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udy
Ⅰ. 고난으로인한 불안한 심정을 호소함 7:1-6
여기에서 욥은 그가 정당화할수 없었던 것, 즉 죽음에 대한 자신의 지나친 욕구에 대해 변명하고 있다.
(1) 사람은 누구든지 곧 죽게 마련이다. "바라건대 내가 죽음을 바라는 것을 마치 내가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때를 앞지를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오해하지 말라. 그렇지 않도다. 나는 그때가 정해져있다는 사실을 아주 잘알고 있도다. 단지 그러한 말을 통해 나의 불안한 심정을 자유로이 표현하고자 할뿐이라." 세상에 있는 인생에게 전쟁(곧 정해진 때)이 있지 아니하냐 그날이 품꾼의 날과 같지 아니하냐(1절). 분명히 그러하다. 우리를 만드시고 이세상에 두신 분께서 그 기간을 정해놓았다고 말할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스토아 철학자들이 말하는 운명의 여신에 의해, 또는 에피큐로스 철학자들이 말하는 눈먼 행운의 여신에 의해 지배받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성삼위 하나님의 지혜로우시고 거룩하시며 주권적인 의론에 의해 다스림을 받고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인간의 삶은 전쟁이며 품꾼의 날과 같다. 우리들은 이세상에 있는 우리들 자신을 다음과 같이 간주해야할 것이다.
1) 대적들가운데서 곤란을 당하고있는 병사로 간주하여야 한다. 우리는 명령에 복종하여야 하며 싸움이 끝났을때에는 영예롭게 물러나야 한다.
2) 품꾼으로 간주하여야 한다. 즉 우리를 낮에는 일하고 밤에 그 수고의 값을 계산하는 품꾼으로 여겨야 한다.
(2) 그는 일에 지친 불쌍한 종이나 품꾼들이 품삯을 받고 휴식하러 갈 저녁 황혼을 기다리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자신이 죽음을 바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2절). 그 비유는 명백한 것이나 거기에 적용한 것은 다소 모호하다. 그러나 욥과 같은 상태에 있는 자에게 언어의 정확성을 기대한다는것 자체가 무리이다. "종은 저물기를 심히 기다리도다. 나역시 같은 이유로 죽음을 심히 기다리노라. 왜냐하면 내가 여러달째 곤고를 받고있기 때문이라."
1) 그의 날은 무익했으며 또한 너무나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하루하루가 그에게는 고통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선을 행하거나 어떤 목적에 그것을 쓸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일할수 없을때에, 단지 그를 위해 조용히 앉아있기만 한다면 그것으로 족하며 우리는 용납될 것이다.
2) 그는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3,4절). 밤은 노동자에게뿐만 아니라 고통을 당하는 자에게도 낮의 노고와 피곤을 씻어준다. 그러나 불쌍한 욥은 이러한 위안을 얻을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종이 밤을 원하는 것만큼이나 밤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3) 그의 몸은 악취를 풍겼다(5절).
4) 그의 생명은 종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6절). 그는 장수를 기대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급속히 쇠약해져가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6절).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그는 이전의 형통함이 다시 회복되리라는 소망을 가질수 없었다.
Ⅱ.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하나님께 호소함 7:7-16
욥은 여기에서 하나님께 자신을 편케해 주시거나 자신의 생명을 끊어주실 것을 간청하고 있다. 그는 자신에 대해 하나님께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1) 자신을 죽어가는 자, 확실히 빨리 죽을 자로 진술하고 있다. 내 생명이 한 호흡같음을 생각하옵소서(7절). 그는 자신이 연약한 피조물이며 이세상에서 살아있을 날이 짧고도 불확실하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의 대상으로서 그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고 있다. 주의 눈이 나를 향하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다(8절). 죽는 것은 단한번밖에 없는 일이다. 이것은 구름이 헤쳐져 흩어지는 것으로 설명된다. 구름은 증발되어 사라지는 것이다. 곧 공기속으로 흩어져버리면 결코 다시 뭉쳐지지 않는다. 다른 구름이 생기지만 이미 이전의 그 구름은 아니다. 인간의 자손의 새로운 세대가 일어남도 역시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는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겠고(10절). 이러한 전제로부터 그는 좀더 나은 결론을 끌어낼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말하며...원망하리이다(11절). 불평과 싸움속에서 죽는 것보다 기도와 찬송속에서 죽는 것이 훨씬 좋은 죽음이다.
