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대 술관원의 임무와 대우

고대 근동의 왕궁에는 왕이 식사할때 주류를 시중드는 술맡은 관원이 있었다. 그런데 궁중 안에는 왕에 대한 음모와 책략이 항상 도사리고 있기 일쑤였기 때문에 왕의 술시중을 드는 술관원을 세우는데 매우 신중을 기해야 했다. 그래서 일단 왕에 의해 간택된 술관원은 왕이 드는 잔에 독이 있는지 살펴보아야 했고, 때로는 술을 왕에게 드리기 전에 먼저 조금 마셔보아야 했다. 따라서 왕의 신임을 한몸에 받았고 또 상당한 권력도 부여받았다. 예를들어 창세기 40장에 나오는 애굽의 술맡은 관원장도 애굽의 상당한 고관이었다. 때문에 요셉은 자신의 누명을 벗겨주기를 그에게 당부했던 것이다. 또한 앗수르왕 산헤립의 부하 랍사게(왕하18:17)도 사실상 술맡은 관원장이었다. 그것은 랍사게라는 이름이 앗수르어로 술맡은 관원장을 가리키는 직함인 사실에서 알수 있다. 고대의 술관원이란 오늘날 경호와 비서 업무를 총괄하는 고위직과 유사하다고 볼수 있다.

2. 포로귀환 시대의 대제사장의 사회적 역할

1) 사회적 역할
포로귀환이 시작될 무렵부터 대제사장의 사회적 역할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제1차 포로귀환 당시(B. C. 537) 스룹바벨과 함께 대제사장 예수아가 백성들의 최고 지도자로서 그 역할을 수행했다(스2:1; 느7:6). 또한 스룹바벨 성전 재건 당대의 역사를 기록한 학개서를 보면 B. C. 520년에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역할이 얼마나 컸던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학1:1,12; 학2:2, 4). 그리고 2차 포로귀환 당시 (B.C. 458)의 지도자였던 에스라도 역시 대제사장이었다. 그는 당시 1차 포로귀환때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백성들의 이방인의 통혼 문제 등 기타 많은 문제의 개혁과 율법 교육을 통한 백성들의 신앙 교육, 즉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마땅히 가져야할 마음 자세 및 생활 교육으로 인하여 종교 부흥을 가져올 수 있었다. 그런데 3차 포로귀환 당시에는 (B. C. 444) 느헤미야가 유대 총독으로서 그의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했기 때문에 대제사장의 역할은 다소 적어진 듯하다. 그러나 그것은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라는 국가적 사업으로 인해 그렇게 된 것이며, 대제사장의 사회적 지위 자체가 격하된 것은 아니다. 느헤미야 당시 대제사장은 엘리아십이었다(느3:1). 그는 성벽 재건 당시 백성들의 모범이 되어 선봉에서 그 역할을 잘 감당하였다. 그러나 그는 느헤미야가 약 1년동안 예루살렘을 떠나있는 동안에 암몬 지방 총독 도비야와 친분을 맺고 그에게 성전 뜰의 한방을 내어주는 실책을 범하기도 했다. 하지만 조정적인 측면에서 그것도 결국은 암몬 지방 총독 도비야와 제휴함으로써 예루살렘 거주민의 안정을 도모코자 했던 것이라고 볼수도 있다(느13:4). 이처럼 포로귀환 당시의 제사장은 사회의 최고 지도자로서 그리고 백성들의 모범자로서 그 역할이 지대하였음을 알수 있다.

2) 제사장의 지위 격상 이유
신정 국가인 이스라엘에서는 '대제사장'이 종교 지도자로서뿐 아니라 사회적, 국가적 측면에서 볼때 대제사장의 지위는 왕정 시대와 그 이전보다 포로귀환 시대 이후에 훨씬 더 격상되었다. 그 이유는 왕정 시대에는 왕이 국가의 최고 통수권자였기 때문에 대제사장은 상대적으로 왕의 자문 역할이나 성전과 관련된 국가 행상에만 그 역할을 수행하기 마련이었다. 물론 왕정 시대에 있어서도 국가의 비상시에는 대제사장이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기도 했다. 예를들면 아도니야의 반란과 솔로몬 즉위 초기 제사장들의 세력 형성(왕상1:7; 왕상2:27-35) 그리고 분열왕국 시대 남왕국 요아스 즉위 직전에 악녀 아달랴를 몰아내고 요아스로 다윗 왕권을 계승케한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활약 등을 들수 있다(왕하 11장).
반면에 포로귀환 시대 이후에는 왕이 따로 있었기 때문에 대제사장의 역할은 한층 더 중요하게 여겨졌다. 왜냐하면 포로귀환 시대 이후 외형적으로는 어느 정도 국가의 형태를 회복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강대국의 속국에 불과했던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성전만을 중심으로 한 종교 생활에 전념하였기 때문에 자연히 대제사장의 지위와 역할은 격상될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3. 포로귀환의 영적 의미

기도의 응답으로 이루어진 느헤미야의 귀환은 하나님의 구속사적 흐름이 원만한 방향으로 고정될 수 있었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만약 그의 귀환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 백성들의 약탈로 인해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성전까지도 파괴될 수 있을지 모르는 심각한 영적 혼란을 겪었을지도 모른다. 방해자들과 너무 심하게 파괴된 성벽으로 인해 성벽 재건이 어려웠으나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 하심을 믿음으로 성벽 재건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출처 : 갓피플 자료&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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