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자선에 대한 의무 11:1-6

 

솔로몬은 본문에서 부자들에게, 가난한 자들에게 후히 베풀라고 강조한다.

(1) 우리에게 권장되는 의무(1절) : 너는 네 식물을 물위에 던지라. 더러는 이 구절을 "너는 네 곡식을 낮은 곳에 던지라"는 말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 말은 농부가 씨앗을 뿌리지 않고서는 다음해에 아무 수확도 거둘수 없다는 것을 알기때문에 자기 식구가 먹는 곡식에서 파종할 씨앗을 남겨두었다가 '귀중한 씨앗을 가지고 나가서 뿌리는' 것을 암시한다. 이렇게 자선을 베풀기를 즐겨하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을 먹이기위해 자기 먹을 곡식에서 종자를 떼어놓는다. 이는 그가 심는대로 '거둘' 것이기(갈 6:7)때문에 '모든 물가에 씨를 뿌리려는'(사 32:20) 것이다. "비록 그것이 '물위에 던져지는' 것처럼 즉 없어지듯이 보일지라도, 가난한 자들에게 후히 주라. 해로로 무역하는 상인처럼 모험삼아 식물을 띄워보내라. 그것을 '물위에' 맡겨라. 그래도 그 식물이 가라앉지 않을 것이라."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줄지어다. "자선을 베푸는 일에 후하고 너그러이 하라. 조금 주지말고 '일 인분' 곧 한끼 분을 주어라. 많은 사람에게 주어라." 즉 네가 동정을 베풀어야할 사람을 일곱 만나면 일곱 모두에게 동정을 베풀고, 여덟 사람을 만나면 여덟 모두에게, 그리고 그 이상을 만나도 역시 그들 모두에게도 정을 베풀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일에 풍성하시다. 비록 우리가 그 긍휼을 받을만한 가치가 없을지라도 역시 그의 자비는 풍성하시다. 그는 '후히 주시고' 이전에 주신 선물을 가지고 우리를 '꾸짖지 아니하신다.'

(2) 이 의무가 우리에게 강조되는 이유 : "네가 '식물을 물위에 던지면' 그것을 잃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농부가 자기가 뿌린 씨앗을 풍성한 수확으로 다시 거두듯이 '네가 여러날 후에 그것을 다시 찾을 것이라. 그 돌아오는 기간이 더딜수는 있으나 반드시 돌아오며 또한 훨씬더 많은 양으로 돌아올 것이라." 가장 귀한 곡식인 밀은 땅속에 가장 오랫동안 있다. 선행을 할수 있는 우리의 기회란 매우 불확실하다. "이는 네가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지 알지 못함이라. 다시말해서 그 재앙이 네게서 재산을 빼앗아 갈지, 선행을 행할수 있는 능력을 빼앗아 갈지 네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때가 닥쳐서 자신들이 궁핍하게 될수 있다는 것을 알지못하기 때문에 이 말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을 반대하는 논리로 사용한다. 우리는 이와 반대로, '재앙이 임할' 때 우리가 할수 있는동안에 선을 행했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을수 있도록 서둘러 자선을 베풀어야 한다.

(3) 자선을 행하지않는 자들의 변명.

1) 더러는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자기 것이라고 말하면서 왜 그것을 '물위에 던져야' 하느냐고 물을 것이다. "이 사람아 하늘을 쳐다보고 이것을 좀 생각해 보아라. 곧 만일 네 머리위에 떠있는 '구름이' 자기속에 물을 간직하고서 땅에 뿌려주지 않으려고 한다면 네가 황무한 땅에서 이내 굶어죽게 되리라는 것을 생각해 보아라. 하늘은 자기보다 훨씬 아래에 있는 보잘것없는 땅에게 이처럼 후한데 너는 '네 뼈중의 뼈인' 불쌍한 네 형제에게 나눠주기를 왜 싫어하느냐?"

2) 더러는 자기들이 유익을 끼칠수 있는 범위가 낮고 좁으므로 실제로는 아무소용도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들은 좀더 공적인 지위가 있는 다른 사람들이 행할수 없기 때문에 가만히 앉아서 아무것도 하려고하지 않는다고 한다. 아니, 그들은 '나무가 쓰러지면' 즉 공교롭게 나무가 쓰러지면 그 나무의 주인을 위해서 '쓰러진 곳에 그냥 둘'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은 어디에 있는지간에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있게된 그곳에서 주위 사람들에게 복이 되도록 애써야 한다. 우리는 어느 곳에 있든지간에 할 마음만 있다면 행해야할 선한 일을 언제든지 발견할수 있다.

3) 더러는 그들이 자선을 베푸는중에 만나는 많은 낙담거리들을 항의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자선행위가 거만하고 위선적이라는 이유로 비난을 들어왔다. 만일 줄것이 거의 없어 다른 사람들이 주는만큼 그들이 주지않는다면 그들은 멸시받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내야할 세금이 있다. 그들은 그들이 낸 구호금이 어떻게 쓰일지도 알지 못한다. 솔로몬은 이같이 허다한 반론들에 대해 한마디로 이렇게 대답한다(4절). 풍세를 살펴보는 자는 파종하지 아니할 것이요. 여기서 파종한다는 것은 선을 행한다는 말이다. 구름을 바라보는 자는 거두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거둔다는 것은 유익을 얻는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 사소한 모든 어려움을 크게 보고 이의를 말하며 어려움이 전혀 없는 곳을 생각하면서 그 자리에 멈춰 서있다면 우리는 결코 일을 계속해 나가지못할 것이다. 만일 농부가 흘러가는 구름을 보고서 파종을 하지않거나 하다가도 그만둔다면 또 바람이 세차게 불어서 농작물 거두기를 그만둔다면, 그는 연말에 가서 형편없는 수확밖에 거두지못할 것이다.

4) 더러는 우리가 구제하는 일에 들이는 비용과 정력이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보상될지 알지못한다고 말할 것이다. 이 말에 대해 솔로몬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 "또한 네가 그것을 알아야하는 것도 아니니라. 그러나 비록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의 말씀을 어떻게 이루실지를 네게 말씀해 주시지 않을지라도, 너는 그것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확신할수는 있느니라." 그는 하나님의 일에 대한 우리의 무지를 다음의 두가지 실례를 들어 설명한다.

첫째, 우리는 '바람의 길' 곧 성령의 길이(더러는 이렇게 본다) '어떠함을 알지 못한다.' 즉 우리는 바람이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또 언제 바람이 방향을 바꿀는지 알지 못한다. 선원들은 바람이 그들에게 순풍으로 변할때까지 바람을 기다릴 준비가 되어있다. 그와 같이 우리도 정해진 축복의 때를 기다리면서 자신의 의무를 행해야 한다. 이 구절을 사람의 영혼에 대한 말씀으로 이해할수도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에게 이같은 영혼을 주셨다는 사실을 알고있다. 그러나 그 영혼이 어떻게 몸속에 들어와서 생기를 불어넣어주며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는 알지 못한다. 영혼은 그 자체가 신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이 우리에게 그와 같이 신비스럽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둘째, 우리는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지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신체에 영혼이 들어간 방법과 더불어서 뼈의 형성방법이나 뼈에 대한 지식을 정확히 기술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두가지가 다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알고있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님의 일로 잠자코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우리를 위해 더큰 일을 행하신 이가 그보다 작은 일도 행하실 것이라고 우리는 믿어야 한다.

5) 더러는 "이제까지 자선을 베풀어왔지만 그것에 대해 조금이라도 보상을 받아본 적이 없다"고 말할 것이다. 여러날이 지났지만 그것을 '도로 찾지' 못했다는 말이다. 이에 대해 솔로몬은 그럴지라도 계속해서 선행을 해나가라고 대답한다(6절).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거두지 말라. "아침 곧 젊었을때에 열심히 선을 행하라. 네게 있는 적은 것으로 나눠주리라. '저녁' 곧 늙었을때에 인색해지려는 노인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유혹에 넘어가지 말며 그때에도 '손을 거두지 말고' 끝까지 선을 행하라." 이것이 잘될는지 저것이 잘될는지 혹 둘이 다 잘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이는 너의 구제 행위중 어떤것이 다른 사람들과 네 자신에 대해서 잘될는지 알지 못함이며 혹시 '둘이 다 잘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Ⅱ. 죽음과 심판에 대한 준비 11:7-10

 

전도자는 지금까지 여러가지 탁월한 교훈으로써 우리에 잘사는 방법을 가르쳐왔는데 이제는 잘죽는 방법에 대해서 가르치려고 한다.

(1) 그는 나이든 사람들에게 말을 한다. 빛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라 눈으로 해를 보는 것이 즐거운 일이로다(7절). 이교도들은 그 즐거움에 너무 매혹된 나머지 해를 숭배하였다. 햇빛에 의해서 다른 사물들을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생명이 아름답다는 것 또한 부인할수 없는 사실이다. 생명은 모든 사람에게 즐거운 것이다. 생명이 아름답다는 것이 자연에서도 나타난다. 죽음은 만일 그것이 현재의 악에 대한 종지부이거나 미래의 선에 대한 이주로서 바라지 않는한, 사람들이 그 자체를 위하여 바랄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여러해를 살면...캄캄한 날이 많으리니 그 날을 생각할지로다(8절).

1) 즐길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여름 낮이 있다. 즉 그것은 생명이 여러해동안 계속되며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생명이 안락해져서 사람이 항상 '즐거워할'수 있는 날이다. 어떤사람들은 자기들이 누리는 여러해를 다른 사람들보다 더 기뻐한다. 형통하는 상태와 즐거워하는 심령, 이 두가지가 함께 갖추어진다면 실로 그것은 사람으로 '항상 기뻐할'수 있도록 만드는데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아무리 유쾌한 마음에라도 낙담시키는 것은 있다. 희희낙낙하는 죄인들에게도 우울한 불만이 있고, 명랑한 성도들에게도 은혜로운 슬픔이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여러해를 살면서 항상 즐거워한다는' 것은 실제의 경우가 아니라 하나의 가정에 불과하다.

2) 이 여름 낮이 지나면 겨울 밤이 오리라고 기대해야 한다. '그러나' 이 건강한 노인은 '깜깜한 날을 생각해야' 한다. 그 이유는 '그 날이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날이 많기는 하나 무한정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리 낮이 길어도 밤이 있듯이, 아무리 밤이 길어도 아침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캄캄한 날'이 오기전에 미리 그것을 생각한다면 정작 그 날이 올때는 덜 무서워할 것이다.

(2) 그는 젊은 사람들이 죽음을 생각해보도록 일깨우려고 애쓴다(9,10절).

1) 그는 역설적으로 젊은 사람들에게 허영과 쾌락을 용인한다. 청년이여 네 어린때를 즐거워하며. 솔로몬은 이와같이 역설적으로 젊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우매를 드러내고 방탕하고 사악한 인생 행로의 어리석음을 내보이라고 말한다.

2) 그는 이같은 허영과 쾌락을 강력히 저지한다.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인하여 너를 심판하실줄 알라.

3) 그는 이 모든 사실에서 주의와 권고의 말씀을 이끌어낸다(10절). 젊은 사람들은 자신을 살피고 자기 영혼과 몸을 잘 돌보아야 한다. 또한 마음이 교만으로 높아지거나 노여움이나 죄악적인 어떤 격정으로 동요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근심(노여움)으로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이 말은 근심에서 일어나는 어떤 동요나 혼란을 뜻한다. 젊은 사람들은 저지와 제어를 참지못하며 굴욕감을 주는 것에 대해서는 안달을 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그들의 교만한 마음은 그들을 방해하고 반대하는 것에 대해서는 무엇이든지 반기를 들고 일어서려 한다. 그들은 반성하면서 슬퍼해야할 일은 무엇이든 가까이 하지말아야 한다. 그들은 무절제와 불결 혹은 어떤 육신적인 정욕에 의해서든지 몸을 더럽히지 않도록해야 한다. 악으로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네 몸의 지체를 불의의 도구로 사용하지 말라."

(3) 전도자는 그의 강화의 중요 요지인 이 세상 모든 것의 허무성과 불확실성 그리고 불충분성을 강조한다.

1) 그는 노인들에게 이 사실을 상기시킨다(8절). 장래 일은 다 헛되도다. "비록 사람이 여러해를 살면서 항상 즐거워할지라도 장래일은 다 헛되도다."

2) 그는 젊은이들에게 이 사실을 상기시킨다(10절). 어릴때와 청년의 때가 다 헛되니라. 이는 어릴때와 청년의 때의 쾌락과 이점들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꽃들은 시들고 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오래가고 좋은 평가를 받을 선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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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우매의 악함 10:1-3

 

(1) 적은 우매가 지혜와 존귀로 패하게 하느니라. 적은 우매는 '죽은 파리가 향기름에' 해를 끼치듯이 그의 명성에 해를 끼친다. 참된 지혜는 사람으로 명성을 얻게하는데, 그 명성은 귀한 기름이 들어있는 옥합과 같다. 많은 지혜로 얻은 명성을 '적은 우매'로 쉽게 잃어버릴수가 있다. 이는 명성에는 시기가 따르기 마련이어서 지혜로인해 칭찬받는 자들의 실수를 큰잘못처럼 말하기 때문이다.

(2)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편에 있고. 그렇기때문에 그는 자신의 일을 빈틈없이 착수한다. 우매자의 마음은 왼편에 있느니라. 우매자의 마음은 자기에게 해야할 중요한 일이 있는데에도 언제나 할일을 찾아다니기 때문에 일을 해도 서투르게 한다.

(3) 우매자들은 언제나 자신의 어리석음을 나타내며 노출시키기가 매우 쉽다. 어리석거나 악한 자는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자기의 우매한 것을 말한다'(3절). 즉 그는 마치 그들에게 직접 자신이 어리석다고 말하기라도 하듯이 명백하게 자신의 어리석음을 드러낸다.

 

Ⅱ. 지배자와 피지배자 간의 상호 의무 10:4-11

 

본문의 의도는 국민들로하여금 정부에 충성을 바치게 하며 의무를 지키게 하려는 것이다.

(1) 신하들은 사사로운 개인 감정때문에 왕과 다투는 일이 없어야 한다(4절). 주권자가 네게 분을 일으키거든 너는 네 자리를 떠나지 말라. 즉 "주권자가 너를 불쾌하게 여기더라도 신하의 본분을 잊어버리거나 네 충성을 저버리지 말라. 성을 냄으로인해 그에게 봉사하던 네 직책을 떠나지 말라."

(2) 신하는 왕과 다투지 말아야 한다. 솔로몬은 '해아래서 한가지 폐단' 곧 왕만이 시정할수 있는 폐단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런데 그 폐단을 왕만이 시정할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주권자에게서 나는 허물이기' 때문이다(5절). 사람들이 각자의 공로에 따라 발탁되지 않고, '우매자가 크게 높은 지위를 얻는' 것은 주권자들이 개인적인 감정에 의해 흔히 범하는 잘못이다. 사는 것은 백성들에게 불행한 일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예증되고 있다(7절). 또 보았노니 종들은 말을 타고. "그들은 비천한 태생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치사하고 비굴하며 돈만 밝히는 성향을 지닌 자들이라."

1) 왕이든지 백성이든지간에 아무도 극단적으로 변화를 시도하지 말아야 한다. 왕은 백성의 권리와 자유를 침해하지 말아야 하고 백성은 왕에 대해 폭동과 반역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① 다른 사람을 빠뜨리려고 '함정을 파는 자는' 십중팔구 자기가 '거기 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왕이 폭정을 행하든가 아니면 신하가 반역을 일으킨다면, 모든 역사가 각자의 운명에 합당한 것이 어떤 것인지를 그들 모두에게 알려줄 것이다.

② '담' 곧 오랫동안 경계표가 되어왔던 옛담을 허는 자는 '뱀' 혹은 섞은 울타리에 숨어있는 '독사'에게 물릴 것이기 때문이다.

③ 벽이나 건물을 허물어뜨리기 위해 '돌을 떠내는 자는' 그 돌에 치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 돌로인하여 상할 것이다.' 잘 구성되고 정착된 정부를 개조하려고 나서는 자들은 고치는 일보다는 흠잡는 일이 더 쉽다는 것을 곧 깨닫게될 것이다.

④ 나무를 쪼개는 자는 그로인하여 위험을 당하리라(9절). 나무조각이나 도끼머리가 그에게 정면으로 날아들 것이다. 우리는 마디가 많은 나무조각같이 완고하고 제멋대로인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그들을 힘과 폭력으로 제압하려고 생각하여 그렇게 해보지만 오히려 그로인해 우리 자신이 손해를 당하는 수가 있다.

