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udy

 

Ⅰ. 바울의 이달리야 여행 27:1-11

1. 바울이 이달리야로 행선하게 된 경위(1,2)

바울이 로마로 가는데에는 긴 항해 이외의 다른 방도가 전혀 없었다. 그는 가이사에게 호소했었으므로 가이사에게 가야만 했다. 우리가 배타고 이달리야로 갈 일이 작정되매(1절). 바울이 로마로 가야만 한다는 사실은 베스도와 협의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결정된 것이었다. 왜냐하면 바울의 로마 여행은 하나님이 그를 거기로 데려가서 시키실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의 호송 책임자는 아구스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이었다. 그는 수하에 군대를 거느리고 바울을 감시하였다. 그가 승선한 선박은 아프리카의 항구에 정박중이던 아드라뭇데노 배였다(2절). 그리고 그의 항해에 동행한 사람들은 죄수 몇명과 백부장과 같이 호송 임무를 담당한 군인들이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처형될때 강도들과 함께 계셨던 것처럼, 바울도 이 죄수들과 동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과 이 항해동안 운명을 같이 하지않으면 안되었다. 또한 우리는 뒤에서 바울이 그들때문에 죽임을 당할뻔했었음에 반해 그들은 그가 위험에 처했을때 자신의 몸만 보존했음을 보게 된다(42절). 그러나 바울은 특히 누가와 같은 친근한 동료들과도 동행했는데, 그것은 그가 우리는 이달리야로 항해했다 라든가 '우리가 올라 행선 할때'등을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2절).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는 여기서 그의 동료로 특별히 언급되고 있다. 이런 지루한 여행에 몇몇 동료들과 함께 교제를 나눈다는 것은 바울에게 커다란 위안이 되었다. 긴 항해를 하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지혜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속에 있는 사악한 무리들을 교화시켜 선을 이루거나 그렇지 못하면 적어도 그들로 하여금 사악함에 물들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2. 그들의 항로와 정박(3-9)

그들은 이튿날 시돈에 정박했다. 백부장 율리오는 의외로 바울에 대해 호의적으로 행동했다. 이 사실에 비추어 볼때 아마도 그는 아그립바 앞에서의 바울의 송사에 대해 듣고 그 결과 그에게는 죄가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던 '성중의 높은 사람들 중'의 한사람이었던 것 같다(행 25:23). 그는 바울을 죄수로 호송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친구로서 그리고 교양과 인격을 갖춘 훌륭한 사람으로 대우했다. 바울은 친절히 대하여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받음을 허락하더니. 여기서 율리오는 권력자들에게 존경할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은 존경해야 한다는 본보기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여기서 하나님은 그를 위하여 고난을 겪는 사람들에게 그를 믿으라고 격려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전혀 기대도 하지않던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그들로 하여금 호의를 베풀게 하실수 있기 때문이다. 더우기 이같은 백부장의 호의는 바울의 신실함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즉, 바울은 결코 탈출을 도모하지 않았던 것이다. 백부장이 바울을 친절하게 대한만큼 바울은 자신의 약속을 지키는데 바르고 정직하였다. 그들은 그후에 '구브로 해안을 의지하여 행선하였다'(4절). 만약 순풍이 불었더라면 그들은 구브로 섬의 우측을 향해했겠지만 바람이 순조롭지 못했기때문에 그들은 측면의 바람을 의지하여 구브로 섬의 왼편을 돌아 항해해야만 했다. 선원들은 그들이 바람으로 인해 배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는 경우에는 목적지가 어디이든간에 그 바람이 최적의 상태가 되었을때 이동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이라는 대양을 건너가는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바울의 일행은 무라 항구에서 배를 갈아탔다. 거기서 그들은 이달리야로 가는 알렉산드리아 배에 승선했다(5,6절). 알렉산드리아의 항구에 입항할때, 급히 돛을 내리지 않아도 되었던 것은 그들에게 베풀어진 특별한 호의 때문이었다. 바울의 일행은 그곳을 떠나 간신히 그레데 섬의 한 항구인 미항에 이르렀다(7,8절). 그들은 천천히 여러날 동안 항해했다. 그들이 니도에 이르는데에는 많은 시간을 허비했으며, 전에 구브로에서처럼 그레데 섬을 의지하여 행선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레데 섬의 동해안에 돌출해 있는 살모네곶 앞을 지나는데 숱한 난관을 겪어야만 했다. 지금까지의 그들의 행선에서 심한 폭풍우는 없었더라도 그것은 매우 지겨운 항해였다. 이와같이 불운에 빠졌으나 자신의 일을 포기할수도 없으며 그렇다고 앞으로 진척시킬만한 행운도 얻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은 다만 서서히 인생 항로를 항해해 갈 뿐이다. 또한 행운의 섭리가 작용한다고해서 빨리 나아갈수 있는 것도 결코 아니다. 이러한 난관을 뚫고 그들이 안착한 곳은 미항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그곳은 현재도 그렇게 불리고 있으며, 그 이름은 그곳의 경치와 전망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곳은 그들의 행선의 목적지가 아니었다. 그 항구는 아름답기는 했으나 그들이 거할 곳은 못되었다. 왜냐하면 그곳은 '겨울을 날만한 항구'가 못되었기 때문이다(12절). 아름다운 항구라해서 모두 안전한 것은 아니다. 가장 즐거운 곳이 가장 위험스러운 장소가 될수도 있기 때문이다.

