) 바울은 그들이 소명 받았던 사역을 상기할 것을 그들에게 명하였다. 의무에는 존엄성이 뒤따르는 법이다. 그러므로 만일 성령께서 그들을 양떼의 감독으로 삼으셨다면 그들은 진정한 신뢰를 지켜야 한다.

첫째, 그들은 처음 장소에서 자중하고 신중을 기해야 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많은 눈들이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 어떤이들은 당신을 본받기 원하지만, 다른 이들은 당신과의 싸움을 원한다. 그러므로 당신은 자중해야한다." 자기 소유의 포도원조차도 돌보지 않는 자들은 유능하고 충실한 타인의 포도원 관리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둘째,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해야 한다(28절). 사역자들은 자신들의 영혼을 돌볼뿐만 아니라 그들이 책임지고 있는 자들의 영혼에 대해서도 지속적인 관심을 지녀야 한다.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는 구절은 양떼 중 한마리도 우리밖으로 이탈하거나 짐승의 먹이가 되는 것을 막고 한마리도 잊어버리지 말 것을 당부한 말이다.

셋째, 그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육성시키고 그리스도의 양떼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해야 하며 그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모든 가르침으로 그들을 양육해야 한다. 또한 그들은 영생을 얻는데에 필요한 양식을 충분히 공급했는가를 보살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를 모으고 그 안에 있는 자들을 증대시킴으로써 그 교회를 육성시킬 목회자들이 필요하다.

넷째, 마치 목자가 밤마다 자기 양떼를 감시하듯 그들은 경계해야만 한다(31절). 따라서 그들은 양떼를 해칠 수 있는 모든 것을 경계해야 하며, 양떼에게 유익한 것이 될 수 있는 모든 것도 지켜보아야 한다.

3) 바울은 그들이 맡은바 사역의 사명을 명심해야 할 몇가지 이유들을 그들에게 제시한다.

첫째,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주인이신 주님의 관심과 양떼에 대한 바울 자신의 관심을 참작토록 하였다(28절). 교회는 바로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소유이며 당신은 그를 위해 교회를 돌볼 그의 종에 불과하다. 만일 당신이 맡은바 사역을 게을리 한다면, 당신은 하나님께 잘못을 범하는 것이므로 당신의 무관심과 반역의 죄는 실로 막중한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라면, 하나님은 당신이 그의 양떼와 어린양을 양육함으로써 당신의 그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기를 기대할 것이다. 하나님은 교회를 사셨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께 귀한 것이므로 우리에게도 소중한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님이 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사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교회를 섬길 수 있는 최상의 길은 그의 양떼와 어린양들을 양육하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교회는 그가 자신의 피로 사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를 양육하라는 말이 중요함은 그 교회를 위해 아주 비싼 대가가 지불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시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쳤는데, 하물며 그의 사역자들이 그것을 양육하는데에 관심과 수고를 아껴서야 되겠는가?

둘째, 그들로 하여금 양떼가 대적자들의 먹이로 넘겨질 위기에 대해 고려하도록 하였다(29,30절). 그래서 바울은 너희는 너희 자신들을 돌봄과 동시에 양떼들도 돌봐야 한다고 말했다. 자신들과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①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28절). 왜냐하면 먹이를 찾아다니는 이리가 돌아다니기 때문이다(29절). 그러므로 바울은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올 것을…내가 아노니'(29,30절)라고 말했다. 어떤 학자들은 그 상황을 핍박의 상황으로 이해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울과 함께 있었을때의 유대인들의 분노는 최고조에 달한 반면, 그가 그 지방을 떠났을때에는 유대인들이 침묵을 지켰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는 내가 떠난후에도 정녕코 핍박의 영이 여전히 활동하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사역자들은 핍박의 시기에 양떼에 대하여 각별한 관심을 갖고 돌봐야 한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유혹자들과 거짓 교사들을 파악하는 것이다. 바울은 의식법을 전한 할례받은 자들에게 시선을 돌렸던 것 같다. 왜냐하면 바울은 이들을 가리켜 흉악한 이리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바울이 에베소에 머물러 있던 동안에 그들이 바울을 멀리한 것은 감히 그를 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바울이 떠나버렸을때, 그들은 양떼속으로 들어갔다.