2) 왕과 백성은 오히려 서로에 대하여 신중함과 온유함 그리고 착한 마음씨를 가지고 행동해야 한다. '지혜는' 폭동을 일으키기 쉬운 백성들을 방관에 의해서 대담하게 만들지않도록, 또한 엄격하고 가혹한 행위에 의해 그들에게 선동적인 행실을 자극하지않도록 그들을 잘 다룰수 있는 방법을 주권자들에게 '가르쳐 주기에 유익하다.' 또한 지혜는 압제하기 쉬운 군주에 대해서 그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않고 오히려 온건한 항의와 평화로운 방법때문에 그의 관심을 사도록 처신하는 법을 신하들에게 가르쳐주기에도 유익하다. 지혜는 온건한 방법을 가르쳐주며 난폭한 방법을 삼가도록 만든다. 지혜는 우리가 사용하려고 하는 도구를 무딘채 내버려둠으로써 우리로 '힘을 더 들이지' 않을수 없게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그 도구를 '갈도록' 우리를 가르친다(10절). '나무를 쪼개기전에 먼저 도구를 갈라는 것'은 어려운 일을 만날때마다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적합한지를 미리 생각하고 연구하라는 말이다. 풀베는 사람이 낫을 가는동안은 시간을 손해보는 것이 결코 아니다. 지혜가 있는 사람은 물리쳐야할 뱀을 쉬쉬하고 쫓아내려고 생각하기보다는 뱀을 홀리려고 할 것이다(11절). 노래와 음악으로 뱀을 홀리지않는다면 '뱀이 물 것이다.' 뱀앞에서 수다를 떤다고해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혀를 다스리는 자'는 자기가 뜻하는바를 말할수 있다. 그런데 혀를 다스리시는 자는 홀리지않은 뱀처럼 다루기 위험한 존재이다. 무슨 말이든지 할수 있는 사람에게는 화나게 만드는 말은 아무말도 하지않는 것이 지혜이다.

 

Ⅲ. 혀를 다스림 10:12-15

 

솔로몬은 본문에서 어리석음의 해악을 보여주고 있다.

(1) 우매자들은 쓸데없이 말을 많이 한다. 그들은 부적절한 말로써 자신의 어리석음을 드러낸다. '지혜자의 입의 말은 은혜로와서' 주의 모든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반면에 '우매자의 입술은' 스스로 수치를 당하게 만들고 '자기를 삼켜' 망하게 만든다. 우매자의 말은 자신의 약함과 악함에서 나온다. 그 입의 말의 시작은 우매요. 그의 마음속에 있는 우매가 이같이 더러운 모든 물줄기가 흘러나오는 더러운 샘이다. 그 입의 말의...끝은 광패니라. 우매자는 말을 많이 한다(14절). 특별히 언제 말을 끝내야할지를 전혀 모르는 성미급한 자가 그렇다. 그는 처음에 했던 말을 마지막까지 되풀이할 것이다. 대개 지각이 없는 사람들이 말을 많이 한다. 빈깡통이 요란한 법이다. 우매자는 말을 많이 하거니와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못하나니 신후사를 알게할 자가 누구이냐(14절). 그는 누구나 다 아는 아주 진부한 사실인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다시 '신후사를 알게할 자가 누구냐'고 말할 것이다.

(2) 우매는 쓸데없이 수고를 많이 한다(15절). 자신의 계획을 달성하려고 하는 '우매자들의 수고는 제각기 곤하게 할뿐이다.' 그들의 수고는 모두가 세상과 육신과 썩어 없어질 양식을 위한 것이다. 어리석은 자들은 '성읍에 들어갈줄도 알지못하기 때문에' 한가지도 성립시키는 일이 없다. 즉 큰성읍으로 들어가는 입구처럼 아주 명백한 사실마저도 이해할수 있는 능력이 없기때문에 무엇하나 성립시키는 일이 전혀 없다.

 

Ⅳ. 근면과 조심성의 지혜 10:16-20

 

(1) 한나라의 행복은 그 나라 통치자의 성품에 달려있다. 왕이 유치하고 주색을 탐하는 나라의 백성은 행복할수가 없다(16절). 왕은 어리고 대신들은 아침에 연락하는 이 나라여 화가 있도다. 여기서 어리다는 것은 나이가 어리다기보다는 지력이 어리다는 뜻이다. 왕이 변덕스럽고 까다로운 어린아이처럼 약하고 어리석다면 백성들에게 불행한 일이다. 대신들이 '아침에 연락한다'는 말은 배를 신으로 삼고 식욕의 노예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신들이라도 현명하다면 그 나라는 발전할 가망이 있다. 그러나 공무를 신속히 처리하기보다는 쾌락을 탐닉하여 '아침'부터 먹고 마시며, 재판관들도 미식가가 되어 살기위해서 먹지않고 먹기위해서 산다면, 그 날에서 모든 유익을 기대할수 있겠는가! 통치자가 관대하고 활동적이며 단정하며 온화하고 일을 잘한다면 그 백성은 행복해지지 않을수 없다(17절). 지혜, 덕망, 하나님을 경외함, 자선 그리고 모든 인류에게 언제든지 선을 행하려는 마음의 자세. 이런 덕목들은 왕가를 품위있게 만든다. 이럴때 그 밑의 관원들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에 급급하기보다는 자신의 책임을 이행하기에 더욱 고심할 것이다. 그들이 '마땅한 때' 즉 자신의 일을 다 마치고나서 '먹을'때 그 나라는 복이 있다. 관원들은 그들의 몸이 그들의 영혼을 섬기는데 알맞도록하여 하나님과 그들의 나라를 잘 봉사할수 있도록 '기력을 보하려고 먹어야한다.' 대신들이 절제의 모범을 보일때 즉 소비할 것이 아주 많은 자들이 스스로 자기를 부인하는 법을 알때, 그 백성은 복되다.

(2) 게으름은 사적인 일에나 공적인 일에 모두 나쁜 결과를 초래한다(18절). 게으른즉 석가래가 퇴락하고 손이 풀어진즉 집이 새느니라. 즉 일을 태만히 하고 편안과 쾌락을 사랑하면 건물은 퇴락하게 되는데 먼저 석가래가 퇴락하고 나중에 점차로 집이 내려앉는다. 왕이 '어린아이' 같아서 아무것도 신경쓰려고 하지않고 '대신들은 아침에 연락하며' 전혀 수고하려고 하지않는다면 국가는 큰손실을 겪게되고 나라의 모든 토대는 마땅히 '무너진데를 수축해야'할 자들의 게으름과 이기주의로인해 어긋나게 된다.

(3) 일반적으로 대신들이나 백성들이나 모두가 돈을 버는데는 매우 부지런하다. 그 이유는 돈은 무슨 일에든지 유용하기 때문이다(19절). 솔로몬은 환락보다는 돈을 더 낫게 여기는듯 싶다. 잔치는 희락을 베푸는 것이요. 즉 잔치는 우매자의 희락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지혜자의 희락을 위하여 베푼 것이다. 지혜자는 그 희락에서 일과 힘든 연구를 해낼수 있는 힘을 얻는다. 돈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 돈자체는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주지못한다. 그러나 그것이 거래의 도구가 될때 돈은 이 현세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준다. 그럴지라도 돈이 죄의 용서와 하나님의 은총, 양심의 평안을 조달해주지는 못한다.

(4) 백성들은 마음에 불충한 어떤의도를 품거나 파당을 이끌거나 반정부적인 모의를 꾸미는 일을 하지않도록 매우 조심해야 한다. 심중에라도 왕을 저주하지 말며. "마음속으로라도 정부가 잘못되기를 빌지말라." 침방에서라도 부자를 저주하지 말라. "비밀 회의에서나 반정부적인 감정을 지닌 사람들의 회합에서라도 대신들과 통치자들을 저주하지 말라. 그런 자들과 사귀지 말라." 공중의 새가 그 소리를 전하고 날짐승이 그 일을 전파할 것임이니라. "정부를 반대하는 음모에 그들과 함께하지 말라. 그 음모가 아무리 비밀스럽게 실행된다고 하더라도 네가 알고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첩자를 사방에 두고있는 왕에게 '공중의 새가 그 소리를 전하고 날짐승이 그 일을 전파하여' 너를 당황하게 하고 망하게 만들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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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모든 사람의 공통적인 운명 9:1-3

 

현자의 돌(the philosopher's stone)을 찾는 자들이 비록 찾으려고 하는 것은 발견하지 못했을지라도 그것을 찾는 과정에서 다른 유익한 새로운 사실과 경험을 많이 발견했다는 것을 이제까지 관찰해 왔다. 이렇게 솔로몬도 앞장 마지막부분에서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였지만 '능히 깨닫지 못하였다.' 그래도 그는 그 연구에 대해 그에게 충분한 보상을 해주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그는 '마음을 다하여 그 모든 일을 살폈고'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그 사실을 '밝힐'수 있도록 그것을 신중하게 숙고하였다.

솔로몬이 하나님의 섭리를 연구하면서 부딪힌 문제는 악인과 선인이 차이없이 즐거움과 고난을 당한다는 사실이었다. 이것은 많은 지혜자들의 마음을 혼란시켜왔다. 솔로몬은 그 사실이 우리에게 거침돌이 되지않도록 말한다.

(1) 그는 강한 힘을 지닌 유혹을 기술하기에 앞서 의심할수 없는 위대한 진리를 진술한다. 욥은 하나님은 전지하시다는 교리를(욥 24:1),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교리를(렘 12:1), 다른 선지자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교리를, 시편 기자는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특별한 은총에 대한 교리(시 73:1)를 진술하는데, 바로 이것이 솔로몬이 본문에서 지지하려고 하는 교리이다. 즉 비록 선과 악이 아무렇게나 시행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특별히 돌보시고 그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신다는 것이다. 의인과 지혜자나 그들의 행하는 일이나 다 하나님의 손에 있으니. 즉 모두가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와 지도를 받는다는 말이다. 그들의 모든 일이 그들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에 의해 조정된다. 그들의 지혜롭고 선한 모든 행위가 이 세상에서는 보상받지 못할지라도 저 세상에서는 보상될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간에 하나님의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신 33:3;요 10:29;시 31:15).

(2) 그는 하나님의 사랑과 미움이 사람의 외적인 조건에 의해서 측량되거나 판단되지 않는다는 것을 하나의 규칙으로 설정한다. '사람은' 감각의 대상이 되는 것들에 의해서는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알지 못한다. 만일 우리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우리속에 있는 것으로서 그것을 알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내세에 있을 일과 사람의 영원한 상태에서 알게될 것이다.

(3) 그는 이러한 규칙들을 고백하고나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모든 것이 일반이라. 어떤사람들은 이 구절과 그 이후로 12절까지 계속 이어지는 모든 구절이 하나님의 섭리의 교리를 반대하는 무신론자의 비뚤어진 추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구절들을 솔로몬이 자기가 허용하는 규칙이 조금이라도 오용되는 것을 충분히 막을수 있는 진리들을 확고히 하고나서 양보하여 표현한 말이라고 볼수 있다.

1) 의인의 성격과 악인의 성격사이에는 큰차이가 있다.

① 의인은 '깨끗하며 깨끗한 손과 청결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 악인은 '깨끗지않으며' 더러운 정욕의 지배를 받는다. 하나님은 비록 이 세상에서는 '깨끗한 자와 깨끗지않은 자' 사이에 차별을 두시지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저세상에서는 반드시 차별을 두실 것이다.

② 의인은 내적이고 동시에 외적인 예배로 '제사드린다.' 악인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한다.' 즉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무시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어떤 것도 내어놓기를 싫어한다.

③ 의인은 세상에서 선을 행한다.

④ 악인은 '맹세'를 하면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치 않는다. 그러나 의인은 하나님의 이름을 크게 경외하므로 '맹세하기를 무서워한다.'

2) 이 세상에서 의인의 형편과 악인의 형편사이에는 별 차이가 없다. 즉 두사람의 '결국이 일반이다.' 다윗이 부유한가? 나발도 부유했다. 아합이 전쟁에서 죽었는가? 요시야도 그랬다. 그러나 악인과 의인이 똑같이 당하는 사건일지라도 그 사건의 본질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리고 그 사건의 결과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동일한 섭리가 비록 외형에 있어서는 똑같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한사람에게는 '생명에서 생명으로 이르는 냄새'요 다른 사람에게는 '죽음에서 죽음으로 이르는 냄새'가 된다.

(4) 그는 이 사실이 지혜롭고 선한 사람들에게는 불평의 씨가 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것은 해아래서 모든 일중에 악한 것이니(3절). "이것은 모든 일중에 가장 난처한 일이라." 무신론자들은 이 사실때문에 완고해지고 행악자들은 이것으로인해 더욱 악에 힘쓴다. 그들은 '의인과 악인의 결국이 일반이라'는 것을 보면서 이 사실로부터 하나님께서는 자기들이 의롭든지 악하든지간에 매일반이라고 악하게 추론해 낸다.

(5) 그는 이 큰난제를 보다 명백하게 밝히기위해 악인의 불행에 대한 교리로써 결론을 내린다. "그들이 아무리 형통할지라도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다가 후에는 죽은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Ⅱ. 죽음의 결과와 생의 향유 9:4-10

 

솔로몬은 앞에서 짜증이나서 '산 자보다 죽은 자를 복되다'고 하였다(4:2). 그러나 여기에서 그는 더나은 생을 준비할수 있는 생의 이점을 생각하고서 마음이 달라진 것처럼 보인다.

(1) 그는 산 자가 죽은 자보다 더낫게 지니고있는 이점들을 보여준다(4-6절). 어떤 이유로든지간에 사람의 형편이 나쁘더라도 그것이 나아질 '소망은 있다.'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미친 마음을 품었다'고 할지라도 생명이 있는동안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복된 변화가 일어날수 있는 '소망이 있다.' 무릇 산 자는 죽을줄을 알되. 산 자는 아직은 죽음이 오지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준비할수가 있다. 그러나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른다.' '죽은 자들은' 세상에서 행한 그들의 수고에 대해 '다시는 상도 받지못하고' 그들이 벌어놓은 모든 것을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어야만 한다. 죽은 자는 거룩한 행실에 대해서는 보상을 받을 것이나 세속적인 행위에 대해서는 보상받지 못한다. 이 세상의 일은 영혼을 위한 분깃이 되지못할 것이다. 이 세상은 생명을 위한 연금은 될수 있을지언정 '영원한 분복은' 되지 못한다. 죽은 자들의 애정과 우정과 증오도 끝이 난다. 즉 '그 사랑함과 미워함과 시기함도 없어지게 된다.'

(2) 그는 여기에서 생명이 지속되는동안 삶을 될수 있는대로 잘 선용하는 것이 우리의 지혜라고 추론한다. 솔로몬은 그 자신이 즐거움의 남용으로 올무에 걸린 경험이 있기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그 위험을 경고하는데, 그는 즐거움을 전적으로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적절하게 사용하도록 가르쳐 준다. "네 마음으로 편하고 즐겁게 하라. 네 속에 기쁨과 즐거운 마음을 품어라." 우리는 우리 자신을 즐기며 우리의 친구들과 우리 하나님도 즐겁게 해야하며 선한 양심을 지키도록 조심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을 사용하여 기쁘게 하나님을 섬겨야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데 후해야 하며 세상에 대한 지나친 염려에 사로잡히지 않도록해야 한다. "하나님이 네게 주신 기쁘고 즐겁게 하는 것들을 이용하라. 너의 즐거움을 밖으로 나타내라"(8절). 네 의복을 항상 희게하며. "말쑥하라,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꾀죄죄한 차림으로 다니지 말라." "네 친족에게 상냥하게 대해라."(9절).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네 주위사람들은 어떻게 되든지 상관하지 않고 네 즐거움을 나누게 하고 그들도 편히 지내게 하라. 네 아내 곧 한아내만을 두고 아내를 많이 두지말라.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아내와 함께있을때 가장 기뻐하라. 네 포도나무와 감람나무를, 곧 네 가족을 기뻐하라." 자신의 행사가 하나님께 열납된 자들은 기뻐하고 즐거워할만한 이유가 있다. 하나님은 자기 종들이 일하면서 노래하는 것을 좋아하신다. "즐겁게 살지어다. 은혜로운 마음의 평정을 가지고 그것으로 세상의 헛됨을 치료하는 해독제로 삼으라." 이는 네가 일평생에 해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이니라. "너는 하나님과 또다른 생에서 더나은 분복을 얻을 것이라. 그러므로 네 영혼이 더욱더 수고하고 여호와의 기쁨이 네 영혼의 힘이 되고 영혼의 수레바퀴에 기름을 칠수 있도록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먹을지어다"(10절). 이 세상은 봉사의 세계이고 장차올 세상은 보상의 세계이다. 추수하는 날은 바쁘다. 우리는 좋은 기회를 놓치지말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 사실 그 모든 것을 다한다해도 충분치는 못하다.

 

Ⅲ. 불의의 재난 9:11,12

 

전도자는 앞에서 우리가 해야할 일을 '힘을 다하여' 하도록 우리를 권고하였다(10절). 그러나 본문에서 그는 우리가 모든 일을 다 마치면 그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1) 우리는 종종 잔뜩 기대했던 좋은 일들에 대해 실망을 하곤 한다(11절). 공적인 일이나 사적인 일에서 발생하는 우연한 사건들이 항상 가장 합리적인 예상과 가능성에 꼭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발이 가장 빠른 사람이 달리기에서 상을 타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빠른 경주자라고해서 선착하는 것은 아니다.' 예기치 못한 사고가 일어나 그들을 방해하거나 그들이 너무 방심하다가 자기보다 느린 자들에게 선두를 빼앗기기도 한다. 사람은 수가 많고 강한 군대가 전투에서는 항상 승리하고 힘이 센 투사가 일대일의 싸움에서는 이긴다고 생각한다. 유력한 자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사람들은, 사람을 이해하고 경영술을 터득한 사람은 반드시 출세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재능있는 많은 사람들이 무명한가운데 일평생을 허비하였다. 우리를 실망시키는 이 모든 것들이 뜻밖의 일처럼 보여서 우리는 그것을 '우연'이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지혜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이 여기서는 '시기'라고 불렸다(전3:1절에는 '기한'으로 시31:15절에서는 '시대'로 불렸다-역주). 시기와 우연이 이 모든 자에게 임함이라.