3. 바울의 충고 내용(10,11)

그것은 일행의 안전한 월동에 관한 것이었다. 그들은 역풍과 싸우는동안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따라서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항해는 이제 매우 위험하게 되었다. 금식일은 이른바 속죄의 날로 유대인들의 유명한 연례 절기였다. 이 절기는 유대력으로 7월 10일에 준수됐으며 양력으로는 9월 20일이 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우리는 성서 전반을 통해 이 절기를 준수했다는 언급을 찾아볼 수가 없다. 다만 여기의 언급에서 알수 있는바는 그것이 오직 계절을 구분하기 위해 쓰여지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선원들은 미가엘 제일(祭日)을 다른 어떤 때보다도 바다에서 행선하기에 좋지않은 날로 간주하고 있다(미가엘 제일은 9월 20일로 영국의 사게 지불일 중 하나임-역주). 이런 연유로 바울은 다음과 같은 말로 일행들에게 위험을 경고했다.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행선이…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10절). 그 배안에는 약간의 선한 사람과 그보다 더많은 악인이 타고 있었으나 이러한 상황에서는 모두가 똑같은 운명에 처해지게 되는 법이다. 만약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그 양자가 함께 배를 타고 있었다면, 당연히 위험도 그 양자에게 똑같이 임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이 문제에 관한 바울의 충고를 묵살했다(11절). 그들은 그가 이러한 문제에 주제넘게 말참견한다는 것을 건방지다고 생각했다. 그 일의 결정권을 쥐고있었던 백부장은 바울의 말을 자신의 권한으로 취소시켰다. 백부장은 바울의 견해보다는 그의 선장과 선주의 의견을 더욱 존중하였다. 왜냐하면 사람들이란 본래 그의 직업에 의해 신용을 받기 때문이다. 백부장은 바울을 매우 예의바르게 대했으나(3절), 그의 충고에 좌우되지는 않았다.

 

Ⅱ. 풍랑을 만난 바울의 일행 27:12-20

(1) 그 배는 다시 바다로 나아가 처음에는 순조로운 바람에 따라 항해하였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때문에 그 미항을 떠나게 되었는가? 그 이유는 그들이 그 항구에서는 과동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는 일이 종종 그렇듯이 그들도 불편함을 덜기위해 피한다는 것이 오히려 잘못된 길로 접어들고 말았던 것이다. 그 배의 선원들중 몇몇은 거기에 계속 머물자고 주장했다. 풍랑이 거센 바다로 나가 목숨을 잃느니 오히려 좀 불편하더라도 안전한 것이 훨씬 낫지 않느냐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협의결과 떠나자는 편이 지배적이었다. 그렇지만 떠나더라도 멀리는 가지말고 이 섬의 다른 항구로 옮기자는 의견이 관철되었다. 그곳은 본문에 언급된 뵈닉스였다. 본문에서는 이 항구가 한편으로는 동북을, 한편으로는 동남을 향하여 위치해 있다고 묘사되어 있다. 아마 그 항구는 두개의 돌출부(곶)사이에 위치해 있었을 것이며, 그중 하나의 돌출부가 동북을, 다른 하나의 돌출부가 동남을 향하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그 두개의 곶은 동풍의 방벽 역할을 했던것 같다. 만일 이와같이 우리가 안전하게 정박할 수 있는 천연의 항구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면, 우리의 항해를 위해 마련된 바다라는 자연은 전혀 무용지물이었을 것이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처음 항해를 결행하도록 용기를 주었는가? 그들은 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 순풍에 따라 출발했으며 자신들의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갈수 있다는 희망에 마음이 부풀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레데 섬의 해안에 바짝 붙어 항해하였다. 그들은 순풍에 돛을 달고 바다로 나갔으므로 자신들이 이때껏 접해보지 못한 폭풍을 만나 극도의 위험속에 처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2) 그 배는 즉시 엄청난 폭풍에 휩쓸렸다. 그들은 현재 남풍이 순하게 불고 있었으므로 계속 순조로운 항해가 될것으로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러한 확신하에 바다로 내달았으나, 곧 그들의 어리석음이 드러나고 말았다. 그들은 바울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보다 부드러운 바람을 더 신용하였던 것이다.

1) 그들에게 닥친 위험과 재난 : 그들에게 광풍이 대작하였다(14절). 이 바람은 선원들이 유라굴로라고 부르는 북동풍인데, 일단 이 바람이 바다에 몰아치면 모든 선박들은 재난과 위험에 처할 수밖에 없다. 그 배는 심하게 흔들렸다(18절). 그 배는 휘몰아치는 바람에 이리저리로 휩쓸렸던 것이다. 그 배는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돛을 걷어내렸다. 그러한 폭풍우속에서는 어떠한 노력도 위험을 자초하므로 배를 가는대로 내버려 둘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이 폭풍을 만난 곳은 뵈닉스 근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그들은 곧 안락한 항구에 닿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가! 그들은 갑자기 이러한 역경에 처하게 된 것이다. 또한 당시에는 선원들에게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반의 사용법이 개발되지 않았으므로(따라서 그들이 태양이나 별을 볼 수 없을 경우에는 그들에게 방향을 지시해 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사태는 더욱 심각해졌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도 영적인 이유때문에 간혹 이러한 참담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따라서 이와같은 상황이 이들에게 엄습할 수 있으나, 언제나 그들에게는 서광이 비치고 있다. 바울과 그들은 그 심한 폭풍우뿐만 아니라 겨울의 혹독한 기후속에 있었다. 그들은 혹독한 비바람속에서 추위로 거의 사경을 헤매었다. 그러한 상황은 몇날이고 계속됐다. 바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삶의 현장에서 겪는 역경이외에 종종 겪는 곤경이 어떠한 것인가 생각해 보자.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의 생계유지를 위해 여전히 이 모든 일을 견디어 내고있는 것이다. 이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바다에서 생업에 종사하는 자들을 있게한 것은 곧 하나님의 거룩한 섭리의 한 예이다. 그러기때문에 그리스도께서도 항해에 종사하는 사람들중에서 사역자를 택하셨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들이야말로 역경을 극복하는데 익숙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 그들이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사용한 방법들 : 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그 바람을 이겨내지 못한다고 판단한 나머지 배를 표류하게 내버려두었다. 싸워서 득이 없을 경우에는 항복하는 편이 지혜로운 것이지만 그들은 현재의 위험스러운 상황을 피해가기 위하여 할수 있는 최선의 방법들을 모두 동원하였다. 그들의 배가 가우다로 불리는 작은 섬을 지나게 되자, 그들은 배가 성에 부딪혀 난파될까봐 조심하면서 간신히 사태를 수습하여 그 섬아래로 빠져나갔다(16절). 또한 배가 난파될 것을 두려워하였으므로 그들은 거룻배를 떠내려가지 못하도록 재빨리 손을 썼다. 그들은 '간신히 거루를 잡아'(16절) 그것을 마침내 끌어올렸다(17절). 이처럼 그들은 그때그때의 상황에 적절한 수단을 사용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줄을 지고 선체로 둘러감기도 하였다(17절). 그들은 가장 심한 폭풍우속에서도 그 배를 지키기 위해 강한 밧줄로 선체를 동여맸다. 또한 그들은 배가 모래바닥에 걸릴까봐 염려하여 돛을 내린 다음 배가 가는대로 방치해 두었다. 비록 배를 조정하기에 넉넉한 해면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푹풍이 몰아치는 그런 악천후속에서 배가 살아나온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닐수 없다(그들도 그렇게 표현하고 있다). 이튿날 그들은 배의 짐을 덜기위해 싣고 있던 상품들과 물건들을 밖으로 던져버렸다. 이 세상의 재물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여기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이 세상의 재물이 하나의 짐으로 여겨질때가 올 것이다. 그 짐은 너무도 무거워서 재산 그 자체의 안전도 보장못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지닌 사람까지 익사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이 세상 사람들의 어린이들과도 같은 유치한 어리석음도 생각해 보자. 그들은 자신의 생명을 구하기위해서는 재물을 아낌없이 내어던지곤 한다. 그러나 그들은 경건과 자비의 사업이나 그리스도 위해 고난받는 일에는 얼마나 인색한지 모른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생명을 재물보다 귀하게 여길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재물을 버리기보다는 믿음과 선한 양심을 버리려고 한다. 사흘째 되던 날, 그들은 배의 기구를 저희 손으로 내어버렸다.

