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udy

Ⅰ. 가뭄으로인한 호소 14:1-9
(1) 본문에는 재난을 슬퍼하는 말이 나온다. 하늘이 놋과 같이되어 이슬 한방울 내리지않으며 땅은 쇠와 같이되어 아무런 산물도 내지않는다. 슬픔과 혼란이 만연하였고 그땅에 있는 백성들은 온통 눈물에 젖었다. 저희 죄로인하여서가 아니라, 비가 오지않음으로 인해서 '유다가 슬퍼한다'(2절). '성문의 무리가', 곧 성문으로 드나드는 모든 사람들이 '곤비하였고' 필요한 물자의 결핍과 계속될 심판에 대한 두려움으로 창백하게 보였으며 갈수록 연약하게 되었다. 성문의 무리들은 이제 음울한 분위기아래 놓여있다. 거민들은 다른나라들로 양식을 구하기위해 떠나고 있다. 문에 앉아있는 자들도 곤비케 되었다. 땅에 앉아 애통하니. 그들은 상주처럼 애곡하고 거지처럼 땅바닥에 쓰러진다. 예루살렘의 부르짖음이 위에 오르도다. 즉, 성민(성의 식량물자는 들에서 나는 것으로 충족되기때문에), 또는 전국 각처에서 온 사람들이 비를 위해 기도하고자 예루살렘에서 모였다. 그렇지만 이것은 기도의 부르짖음이라기보다는 고통의 절규이었다고 볼수 있다. 그땅의 고관들은 이심판을 느꼈다(3절). 귀인들은 자기 사환들을 보내어 물을 길으라 하나. 그들보다 비천한 사람들, 그들의 종들은 물을 구해오도록 보냄받았다. 그러나 어디에도 물은 없었다. 그들은 '빈그릇으로 돌아왔다.' 샘들은 그곳을 채워줄 비가 오지않아서 죄다 말랐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그 상전들)은 '부끄럽고 근심하였다.' 농부들은 가뭄에 가장 즉각적인 타격을 받았다(4절). 밭가는 자가 부끄러워서. 왜냐하면 땅들이 쟁기가 들어가지 않을정도로 메마르고 단단하게 굳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일할수 없어 놀고있는 것이 부끄러웠다. 농부들이 하나님의 섭리에 얼마나 직접적으로 의존하고 있는지 주목하라.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밭고랑에 물을 대주시지 않으면 소망을 가지고 쟁기질을 할수도 씨를 뿌릴수도 없다(시 65:10). 들짐승들의 경우조차도 참으로 불쌍하였다(5,6절). 유다와 예루살렘은 죄를 지었다. 그렇지만 암사슴과 들나귀들, 그것들은 무엇을 잘못했는가? 암사슴들은 특히 그새끼들에게 자애스러운 동물이다. 그런데 그본성과는 반대로 그들은 자기 새끼들을 내어버렸다. 그것도 그새끼들이 어미를 가장 필요로하는 시기에, 다른곳으로 풀을 찾으러 가기위하여 그리하였다. 풀을 찾지못하면 젖을 빨릴수 없기때문에 새끼들을 내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암사슴의 슬픔은 자신을 위한 풀이 없다기보다는 새끼에게 줄것이 없어서였다. 이사실은 당연히 가족들을 위하여 예비해두어야할 것을 자신의 욕망으로 탕진해 버리는 자들을 부끄럽게할 것이다. 들나귀들까지도 가련한 마음을 들게하였다. 황야는 이제 그들이 거하기에는 너무도 뜨거웠으며 그래서 그들은 가능한한 가장 높은 '자산위'에까지 이르렀다. 그곳의 공기가 매우 시원하였으므로 그들은 끊임없이 숨을 헐떡이는 동물인 '시랑같이' 바람을 들이마신다. 그들의 '눈이 아득하여 하며' 기운역시 아득한 것은 거기에도 풀이 없기 때문이다.
(2) 죄를 애곡하고 재난에 대해서 하나님께 호소하는 말이 나온다. 백성들은 기도를 시작하지 않지만 선지자는 여기에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으며 그리하여 저희 스스로 기도하게끔 그들을 자극하려고 한다(7-9절). 이기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죄가 겸손히 고백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우리에게 고난을 주심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부당하게 혹은 불친절하게 대하고 계시다고 그와 쟁변한다면 우리의 죄악이 우리의 부당성을 증거할 것이다. 우리의 타락함이 많으니이다(7절). "그리고 사면되기에는 너무도 극악하나이다. 이는 그것들이 당신을 거스린 죄들이기 때문이니이다."
