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집에 대한 개념 문제

집이라는 말로 헬라 사람이나 유대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했는가 하는 것은 많은 자료를 가진 흥미있는 제목이다. 헬라어로는 oiko"(오이코스)와 oijkia(오이키아) 라는 두말이 기본적이며 전자 '오이코스'는 먼저 동산, 부동산, 주택 등의 전체 자산을 지시했고 그것에 연관되어 아내, 딸, 가족 등의 전재산도 가리켰다. 다른 한편 '오이키아'는 친척 거래인 봉사직의 사람들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두말 모두 비슷한 내용을 가졌다. 구약성서에서는 히브리어의 tyB(바이트)가 '나무와 풀로 된 건물로써 남녀 가족이 거주하는 곳'이라고 간주되었다. 수24:15에서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고 쓰여진 것이 모범적이다. 그러나 랍비 문학에서 이 말을 비유적으로 사용하게 된 것은 특이하다. 그러나 집이 무엇과 같다는 것이 아니라 선행을 하고 율법을 많이 배운 사람은 굳건한 기초 위에 집짓고 벽돌로 그 위에 세워 홍수가 와도 넘어지지 않는 것과 비길수 있다고 해서 그들의 행위가 집짓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신약성서에서는 '하나님' 또는 '아버지'를 '집'과 결합시킬 때가 많고 '하나님의 집, 이스라엘의 집'이라고 해서 성전 건물이나 민족 공동체를 지시했다. 신약성서에 사용된 '오이코스'의 사용을 분류하면 ① 집, 가족, 가산 ② 성전 ③ 인간학적인 비유적 사용이 많고 '장막집, 영원한 집'등이 있다. 가정교회를 지시하는 kat oijkon(카트 오이콘)이 란 말을 살펴보면 '…의 가정에 모이는 교회'라는 표현이 어느 시기에 가서 공식어가 된것 같다(롬16:5 ; 고전16:19 ; 골4:15 ; 몬1:2). 이 말은 '집에서'라는 의미로 흔히 쓰였다. 결국 '집에 모이는 교회'라는 말이다.

2. 원시교회의 선교와 가정교회

처음 그리스도인들은 성전을 지으려 하지 않았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포로에서 돌아왔을때 성전을 짓는다는 것은 그들의 신앙을 확증하고 훈련하는 표가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성전의 예배는 오래 계속되지 않았고, 선교로 나가는 곳이다. 어디서나 예배를 드렸다. 선교설교는 길거리나 장터에서 또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데서 하고 자신들의 기도와 예배는 교회원의 집에서 외부 사람들이 참관할 수 있기는 했으나(행2:13; 고전14:24,25) 다소 비공개적으로 진행했다. 신약성경에서 기록된대로 첫 그리스도인들이 매일 성전으로 올라갔다(눅24:53 ; 행2:46 ; 행3:1 ; 5:42). 또 솔로몬 행각에서(행3:11 ;행5:12 ; 요10:23)곧 성전 회당을 따라 동쪽에 있는 기둥을 나란히 세운 홀에서 설교했다. 그것은 거기에 많은 사람이 왕래했기 때문이다. 거기서 사도들은 병자를 치료하고 설교도 했다. 이것이 모인 군중에게 큰 인상을 주었다. 바울은 회당에서의 집회가 유대인과의 대립을 조장했으므로 그것이 이방인에게로 향하는 계시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장소의 다양성은 단순히 외적 사정에 의해서 선택된 것이며 결코 미리 정해진 모본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같은 집회에서 선교설교의 장소와 성도간의 교제와 성례전과 예배 장소는 다른 곳이 될수 있었고, 같은 장소의 다른 방이 될 수도 있었다. 처음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 예배와 성도의 사귐이 이루어진 장소에 대해서는 지적할 것이 많다. 대부분의 선교설교가 이루어진 곳은 가까운 동료 회원들의 집이었다. 예루살렘에서 요한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행12:12)이 이때 특출한 역할을 했다고 보인다. 이미 성서학자 찬(Th. Zahn)이 성실한 석의적 근거로써 이 집은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들고 '주의 만찬'의 전통을 수립했던 그 집이라고 했다. 후대의 전승에 의하면 이집은 시온산 위에 있었다는 것과 그 안에서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 현현'(눅24:33 ; 요20:19,26)과 성령 강림을 기다렸던 곳(행1:13)이며, 맛디아 선택과 오순절의 성령강림(행2:1) 그리고 예배 집회가 있던 곳이라고 한다(행4:23 ; 12:12). 4세기의 증언에 의하면 이 시온산 위의 작은 첫 사도교회가 예루살렘 성전 파괴 때에도 해를 입지 않은채로 하드리안(Hadrian) 황제가 예루살렘을 방문했을때 그것을 보았다고 한다. 이 집에 대해서 우리가 알수 있는 것은 본체에 거리를 가진 '대문간'이 있었다는 것(행12:13)과 넓은 윗층을 가졌다는 것이다.