3) 그들에게 닥친 최후의 절망(20절) :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20절). 푹풍우는 계속되었고 그것이 조정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사용한 방법들은 전혀 실효를 거두지 못했으므로 그들은 어찌할바를 몰랐다. 그들에게는 이제 먹는 것도 마시는 것도 안중에 없었다. 그들은 선상에 풍부한 양의 식량을 보유하고 있었으나(38절), 죽음의 공포에 완전히 사로잡혀 목숨을 부지할 기력조차 없었다.

 

Ⅲ. 바울과 그의 동료들의 역경과 구원 27:21-44

우리는 본문에서 바울과 그의 동료들이 겪은 역경과 그 결말을 보게 된다. 그들 모두는 마침내 생명을 보존하였다. 우리는 본문에서 그 배에 승선한 인원이 이백칠십육명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37절). 물론 바울도 그중의 일원으로 누구보다도 가치있는 인물이었다. 우리는 그들이 절망에 빠져 행선을 포기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바울은 요나처럼 폭풍을 불러들인 자가 아니라 그 폭풍속에서 나머지 선원들에게 위안을 가져다준 사람이었다.

1. 바울의 격려(21-26)

여기서 바울은 그들 모두가 구원받게될 것이라는 격려의 말을 전하고 있다. 바울은 그들이 결코 죽지않을 것이라는 점과 이 역경에서 벗어날 방법이 충분히 있다는 점을 상기시킴으로써 먼저 그들을 절망의 상태에서 구원하였다.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21절). 이제까지의 역경속에서 바울은 그 무리의 일원으로 행동하면서 기구를 내버리는 것을 돕기도 하였다(19절). 그러나 이제 그는 죄수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상담자이자 위안자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1) 신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아니한 것에 대한 바울의 훈계 :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뻔 하였느니라(21절). 바울이 그들에게 위험을 경고했을때, 그들은 그 경고를 무시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위험에 처하게 되자 바울은 기꺼이 그들에게 위안과 안도의 말을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비록 그들이 자신들의 의지대로 불행에 빠진다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동정을 베푸신다. 바울은 위로의 말을 하기전에 자신의 경고를 경청하지 않은 죄를 그들로 하여금 깨닫도록 했다. 그들이 책망당한 이유는 그들이 안전한 그레데를 떠났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 불행을 자초하곤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보다 더나은 충고를 거부함으로써 언제가 좋은 때인지를 알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2) 바울의 구원에 대한 확신 : 바울은 그들에게 비록 배는 잃을지라도 목숨만은 결코 잃지않는다는 점을 확신시키고 있다. 바울은 그들에게 현재의 그들의 상태가 비참하나 절망적인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내가 저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22절). 따라서 우리도 죄인들에게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여러분이 우리말을 듣고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으면 좋았으리라. 그러나 지금도 우리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우리가 하지말라고 말했을때 너희는 우리의 충고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으나 이제 책망하지 말라는 우리의 충고는 받아들이도록 하라." 그들은 더이상 아무런 방도를 구하려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구원의 여망이 없어졌기 때문이었다(20절). 이제 바울은 그들의 분말을 촉구하였다. 만약 그들이 활기를 되찾는다면, 그들은 생명을 건질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배의 손실을 각오해야만 한다. 그들의 배는 난파될 것이다. 그러나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을 것이다'(22절). 바울의 이러한 위로의 말은 죽음의 공포로 말미암아 사경에 처한 그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었다.