②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삼가라(28절). 그 이유는 일부 목자들이 변절할 것이기 때문이었다(30절). '너희 자신들에 대해서도 삼가라,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것이다'(28,30절). 그들은 복음에 대해 왜곡된 말을 유포시킴으로써 자신들의 잘못을 합리화 시킬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란 구절에서 자기라는 말은 이미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자들을 뜻하며, 그들이 다른 제자들을 그리스도에게서 끌어내어 자기를 따르도록 종용한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그러나 비록 에베소 교회에 몇몇 그러한 유혹자들이 있었다해도, 그 교회에 보낸 바울의 서신에서 볼때 그 교회는 다른 어떤 교회들처럼 엄청난 수의 거짓 교사들로 가득차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에베소 교회의 평화와 순결은 장로들의 수고와 경계의 덕택으로 하나님의 축복에 의해 보존되었다.

셋째, 그들로 하여금 바울이 이 교회를 개척할때 투자한 엄청난 수고를 참작케 하였다(31절).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바울은 충성스런 파숫꾼처럼 그들을 경고했으며, 경고로써 그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들을 설득하였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경고하였다. 즉, 그는 설교시에 행한 공적인 경고외에도 경고가 요구되는 그들의 상황을 목격했을때 자신을 특정 인물들에 적용시켰다. 그는 끊임없이 경고를 하였다. 그는 밤낮으로 경고하였다. 그래서 그의 일과 시간은 그의 활동으로 가득 찼다. 그는 지칠줄 모르고 활동하였다. 또한 그는 경고하는 것을 중단하지 않았다. 그는 의로운 자들이 그들의 의로부터 떠나지 말 것을 경고했으며, 그들이 사악해졌을때 그 사악함으로부터 벗어날 것을 경고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들의 영혼에 대하여 상당한 애정과 관심을 갖고 그들에게 말씀을 전했다. 그러기에 그는 눈물로 훈계했던 것이다. 그가 주님을 섬겼듯이 그는 많은 눈물로써(19절) 그들을 섬겼다. 이로써 그는 자신의 수고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런데 왜 그들은 과업을 수행하는 일에 자신들의 수고를 아껴야 한단 말인가?

(5)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지시와 감화를 받도록 권면한다(32절). 그는 "형제여 이제 내가 그대를 하나님께 부탁하노니"라고 말한다. 바울은 그들에게 신앙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지시하면서 하나님이 그들을 은총의 눈으로 보살펴 주실 것을 간구한다.

1) 여기서 바울이 그들을 누구에게 부탁하였는지를 살펴보자. 바울은 그들을 하나님께 부탁하면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해 주실 것을 하나님께 간청한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 그들의 모든 염려를 맡기도록 그들을 다음과 같이 격려한다. "너희가 무엇을 원하든지 간에 하나님께로 나아가라. 모든 것에 풍족하신 하나님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곧 너희의 위로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 누구와 이별한다해도 항상 하나님을 우리 곁에 모시고 있다. 바울은 주의 은혜의 말씀으로 그들을 부탁한다. 어떤 학자들은 이 주의 은혜의 말씀을 그리스도로 이해한다. 즉, 그리스도는 말씀이시다(요 1:1). 여기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으로 칭한 이유는 우리가 그의 충만함을 통하여 넘치는 은혜를 받을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들을 하나님과 그의 섭리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에 부탁하였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그의 은혜의 말씀에 비추어 이해한다면 상당히 비슷한 결과가 나올 것이다. 즉, 여러분이 하나님의 섭리를 의지하는 능동적인 신앙을 통해서 많은 위로를 얻게될 것이지만, 복음의 약속을 의지하는 능동적인 신앙을 통해서는 더욱 많은 위로를 얻게될 것이다. 바울은 그들의 소망과 기쁨의 원천일 뿐 아니라 삶의 규범이신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그들을 부탁한다. "나는 너희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그의 은혜의 말씀에 너희를 부탁하노라. 이 말씀의 교훈을 음미하고 그 말씀의 약속을 의지하는 삶을 영위하기 바라노라."