3. 가정교회의 의미

①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집합의 필연적 형태였고 결코 여러 가능성 속의 하나는 아니었다.
② 가정교회는 여러계층의 사람들이 한데 모여 하나님 앞에서 인간다운 심정으로 사귀며 말씀에 의해서 단련받기 때문에 생태의 사람들과 당시의 사회를 불로써 재현하는 도가니의 역할을 했다.
③ 가정교회는 그 소속이 하나님께 있고 하나의 유기체와 같이 근육과 뼈마디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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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서신서 가운데 가장 간략하며 사신서(私信書)의 성격을 띠고있는 본 서는 회심한 일개 노예의 안전을 위하는 사도 바울의 애틋한 심정을 잘 나타내 주고있다. 그중 본문은 일개 노예에 불과한 한 영혼의 안전을 도모하고자 먼저 빌레몬의 아름다운 헌신을 확신시켜 자신과 신뢰를 쌓는 것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이는 명령과 강압이 아니라 겸손한 권면으로 문제에 접근하는 바울의 사려깊은 행동을 잘 나타내 주고있다.

1. 진실한 인사(몬1:1-3)
바울은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왜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라고 하였으며, 또 그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리고 이 편지의 인사말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라 할 수 있는가?

1) 빌레몬에 대한 바울의 칭찬
바울은 그의 다른 서신들에서는 자신의 권위를 나타내는 '사도'라는 말로 서신의 서두를 시작하고 있으나, 본 서는 '갇힌 자'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이는 복음을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도 아끼지않고 헌신한 사실을 빌레몬에게 주지시킴으로 뒤이어 언급할 노예 오네시모에 대한 관대한 조처를 호소하고자 함이었다. 사실 바울은 빌레몬을 회심시킨 믿음의 아버지로 그에게 명령을 할 수도 있었으나 감옥에서 거듭난 오네시모를 위한 간청을 보다 효율적으로 전하기 위해 이같은 말을 사용한 것이다. 또한 바울은 수신자들에 대한 이름을 세세하게 밝힘으로 상대방에 대한 그의 예의를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 이는 결국 미천한 한 영혼을 위해 철저하게 자신을 낮추는 겸손과 사려깊은 바울의 모습을 나타내주고 있는데 오늘날 모든 신앙인들의 귀감이 되는 행동인 것이다.

2) 진실한 성도의 기원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대하는 상대방에게 예의와 사랑을 나타내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같은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과 칭송받는 신실한 믿음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도들간에도 더 큰 영적 교제 및 하나님과의 신령한 교제를 통하여 더욱 선한 열매가 넘치기를 간구하여야 한다(행4:32-34). 왜냐하면 그 일이 결국 한 개인의 영적 성숙에 이바지할뿐 아니라 교회에는 크나큰 유익을 제공하며 또 하나님께는 큰 기쁨과 영광이 되기 때문이다.