(3) 바울의 확신 근거 : 한밤중에 바울에게 한천사가 나타나 그와 그의 모든 동료들이 온전히 구원받을 것이라는 말을 전했다(23-25절). 그들은 섭리에 의해서뿐만이 아니라 바울에게 베풀어진 특별한 호의로 인한 약속에 의해서 구원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

첫째, 하나님께 대한 바울의 경건한 신앙고백 : 그는 하나님을 나의 속한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23절)이라고 불렀다. 바울은 하나님을 자기의 의로운 주인으로, 그리고 누구도 그분과 겨룰수 없는 최고의 지배자로, 또한 자기의 통치자로 간주하였다. 바울은 하나님은 '나의 속한바' 되신다고 말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소유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소유물이다. 하나님은 그의 절대적인 통치자이자 주인이시므로 그에게 법을 수여할 권한을 가지고 계셨다. 따라서 바울은 본문에서 '내가 섬기는 하나님'이라고 말했다(23절). 우리도 역시 그의 소유이므로 마땅히 그분을 섬겨야만 한다. 바울은 본문에서 '우리가 속한바 곧 우리의 섬기는 하나님'이라고 말하지 않았다(23절). 그 이유는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이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한 것은 그들이 자신을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알고 섬기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둘째, 바울 자신이 목격한 환상에 대한 설명 : 바울은 본문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내 곁에 서서'라고 말했다(23절). 비록 바울이 먼 바다에 있을지라도 그것이 그와 하나님과의 교통을 결코 방해할 수는 없었다(시 65:5).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 직접 기도할 수 있었고, 하나님은 그에게 직접 사자를 파견할 수 있으셨다. 배가 풍랑에 흔들렸지만 그 사자는 그 배안으로 찾아올 수 있었다. 어떠한 폭풍이나 풍랑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향한 은총의 베푸심을 결코 방해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은 즉시 도움을 베푸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죄수인 바울이 그 배의 전용 객실이 아니라 감옥(그는 그곳이 아무리 불결하고 어두운 곳일지라도 나머지 죄수들과 함께 있는 것으로 만족하게 여겼을 것이다)에 수감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자는 그의 곁에 있었다. 초라함이나 빈곤함이 하나님과 그의 은총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요인은 결코 아니다. 바울은 이 환상을 바로 어젯밤에 보았다. 그는 자신뿐만이 아니라 그와 동행하는 사람들의 안전까지도 확신시켜 주는 이 새로운 환상을 바로 지난밤에 보았던 것이다.

셋째, 바울은 자기에게 임한 환상속에서 격려받았다(24절).

①그는 두려움을 떨쳐버렸다. 그의 주변사람들이 모두 어찌할바를 모르고 절망중에 있을지라도 그는 하나님의 사자로부터 '바울아 두려워말라'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24절). 성도들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일지언정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만군의 주께서 그들과 함께하시기 때문이다.

②바울은 로마에 안전하게 도착할 것을 확신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자가 바울에게 '네가 가이사 앞에서야 하겠고'라고 말한 사실에서 알고 있다(24절). 가장 풍랑이 거센 바다라할지라도 하나님의 증인들이 그 증언을 완수할때까지는 결코 그 증언의 길을 막지못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고난과 역경에 처한 하나님의 신실한 성도들에게 있어서 위안이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자신의 일을 계속해서 수행하시는한 그들의 생명은 지속되기 때문이다.

③하나님의 사자는 바울뿐만이 아니라 그의 동행인 모두를 구원하겠다고 말했다.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24절). 하나님은 세상에 유익한 인간에게는 커다란 축복이 내린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해 바울로 말미암아 그들을 구원해 주시는 방도를 취하셨다. 바울은 여기서 거의 삼백명에 달하는 배의 승객 전부를 구원하고 있다. 하나님은 간혹 경건한 자들을 위해서 사악한 사람들을 용서하신다. 선한 사람들은 마치 그들이 이 세상에서 살 가치가 없는 인간들인양 증오와 박해를 받지만, 실제로 세상이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선한 사람들 때문이다. 자신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까지도 구원을 받게되었다는 사실은 바울에게 매우 커다란 은총이었으며, 바울도 그것을 이렇게 받아들였다. 하나님의 사자는 바울에게 그들을 다 네게 주셨다고 전한다. 선한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공공의 일에 축복이 된다는 사실을 아는 것보다 큰만족이 없을 것이다.

(4) 바울의 위안의 말 : 본문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고 말했다(25절). 그는 결코 자신이 믿지않는 것을 그대로 하여금 믿도록 강요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신뢰하는바를 경건하게 고백한 것이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는가? 그 말씀은 그들에게 활기를 불어 넣어주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말씀이었다. 하나님의 언행이 일치하는데 어떻게 우리의 믿음과 기쁨이 일치하지 않을수 있겠는가!

(5)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의 암시를 주고있다. 그는 그들에게 이 폭풍우속의 항해에서 빚어질 어떤 특별한 경과에 대해 이야기한다(26절). 즉 그는 그들에게 "우리가 한 섬에 걸리리라 그곳에서 배는 난파되지만 승객들은 구원되리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섭리로 그들은 편히 쉬게될 한 섬으로 인도함을 받는다.

2. 그들이 마침내 미지의 한 해변에 정박하게 됨(27-29)

그들은 계속 사경을 헤매면서 꼬박 두주일간을 폭풍우속에서 보냈다. 본문은 이 상황을 '열나흘째 되는날 밤에 우리가 아드리아 바다에 이리저리 쫓겨다니다가'라고 기록한다. 아드리아해는 지중해의 일부로 아프리카 연안까지 뻗어있었다. 또한 그들은 어찌할바를 몰라 당황하고 있었다. 그러나 밤중쯤 되어 사도들이 어느 육지에 가까워지는줄을 짐작하였다(27절). 그들은 그것이 육지인지 아닌지를 식별하기위해 물의 깊이를 재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해변에 접근함에 따라 물의 깊이는 얕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처음에 그들이 물을 재어보니 이십 길이 되고 조금 가다가 다시 재니 열다섯 길이었다(28절). 이것은 그들이 어떤 해변에 근접해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육지에 근접해 있음을 깨닫고 해안의 주변에 널린 암초가 두려워 닻을 내리고 날이 새기를 고대하였다(29절). 그들이 볼수 있었던 낮에는 그들의 시야에 섬의 그림자조차도 없었으나, 이제 그들이 아무것도 볼수 없게된 밤에는 어떤 해변에 가까이 와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날이 새기만을 고대하지 않을수 없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빛도 없는 어둠속을 걸어가게 될때 선원들이 했던 것처럼 닻을 내리고 날이 밝기를 고대하면서, 반드시 여명이 동트리라는 확신을 가져왔다.