(2) 우리는 종종 재앙에 놀라곤 한다(12절). 대저 사람은 자기의 시기(자기의 재난의 시기)를 알지 못하나니. 우리는 시기를 알지 못한다. 아니, 우리 자신의 때 곧 우리가 언제 어떻게 죽을지 알지 못한다. 하나님은 우리로하여금 항시 준비하고 있도록 하시기위해 지혜롭게 우리로 그 시기를 알지 못하게 하셨다. 우리는 물고기와 새들이 미끼때문에 올가미와 그물에 빠지듯이 우리가 만족을 기대하는 바로 그 일에서 환난을 당할수가 있다. 사람들은 종종 행복을 추구하던 곳에서 파멸을 당한다. 그러므로 언제나 변화에 대비하여, 비록 갑작스런 변화를 당할지라도 그로인해 전혀 놀라지않도록 하자.

 

Ⅳ. 가난한 지혜자의 불행 9:13-18

 

솔로몬은 지혜를 우리의 평안을 보존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여전히 우리에게 권고한다. 어떤사람으로 하여금 순수한 애국심에서 자기 나라를 도울수 있도록 만드는 이 지혜는, 비록 그 지혜가 자신이 그 지혜로 말미암아 아무런 이득도 얻지못할지라도 솔로몬으로서는 '크게 여긴' 지혜이다(13절).

(1) 솔로몬은 여기서 한가지 실례를 제시하는데, 그것은 아마도 실제로 있었던 일 같다. 즉 공적인 곤경와 위기의 때에 자신의 지혜로써 크게 봉사를 한 어떤 '가난한 사람'에 대한 예이다(14절). 어떤 작은 성읍이 있었다. '성읍에 적을 방어할 인구가 많지않아서' 그들의 성읍을 막 넘겨주려는 판이었다. '큰임금'이 이 작은 성읍을 치려고 허다한 군대를 끌고와서 그 성읍을 에워쌌다. 과연 승리와 성공이 '강한 자'에게 돌아갔겠는가? 아니다. 인구가 많지않은 가운데서도 성읍내에는 권력이 있거나 득을 보는 자리에 전혀 발탁되지 않은 '가난한 지혜자' 한사람이 있었다. 그는 비록 가난하였지만 지혜로와서 성읍을 도왔다. 성읍 사람들은 곤경에 처하자 그를 찾아가 조언과 도움을 청하였다(삿11:7). 가난한 지혜자가...그 지혜로 그 성읍을 건진 것이라. 즉 그는 포위된 자들에게 그들 자신을 방어할수 있는 절묘한 어떤 전략을 가르쳐 줌으로써 혹은 아벨의 여인처럼(삼하20:16) 포위한 자들과의 지혜로운 협상에 의해서 그 성읍을 건진 것이다. 그러나 이 가난한 자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도다. 그에게는 아무런 보상도 없었고 아무런 명예도 표시되지 않았다. 그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가난하고 무명한가운데서 지냈다.

(2) 솔로몬은 이 실례로부터 유용한 추론을 몇가지 끌어낸다. 그는 '지혜가 힘보다 낫고'(16절) 공격 무기이든 방어 무기이든간에 '병기보다 낫다'(18절)는 것을 주목한다. '지혜자의 말은 조용히 들린다.' 지혜자가 하는 말은 합리적이고 요령이 있으며 조용하고 신중하게 말해지기때문에 존중을 받을 것이다. 또한 '우매한 자들을 다스리는' 자 곧 시끄럽게 호통치는 소리때문에 우매자들의 치리자로 선택된 자의 외치는 소리보다 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것이다. 몇마디 치밀한 논증은 큰소리로 말하는 장광설보다 오히려 가치가 있다. 지혜롭고 선한 사람들이라도 마땅히 받아야할 칭찬을 받지못할 때에는 선을 행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만족해야 한다. 지혜는 사람으로 자기 이웃을 도울수 있도록 만든다. 적당한 격려를 베풀어주기만 했어도 세상에 큰축복을 끼쳤을 많은 사람들이 궁핍하고 무명하게 살다가 죽었다. 그것은 많은 진주가 조개 껍질속에 감추어져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지혜와 선함이 명예롭게 여겨지며 '의인이 빛을 발할' 날이 오고있다. 그는 이제까지 지혜롭고 덕망이 있는 한사람이 행할수 있는 큰유익에 대해 살펴보아 왔는데, 이제는 악인 한사람이 끼칠수 있는 허다한 해악을 살펴본다. 자연과 섭리가 주는 좋은 선물들을 한죄인이 얼마나 많이 황폐시키는가! 다른 사람을 타락시키는 것을 본업으로 삼는 한죄인은 수많은 좋은 입법의 취지를 짓밟고 망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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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하나님이 세우신 권세에 대한 복종 8:1-5

 

(1) 지혜에 대한 찬사(1절) : 즉 매사를 신중하고도 사려깊게 행하는 참된 경건에 대한 찬사이다. 지혜로운 사람이란 하나님을 알고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경건한 사람이다. 지혜자와 같은 자...누구냐. 하늘의 지혜는 사람을 비할데없이 뛰어나게 만든다. 비록 학식이 있고 고귀하며 부유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못한 사람은 참된 은혜를 받음으로써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사람과는 비교되지 않는다. 또한 하늘의 지혜는 사람을 주위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는 사람으로 만든다. "지혜자외에 사리의 해석을 아는 자(시대와 사건을 깨닫는 자) 누구냐." 하늘의 지혜는 모세가 산에서 내려왔을때 그랬던 것처럼 '사람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한다.' 또한 지혜는 사람을 명예롭게 하며 그의 모든 대화를 빛나게 한다. 그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 즉 그 "안색"(더러는 이 구절을 이렇게도 이해한다)의 심술궂음과 혹독함이 하늘의 지혜로 말미암아 상냥하고 친절한 표정으로 바뀌게 된다. 비록 천성이 거칠고 까다로운 사람들이라도 '지혜'로 말미암아 기이하게 변한다. 지혜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적에 대해 대담해지도록 만든다. '그 얼굴의 담대함이' 지혜로 말미암아 배가될 것이다. 즉 어떤사람이 주장할만한 때의 명분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을 지혜로써 처리하는 방법도 알고있을때 지혜는 그에게 용기를 더해줄 것이다.

(2) 지혜의 구체적인 예는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다. 우리는 법을 지켜야 한다. 우리는 그것이 입법권이든 사법권이든간에 국가의 권력이 개입되는 모든 일에 있어서 그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내가 권하노니. "내가 왕으로서뿐만 아니라 전도자로서 네게 명령하노니, 다시말해서 내가 한가지의 지혜로서 그것을 네게 권고하노니." 왕의 명령을 지키라. "다른 사람들은 무슨 말을 할지라도 너는 왕의 명령을 지키라." 곧 "왕의 입을 주시하라"(그 구절의 뜻이 이렇다). 어떤사람들은 위에 나오는 구절을 이 순종에 대한 제한으로 본다. 즉 "왕의 명령을 지키라.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맹세를 존중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라. 즉 왕에 대한 너의 의무보다도 앞서는 우월한 하나님께 대한 너의 의무를 위반하지 않고 너의 선한 양심을 지키기위해서 그렇게 하라." 우리는 국정을 트집잡는 일에 앞장서지 말아야 한다(3절). "왕이 너를 불쾌히 여길때 '그 앞에서 물러가기를 급하게 하지 말라.' 성을 내어 나라를 도망치거나 버리지 말라." 악한 것을 일삼지 말라. "네가 왕을 조금이라도 성나게 했으면 네 자신을 낮추고 스스로를 정당화하지 말라.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것이 왕을 더욱더 성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라." 만일 우리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구제하며 대중의 불만을 시정하기 위해서 우리의 기회들을 지혜롭게 사용해야 한다. 지혜자의 마음은 시기와 판단을 분별하나니(5절). 우리는 양심을 인하여 복종해야 한다(롬13:5). "왕의 명령을 지키라. 이는 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너를 다스리기로 맹세하였고 너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그에게 충성하기로 맹세하였기 때문이라." 그 맹세는 '하나님께 대한 맹세'라고 일컬어졌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그 맹세의 증인이 되시므로 만일 우리가 그것을 어길때는 보복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Ⅱ. 갑작스런 화와 죽음에 대한 준비 8:6-8

 

솔로몬은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이라해도 전혀 예기치 못한 재난으로 놀랄수 있기때문에 갑작스런 변화를 미리 내다보고 준비하는 것이 우리의 지혜라고 가르친다.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장래 일을(일이 언제 어떻게 일어날지를) 가르칠 자가 누구이랴(7절). 별들이 사람에게 장래 일을 말할수 없으며 점성술도 역시 말할수 없다. 우리로 하여금 언제나 변화에 대비하도록 하시기위해 하나님은 지혜롭게 우리로 하여금 장래 일을 알지못하게 하셨다 "무론 무슨 일에든지 한가지 길과 한가지 방법, 한가지 적당한 기회 밖에 없으므로 사람에게 임하는 화가 심하도다." 사람은 총명과 지혜가 부족하므로 불행하다. 우리는 다른 모든 악은 피할수 있다해도 죽어가는 필연적인 우리의 운명은 아무도 피하지 못한다(8절). 영혼이 요구될때 우리는 그것을 단념하지 않으면 안된다. 생기가 그것을 내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소환받을때 '생기를 주장하여 머무르게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죽음은 우리 모든 사람이 조만간에 상대하지 않으면 안될 원수이다. 전쟁할때에 모면할 자도 없으며. 인간의 사악함이 종종 왕의 처벌을 피하거나 그것에 대항할수는 있을지라도 죽음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자신을 지킬수는 없다. 아무리 완고한 죄인이라도 죽음의 공포를 물리칠정도로 자신의 마음을 강하게 하지는 못한다.

 

Ⅲ. 악인과 의인의 결국 8:9-13

 

본문에서 솔로몬은 독재적이고도 압제하는 통치자가 끼치는 해악에 관해 말하면서 우리를 격려한다. 그는 종종 '사람이 사람을 주장하여 해롭게 하는' 것을 주시해 보았다(9절). 백성의 신앙과 권리를 보호해야할 자들이 오히려 그것을 해치려고 마음먹는다는 것은 백성들에게 슬픈 일이 아닐수 없다. 통치자들이 해를 끼치는 것은(그 구절을 이렇게도 번역할수 있다) 그들 자신을 해롭게하는 것이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무슨해를 끼치든지 결국 그것이 자신을 해롭게 만들 것이다. 솔로몬은 악한 통치자들이 그들의 권력을 남용하는 가운데 형통하고 번성하는 것을 보았다(10절). "내가 그 악한 통치자들이 거룩한 자의 처소로부터 오가는 것을 보았노라." 즉 그들이 당당하게 재판소에 들어가고 허세를 부리면서 나오는 것을 보았고('재판은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에 재판소가 거룩한 자의 처소'라고 불렸다. 신 1:17) 그들이 평생동안 직위를 맡고있으면서 그들의 잘못이 전혀 처벌되지 않고 오히려 명예롭게 죽고 성대하게 장사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이 그처럼 악을 행하던 성읍 사람의 잊어버린바 되었다.' 그들이 죽고나자 그들의 악한 행실이 기억되지 않았다. 또한 솔로몬은 그들이 악을 행하는 중에도 형통함을 보고 마음이 강퍅하게 되어 계속해서 악을 행하는 것을 주의해 보았다(11절). 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즉 징벌이 결코 실행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법을 무시하고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담대하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모든 죄인에게 들어맞는 말이다. 특별히 이것은 악한 통치자들에게 더욱 해동되는 말이다. 그들은 대담하게 더욱 해악을 끼치며 강압적으로 죄악을 범한다. 하늘과 땅의 의로우신 재판장에 의해서 악한 일과 악인에게 징벌이 선고되는데 심지어 왕들과 고관대작들의 악에 대해서도 징벌이 선고된다. 이 선고의 시행이 종종 연기되기도 한다. 그래서 죄인들은 처벌되지 않을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형통하고 성공한다. 죄인들은 이점에서 스스로 속는다. 왜냐하면 비록 그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는 않을지라도' 마침내는 더욱더 혹독하게 실행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망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든 자들에게 말하노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잘 될' 것이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교만한 압제자들의 손아귀에 있으면서도 그를 두려워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한다. 내가 정녕히 아노니. "하나님의 약속과 모든 성도의 경험을 두고 볼때 다른 사람들은 어찌될지라도 '그들'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잘될 것이라'는 사실을 내가 아노라." 선한 사람의 일생에는 어떤 대의가 들어있다. 그는 선한 목적을 위해서 산다. 그러나 악한 사람의 일생은 모두가 헛되고 하잘것 없는 '그림자와 같다.' 악인의 날은 그가 장담하는 것만큼 '장수하지 못할 것이다.' 비록 그가 다른 사람들이 기대하는것 이상으로 '장수할지라도'(12절) 그의 날은 반드시 끝이 날 것이다. 그는 영원한 생명에 이르지 못할 것이므로 세상에서의 그의 장수도 무익하게 되고 말 것이다.

 

Ⅳ. 하나님의 뜻에 순응 8:14-17

 

옛부터 지혜롭고 경건한 자들이 이 난제로 고심해 왔다. 이 난제란, 악인의 형통과 의인의 고난이 어떻게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선하심과 조화를 이룰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솔로몬은 이 문제에 관해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조언한다.

(1) 그는 우리가 무슨 이상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보고 놀라지 말라고 한다. 이는 그 자신이 이미 그의 생애동안에 그런 사실을 보았기 때문이다(14절). 그는 '악인의 행위대로 받는 의인을' 보았다. 즉 의인이 그의 의에도 불구하고 매우 어려운 일들을 당하는 것을 보았다. 또 그는 '의인의 행위대로 받는 악인도' 보았다. 즉 악인이 마치 선한 행실에 대해 보상받기라도 하는듯이 아주 눈부시게 형통하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의인이 마음으로 근심하고 당황하는데 반해 악인은 마음이 편하고 두려움이 없이 태평하게 지내는 것을 본다.

(2) 그는 우리가 하나님을 불의하다고 비난하지 말고 세상이 헛되다고 말하게 한다. 하나님께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그러나 세상에 대해 볼때 '이것이 세상에 있는 헛된 일이다.' 이것도 헛되도다. 즉 이 세상의 일은 가장 좋은 것도 아니며 우리에게 행복을 주기위해 계획된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그의 가장 악한 원수들에게 이 세상 재물을 그렇게 많이 주시고 그의 가장 친한 벗들에게는 이 세상 고난을 그렇게 많이 주시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기쁨과 슬픔뒤에는 또다른 삶이 틀림없이 있는 것이다.

(3) 그는 우리로하여금 그 사실에 대해 불안해하지 말고 하나님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기꺼이 즐기며 비록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훨씬더 많고 우리의 것은 매우 하찮게 생각될지라도 그것을 될수 있는대로 잘 이용하라고 한다(15절). "이에 내가 희락 곧 하나님과 그의 권능, 그의 약속을 신뢰하는데서 일어나는 거룩한 안심과 마음의 평정을 칭찬하노라. 이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즉 진지하게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생의 일을 이용하고 무슨 일을 당하든지 기뻐하는 것보다 해아래서 나은 것이 없음이라." 하나님이 사람으로 해아래서 살게하신 날동안 수고하는 중에 이것이 항상 함께있을 것이니라. 우리의 현재 삶은 '해아래서'의 생이다. 우리는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더이상 빛을 발하지 않을때에 시작하여 계속될 "장차올 세상의 삶"을 기다린다.

(4) 그는 우리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이유를 제시하도록 하지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길은 바다에 있고 그의 도는 큰물속에 있어' 찾을수 없기 때문이다(16,17절). 솔로몬 자신과 다른 많은 사람들도 그 문제를 아주 면밀히 연구하고, 악인의 형통과 의인의 고난의 이유를 조사하였지만 그 모든 것이 헛된 노력이었다(17절).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모든 행사'와 그의 섭리를 살펴보고, 서로 비교해 본다할지라도 우리는 '해아래서 하시는 일'에 확실히 정해진 어떤 방법이 있다는 것을 '능히 깨닫지 못한다.'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의 방법보다 뛰어나며 그는 이전에 사용하시던 방법을 그대로 사용하시지도 않는다. "그의 판단은 바다처럼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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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지혜자와 우매자 7:1-6

 

이 구절들속에서 솔로몬은 역설적인 것처럼 보이는 몇가지 진리들을 주장하고 있다.