2) 여기서 바울이 그들을 하나님의 은총의 말씀에 부탁한 이유를 살펴보자.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은총의 복음을 받았고 그것을 전파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제 바울이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의 말씀을 권고한 것은 그들을 더욱 고양시키기 위함이었다.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32절). 이미 아무리 훌륭한 은사를 받았다해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러므로 그 은사에 대한 더욱 정통한 지식을 습득하며 많은 감명을 받아야 한다. 사역자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함양을 추구해야만 한다. 가장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성장할 수 있다.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32절)는 말은 그들의 영광을 칭송하는 내용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은 기업을 주실뿐만 아니라 그것에 관한 지식과 약속도 함께 주신다. 그것은 거짓일 수 없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그러므로 은혜의 성령은 말씀을 통하여 약속에 대한 보증으로 주어진다(행 10:44). 천국은 모든 상속인들에게 파기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한 하나의 기업이다. 이 기업은 오직 거룩함을 입지 못한 자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손님으로 환영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실상 천국은 결코 그들의 것이 될 수 없다. 전능한 권세와 영원한 진리만이 존재하는 천국은 다만 중생하여 거룩함을 입은 모든 자들만의 소유가 될 것이다. 우리가 현세에 거룩함을 입은 자들 가운데 서있지 못한다면, 결코 내세에 영광을 입은 자들 가운데 서 있기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6) 바울은 그들에게 자기 자신을 이세상과 무관한 본보기로서 제시한다. 그는 하나님께 그들에게 최상의 축복인 영적 축복을 내려주실 것을 간구 했다. 그러나 그들은 가족들을 위한 양식을 간구 할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일들에 관한 한 내가 행했듯이 행하라고 말한다.

1) 바울은 결코 세속적인 부를 추구하지 않았다.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33절). 에베소에는 부자와 잘 차려입은 자들이 많았다. 바울에게는 그들과 같은 삶을 영위하려는 야심이 전혀 없었다. 우리는 바울의 이 말을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엄청난 금과 은을 소유할 욕심이 전혀 없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그들을 비난하거나 시기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엄청난 생계비가 없이도 편안하고 유익하게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는 궁핍함과 굴욕이 어떤 것인가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들로부터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원한 적이 결코 없었다. 오히려 그는 탐욕을 제거하려고 항상 간구하였다. 그는 "내가 누구에게 짐을 떠맡겼는가?"라고 말했다.

2) 바울은 자신의 생계를 위하여 일했고 빵을 얻기 위해 엄청난 수고를 하였다.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당하여(34절). 때로 바울은 생활을 유지하는데에 필요한 생필품들을 줄여 나갔다. 바울과 같은 인물을 그토록 가난하게 살도록 방치한 이 세상이야말로 얼마나 무심하고 불친절하며 배은망덕한가! 그는 최소한의 생필품을 공급받기를 원했다. 빵을 얻어야만 했을때 바울은 수공업으로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는 돈을 벌 수 있는 두뇌와 언변을 구비하였으나 그가 말한대로 자신의 생필품을 조달한 것은 그의 두 손이었다. 그는 장로들(그리고 그들과 함께한 다른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상기시킴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나태한 생각을 갖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들은 사람들에게서 작은 용기를 얻게될 것이다. 바울은 자기 자신과 그와 함께한 자들의 생계 유지를 위하여 일했다. 이 일은 사실상 고된 것이었다. 바울을 위해서 그들이 일하는 편이 더 나았다. 그러나 그것은 상황이 그러하였다. 따라서 힘든 일을 기꺼이 담당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해야할 일을 마땅히 하는 자들을 그들 주위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

