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udy

[1절]

그 미래임이니라. 세상 사람들은 단순히 세상에서 잘 먹고 건강한 것을 지상 목표로 생각한다.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악착같이 잘 살려고 한다. 이런 자들은 성실하게 살아가는 자들의 고통을 조롱하며 무시한다. 그러나 여기 전도자가 놀라운 미래 지향적 신앙으로 고백하였듯이 성도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미래의 영원한 구원인 것이다.

(9:13~10:1절)

지혜의 불완전성 - 먼저 9:13~16절은 지혜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부당한 자세를 지적하고 있고, 9:17~10:1절은 인간 지혜 자체의 결함을 말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세상 지혜는 그 자체로도 완전하지 않고 또 세상에 대하여 실질적 능력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 자체로서도 충족하며 또 천하를 직접 좌우할 능력이 있는 지혜는 오직 창조주 하나님의 지혜밖에 없다(시 104:24; 잠 3:19; 단 2:20, 21; 롬 11:33).

(2~12절)

하나님 없는 생의 불확실성 - 본서가 해 아래 세상의 부정적 측면을 적나라하게 제시함으로써 성도들에게 간접적으로 '그러면 이런 헛된 세상에서 구원의 길은 없는가?'라고 자문하도록 유도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서론과 각 문단 강해에서 밝혔었다. 그런데 이제 본서 후반부인 이 부분에서도 이를 다시 기억할 필요가 있다. 본서 후반부는 비교적 많은 잠언 형태의 글이 계속되는데 이를 읽을 때 그 부정적 견해에 잠시 어리둥절하기 십상이다. 따라서 우리는 간접적 충격 효과를 노린 전도자의 의도와 본서의 전체적 맥락, 나아가 성경 신학 전체의 시각에서 각 구절을 심층적으로 이해해야지 어느 한 구절만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한편 이 부분은 2, 3절에서 죽음 등 인간 만사가 외부적 현상만을 볼 때에는 선인과 악인에게 똑같이 임하므로 크게 모순되고 희망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나서, 4~10절에서 이런 세상에서 성도들이 어떤 자세로 살아갈 것인지를 밝힌다. 그 후 전도자는 11, 12절에서 다시 한번 인생은 인간의 생각이나 뜻이나 능력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 좌우되며 인간은 그 모든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음(8:15~9:1)을 거듭 밝히고 있다.

[2~3절]

선과 악의 양립, 죽음이라는 한계 상황에 대한 전도자의 회의가 언급되어 있다(2:12~23).

[3절]

해 아래서(1:3). 그것은...악한 것 즉 죽음이 이토록 혐오스러운 것은 그것이 죄의 삯으로 온 것이기 때문이다(롬 5:14; 롬 6:23).

(4~10절)

적극적인 삶의 태도 - 4~6절은 죽음을 전제할 때 인간이 해 아래 세상을 탈출하여 모순이 없는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는 죽음이 오기 전까지 밖에 없다는 경고성 교훈이다. 그리고 7~10절은 비록 세상의 현실은 어둡지만 하나님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동시에 그 결과가 어찌하든지 최종적 승리를 확신하면서 삶의 기쁨을 누리며 적극적이고도 낙관적으로 살 것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2:24~26; 3:11~15; 5:18~20; 8:15~17절 등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한편 7~10절에서 특히 강조하고 있는 삶의 즐거움과 기쁨의 향유는 현실도피적 향락 추구를 권장하는 말이 아니라 기본적인 영혼의 만족과 평화를 가리키는 것이다(고전 10:31; 빌 4:4). 성경은 오히려 이미 구원의 약속을 얻어 영혼의 기쁨을 누리는 성도들에게 세상의 고난에 동참하라고 명령하고 있다(롬 8:17; 벧전 2:20; 벧전 5:10). 이는 성도들이 고난 중에서 더 큰 기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벧전 1:7).

(4~6절)

살아 있는 동안에는 소망의 기회가 있다는 것을 강조한 구절이다.

