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udy

 

Ⅰ. 더둘로의 송사 24:1-9

우리는 천부장 루시아가 대제사장들에게 바울을 따라 가이사랴로 갈 것과 거기에서 그들의 고소를 들어줄 재판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1) 우리는 본문에서 바울에 대한 고소의 진행 경위를 대하게 된다. 재판은 지체없이 곧 시작되었다. 왜냐하면 고소인들이 5일만에 재판에 필요한 준비를 끝냈기 때문이다. 바울은 본문에서(11절)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간지 열이틀밖에 되지 않았고 또한 성전에서 결례하는데 칠일을 소비하였다고 말하였다. 바울의 재판자였던 자들이 본문에서는 바울의 기소자로 나타난다. 즉 대제사장인 아나니아 자신이 바울을 기소하려고 일어서고 있다. 이와 같이 아나니아가 자신을 욕되게 하고 그의 지위의 신성함을 망각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이렇듯 아나니아는 직접 자기 자신을 밝히며 바울을 대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아나니아는 자신이 바울에 대해 서원한 적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장로들은 자신들이 아나니아를 지지한다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해 그와 함께 가이사랴로 왔다. 이렇게 약한 자들도 악을 도모하는데에 수고하며 지칠줄 모르는데 우리가 선한 일을 하는데에 무관심하고, 냉담해서 되겠는가.

(2) 우리는 본문에서 바울을 대적하는 송사의 내용을 대하게 된다. 기소자들은 자신들과 함께 더둘로라고 불리는 어떤 변사를 데리고 왔다. 그는 로마인이므로 로마 총독앞에서 송사하는데에는 적임자였다. 그는 총독으로부터 최상의 지지를 얻어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악의로 가득차 있었지만 날카로운 어투로 조리있게 말할 수 없었다. 바울은 법정에서 총독 벨릭스 앞에 앉았다. 그는 소환되어 이 자리에 앉게 되었다(2절). 더둘로의 임무는 기소자들을 대신하여 바울을 반박하는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의 변론은 아첨과 거짓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의 말은 악을 선이라, 선을 악이라고 하는 것과 같았다.

1) 여기에서는 가장 악한 인간 중의 하나가 단지 그가 재판관이라는 사실때문에 가장 훌륭한 후원자로 치하되고 있다. 유대 역사가인 요세푸스뿐만 아니라 로마 역사가들은 베릭스를 매우 사악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벨릭스는 온갖 죄악을 자행하였으며, 매우 잔인하고 탐욕스러운 폭군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 더둘로는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이름으로 벨릭스를 찬양하고, 마치 그가 이제껏 볼 수 없었던 가장 훌륭한 행정 장관인 것처럼 그를 추켜세웠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벨릭스를 이용한 것은 바울에 대한 그들의 적의를 충족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그들은 벨릭스가 역대 총독들 중 그들의 교회와 민족을 위해 공헌한 가장 훌륭한 총독이었다고 아부했다.

①그들은 벨릭스에 대한 이러한 찬사를 주저없이 인정하고자 한다(2절). 천부장이 앞에서 말했듯이, 벨릭스도 한때는 애굽인의 폭동을 진압함으로써 유대인에게 공헌한 적이 있기는 했다(행 21:38). 그러나 높은 지위의 사람들의 불행은 그들의 결점이 결코 정확히 지적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이로인해 그들은 무감각해져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악을 자행하게 된다. 그들은 아첨하는 관리들과 같은 사악한 무리들에 의해 그릇된 정책을 시행함으로써 점점더 나쁜 길로 빠져드는 것이다.

②그들은 벨릭스의 은덕에 대해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겠다고 약속한다(3절). 그들은 더둘로를 통해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당신의 은덕에 감사무지 하옵나이다'(3절)라고 말한다. 그가 진실로 그들이 말한 것과 같은 총독이었다면 당연히 그들은 이같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의 선정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우리가 정부로부터 은덕을 입은 경우, 특히 현명하고 선량한 통치자의 행정에 의하여 은덕을 입었을 경우에는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과 인간에게 감사드리지 않으면 안 된다.

③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이 송사에 대한 벨릭스의 호의를 기대하고 있다(4절). 그들은 벨릭스의 시간을 뺏지 않으려고 대단히 조심하는체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우리가 대강 여쭈옵나니 관용하려 하여 들으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한다(4절). 그들은 자신들이 너무 의식적으로 적의를 가진 것이 곧 드러날 것이기 때문에 교묘히 벨릭스의 환심을 살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모든 사람들은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벨릭스를 미워하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바울을 없애려는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그에게 온갖 아첨을 다하였다. 통치자들은 백성들의 칭찬에 의해 자신이 그들로부터 항상 호의를 받고 있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아첨과 진실한 충성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2) 가장 선한 사람들 중의 하나가 본문에서는 가장 나쁜 악인으로 비난받고 있다. 더둘로는 갖은 미사여구로 아첨을 한후, 그의 용무를 말하고 있다. 우리는 앞에서 그의 지나친 아첨으로 치를 떨었지만, 이번의 그의 발언에서 보이는 지나친 야유는 우리로 하여금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처럼 기지가 넘치고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 말을 팔아먹고 산다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또한 그로 하여금 이러한 말을 내뱉게 한 위엄있는 사람들인 대제사장의 무리에게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본문에서 더둘로는 다음의 두가지 점을 벨릭스에게 고소한다.