3) 바울은 그의 생필품을 조달하기 위해 일하면서도 남을 구제하기 위해 자신이 벌어들인 수입의 일부를 절약하였다. 본문에서 그는 이 일에 대해 '내가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한다'(35절)고 당부한다. 우리는 이 말을 병든 자, 가난한 자, 실업자의 생계를 도와주어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이 말이 바울의 권면과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엡 4:28). 우리는 생활을 영위하면서도 남에게 줄 수 있는 정직한 직업을 갖고 수고해야 한다. 이것은 매우 실천하기 어려운 말처럼 들린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말 뒤에 우리 주님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이것은 매우 훌륭한 말씀인 동시에 그 속에는 역설적인 어떤 것이 담겨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35절).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큰 축복이다. 다시 말해서 가난하게 되어 받는 손(모든 사람이 이에 속할 것이다)보다는 부자가 되어 주는 손길 위에 더 큰 축복이 임할 것이다. 또한 재산이 많든지 적든지간에 그 소유를 더 불리고 증식시키는 사람보다는 그것을 갖고 선행을 베푸는 자에게 더 큰 축복이 임할 것이다. 이 세상에 속한 자녀들의 느낌은 이와 대조적이다. 즉 그들은 주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들은 항상 받기만을 희망한다. 깨끗하게 벌어들인 수입은 그들에게 주어진 최대의 축복일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우리는 이 말씀대로 행함으로써 모든 것을 내어주시고 아무것도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께로 좀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 또한 이리하여 우리는 선행에 힘쓰시는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가 수고의 대가를 받기보다는 수고를 제공하는 것이 더 복된 일이다. 또한 감사할 줄 아는 자에게 선을 베푸는 일은 무척 기쁜 일이지만, 감사할 줄 모르는 자에게 선을 베푸는 일은 더더욱 영광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우리의 급료 지불 책임자로 모실 수 있기 때문이다.

 

Ⅴ. 바울과 장로들 사이의 작별 20:36-38

여기서 우리는 에베소 장로들에게 행한 바울의 고별 설교후에 작별의 기도와 석별의 눈물을 보게 된다.

(1) 바울과 장로들은 기도로써 작별했다(36절). 이 말을 한후 무릎을 꿇고 저희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하니. 이 기도는 합동으로 드린 기도였다. 바울은 그들을 위해 기도했을뿐만 아니라 '저희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하니' 라는 본문의 기록대로 함께 기도드렸다. 공개적인 기도회는 우리 자신의 은밀한 기도 형식을 바꾸어 오히려 그들을 고무시키고 격려하도록 계획되어야 한다. 그 기도회 는 겸허하고 경건하였다. 이 기도회에서 그들이 취한 자세가 다음과 같이 표현되었다. 즉 '무릎을 꿇고 저희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하니'(36절)라는 말은 찬양과 간구, 특히 죄의 용서를 비는 간구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설교후에 행한 기도였다. 바울은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그 교회를 돌볼 것을 당부한 후에 이러한 중책을 위임받은 그들이 충성스럽게 맡은바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드렸다. 또한 그는 양떼들을 위하여 양떼를 지키는 위대한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을 돌보아 주실 것과 그들이 흉악한 이리의 먹이가 되는 것으로부터 보호해 주실 것을 간구하였다. 그리고 그는 사역자들에게 그들이 전도한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당부하였다. 이것은 작별의 기도였다. 바울과 장로들이 작별할때 서로 한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로써 작별의 정을 나누었듯이, 친구들간에 서로 작별할때에도 작별의 기도를 나누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다.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본을 따랐다. 그리스도 역시 제자들과 헤어질때 그들에게 설교하고 난후에 그들과 함께 기도를 드렸다(요 17:1).