[4절]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개는 가장 멸시받는 동물이고, 사자는 반대로 가장 칭송받았던 동물이다. 이 말씀은 현세의 삶에 의해 내세의 삶이 영원히 결정되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단 한 번의 삶의 기회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교훈해 주고 있다(눅 16:19~31).

[10절]

일. 하나님이 인간에게 최초로 주신 세 가지 제도는 안식일 제도, 노동의 제도, 결혼의 제도이다(창 2:1~3, 15, 22~25). 따라서 노동은 거룩한 제도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수단 중 하나가 된다. 아담의 범죄로 저주받은 것은 노동 자체가 아니라, 노동에 대한 인간의 수고이다(창 3:17~19). 이러한 노동에 대한 타락상은 다음 세 가지로 나타난다. ①노동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지 않는다. 어떠한 노동이라도 그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면 그것은 타락한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하면 모든 일이 선이 되지만, 믿음으로 하지 않으면 모든 일이 죄가 된다(롬 8:28; 롬 14:23). ②노동의 종류를 나누어 어떤 것은 귀히 여기고 어떤 것은 천히 여긴다. 전도자는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라'고 가르친다. 노동엔 귀천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노동을 하느냐'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왜 노동을 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③노동을 힘써 하지 않는다. 이런 자들은 먹지도 말라고 말씀하셨으며(살후 3:10) 안식일을 제외한 6일 모두를 힘써 일하라고 명령하셨다(출 20:9)<살후 3:7~9, 그리스도인의 직업관>.

[11~12절]

시기와 우연. '시기'는 하나님이 정하신 적절한 때를 의미하고, '우연'(히, 페가)은 발생 사건을 의미한다. 인생은 시기와 우연을 씨줄과 날줄로 삼아 각양 삶의 직물을 짜낸다. 그런데 인생의 지혜만으로는 이 시기와 우연을 도저히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인생은 내일 일을 자랑치 말고 하나님 앞에서 오직 겸손해야만 한다(잠 16:1~3; 잠 27:1; 약 4:13~16).

(9:17~10:1절)

세상 지혜의 한계 - 인간의 지혜는 상대적으로는 그 무엇보다도 능력이 있는 것이지만 결코 절대적인 신뢰의 대상은 될 수 없다. 그것은 다음 두 가지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지혜는 큰소리나 권세자(어른)의 힘에 방해를 받을 수 있다(9:17). 지혜는 '작은 우매'로 인하여 일순간에 무너져 버릴 위험성이 있다(9:18~10:1). 따라서 전도자는 인간의 지혜도 인생이 의뢰할 궁극적인 대상이 못 된다는 것을 경고해 주고 있다. 결국 인생이 날마다 의뢰해야만 할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다(잠 3:5, 6).


# 해설

하나님 없는 생의 불확실성 (9:2~10:1절)

4장을 기점으로 크게 2부로 나누는 관점에서 보면 4~6장은 인생의 모순상을, 7~12장은 신앙에 의한 영원한 해결책과 세상에서의 행동 원리를 말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본 9장은 7~12장의 중간 삽입부로서 잠시 분위기를 바꾸어 다시금 하나님을 통한 절대성의 확립이 없었을 때의 세상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 준다고 하겠다. 그러나 혹자는 이 장이 다시금 해 아래 생의 모순을 말하는 점을 중시하여 전도서를 1~3, 4~8, 9~12장 등 세 부분으로 나누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는 9:7~10절이 비록 소극적이지만 8:14, 15절과 함께 2:24~26; 3:9~15절과 일맥 상통하는 잠언을 담고 있다는 점으로 볼 때 역시 중간 삽입부 정도로 간주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한편 본장은 9:7~10절을 제외하고 각각 9:2~6; 9:11, 12; 9:13~10:1절의 세 문단으로 나눌 수 있는데, 기본 논조는 만약 우리가 해 아래 세상만 고려한다면 선과 악, 지혜와 무지가 무원칙한 불확실성을 보여 줄 뿐임을, 더더욱 곧 망각될 한 순간의 허망한 현상일 뿐임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본 단락은 소위 현대 실존주의자들의 '부조리' 논리와 일맥 상통한다고 보여진다. 특히 9:13~18절의 인본주의적 지혜가 상대적으로 좋기는 하나 결국에는 근본적 기준 확정이 없다면 결정적으로 우매를 극복할 수 없는 상대적 한계를 갖고 있음을 잘 보여 준다.