2. 빌레몬의 사랑과 믿음(몬1:4,5)
바울은 어떻게 빌레몬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는가? 그리고 빌레몬으로 인한 바울의 감사의 제목은 무엇이며 또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1) 빌레몬의 선한 삶
빌레몬에 대한 소식은 골로새서에서 로마 옥중에 있는 바울을 찾아온 그의 수종을 든 골로새 교회의 지도자 에바브라에 의해 전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에바브라가 전해준 빌레몬의 사랑과 믿음에 관환 소식은 빌레몬으로부터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의 증언에 의해 확증되었음이 틀림없었을 것이다.
한편 빌레몬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성도들을 사랑함으로 사랑의 실천자가 되었다. 이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반드시 이웃과 형제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소유한 자로 주위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있음을 바울은 아울러 증거하고 있다. 이처럼 주위 사람들로부터 믿음의 인정을 받고 사는 사람의 생활은 진정 기쁨이 넘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참믿음은 참사랑으로 구체화되고 참사렁은 참믿음으로 그 힘을 얻게되는 것이다(고전13:13). 따라서 바울이 이 진리를 보여준 빌레몬에게 기도할 때마다 그를 기억하고 간구를 잊지않은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2) 성도의 고결한 삶
믿음과 사랑은 정체적인 것이 아니다. 즉 믿음과 사랑은 어떠한 한계나 끝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인간의 믿음과 사랑은 여전히 부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면할수록 부족함을 느끼는 것이 바로 이 믿음과 사랑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영원한 믿음과 사랑의 정진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의무를 지니는 것이다(엡4:13).

3. 빌레몬에 대한 바울의 칭찬(몬1:6,7)
바울이 빌레몬에 대하여 칭찬한 '믿음의 교제'가 의미하는 바와 그로 인한 결과는 무엇인가? 그리고 빌레몬으로 인하여 바울과 성도들은 어떠한 체험을 하게 되었나?

1)빌레몬에 대한 칭찬의 근거
'믿음의 교제'란 구체적으로 두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먼저 믿음을 통한 모든 그리스도인들과의 교제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믿음 안에서 물질적인 도움을 다른 성도들에게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빌레몬은 영적이든지, 물질적이든지 항상 성도들과 교제함으로 바울 일행 가운데있는 선(善), 다시말하면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발견되어져야 할 모든 선을 알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이는 결국 성도들에게는 안정된 쉼과 새로운 용기를 얻게하는 평안함을 주었고(마11:28), 바울에게는 말할 수 없는 영적인 기쁨이 되었는데, 이는 자신이 처한 불행한 상황 가운데서도 위로를 얻게하는 원동력이 되었다(사61:10).

2) 복음의 유익을 위한 성도의 삶
한 개인의 신실한 신앙 생활과 인격은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따라서 교회마다 이러한 신앙인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교회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복음의 터전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웃의 모자람을 비난하기에 앞서 자신이 먼저 믿음의 본을 보이므로 온 교회에 유익을 끼치고, 나아가 세상에서 인정받는 아름다운 신앙인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바울은 로마에 구금되어 있는 동안 빌레몬에게 이 서신을 썼다. 그는 편지의 서두에서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혔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밝히고 있다. 이처럼 그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과 핍박을 받는 중에 기뻐할 수 있었음은 그리스도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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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빌레몬서의 특징 및 구조

1) 특징
빌레몬서는 평범한 가정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다룬 서신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정경 시비가 많았다. 하지만 사사로운 가정 일이지만 그 속에는 훌륭한 교훈뿐만 아니라 본 서를 통해서 보여주는 고귀한 정신은 훗날 기독교 정신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존 칼빈이나 마틴루터는 지적했다. 원래 바울은 신학자요, 사상가이지만 본 서에 보이는 바울은 인간적인 바울의 순수하고 자비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바울서신에서 바울의 신학을 보여주고 있다면 본 서는 그의 윤리관을 엿볼 수 있다. 이런 점이 본 서의 특정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실천없는 신학은 죽은 신학이기 때문이다. 본 서에 보이는 또 하나의 중요한 것은 사랑의 행동을 보여준 바울의 정신이다. 즉 바울이 비천한 노예에게 사랑과 용서를 간구하는 모습이다. 이런 바울의 행동을 예수께서 한마리의 잃어비린 양을 찾으시는(눅15:4 ; 요10:11) 모습에 비유하는 학자도 있다.

2) 구조
빌레몬서의 양식은 의도적으로 구성된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즉 신중하게 한문장 한문장 쓰여 있으며, 단락들이 뚜렷하게 구분되어 있다. 이런점 때문에 개인 서신이라기보다는 공문서라는 느낌이 든다.

