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면류관을 뺏기지 맙시다 (공재영 목사님)
[요한계시록 3장 7절~13절]
7절 -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8절 -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9절 -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10절 -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11절 -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12절 -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13절 -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오래 전에 모 일간 신문에 이런 글귀가 실렸다면 지금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까? 그 내용은 “65세 된 의지할 데 없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100원에 팝니다.”라는 글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조롱하고 비웃으며 하는 말이 내 부모 모시기도 힘든데 돈 100원까지 주며 사라니 무슨 말도 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어느 날 조실부모한 젊은 부부가 사러 왔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 어르신들이 억대 재산을 가진 부자인데 자신들의 재산을 물려줄 대상을 찾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남의 부모를 100원 주고 사러 온다면 자기 재산을 맡기고 남은 생을 함께 살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고통과 시련이 많은 빌라델비아 교회를 위로해 주시는 주님의 약속이 열린 문을 두었다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나 그 문을 열고 닫을 수 없는 오직 그 교회에게만 허락된 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원망과 불평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자기 자신을 위해 좋은 일 곧 면류관이 있음을 믿을 때에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가 복되게 열려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자신에게 주어진 면류관을 빼앗긴 사람이 있습니다. 에서라는 사람은 동생 야곱에게 자신의 축복권 곧 장자권을 뺏긴 후 눈물을 흘리며 찾으려 했으나 소용없었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자신의 왕권을 다윗에게 뺏겼으며 예수님의 제자 가룟 유다는 축복의 사도권을 이름 없는 맛디아에게 뺏겼던 것입니다. 모든 성도에게는 축복된 약속이 있으며 그것을 뺏으려고 유혹하는 세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면류관을 뺏기지 맙시다.
1. 작은 것에도 충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8절).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의 자리에서 남에게 추하게 보이지 않고 함께할 수 있도록 세워지는 사람을 일컬어 보기에 좋아 보인다고 말합니다. 이 자리는 많은 재산을 가진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하는 일을 만족하면서 웃을 수가 있고, 여유는 많지 않지만 자신의 몫을 기쁘게 감당하며 살아가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자리는 어떤 자리입니까? 그것은 작은 것에도 충실하게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우리 사회가 어느 때부터 작은 것에 대하여 우습게 여기는 풍토가 많이 조성되어졌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보여주는 현상이 땀 흘리며 얻어지는 보상을 크게 보려고 하지 않고 남보다 잘 되는 것만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자리가 얼마나 무지한 자리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이 살아있다는 것을 모르고 죽어 있는 세상 곧 자기 계산에만 맞추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세상은 반드시 움직이는 세상이라는 것이며 나 자신이 어디에 있을지라도 세상이 나를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굽어진 삶을 살아간다고 해서 세상이 굽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지극히 공정한 자리에서 열려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눈에 불법과 불의를 행한 자가 더 잘 사는 것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평을 하게 되고 원망하며 자신의 자리를 닫아버리게 됩니다. 분명한 것은 언젠가는 그 결과가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컬어 역사적 심판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그 역사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에게 증거하시기를「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20:26,27)」고 했습니다. 그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 예수님이 본문에서 자신의 면류관을 뺏기지 않는 삶을 가르쳐 주시기를「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작은 것이란 누구에게나 열려지는 일상의 자리에서 소유하는 것을 말합니다. 1초 1분의 나의 시간, 나 자신이 무시하고 싶은 나의 자리가 작은 것입니다. 이 자리에서 충실하게 살아가는 지혜를 가질 수 있을 때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이 귀한 사람이며 면류관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자신을 세우는 복을 알고 살아가야 합니다(9절).
세상이 살아있다는 것은 그 세상은 세우는 사람으로 살 때에만이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원망과 불평으로 살아가면 결코 자신을 웃을 수 있게 하는 세상은 열려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힘들게 느껴지는 것은 세상을 세우는 자신의 복을 닫아버리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어느 때에 자신을 세우는 복을 알아야 합니까? 그것은 좋을 때보다 나쁜 일이 생겼을 때이며 가진 것이 있을 때보다 많은 것을 잃어버렸을 때, 더 중요한 것은 기회가 있다고 생각되어질 때보다 기회가 없다고 생각하고 싶을 때에 자신을 세우는 복을 열어가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나 자신이 있음으로 더 좋게 보여지게 하는 삶을 살아가는 자세를 가질 때에 자신을 세우는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의 배경은 성도가 세상을 살아갈 때에 성도의 삶을 무너뜨리는 악한 환경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때 자신을 세우는 복이 무엇인가를 아는 지혜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의 눈에 보이는 현상만을 보지 말고 이 세상을 누가 다스리고 있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 자리를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런 복된 자리가 있기에 예수님은 작은 것에도 충실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하나님이 보시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 자리가 성도가 교회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리이며 세상을 살아갈 때에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자리에서 냉수 한 그릇을 주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나의 성도들을 내 앞에 모으라 그들은 제사로 나와 언약한 이들이니라(시50:4)」고 했고,「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막9:41)」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이 자신의 삶에 중심이 되는 삶 곧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모습에서 행해지는 자리를 복되게 세울 때에 면류관을 뺏기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3. 이기는 삶을 끊임없이 열어가야 합니다(12절).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실 때에 수많은 천군과 천사들이 하나님을 찬송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찬송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이었고 세상에는 분쟁과 소요가 끊임없이 소용돌이 쳤기 때문입니다. 그런 세상에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을 찾게 했으며 이 땅에 평화를 열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이 증거하시기를「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요14:27)」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평안의 자리는 어떤 것입니까?「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평안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이기게 하시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이기는 자리를 열어주는 것을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19:26)」고 하셨습니다. 이 역사를 위해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내 마음에 모실 때에 성령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잡아 주시면서 세워주신다고 성경은 크게 증거하고 있습니다.「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기는 것은 어떤 자리입니까? 이 자리는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시고 세워주신 자리입니다. 그것은「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1:31)」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을 열어가는 지혜가 이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상식적인 자리입니다. 좋게 보이는 것과 나쁘게 보이는 것, 밝은 모습과 어두운 모습, 감사하는 생활과 불평과 원망하는 생활, 사는 복을 붙잡는 것과 사는 복을 포기하는 것 중에서 나를 세우는 것을 알 때 이것이 이기는 삶을 열어가는 것입니다. 감사한 것은 예수님을 모시고 살면 성령님이 좋은 것으로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족하는 삶인 것입니다. 여기에 면류관이 보이게 됩니다. 그 면류관을 보게 하신 예수님이 본문에서「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 곧 천국에 기둥이 되게 하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기는 성도의 삶을 열어갑시다.
결론을 맺습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면류관을 예비하셨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딤후4:7,8) . 단 하나님이 열어놓은 경기장에 세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면류관을 뺏기지 않기 위해 첫째 작은 것에도 충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둘째 자신을 세우는 복을 알고 살아가야 합니다. 셋째 이기는 삶을 끊임없이 열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행복을 누리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행복을 고백하며 세상을 살아가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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