①바울이 그 나라의 평화를 교란시켰다고 고소한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그리스도의 사도들을 짐승과 같은 나쁜 사람들로 누명을 씌우지 않고서는 그들을 괴롭힐 수 없었다. 순수함이라든가 탁월함, 혹은 유익함은 비방에 대한 방책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통치자들과 군중들은 곧잘 비방하는 말에 현혹되어 미쳐 날뛰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비록 부당한 사실일지라도 엄숙하고 확신에 찬 모습으로 정당한 것처럼 주장하면, 본문에서처럼 그것은 그럴듯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는 이 사람이 위험한 인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의기양양하게 "우리는 그가 위험 인물임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함으로써, 그 말이 진심인양 받아들이게 한다. 그들은 마치 바울이 반역자이고 이미 그의 반역이 확정된 것처럼 말했다. 바울은 유익한 사람으로 그 나라에 커다란 축복을 가져다 준 사람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이 법정에서 염병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5절). 즉 전염병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바울이 당시의 전염병보다 더 큰 해로움을 자기들에게 준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바울이 끼친 해로움이 널리퍼져 남까지 감염시킨다고 생각했다. 즉, 그들은 그를 염병처럼 두려워하고 경계해야할 인물로 간주하였다. 바울은 화평케 하는 사람이었으므로 자신이 평화롭고 조용하게 살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또한 그렇게 살도록 가르쳤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들은 그를 온세계에 퍼져있는 모든 유대인들을 소요케 하는 자로서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본래 유대인들은 로마 정부를 증오하였다. 벨릭스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제 그들은 바울이 그들을 소요케 선동하는 자라고 믿도록 벨릭스를 속이려 하였다. 유대인들은 바울이 가는 모든 곳에서 폭동을 일으켰고, 그리고는 모든 책임을 부당하게 바울에게 씌웠다. 그러나 바울은 관대하고 자비로운 사람이었고, 자신을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한 종으로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들에 의해 나사렛 이단의 괴수로 고소당했다. 이제 바울이 기독교를 전파하는데 있어서 활동적이며 지도적인 인물이 되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로 나타냈다.

그러나 첫째, 바울이 전한 종교가 이단이라고 말한 것은 전적으로 거짓이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다. 그러므로 기독교를 바리새인 종파와 같은 종류의 종파로 편견을 가지고 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참된 기독교는 인간을 하나되게 한다. 만약 기독교가 인간들의 마음에 정당한 영향력을 행사할때 그것은 인간들을 평화롭게 서로 사랑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무질서의 씨를 심고 분열을 야기하는 교파와는 거리가 멀다. 참된 기독교는 세상적인 이익이나 편의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전혀 교파로 불리울 수 없는 것이다. 교파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부와 명예를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은 그들에게 귀중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잃어버림으로써 자신들을 드러낸다.

둘째, 그들은 바울의 종교를 부당하게 나사렛 이단으로 불렀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나사렛 출신, 즉 선한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전혀 기대할 수 없는 곳이었던 나사렛 출신이라고 야유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메시야가 태어나리라고 예언된 베들레헴 출신이었다.

셋째, 바울을 이 종파의 창시자요 주동자라고 한 것은 잘못이었다. 왜냐하면 바울이 사람들을 자기에게 오게 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오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바울은 성전을 숭배하였으며, 최근에도 경건하게 성전에서 봉헌을 드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 그들은 바울을 성전을 더럽게 하는 자라고 고소하였다(6절).

②그들은 바울에 대한 정당한 재판 진행이 천부장에 의해 방해를 받았다고 고소했다. 그들은 '바울을 데려가 그들의 율법에 의하여 재판하고자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이었다. 그들은 바울을 율법에 따라 재판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그를 때려죽이거나 찢어 죽이려고 하였고, 숨어서 기다리는 악당들의 손에 그를 넘겨 죽이려고 하였다. 그들은 천부장의 체면을 손상시켰다. 그것은 그들이 '천부장 루시아가 우리에게 와서 우리의 손으로부터 바울을 강제로 빼앗아 갔습니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7절). 박해자들이 실망에 봉착해서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가를 보라.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데 대하여 감사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 잔인한 사람들은 자기들을 정당화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손으로 피를 흘리게 하려는 계획으로부터 그들을 지켜준 천부장을 오히려 그들의 적으로 생각하였다. 그들은 그 문제를 벨릭스에게 알리고, 천부장이 자신들로 하여금 벨릭스에게 고소하도록 강요하였다고 했다. 그래서 그들은 "천부장이 그의 피고인을 당신에게 가도록 명하매 당신이 고소의 내용을 듣게끔 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당신에게 바울을 심문하도록 하였고, 당신이 그를 제거하는 수고를 하도록 하였습니다"(8절)라고 말하였다.

(3) 더둘로가 제기한 고소에 대하여 유대인들이 승인하고 있다. 유대인들도 이제 참가하여 이 말이 옳다 주장하니라(9절). 어떤 학자들은 그들이 이 말을 함으로써 그들의 고소의 정당성을 맹세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히려 그 말은,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더둘로가 말한 사실을 동조하였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 말주변이 없어서 다른 사람들처럼 말로써 신앙을 공박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행한 것을 인정함으로써 그들의 행악의 책임을 자신들이 떠맡는다. 많은 사람들은 바울을 변호할만큼 충분한 지식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을 위해 표를 던지기에 충분한 사악함은 지니고 있다.

 

Ⅱ. 벨릭스 앞에서 변명하는 바울 24:10-21

우리는 본문에서 바울이 자신을 변호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로써 우리는 제자들에게 하신 그리스도의 약속, 즉 그들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왕과 통치자들 앞에 설때, 그들에게 말할바를 알려 주겠노라고 하신 말씀이 성취된 것을 볼 수 있다. 비록 더둘로가 바울을 분노하게 하는 장황한 말을 늘어놓았지만, 바울은 그의 말을 막지 않았고 그의 말을 끝까지 경청하였다. 그리고 그는 더둘로가 말을 마쳤을때에도 재판장이 자기에게 말할 것을 허락할때까지 기다렸다. 총독이 바울에게 머리로 표시하여 말하라 하니(10절). 바울은 더둘로를 전혀 비난하지 않았다. 그는 더둘로를 고용한 사람들에 대해 자신의 변론을 전개했다.