(1) 훌륭한 미덕을 지녔다는 명예가 이 세상의 모든 부나 쾌락보다도 더 고귀하고 바람직하다(1절).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여기서 '보배로운 기름'이란 땅의 모든 이익들(땅의 소산들중에서 기름이 가장 값비싼 것중의 하나로 취급되어졌다), 모든 감각적인 즐거움들(이것은 기쁨의 기름이라고 불리운다), 그리고 가장 영예로운 호칭들(이는 왕이 기름부음을 받는 까닭이다)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좋은 이름이 많은 재물보다 낫다(잠 22:1). 그리스도께서는 마리아의 기름부음에 대하여 그 대가로 그녀에게 아름다운 이름, 곧 복음서에 기록되는 이름을 주셨다(마 26:13).

(2) 만약 우리가 그렇게 '아름다운 이름'을 가지기에 합당한 삶을 살았다면 죽는 날은 우리의 근심, 걱정, 슬픔에 종지부를 찍게해줄 것이다. 우리를 안식과 즐거움과 영원한 만족으로 옮겨주는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

(3)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우리에게 더 유익하다(2절). 우리는 잔치집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선을 행하며, 좋은 것을 얻을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얼마나 쉽게 허영과 보잘것없는 일에 빠지며, 교만한 마음과 안심하는 마음을 갖기 쉬우며, 육신에 탐닉하기 쉬운가를 고려해 볼때, 우리는 거창한 장례식을 구경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슬픔을 함께 나누기 위하여 '초상집에 가는 편이' 우리에게 더 유익하다. 초상집에 모임으로써 얻어낼수 있는 유익한 점은 '모든 사람의 결국이 그와 같이 된다'는 것을 알고 '산 자는 그것에 유심해야' 한다는 권고를 받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죽음을 마음속에 간직하는데에는 다른 사람의 죽음을 보는 것보다도 더 손쉽고 자연스러운 방법이 없다. 좋은 설교에 유심하려 하지않는 자들도 아마 이 점은 마음에 들 것이며 결국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곰곰히 생각할 것이다. 초상집은 지혜자의 학교로서 그곳에서 많은 좋은 교훈을 배운다. '그 마음이 향락하는 집에 있는' 것은 우매자의 특성이다. 그가 '초상집'에 있을때에는 언제나 속박을 느낀다. 그의 마음은 바로 그때에도 향락하는 집에 가 있기 때문이다.

(4) '한온스의 향락은 한파운드의 슬픔과 맞먹는다'는 속담이 있다. 그러나 전도자는 우리에게 그 반대의 교훈을 가르쳐 준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나타나는 근심이 마음을 좋게 만드는 경우가 자주있다.

(5) 지혜자의 책망으로 우리의 타락을 억제하는 것이 우매자의 노래로써 즐거움을 얻는 것보다 훨씬 낫다(5절). 솥밑의 가시나무의 타는 것으로 적절히 비유될수 있는 우매자의 웃음소리를 사람이 그렇게도 끔찍하게 사랑할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그 가시나무는 큰소리와 큰불을 잠시동안 내기는 하지만, 잠시후에는 재만 날리며, 솥에 있는 것을 끓이는데에는 아무 도움도 주지못하고(왜냐하면 그것을 하기위해서는 지속적인 화기가 필요한 까닭이다) 마는 것이다. 우매자의 웃음소리는 시끄럽고 잠깐동안 반짝하는 것이지, 참된 기쁨의 표시는 아니다. 이것도 헛되니라.

 

Ⅱ. 지혜자의 인내 7:7-10

 

솔로몬은 앞에서 미덕과 경건을 크게 실망시켰던 압제에 대하여 불만을 토로한 적이 종종 있었다.

(1) 그는 그 유혹이 강하다는 것을 인정한다(7절). '탐학이 지혜자를 우매하게 한다'는 것은 너무나 흔한 사실이다. 만약 지혜자가 오랫동안 심한 탐학에 시달리면, 그는 자기 자신에 걸맞지 않은 언행을 하기가 쉬우며, 하나님과 사람을 향하여 갑자기 외람된 불만을 터뜨리게 된다. '그것이 마음속의 은사를 파괴한다'(후반부의 구절은 이렇게 읽어야 한다). 관대한 마음까지도 탐학에 의해서 부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저 학대받는 자들에 대하여 깊이 마음을 써야한다. 만약 우리 자신이 그런 경우에 처했다면 우리도 어찌할바를 몰랐을 것이다.

(2) 탐학자들의 성품은 매우 악하다고 어떤사람은 이해한다(7절). 지혜자라는 평판을 얻고있던 사람이 만약 탐학자가 된다면 그는 미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가지고 있는 은사들이 그의 마음을 파괴해서 그의 내부에 빈곤하게 남아있던 지성과 미덕을 소멸시켜 버리며 그는 선망의 대상이 아니라 동정의 대상이 될것이다. 그를 그냥 내버려두면 잠시후에 그는 스스로 파멸될 것이므로 결국 그 문제는 좋게 해결될 것이다.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8절).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의 밑에서 벽돌 생산량이 갑절로 늘고 모든 것이 절망적으로 보이던 '일의 시작보다' 이스라엘이 이겨서 애굽을 벗어나던 때에 모세가 저 교만한 압제자 바로와 조약을 맺던 '일의 끝이 낫다.'

(3) 우리가 탐학에 의하여 미치는 지경에까지 몰리지 않으려면, 우리는 겸손으로 옷입어야 한다. 이는 '그 마음이 교만한 자'는 그들이 가혹한 처지에 이르렀을때에 난폭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통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하여 인내, 곧 견디는 인내를 입어야 하며 또한 하나님의 정하신 시간이 올것을 기대하는 기다림의 인내를 덧입어야 한다. 우리는 지혜와 은혜로 우리의 격정을 다스려야 한다(9절).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지체되는 것을 참지못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즉시 즐거움을 얻지못하면 화를 내기 쉽다. '분을 오래 품지말라.' 왜냐하면 지혜자에게는 분노가 찾아 오더라도 마치 나그네처럼 그냥 지나가고 말지만, '노는 오직 우매자의 품에 머무는' 까닭이다. 우리는 현재 있는 것을 최선으로 이용해야 한다(10절). "옛날이 오늘보다 낫다는 생각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며, 또한 그런 이유가 무엇인가를 묻지말라." 이는 이렇게 묻는 것이 지혜가 아닌 까닭이다. 우리는 과거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재에 대해서도 재판관이 될 능력이 없으므로, 그 질문에 대하여 만족스러운 대답을 기대할수 없다. 지난 시대의 좋았던 것을 부르짖으면서 우리 시대의 하나님의 자비를 모독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 이전의 황금기에 비해보면 철의 시대와 같은 이 시대에 우리를 보내신 것을 하나님의 불공정하고 불친절한 처사로 여겨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이것은 다름아닌 초조와 불만족에서 오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께 싸움을 걸려는 것이다. 우리는 자연의 보편적 쇠락이나 도덕의 타락이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언제나 선하셨지만 인간은 언제나 악했다. 만약 어떤 점에 있어서 오늘날이 과거보다 더 악화되었다면, 다른 점에서는 더 좋아진 것도 있을 것이다.

 

Ⅲ. 지혜의 유익함 7:11-22

 

(1) 지혜에 대한 경솔 : 지혜는 이 세상에 있는 우리의 소유를 관리하고 선용하는데에 필요하다. 지혜는 유업과 함께하여야 아름답다. 즉 유업은 지혜가 없으면 쓸데가 없다. 지혜는 가난한 자들에게뿐 아니라 부자들에게도 유익하다. 왜냐하면 지혜는 부자를 자기 재물로 인한 피해로부터 지켜주고 또 그 재물로 선을 행할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지혜는 그 자체로 유익하며 사람을 쓸모있게 만들어준다. 그런데 만약 지혜와 함께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더욱 유용하게 쓰일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되며, 자신의 재물과 더불어 그에게 부가 없을때보다도 자기 세대에게 더욱 봉사할수 있게될 것이다. 지혜는 우리의 안전에 기여하며, 고난의 폭풍과 온갖 것을 초토화시키는 그 열기로부터 우리가 피할 안식처가 된다. 그것은 하나의 그늘(그 단어가 이렇게 되어있다), 곧 메마른 땅에 서있는 큰바위의 그늘과 같다. 지혜도 보호하는 것이 되고 돈도(즉 돈처럼) 보호하는 것이 된다. 부자가 그의 재산을 가지고 그렇게 하듯이 지혜자는 그의 지혜를 강한 성으로 삼는다. 지혜는 사람에게 기쁨과 참된 행복이 된다. 이것은 뛰어난 지식 곧 하나님의 지식으로서 돈보다도 뛰어날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지혜 곧 인간의 지혜보다도 더 뛰어나서 이 지식을 가진 자에게 생명을 주는 지식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이고 그것이 곧 생명이다. 그것은 생명을 연장시킨다. 지혜는 사람에게 힘을 불어넣으며 그의 거처와 지주가 된다(19절). 지혜는 지혜자로 능력이 있게 하고 그의 정신을 강건케 하며, 그를 언제나 튼튼한 기초위에 둠으로써 그를 담대하고 결단력있게 해준다.

(2) 지혜에 관한 몇가지 교훈들.

1)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보라(13절). 불행한 사건들에 대한 우리의 불평을 침묵시키기 위하여, 우리는 그 일들속에서 활동하는 하나님의 손을 보고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하여 거스리는 말을 하는 우리의 입을 다물어야 한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마다 선하고 의로우며 유익하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일속에는 흠모할만한 아름다움과 조화가 있으며, 그 모든 것들은 마침내 최선을 위한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사물의 성질을 하나님께서 원래 정해놓으신 상태에서 변경시킬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2) 우리는 우리를 존중하는 하나님의 다양한 경륜에 우리 자신을 적용시키며, 한날에 할일과 의무는 그날에 행해야 한다(14절). 낮과 밤, 여름과 겨울이 차례대로 찾아오기 때문에 형통할때에는 마치 기뻐하지 않는 것처럼 기뻐해야할 것이고, 역경속에서는 마치 울지않는 것처럼 울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지해서 살며 또한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거기에 대처할수가 있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우리의 믿음은 모든 상황속에서 한결같아야 하지만, 어떤 특별한 상황속에서의 믿음의 발휘는 우리의 외적인 조건의 변화에 따라서 같이 변화해야 하는 것이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선을 행하여 선을 구하면서 거룩한 즐거움을 유지하며 마음의 즐거움으로 여호와를 섬겨야 한다.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째서 우리와 다투시는지를 생각지 않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통을 주시는 목적에 부응할수 없다.

3) 우리는 이 생에서 악인이 가장 크게 번영하는 것이나, 경건한 자에게 떨어질수도 있는 가장 슬픈 재난으로인해 실족하지 말아야 한다(15절). 지혜는 우리에게 섭리의 그 어두운 시기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그것들을 하나님의 지혜, 거룩함, 선하심, 신실하심과 조화시킬수 있는지를 가르쳐줄 것이다. 내가 내 헛된 날에 이 모든 일을 본즉. 비록 솔로몬은 그렇게도 지혜로운 사람이었지만, 자기 생애의 날들을 '내 헛된 날'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는 땅위에서의 최고의 날들이라 하더라도 영원한 날에 비하면 그렇다는 말이다. 의인의 재난은 미래의 축복을 위하여 그들을 준비시켜 주는 것이지만, 악인의 재난은 단지 그들의 파멸을 거두는 것뿐이다. 이렇게 굽은 것으로 보이는 것들을 곧게할 심판의 날이 임할 것이며 우리는 그 날이 올때까지 인내로 기다려야 한다.

4) 지혜는 성도에게는 그 길에 대한 경고로도 사용될수 있고, 죄인에게도 그 길을 억제하는데에 사용될수 있다. 의로운중에서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의인은 자기의 경솔함과 성급한 열정에 의하여 스스로 머리를 쥐어짜면서 하나님의 섭리가 자기를 가혹하게 다룬다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말며(16절). 자기를 무인하며 육신을 죽이는 것은 선한 일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렇게 하다가 우리의 건강을 해치거나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섬기기에 합당치 못한 지경에 빠지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가 '지나치게 의인이 된' 까닭이다. "너무 독단적이 되지말며, 자기 자신의 능력을 자부하지 말라. 비판자로 나서서 사람들이 말하고 행하는 것마다 헐뜯는 짓을 하지말라." 죄인에 관하여 보자면, '자기의 악행중에서 장수하는 악인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15절).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우리도 그 악인 정도만 악해져서 안전을 누리자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된다.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말며(17절). "네 자신을 법망에 노출시킬 정도로 어리석음을 범치말라." 어찌하여 기한전에 죽으려느냐.

5) 지혜는 우리에게 그 양극단의 중간을 취할 것을 명할 것이며, 항상 우리의 의무를 지키도록 지시할 것이다. 그리고 그 길에서 우리는 평탄하고 안전한 길을 발견할 것이다(18절). "너는 이것 곧 스스로 함정에 빠지지않게 해주는 이 지혜, 이 조심성을 잡는 것이 좋으며, 또한 '저것을 놓지마는 것이 좋으니라.' 지식이 없는 말과 노새를 어거하듯이, 너의 완고한 격정을 어거하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고삐를 잡으라. 그리고 일단 그것을 잡았으면, 이제는 꼭 붙들고 있으라. 양심을 지키면서도 주의하라. 그리고 이것을 위하여 너 자신이 연습하라."

6) 지혜는 우리에게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하여 어떻게 행동해야할 것을 가르칠 것이다. 지혜는 우리에게, 우리와 관계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그들이 흠이 없기를 기대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우리 자신은 어느누구도 흠이 없을수는 없다. 이 '지혜가 지혜자로 능력있게 하며', 그들로 하여금 분노에 대하여 무장시켜 줌으로써(19절) 그들이 분노에 의하여 혼란에 빠지는 일이 없게 해준다. 그들이 관계하고 있는 사람들은 육체를 입은 천사들이 아니라, 아담의 죄많은 아들 딸들이다.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20절).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지혜는 우리에게 도전적인 모욕에 대해서는 눈이 빨리 돌아가지 말고, 도리어 우리에게 가해지는 여러가지 상해에 대하여 눈을 돌리고서는 마치 못본 것처럼 행동할 것을 가르친다(21절). 무릇 사람의 말을 들으려고 마음을 두지말라. "사람들이 너에 대하여 무엇이라 말하는지를 알기위하여 애를 쓰거나 조사하지 말라. 하나님과 너 자신의 양심앞에서 떳떳하라. 그리고나서 사람들이 너에 대하여 무엇이라 말하는지에 괘념치말라. 만약 네가 온갖 말에 다 주의를 기울인다면, 어쩌면 너는 네가 듣지않고 있는줄로 알고 네 종이 너를 저주하는 것을 들으리라." 그런 모욕을 스무번 그냥 지나치는 것이 하나에 대하여 앙갚음하는 것보다도 더 쉬운 일이다. 지혜는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결점을 가르쳐 준다(22절). "너를 험담하는 자들에게 격노하지 말라. 만약 네가 조용히 자신에게 물어보면 네 마음이 너에게 너도 가끔 사람을 저주한 것을 말해줄 것이기 때문이라. 따라서 너는 네가 한대로 받은 것이니라."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을 뒤에서 험담하고 비방한 것에 대하여 자신에게 참으로 분노한다면(우리는 당연히 그래야 한다), 우리는 뒤에서 우리를 험담하고 비방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분노를 덜 느낄 것이다.

 

Ⅳ. 사람의 사특함 7:23-29

 

지금까지 솔로몬은 이 세상이 헛되다는 것과 이 세상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기에는 너무 부족하다는 것을 입증해 왔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솔로몬은 죄의 사특함과 그것이 분명히 인간을 비극으로 몰고가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입증하고 있는데, 그것은 값비싼 대가를 지불할 경험이었다. 솔로몬은 여기서 그가 쓴 어떠한 책들에서 보다도 참회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1) 그는 자기의 지혜의 부족을 시인하고 그것을 슬퍼한다.

1) 그는 지혜를 탐구하는데 근면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어느누구보다도 뛰어난 지식의 수용력을 허락하셨다. 그는 할수만 있다면 자기의 목적을 관철하려고 결심했다. 내가 지혜자가 되리라(23절). 또한 그는 어떤 노고도 감수하리라고 결심했다(25절). "내가 유용한 모든 학문과 철학과 신학을 통달하기 위하여 돌이켜 전심으로 지혜와 명철을 살피고 궁구했노라."

2) 그러나 그의 성공은 그에게 도움을 주거나 만족을 주지 못했다. 내가...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지혜자가 되리라 하였으나 지혜가 나를 멀리하였도다. "나는 그것을 섭렵할수가 없었노라. 결국 더많은 것을 알수록 알아야할 것도 더 많아졌고 또한 나의 무지를 점점더 알게 되었노라." 무릇 된것이 멀고 깊고 깊도다 누가 능히 통달하랴. 그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 자신에 관한 것이며 하나님의 경륜과 활동에 관한 것이다. 그가 이런 것들을 궁금했을때에, 그는 곧 당혹하게 되었고 좌절할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말씀이 우리에게 가까이 있다'(잠 8:9). 그러나 우리는 멀리있는 많은 것을 알고자 한다.