(2) 바울과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은 눈물과 사랑에 넘치는 격정적인 포옹으로 작별을 고했다(37,38절). '그들은 모두 크게 울었다'(37절). 그들과 함께 있던 동안에도 간혹 눈물을 흘린 바울은(19,31절) 작별시에도 역시 많은 눈물을 흘렸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그들이 흘린 눈물이다. 즉 그들은 모두 크게 울었다. 그들 중에서 눈물을 흘리지 아니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이 흘린 눈물은 사랑과 상호간의 친애의 눈물이었다. 본문에 '바울이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37절)라고 기록되었다.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자들은 일반적으로 최고의 사랑을 받게 마련이다. 친구를 가장 소중히 아끼고 사랑했던 바울에게는 그를 매우 아끼고 사랑한 친구들이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38절)는 바울의 말이 가슴에 사무쳤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다시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을 것이라는 말과 현재 바울과 주고받는 이 인사가 마지막 작별이란 말을 들었을때 커다란 슬픔을 맛보아야 했다. 우리는 친구들이 죽어서 우리의 곁을 떠날때 바울의 이 말을 회상하게 된다. 그 친구들의 얼굴을 더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우리의 슬픔을 한층 격양시킨다. 그러나 우리는 전혀 희망이 없는 사람처럼 이 사실을 한탄해서는 안 된다. 비록 이 세상에서는 그들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없지만, 더나은 세상에서 그들을 다시 볼 수 있다는 희망과 그곳에서 주님과 영원히 살아갈 것이라는 소망을 간직해야 한다.

(3) 그들은 바울을 배에까지 전송하였다. 왜냐하면 그와 잠시라도 같이 있으면서 대화를 나누고 그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흔히 작별 인사를 나눌때까지도 이별을 못내 아쉬워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 작별은 바울과 에베소 교인들 모두에게 있어서 하나의 위로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떠나는 바울과 머물러 있는 그들 모두에게 임재하셨기 때문이었다.

  

# 해설

마게도냐에 재방문한 바울 ( 20 )

누가는 바울의 제3차 전도여행을 간략하게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의 오랜 사역을 마치고 마게도냐로 떠났습니다. 이곳 뿐만 아니라 바울은 여러 지역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고린도에 석 달을 머물면서 로마서를 쓰기도 했습니나. 드로아와 밀레도에서의 설교는 바울의 전도자로서의 마음 자세를 엿볼 수 있게 합니다.

 

1. 바울의 에베소 작별

1) 마게도냐와 그리스

바울은 여러가지의 목적을 가지고 마게도냐로 떠났습니다. 그렇지만 마게도냐에서의 바울의 모습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육체적인 어려움과 안팎으로 당하는 많은 환난과 다툼으로 인해 많은 두려움을 겪었습니다. 바울은 마게도냐로 가기 전에 드로아에서 디도를 만나 고린도 교회의 소식 듣기를 갈망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드로아에서 디도를 만나지 못하고 계속 여행해서 마게도냐에서 디도를 만나 고린도 교회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염려한대로 많은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후서를 써서 디도편으로 보냈습니다. 디도가 고린도후서를 가지고 고린도로 떠난후 바울은 마게도냐 지방에서 그해 가을과 겨울을 지낸 것 같습니다. 이때에 바울은 일루리곤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후 바울은 고린도에 도착하여 거기서 석달을 머물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머물면서 로마서를 썼습니다. 로마서는 바울의 장래 계획에 대한 약간의 자료를 제공해 줍니다. 바울은 오랫동안 로마에서 복음 전하기를 갈망해 왔습니다. 그는 또한 서바나로 가는 그의 장기적인 복음전도 계획의 전진 기지로 로마를 사용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그 계획이 성취되지 못하고 막혀 있었습니다.

a.바울의 고난(딤후3:11)