(1) 바울은 총독에게 경의를 표하였다. 바울의 증언에는 더둘로가 총독에게 비위를 맞추려고 한 것과 같은 아첨의 말이 전혀 없었다. 바울은 총독을 공정한 재판관으로 대우하면서 그의 면전에서 "내 사건에 대하여 기쁘게 변명하나이다"라고 말하였다. 또한 바울은 자신의 결백에 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사람처럼 말하였다. 그는 법정에서 떨면서 서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편파적이지 않으며 자신과 무관한 재판관에게 재판받게 된 것을 매우 기뻐하였다. 그는 그의 재판관을 보고 '당신이 여러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 된것을 내가 알고 내 사건에 대하여 기쁘게 변명하나이다'라고 말했다(10절). 이 말은 매우 진실한 것이었다. 총독 자신은 이전에 바울에 대한 어떠한 기소도 제기된 일이 없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바울은 지금까지 결코 총독앞에 끌려간 적이 없었다. 따라서 바울은 위에서 언급된 것처럼 위험스러운 죄인은 아니었다. 총독은 그들이 자기들을 따르지 않는 모든 사람을 배격하는 맹렬한 열성가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총독은 바울의 재판에 이 사실을 참작하였다. 비록 그는 바울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고 있지 않았지만, 그를 기소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바울이 어떤 인물일 것이라는 추측은 하고 있었다.

(2) 바울은 자기에 대해 고소했던 내용의 근거를 부인했다. 소요를 선동하고 성전을 더럽혔다는 것이 바울이 기소된 죄목이었고, 기소자들은 이러한 죄목이 로마 총독이 심문할 성질의 것이 아님을 알았다. 그러나 바울은 설사 총독이 그 죄목에 대하여 심문하지 않더라도 그 죄목으로 불공평하게 기소된 자신을 총독이 보호해 주기를 원하였다. 이제 바울은 총독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이해시키고자 한다.

1) 바울은 평화와 경건함 속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려고 예루살렘에 왔다는 것이다. 바울은 유대인들과 계속 친교를 나누려고 그곳에 간 것이지 그들을 모욕하려고 간 것은 아니었다.

2) 바울이 예루살렘에 와 있은지는 단지 열이틀에 불과했다고 말한다. 그중 6일은 그는 죄수로 있었다. 그러므로 이처럼 짧은 시간에 그들이 고소한 그러한 잘못을 그가 저지를수 있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3) 바울은 자기가 예루살렘에서 매우 조용하고 평화롭게 행동하였다고 말한다. 만일 바울이 모든 유대인들 가운데서 소요를 일으킨 주모자라면, 그는 예루살렘에서 파당을 지으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바울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성전에 있었다. 또한 바울은 율법이 낭독되고 강연되는 회당에 있었다. 바울은 그 성에 거주하는 자기의 친척들과 친구들을 만났다. 그들은 바울의 신앙이 잘못되었다거나 혹은 유대 교회의 평화를 어지럽힌다는 어떤 증거를 제시하여 바울을 고소할 수 없었다.

①바울은 소요의 주동자들이 지닌 투쟁적인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바울이 다른 사람과 다투는 것을 결코 본적이 없었다. 바울은 어느 누가 자기의 소망의 근거를 요청한다면 자기의 소망의 근거를 말하고, 다른 사람에게 가르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종교에 대하여 결코 어느 누구와도 다투려고 하지 않았다.

②바울은 거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을 결코 내가 사람들과 불화를 일으킨 것을 보지 못하였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답게 사랑과 온유함을 지니고 행동했고 또한 로마 당국에 복종하였다. 바울은 육적인 것을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무기로 삼고자 생각하지도 않았을뿐만 아니라 그렇게 말한적도 없었다.

4) 그들이 바울을 기소한 다른 내용, 즉 그가 다른 지방에서 소요를 일으켰다는 내용에 대해 그 자신은 전적으로 무죄라는 것과 그들이 그 기소를 자신들에게 이롭게 할 수 없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13절). 그러므로 그는 '이제 나를 송사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저희가 능히 당신 앞에 내세울 것이 없나이다'라고 말하였다(13절). 바울은 자기의 무죄를 계속해서 주장한다. 바울은 결코 공공의 평화의 적이 아니었다. 바울은 자신이 처한 재난, 즉 그들이 자기에 대하여 어떠한 반대 증언도 할 수 없는 일들로 기소되었음을 개탄하였다. 그러나 선한 사람들이 이같은 해를 당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또한 그들이 전혀 행한 적도 없고, 생각하기도 싫어하는 일로 그들이 비난받게 되는 일도 흔히 있는 일이다. 바울은 자기의 박해자들의 불법행위, 즉 그들이 알고는 있으나 그것을 증명할 수는 없다고 말하는 그들의 부당성을 제시한다. 또한 그들의 허위 기소는 바울의 명예와 자유와 생명을 훼손하였을뿐만 아니라 재판관을 모욕하는 일이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쓸데없는 일로 재판을 열게 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총독에게 재판의 공정성을 호소하고 있다. 재판은 반드시 진술뿐만 아니라 증거에 따라 공정하게 판결되어지지 않으면 안된다.

(3) 바울은 자신에 대하여 공정하고도 정직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의 설명은 자신을 박해하는 자들의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를 밝혀 주고 있다.