# 핵심

1절

하나님의 손에 있으니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에 의해 좌우됨을 나타내는 표현

흰 옷 (8절)

기쁨과 순결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솔로몬 성전에서 노래 부르는 자들은 흰 세마포를 입었다(대하 5:12). 모르드개가 아하수에로 왕 앞에서 영예를 얻을 때 흰 옷을 입었고(에 8:15), 천사들이 흰 옷을 입었으며(막 16:5), 하나님께 합당한 성도들, 곧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씻김을 받은 성도도 흰 옷을 입을 것이라고 했다(계 3:4; 계 7:14). 흰 옷은 기쁨의 축제 때 입는 옷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성도가 흰 옷을 입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천국 잔치의 기쁨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 묵상

영생의 분복(分福)을 얻을 수 있는 길 (1~3절)

인간의 삶과 죽음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고 인간의 행위는 헛될 뿐입니다. 따라서 헛된 인생을 추구하지 말고 생명이 있는 한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영생을 얻어야 합니다. 인간의 생사와 구원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달려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직접 특별한 은혜를 주실 때까지 멋대로 살자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나 자신의 죄악된 처지에 비해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큰 점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겸손히 소망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소망을 가진 자의 삶 (7~10절)

소망을 가진 자는 이생에서도 보람되고 즐거운 삶을 살아갑니다. 외형상으로 볼 때는 똑같은 인생을 산다고할지라도, 하나님을 소망하며 사는 자들에게는 기쁨과 희망이 있기 때문에 인내하며 부지런한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일의 의미 (10절)

일은 성경에 나타난 거룩한 제도로써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중요한 수단입니다. 타락으로 노동이 힘들어지기는 했지만, 노동 자체가 죄의 형벌은 아닙니다. 타락 이전에도(창 2:15) 이후에도 하나님은 노동을 명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을 제외한 날엔 모두 힘써 일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다시 없는 노동의 기회로 알고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인간이 의지해야 할 지혜 (11~18절)

구원받은 성도가 진정으로 의지해야 할 참 지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지혜입니다. 인간의 지혜는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회 속에서 인간의 지혜가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정직하게 실현되지 못한다는 것만으로도 인간의 우매함이 증명되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의지해야 할 지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지혜입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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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8:1~9:1절)

권위에 대한 교훈 - 본문은 비교적 독립된 세 가지 문제를 다루고 있다. 왕에 대한 지혜자의 자세(8:1~8), 악인이 때로 번영하고 의인이 때로 고통당하는 모순에 대한 이해(8:9~14), 인간의 분명한 한계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정(8:15~9:1).

(1~8절)

왕(王) - 만약 왕이 세상의 권력자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이는 지혜자의 처세술을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여기 왕은 우리의 생사 화복을 주장하시는 영원한 한 왕 즉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다. 따라서 왕에 대한 지혜자의 바른 자세에 대한 교훈은 7:11~14; 잠 1:7절과 일맥 상통한다.

[1절]

얼굴은 마음의 게시판이다. 따라서 성도들의 가장 좋은 화장법은 매일 말씀의 거울을 보면서 자신의 속사람을 단장하는 것이다(벧전 3:3~5).

[2~6절]

하나님과 인간 - 주권과 복종의 관계. 왕 즉 하나님의 주권과 그에 대한 인간 복종의 당연성에 대한 설명이다. 주권과 복종의 관계는 ①존재론적이다 : 즉 좋고 나쁘고를 가리기 이전에, 하나님은 창조자이고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다. ②선한 것이다 : 하나님은 정의와 사랑의 하나님이므로 그분에게 순종하는 것은 결국 선한 일에 참여하는 것이다. ③지혜로운 것이다 : 존재론적이고 선한 순종의 미덕과 행복을 깨닫는다는 것은 결국 인간의 가장 궁극적 본질을 깨닫고 그것을 실천한다는 것이니 이는 지혜로운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은 극히 어리석은 것이다. 잠 1:7절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말하고 있다.