3. 선원들의 배를 포기하려는 시도와 좌절(30-32)

(1) 사공들의 배반 계획은 침몰하려는 배를 버리고 떠나려는 것이었다. 사공들이 배에서 도망하고자(30절). 그들은 위험에 처한 다른 모든사람들을 내버려둔채 자신들의 목숨만 건지려고 하였다. 그들은 이런 계획을 은폐하기 위해 이물에서 닻을 내리는체 하면서 거루를 바다에 내려놓았다. 바울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이 육지에 무사히 도착할수 있다는 점을 확신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나 진리보다도 자신들의 안전만을 추구하는 거짓된 속임수를 더 신뢰하였다.

(2) 바울이 배반자들의 행위를 발견하였다(31절). 바울은 그것을 보고 백부장 군사들에게 다음과 같은 경고의 말을 했다.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31절). 이제 그들앞에는 이제까지의 모든 고난중 가장 큰 역경이 닥쳐왔다. 왜냐하면 육지에 접근할때 반드시 필요한 것은 배를 육지에 댈수 있는 사공들의 기술이므로 그때는 이전보다 더욱 사공의 존재가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우리가 할수 없는 일을 행하고 계실때 우리 역시 그의 능력속에서 온힘을 기울여 노력해야 한다. 그들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결말을 약속하신 하나님은 그 방법에 대해서는 그들이 이 사공들의 도움으로 구원을 얻게될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할 것은 일을 주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나 우리도 우리의 행할바를 수행하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우리의 안전을 위해 우리가 할수 있는 적절한 방법들을 취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믿지않고 시험하게 되는 것이다.

(3) 군인들에 의해 선원들의 탈출시도가 좌절되었다(32절). 군인들은 그 사건을 놓고 사공들과 논쟁을 벌일 시간도 없으므로 즉각적으로 거룻줄을 끊어 떼어버렸다. 이제 그 사공들은 그 배에 머물지 않을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그 배의 안전을 위해 일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왜냐하면 그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 배와 운명을 같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4. 바울이 동행인들에게 불어넣어준 새로운 활력(33-38)

그러한 무리속에 바울과 같은 인물이 함께 타고 있었다니 그들에게는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새벽의 여명은 그들에게 얼마간의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때 바울은 무리들을 소집하여 그들이 자신들의 몸을 돌보지 않고있는 점을 책망하였다. 그는 '너희가 기다리고 기다리며 먹지 못하고 주린지가 오늘까지 열나흘인즉' 이라고 그들에게 말했다(33절). 사실 그들은 거의 먹지않았거나 끼니를 거르기를 예사로 하였던 것이다. 본문의 '너희가 계속해서 주렸다'는 말은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너희는 식욕을 잃었다. 즉 너희는 음식을 먹을 의욕도 식욕도 모두 잃고만 것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로 말미암아 죽는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바울은 그들에게 음식을 먹으라고 권고하고 있다. 음식을 먹으라 권하노니(34절). 즉 우리가 험난한 투쟁에 직면해서 굶주려 몸이 약해진다면 어떻게 자구책을 강구할수 있겠는가? 바울은 이들을 먹여야만 했다. 그렇게 하지않는다면, 그들은 거센 파도에 견디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너희에게 약간의 양분이라도 섭취할 것을 간절히 권한다. 그것은 너희 건강과 너희 구원과 그리고 지금의 너희 안전을 위해서 음식을 먹게함으로 자기 생명을 구할 힘도 얻게하기 위해서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아야 하는 것처럼, 일하려고 하는 자는 반드시 먹어야 한다. 의혹과 공포에 굴복하여 나약하게 떠는 기독교인들은 계속해서 주님의 만찬을 금하고 하나님의 위안을 거부하면서 자신의 영적 사업을 계속할수 없다고 불평을 털어놓는다. 그러나 그것은 오로지 그들 자신의 책임이다. 만약 그들이 주님의 만찬을 즐거운 마음으로 맛있게 먹었다면, 그들은 힘을 얻을수 있었을 것이다. 바울은 '너희중 머리카락 하나라도 잃을 자가 없느니라'고 말함으로써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을지도 모른다. "너희가 죽음의 공포로 말미암아 아무것도 먹을수 없다면 내가 말하노니 너희는 분명히 생명을 건질 것이니 염려하지 말고 먹으라." 이렇게 말하고나서 그들을 위해 손수 식탁을 마련하였고 떡을 가져왔다. 그들에게는 절약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풍부한 식량이 있었다. 그러나 식욕이 없는 그들에게 그것이 무슨 유익이 되었겠는가! 우리는 우리가 맛있게 먹을 음식뿐만 아니라 그 음식을 먹을 식욕도 구비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드려야 한다. 바울은 그 배에서 목사의 역할을 수행했으며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의 목사에 대해 자부심을 가져야할 이유가 있었다. 바울은 떡을 가져와 '모든 사람앞에서 축사하였다'(35절). 이 일이 있기전에 그가 그 배안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했는가는 불확실하다. 이제 그가 모든 사람앞에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 것은 그들이 생존해 있고, 또한 그들이 구원의 약속을 받았기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그들이 보유하고 있는 양식에 대해서도 감사하고 그 음식위에 축복이 함께 임하기를 간구하였다. 우리는 범사에 감사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특별히 하나님으로부터 일용할 양식을 받을때 더욱 간절한 심정으로 감사드리지 않으면 안된다. '그가 모든 사람앞에서 축사한 것'은 그가 떳떳하게 자기의 주인되시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사실을 과시하기 위함일뿐만 아니라 그들을 그의 섬김속으로 인도하기 위함이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음식위에 축복을 간구한다면, 그리고 올바른 방법으로 그것에 대해 감사드린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신앙을 돈독히 할뿐만 아니라 그것을 권면함으로써 다른 사람들로부터 좋은 인상을 얻게될 것이다. 바울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었다. 그는 축사한후에 떡을 떼어(이 떡은 바닷물에 절은 것이었다)먹기 시작했다. 그들이 삶에 대해 용기를 얻었는지의 여부는 알수 없으나, 바울 자신은 그러한 용기를 얻었다. 그래서 그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다. 설교의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모범을 보이는 것이었다. 바울의 이러한 모범은 그들 모두에게 선한 영향을 미쳤다. 저희도 다 안심하고 받아 먹으니(36절). 그들은 바울을 통해 그들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메시지에 대해 바울 자신이 확신하고 있음을 파악한후에 그 메시지를 믿으려하였다.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구세주로 받아들이도록 인도하는 전도자들이 스스로 그렇게 모범을 보일 경우, 사람들은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의탁하려는 용기를 얻게 된다. 본문에서는 그 배에 승선한 사람들의 수가 이백 칠십 육인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 사람의 훌륭한 본보기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 영향을 미쳤는가 보라! 본문에 기록된대로 그들은 배부르게 먹었다(38절). 또한 그들은 배의 중량을 더욱 가볍게 하기위해 밀을 바다에 버렸다. 그들이 전에는 짐과 기구를 배밖으로 내던졌지만, 지금은 밀을 내던졌다. 양식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침몰되기보다는 그들이 양식을 침몰시켜 버리는 것이 더나았기 때문이다. 우리들도 역시 자신의 생명을 위해 보관하고 비축해 두었던 양식을 똑같은 이유로 던져버려야될 상황에 직면할수도 있다.