(2) 지혜에서 그가 부족했던 경우처럼, 그의 어리석음이 지나쳤던 경우들에 대해서도 그는 시인하고 슬퍼한다.

1) 죄의 악함에 대한 그의 연구 : 그는 '악한 것이 어리석은 것이요 어리석은 것이 미친 것인줄 알고자 하였다.' 죄는 마치 자기가 죄로 드러나는 것을 꺼리기나 하는 것처럼 많은 가면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 가면들을 전부 벗겨내고 죄의 본성과 그 색채를 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그 병의 성격, 원인, 악성(malignity)을 알아야하듯이, 우리가 죄를 회개하기 위해서도 그 죄의 악함을 알아야 한다. 그의 우매하던 시절에는 쾌락을 찾는 일에 온정신을 쏟았고 그리하여 육신을 위한 준비에 비상한 재능을 보였던 솔로몬이 이제 하나님께서 그의 눈을 열어주시자 죄의 악한 영향을 찾아내서 자기의 회개를 굳히기위해 열심이다. 큰죄인은 또한 큰참회자가 되어야 한다. 솔로몬이 가장 크게 강조한 것은 어리석음의 악(아마 이것은 자기 자신의 잘못인 것 같다)과 불결함의 죄인것 같다. 이는 이 죄가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의 어리석음'으로 불리웠기 때문이다(창 34:7;신 22:21;삿 20:6;삼하 13:12). 솔로몬은 자신이 그 죄에 빠져 있을때에는 그것을 가볍게 여겼다. 그러나 이제 그는 그 죄의 사악함을 보기를 원한다. 어리석음속에 악이 있듯이, 악함속에 그리고 심지어 우매함과 미친짓속에도 어리석음이 있다.

2) 이 연구의 결과 : 이제 솔로몬은 자기 자신이 범했던 그 큰죄, 곧 '이방 여인을 사랑한' 죄의 악을(왕상 11:1) 발견했다. 그는 죄의 기억을 큰슬픔으로 느꼈다. 내가 깨달은즉...여인은 사망보다 독한 자라. 음란한 여인의 마음은 '올무와 그물'이다. 경솔한 사람들은 쾌락이라는 미끼에 의하여 거기에 걸려든다. 그녀의 손은 다정한 포옹의 위장속에서 한번 잡은 것을 꽉 잡아매는 수갑이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는 저를 피하려니와. 이제 솔로몬은 그가 실제로 범한 죄의 수효를 밝히는데에 마음을 쏟고있었다(27절). 그는 자기가 그 죄를 더욱 자세히 시인하기위하여 회개자로서 그것들을 찾아내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는 곧 당황해서 그것들이 무수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28절). 내 마음에 찾아도 아직 얻지못한 것이 이것이라. "나는 아직도 세고있지만 그것을 모두 셀수는 없도다. 아직도 나는 내 마음속의 새로운 악을 발견하고 있도다"(렘 17:9,10). 그는 자기 자신의 마음과 생활의 부패와 이 세상의 부패를(그 속에서 그는 천명 가운데서 한명의 선인을 찾기가 힘들었다) 비교함으로써 그 실례를 제공하고 있다. 그는 자기가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서도 죄를 범했음을 발견했다(20절). 이 세상에 있는 온갖 어리석은 짓과 미친 짓의 근원은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원래의 바른상태에서 타락한 것이다(29절). 처음 하나님의 손에서 생겨날때의 인간은 선하고 정직한 창조주의 축소판이었다(이렇게 말할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자기 자신의 어리석음과 악때문에 손상을 입었고 결국은 파괴되고 말았다.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 여기서의 그들은 우리의 최초의 부모 혹은 전인류 전체적으로는 모든 사람들이고 세부적으로는 각사람들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제도를 위한 존재가 되지않고 자기의 꾀를 위한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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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자기의 소유를 누리지 못하는 폐단〔1〕 6:1-6

 

솔로몬은 이제 가지고 있기는 하면서도 사용하지 못하는 폐단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솔로몬 자신이 직접 해아래서 본 한가지 폐단이다(1절). 솔로몬은 왕으로서 이런 폐단을 공공에 대한 불이익, 즉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방탕에 의하여,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인색함에 의하여, 대중에게 손상을 입히는 불리한 요소가 된다는 것을 주목했다. 인간의 몸속의 혈액과 마찬가지로 국가의 부도 만약 순환하지 않고 정체되어 있다면 해로운 결과를 가져오게될 것이다. 이런 폐단이 존속되고 있는 것을 본 솔로몬은 전도자로서 자기가 그런 폐단을 비난하고 사람들에게 그것에 대하여 경고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1) 구두쇠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섬겨야할 이유는 얼마든지 있다. '재물'과 '부요'는 대개 사람에게 '존귀'를 가져다 준다. 재물과 부요와 존귀는 하나님의 선물, 곧 하나님의 섭리의 선물이다. 그런데도 그것들은 그것들을 선용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어떤사람은 그 심령의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2절). 그러나 그는 더 중요한 영혼을 위해서는 은혜를 바라지 않는다. 그가 요구하는 모든 것은 감각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들이며, 또 그는 그것을 얻는다. 사람이...일백 자녀를 낳고. 이처럼 어떤 사람이 그의 집안의 힘과 저력이 되며 자기 이름을 떨칠수 있는 수많은 가족을 거느린다고 가정되어 있다. 또한 그의 행복을 더욱 완전한 것으로 보이기위하여, 본문에는 그가 많은 날을 살아서 '천년의 갑절을 산다'고 가정되어 있다.

(2) 그에게는 이렇게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것들을 그 주어진 목적을 위하여 사용하려는 마음이 거의 없다. 이것이 그의 잘못이다. 그는 자기의 소유로써는 마음에 만족을 얻지 못한다. 그는 자기앞에 음식이 차려져있는 것을 보면서도, 그것을 먹을 힘이 없다. 그는 자기가 먹을 음식조차도 아까와할 정도로 옹졸하고 인색한 사람이다. 그가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려 하지않은 까닭에, 하나님께서도 그가 그것을 자기를 위하여 사용할수 있는 힘을 주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강한 자가 그것을 먹도록 하신다. 이것은 '헛되어 악한 병'이라고 불리울만한 것이다. 우리의 가장 악한 질병은 우리 마음의 부패에서 생겨나는 병이다. 그는 자기의 세상적인 소유로부터 얻을수 있을뻔했던 그 좋은 것을 스스로 없애버렸다. 그 심령에 낙이 족하지 못하고 또 그 몸이 매장되지 못하면(3절). 즉 그는 그의 지위에 합당한 훌륭한 장례가 되지 못하고 죽은 나귀가 묻히듯이 장사된다.

(3) '낙태된 자' 곧 모태에서 나와서 곧장 무덤으로 가는 영아가 '저보다 낫다.' 솔로몬은 여기서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서 '낙태'를 매우 슬픈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다(4,5절). 낙태된 자는 헛되이 왔다가 어두운 중에 가매. 그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런 주의도 기울여지지 않는다. 유산이 되었으므로 그에게는 '이름'도 없고, 설혹 이름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곧 잊혀져서 망각속에 묻혀버린다. 그 몸이 땅속에 묻혀버리듯이, 그 '이름이 어두움에 덮힌다.' 그뿐만 아니라(5절) 그는 '햇빛을 보지못하고,' 태의 어두움속에서 곧장 무덤의 어두움속으로 들어가며, 다른 사람에게 전혀 알려지지 못하는 것보다도 더슬픈 것은 그 자신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Ⅱ. 자기의 소유를 누리지 못하는 폐단〔2〕 6:7-10

 

본문에서 전도자는 세상적인 부를 쌓아놓고 거기서 행복을 기대하는 것의 헛됨과 무상함을 더욱 자세히 보여주고 있다.

(1) 사람이 이 세상에서 제 아무리 수고하고 무엇을 얻어낼지라도,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하여 소유할수 있는 것은 우리의 존재의 유지를 위한 것이상이 될수 없다(7절). 소량의 재물로도 우리의 존재는 편안하게 유지되며, 재물이 많다고 해서 그이상의 무엇이 되는 것은 아니다.

(2) 지금까지 그렇게도 많이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더많은 것을 갈망하고 있다. 사람은 '자기의 입을 위하여' 언제나 수고하지만 '그 식욕은 차지않는다.' 영혼의 갈망은 이 세상의 재물속에서는 아무런 만족도 발견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 영혼은 채워지지 않는다.

(3) 우매자도 지혜자가 가진것 만큼의 많은 세상적 재물을 가지고 그만큼의 쾌락을 누릴수 있다. 게다가 지혜자 만큼의 고민을 느끼지 않을수도 있다. 지혜자가 우매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뇨(8절). 우매자도 지혜자만큼 좋은 대접을 받고 옷을 잘 차려입으며 어떤 공적인 좌석에도 훌륭하게 그 모습을 드러낼수 있다. 지혜자가 우매자보다 나은 것인 정신에만 해동되는 즐거움과 명예가 없다면, 이 세상에서 지혜자와 우매자는 결국 같은 수준에 불과하다.

(4)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가 사업을 하고 있고 그것을 사려깊고 근면하게 운영해 나간다면, 그는 엄청난 재산을 짊어지고 있는 사람만큼 이 세상에서 평안하게 지낼수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이웃으로부터 더많은 사랑과 존경을 받으며 자기를 괴롭히는 오만한 부자보다도 더 큰세력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5) 더많은 것을 소유하려는 탐욕보다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누리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인정하지 않을수 없다(9절). '눈으로 보는 것' 곧 현재 갖고있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 '심령의 공상보다 낫다.'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항상 더많은 것을 원하는 사람보다는 적게 가지고 있을지라도 항상 만족하는 사람이 더 행복하다. 우리는 자신의 소망을 하나님께만 집중시켜 그안에서 영혼의 안식을 얻는 것보다 눈으로 보는 것이 낫다고 말할수는 없다.

(6) 우리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달성하든지간에 우리는 여전히 인간에 불과하며, 우리의 가장 큰소유라 할지라도 인간의 생명에 공통적으로 닥치는 일을 벗어나게 해주지는 못한다. 이 세상에 그런 혼란과 잡음을 일으키는 그 분주한 동물은 이미 '그 이름이 칭한바' 되었다. 그를 지으신 이가 그에게 이름을 주셨으므로 '사람이 무엇인지도 이미 안바 되었다.' 그 이름은 겸손하게 하는 이름이다(창 5:2).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아담이라고 부르셨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은 그와 동일한 성질, 곧 '붉은 흙'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 부유하고 큰 자들은 그들이 단지 인간임을 알고 그 사실을 늘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좋다(시 9:20).

 

Ⅲ. 무상함을 더하게 하는 것 6:11,12

 

헛된 것을 더하게 하는 많은 일이 있나니(11절). 겉으로 보기에는 부와 쾌락을 더하게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허영을 가중시키며, 더욱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 있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갈망해야할지를 알지 못한다. 이는 가장 만족스러우리라고 여기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성가신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생각이 깊은 사람들은 비록 그들이 알고있는 일이라 할지라도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할수 있도록 조심한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로는 우리에게 해로운 것을 마치 좋은 것인듯이 갈망하기 쉬운 것은 우리 마음이 부패한 까닭이다. "모든 것이 헛되므로 그 신후에 해아래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누가 능히 그에게 고하리요?" 그는 지금 자기가 어떻게 되리라는 기대로 즐거워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신후에' 그의 자녀나 가족에게 일어날 일에 대한 소망으로 즐거워 할수가 없다. 이는 그가 자기 자신의 장래를 예견하지 못할뿐 아니라 다른 어떤사람도 '그 신후에 무슨 일이 있을 것'을 그에게 미리 이야기해 줄수 없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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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하나님 앞에서 주의함 5:1-3

 

세상의 허무함을 우리에게 보여줌으로써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분리시키려는 솔로몬의 계획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며 우리의 직책에 충실하게 하려는 것이다.

(1) 여기서 솔로몬은 우리를 '하나님의 전' 곧 공공예배의 장소로 보낸다. 우리는 피조물에 대한 실망을,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 돌리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말씀과 기도속에는 어떤 상처에도 바를수 있는 기름이 들어있다.

(2) 또한 솔로몬은 우리에게 그곳에서 우리의 행동을 조심할 것을 명한다. 종교적 실천들은 헛된 것이 아니지만, 만약 우리가 잘못 수행하면 그것은 헛된 것이 된다. 네 발을 삼갈지어다. "네 발을 하나님의 전에서 멀리하지 말고(참조. 잠 25:17), 잘 살펴서 다니며 그 가는 길을 주의하라. 경건한 정숙함으로 하나님의 예배를 참예하며,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수 있는 시간을 가지며, 성급하게 다니지 말라. 즉 '발이 급한 사람'처럼 다니지 말라(잠 19:2). 또한 너의 생각으로 하여금 배회하거나 방황하지 못하게 하라. 너의 마음이 잘못된 대상에게 쏠리지않도록 하라." 어떤사람들은 이것이 모세와 아론에게 내려졌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는 명령을 넌지시 상기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출 3:5;수 5:15). 우리는 우리가 드리는 제사가 '우매자의 제사'가 되지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즉 제사의 의미와 본질은 생각지 않고, 상징과 의식에 주저앉아 버리는 '우매자의 제사'를 드리지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이 죄인지도 모르고 악을 행할수가 있다. 인간의 악한 마음은 예배의 행위속에서도 악을 선택할수밖에 없다. 우리는 경청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읽혀지고 가르쳐질때에 거기에 근실하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때때로 듣는 것은 순종하는 것을 대신한다. 왜냐하면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기 때문이다(삼상 15:22; 사 1:15,16). 우리는 하나님앞에 나아갈때에는 언제나 극히 조심해야 한다(2절). 너는 하나님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말라. 즉 기도나 서약이나 주장할때에 그리하지 말아야한다. 만약 우리가 아무런 볼일도 없이 온다면, 갈때에도 아무런 이익을 얻지못하고 갈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앞에서' 말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서 나와야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때에 말이 우리의 생각을 앞지르지 말도록해야 한다. 우리의 생각은 곧 하나님께 드리는 말이다. 우리의 말하는 것이 마음에서 나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의 말은 갑작스런 열기나 격정이 아닌 안정된 마음에서 나와야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그곳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축복과 찬송보다도 훨씬 높이 계시다.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땅은 하나님 보좌의 발등상이요, 하나님과 어떤 교제도 가질 자격이 없는 무가치한 곳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말씀을 올릴때에는 정중하고, 겸손하며, 진지하고 삼가는 태도를 가져야하는 것이다.

 

Ⅱ. 서원과 말한 것을 지킬 것 5:4-8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네가지 사실에 대하여 권고를 받는다.

(1) 서원한바를 양심적으로 지켜야 한다.

1) 서원한 마음을 제어하는 것이다(민 30:2). "네가 어떠한 환난을 의식하거나(시 66:14) 어떤 자비를 목적으로(삼상 1:11) 하나님께 서원했다면, 너는 네 입을 여호와께 열었으므로 취소할수 없음을 알라. 그러므로 너의 약속한 것은 지키라." 서원한 것을 갚으라. "그것을 온전히 갚고 조금이라도 갚지않는 부분이 없게 하라."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주님께 드리기로 서약했는가? 만약 그렇게 서약했다면 그 말한대로 행하라. 갚기를 더디게 말라.

2) 우리가 우리의 서원한바를 신속하고도 기쁜 마음으로 갚아야할 두가지 이유가 여기 제시되어 있다.

① 만약 그렇게 하지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 되는 까닭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하나님께 속임수를 쓰려고 계획한 것처럼 되어서, 결국은 어리석은 짓이 되고 만다. 하나님은 우매자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② 만약 그렇게 하지않는다면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격이 되는 까닭이다. 즉 그것을 어긴 형벌을 받아야 하게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럴바에는 차라리 서원하지 않는 것이 낫다. 서원하지 않은 것은 단지 어떤 일을 하지않고 넘어간 것에 불과하지만, 서원하고 갚지아니하는 것은 사기죄와 거짓 맹세의 죄에 빠지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 거짓말하는' 것이다(행 5:4).

(2) 서원함에 있어서 조심스럽게 해야한다. 우리는 악한 것이나 죄악의 소지가 있는 것에 대해서는 결코 서원하지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런 서원은 잘못 발해진 것으로서, 지켜지지 말아야하는 까닭이다. 헤롯의 성급한 약속이 그로하여금 세례 요한의 목을 자르게 만들고 만것과 같은 서원에 의하여 '자기 입으로 자신의 육체를 범죄케말라.' "서원을 했으면 그것을 교묘하게 피해서 빠져나갈 생각은 하지말라. 제사장(여기서 만군의 여호와의 천사 혹은 사자라고 불리우고 있음)앞에서 말하기를, 다시 생각해 보고 마음을 돌렸으며 그 서약을 지켜야할 의무를 벗고 싶다고 말하지 말라. 반드시 그 서원에 충실해야 하며, 빠져나갈 구멍을 찾지 말라." 만약 우리가 부정직하게도 우리 입의 말을 취소하고, 우리의 서원을 폐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우리의 계획을 실패케하실 것이다.