[5~6절]

시기와 판단이 있으므로(3:1~8).

[7~8절]

미래 일에 대한 무지, 죽음 앞에서의 무력함을 시인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절대성에 대한 시인과 순종을 간접적으로 반영하는 것이다.

(9~14절)

신정론 - 현실의 모순에 숨은 하나님의 뜻. 이 부분은 9, 10절에서 현실의 모순을 말하고, 11~13절에서는 악의 멸망과 정의의 승리라는 원칙론적 이야기를 하고, 다시 14절에서 현실의 모순을 이야기하는 등 논리 전개에 무리가 있는 듯이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현재의 피상적인 현실의 현상만 보면 악과 선이 뒤 바뀌고 악인이 의인을 압제하며 잘사는 모순이 있는 것 같지만, 그 깊은 내면의 본질을 볼 때에는 악인은 패망할 것이라는 일반적 신앙을 이야기한 것이라 하겠다. 이 문제를 신정론이라 한다<욥 서론, 신정론의 이해>.

[10절]

장사지낸바 되어. 무덤에 고대인들에게 이는 명예로운 사후의 대우를 의미했다. 악인이 사후까지 대우 받는 철저한 모순을 가리킨다.

[11절]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길어야 80세 안팎을 살다 갈 수밖에 없는 인간은 당장 모든 일이 끝장나기를 바라나 영원을 사시는 하나님의 시간 개념은 이와 사뭇 다르다(벧후 3:8). 또한 하나님은 인간에게 충분한 회개의 기회를 주시기 위하여 징벌을 지연시키고 계신다(롬 3:25; 벧후 3:9). 그러므로 이를 기회로 회개하기는커녕 더욱 악을 자행하는 자가 있더라도 성도는 그를 시기하거나 부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가련히 여길 일이다.

(8:15~9:1절)

모순적인 현실에 대한 성도의 태도 - 9~14절과 대응되는 것으로서 성도는 비록 현실에 모순이 있으나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허락해 주신 것에 만족하며(빌 4:11, 12) 선한 일에 힘쓰면서 인생을 즐기는 것이 최선의 길임을 결론적으로 교훈하고 있다.

[15절]

내가 희락을 칭찬하노니. 이는 세상이 복잡하니 나도 즐겨보자는 식의 자기 방종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의 신뢰와 성실에 바탕을 둔 만족과 행복이다(2:24~26; 3:11~15; 5:18~20).

[17절]

이 짧은 한 절에만 능히 깨달을 수 없도다라는 말이 세 번이나 반복되었다. 이는 인간 지혜의 한계에 대한 고백으로서(3:11; 7:14, 24) 불가지론이나 지식 무용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은 본래부터 제한된 존재로 하나님을 다 이해할 수 없다는 자아 발견의 극치라 하겠다. 자신의 참모습을 깨달은 자는 착각과 교만에서 깨어져<막 14:66~72, 자아의 깨짐> 여호와 신앙이 왜 당연한 것이며 선한 것이며 행복한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잠 1:7절과 비교해 볼 때 자신을 깨닫는 것은 결국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깨닫고 여호와를 신앙하는 것과 일맥 상통하는 것으로서 참 지혜의 출발점이자 완성점인 것이다.


# 해설

권위에 대한 잠언 (8:1~9:1절)

일단 세상적 권위에 복종할 것을 권하는 전반부(1~8절)와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미칠수 없는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할 것을 권면하는 후반부(9~17절)로 나눌 수 있다. 특히 후반부 9~11절은 의인의 고난이라는 욥기 전체의 주제와 일맥 상통한 물음이며, 이에 대한 대답인 12, 13절은 간접적으로 영원한 심판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이는 우리의 영원성을 보장해 주시는 하나님 앞에서만 생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전도서의 결론임을 보여 주고 있다. 좀더 세부적으로 고찰해 보면 14, 15절은 2:24~26; 3:9~15, 22절 등과 연결된 것으로서 하나님 신앙이라는 절대성 회복을 전제로 상대적 문제를 자족하며 기뻐할 것을, 8:16~9:1절도 결국 욥기의 결론부(욥 42:1~6)가 보여 주는 주제를 반영하고 있다.