2. 가정교회의 형태와 평가

초대교회 당시에는 가정모임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전교를 나누었다(행1:13 ; 행2:46 ; 행5:42 ; 행12:12). 이런 가정모임의 형태는 초대교회 당시뿐만 아니라 3세기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흔적은 고고학적인 측면에서도 발견되고 있는데, 즉 가정집을 교회로 개조한 흔적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당시 일반적 백성의 가옥은 좁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가 없었다. 따라서 주로 교회로 쓰인 가옥은 부유한 가정일 것이다. 아굴라, 브리스길라, 빌레몬,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 등이 모두 부유한 사람들이다. 특히 마가의 다락방 같은 경우는 120여명이 모일수 있을만큼 컸다. 처음부터 교회로 지은 건물이 아니기 때문에 그 형태는 다양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가정교회는 공동의 식사와 공통된 의식속에서 이루어진다. 즉 그리스도와 한몸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가정교회는 단순한 말씀뿐만 아니라 성도간의 코이오니아를 이룰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3. 빌레몬서에 나타난 노예제도
당시 유대는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노예제도는 오랜 관습이기 때문에 당시 사회에서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다. 대부분 노예들은 인격적 대우를 받지 못했으며 심할 경우에는 파리 목숨과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1) 공급 및 매매
노예는 자신에 대한 아무런 권한을 가질 수가 없다. 대부분 노예의 충당은 약탈에 의한 것과 전쟁 포로, 또는 노예의 부모로부터 난 자, 국가의 반역죄를 지은 자 등이 노예가 된다. 당시 로마 같은 경우는 자유인과 노예의 바울이 1:5였으며, 로마 시내 같은 경우는 1:3 정도였다고 한다. 노예는 부의 상징이기도 했다. 따라서 노예의 매매는 주로 경매에 의해 이루어졌다. 노예들은 결혼을 할 수는 있지만 법적인 효력을 발생할 수 없다. 따라서 처자에 대한 법적 권한과 권리가 없었다.

2) 노예 해방
노예의 신분으로부터 해방되는 방법은 두가지 형태가 있다. 먼저 주인의 유언에 의해 행해지는 경우가 있다. 즉 주인이 죽을때 일정한 노예의 신분을 해방시켜 주는 것이다. 이러한 풍습은 율리아누스 시대부터 행해지고 있었다. 또 다른 방법은 주인의 특별한 배려로 되는 경우이다. 즉 주인의 목숨을 구했을 경우 주인은 감사의 표시로 노예의 신분을 해방시켜 주었다.

3) 신약성경에 나타난 노예제도
신약성경에는 노예제도에 대한 비판적인 구절이 없다. 즉 노예제도가 나쁘다는 단정적인 구절은 보이지 않는다. 당시 사회가 아직 노예 해방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비판적인 구절이 없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러면 성경 기록자들이 노예제도를 반대할 경우 권력자들로부터 박해받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인가? 그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도 바울 같은 경우는 노예를 하나님의 자녀로 보았기 때문에 지고가야 할 멍에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신약성경에서 노예제도에 관한 태도는 부정도 아니요, 긍정도 아닌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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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자
혹자들은 본 서 속에 교리적인 내용이 없다는 점 때문에 바울의 저작설을 부인하나 본 서는 전통적으로 내·외적인 증거에 의하여 바울의 저작으로 인정되어 왔다.

1) 외적 증거
초대교회의 교부인 이그나티우스(Ignatius), 터툴리안(Tertullian), 오리겐(Origen) 등은 본 서의 저자를 바울로 인정하여 왔다. 뿐만 아니라 무라토리 단편(Muratorian Fragment)과 마르시온 정경(Marcionical Canon)도 바울이 본 서를 기록하였다고 인정하였다.

2) 내적 증거
19세기 튀빙겐 학파(Tubingen Schule)의 비평학자들은 본 서가 위경 클레멘트와 마찬가지로 정경이 아니고 그리스도교 문학의 맹아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더구나 이 서신은 바울이 쓴 것이 아니라 주후 2세기경 교회의 노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익명의 저자에 의해 쓰여졌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본 서의 내용을 보면 서두에서부터 바울이 발신임을 밝히고 있을뿐만 아니라 그만이 전개할 수 있는 독특한 특징(몬1:1,9,10,13)들이 나열되어 있다. 그리고 바울 자신의 일상 생활을 언급함으로 자신이 본 서의 저자임을 강하게 나타내주고 있기도 하다(몬1:23,24).