(3) 하나님 경외하기를 계속해야 한다(7절). 옛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꿈에 의하여 자기들이 하나님의 뜻을 아는 척하면서 하나님의 백성들로하여금 그들의 꿈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거의 잊어버리게 만들었다(렘 23:25,26). 그런데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놀랍고 기묘한 꿈을 꾸고서는 마치 자기들이 재난을 미리 감지하기나 한것처럼 당황하여 어쩔줄 몰라 한다. 꿈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은 많은 꿈을 꾸게될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꿈속에는 헛된 것이 많다.' 그러므로 "꿈에 주의를 기울이는 일이 결코 없도록하라. 꿈을 자꾸 반복하는 짓은 이제 그만두라. 또한 꿈을 강조하지도 말고 거기서 결정적인 결론을 이끌어내지도 말며,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라."

(4) 정의감과 인간을 위한 염려를 품고있는 선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빈민을 학대하는 것'과 '공의를 박멸하는 것'(법의 허울속에서 권력의 비호를 받는 압제)을 보면 분노를 느낀다. 나라 전체는 훌륭한 정부의 통치를 받고 있을지라도 어떤 특정한 지방이 악한 사람에게 맡겨지는 일이 발생할수 있다. 이런식으로 사태가 밝아 보이지 않을때에, 우리는 비록 압제자들이 높을지라도 하나님은 피조물의 '가장 높은 자보다 더높은 분'이시며, 제왕들중의 가장 높은 자보다도 더높은 분이시라는 사실에서 위로를 얻을수 있다. 하나님은 '온 땅위에 가장 높은 분이시며' 그의 '영광은 하늘들위에 있다.' 비록 압제자들이 지금은 안전하다해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조목하고 계시며 그들이 난폭하게 공의를 거스린 일들을 모두 갚아주실 것이다.

 

Ⅲ. 재산도 헛됨 5:9-17

 

솔로몬은 여기서 '육체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헛되듯이 큰부와 그에 대한 '안목의 정욕'도 헛되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사람은 재물을 소비함으로써 행복을 얻지못하듯이 그것을 쌓아두더라도 역시 행복을 얻지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1) 솔로몬은 땅의 소산이 인간 생명의 유지와 평안을 위하여 귀한 것임을 수긍한다(9절). 땅의 이익은 뭇사람을 위하여 있나니. 모든 사람이 그것을 필요로하며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정해진 일이다. 그리고 땅에서는 모든 사람이 쓰기에 충분한 양이 나온다. 땅은 우리의 곳간이며 짐승들은 우리와 함께 토지의 공영자이다. 왕도 밭의 소산을 받느니라. 따라서 그 소산이 없다면 굶어죽을 것이다. 이것은 농부의 소명에 큰명예를 입혀준다. 이는 인간생명의 유지를 위해서는 농부의 직책이 다른 무엇보다도 가장 필요한 것인 까닭이다.

(2) 솔로몬은 생명의 유지를 위한 것이상의 부, 곧 사용하기 위함이 아니라 축적을 위한 재산은 헛된 것이며 그것이 사람을 편안하거나 행복하게 해줄수 없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은 많이 가질수록 더많이 가지려 한다(10절). 정상적인 욕망은 그 요구하던 것이 획득되면 진정이 되지만, 타락한 욕망은 만족을 모른다. '은 그 자체만 가지고서는' 충족시킬수 없는 인간의 신체적 욕구들이 있다. 만약 어떤사람이 배가 고프다면, 그때에 은을 먹는 것은 마치 진흙덩이를 먹는 것과 똑같이 사람의 허기를 채워주지 못한다. 하물며 세상적인 풍요가 영적인 욕구를 채워주지 못하는 것은 말할것도 없다. 재산이 더하면 먹는 자도 더하나니(11절). 음식이 많아지면 입도 많아진다. 재산이 늘어나는가? 그와 동시에 가족의 수도 훨씬 늘어나면서, 자녀들도 성장해서 더많은 것을 요구하지는 않는가? 사람의 소유가 점점 증가하게 되면 그에 따라 그것들을 비치해 둘수 있는 더나은 집이 필요하다. 주인은 자기의 소유로써 자기가 누릴수 있는 실제적인 유익만큼 주위의 사람들도 누릴수 있게 배려한다. 그런데 이때에 다른 사람들에게 선을 행한다는 만족감은 오직 주인만이 가지는 것이며, 이것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복되다'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는 사람에게는 분명히 만족을 주는 일이다. 사람은 그 소유가 많을수록 그것에 대한 염려도 늘어나게 되는데, 이것때문에 그들은 어쩔줄 모르게 되고 수면을 방해받게 된다(12절). 원기를 되찾게하는 수면은 이 세상에서의 생활을 위하여 음식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다. 열심히 일을 하고나서 얻은 소산만으로 사는 사람들이 대개는 가장 잠을 잘 잔다. 노동자는...잠을 달게 자거니와. 때때로 모든 것을 가진 사람들이 자주 밤에 단잠을 이루지못하는 경우가 있다. 소유가 많은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거나 다른 사람에게서 손해를 입을 위험성이 더많다(13절). 내가 해아래서 큰폐단되는 것을 보았나니 곧 소유주가(재산을 열심히 축적해서 안전하게 지키고 있는 자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되도록 지키는 것이라. 그들에게는 차라리 그 재산이 없었더라면 더좋을 뻔했던 것이다. 그들은 '그 재산으로 해를 끼친다.' 즉 그 재산은 그들로하여금 자신의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킬수 있게 만들어줄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압제하며 가혹하게 다룰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자주 그들은 자신의 부로 말미암아 해를 입게 된다. 만약 그들이 부자가 아니었다면 그들은 다른 사람의 시기를 받지도 않았고 도적을 맞지도 않았을 것이다. 큰고통과 함께 축적된 재물은 그들이 그 재물을 지키고 증가시키기 위하여 쏟던 바로 그 고통과 근심에 의하여, 즉 '재난을 인하여 패망한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모든 것을 얻음으로써 모든 것을 잃는다. 사람이 죽을때에,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는 그 모든 것을 뒤에 남겨두고 가는 것이다(15,16절). 저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 나온데로 돌아가고. 육신에 관한한 우리는 올때와 똑같이 돌아간다. 흙은 원래대로 땅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의 영혼까지도 처음에 왔던대로 성화되지 못한채 돌아간다면, 이것은 슬픈 일이다. 그 마음이 이 세상에 집착되어 있는 사람은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것도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한다'는 것을 슬픈 폐단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재물은 그와 함께 저세상으로 가지는 못하며 그곳에서는 재물이 조금도 그에게 도움을 주지 못한다. 만약 우리가 신앙생활로 수고했다면, 우리는 그 수고로써 얻은 은혜와 평강을 우리의 마음속에 가지고 갈것이며, 그것을 영원토록 더많이 받게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영원한 양식이다. 사람들은 임종시에 자기가 수고하여 얻은 모든 이익이 바람과 같이 사라져서 그것이 어디로 갔는지 알지도 못하게 될때에야 비로소 자기들의 수고가 '바람을 잡으려는 수고'였음을 깨닫게될 것이다. 소유가 많은 사람들이 만약 마음을 그 소유에 쏟는다면, 그들의 죽음이 불편할뿐만 아니라 그 삶도 역시 불편한 것이다(17절). 재산을 늘리는데에 그렇게도 혈안이 되어 있는 이 탐욕스런 속인들은 '일평생 어두운데서 먹으며 번뇌와 병과 분노가 그들에게 있게 된다.' 그는 자기의 재산에서 아무런 쾌락도 아무런 기쁨도 누리지 못하는데, 이는 '그가 슬픔의 떡을 먹으면서도'(시 127:2), 다른 사람이 그것을 먹는 것에 대하여 크게 화를내는 까닭이다.

 

Ⅳ. 낙을 누리는 분복 5:18-20

 

쌓아놓은 부가 허무하다는 사실에서 솔로몬은 우리가 취할수 있는 최선의 길은 우리의 소유를 선용해서 그것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선을 행하며, 거기서 우리 자신과 가족이 평안을 얻는 것임을 추론한다. 솔로몬은 앞에서 이미 이 사실을 역설하였다(2:24;3:22).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사는 '날수'를 정해주셨다(욥 14:5). 그러므로 우리는 그 날들을 '마음의 기쁨과 즐거움으로 주 우리 하나님을 섬기면서' 보내야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소명인 직업을 고역으로 여기지 말아야하며, 또한 우리 자신이 거기에 질질 끌려가는 노예처럼 되지말고, 우리가 당황이나 불안에 빠지지않고 해낼수 있는 일이상의 벅찬 일을 벌이지 않으면서, '수고함으로 즐거워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기쁘게 사용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을 주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 은사의 목적에 부응하는 것이며, 합리적이고도 관대하게 세상에서 선을 행하고 그들의 소유를 가장 잘 이용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그들의 공로이자 그들의 위안이 된다. 이것이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거기에는 책임감과 단정함이 따른다. 그렇게 행하고자 하는 심정은 하나님의 섭리의 모든 은사를 존귀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이것은 세상에서의 우리 생활에 부수적으로 따라다니는 많은 고통과 시련에서 우리를 건지는 길이다(20절). 저는 그 생명의 날(즉 슬픔과 뼈아픈 고통의 날들, 노동하는 날들, 통곡의 날들)을 깊이 관념치 아니하리니. 그는 그 날들을 잊어버리거나, 아니면 흘러가버린 물처럼 기억할 것이다. 그는 자기의 십자가들을 크게 걱정하지 않을 것이며, 그것의 쓴맛을 오래 간직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저의 마음의 기뻐하는 것으로 응하시는' 까닭이며, 그의 노동의 모든 슬픔을 그것의 기쁨으로 채워주시며, '그의 손에 수고한대로 먹게' 하심으로써 그의 수고를 보상해주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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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학대받는 자들이 느끼는 유혹 4:1-3

 

솔로몬은 '넓은 마음'(왕상 4:29)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 사실은 다른 여러점들 가운데서도 나타나지만 그가 불쌍한 자와 환난당하는 자들에 대해 매우 자상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잘 나타난다. 그는 3:16,17절에서 압제자들을 비난했었는데, 이제는 학대당하는 자들을 주시하고 있다. 본문에서는 그는 전도자로서 학대당하는 자들을 위로한다.

(1) 학대받는 자들이 처한 환난(1절)은 그를 슬프게 하였다. 종들과 노동자들은 그 주인들에게 학대받고, 채무자들은 잔혹한 채권자들에게, 그리고 채권자들은 사기꾼 빚쟁이들에게 시달림을 받았다. 또한 소작인들은 가혹한 지주들에게, 고아들은 믿을수 없는 후견인들에게 학대와 수탈을 당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극악한 것은 전제 군주들과 불공정한 재판관들이 백성들을 압제하는 일이었다. 솔로몬은 자력으로는 스스로를 도울수 없는 '학대받는 자들의 눈물을' 보았다. 저희를 학대하는 자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학대자들은 그릇된 일을 행하고서도 자기들의 권세로써 그 잘못된 일을 고집하고 자기들이 행한 것을 끝까지 밀고 나갔으므로, 가난한 자들은 폭력에 억눌리고 구제받을 길이 없었다.

(2) 이렇게 가혹한 취급을 당하게 되자 그들은 죽어서 무덤속에 있는 자들을 부러워하고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하는 소원을 갖도록 유혹을 받는다(2,3절). 그래서 솔로몬은 쾌히 그들의 생각에 동의한다. "나는 잘 살아보기도 전에 이미 죽은 자를 칭송하였노라. 나는 삶이라고 하는 길고도 무거운 쇠사슬을 질질 끌며 그 지리한 분초를 소모시키면서 아직 살아있는 자보다 그들이 더 낫다는 결론을 내렸노라." 태어나서 '해아래서 행해지는 악을 보느니'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더 낫다. 이는 태어났다해도 문제를 개선할 능력이 없거나, 설사 한문제를 잘 해결했다해도 여전히 다른 문제로 학대를 받게되므로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더 낫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선한 사람은 그가 이 세상에서 아무리 비참한 처지에 있더라도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겠다고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불속에서조차 여호와를 영화롭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Ⅱ. 평안에 대한 유혹 4:4-6

 

(1) 만일 사람이 명민하고 재주가 있어서 사업이 성공적이면 자기 이웃에게 시기를 받는다(4절). 또한 그는 자신의 정직함으로인해 얻은 명성으로 해서 더욱 시기를 받는다. 가인은 아벨을, 에서는 야곱을, 그리고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였는데, 이 모두가 그들의 의로운 행실때문이었다. 이것은 명백히 악마적인 행위이다. 덕이 뛰어난 자들은 악이 넘치는 자들의 눈에 언제나 가시와 같을 것이다. 그렇다고해서 우리는 어떠한 옳은 일을 하는데에 용기를 잃어서는 안되며 사람으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의 칭찬을 기대하여야 한다.

(2) 만일 사람이 어리석어 자기 사업에 실수를 저지르면 그는 자기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다(5절). 마치 손이 둔하고 거두어져 있는 것처럼 자기 일을 하는데에 매사에 서투른 '우매자'와, 자신의 안일을 사랑하고 손을 따뜻하게 하려고 손을 거두는 '게으름장이'는, '자기 살을 먹으며' 자기 자신에 대해 식인종이 된다. 그는 자기 살 이외에는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을정도로 가난한 처지까지 스스로를 몰고가는 것이다. 한손에만 가득하고 평온함이 두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으려는 것보다 나으리라(6절). 이 말씀은 다음의 두가지 각도에서 받아들일수 있다.

1) 마치 정직하게 수고하여 풍부한 것보다 게을러서 조금 가지는 것이 더 낫다는 투로 자기 자신의 게으름을 변명하는 게으름장이의 주장으로 볼수 있다.

2) 그러나 이것을 수고와 게으름사이에서 중용을 취하라는 솔로몬의 권면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필요한 것이 부족하지않도록 정직과 근면으로 한손 가득히 붙들라. 그러나 양손에 가득히 잡음으로써 마음을 쓰게하지 말라. 적당한 수고와 적당한 수익이 가장 좋은 것이다.

 

Ⅲ. 서로 도우라는 권면 4:7-12

 

솔로몬은 이 세상의 헛된 것에 대해 또다른 실례를 들어보이는데, 그것은 흔히 사람들이 가진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가지고 싶어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이러한 욕망에 너무도 열중하여, 자기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에서 아무런 즐거움도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1) 이기심이 바로 이 악의 원인이다(7,8절). '어떤사람이 홀로 있는데' 그는 자기 자신외에는 아무도 염두에 두지않는다. 그에게는 다른 사람이 없으며 또한 그는 다른 사람이 있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그는 한집에 한입만 있으면 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을 자기 사업의 노예로 만든다. 어떤사람은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으니 아무도 없이 홀로 있으나(8절). 그는 자기 자신외에는 돌볼 사람이 한사람도 없으며 가족을 위한 지출비가 겁이나서 결혼도 하려하지 않는다. 수고하기를 마지아니하며. 그는 자신이 충분히 가졌다고는 절대로 생각지 않는다. 부를 눈에 족하게 여기지 아니하면서도. 그는 등을 따뜻이 하고 배를 불리며 자기 직업과 가족, 이 세상에서 멋지게 사는 일에는 모자람을 느끼지않았으나, 그것들이 자기 눈에 차지는 않았다. 그는 자기가 갖고있는 소유가 주는 위로를 거부한다. 내가...내 심령으로 낙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고. 그에게는 이런 일을 행하는 것에 대한 변명의 여지도 없다. 그는 '아들도 없으며 형제도 없다.' 즉 그에게는 불쌍한 자도 사랑스러운 자도 없는 것이다. 자기들의 모든 수고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정말 가치있는 일인지 아닌지를 깊이 생각해 보고서 이 세상에서 수고하는 자들은 지혜로운 사람들이다. 만일 사람들이 이 점을 숙고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헛되어 무고한 노고'이다. 그들은 아무 의미도 없이 수치를 당하며 애태우는 것이다.