# 핵심

1~9절

하나님의 위임을 받은 통치자인 왕의 명령에 순복하는 것이 지혜자의 도리라고 가르친다.


# 묵상

지혜로운 삶을 위한 방법 (1~8절)

지혜로운 삶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은 삶의 모든 면에서 전지전능하시며 판단자이신 하나님께 절대 복종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지혜로운 삶을 위해 경계해야 할 것은 교만과 불신입니다. 자신의 의와 지혜를 지나치게 자랑하는 것은 자기 중심적인 교만이며, 세상의 악과 어리석음을 좇는 것이 됩니다. 또한 이러한 교만은 결국 하나님을 불신하게 하는 것입니다.

전도자의 신념 (9~17절)

의인과 악인에 대한 전도자의 신념은, 의인은 인생을 즐길 수 있으나 악인은 그렇게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의인이 벌을 받고 악인이 잘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문제는 전도자도 수수께기처럼 풀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모순된 현실에서의 성도의 삶 (8:15~9:1절)

세상 사람들은 육신의 안일과 부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성실하게 살아가는 성도들을 오히려 무시합니다. 하지만 성도에게 중요한 것은 세상 사람들과 같이 잘 먹고 건강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모순뿐인 현실에서도 성도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허락하신 상황에 만족하고, 선한 일에 힘쓰며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자 하는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산다면 신약에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신 말씀대로 사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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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7:1~12:14절)

헛된 인생과 참된 인생 - 여기서부터 본서의 마지막 결론 부분까지는 주로 짤막한 형태의 잠언들로 구성된다. 헛된 인생과 참된 인생에 대해 대조법 형태의 잠언들로 조언을 하다가(7:1~10:20), 결단을 촉구한 다음(11:1~12:8), 결론을 내린다(12:9~14).

(1~14절)

참 지혜의 유익 - 특별히 본 단락에서는 '~보다 나으니'(better than)라는 전형적인 잠언 형태의 비교법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1~10절). 본 단락은 주로 지혜자와 우매자를 대조시켜 나가다가 마지막 13, 14절에 가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함으로써 참 지혜는 오직 여호와 신앙에만 있음을 암시함으로써 끝맺고 있다.

(1~4절)

지혜자와 우매자 - 지혜자는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지만, 우매자는 놀며 즐기는 데 마음을 빼앗긴다.

[1절]

아름다운 이름. 이는 단순한 명성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앞의 영원한 명예를 말한다. 보배로운 기름. 많은 재물을 뜻한다. 지혜자는 명예를 위해 재물을 사용한다(마 26:6~13). 그러나 오늘날 '보배로운 기름'을 얻기 위해 너무나도 쉽게 자신들의 '아름다운 이름'을 포기해 버리는 현대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죽는 날이...나으며. 이는 결코 염세주의적 사고가 아니다. 왜냐하면 성도의 죽음은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잠 14:32). 따라서 이 말은 죽음을 허무의 극치로 보지 않고 소망스러운 삶의 시작으로 보는 자들만이 공감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도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더 낫다고 말했다(빌 1:23). 그렇다고 해서 죽기 위해 힘써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주님도 우리가 죽기를 바라지 않으시고 이 세상에서 깨끗이 보존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요 17:15). 참 지혜자는 죽음을 소망스럽게 보면서, 죽음 뒤에 남겨질 아름다운 이름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다(잠 22:1).

[2~4절]

초상집 교훈 -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현실적 쾌락에 있으나, 지혜자의 마음은 자신의 명예로운 죽음과 그 후의 영생에 있다. 초상집에서 얻는 최소한의 교훈 세 가지가 있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2절). 죽은 뒤에는 이름을 남긴다. 죽은 뒤에는 심판이 있다(히 9:27). 그러므로 지혜자는 자신의 명예로운 죽음을 위해서 오늘을 선하게 살아가야 한다.