(2) 욥은 자신을 병든 자, 곧 심신이 모두 격심하게 고통받는 병든 자로 묘사하고 있다. 그는 이 진술에서 하나님께 원망하고 있다. 내가 바다니이까 용이니이까(12절). "일정한 영역내에 머무르도록 된 거센 바다니이까 또는 바다의 모든 고기를 탐식하지 못하도록 잡아두어야 하는 다루기 힘든 고래니이까?" 불쌍한 욥에게 있어서 그 자리는 그를 위로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두려움을 주었고 그 침상은 그의 수심을 덜어주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가중시켰다. 욥의 꿈이 부분적으로는 그의 병에 의해 생긴 것일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사단이 그의 꿈에 손을 뻗치고있다고 생각할수 있다. 왜냐하면 사단은 파멸시킬 능력이 없는 자들을 두렵게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고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욥은 이러한 일을 하도록 사단에게 허락을 내리신 하나님을 바라보았고 이러한 사단의 역사를 하나님의 두려움이 그를 엄습하여 치는 것으로 오해했다. 우리는 우리의 꿈이 우리를 부정하게 하거나 불안하게 하지않도록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욥은 이리저리 뒤척이지도 않고 무서운 꿈도 꾸지않는 잠자리로서 무덤을 열망했던 것이다(15,16절). 의심할바 없이 이것은 욥의 결점이었다. 왜냐하면 생명은 사람에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늘나라로 갈 준비를 할수 있는 기회를 주기때문에, 선한 자는 비록 이세상에서 영원히 살기를 원하지않고, 죄보다는 오히려 순교자처럼 질식해 죽는 것을 택하겠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한에는 즐겁게 살아가며 결코 죽기를 택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Ⅲ. 하나님께 용서와 고통의 회복을 간구함 7:17-21
욥은 여기에서 다음의 것들을 하나님께 아뢴다.
(1)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일반적인 섭리에 대해 아뢴다(17,18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크게 여기사. 하나님께서 아주 보잘것없는 그의 피조물을 보살피는 것이 그를 격하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섭리의 본질을 잘못 알고있는 것이다. 여기서 욥은 자신의 특수한 고난을 원망하는 중에서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전반적인 은총을 시인하고 있다. "불쌍하고, 보잘것없고, 연약한 피조물인 사람이 무엇이관대 위대하고 영광스런 하나님이신 주께서 사람을 이처럼 대하시나이까?"
1)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그를 이처럼 존중하시고, 그로하여금 주와 더불어 언약을 맺고 교제를 나누게 하심으로써 크게 여기시나이까?"
2)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사랑하는 자로서 그에게 마음을 두시나이까?"
3)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를 권징하시나이까?"
(2) 특별히 그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하나님께 아뢴다.
1)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살의 과녁이 되었다고 말한다. 어찌하여 나로 과녁을 삼으셔서(20절). "나의 경우는 특이한 것으로서 아무도 나와같은 일을 당하지 않았나이다."
2) 그는 스스로 무거운 짐이 되었다고 말한다. 곧 그 자신의 생명의 무게에 깔려 죽게되었다고 말한 것이다.