5. 그들의 해안 상륙과 파선(39-41)

그들이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한 것은 날이 완전히 밝은 다음이었다. 날이 새매 어느 땅인지 알지 못하나(39절). 그들은 자신들의 지금 도착한 이 해안이 어느나라의 해안인지도 알수 없었다. 그 배의 사공들은 어쩌면 가끔 이 항로를 항해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본문은 그들이 어찌할바를 몰라 당황하고 있다고 전한다. 그러나 그들은 곧 경사진 항만으로 된 해안이 눈에 띄었으므로 배를 거기에 들여다 댈 수 있는가 의논하였다(39절). 그들은 그곳이 어느나라인지도 몰랐고, 그곳의 주민이 문명인인지 야만인인지도 몰랐으나, 모든 것을 그곳 주민들의 처분에 맡기기로 했다. 그곳은 물이었으며 따라서 그토록 오랫동안 바다에서 지냈던 그들에게는 너무도 반가운 곳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그 해안에서 누구의 도움도 받을수 없었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해안에 살고있는 사람들은 간혹 바다에서 조난을 당한 사람들의 귀중한 생명을 구조하는 기회를 갖게 된다. 그때 그들은 인명구조를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들은 해안으로 직행하였다. 닻을 끊어(40절). 그들은 바다에 자신들을 맡겼다. 그리고는 그들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동안 배를 좀더 견고하게 유지키위해 고정시켜 놓았던 킷줄을 늦추었다. 이제 그들은 항구로 들어가기 위해, 그리고 조타수가 좀더 자유롭게 배를 몰기위해 킷줄을 늦추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돛을 달고 바람을 맞추어 해안으로 향하여 들어갔다. 그들이 해안을 보았을때, 그들은 서둘러 가능한 한 빠른 속도로 배를 몰았다. 그 속도는 아마도 정상속도를 훨씬 상회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마치 이 세상의 거센 풍랑과 오랫동안 싸워온 한 가련한 영혼이 그 영원한 안식처인 천국의 안식속으로 한시라도 빨리 달려가고픈 심정과도 같지 않은가? 그러므로 그 영혼은 성령의 바람에다 신앙의 큰돛을 띄워 가득찬 소망을 가지고 해안으로 향해 나아갈 것이다. 그들은 두 물살이 합치는 곳을 만나 배가 좌초되었으므로 일단 모래바닥으로 보이는 지협같은 곳에 배를 정착시켰다. 그곳은 양쪽에서 바닷물이 몰아치는 곳이었다. 바로 그곳에서 이물이 부딪혔다. 이제 고물은 큰파도에 곧 파산될 지경에 처하고 말았다. 배를 조종할수 있는 공간이 넓었던 망망한 대해에서 폭풍우를 만났던 배가 이제는 암초에 걸려 파선하고 만 것이다. 이와같이 만약 우리의 마음도 이 세상에 매여 꼼짝하지 못하면, 곧 파멸하고 말 것이다. 사단에 유혹이 마음을 치면, 마음은 무너져 버리고 만다. 그러나 그 마음이 세상을 초월하여 있는한, 근심과 소요로 흔들릴지라도 거기에는 소망이 있다. 그들은 해안을 목전에 두고도 그곳에서 난파당하고 말았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어디서든지 마음을 놓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다.

6. 바울과 나머지 죄인들이 당한 특별한 위험(42)

군사들은 죄수가 헤엄쳐서 도망할까하여 저희를 죽이는 것이 좋다하였으나(42절). 사실 죄수들이 도망갈 정도의 큰위험은 없었다. 왜냐하면 죄수들은 허약하고 지쳐있었으므로 멀리 도망가지 못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많은 군사들의 감시속에서 그들이 탈출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비의 기적이 없이는 자신도 생명을 부지할수 없는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군사들이 유린하고자 했다는 것은 가증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다. 백부장은 바울을 구하기위해 이러한 제안을 일축했다. 백부장은 자신의 죄수인 바울에 대해 호감을 갖고있었다. 율리오는 전에 바울의 충고를 거절한 적이 있었지만(11절), 이제는 바울을 구하기위해 그 무자비한 살육계획을 저지시켰다. 하나님이 바울로인하여 그 배의 모든 승객들을 구원하셨듯이, 여기서 백부장도 바울로인해 모든 죄수를 구원하였다. 여기에서도 한사람의 선함으로 말미암아 모두에게 유익이 돌아가게 되었다.