1) 바울은 자신이 그들이 이단으로 간주하는 자임을 인정한다. 천부장이 그랬듯이 총독은 바울의 기소자들이 충분한 증거도 없이 그에 대하여 이상할 정도로 격노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소동으로 볼때, 무언가 바울에게 죄가 있고 또 바울이 아주 나쁜 인간임에 틀림이 없다고 추측하였을 것이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그들의 기소 이유를 해명한다. 그들이 이단이라고 부르는 도를 쫓아 나는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14절). 하나님을 숭배하는 올바른 길이 이단이라고 불리운 것은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명을 쓴다고해서 어떤 옳은 길을 포기해서는 결코 안되는 것이다.

2) 바울은 이러한 비난에 대해 자신의 정당성을 변호한다. 그들은 바울을 이단이라고 부르지만, 바울은 그렇지 않다.

①바울은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그러므로 예배의 대상에 있어서 그는 옳았다. 바울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즉 그들에게 계약을 맺도록 이끄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바울은 그 계약을 고수하고 그것에 반대되는 다른 어떤 것도 주장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나의 모든 조상들이 숭배했던 하나님을 나는 숭배한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바울은 신앙의 오랜 전통을 찬양했고, 그 신앙의 고백자들이 끊임없이 계승되는데 대하여 긍지를 느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함에 있어서 그를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으로 부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대단히 위안이 되는 일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그들의 하나님이심을 증명하셨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조상들이 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섬긴다면, 그분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어 주실 것이다.

②바울은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니'라고 말했다(14절). 그러므로 그의 예배하는 방법 또한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바울은 성경을 완전히 받아들이되 그것을 순수하게 받아들였다. 바울은 어떤 다른 믿음의 방법이나 실행에 기초를 두지 않고, 단지 성경에만 의존하였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바울은 하나님의 계시에 믿음의 근거를 두고 있었으며 그 계시에 따라 살다가 죽을 것을 결심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결코 이단이 아니었다.

③바울은 미래의 세계를 그의 목표로 삼는다. 그러므로 그의 예배의 목표 또한 올바른 것이다. 이단을 추종하는 자들은 이 세상에 관심을 가지지만, 바울은 천국을 그의 신앙의 목표로 삼았고, 거기에서 더이상 치우침이 없었다(15절).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다. 나의 소망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지 이 세상을 향한 것이 아니다. 나는 하나님과 그의 권능에 의지하며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믿는다"라고 말한다. 태초부터 종말까지 모든 사람들의 죽은 몸은 부활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현재 생명이 끝날때 또다른 생명을 얻게될뿐 아니라 또 다른 세계까지도 향유할 것이다. 그때에 의인과 악인이 부활하게 될 것이다. 거룩한 자나 거룩하지 못한 자가 다같이 부활할 것이다. 우리의 구세주께서는 믿음으로 산 사람들에게는 생명의 부활이, 악을 행한 자에게는 저주의 부활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최후의 심판때의 부활을 의미한다. 의로운 자는 그들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상태로 부활하게 될 것이고, 불의한 자는 그들의 심판관으로 서시는 그리스도의 지배하에 부활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의 부활을 주재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가졌으며, 하나님 안에서 부활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것은 오로지 전능하신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죽은 자의 부활은 그것이 유대 교회의 기본적인 조항이 된다. 그들 역시 부활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복음에 의해서 더욱 명확하게 계시되었다.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에 있어서 우리는 죽은 자의 부활이 있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을 가지고 그때에 받을 보상을 기대하면서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 안된다.

④바울은 헌신적인 교제로 일관했다. 이것으로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16절). 바울의 이같은 주장은 전에 그가 대제사장 앞에서 행했던 것과 똑같은 취지의 내용이었다(행 23:1). 그는 그때에도 '나는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고 말했다(행 23:1).

㉠바울의 목적과 소망 : 그것은 거리낌이 없는 양심을 가지는 것이다. 즉, 이 말은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첫째, 죄를 범하지 않는 양심 : 즉 나에게 악을 가르쳐 주지 않으며 무슨 일에든지 나를 그릇 인도하지 않는 양심을 지니고자 애써왔다는 뜻이다.

둘째, 죄를 범한 적이 없는 양심 : 이 말은 내가 결백한 양심을 지닐 것을 소망한다는 의미이다. 즉 "나는 내가 늘 사귀는 친구에게 거리낌이 없도록 애쓴 것처럼 나도 내 양심에 거리낌이 없도록 주의했다"라는 뜻이다.

㉡이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바울의 신중함과 노력 : 나는 힘쓰노라. 즉 나는 거리낌이 없는 양심을 지니는 것을 내 평생의 과제로 삼을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이렇게 사는 사람들을 고행자라고 하는데, 이 말은 여기에서 유래된 용어이다). 또한 그는 "나는 내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 것이다"라고 말했다.

㉢바울의 애씀의 정도 : 그는 항상 힘썼다.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16절). 바울은 자신이 아직 완전함을 성취하지 못하였다는 사실과 과거에 저질렀던 잘못을 아직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다. 의지의 박약에서 비롯되는 죄들의 염치 불구한 건방진 죄를 오염시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비록 죄가 양심을 침범할지라도 양심에 머무르지는 못하도록 항상 경계하지 않으면 안된다. 또한 그는 모든 일에 대해 양심에 거리낌이 없도록 힘썼다. 즉 그는 하나님과 인간에 대해 양심에 거리낌이 없도록 힘썼다. 바울의 양심적인 배려는 그의 의무 전반으로 확산되었다. 바울은 하나님과 자기의 이웃에 대한 사랑의 법을 깨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행동할때 하나님과 인간에 대해 어떤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의 이러한 애씀의 동기 : 이것으로 인하여. 이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나는 죽은 자의 부활과 앞으로 도래할 세계의 생명을 믿기때문에' 이와 같이 힘쓰노라.

