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udy

Ⅰ. 욥의 대답〔1〕 9:1-13
빌닷은 욥이 너무 말을 많이한다는 사실을 책망하면서 자기의 이야기를 시작했다(8:2). 욥은 그 책망에는 답변하지 않고있지만, 그다음에 빌닷이 제시한 원리, 즉 하나님은 결코 심판을 굽게하시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고 있다. 내가 진실로 그일이 그런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앞에 의로우랴(2절).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하나님의 엄격하심과 혹독하심에 대한 격렬한 불만으로 이해한다. 실제로 이 장에 몇몇 불평섞인 표현이 나타나고 있는것을 부인할수 없다. 그러나 나는 이 말을 오히려 인간의 사악함에 대한, 특히 자기 자신의 사악함에 대한 경건한 고백 곧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중의 어느누구라도 우리의 죄악에 마땅하게 다루신다면 우리는 분명히 멸망하고 말 것이라는 고백으로 보고 싶다.
(1) 욥은 인간은 조물주와는 겨룰수 없는 존재라는 진리를 주장하고 있다.
1) 논쟁에 있어서 비교가 안된다(3절). 사람이 하나님과 쟁변하려 할지라도 천마디에 한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 율법이나 이론에 있어서 그러하다. 하나님은 폭풍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실때에 그에게 많은 질문을 제시하셨는데('네가 이것을 아느냐, 네가 그것을 알 수 있느냐'), 욥은 그 어느 질문에 대해서도 대답할수 없었다(38,39장). 하나님은 수천가지 죄악에 대하여 우리에게 심문하실수 있지만 그 어느 한가지에 대해서도 우리는 피할수 있는 답변을 제시할수 없다.
2) 싸움에 있어서 비교가 안된다(4절). 그를 거역하고 형통한 자가 누구이랴. 우리는 하나님을 거역하고서 하나님이 얼마나 엄하신 분임을 발견하지 못했거나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한 대가를 지불받지 않은 어떤 뻔뻔스러운 죄인의 경우를 찾아볼수 없다.
(2) 욥은 우리가 관계되어 있는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줌으로써 그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하나님은 마음이 지혜로우시고. 우리는 율법으로 그에게 대답할수 없다. 또한 하나님은 '힘이 강하시므로' 우리는 그와 싸워 이길수 없다. 마귀는 고난의 날이 임하면 욥이 하나님을 저주하고 비방하리라고 기대했지만, 욥은 고난속에서라도 하나님을 숭앙하고 찬송했다. 자연의 하나님께서는 어느누구도 제어할수 없는 힘을 가지고 행하시며, 또한 그 원하시는 일을 이루신다. 왜냐하면 자연의 모든 질서와 세력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고 그에게 의지하고 있기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자연의 흐름을 변경시키거나 역행시키실수도 있다(4-5절). 산보다도 더 견고한 것은 없다. 우리는 불가능하다는 뜻으로 말할때에 산을 움직인다는 말을 쓴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산의 자리를 바꿔놓을수 있다. 하나님은 산을 평지로 만드실수도 있고, 무너뜨리실수도 있다. 사람들은 산을 넘으려면 상당히 애를 써야하지만 하나님은 산을 없애실수가 있다. 땅보다도 그 굴대에 더 튼튼하게 고정되어 있는 것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땅을 움직여 그 자리에서 밀어내실수도 있고' 심지어 '그 기둥이 흔들리게' 하실수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에 의해 죄의 짐아래서 신음하고 있는 땅을 흔들어서 '악인을 그가운데서 구축하시기에'(욥 38:13)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땅과 그위에 있는 인간을 보존하시고자 땅이 그 반역자들을 삼키게 하시지 않으신다. 떠오르는 태양보다 더욱 견고한 것은 없으며, 태양은 그 지정된 시간을 결코 어기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시고자 하시면 태양을 정지시키실수도 있다. 하나님의 능력은 이렇게도 위대하다. 악인과 하나님께 감사치않는 자들에게서 태양을 거두어들이실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도 빛을 비취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은 얼마나 큰가! 욥은 여기서 하나님께서 하실수 있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이 이야기를 하나님께서 실제로 행하셨던 일에 대한 것으로 이해한다면, 이 모든 구절들은 아마 노아의 홍수에 적용될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한 자연의 정해진 경로와 질서를 유지시키신다. 