2) 유대인들의 음모

애당초 바울의 계획은 분명히 겐그레아 항구에서 배를 타고 유대로 항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생명을 노리는 유대인들의 음모를 알고서, 그와 누가는 이 항로를 취소하고 다른 항구에서 항해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그의 동료들은 겐그레아에서 드로아를 향해 출항해서 거기서 그를 기다렸습니다.

a.음모의 원인(마27:18)

3) 바울의 동행인들

누가는 바울과 함께 동행했던 사람들을 일곱 사람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여러 교회의 대표들로서 바울이 늘 관심을 두었던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위한 헌금을 운반했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의 동행에서 세사람은 마게도냐에서 왔고(소바더, 아리스다고, 세군도), 넷은 소아미아에서 왔습니다(가이오, 두기고, 디모데, 드로비모). 이들은 바울과 드로아에서 만나기로 하고 그곳에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과 누가는 육로로 북쪽을 향해 빌립보까지 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드로아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바울은 닷새 만에 드로아에 이르러서 동료들과 함께 만나 이레를 머물렀습니다.

a.소시바더(롬16:21)

b.드로비모(딤후4:20)

 

2. 드로아에서의 설교

1) 드로아의 교회

드로아에는 교회가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만일 본문의 청중들이 바울과 함께 항해할 일행들이었다면, 그처럼 깊은 밤까지 강론을 계속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드로아 교회는 아마도 사울이 에베소에서의 사역을 마무리할 즈음에 세워진 것으로 보입니다(참조, 고후2:12). 드로아에 갔을 당시 바울은 심령이 편치 못한 일이 있었지만, 잠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기회를 가졌었습니다. 그런데 2년이 지난후 다시 그곳에 갔을때 거기서 만난 제자들을 보고서 이전 그의 전도의 열매가 나타난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a.말씀 전파(눅9:2)

2) 바울의 설교와 유두고

바울은 드로아에서 지체하며 유대로 갈 적당한 배를 기다렸습니다. 그들이 드로아에 머물렀던 마지막 날은 주일이었습니다. 동행들은 그날 저녁 드로아의 교인들과 함께 떡을 떼기 위해 모였습니다. 이 지역의 그리스도인들로서는 아마 마지막으로 바울과 지내게 될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의 긴 강론을 경청했습니다. 그때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졸음때문에 삼층 누에서 떨어져 죽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그 몸을 끌어안자 생명이 돌아왔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넘쳤음은 물론입니다.

a.주일(고전16:2)

b.떡을 뗌(행2:42)

 

3. 밀레도에서의 바울의 고별 설교

1) 앗소에서 밀레도로

분명히 바울은 원래 계획보다 드로아에 오래 머물렀습니다. 지연됨을 보충하기 위해 그는 나머지 일행들을 미리 보내고 자신은 육로를 통해 앗소로 갔습니다. 그리고 앗소에서 미둘레네, 기오 그리고 밀레도로 배를 타고 갔습니다. 바울은 가능하면 오순절까지는 예루살렘에 도착하려고 서둘렀습니다. 그래서 에베소를 거치지 않고 밀레도에 이른 것입니다. 그는 사람을 보내어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그곳으로 오게 했습니다.

a.오순절(민28:26)

b.장로(딤전4:14)

2) 밀레도에서의 바울

바울의 전갈을 받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은 바울을 보고 싶은 간절한 일념으로 밀레도로 달려왔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목회에 필요한 권고를 했습니다. 바울의 설교 처음부분은 바울이 에베소에서의 자기 생활을 회고하는 내용입니다. 그가 에베소에서 얼마나 혼신의 힘을 다해 사역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책임은 바울에게서 그 메시지를 들은 사람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또한 자기가 가려고 하는 예루살렘에 환난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친구들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주신 사명을 마쳐야 한다는 단호한 결심을 보이게 됩니다. 바울은 장로들에게 그를 본받아서 계속 교회를 돌보는 일을 해야함을 권고했습니다. 바울은 장차 교회밖에서 원수들의 공격과 교회안에서 거짓 교사들의 해악이 있을 것을 예고하고, 그들의 지혜와 정성이 필요함을 상기시키며 그들과 교회를 은혜의 말씀에 부탁했습니다.

a.사명 전수(딤전5:21)

 

결론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은 바울이 새 신자들에게 쏟던 관심과 그가 교회를 위해 일했던 정신을 본받아야 했습니다. 바울은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하나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과 하나님 나라를 전파, 하나님의 뜻을 다 전하였음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임종을 앞두고 그가 하나님 앞에 드렸던 고백을 연상케 합니다. 과연 교회를 섬기는 사역자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게 합니다.