7. 그 배의 전원이 구원받음(43)

몇몇 사람들은 헤엄쳐서 살아났다. 그것은 백부장이 헤엄칠줄 아는 사람들을 명하여 물에 뛰어내려 먼저 육지에 나가게 했기때문이다(43절). 백부장이 그렇게 한것은 죄수들의 탈출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많은 수고끝에 해안으로 기어나갔다. 어떤 사람들은 널조각으로, 어떤 사람들은 배의 파편들을 의지하여 나갔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음을 확신했으므로 더욱 열심히 서둘렀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안전하게 육지에 상륙한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선한 섭리에 의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무서운 바다로부터 구원되었고, 소원하던 항구로 들어갔다. 비록 약속된 구원의 과정에서 큰 고난은 있었지만, 구원의 약속은 완전히 성취되었다. 그리고 심지어 난파선 파편들조차도 그들의 생명을 구하는데 공헌하였으며, 모든 것이 끝장난 것처럼 보였으나 모든 것이 안전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심지어 널조각이나 부서진 뱃조각마저도 그들의 구원에 이용되었던 것이다.

 

# 해설

로마로 향하는 바울 ( 27 )

마침내 바울은 이달리야로 향하게 됩니다. 바울이 가이사에게 호소하였기 때문에 바울은 군인들의 호송하에 로마로 보내지게 되었습니다. 이때 의사 누가와 아리스다고가 바울과 동행을 했습니다. 이들의 항해는 처음부터 수월하지가 않았습니다. 유라굴로 태풍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모든이에게 소망이 없어졌고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합니다. 마침 배는 육지에 이르게 되어 바울의 말과 같아졌습니다.

 

1. 이달리야로 향하는 바울

1) 동행인들

바울이 로마로 갈때 같이간 다른 죄수들은 누구였으며 몇명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은 어떤 이유로 로마로 옮겨지고 있었는지 조차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백부장 율리오는 이 사건의 중심 인물로서 특정 군대에게 부여되는 명예 칭호인, 아구스도대에 속한 자로 기록합니다. 아구스도는 '존경하는'을 의미하는 세바스테스로 번역됩니다. 이 백부장은 100명의 군사를 거느렸습니다. '우리'라는 말에서 알수 있듯이 누가는 이 여행에서 바울과 동행하였습니다. 아리스다고는 바울의 조력자로서 동행했습니다. 아리스다고는 바울이 로마에 감금된 기간에도 그와 함께 머물렀습니다.

a.죄수(사49:9)

b.아리스다고(행19:29)

2) 미항에 도착

그 배의 취항지인 아드라뭇데노는 소아시아 북동부에 있는 드로아의 동남쪽에 위치했습니다. 그 배는 폭풍이는 겨울 항해철이 접어들기 전에 이 취항지를 향해서 항해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흥미롭게도 바울은, 가이사랴를 떠나 첫 기항지인 시론에 도착했을때 그곳에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백부장의 친절은 또다른 백 부장의 친절만큼이나 잊지못할 고마운 것이었습니다. 바울 일행은 지중해 동부에서 서부로 항해하는데 매우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바울을 태운 배는 바람을 거슬리며 항해를 했기때문에 더욱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소아시아의 남부 해안에 위치한 항구 도시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났습니다. 이 배는 276명을 태울만큼 큰 곡물 운반선이었습니다. 애굽은 로마의 곡물 공급지였습니다. 바울이 탄 이 두번째 배의 항로는 무라에서 출발하여 니노에 이른 다음 그레데의 남서 해안을 지나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a.바울의 친구들(행24:23)

b.정중한 환대(창12:16)

3) 바울의 말을 믿지않는 백부장

9월 중순이후로 지중해를 항해하는 것은 어려웠고, 11월 중순이후로는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누가는 그때의 계절을 '금식일', 즉 대속죄일이 지났다는 말로 표현을 했습니다. 그 해의 속죄일은 10월 5일이었습니다. 이때는 강한 북서풍때문에 항해하기가 곤란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레데 섬의 남쪽 해안을 따라 행선했던 까닭에 바람의 피해는 입지 않았습니다. 배가 이 해안의 미항이란 항구에 도착한뒤 선상회의가 열려 이곳에서 겨울을 나느냐 아니면 서쪽으로 더 떨어진 뵈닉스에서 나느냐의 문제를 논의하였습니다. 바울도 여행경험이 많은 사람으로 자문 역할을 했으나 미항에 그대로 남아있다는 그의 의견은 뵈닉스에 가자는 의견에 밀려 거부되었습니다.

a.금식(민29:7)

b.속죄일(레23:27)

 

2. 유라굴로 태풍

1) 광풍을 만남

바울의 불길한 예감이 들어맞았습니다. 그의 동료 여행자들은 그들이 미항을 떠날때 잠깐동안 불었던 순한 남풍에 속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못되어 이윽고 그레데 섬 중심에 있는 이데 산으로부터 갑자기 불어닥친 유라굴로 광풍때문에 배는 정기 항로를 이탈해 버렸습니다. 그들은 그레데 섬의 남쪽에 있는 가우다라는 작은 섬에 이르러 그 섬을 바람막이로 하여 지날 짧은 순간에 배위로 돛없는 작은 배, 거루를 끌어올리고 선체를 둘러 감았습니다. 만일 연장을 내리고 배의 방향을 서북서 방향으로 고정시킴으로써 항로를 제대로 잡지못했다면 광풍에 밀려 리비아 해안의 모래 수렁 스르디스로 떠내려 갔을 것입니다.

a.광풍(막4:37)

b.주목할만한 배(창7:17)