이것은 계속적인 창조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의 힘만으로, 어느누구의 도움도 받지않고 하늘을 펴신다(8절). 처음에 그것을 펴셨을뿐만 아니라 지금도 펴고계시다. 바다물결을 밟으시며. 즉 그는 바다물결이 다시 땅을 덮지못하도록(시 104:9) 그것을 누르시고 지키신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해야할 이유로 주어졌다(렘 5:22). 하나님은 성좌들을 만드셨다. '북두성과 삼성과 묘성과 남방의 밀실을 만드셨다'(9절). 곧 하나님은 별들을 인간에게 유용하도록 만드시사 사람들의 마음을 이끌어서 별들을 주목하게 하셨다. 이것은 짐승들은 할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보고 이름을 지어준 저별들뿐만 아니라 결코 우리의 시야에 들어오지않는 남극주위에 있는 다른 천체의 별들, 곧 여기서 '남방의 밀실'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그 별들도 하나님의 지도와 지배아래에 있다. 이세상을 통치하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생각해 보라. 그러면 당신은, 하나님은 '마음이 지혜로우시고 힘이 강하시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많은 일들과 큰일들을 행하시는데, 그것이 너무나 많고 커서 우리는 감탄하게 된다(10절). 하나님은 크신 하나님이시며 '큰일'을 행하시며 기이한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의 기이한 일들은 너무나 많아서 우리가 그 수효를 셀수 없으며 너무나 신비해서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그는 우리가 보지도 못하고 분별하지도 못하는 방식으로 행하신다(11절). 그가 내앞으로 지나시나 내가 보지못하며...내가 깨닫지 못하느니라. '주의 길이 바다에 있도다'(시 77:19). 우리의 유한한 이해력은 그의 도략을 상상하지 못하고 그의 움직임을 깨닫지 못하며, 그의 택하시는 방법을 깨닫지 못한다.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며 무엇을 계획하시는지를 알지못하는 까닭에,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행사를 판단할 자격이나 능력이 없다. 통치의 비밀은 우리를 초월해있는 것이므로 우리는 그것을 설명할수 있는체 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주권을 가지고 행하신다(12절). 어떤 행동이 감히 그를 대항할수 있겠는가? 무엇을 하시나이까 누가 물을수 있으랴.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을 우리에게 설명해야할 의무가 없다. 그의 행사의 의미를 지금은 우리가 모른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특권에 의하여 행하신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실은 무한한 지혜속에서 최선을 위하여 행해진 것이라는 사실로 드러날 것이다. 우리가 그 의미를 알게되는 시기는 이후에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피조물이라도 저항할수 없게 능력으로 행하신다(13절). 하나님이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시나니 라합을 돕는 자들이 그아래 굴복하겠거든. 즉 하나님은 자신을 대항하여 거만하게 서로 돕는 자들을 반드시 무너뜨리신다.

Ⅱ. 욥의 대답〔2〕 9:14-21
욥은 하나님과 다툴수 없는 인간의 전적인 무능력에 관하여 자신이 한말을 여기서 자기 자신에게 적용시킴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일에 있어서 절망하고 있다. 이런 절망은 현재 하나님께서 자기에 대하여 무엇을 싫어하신다는 어둡고 막연한 이해에서 생겨난 것이다.
(1) 욥은 감히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지않는다(14절). 라합을 돕는 자들이 그아래 굴복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감히 대답하랴. "나라는 존재는 스스로 무력해서 다른 사람의 조력자는 도저히 될수 없는 그런 불쌍하고 약한 피조물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을 대적하여 내가 무슨 말을 할수 있으랴?"
(2) 그는 감히 하나님앞에서의 자신의 의를 주장하려 하지않는다. 비록 욥은 친구들에 대해서는 자신의 고결함을 변호하며 그들의 주장처럼 자기가 사곡한 자요 사악한 자라고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이것을 하나님앞에서는 자기의 의라고 변호하지 않았다.