 

# 핵심

20:1-12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을 둘러본 후 예루살렘으로 가려했다. 그러나 고린도에서 유대인들의 살해 위협에 처한 그는 왔던 길을 되돌아 드로아에 이르렀다.

바울의 에베소 사역 기간(20:31)

바울은 자신이 에베소에서 3년간 사역했다고 증거한다. 그러나 19:8-10절에는 2년 3개월간 사역한 것으로 나와있다. 따라서 양자는 모순된 듯이 보인다. 하지만 바울이 에베소의 유대인 회당에서 3개월, 두란노 서원에서 2년간 사역하기까지는 몇개월의 준비 기간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즉 그 기간 동안 사람들로부터 상당한 호감을 샀기때문에 장기간의 본격적인 전도사역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준비 기간과 본격 사역 기간을 합하면 도합 3년간 에베소에서 지냈다는 결론이 나온다.

 

# 묵상

바울의 선교 방향 전환 ( 20:3 )

바울은 수리아로 가려다가 마게도냐로 돌아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였기 때문입니다. 당시는 로마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감이 컸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때에 바울이 로마인임을 자처하며 복음을 전하였기에 유대인의 눈에는 바울이 로마와 합작한 민족적, 종교적 반역자로 보였을 것입니다.

일정을 서두른 바울 ( 20:16 )

바울은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려고 아시아에서 오랫동안 지체하지 않으려 서둘렀습니다. 이처럼 바울이 오순절 절기를 지키려고 노력한 것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고해서 예루살렘 교회를 소홀히 한다는 인상을 주지않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오순절은 예루살렘으로 몰려오는 유대인과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좋은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에베소에서 바울이 청한 사람들 ( 20:17 )

바울은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했습니다. 이것은 에베소 교회를 향한 바울의 평상시의 관심과 사랑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초청받은 이들은 에베소 교회를 대표하는 사람들로, 바울은 그들에게 고별 설교와 권면을 하기위해 그들을 청한 것입니다.

바울의 복음전도 자세 ( 20:20 )

바울은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앞에서나 각 집에서 거리낌없이 전하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대적자들에게 고난을 받고, 신변의 위협을 받았지만 복음을 전하는 그의 자세는 언제나 당당했습니다. 그런데 성령은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는 결박과 환난이 기다린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이처럼 바울은 인간적으로는 자신에게 위협이 다가옴을 알았지만 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이 있는한은 생명조차 아끼지 않고 끝까지 감당할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바울의 권면 ( 20:28-30 )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행한 권면은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많은 신자들이 장로들을 바라보고 있기때문에 장로들 스스로가 언어와 행실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는 것은 신자들이 세상이나 우상숭배의 유혹에 넘어지지 않도록 잘 돌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교회안에 흉악한 이리가 나타나 양떼를 아끼지 않으며,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것을 예견했습니다. 이는 복음에 상반되는 말을 하거나 복음을 왜곡시켜 자기들이 존경받고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근심하며 바울을 전송한 에베소 장로들 ( 20:38 )

이들이 근심하며 바울을 전송한 이유는, 다시는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이라는 바울의 말 때문입니다. 이러한 말을 들은 장로들은 바울의 섬기는 모습, 집회를 주재하는 모습, 따뜻한 충고와 위로를 주는 모습을 더이상 볼 수 없음을 슬퍼하며 근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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