(2) 친목이야말로 이 악에 대한 치료책이다. 사람들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하려 들기때문에 이처럼 비열하게 되는 것이다. 솔로몬은 여러가지 사례를 통해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창2:18)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우리에게 결혼과 우정을 권장하고 있다. 두사람이 한사람보다 나음은(9절). 그들중 어느 쪽이라도 따로 떨어져 있는 것보다는 결합해있는 것이 더 행복한 것이다.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자기를 섬기는 자에게는 자기 자신만이 회계 주임이 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한 사람은 '좋은 상'을 얻는다. 거룩한 사랑의 즐거움과 유익은 사랑의 모든 일과 수고에 대하여 풍부한 보상이 될 것이다. 그는 우정과 좋은 교제의 유익에 대한 여러가지 사례를 통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두사람이 함께 여행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왜냐하면 혹시 한사람이 넘어지게 되면 다른 한사람이 즉시 그를 붙들어 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사람이 만일 죄에 빠지게된다면 그의 친구는 온유한 마음으로 그를 돌이키고자 도와줄 것이다. 덕스럽고 은혜로운 애정은 좋은 교제를 통해 일어나며, 기독교인들은 사랑과 선한 일을 하도록 서로를 분발시킴으로써 서로간에 따뜻하게 한다. 만일 대적이 홀로있는 사람을 발견한다면 그 대적은 그를 이기기 쉽다. 그러나 만일 그에게 조력자가 있다면 그는 그 대적을 충분히 감당해낼수 있을 것이다. 한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12절). 로마인들이 영국을 침범했을때의 고대 브리튼 족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이 전해지고 있다. "그들은 분산된 부대로 싸우는동안 대세를 그르쳤다." 영적인 전쟁에 있어서도 우리는 영적 사업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서로에게 도움이 될수 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주는 위로에 버금가는 것은 성도와의 교제에서 오는 위로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잠언으로 결론을 짓는다. '삼겹줄은' 한다발의 화살과 마찬가지로 '쉽게 끊어지지 않지만' 줄 한가닥과 화살 한개는 쉽게 끊어진다. 그는 두사람이 함께있는 것을 '삼겹줄'에 비유하고 있다. 왜냐하면 거룩한 사랑과 우정으로 밀접하게 연합되어 있는 두사람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엠마오로 가고 있던 두제자와 합류하셨던 것처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오셔서 세번째 분이 되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 세겹의 줄이 되는 것이다.

 

Ⅳ. 명예의 헛됨 4:13-16

 

(1) 왕이라도 지혜가 없으면 행복하지 않다(13,14절). 만일 그가 우둔하다면 그는 어떠한 충언이나 간함도 받지않을 것이다. 우매함과 고집은 흔히 함께와서, 충고를 가장 필요로하는 자들로 하여금 한사코 그 충고를 받지못하게 만든다. 만일 사람이 충고를 들어줄만한 진정한 지혜와 덕을 소유하지 못한다면 나이가 지위로도 존경을 받지못할 것이다. 반면에 연소함과 가난이라는 불리한 조건하에 있더라도 지혜와 덕이 있는 자면 명예를 얻을수 있을 것이다.

(2) 왕이 만일 백성들의 사랑을 받는 일에 꾸준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십중팔구 왕위에 계속 머무르지 못할 것이다. 왕된 자에게는 반드시 후계자 곧 '버금으로 대신하여 일어날 소년'이 있어야 한다. 그 소년은 왕 자신의 소생이거나 아니면 13절에서 말하는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소년'이라고 가정할수도 있다. 백성은 결코 오랫동안 편안해 하고 만족해하는 법이 없다. 백성들이 무수하였을지라도(16절). 그들은 끊임없이 변화를 좋아하지만 자기들이 무엇을 갖고 싶어하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까지 그래왔듯이 아마 여전히 그럴 것이다. '후에 오는 자들'도 똑같은 마음일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처음에는 매우 좋아했던 것처럼 보이는 왕에게조차도 오랫동안 '기뻐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은 '호산나'라고 하지만 내일이면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외칠 것이다. 이것도 헛되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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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모든 인간사의 가변성 3:1-10

 

우리는 변화의 세계속에 살고있다. 시간이 흐르며 발생하는 여러가지 사건들과 인간생활의 여러조건은 매우 판이하며 우리는 끊임없이 그러한 일들을 지나치고 또 지나치면서 살아간다. '생의 바퀴'(약 3:6)가운데, 가장 꼭대기에 있던 바퀴살이 잠시후에는 정반대의 위치에 가있는 경우가 때때로 있는 것이다. 끊임없는 만조와 간조, 부단히 차고기우는 달과 같이 하나의 극단으로부터 또다른 하나의 극단으로 변화해 간다. 우리는 형통할때 편안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안심하지 못한다. 우리가 안심할수 없는 까닭은 우리의 사는 곳이 변화무쌍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안심해야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즉 솔로몬이 2:24절에서 권면한바와 같이 하나님께 겸손히 의지하는 가운데 '우리의 수고한 낙을 누리되,' 갖가지 소망으로 한껏 고개를 쳐들지도 말고 두려움으로 낙담하지도 말며 오로지 한결같이 침착한 마음을 지녀야 한다.

(1) 한가지 일반적인 명제가 제시되고 있다. 범사가 기한이 있고(1절). 서로 매우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일들도 형세가 순환하는 가운데 각각 제차례를 찾아 활동하기 시작할 것이다. 낮은 밤과 교대하며 밤은 낮과 다시금 교대한다. 여름인가 하면 겨울이 오고 겨울인가 하면 얼마 안있어 여름이 올 것이다. 모든 목적이 이를때가 있나니.

(2) 이 여러가지 변화들중 일부는 순전히 하나님의 행위이고 일부는 사람의 의지에 의존하고 있다. '천하에는' 모든 것이 이처럼 변화무쌍하지만 천상에는 모든 것이 불변하는 상태에 있다.

1) 날때가 있고 죽을때가 있으며(2절). '날때가 있고 죽을때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시 살아날때가 있을 것이다.

2) 사람들에게는 일년중 한때, 일생중 한때 '심는 때'가 있다. 그러나 '심은 것'이 열매가 없고 무익할때, 그때는 그것을 '뽑을 때'인 것이다.

3) 죽일때가 있고(3절). 그때는 하나님의 심판이 땅에 널리퍼져 모든 것을 황폐시키는 때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비의 길로 돌아오실때는 '그가 찢으신 것을 치료하는 때로서'(호 6:1,2) 백성으로 화를 당케하신후 위로하시는 때인 것이다(시 90:15).

4) 헐때가 있고 세울때가 있으며. 가정, 재산, 나라를 '헐때'는 그것이 곧 멸망에 이를정도로 무르익은 때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돌아와 회개한다면, 하나님께서는 헐어버리는 것을 다시 세우실 '때'를 찾으실 것이다.

5) 하나님의 섭리가 '울고 슬퍼하도록 요구하는 때'가 있다. 그러나 한편 하나님께서 '웃고 춤추도록' 요구하시는 때, 곧 명랑함을 명하시는 때가 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마음의 기쁨과 즐거움으로 자신을 섬길 것을 기대하신다.

6) 하나님께서 국경에 평화를 주셔서 요새를 철거해 버림으로써 '돌을 던져버릴 때가 있다.' 그러나 성채를 쌓기위해 '돌을 거둘때'도 있다는 것이다(5절).

7) 친구가 신실하다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이 우리가 그 친구를 '안을 때'이다. 그러나 그가 부정하거나 신실치 못할때는 그를 '안는 일을 멀리할 때'이다. 이것은 고린도전서 7:3-5절과 요엘서 2:16절에 설명되어 있는대로 부부간의 포옹에 흔히 적용된다.

8) 찾을때가 있고 잃을때가 있으며(6절). 기회가 미소짓는 때는 돈을 벌고, 승진하며, 이득을 보는 거래를 하는 때로서 곧 지혜로운 자가 찾는 때이다. 그가 세상에 나가 일하고 가족이 불어날때, 그가 전성기를 맞을때, 바로 그때가 그에게 분주한때이며 햇볕이 비취는동안 건초를 만들때인 것이다. 또한 쉽게 얻은 것들이 쉽게 흩어져버릴때, 즉 '잃을때'가 올 것이다.

9) 우리가 이미 얻어놓은 것을 이용할때, 곧 '지킬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인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버려야할 때'가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에 집착한다면,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우리의 양심을 그릇되게 하지않을수 없게되는 것이다(마 10:37,38).

10) 매우 큰슬픔을 당할때에 하듯이 옷을 '찢을 때'가 있으면, 그 슬픔이 지나갔다는 표시로 그 옷을 다시 '꿰맬 때'가 있다.

11) '잠잠히' 있는 것이 우리의 의무가 되는 때가 있는데, 그때는 바로 '악한 때'(암 5:13)이거나 우리가 잘못 말할 우려가 있는 때(시 39:2)이다. 그러나 침묵이 공의로운 주장을 배신하게 되는 때가 있는데, 그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말해야할 때'인 것이다.

12) '사랑할때'가 있으며 우애를 보이기위해 명령하고 자유스러워할 때가 있다. 반면에 '미워할때'가 올수도 있는데, 그때는 우리가 좋아하던 자들과의 모든 친밀한 감정을 끊어버릴만한 명분을 보게되는 때로서 그 친밀감을 유보시켜야 하는 것이다.

13) '전쟁할때'가 있는데, 그때는 하나님께서 심판을 위해 칼을 빼어드시는 때이며, 사람들이 정의를 위해 칼을 빼어드는 때이다. 그러나 또한 '평화할때'가 있는 것이다. 그때는 여호와의 칼이 칼집에 들어가는 때이며 그가 '전쟁을 쉬게' 하시는 때이다(시 46:9). 전쟁은 언제나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며, 이와 마찬가지로 어떠한 평화도 영원한 평화라고는 불리우지 않는 것이다.

(3) 만일 우리의 현재 상태가 그 정도로 변천하기 쉽다면, '일하는 자가 무슨 이익이 있으랴'(9절). 우리는 우리들 자신이 그러한 변화속에서 시험당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야 한다. 실로 '우리가 수고하는 일에는' 아무 이익도 없다. 물건 자체는 우리가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때에라도 우리에게 별로 유익을 주지못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것에 대해 하나님의 섭리가 정해놓은대로 바르게 사용한다면 유익함이 있을 것이다(10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이는 그것을 통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단련을 받고 다양한 사건들을 통한 연단으로 갖가지 은총들을 얻게하려는 것이다. 모든 변화는 우리로하여금 어떤 새로운 일을 중지하게 만드는데, 이때 우리는 그 변화자체보다도 이 새로운 일에 보다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Ⅱ. 하나님의 계획의 불변성 3:11-15

 

솔로몬은 그 모든 변화들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여준다.

(1) 우리는 현재있는 것을 될수 있는대로 이용해야 하며, 현재로서는 그것을 가장 좋은 것으로 믿고 그것에 순응해야 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11절). 더위가 여름에 어울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추위는 겨울에 어울린다. 또한 제차례가 되어 돌아온 밤은 흑암의 아름다움이고 때가 되어 돌아온 낮은 밝음의 아름다움이다. 하나님의 섭리와 그 모든 경륜가운데는 놀랄만한 조화가 있어서, 그 섭리를 통해 일어나는 사건들은 그것들이 일어난 시기와 관련 사항과 성향을 생각해 볼때 하나님께는 영광, 그를 신뢰하는 자들에게는 위로가 되기에 충분히 아름답다. 비록 지금은 우리가 섭리의 완전한 아름다움을 보지 못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신비가 완료되는 때에는 그것을 보되 영광스럽게 된 모습을 볼 것이다(신 32:4;겔 1:18).

(2)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측량할수 없음'을 인정하고, 현재 우리에게 뒤엉키고 복잡하게 보이는 것에 대해 완전한 발견을 할수 있기위해 끈기있게 기다려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때가 오기전까지는 아무런 판단도 내리지말아야 한다. 그림이 그려지고 있는동안, 그리고 집에 세워지고 있는동안에는 그 아름다움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예술가가 마지막 손질을 하고난 다음에는 모든 것이 매우 훌륭하게 보이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중간부분 밖에 보지 못한다. 그래서 그 일의 처음도 보지 못했으려니와(만일 그 처음을 보았더라면 하나님의 경륜속에 그 계획이 얼마나 훌륭하게 들어있는지를 알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행동이 영광스럽게 성취되는 그 일의 마지막부분 또한 보지 못한다(만일 그 마지막을 보았더라면 우리는 그 결과가 얼마나 영화로운지를 알수 있을 것이다). 오직 우리는 휘장이 찢어질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이...사람에게 세상(한글개역에는 '영원'으로 나옴-역주)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이 상이하게 이해되고 있다.

1) 혹자는 이 말씀을 우리가 왜 하나님의 일에 대해 보다많이 알수 있는지에 대한 이유로 삼고있다. 만일 사람들이 사물에 대한 정확한 관찰에 몰두하기만 한다면 그 대부분의 사물가운데서 경탄할만한 질서와 짜임새있는 계획을 깨달을수 있을 것이다.

2) 다른이들은 이 말씀을 왜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대해 그처럼 모르고 있는지에 대한 이유로 보고있다. 우리는 세상을 우리 마음속에 너무 많이 두고있으며 세상일들에 대한 생각과 염려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어서 그 일속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손길을 볼수 있는 시간도 정신도 없는 것이다.

(3) 이러한 일들가운데는 분명하고도 지속적인 선이란 없다(12,13절). 그것들 안에 있는 모든 것은 그것들을 사용하여 우리 가족에게, 우리 이웃에게, 가난한 자에게, 대중에게, 그리고 사회와 종교의 유익을 위해 곧 선을 행하기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 세대에게 필요한 유용한 일을 하지않는다면 우리가 무엇때문에 존재하며 재능과 재산을 가지고 있겠는가? 이 생에서의 우리는 저 생을 위한 시련과 시험의 상태에 놓여있다. 모든 사람의 생은 자기를 영원케할 것을 행하는 기회이다. 우리는 자신을 편안히 하고 즐거워하며 우리 수고의 낙을 하나님의 선물로 누림으로써, 그 낙안에서 하나님을 즐기며 그에게 감사를 돌리도록 하자.

(4)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가 개인적, 혹은 공적 관심사에 대해 내리는 처분들을 흡족히 여겨야 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지게 하소서." 왜냐하면 우리 계획과 이익에 아무리 어긋나는 것이라도 하나님의 뜻은 바로 지혜이기 때문이다. 그의 계획은 변경될 필요가 없다. 만일 우리가 한번 그것을 볼수 있다면 그것이 너무도 완전하여 그 이상 아무것도 더 추가시킬 필요가 없음을 알게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안에는 아무런 결함도, 덜어낼 것도 없으며 불필요하거나 남아도는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5)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섭리가운데 있는 그의 목적에 응답하기위해 애써야 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보거나 느끼는 변화가 무엇이든지간에,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야말로 아무도 침범할수 없는 일관성을 지니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하나님의 섭리아래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이제 있는 것이 옛적에 있었고(15절). 세상은 옛날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변하기 쉽다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다.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시느니라. 즉 하나님께서는 그가 전에 행하신 것을 반복하신다.

 

Ⅲ. 인간의 한계성 3:16-22

 

솔로몬은 이 세상 만물이 하나님께 대한 경건과 경외없이는 헛된 것임을 계속해서 보여주고 있다. 그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감이 없다면 권력이나 생명 그 자체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점을 제시한다.

(1) 본문에는 허무, 곧 보좌에 앉은 권세자와 재판석에 앉은 자의 허무가 나타나 있다. 그들에게는 권세가 있으므로 만일 그들이 신앙의 지배를 받고있기만 하다면 그들은 하나님밑의 부지배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이 없다면 헛된 일이다. 왜냐하면 경외심이 없는 재판관은 다음과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1) 그 재판관은 올바른 재판을 하지못할 것이다. 솔로몬은 '재판하는 곳에 악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존귀에 처하여 있으나 무엇을 해야할지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곧 맹수같이 된다. 백성들에게는 그런 자들을 재판관으로 삼느니 차라리 재판관이 없는 것이 나을 뻔하게 된다. 또한 재판관들로서는 권력을 가지고 그런 나쁜 목적에 사용하느니보다는 차라리 권력을 갖지않는 것이 낫다.

2) 그러한 재판관은 올바로 판결하지 못한데 대해 그 자신이 심판받게될 것이다.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이 불의한 재판을 결정적인 것이 아니라고 하였으니, 이는 그 재판에 대한 검열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라."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17절). 즉 하나님께서 의인을 위해 재판하시고 변호하실 것이다. 압제받는 자들로서는 자기들의 주장이 재심리될 것이라는 사실로부터 말로 할수 없는 위로를 받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참을성있게 기다려야할 것이니 또다른 심판자가 문앞에 서계시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가 아직까지는 이 세상에서 보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호소를 다시 들으시고 불평을 시정하시며 부당한 법령을 번복시키실 때가 있는 것이다(욥 24:1).