1) 그는 하나님에 대하여 잘알고 있었기때문에, 감히 재판정에서 하나님을 대항하려고 하지않았다(15-19절). 하나님은 욥이 자기 자신을 아는 것보다도 더 잘알고 계셨다(15절). "나의 이해력으로 '내가 의로울지라도', 그리고 내마음으로는 내가 나를 정죄하지 않았을지라도, 하나님은 나의 마음보다 더크시며 내가 모르는 누구도 알수도 없는 마음의 은밀한 잘못들과 실책들을 알고계시사 그런 잘못들을 들어서 나를 꾸짖으실수 있으므로 나는 대답하지 않으리라." 그러므로 욥은 하나님의 자비에 자신을 내던지고자 하며, 자기 자신의 의에 의지할 생각을 하지않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부르기때문에 대답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부르기 이전에 대답하시며, 우리의 기도에 대하여 은혜로 응답하시지만 이것은 우리의 기도때문에 응답하시는 것은 아니다(16절). 가령 내가 그를 부르므로 그가 내게 대답하셨을지라도. "내가 구한 그것을 내게 주셨다할지라도, 나의 가장 훌륭한 기도까지도 너무나 연약하고 결점투성이므로 나는 그가 그 기도속에서 '내 음성을 들으셨다고는 믿지 아니하리라.' '나는 그가 나에게 응답하사 오른손으로 구원하셨다'고 말할수 없도다(시 60:5). 그러나 그는 '순전히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그것을 행하셨다'고는 말할수 있도다." 욥은 자기에게 어떤 특별한 범죄가 있다고 생각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고난에 빠져있었다(17,18절). 욥은 '폭풍으로' 꺾이었다. 욥의 재난은 너무나 무겁게 그를 짓누르고 있었으므로 그는 숨쉴 여유도 없었으며 괴로움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리고 욥은 이 모든 것들이 '까닭없이' 즉 큰분노를 발할만한 일이 없는데도 일어났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그가 자기 입술로 경솔하게 말했다는데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는 자기가 '숨을 쉬지 못하게' 되었다고(그러나 그는 자기의 이성과 연설을 훌륭히 사용해서 이렇게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선하심을 비방하고, 그런 고통이 까닭없이 왔다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를 비방했다. 군대를 지휘하는 자와는 다툴수가 없다(이렇게 누군가가 시이저에게 말한 일이 있다). 하물며 천사의 군대를 지휘하는 자와 어찌 다툼이 있을수 있겠는가.
2)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너무나 잘알고 있었으므로 감히 그 심판대에 서려하지 않는다(20,21절). "만약 내가 내 자신을 정당화시키려하며 내 자신의 의를 변호하려 한다면, 나의 변호가 도리어 나에 대한 비난이 될것이며 나를 석방해주려던 내 입이 도리어 나를 정죄하리라." 자기 자신의 마음의 기만성을 알고있는 선인은, 자기가 의식하는 것보다도 더많은 악이 자기속에 있으리라고 생각하기때문에 결코 하나님앞에서 자기를 변호하려고 하지않는다. "비록 내가 엄청난 죄를 짓지는 않았고 나의 양심이 어떤 큰죄목을 들어서도 나를 정죄하지 않는다할지라도, 나는 내 자신의 무죄함을 주장할정도로까지 내 마음을 신뢰하지는 않을 것이며 또한 나의 생명이 하나님과 겨룰만하다고 생각지도 않으리라."

Ⅲ. 욥의 대답〔3〕 9:22-24
욥은 여기서 그와 친구들사이에서의 논쟁의 초점을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 친구들은 주장하기를, 의롭고 착한 자들은 이세상에서 항상 번영하고 오직 사곡한 자들만이 슬픔과 환난속에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여 욥은 단언하기를, 악인이 번영하고 의인이 큰고통을 당하는 것은 흔한 일이라고 했다. "내가 그것을 말했고 지금 다시 말하거니와 모든 사람에게 모든 일이 동일하게 임하는 것이라." 여기서 욥의 말, 즉 현세적인 심판이 내려질때에는 선인과 악인에게 그 심판이 임한다는 말속에는 상당한 진리가 내포되어 있음이 인정되어야 한다. 이 사실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는 자기들에게 임한 고통을 적대시하지 말아야 한다. 그 고통들이 자녀들의 명예와 유익을 위하여 계획된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런 시련을 자녀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면, 자녀들은 그것을 싫어해서는 안된다. 반면에 악인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표식이 되기는커녕, '세상이 악인의 손에 붙이었다'(24절). 악한 자에게는 땅이 주어졌지만 의인에게는 하늘이 주어졌으니(땅이 없는 하늘과 하늘이 없는 땅 중에서) 어느것이 더 낫겠는가, 욥은 '그가 비웃으시리라'고 말하지 말았어야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즐겨 고난을 내리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논쟁이나 의견의 불일치때문에 정신이 흥분하게 되면 우리는 우리 입술의 문앞에 파수꾼을 세워야 한다.