2) 자비가 간절히 구해지고 있다. 우리의 죄악이 우리에게 대하여 증거할지라도 주는…일하소서. 참회자와 걸인이 되었을때처럼 그들은 그일을 하나님께 의뢰한다. '주의 보시기에 좋은대로 우리에게 행하소서'(삿10:15). "우리 자신들에게는 내세워 청원할만한 것이 전혀 없나이다. 오직 당신께 달려있나이다." 이기도에는 또다른 청원이 담겨있다(9절). "우리를 버리지 마옵소서."
3) 하나님과 그들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기대가 참으로 비장하게 탄원되고 있다(8,9절).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구원해주셔야 한다고 생각할만한 이유가 있다고 보았다. 그분안에서 자비가 곧잘 심판에 맞서서 즐거이 부여되곤 했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희망을 두라고 그의 백성을 격려하셨었다. 매번 스스로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반석,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로 부르시면서 하나님께서는 친히 '이스라엘의 소망'이 되셨었다. 그래서 그들은 청원한다. "주는 오히려 우리중에 계시나이다. 우리는 주께서 우리에게 임재해 계시다는 특별한 징표를 가지고 있나이다. 주의 성전, 주의 법궤, 주의 신탁이 우리에게 있으며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 곧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고 불리우는 자니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께서 우리를 버리지않으실 것을 믿나이다. 우리는 주의 것이오니 우리를 구원하소서." 하나님께서 저희를 구원하시기위하여 나타나시지 않는다는 생각이 그들을 슬프게 하고있다. "애굽인들이 무어라 하겠나이까?"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스라엘의 소망이시자 구원자께서 그들을 유념치 않으시도다. 그는 그땅에서 거류하는 자같이, 곧 낯선 타인같이 되었으며 저희의 이해와 권익에 상관치 않으시도다. 그의 성전을 일찍이 자기의 영원히 쉴곳이라고 부르셨었으나 이제는 더이상 그렇지 아니하도다. 그곳에서 그는 하룻밤을 유숙하는 행인같이 행하시도다." 원수들은 한때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인도할 능이 없는고로 광야에서 죽게 내버려두었다고 말했었다(민14:16). 그런데 이제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여호와의 지혜와 능력이 쓸모없게 되었도다. 그는 마치 '놀라 벙벙하는 자'(비록 인간의 이성을 가졌으면서도 그이성의 한계점에 부딪친 자)같으며 '구원치 못하는 용사'같도다." 이같은 말들은 하나님의 온전하심에 대한 가장 참을수 없는 모욕일 것이다. "그런즉 우리가 '우리중에 계시다'고 확신하는 하나님께서 왜 '거류하는 자', 낯선 타인같이 되시나이까? 여전히 능력이 많으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왜 아직도 구원하실수 없는 것이니이까?"

Ⅱ. 미혹한 자와 미혹된 자의 파멸 14:10-16
본장에 나오는 하나님과 그의 선지자간의 언쟁은 마치 열매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에 대해 소유주와 과원지기가 벌였던 변론과 같다(눅13:7). 소유주의 공의는 그나무를 찍어버리라고 정죄한다. 반면에 과원지기의 온후한 마음은 연기해주도록 중재한다.