(4) 바울은 자신의 신앙을 고백한후, 자신의 처지와 자신을 박해하는 자들의 부당한 행위에 대해 솔직히 설명하고 있다. 또한 바울은 자신의 유죄를 증명할 증거를 제시하라고 그들에게 도전하였다.

1) 성전 안에서의 그의 행동에 대하여 : 그들은 여기서 바울을 자기들의 나라와 성전에 대한 적으로 맹렬히 몰아세웠다(행 21:28).

①바울을 그들의 민족에 대한 적으로 기소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민족을 구제하기 위하여, 즉 예루살렘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왔기 때문이다. 바울은 유대인들에 대해 어떠한 악의도 품지 않았다. 그는 그들에게 모든 선한 일들을 행하고자 했을뿐이었다.

②성전을 모독한 죄였다는 이유로 바울을 기소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때 바울은 제물을 가지고 와서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기 때문이다(행 21:24).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율법에 따라(18절) 결례를 행하였고 모임도 없고 소동도 없이 조용히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적들인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은 그가 대중을 선동하여 소동을 야기시켰다는 그 어떤 증거도 찾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바울은 자신을 위해 전혀 군중을 선동하지도, 소란을 일으키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기소 내용을 증명하라고 반박한다(19절). 그래서 그는 '저희가 만일 나를 반대할 사건이 있으면 마땅히 당신앞에 와서 송사할 것이요'라고 반문하고 있다.

2) 법정에서의 그의 태도에 대하여 : 바울은 여기서 '그렇지 않으면 이 사람들이 내가 공회앞에 섰을때에 무슨 옳지 않은 것을 보았는가 말하라 하소서'라고 반문하고 있다(20절). 그는 또 그가 공회에 섰을때 말했던 것은 오직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앞에 심문을 받는다'(21절)는 말 한마디뿐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말에 대해서 사두개인들외에는 어느 누구도 나를 비난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스스로 이단이라고 칭하는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유대 교회가 신앙하는 것을 나 역시 따랐기 때문이다."

 

Ⅲ. 가이사랴의 감옥에 갇힌 바울 24:22-27

(1) 벨릭스는 이 소송을 연기했다(22절). 벨릭스는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그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이상으로 유대인들이 이단이라 부르는 도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하나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기독교가 들리는 것처럼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기소자들의 기소를 연기하였다.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거든 너의 일을 처결하리라(22절). 즉 "나는 그를 통하여 진실을 알아보아야겠다. 과연 바울이 소란을 일으킨데 대한 벌을 받아야할 것인지, 아니면 너희가 소란을 일으키고 바울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 것인지 내가 그의 말을 들어보고 너희 사이를 판단하리라."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바울이 정죄되지도 않았을뿐만 아니라 자기들에게 재판권이 넘어오지도 않은 점에 대해 여간 실망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와 같이 때때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대적하는 자들의 분노를 백성들과 친숙한 자들을 통하지 않고 그들에게 전혀 낯선 사람들을 사용하심으로써 제지시킨다. 벨릭스가 바울을 석방시키지 않은 것은 그에 대한 모욕이었다. 벨릭스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도 모르고 인간을 존중할 줄도 모르는 재판관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그에게서 선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2) 벨릭스는 죄수 바울을 수감하여 억류하였다. 그러나 벨릭스는 바울과 같은 활동적인 인물에게는 많은 친구들이 있다는 점을 참작하여 바울이 친구들과 만나는 것과 그들이 바울을 위해 수종드는 것을 허용해 주었다. 벨릭스는 백부장에게 바울을 계속해서 죄수로 가두어 지키라고 명령하였지만(23절) 그를 자유로운 죄인으로 취급하게 했던 것이다. 따라서 바울을 지키는 자는 그에게 자유를 허용하고, 그의 구류 생활이 가능한한 편하도록 조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바울에게 생활의 자유가 허용된 것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벨릭스는 그에게 얼마간의 자유를 허용하는 관용을 베풀었다. 또한 그는 바울의 친구들 중 아무나 바울에게 오는 것을 방해하지 말라고 명령하였다. 만약 감옥에서도 친구들을 자유로이 만날 수 있다면, 인간의 감옥도 집과 마찬가지로 편안할 것이다.

(3) 공개 재판후, 벨릭스는 종종 바울과 사담을 나누었다(24,25절).

1) 벨릭스가 바울을 불러낸 목적 : 벨릭스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도에 관하여 바울과 다소 이야기를 나눌 마음이 있었다. 즉 벨릭스는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에 관하여 자신이 공개법정에서 할 수 있었던 것보다 더 자유롭게 바울과 이야기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단지 그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었거나, 아니면 헤롯 아그립바의 딸로서 유대인이었던 그의 아내 드루실라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녀는 유대의 종교적 풍토속에서 교육받았기 때문에 기독교라는 종교에 관하여 더욱 호기심이 많았다. 그러나 그녀가 어떤 종교에 속해있건 그것은 그녀에게 큰 문제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종교가 무엇이건 간에 그녀는 그 종교에 저촉되는 수치스러운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유대 여인이면서도 간음을 행하였으며, 무례한 여자로 유명했다. 종교에 대한 새로운 견해나 이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오히려 그러한 사람들일수록 종교의 권능과 영향력에 순종하기를 꺼려했다.