(2) 이 세상에는 죽어야할 운명을 지닌 인간의 허무가 있다. 여기에서 전도자는 이 세상의 인생의 일에 대하여 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서, 종교와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갖지못한다면 인간의 이성이라도 인간을 짐승보다 낫게 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나님을 비난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인간의 감옥으로 지으셨고 인간의 생을 고행이 되게 하셨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지으셨다. 만일 인간이 천하고 비참하다면 그것은 그 자신의 잘못때문이다. 교만한 자들에게 자기가 단지 인간에 불과한 존재인줄 알게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시 9:20). 더구나 악인들에게, 저희가 신앙심이 결여되어 있으므로 짐승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하는 일은 훨씬더 어렵다. 세상적이며 육욕적이고 세속적인 마음을 가진 '인간은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는데,' 이는 그가 마음에 두고있는 '모든 것이 헛되기' 때문이다(19절).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죽음은 짐승과 사람에게 동일한 변화를 일으킨다. 인간과 짐승의 몸에 일어나는 변화는, 살아남은 자들이 표하는 관심에만 차이가 있을뿐 똑같다. 솔로몬은 여기에서 모든 것이 '다 한곳으로 간다'는 점을 주목하고 있다. 인간과 짐승의 시체는 다 똑같이 부패한다. 모든 것은 썩어서 '다 흙으로 돌아간다.' 인간과 짐승의 혼에는 매우 큰차이가 있지만 그것은 눈으로는 볼수 없는 차이이다(21절). 인간이 죽으면 그 '혼'은 그를 지으신 혼들의 아버지 하나님께로 '올라간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 혼은 육체와 함께 죽지않고, '음부의 권세에서 구속받는다'(시 49:15). 인간의 영혼은 어두운 초롱에서 꺼낸 촛불과 같아서 그 초롱은 실로 쓸모없는채로 남게되나 촛불 그 자체는 더욱 밝게 빛나는 것이다. 모든 육욕적인 감각주의자들처럼 감각에 의지하여 살아가며 저희 눈에 보이는대로 행하는 자들은 짐승보다 뛰어남이 전혀 없다.' 짐승처럼 죽으리라고 생각되는 자들이 짐승처럼 살아간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바가 없다. 그런 자들에게 있어서는 이성의 고귀한 여러 기능들이 없어져버리는 것이 당연하다. 이상의 것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점이 추론되고 있다. 즉 이 세상에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는 점이다. 깨끗한 양심을 지니고 절대로 불의한 의로움의 자리에 들여놓지 말라. 명랑한 삶을 누리라.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는 일을 형통케 해주셨다면, 우리는 그것으로 즐거워해야 하며 그것을 무거운 짐으로 여겨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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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세상적인 즐거움의 헛됨 2:1-11

 

솔로몬은 여기에서 인간의 가장 큰행복을 추구하기 위하여, 자기가 헛되이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며 공부하던 서재를 떠나 공원과 정원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는 철학자들과 위엄있는 원로 정치인들과의 교제를 재사와 호걸과의 교제로 바꾸어 그들가운데서 진정한 만족과 행복을 발견할수 있는지 없는지를 시험해 본다. 여기서 그는 고귀한 지적인 즐거움으로부터 천한 감각적 쾌락으로 수준을 크게 낮춘다.

(1) 그는 환락과 즐거운 재담이 무슨 소용이 있을지 시험해 보기로 결심하였다. 낙을 누리라(1절). "즐거움으로 가득 채우고 근심은 던져버리라. 그리고 즐거워하겠노라고 결심하라." 가난하면서도 매우 쾌활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헛간에 사는 거지들도 그렇게 지낸다는 속담도 있다. 유쾌함은 이성의 힘이 주는 기쁨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단순히 세속적이고 육욕적인 쾌락보다는 우선적인 것이다. 어떤이들은 인간을 이성적인 동물이라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웃을줄 아는 동물'이라는 점에서도 짐승과 구별한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웃어서 살찌고 웃어서 행복해지도록 해보라"고 말한다. 그는 이런 실험을 해보고 난뒤 다음과 같은 판단을 내렸다. 내가 웃음을 논하여 이르기를 미친 것이라 하였고 희락을 논하여 이르기를 저가 무엇을 하는가 하였노라(2절). 건전하고 적당하게 그리고 온건하게 사용하는 순수한 희락은 좋은 것이며 사업에 도움이 되고 인생의 수고로움을 누그러뜨리는데 힘이 된다. 그러나 이것이 도가 지나치고 절제하지 못할때에는 어리석고 무익한 것이 되어버린다. 그것은 현재 이 세상에서 겪고있는 괴로움에 대한 진통제에 불과한 것이다.

(2) 자신의 생각을 만족시켜 주던 것에서 행복을 발견하지 못한 그는, 이번에는 자기 입을 만족시켜 주리라고 여겨지는 것을 시험해보기로 결심하였다(3절). 내마음에 궁구하기를 내가...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할까. 즉 고량진미와 좋은 술에 빠져보겠다는 것이다. 솔로몬은 비판의식을 가지고 이러한 쾌락에 뛰어들었으며 단지 실험을 해보려고 하였을뿐이다. 그는 '어리석음을 취하여서' 이 어리석음이 인간을 행복하게 해줄수 있는 한계의 끝까지 가보려고 하였다. 그는 어리석음이 자기를 붙잡게 하거나 지배하게 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하였다. 동시에 그는 지혜에 통달하고, 그의 쾌락을 사용함에 있어 현명하게 처신하도록 주의를 기울임으로서 자신이 그 쾌락들로인해 어떠한 편견도 갖게되지 않고 그것들에 대한 적절한 판단을 내리기에 부적합한 자가 되지않도록 하였다. 솔로몬은 이러한 실험을 꾀하였으나 그것도 '헛된 것'임을 발견하였다. '포도주는 거만케하는 것이요'(잠 20:1). 어떠한 자라도 술에 빠져있다가 더이상은 마시지 않겠노라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솔로몬이 목적한바는 자신의 욕구를 채우고자 한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행복을 찾아내고자 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그는 인생의 행복이 '인생이 종신토록 생활하면서 얻는 쾌락'이라고 기술하였다. "선하신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행하오리까?" 우리의 행복은 나태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행하고 좋은 일을 하는데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생활방식을 발견하기를 원하여 술에 빠져버리는 자는 여기서 솔로몬이 반성하는 가운데 자책하였던 우행을 범하는 자이다.

(3) 술에 빠지는 것이 어리석은 짓인줄을 곧 깨달은 그는, 이번에는 매우 사치스러운 유흥과 향락을 시험해 보았다.

1) 그는 성읍과 시골에 건축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는 자기의 치세 초기에 하나님을 위한 전을 세우기위해 막대한 비용을 지출했으므로, 그후에 자기를 위한 건물을 세워 자신의 기호를 만족시켰다 할지라도 용납될수 있었다. 건축에 있어서 그는 가난한 자들을 고용하며 후손들에게 유익을 베푸는 즐거움을 누렸다. 우리는 열왕기상 9:15-19절에서 솔로몬의 건축에 대해 읽을수 있는데 그 건물들은 모두 '큰역사'였다. 이제 그의 과오들을 살펴보자. 그는 자신이 행해야만 하는 '선한' 일들을 탐구하였으며(3절) 이것을 추구하느라 큰역사에 몰두하였다. 선한 일들은 참으로 진실되고 위대한 일이지만, 선하지도 않은 많은 일들이 위대한 일로 명성이 나고있다.

2) 그는 정원을 몹시 좋아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어떤이들에게는 건축물만큼이나 매혹적인 것이다. 내가 나를 위하여...포도원을 심으며 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4,5절). 그에게는 재목으로 쓸 나무숲이 있었을뿐 아니라 각종 과일나무 숲이 있었는데 이것은 그가 직접 심은 것이었다.

3) 그는 수로 사업과 연못과 운하 등을 위해 막대한 돈을 들였는데 이는 오락이나 기분전환을 위해서가 아니라 '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주기' 위해서였다(6절). 그는 그것을 심었을뿐만 아니라 물도 주었으며 그리고나서 그것을 증식케하는 일을 하나님께 맡겼던 것이다.

4) 그가 '큰역사'를 하기로 계획했을때 많은 일꾼을 고용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노비'들을 돈을 주고 사서 충당하였고 그들로부터 종들이 '그의 집에서 태어나게도' 하였다(7절).

5) 그는 자기 아버지가 했던 것처럼(대상 27:29,31) 크고 작은 가축떼, 곧 '소와 양떼의 소유를 많게 하였다.'

6) 그는 매우 부유하게 되었으며, 건축과 정원 가꾸기로인해 가난하게 되지도 않았다.

7) 그는 온갖 종류의 가락과 음악, 성악과 기악하는 자들을 손에 넣었다. 이것들은 '인생들의 기뻐하는 것'들로 불리우고 있다.

8) 그는 이성적인 즐거움과 감각적인 즐거움을 동시에 즐겼다. 이러한 오락물들 가운데에서도 '그의 지혜는 그에게 여전하였다'(9절). 그의 판단력과 양심은 그의 즐거움을 억제하지 않았으며 감각적 쾌락의 진수를 추출해 내려는 그의 시도를 방해하지도 않았다(10절). 그는 이제까지 살았던 어느 누구보다도 자신의 일에서 더많은 즐거움을 누렸다. 나의 모든 수고를 내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그가 자신의 사업에 성공을 누리게 된것은 그 사업 자체를 감미롭게 해주었으며, 즐거움이 그 사업의 산물이었다는 사실은 그 즐거움을 감미롭게 해주었다. 그러므로 전반적으로 볼때, 그는 이 세상이 만들어 줄수 있는 가장 행복한 자였음이 분명하다.

9) 우리는 마침내 그가 이 모든 일들에 대해 신중한 판단을 내리는 것을 대하게 된다(11절). 솔로몬은 자신이 최대의 비용과 주의를 기울여 '자기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자신을 편안하고 행복하게 하기위해 '수고한 모든 수고'를 세밀히 검토해 보았으나 그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보라, 모든 것은 헛되며 마음의 헛된 수고였도다." 해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 노동이나 이 세상의 향락으로도 아무런 유익이 없었던 것이다.

 

Ⅱ. 지혜의 우월성 2:12-16

 

솔로몬은 지금까지 학문에서와 감각적 쾌락에서 무슨 만족을 얻을수 있는가를 시험해보았는데, 이제 여기서는 그것들을 비교하며 판단을 내리고 있다.

(1) 그는 지혜와 우매를 함께 깊이 생각해 보려한다. 즉 그는 여기서 그것들을 다시 돌아보아, 두번째 관찰과 생각을 통해서 더많은 만족을 얻을수 있는지 여부를 알고자 한다. 우리는 이 세상 것들에 대해 내린 솔로몬의 판단을 받아들이고, 시험을 다시 해보겠다는 생각을 버려야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가 실험을 했을때 가지고 있었던 유리한 점들을 전혀 가질수 없으며 그와 똑같은 열심을 가지고 실험을 할 능력도 없기 때문이다.

(2) 그는 우매함보다는 지혜에 월등한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내가 보건대 지혜가 우매보다 뛰어남이 빛이 어두움보다 뛰어남같도다(13절). 지혜가 주는 즐거움은 비록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데에 충분치는 못하지만 술이 주는 즐거움보다 훨씬 낫다. 지혜는 영혼이 놀라운 발견을 할수 있도록 밝혀주며 그 영혼 자체를 올바로 다스릴수 있도록 필요한 지시를 해준다. 그러나 육욕은 마음을 흐리게 하며 흑암과 같이 되게 한다. 지혜자는 눈이 밝고(한글개역 난외주에는 '지혜자는 눈이 그 머리에 있고'로 되어있음-역주). 그 머리에는 피해야할 위험과 활용해야할 이점들을 즉시 발견할수 있는 눈이 있다. 우매자는 어두움에 다니거니와. 이들은 때때로 당황하거나 맹렬히 돌진하거나 한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속하는 행복과 만족이란 점을 볼때, 그는 이 세상의 지혜가 인간에게 이점을 거의 주지못한다고 주장한다. 동일한 질병과 동일한 칼날이 지혜로운 사람과 우매한 사람을 모두 삼켜버리는 것이다. 솔로몬은 이 굴욕감을 느낄만한 관찰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고 있다(15절). "이 생에 대하여 지혜가 내게 거의 아무런 도움도 주지못하는데 어찌하여 그것을 얻으려고 그렇게 큰수고를 했었는가?" 이에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이것도 헛되도다. 지혜로운 사람들이나 우매한 사람들이나 똑같이 망각된다(16절). 지혜자나 우매자나 영원토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의인들은 '영원히 기념하게 될' 것이며 그 기억이 복될 것이다. 곧 '별처럼 빛날' 것이 약속되어 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지혜에 관해서는 그러한 약속이 주어지지 않는다. 즉 그 지혜가 사람들의 이름을 영속시켜 주리라는 약속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늘에 기록된' 이름들만이 영속할 것이기 때문이다. 경건한 자의 죽음과 사악한 자의 죽음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지만 지혜로운 자의 죽음과 우매한 자의 죽음 사이에는 차이가 없는 것이다.

 

Ⅲ. 재물의 무익함 2:17-26

 

솔로몬은 사색하는 생활과 육욕적인 생활을 경험한 뒤에 활동적인 생활에 온 정력을 쏟아보았으나, 다른 생활에서와 마찬가지로 큰만족을 얻을수 없었다. 그것 역시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일인 것이다.

(1) 그가 시험해본 사업은 '해아래서 하는 일'이었다(17-20절). 즉 이세상의 일들에 관한 것이었다. 또한 그것은 왕의 사업이었다. 솔로몬이 여기에서 거의 만족을 얻지못한채 말하는 것은 '해아래서 하는 수고', 곧 '썩는 양식을 위한 일'에 대한 것이다(요 6:27;사 55:2). 그것은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써서' 하는 보다나은 종류의 사업이었다(21절). 그것은 온당한 사업으로, 그의 왕국의 통치에 관련된 일이었다. 또한 그 일은 자신의 '지혜를 나타내는' 일(19절)이었는데,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세상 사업에 종사하면서 무엇보다도 자신의 지혜를 나타내는데에 관심을 기울인다.

(2) 그는 그 일에 곧 싫증을 내게되었다. 내가...나의 수고한 모든 수고를 한하였노니(18절). 그는 훌륭한 집과 동산들을 소유한지 얼마 안되어 그것들을 하찮게 여기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세상 것들에 대한 은혜로운 증오심, 즉 그것들을 하나님과 종교보다 덜 사랑하라는 우리의 의무를(눅 14:26) 표현하는 것도 아니며, 이 세상 것에 대한 죄된 증오심,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정해주신 장소와 그곳에서 하는 일에 싫증을 내는 우리의 우매함을 표현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바로, 세상 것들에게서 받는 실망감에서 비롯되는 자연스러운 증오의 감정을 표현한 것이다.

(3) 다음의 두가지 점이 그를 싫증나게 만들었다.

1) 그의 사업은 그 자신에게 너무나 큰수고가 되었다. 해아래서 하는 일이 내게 괴로움이요(17절). 사업가는 나갈때나 들어올때나 불안하다고 묘사되어 있다(23절). 그는 낮에도 자신의 즐거움을 빼앗기고 '밤에도' 휴식을 방해받는다. 세상 일을 악착같이 하면서 하나님을 자신의 안식으로 삼지않는 자들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보라. 그들은 밤이나 낮이나 불안할수밖에 없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볼때 그것은 '모두 헛된 일'인 것이다(17절).

2) 그가 일하여 얻은 것들을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물려주지 않으면 안되었다. 은혜로운 영혼은 이 일로 전혀 마음이 불편해하지 않는다. 왜 우리는 오히려 우리가 가고 난뒤 우리뒤에 오는 자들이 우리의 지혜와 근면함 덕으로 더나은 생활을 하게될 것을 기뻐하지 말아야 하는가? 그는 자기에게 물려받는 자가 지혜자일지 우매자일지 알지 못한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그것을 더욱 증식시킬 것이요 우매한 자라면 그것을 모조리 없애버릴 것이다. 아마 솔로몬은 르호보암이 그렇게 될까봐 우려하면서 이 글을 매우 실감나게 썼던것 같다.

(4) 그러므로 이 세상의 부를 가장 잘쓰는 방법은 그것을 즐겁게 사용하는 것이며 그것으로 선을 행하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내용으로 이 장을 끝맺는다(24-26절). 여기에서 우리에게 권장되고 있는 선은 우리가 이 세상의 사업으로부터 기대할수 있고 추출해 낼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과 이익이며, 또한 이 세상 사업의 헛됨과 괴로움에서 벗어나기위해 가장 멀리가는 것이다. 우리는 재산을 늘리는 방법에 골몰하기 보다는 우리에게 위탁된 목적을 위하여 그 재산을 어떻게 사용할수 있는지에 대해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로하여금 '먹고 마실수 있도록' 하신 분께서 우리에게 사업을 포기하고 편안히 있으라고는 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수고하는 가운데서 낙을 누려야' 한다. 우리는 세상 만물을 물리치지 말고, 우리의 세속적 사업을 부지런히 그리고 즐겁게 행할수 있도록 하는데에 이용해야 한다.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는 그 낙이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아야하는 것이다. 그것들을 즐기는 마음은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이다. 솔로몬 자신은 자신의 소유물과 비교해보아 더이상 목표삼을만한 것이 없었으며 더나은 것을 원할수도 없었다(25절). 솔로몬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없이 자신의 지혜로써는 심령의 낙을 얻을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손에서 그것을 기대하고 얻기위해 하나님께 기도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재물은 그것을 소유한 사람이 유용하게 쓸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그 소유자에게 축복이 되기도 하고 저주가 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는 선한 사람에게 재물과 함께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사' 그 재물이 그에게 상이 되도록 하심으로써, 그들이 재물을 즐거이 누리며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자비롭게 전하게 하신다. 그러나 악인에게는 그 재물로부터 위로를 받을수 있는 마음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것으로 그 악인에 대한 형벌을 삼으신다. 즉 재물은 오직 그를 괴롭히고 학대하는 것이 될 뿐이다. 만족한 경건은 큰 득이 된다. 불경건은 흔히 불만족과 물릴줄 모르는 탐욕으로 벌을 받는데, 이 불만족과 탐욕은 그 자체가 징벌이 되는 죄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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