(1) 하나님께서는 청원을 물리치시며 '이백성에 대하여' 말씀하신다(10절). 그는 '나의 백성에 대하여'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데, 이는 그들이 그와 맺은 언약을 파기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죄를 범하였으며 그것을 거두지 않을수 없게끔 하나님의 진노를 야기시켰다. 하나님은 여기에서 선지자에게 그들이 용서받기에 적합치 못하다고 말씀하신다. 선지자는 그들의 '타락함이 많음'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돌이킨다면 아직도 희망은 남아있었다. 그러나 '이백성'은 되돌아올 기색을 전혀 보여주지 않았으며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였다.' 그들이 타락함은 그들의 즐거움이 되었으므로 이제 그들의 수치가 되어 마땅하였다. 그들이 어그러진 길로 나아간 것은 불가피한 실수때문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것으로인해 하나님의 은총이 박탈된 것이다. 그들은 경고를 듣지않았으며 '그발을 금하지 아니하였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지금 그들에게 논쟁하고 계시는 일이다. 그가 그들에게 하늘로부터 비내려 주시기를 거절하셨을때, 그는 '그들의 죄를 기억하고 그죄를 벌하고' 계신 것이다. 그리고 그로말미암아 그들의 옥토가 이처럼 염밭이 된것이다. 비록 그들이 스스로 금식하고 기도하며 번제와 희생제를 드린다고 할지라도 여호와께서는 '그것을 받지 아니하신다'(10절). 즉, 하나님은 거기에서 어떠한 즐거움도 취하지 않으신다(이렇게 해석할수 있다). "그들이 금식할지라도(12절, 이는 회개와 개혁의 적절한 표현이다), 그리고 번제와 소제를 드릴지라도(이는 중보자를 믿는 신앙의 표현으로 의도된 것이다), 비록 그들이 과거에라면 으례히 열납되었을 그러한 수단으로 기도드릴지라도, 그들이 겸손한 마음, 회개하여 새로워진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고 있기때문에 내가 그부르짖음을 듣지 아니하겠고 그것을 받지 아니하리라. 그들 개개인도 또한 그들의 행위도 받지 아니하리라." 이백성은 선지자의 기도를 통해 받을수 있는 모든 유익도 빼앗기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선지자에게 되풀이하여 명해진 금지의 의미이다(11절). "전에 말하였던바와 같이 너는 이백성을 위하여 복을 구하지말라"(7:16;11:14). 이것은 백성들에 대해 선지자가 호의를 표현하는 것에 관한 금지가 아니었다. 백성들이 저희의 귀를 돌려 율법을 듣기를 거부하는한 그기도로 인하여 어떤 유익을 얻을 것을 기대하지 말라는 금지였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말씀이 뒤이어 덧붙여진다(12절). 내가…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그들을 멸하리라.
(2) 선지자는 백성들의 완악함에 대해 변명함으로 다른 청원을 제기한다. 즉, 하늘로부터 위임받았다고 자처하는 선지자들이 평화를 보장함으로써 백성들에게 아첨하였다는 것이다(13절). 그는 애통해하면서 그말을 하고있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당신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너희가 칼을 보지 아니하겠고 기근이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하는 자들이 있나이다. 그들은 마치 그것이 당신께로부터 나온듯 말하나이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계속하여 이곳에서 머무르게 하실 것이며 '확실한 평강을 주실 것이라'고 그들은 말을 전했나이다. 하지만 상대는 많음에 비해서 나는 혼자일 뿐이니이다. 그러므로 여호와여, 그들을 가련히 여기시고 구하여 주옵소서. 그들의 인도자가 그들로하여금 실족하게 하고 있나이다." 이변명은 만일 백성들이 이전에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를 받지 않았었다면 어느정도 비중을 지니게 되었을 것이다.
(3) 하나님께서는 이청원을 물리치실뿐만 아니라 눈먼 인도자들과 눈먼 추종자들 모두가 함께 구덩이에 빠지게되리라고 정죄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입에 발린 말을 용납하지 않으신다(14절). 선지자들이 내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도다.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예언하라는 위임을 전혀 받지 아니하였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하거나 이르지 아니하였거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저희 자신의 생각으로 맞서는 자들은 '자기 마음의 속임으로' 행한다. 그리고 그것은 저희의 파멸이 될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입에 발린 말을 하는 자들에게 판결을 내리신다(15절). 선지자로서 그들은 저희 스스로가 평강을 누리지 못하게 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칼과 기근이 이땅에 이르지 아니하리라'고 백성들에게 보증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들 자신들이 칼과 기근으로인해 멸절될 것이다. 그 거짓된 예언을 받은 백성들, 기꺼이 자원하여 그예언에 속아 넘어간 백성들은 기근과 칼로인하여 죽을 것이다(16절). 저희의 시체들은 '예루살렘 거리에 던짐을 입을 것이다.' 그곳에서 그들은 매장되지도 못한채 널려있을 것이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악을 그위에 부을' 것이다. 다시말해서 그들의 악에 대하여 징벌하실 것이다.

Ⅲ. 예레미야의 탄원 14:17-22
유다와 예루살렘이 처해있는 비참한 상황이 본문에서 선지자가 애곡하는 이유이며(17,18절) 동시에 그들을 위해 그가 기도하는 이유이다(19절). 전자와 마찬가지로 후자역시 하나님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리고 17절의 말씀, '너는 이말로 그들에게 이르라'는 말씀은 애곡을 가리킬뿐 아니라 중보도 가리키고 있다. 그리하여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고 선지자에게 명하셨던 이전의 지시를 철회하셨음을 뜻하는 것이다(11절).