[5~6절]

지혜자의 책망은 어리석음을 구축(驅逐)하지만 우매자의 노래는 오히려 어리석음을 충동질해 준다(잠 29:5). 가시나무의 타는 소리. 가시나무는 고대 세계의 가장 유용한 땔감이었다(시 58:9). 아주 쉽게 불이 붙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잘 타며, 또한 쉽게 사그라진다. 우매자의 웃음은 그처럼 요란하기만 할 뿐 금방 사라지고 마는 무익한 것이다.

[7절]

지혜자가 경계해야 할 네 가지 사항 중 첫 번째는 탐학과 뇌물이다. 이는 둘 다 세상 쾌락의 이기적 추구에서 파생된 것으로 인간 영혼을 병들게 하고 사회를 썩게 만든다(시 26:10; 잠 15:27; 사 1:23).

[8절]

둘째 위험은 인내하지 못하는 태도로서 이를 설명하기 위해 교만한 마음과 비교하고 있다. 이것은 인내가 겸손의 한 속성이라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교만한 자는 쉽게 불평하고, 참지 못하며 결국 일을 이루지 못하는 법이다(잠 16:18)<렘 43:2, 겸손과 교만>.

[9절]

셋째 위험은 성급히 화를 내는 것이다. 정의의 의분과 달리 감정적 분노는 인격에 대한 통제력을 잃는 것으로서 인간을 악하게 만들며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할 뿐더러(약 1:20), 죄악을 낳는다(창 4:5; 삼상 18:8).

[10절]

오늘에 만족하지 못하고 과거에 집착하는 것이 넷째 위험이다. 지혜로운 자는 과거만을 고집함으로 현실을 그르치지 않고(민 11:4, 5, 33), 오직 미래를 향해 전진한다(빌 3:12~14).

[11~12절]

지혜의 유익성 - 물론 여기 지혜는 2:12~16절과 같은 세상 지혜가 아니라 신앙이 주는 참지혜를 가리킨다. 이러한 지혜는 마치 조상이 물려 준 유업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선사 받은 아주 고귀한 것이다. 유익. 유용한 가치로 말한다면 세상에 돈만큼 좋은 것도 없다. 그러나 지혜는 그보다 더 유용하다. 지혜는 돈으로 살 수 없고 또 보존 할 수도 없는 영생을 얻게 해주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진정으로 소중한 것은 모두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다. 주님의 은혜도 우리가 '돈 없이, 값없이' 사는 것이다(사 55:1).

[13~14절]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의 섭리를 겸허하게 인정한다. 실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야말로 지식의 근본이다(욥 28:28; 잠 1:7). 성도는 자신의 유한성과 하나님의 절대성을 인정하고 오직 그분의 사랑을 의지할 뿐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형통할 때에는 감사하고, 곤고할 때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헤아려 보아야 한다(약 5:13).

(15~18절)

중용의 성경적 이해 - 헬라 철학이나 유교에서 중용이라 하면 그것은 어느 한 문제에 대하여 인간들의 의견이 양 극단으로 갈렸을 때 그 적당한 중간을 취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중용은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길에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것을 말한다(수 1:7). 따라서 전자는 인간의 생각을 적당히 중간치에 둔 인본주의적 사고이나, 후자는 참 생명의 길은 오직 하나, 곧 하나님의 길이라는 신본주의적 사고인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에 입각하지 않은 인간의 길은 절대로 완전한 진리와 구원의 길이 될 수 없다.

[16절]

지나치게 의인이...지혜자도. 이 말은 정의와 지혜를 철저히 추구하지 말고 대강 시늉만 내라는 뜻이 결코 아니다. 이는 하나님이 원하는 방법과 방향을 떠나 자기 멋대로 도취되거나 성급히 '자기 의'를 추구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런 자는 패망하더라도 결코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할 수 없다.

[17절]

지나치게 악인이...되지 말라. 16절의 교훈을 빙자해서, 그리고 부득이한 경우를 핑계 삼아 미세한 악이라도 자행해서는 안 됨을 교훈하고 있다.