2) 바울이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벨릭스에게 설명해준 내용 : 벨릭스는 신비로 가득한 신성문제를 논함으로써 즐거움을 얻고자 기대했다. 그러나 그는 실제적인 신의 모습을 대함으로서 오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리스도 신앙에 대한 강론을 요청 받았을때 바울은 의와 절제와 장차오는 심판에 대해서 합리적으로 강론하였다. 즉 바울은 의와 절제와 장차오는 심판에 대하여 분명하면서도 부드럽게 강론하였던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믿음은 사람들에게 의와 절제에 대한 위대한 법을 지키도록 촉구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의와 절제는 이교도 도덕가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덕목이다. 만약 바울이 설교한 가르침이 의와 절제의 의무에서 벨릭스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었다면, 그는 기꺼이 그 가르침을 포옹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기독교는 의와 절제의 의무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 신성한 법의 의무를 강조한 것'이라고 말한다. 바울이 의와 절제를 강조한 것은 벨릭스에게 그의 불의와 무절제를 확신시키려 한 것이다. 벨릭스는 자기의 죄의 추악함과 그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진노를 깨달았다. 따라서 그는 기독교를 받아들일 결심으로 그리스도 신앙에 관해서 물어보았어야 옳았던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의해 도래할 심판에 대해 알고 있다. 벨릭스가 그랬듯이, 사람들은 이 세상이 자기들의 것인양 활보하고 싶지만, 곧 하나님의 날이 임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바울의 강론의 요점에 관한 이러한 설명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①바울은 설교중에 듣는 사람에게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염두에 두었다.

②바울은 설교중에 인간의 양심을 목표로 삼았으며,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죄를 볼수 있도록 인도하였다.

③바울은 자신의 안전보다는 영혼들의 구제와 그리스도에 대한 봉사를 우선적으로 내세웠다.

④바울은 자기의 사명을 수행하다가 직면하는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고자 하였고, 선을 행할수 있는 아주 작은 가능성 조차도 놓치지 않았다. 벨릭스와 드루실라는 아주 뻔뻔스러운 죄인들이었으므로 바울의 설교에 의해서 회개한다는 것은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에 대해 단념하지 않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비록 파수꾼이 그들이 지키는 영혼의 구원에 실패했더라도, 마땅히 그 영혼에게 경고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영혼만이라도 구원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3) 바울의 설교가 지위는 높지만 사악한 벨릭스에게 끼친 영향 : 벨릭스가 두려워하여(25절). 벨릭스는 깜짝 놀랐다. 바울은 벨릭스앞에서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으나, 벨릭스는 바울앞에서 두려워하였다. 드루실라도 역시 똑같은 죄인이었지만, 본문에는 그녀도 두려워하였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보자.

①하나님 말씀의 권능 :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구석구석을 들추어 내고 깜짝 놀라게 하며, 가장 거만하고 대담한 죄인의 마음까지도 공포로 떨게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②자연적인 양심의 작용 : 양심이 자극을 받아 각성될때, 그 양심은 영혼으로 하여금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게 한다. 도래하는 심판을 예상케하는 것은 가장 완강한 마음이라도 떨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4) 바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안간힘을 쓰는 벨릭스 : 벨릭스는 바울을 기소한 자들에 대해 재판을 연기하였듯이, 바울의 말을 나중에 듣기로 결정하고 미루었다.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25절). 그는 두려워 벌벌 떨수밖에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자극을 받지만, 그것에 의해 효과적으로 변화되지는 못한다. 그리고 죄의 결과에 대해 두려워하면서도 죄와 동맹하여 죄를 사랑하기를 계속한다. 벨릭스는 바울의 확신에 대적하여 싸우지 않았다. 벨릭스는 바울의 경고를 다른때로 연기함으로써 그의 확신에 찬 말을 고의적으로 회피하였다. 그는 빚을 못갚은 채무자처럼 다른 날로 연기해줄 것을 간청했던 것이다. 바울 자신도 말을 하느라 힘이 빠져있었고, 또 그의 말이 벨릭스와 그의 아내를 피곤케 했으므로 벨릭스는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고 말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절호의 기회를 놓침으로써 그들이 확실히 만족해할 모든 유익을 잃고 만다. 벨릭스 역시 그때의 바울의 설득에 고개를 돌려버림으로써 그가 얻게될 모든 유익과 함께 그 자신마저도 영원히 잃고 말았다. 우리의 영혼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연기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스러운 일이다. 흔히 우리는 그 문제를 좀더 적당한 때에 생각하자고 미루게 된다. 그러나 그때가 되면 식어져서 흔적도 없어져 버린다. 벨릭스는 이 문제를 좀더 적당한 때로 연기하자고 하지만, 우리는 그에게 그때보다 더좋은 기회가 온것을 보지 못했다. 의심할 여지없이 지금 이 시간이 가장 적절한 때인 것이다.

(4) 벨릭스는 바울을 죄수로 억류한채 이년후 자기가 총독직에서 파직될 때까지 구류하여 두었다(26,27절). 벨릭스는 바울이 죽임을 당하거나 결박당할 아무런 죄가 없음을 자신의 양심으로 확신하면서도 그를 석방할만한 용기를 지니고 있지 못했다. 우리는 이제 본문에서 벨릭스가 무슨 목적으로 바울과 대화를 나누려고 하였는가를 간파하게 된다.