3) 그는 그의 근심이 결코 끊일 날이 없었다고 말한다(19절). "주께서 주의 막대기를 내게서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심지어 내가 침삼킬동안도 주시지않고 가혹하게 징벌하시기를 어느때까지 하시리이까?" 욥의 병이 거의 그의 목까지 미쳐서 그를 질식시켰으며 그때문에 그는 침을 삼킬수가 없게되었다. 그는 그것이 옷깃처럼 그의 몸에 붙었다고 불평하고 있다(참조. 30:18). "주여 내게 약간의 휴식, 즉 다소 숨을 쉴시간만이라도 주시지 않겠나이까"(9:18). 그는 하나님앞에 그 자신이 범죄하였음을 솔직히 인정하고 있다. 내가 범죄하였은들(20절). 하나님은 욥에 대해 "그는 순전하고 정직한 자"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욥은 "여전히 나는 범죄하였나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죄가 있다할지라도 정직할수 있다. 그리고 중보자를 통하여 마음으로부터 회개하는 자는 복음안에서 완전한 자로 받아들여진다. 욥은 그의 친구에 대항하여 자신이 위선자나 악한 자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뿐만아니라 그는 자신이 하나님께 범죄하였음을 시인한다. 참회의 고백은 모든 근심거리를 잊게할 것이고 격렬한 불만을 사라지게할 것이다. 그는 어떻게해야 하나님과 화해할수 있는지를 진지하게 묻고있다. "이처럼 주께 대적한 내가 어찌해야 하겠나이까?" 회개할때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선한 생각을 가져야 한다. 곧 그의 피조물을 멸하시기를 기뻐하지 않으시며 오히려 다시 돌이켜 살리고자 하시는 분으로 여겨야하는 것이다. "주는 인간의 구세주이시나이다. 내가 주의 긍휼함을 의지하오니 내 구주가 되시옵소서." 그는 진지하게 그의 죄에 대한 용서를 간구하고 있다(21절). 그의 마음의 동요는 한편으로는 그의 불만을 더욱 비통하게 만들었으나 또한편으로는 그의 기도를 더욱 생생하고 간절하게 만들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도하였다. 주께서 어찌하여 내 허물을 사하여주지 아니하시며. 하나님의 긍휼로 우리가 범한 죄를 용서받을때,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마음의 죄악이 사라져버림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서 범죄함을 제거하실때 언제나 죄의 능력까지도 깨뜨리신다.
# 핵심
7:1-21
욥은 인생의 허무함과 고통을 봇물처럼 쏟아놓았다. 그리고 미약한 인생을 시험하시는 하나님을 이해할수 없다는듯한 질문들을 던졌다.
# 묵상
하나님과의 교통이 없는 삶 ( 7:1-10 )
하나님과의 교통이 없는 삶은 인간에게 고통만을 안겨다주며 결국 인생을 가치없는 것으로 전락하게 만듭니다. 뿐만아니라 자기 인생의 고달픔과 허무함을 가지고 살며, 극심한 고난가운데서 삶의 희망을 잃고 죽음을 갈망하는 자세로 살게될 것입니다. 욥은 자신의 고통을 마치 품삯을 간절히 원하는 일꾼의 심정으로 비유했습니다. 즉 빨리 날이 저물어 수고가 그치기를 바라는 일꾼처럼 빨리 고통의 때가 지나기를 바란 것입니다.
음부 ( 7:9 )
구약시대에는 이곳을 선인이나 악인이 가는 곳으로 생각했고, 신약시대에는 악인이 최후심판 전까지 머무는 곳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이 음부는 어둡고 그늘졌으며(시143:3), 침묵의 장소이고(시94:7), 아무것도 알수 없고 깨달을수도 없는 곳입니다(전9:5-10). 한편 하나님은 이곳에도 함께하시며(시16:10), 그리스도께서는 음부의 주가 되시고(행2:24),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계십니다(계1:18).
욥의 탄식 ( 7:12 )
본절에 언급된 ‘어찌하여 나를 지키시나이까’라는 욥의 탄식속에는 자신의 존재의미에 대한 회의가운데서도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잃지않았던 욥의 태도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또한 욥의 이러한 탄식에는 광명한 삶을 회복시켜주실 것을 간절한 마음으로 탄원하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욥 자신에 대한 고백 ( 7:20 )
욥은 하나의 티끌같은 존재인 자신의 범죄가 광대하신 하나님께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않는다는 것과, 욥 자신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기준이 너무 높다고 탄식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은 인본적이며 율법적이 될수 있습니다. 이세상에는 의인이 하나도 없습니다(롬3:10).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인간이 의로워질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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