(1) 선지자는 자기 조국의 멸망을 슬퍼한다. 예레미야는 그사실을 마음속에 생각해보아야할 뿐만아니라 그들에게 말해야만 했다. 내 눈이…눈물을 흘리니(17절). 이렇게하여 그는 자기가, 다가오고 있는 칼과 함께 또다른 기근을 미리 보았으며 그것은 그성읍의 포위가 엄중함으로인하여 그러하리라는 것을 그들에게 알려주어야 했다. 선지자는 여기에서 마치 갈대아인의 공격에 수반되는 불행을 눈으로 보기라도 한듯이 말하고 있다. 이는 처녀딸 내 백성이 큰파멸, 중한 창상을 인하여 망함이라. "이제껏 있었던 어떤 것보다 크고 중한 파멸과 창상으로 망하리라. 들에는 '칼에 죽은' 시체들이 무수히 널려있으며 성에는 먹을 것이 부족함으로 말미암아 죽어 누운 자들이 부지기수이리라. 선지자나 제사장이나, 거짓말로 백성들에게 빌붙던 거짓 선지자들이나 참된 선지자들을 핍박하던 악한 제사장들이나 모두 추방되었도다. 그들은 포로로 혹은 도망자나 떠돌이로 땅에 두루다니며 알지못하는 낯선 땅에서 도피처를 찾을수 있을까하고 헤매리로다." 혹자는 이말씀을 남은 무리들과 함께 바벨론으로 끌려갔던 참된 선지자들, 에스겔과 다니엘에 대한 언급으로 해석한다. 선지자의 눈은 장차될 이일을 생각하여 '밤낮으로 끊치지 아니하고 눈물을 흘려야' 했다. 이렇게하여 그는 백성들이 저 무서운 날이 반드시 이를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만일 하늘로부터 보장만 얻는다면 자신도 그들에게 기꺼이 평강의 메시지를 전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혹시 깨달을까 하였다.
(2) 선지자는 백성들을 위해 중보역할을 하고자 일어선다. 그들중에는 혹간 그의 신앙에 함께 참여하려는 자들이 있었으며 그의 기도에 '아멘'하고 인치려는 자들도 있었다.
1) 그는 저희가 처한 형편에 관하여 겸손히 하나님께 간구한다(19절).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기대는 좌절되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유다가 그의 소유임을 공언하셨다고 생각했지만 그러나 이제 그가 '유다를 온전히 버리신'듯이 보였다. 그들은 시온이 사랑받았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러나 이제 그의 '심령이 시온을 싫어하심을' 알았다. 그리고 거기에서 드려지는 예배까지도 싫어하심을 알았다. 여타의 모든 그들의 기대들과 어긋나 버렸다. 하나님은 그들을 '치시고', 그상처들이 헤아릴수 없었건만 그들을 '치료하지 아니하셨다.' 그들은 '평강을 바랐다.' 폭풍뒤에는 으례히 고요가 뒤따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치료받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숨쉴 시간조차 얻을수 없이 오직 '놀람을 볼' 뿐이었다. "보소서. 평강이 오리라고 기대하던 문에서 놀람, 곧 환난을 보나이다. 이제 주께서는 노하심으로 자비를 기억지 않으시려나이까?"
2) 그는 죄에 대한 참회의 고백을 하고있다. 이는 그들 모두가 말해야만 하는 것이었지만 이말을 하는 자는 거의없었다(20절). "우리가 우리의 악, 우리 땅에 가득찬 악과 우리 조상의 죄악을 인정하나이다. 우리는 그들의 죄를 그대로 따랐나이다. 우리가 주께 득죄하였음을 알며 인정하나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우리에게 내리신 모든 일에 있어서 공의로우시나이다. 하지만 우리가 죄를 자백했으므로, 우리는 죄를 용서하시는 당신의 신실하심과 공의로우심을 보기 원하나이다."
3) 그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사해지기를 탄원하며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에 호소하고 있다(21절). 그의 청원은 이러하다. "우리를 미워하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실지언정 우리를 미워하지 마옵소서. 주의 손으로 우리를 치실지언정 마음으로는 그리하지 마옵소서. 주의 마음을 우리에게서 멀리하지 마옵소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공의로우사 자기들을 미워하심을 인정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렇게 기도한다.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미워하지 마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우리가 불리우며 또한 그이름으로 우리가 호소하기 때문이나이다." 하나님의 성소의 영광을 들어 청원한다. "여호와여, 우리를 미워하지 마옵소서. 주의 영광의 위를 욕되게 할까하나이다. 우리는 수치를 당해 마땅하지만 성전을 훼파하지는 마옵소서. 거기에서 섬겨지던 그이름을 비방할 기회를 이방인들에게 주게될까 함이니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땅에서 '주의 영광의 위를 욕되게' 하지 않으실 것을 확신할수 있다. 그들은 겸손하면서도 담대하게 하나님께 이같이 상기시키고 있다. 우리와 세우신 주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폐하지 마옵소서.