[18절]

경외하는 자...벗어날 것임이니라. 즉 그 어떤 경우에든지 자신의 의만을 주장하거나 제 판단대로 악을 행할 것이 아니라 오직 모든 기준을 여호와의 계시에 둔다면 양극단은 피할 수 있다는 교훈이다. 극단적 예를 들어 위기를 당하였을 때 순응하는 것이 좋은 경우가 있고 반면 피하여 뒷일을 도모하는 것이 더 선할 때가 있는데 이 모든 판단은 오직 기도로 행해야지 자기 생각대로 한다면 더욱 심각한 사태가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19~29절)

참 지혜를 갖지 못한 인간의 부패 - 말씀에 의지한 참 지혜의 능력(19절)과 인간의 부패(20~29절)을 대조 비교함으로써 교훈하고 있다. 한편 지혜와 상반되는 것이 우매인데도 여기서 부패를 지혜와 대조시킨 이유는 부패, 곧 악은 신앙적 어리석음과 동질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19절]

열 유사(有司). '유사'는 성의 지도자 혹은 주권자(10:5)나 총리(창 42:6)를 말한다. '열'이란 수는 완전을 나타내는 숫자이다(욥 19:3)<계 서론, 성경에 나타난 숫자의 상징적 의미>. 즉 '열 유사'란 적의 공격으로부터 성을 지키고도 남을 만한 능력이 있는 지도자들의 수를 말한다. 그런데 전도자는 여기서 그들보다도 한 명의 지혜자가 더 능력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삿 9:53; 삼상 25:33).

(20~29절)

인간의 타락상에 대해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20절)고 결론부터 말한 후 몇 가지 예를 들어 논증한다. ①사람들은 서로 저주한다(21, 22절). ②스스로 지혜에 이르지 못한다(23, 24절). ③지혜 있는 남녀를 찾기 힘들다(25~28절).

[20절]

죄의 보편성을 말한다(롬 3:10). 이 범주에서 벗어난 사람은 아주 없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죄 없다 하거나, 범죄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이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다(요일 1:8~10). 우리 죄를 하나님께 자백하거나 동료에게 시인한다는 것이 이러한 범주 아래 사는 인간들에게는 오히려 미덕이라 할 수 있다.

[21~22절]

부패한 인간의 동질성을 말한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형제의 죄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명하셨다(마 18:21, 22). 남이 범하는 죄악을 자신도 범하고 있음은 자기 자신이 더 잘 아는 법이다.

[23~24절]

지혜가 나를 멀리하였도다. 신앙이 주는 거룩한 지혜는 부패와는 공존할 수 없음을 가리킨다. 누가 능히 통달하랴. 부패한 인간은 스스로 지혜로울 수 없고 또 완전한 지혜를 얻을 수도 없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25~28절]

하나를 얻었거니와. 여기서는 얻은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비율이 '일천 중 하나'일 정도로 얻기가 어렵다는 것이고, 여인 중에서도 그보다 더 어렵다는 것이다.

[29절]

정직하게...꾀를. 지금껏 열거해 온 부패의 근원적 기원과 책임의 명확한 해명이다. 즉 창조자 하나님께서 원래는 인간을 선하게 지으셨으나 인간이 스스로 악해져서 자기의 덫에 걸려 고통당하고 있다는 고백적 교훈이다. 이제 이렇게 죄에 사로잡힌 인간이 다시금 지혜를 회복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뿐이다(엡 1:6~10).

 

# 해설

지혜에 대한 잠언 (1~29절)

본서의 후반부 4:1~12:4절까지의 내용 중 인본주의적 인생의 헛됨을 말하는 4~6장에 이어, 그러면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의 모습과 그런삶은 왜 헛되지 않은지를 말하는 7~12장 부분은 내용면에서도 앞 단락과 구분된다. 하지만 문장 형식도 비교적 한 주제에 대해 논술식으로 연결한 장문 형식이 아니라 같은 주제의 짧은 격언으로 전개된다는 점에서 뚜렷이 구분된다. 한편 본장은 한계성이 뚜렷한 1:12~18; 2:12~17절의 인본주의적 지혜와 달리 여호와 중심의 지혜의 유용성과 가치를 주로 말하는 부분이다. 1~14절은 우매와 대조되는 지혜의 우월성을, 15~18절은 참 지혜에 근거한 신중과 중용의 가치를, 19~29절은 참 지혜를 얻기에는 인간이 너무도 보편적으로 죄에 오염되었음을 개탄하는 내용이다.