①그는 바울을 이용하여 돈을 벌려고 하였다. 그가 바울을 석방하지 않은 것은 바울의 친구들이 바울의 자유를 사기위하여 마침내 돈을 지불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벨릭스는 재판으로 돈을 벌수 없다면 재판관으로서의 자신의 의무를 행할 마음이 없었다.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26절). 벨릭스는 이러한 기대를 가지고 바울을 죄수로 구금하였으며, 또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였다. 벨릭스는 바울의 의향을 떠보기 위해 바울에게 자주 사람을 보내었으며 바울이 그것을 기회로 자신의 석방을 위해 얼마를 지불해야 하는가 물어오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벨릭스가 전에 다른 적절한 때에 좀더 듣겠노라고 바울과 자신에게 약속했던 말을 상기한다.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바울에 의해 돈을 버는 것이었을 뿐이다. 벨릭스는 바울이 가난한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바울의 안전을 바라는 사람중에 돈으로 그를 도울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바울이 자신의 석방을 위해 벨릭스에게 돈을 지불하지 않은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의 친구들이 그를 석방하기 위해 돈을 쓰려하지 않은 것이 합당한 처사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다고해서 부정한 일을 위해 사람을 매수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약 그가 의당해 주어야할 공의로운 일인데도 돈을 받지않고는 해주지 않으려 한다면, 내가 그에게 돈을 주어서 그 일을 이루려 한다고해서 잘못이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마땅히 그 의무를 이행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 책임은 그들에게 있는 것이다. 바울이 지금 갇혀있는 가이사랴의 기독교인들은 그가 감옥으로 끌려가려 할때 눈물로 만류하였던 자들이었다(행 21:13). 그런 사람들이 바울의 석방을 돕기위해 자신들의 돈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전혀 수긍이 가지 않는다. 물론 이렇게 한다고 해서 벨릭스가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뇌물을 받아야 옳은 일을 하는 재판관은 의심할 여지없이 뇌물만 주면 나쁜일도 행할 사람인 것이다.

②벨릭스는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위해 바울을 석방하지 않았다. 벨릭스는 이 일이 있은지 약 이년후에 정부로부터 소환당했다. 그대신 보르기오 베스도가 그의 후임으로 부임했다. 벨릭스는 바울을 가두어둔 채로 떠났다. 그 이유는 유대인을 기쁘게 하기위해서였다. 그는 더이상 유대인들의 비위를 거스리지 않기위해 계속해서 바울을 죄수로 억류해 놓았으며, 또한 자기가 유대인들의 뜻을 반대하여 저지른 많은 잘못을 보상하려는 의도에서 그를 계속 가두어 두었다. 이와 같이 어떤 비열한 짓을 행한 자들은 자신들의 죄과를 은폐시키기 위하여 더 나쁜 짓을 하게 된다. 그러나 벨릭스가 그러한 조처를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가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의 그러한 조처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그를 황제에게 고소하였다. 선을 행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목표로 삼는 것을 얻을수 있지만, 악을 행함으로써 사람들을 기쁘게 하여 자기 목적을 이루려는 자들은 실패하고 말 것이다.

 

# 해설

벨릭스 총독앞에 선 바울 ( 24 )

바울은 이제 가이사랴에서 로마 병정들의 보호아래 유대인들의 폭행으로부터 안전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가이사랴에서 2년 간의 감금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동안 그는 존경을 받고 방문객을 맞을 수 있었으며 그의 복음 전도의 소명을 감당할만큼 자유를 누리면서 지낼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기억했고 말씀의 성취를 인내하며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1. 유대인들의 송사

1) 대제사장 아나니아의 고소

산헤드린은 정식으로 바울에 대한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그들의 고소 내용은 바울이 신성한 성전을 모독했기 때문에 이 사건은 법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장로들과 함께 이 고소 내용을 보다 잘 진술하려고 변사인 더둘로를 고용하기까지 했습니다.

a.아나니아(행23:2)

b.유대인의 장로(막15:1)

2) 더둘로의 송사

더둘로는 벨릭스에 대한 아첨으로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벨릭스는 백성들을 억압하여 자기 세력을 확장하는데만 열중하는 부도덕한 사람으로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둘로의 진술은 수사학적 표현으로 시작했으나 그 내용은 무능하고 비겁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바울에 대한 고소의 내용은 엄격하게 말하면 유대 총독의 소관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더둘로는 바울을 유대인을 소요케 하고, 나사렛 이단의 괴수이며 성전을 모독했노라고 고발했습니다. 그러나 이 고소 내용은 후에 바울이 로마에서 재판을 받게될 일을 암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더둘로의 고소를 듣고 유대인들은 이 송사의 내용이 옳다고 주장했습니다. 그후에 바울은 답변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a.거짓말의 정의(요일2:21)

b.거짓 증인(잠25:18)

 

2. 바울의 세번째 자기 변명

1) 소요에 대한 변명

바울의 서론은 간단하고 진실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벨릭스가 정확한 판단을 내릴만큼 유대의 상황을 잘 알고 있으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에 대한 고소 내용을 차례 차례 부인하고 적극적으로 자신에 대하여 증언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변호에 몇 가지 요점을 두었습니다. 첫째, 그는 소요를 일으킬만큼 예루살렘에 오래 머물지 못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머무는 목적중 하나는 예배 즉, 오순절을 지키려 함이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바울을 비난하는 자들조차도 그가 그 도시에서 소요를 일으켰음을 예증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거짓 진술을 말하고 성전에서 소요를 일으킨,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 고소자들이 여기에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를 통해서 그들의 고소가 얼마나 근거없는 것인지를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입장에서 소동을 일으킨 유일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부활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한 것으로 산헤드린 공회원들 사이에 불화를 조성한 것뿐이었습니다.

a.예배의 자세(요4:24)

b.하나님의 전(출25:8)

2) 바울의 신앙고백

바울은 더둘로가 '나사렛'이라고 지칭한 것을 이단이 아니라 '도'라고 일컬었습니다. 이 도는 이스라엘 조상들의 믿음을 조금도 감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소망을 성취시켰습니다. 바울은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모든 것을 믿었고 그 글들이 복음을 명백히 증거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교를 유대인의 정통 신앙에서 빗나간 이단으로 규정하였으나, 바울은 구약의 예언과 신앙은 예수님을 통하여 완성되는 것임을 주장했습니다. 바울은 또한 이전에 산헤드린 앞에서 그랬듯이 벨릭스 앞에서도 부활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항상 양심에 거리낌없기를 힘쓰노라고 고백했습니다. 그의 구제와 헌금에 대한 언급은 매우 관심을 끄는데, 이것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해 2년간 준비한 헌금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 헌금을 전달하는 목적도 설명하고 있습니다.