Ⅳ. 욥의 대답〔4〕 9:25-35
욥은 점점더 불평을 늘어놓고 있다. 우리는 어려움속에 있을때에, 하나님께 불만을 토로할수는 있지만, 여기서 욥이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 불평해서는 절대로 안된다.
(1) 자기의 번영의 날이 지나가버린데에 대한 욥의 불평은 충분히 그럴만하다(25,26절). "나의 날이(즉 나의 모든 좋은 시절이) 지나가되 내가 의식하기도전에 갑자기 지나가서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는구나."
(2) 자기의 현재의 어려움에 대한 욥의 불평도 용납될수 있다(27,28절). 그는 자기 친구들이 자기에게 충고했던 것처럼 스스로를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는 자기의 '원통함을 잊고' 하나님을 찬송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할수 없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내 모든 고통을 두려워하오니.
(3) 하나님이 무자비하고 냉혹하다는 그의 원망은 결코 용서받을수 없다. 그는 더 잘알고 있었으며, 다른때에는 하나님께 대한 그런 가혹한 생각들을 결코 허용하지 않았었다. 선한 사람들이라고해서 항상 선한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체질과 그들이 받는 유혹의 강도를 고려하시는 주께서는 후에 그들이 회개함으로써 자기들이 잘못한 것을 취소할수 있는 여지를 남겨주시며, 그것으로 그들을 비난하려 하지는 않으신다.
1) 욥은 여기서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① 그는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자기의 슬픔에 대한 어떤위로나 도움도 받기를 포기한것 같다. 주께서 나를 무죄히 여기지 않으실줄을 아나이다. "나의 고통이 너무나 오랫동안 계속해서 나를 누르나이다. 내 자신을 정결케하며 나의 고결함을 지키기위하여 어찌 헛되이 수고하리이까"(29절). 가장 결백한 사람이라해도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자기의 결백함을 입증하려고 하는 노력이 가끔 수포로 돌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결코 그런일이 없다. 하나님께 의로운 사정을 의탁하는 것은 결코 헛되지 않는다(30,31절). 내가 눈 녹은 물로 몸을 씻고. "나의 고결함을 그렇게도 명백하게 드러낼지라도 아무소용이 없으리라. 그래도 재판은 나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라. '주께서 나를 개천에 빠지게 하심으로'(즉 파멸의 구렁텅이, 혹은 더러운 하수구나 도랑), 그 냄새가 나의 주위의 모든 사람의 코를 지극히 불쾌하게 만들어 '내 옷이라도 나를 싫어하리니' 나도 나 자신에게 손을 대기를 끔찍하게 여기리이다." 욥은 자신의 불행이 하나님께로부터 온것인줄을 알았다. 그러나 이 말들은 좋은 의미를 가질수도 있다. 설사 우리가 세상의 눈에 비치는 큰죄의 오염에서 우리의 손을 깨끗이 지킨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속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은 너무나 많은 숨겨진 죄악으로 우리를 책망하심으로, 우리의 모든 정결과 결백의 겉치레를 영원히 벗기고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보시기에 우리 자신이 얼마나 추악한가를 깨닫게 하실수 있는 것이다. 바울은 바리새인이었을때에 자기의 손을 매우 깨끗이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그의 마음속의 죄를 드러내고 "그를 개천에 빠뜨린" 정욕을 그에게 깨닫게 해주었던 것이다.