2. 기록 장소와 연대

본문에 의하면 본 서는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 기록하였다고 하는데(몬1:9,10), 이때는 바울의 1차 옥중 생활에 해당되는 때로 비교적 자유로운 연금 상태에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는데 이때 오네시모를 만나 그를 회심시켰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를 위해 본 서신을 써 두기고를 통해 빌레몬에게 보냈던 것이다.
그런데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혔을 때는 그가 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있을때인 주후 58년이었다(행19-21 ; 행21:17). 그리고 가이샤로 호송되어 약 2년을 보냈다(행24:27). 이때에 바울은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하여 가이사의 재판을 호소하였고 따라서 다시 로마로 호송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이때가 주후 61년경이었다. 그러므로 본 서를 위시한 옥중 서신들은 주후 62년경에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3. 기록 목적

주인인 빌레몬의 재산을 훔쳐 달아난 것으로 추정되는 노예 오네시모는 바울을 만나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새로운 일꾼이자 바울의 조력자로서 그의 총애를 받았다(몬1:11-13). 그러나 바울은 오네시모를 로마에 주인인 빌레몬에게 보내기로 결심하고 그를 더이상 노예로서가 아닌 사랑하는 형제로서 받아들이도록 권고하는 편지를 빌레몬에게 보냈다. 또한 바울은 서신에서 자신이 풀려날 것을 소망하고 있으며 빌레몬이 자신의 처소를 마련할 것을 기대하였다(몬1:22).
따라서 본 서의 기록 목적은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오네시모에 대한 용서를 확실하게 하기 위함이다. 둘째 그리스도의 정신에 따라 노예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보여주도록 지혜롭게 요구함으로써 노예 제도를 정죄하지는 않지만 그 근본 정신을 뒤집어 노예들도 형제들로 받아들일 것을 촉구하고 있다. 셋째 바울 자신이 로마의 감옥에서 풀려난 후에 자신을 위한 처소를 빌레몬이 예비하였으면 하는 소망을 전하기 위해서이다.

4. 내용 전개

노예 신분의 형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용서의 정신을 제시하고 있는 본 서신은 세부분으로 내용이 전개된다.
① 빌레몬의 사랑과 믿음에 대한 칭찬(몬1:1-7) : 특히 본문은 본 서가 단순히 빌레몬과 그 가족들만이 아니라 그의 집에 모이는 모든 회중들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② 오네시모를 위한 사도 바울의 간구(몬1:8-16) :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종으로서가 아니라 따뜻한 한 형제로 받아줄 것을 간청하고 있다.
③ 바울의 개인적인 문제(몬1:17-25) : 바울은 자신의 소망이 헛되지 않을 것을 확신하면서 동료에 대한 안부와 축복으로 본 서를 끝맺는다.

5. 구속사적 의미

사실 오네시모는 타인의 물품을 훔친 자요, 더욱이 도망친 노예로서 당시 법으로 처리한다면 도무지 용서받을 수 없는 중죄인(重罪人)이다. 그러나 바울은 겸손한 자세로 이같은 중죄인을 용서하고 형제로 받아줄 것을 그 주인 빌레몬에게 간청함으로써 사랑의 도리를 보여주고 있다. 사실 바울의 이같은 간청은 분명히 죄와 허물로 죽어 마땅한 자신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죄사함받고 생명을 얻은 그 은혜와 사랑에 기초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로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은 허물있는 형제들을 은혜로 용납할 수 있어야 함을 본 서는 보여주고 있다. 뿐만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는 신분과 계급의 차이를 불문하고 모두가 서로 존경하고 사랑해야할 한 형제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마12:50).

6. 내용 분해

Ⅰ. 빌레몬에 대한 감사(1:1-7)
1. 문안 인사(1:1-3)
2. 빌레몬에 대한 칭찬(1:4-7)

Ⅱ. 빌레몬에 대한 부탁(1:8-16)
1. 오네시모를 위한 간구(1:8-10)
2. 오네시모의 변화(1:11-16)

Ⅲ. 빌레몬에 대한 약속(1:17-25)
1. 부채에 대한 변재 약속(1:17-19)
2. 처소 마련을 부탁함(1:20-22)
3. 작별 인사(1:23-25)

 

출처 : 갓피플 자료&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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