a.믿음(롬4:18)

b.영원한 소망(골1:5)

 

3. 바울과 벨릭스

1) 소송의 연기

총독 벨릭스는 기독교 신앙과 바울이 기독교 운동의 지도자로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약간 알고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조상들을 고려해 볼때, 그가 그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알았다는 것은 의외의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일에 대한 한 가지 가능성은 그가 그의 아내인 드루실라로부터 이 지식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벨릭스는 일단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면 일을 처리하기로 하고 이 소송을 연기했습니다. 그리고는 바울을 감금하여 두었습니다. 벨릭스는 바울이 무죄라는 것을 확신했지만 석방을 유보시켰던 것입니다. 벨리스는 바울이 구제 헌금을 갖고 왔다는 것을 알았고, 따라서 뇌물을 써서 석방되기를 원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2년의 기간 동안 자유를 누리며 친구들의 방문을 받을수 있었습니다. 벨릭스는 바울 사건에 대한 결정을 연기하다 결국 자신은 로마로 소환을 받게 되고 바울은 그의 후계자에게 맡겨집니다.

a.구제 헌금(고후8:2)

b.뇌물을 좋아하는 자(시26:10)

2) 벨릭스와 바울의 강론

가이사랴의 감옥생활이 바울에게는 자유로웠습니다. 친구들의 방문뿐만 아니라 가이사랴의 생활에 종종 지루함을 느끼고 있는 벨릭스와 드루실라에게 기독교 신앙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두사람에게 정말 필요한 의와 절제와 장차올 심판에 대해 강론했습니다. 바울과 이런 대화를 나눈 벨릭스는 바울에게 자유를 주었지만 뇌물을 바라고 바울 사건을 처리하지 않고 연기하다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총독직에서 파면되어 로마로 소환되어 갔습니다. 요세푸스는 이 일이 가이사랴에서 발생한 유대인과 이방인간의 분쟁을 과잉 진압함으로써 많은 희생자를 냈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a.의를 행함(고전15:34)

b.죄의 자각(행2:37)

 

결론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임금들과 많은 사람들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때로는 소망마저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주님의 말씀은 성취되었고 성취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메시지에서 바울의 담대함의 비결을 생각해 봅니다. 그는 복음을 따라 살았고, 마땅히 해야 할 말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주님을 두려워하는 삶이 그 비결이었던 것입니다.

 

# 핵심

24:1-9

유대교 지도자들이 변사 더둘로를 내세워 벨릭스 총독에게 바울을 정식 고소하는 장면이다.

 

# 묵상

총독앞에서 바울을 고소하는 사람들 ( 24:1-9 )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어떤 장로들과 변사 더둘로를 데리고 내려와서 총독에게 바울을 고소했습니다. 변사 더둘로는 바울을 가리켜 염병에 걸린 자요, 유대인을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고 했습니다. 더둘로는 로마법과 로마어에 능통한 로마인으로, 바울을 기소한 자들에게 삯을 받고 대신 송사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물질에 눈이 어두워 정의는 내동댕이친채 악을 선의 자리에, 선을 악의 자리에 놓으며 총독에게 아첨의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공의의 하나님은 불의를 미워하시며 불의에 대해서는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바울의 이같은 죄목은 유대 경건주의자들의 예수님에 대한 입장을 단적으로 말해 줍니다. 우리는 이에 지혜롭게 복음으로 대처해야 합니다.

바울에 대한 더둘로의 증언 ( 24:5 )

더둘로는 바울을 염병에 걸린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들은 바울이 위험 인물인 것을 강조하기 위해 붙인 말들입니다. 이단의 괴수라고 한 것도 바울이 자기 자신을 좇으라고 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쫓으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는 바울 ( 24:14-22 )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이단의 괴수라고 하는 고소에 반박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가졌고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믿으며, 이로 인하여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고 역설했습니다. 이렇게 바울은 의연한 자세로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면서, 이것이 종교적 문제일뿐 법정에 설 일이 아님을 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벨릭스는 이들의 송사를 천부장 루시아가 처리하도록 연기했습니다. 벨릭스는 천부장의 편지를 통해 사건의 진상을 잘 알았으면서도 자신의 임기동안 큰 일을 치르고 싶지 않은 안일한 태도와 뇌물에 대한 욕심때문에 판결을 연기하였던 것입니다.

벨릭스와 바울 ( 24:24-27 )

벨릭스가 바울을 자주 불러 이야기를 나눈 배후에는 돈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법은 죄수에게서 금품을 받는 것을 금하고 있었지만, 부패한 관리들은 기회가 있는대로 금품을 받았습니다. 벨릭스는 바울이 제물을 가지고 왔다고 말했으므로 바울에게 돈이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17절). 그로부터 2년후 베스도가 총독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벨릭스는 가이사랴에서 유대인과 헬라인이 자주 충돌하는 것을 다스리지 못하고 유대인의 마음을 잡지 못하는 등의 실정(失政)으로 인해 총독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 것입니다.


'사도행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도행전 26장 - study  (0) 2019.03.22
사도행전 25장 - study  (0) 2019.03.21
사도행전 23장 - study  (0) 2019.03.21
사도행전 22장 - study  (0) 2019.03.21
사도행전 21장 - study  (0) 2019.03.2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