② 그는 자기가 하나님과 더불어 공평한 재판을 받을수 없다고 절망한것 같다. 욥은 자기가 하나님과 타협을 할수 없음을 불평하고 있다(32절).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나는 나같은 사람과는 과감하게 논쟁할수 있으나 하나님과는 논쟁할수 없도다. 우리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 그런 판결자가 없다는 불평은 결국 그런 판결자가 있었으면 좋을 뻔했다는 이야기이므로, 70인역은 이 구절을 이렇게 옮겨놓았다. "오 우리사이에 중재자가 있었더라면!" 만약 중재자가 있었더라면 욥은 기꺼이 이 문제를 그에게 위탁했을 것이지만, 어떤 피조물도 그런 중재자가 될수 없으므로 욥은 이 문제까지라도 하나님께 맡겨서 하나님의 판결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해야 했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하늘과 땅을 중재하시는 복된 판결자이시다. 복음은 이와같은 불평의 여지를 전혀 남겨두지 않는다. 욥은 이전에 그가 하나님께 나아갈때에 가지고 있었던 그 확신을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께 말씀을 드려야할지를 몰랐다(34,35절). 주께서 그 막대기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이 말은 자기에게 임한 외적인 고통보다는 자기를 '두렵게 하는' 그 '두려움'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2) 이 모든 것들에 비추어서 우리는 심령이 상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며,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좋은 생각들을 지니도록 해야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하여 독하게 생각하는 것은 많은 불행의 발단이 되기 때문이다.

# 핵심
9:1-20
욥은 하나님앞에서는 고난을 당하는 자나 편안히 거하는 자나 모두가 죄인일수밖에 없다고 말함으로써 빌닷의 신앙관을 논박한다. 욥은 자신이 결코 완전무결한 의인임을 내세우지 않았다. 단지 자신에게 임한 끔찍한 고난을 당할만한 죄를 짓지는 않았음을 밝혔을 따름이다.
판결자(9:33)
원문(히, 모키아흐)상으로 ‘중재자’(mediator)로도 번역된다. 이 말은 죄인인 인생이 하나님과 사람에게 동시에 접근할수 있는 중보자를 절실히 필요로한다는 심오한 진리를 함축하고 있다. 즉,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중보”(딤전 2:5)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어렴풋하게나마 예시하고 있는 것이다.

# 묵상
빌닷의 변론에 대한 욥의 답변 ( 9:1-10:22 )
욥은 주권적인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면서도, 분명한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불만을 토로하는 한계를 보여주었습니다. 당시 욥은 고난의 정도가 심각했습니다. 이럴때 흔히 우리는 도식적인 인과응보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할수도 있습니다. 유일한 해결방법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깊은 신앙뿐입니다.
하나님과 쟁변할수 없는 인간 ( 9:3 )
인간이 하나님과 쟁변할수 없는 이유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유한한 인간과 동등한 분이 아니라 초월적인 분이시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판단기준은 인간의 판단기준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수준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기 때문에 신령한 계시를 받지않고서는 그 누구도 하나님의 뜻을 알수 없는 것입니다(엡4:13).
항변과정에서의 욥의 실수 ( 9:11-24 )
욥은 하나님의 공의가 종말론적으로 실현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즉 그는 인과응보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신의 고난이 마치 하나님께서 태만하셔서 나타난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으로인해 욥이 결국 하나님의 책망을 받았던 것처럼 이러한 실수는 우리도 범하기 쉬운 것입니다.
하나님과 변론할수 없었던 욥 ( 9:15 )
욥은 자신이 하나님앞에서 자기의 의를 내세울수 없는 죄인이며, 오직 하나님만이 홀로 공의로운 분이시라는 것을 깨달았기때문에 감히 하나님께 대답하지 못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중의 인간이 하나님께 할수 있는 일은 오로지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긍휼에 간절히 호소하는 것뿐입니다.
욥의 주장 철회과정에서 나타난 교훈 ( 9:25-35 )
본문을 통해 저자는, 인간은 행위로 의롭게 될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롭다 인정하심을 받는다는 복음의 말씀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고통속에서 그리스도를 향해 간구하는 자세는 진실한 믿음의 태도요, 표본입니다. 이는 고통가운데 있을지라도 그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아가며 자신의 신앙적 한계를 깨우쳐가는 신앙인의 영적 성숙과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경적 복의 개념 ( 9:25 )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으로 회복된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구약의 복은 주로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반면에 신약의 복은 내세적이고 영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소유하고 있는 복은 천국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게될 영원한 풍요로움과 안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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