2) 구원의 소망이 없어짐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은 풍랑으로인해 힘겨운 싸움을 계속해야 했습니다. 가능한 한 배를 가볍게 해야 했기때문에 먼저 곡물들을 바다에 던지고 또 움직이기 쉬운 짐과 모든 여분의 기구들도 그렇게 했습니다. 여러날 동안을 폭풍과 낮에는 해를, 밤에는 별들에 가려서 방향을 잡아 항해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살수 있다는 구원의 소망은 사라져만 갔습니다.

a.짐을 바다에 버림(욘1:5)

b.소망이 없는 절망(렘2:25)

3) 바울의 위로

이때 바울은 그레데에서 한 조언을 상기시킨 다음, 하나님이 주신 말씀으로 그들을 위로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에게 임한 첫번째 환상은 아니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사실, 예루살렘 환상가운데서도 하나님은 바울의 길이 평탄하지는 않겠으나 결국은 무사히 로마에 갈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서도 하나님은 바울이 가이사 앞에 서게된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바울은 동료들에게 거듭 안심하라고 위로했습니다. 죄수임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하나님을 믿는 그의 믿음을 알리는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a.천사의 사역(히1:14)

b.믿음의 승리(롬4:20)

 

3. 아드리아 바다에서

1) 바울의 지혜로운 권면

아드리아 바다는 아드리아 해와는 다른 지중해의 중앙을 일컫는 곳을 말합니다. 그레데로부터 떠밀려 간지 2주일후 그들은 멜리데 섬 근방에 이르렀습니다. 사공들은 물의 깊이를 재며 육지에 가까이 옴을 알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공들이 도망하려하자 바울이 이를 지혜롭게 저지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배에 탄 모두를 안전히 지키시리라던 주님의 말씀으로 위로하고 그들에게 먹으라고 권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빵을 조금 떼어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했습니다. 모두들 안심하고 받아먹었습니다. 배에 있는 사람의 수는 276명이었습니다.

a.지혜로운 모사(잠11:14)

b.하나님께 축사함(마15:36)

2) 육지에 오른 사람들

경사진 해안으로 된 항만이 보이자 그들은 배를 곶에 대기로 했습니다. 닻을 끊어 바다에 버리는 동시에 킷줄을 늦추고 돛을 달고 바람을 맞추어 해안을 향해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배는 사공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모래톱에 부딪쳤습니다. 배의 이물은 모래에 부딪쳐 움직일수 없게 되었고 고물은 큰 물결에 깨어져 갔습니다. 백부장의 배려로 목숨을 건진 죄수들, 그리고 헤엄을 치며, 배의 파편을 타고 모든 사람들이 육지에 상륙했습니다.

a.파선(고후11:25)

b.구출의 약속(딤후4:18)

 

결론

드디어 로마를 향하여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가이사 앞에 서게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되는 것이었습니다. 때론 죽음의 위험을 지나게 되었지만 그때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격려하시며 바울로 하여금 주님의 뜻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 핵심

27:1-26

로마로 향한 바울의 항해여정은 순탄하지 못했다. 그 와중에서도 다른 사람들을 위로할수 있었음은 주의 약속을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리아 배(27:6)

나일강 삼각주의 곡창 지대에서 수확한 곡식을 싣고 알렉산드리아에서 로마로 향하던 무역선. 이 배의 항해기간은 역풍으로 인해 대개 두달 남짓 걸렸다. 그러나 로마에서 알렉산드리아로의 항해는 순풍으로 인해 2주 정도면 가능했다.

 

# 묵상

미항에서의 바울 ( 27:9-11 )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를 향한 바울은 미항에 이르자 행선하기가 위태로운 때라 이번 행선이 하물과 배뿐 아니라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을 것이라고 충고하였습니다. 여기서 언급된 금식하는 절기는 티쉬리(9-10월) 10일에 지키는 속죄일을 의미하는데, 이때는 우기이므로 지중해를 항해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겨울을 지내고나서 항해를 시작하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바울에게 친절하기는 했지만 바울의 말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백부장의 실수가 있었습니다. 인간의 경험이나 지식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선되면 이런 실수를 저지를 수밖에 없게 됩니다.

연장을 내린 선원들 ( 27:17-22 )

이는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스르디스는 그레데 섬 서쪽에 있는 얕은 바다로, 이 바다에는 유동하는 모래가 깔려있어 줄로 선체를 둘러감고 연장을 내린 것입니다. 항해술이 발달하지 않은 당시로서는 달리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풍랑을 만난 사흘째는 배의 기구를 내어버렸습니다. 이때 바울은 ‘안심하라 너희의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을 것이고 배만 상할 것이라’고 안심시켰습니다. 바울은 비록 죄수의 몸이긴 했지만 위로자가 되어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사명을 다할수 있도록 하기위하여 그를 구원하실 것을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바울은 인간적인 소망이 다 끊어진때에라도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믿었기 때문에 그들을 절망에서 끌어내고 소망중에 안심하게 하였습니다.

난파된 배위의 상황 ( 27:27-44 )

난파선에서의 바울은 용기를 내어 그들을 도왔습니다. 그 용기의 근원을 하나님께 두었던 바울은 먼저 열나흘 동안 불안과 공포에 떨며 아무것도 먹지 못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먹도록 권했습니다. 바울은 구원의 확신이 있었기때문에 폭풍과 파도가 조금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또한 배가 깨어짐으로인해 바울에게는 커다란 위기였지만 백부장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할수 있었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섭리하심으로 백부장은 바울 사도를 구하고 죄수들도 살해당하는 것을 막았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오차가 있을수 없습니다.

군사들의 계획 ( 27:42, 43 )

군사들은 죄수들이 헤엄쳐서 도망갈지 모르니 죽이는 것이 좋겠다고 백부장에게 제의를 했습니다. 로마법에서는 죄수를 놓치면 그 죄수를 지키는 군사가 대신 벌을 받게되어 있었기때문에 그들은 책임질 일을 만들지 않으려고 이렇게 제안한 것입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바울을 살리기위해 그러한 위험도 무릅쓰고 죄인들을 죽이지 못하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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