4) 선지자는 하나님께 비를 내려주시기를 간구한다(22절). 그들은 결코 이방인의 우상들에게 간구하지 않을 것이다. 열방의 허무한것 중에 능히 비를 내리게 할자가 있나이까. 이스라엘에 큰가뭄이 들었을때, 곧 아합왕때에 이스라엘이 바알에게 기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바알은 그들을 구해줄수 없었다. 물로 응답하실수 있으셨던 이는 역시 불로써 응답하셨던 하나님뿐이었다. 하늘이 능히 소나기를 내릴수 있으리이까. 하늘의 하나님으로부터 명령받지 않고는 비를 내릴수 없다. 왜냐하면 구름의 열쇠를 가지신 이, 하늘의 창을 여시고 자기 거하는 곳으로부터 땅을 적시는 이는 바로 그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모든 기대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그리하는 자가 주가 아니시니이까. "주로부터 구원을 바랄수 있는데 우리가 주께 의뢰해야 하지 않겠나이까? 능히 비를 내리게 할수 있으시며, 능히 소나기를 내릴수 있으신 이가 바로 주가 아니시니이까? 왜냐하면 주께서 이모든 것을 만드셨음이니이다. 주께서 그것들을 있게 하셨고, 그러므로 주께서 그것들에 법을 주시며 그것들 모두를 주의 명령아래 두고 계시나이다. 우리가 여호와께 비를 구하리이다(슥10:1). 우리가 적시에 비를 내려주시는 주를 의뢰하리이다."

# 핵심
14:1-15:9
유다 전국을 강타할 가뭄재난을 묘사한 다음, 고통스러워하는 유다 백성을 위한 예레미야의 중보 기도와 이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을 대화식으로 기록하고 있다.

# 묵상
이 시기의 역사적 배경 ( 14:1 )
이는 여호야김 왕때의 한재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때의 가뭄은 전국적으로 극심해서 많은 백성들이 굶주림으로 고통당했다고 합니다. 이 가뭄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이었습니다.
주의 이름을 위해 간구하는 선지자 ( 14:7 )
본문의 의미는 죄가 눈앞에 있어 사람을 죄인이라고 증거할지라도 여호와께서는 주의 명성과 자비를 위하여 죄인을 사해주십사는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는 결코 사함받거나 의로울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위해서 구원을 베풀어주실때 구원을 받을수 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위해 중보기도한 것처럼(출32:11-14; 민14:13-25), 예레미야도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백성을 구원해주실 것을 기도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기도를 하거나, 다른 무엇을 하든지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합니다(고전10:31).
소용이 없게된 금식과 번제 ( 14:12 )
금식과 번제와 소제는 마음의 죄를 통회하고 용서를 구하기위하여 행해지는 종교의식입니다. 그러나 마음으로부터의 진정한 회개없이 행해지는 종교의식은 다만 위선이요 신성모독일 뿐입니다. 즉, 통회와 자복과 회개가 수반되지 않는 종교행위는 아무리 가혹한 고행이라 할지라도 그가치를 발하지 못합니다.
평강을 말하는 거짓 선지자 ( 14:14-18 )
예레미야가 평강하다 말하는 선지자들을 가리켜 거짓 선지자라고 지칭합니다. 그이유는 그들이 거짓 환상, 곧 거짓 계시와 복술과 허탄한 것과 자기 마음의 속임으로 예언했기 때문입니다. 또 그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말이 아니라 사람들이 듣기원하는 말만을 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메시지의 특성은 사람들 귀에 즐거운 말만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을 경고하는 참선지자에 비해 거짓 선지자들의 말은 백성들의 큰지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 메시지였고 백성을 멸망으로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평강하리라는 그들의 예언은 유다의 멸망을 통해서 거짓임이 드러났습니다.
예레미야의 중보기도의 근거 ( 14:19-22 )
그근거는 바로 주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과 언약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셔서 광야에서 죽게하심이 하나님 이름의 수치임을 근거로, 백성들의 죄를 위해 중보기도를 드렸습니다. 이처럼 예레미야도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지지 않기위하여 그리고 이스라엘과 맺으신 주의 언약을 인하여 이스라엘을 사해주실 것을 간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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