 

# 핵심

1~29절

허무한 인생 가운데서도 보람 있고 지혜롭게 살아가는 방법을 교훈적 형식으로 언급한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본 인간의 상태 (29절)

이는 세 가지 상태로 묘사될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첫 사람 아담의 상태이다(창 1:27). 타락하기 전의 아담은 하나님과 항상 친밀한 교제를 나누었으며, 선하고 의로운 존재였다. 둘째, 하나님을 떠나 타락한 상태이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범죄한 이후 모든 인간은 생래적으로 타락한 본성을 지니게되었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었다(롬 5:12). 셋째는,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상태이다(고후 5:17).

 

# 묵상

죽음 뒤의 소망 (1~4절)

'죽는 날이 낫다'는 말씀의 의미는 성도의 죽음에는 소망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는 죽음을 허무의 극치로 보지 않고 소망스러운 삶의 시작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 지혜자는 쾌락을 위해 살지 않고 죽음을 소망하며 죽음 뒤에 남겨질 아름다운 이름과 자신의 명예로운 죽음을 위해서 매일의 삶을 선하게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삽니다.
지혜자의 경계 사항 (7~10절)

지혜자는 탐학과 뇌물, 교만한 마음과 인내하지 못하는 마음, 성급히 화를 내는 마음, 자족하지 못하고 지나간 과거의 일에 집착하는 마음, 이웃을 돕지 않으려 하는 이기적인 마음 등을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 중심의 삶 (8절)

하나님 중심의 삶이란 의롭고, 선하며, 지혜로운 삶을 뜻합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부패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 자기 중심적으로 살면 죄악에 머무를 수밖에 없습니다.

우매자의 속성 (9절)

헛된 인생을 사는 우매자는 불의하고, 부정직하며, 급하게 노를 발합니다. 노(怒)란 자신이 도모하는 일이 자기 뜻대로 진척되지 않는 것을 이유로, 하나님의 섭리를 불평하며 하나님께서 운행하시는 질서에 대항하는 그릇된 행동이나 감정 상태를 가리킵니다. 노는 지혜자나 우매자 모두 발할 수 있지만 지혜는 노를 오래 머물게 하지 않는 반면 우매자는 노를 오래 머물도록 허용합니다. 또한 우매자는 훈계를 멸시하고 다툼을 일으키며(잠 18:6), 참견하기 좋아하고 위선으로 가득 찬 자기 마음을 믿습니다(잠 28:26).

지혜의 유익 (11~18절)

본문에서 전도자는 지혜의 유익을 강조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섭리를 설명합니다. 전도자는 돈과 지혜를 비교하면서 지혜의 우위와 가치를 증명하고, 또 인간이 미처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무궁하신 기사를 설명합니다. 성경은 지혜가 부족하거든 하나님께 구하라고 말합니다. 그리하면 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꾸짖지 아니하시고 후히 주신다고 증거합니다(약 1:5). 참 지혜는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따라서 성도는 항상 더 많은 지혜를 얻기 위해 기도하며 힘써야 하겠습니다.

죄에 대한 고백의 당위성 (20~29절)

인간은 타락하여 스스로 지혜에 이르지 못합니다. 이처럼 타락한 세상에서 지혜 있는 자를 찾기란 힘든 일입니다. 따라서 '의인은 세상에 없다'는 말씀의 의미는 죄의 보편성을 말하며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하나님께 자백하고 시인해야 합니다. 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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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1~12절)

영혼의 만족을 얻는 길 - 이 부분의 주제와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1:1~3:22절의 그것과 유사하다. 1:1~3:22절이 비교적 객관적으로 죄진 인생의 허무를 논했다면 이 부분은 좀더 주관적으로, 세상적 쾌락을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도 그것이 영혼의 행복을 주지 못하니 결국 허무하다는 것을 논하고 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건강, 학식, 돈, 쾌락 등이 행복의 요소 또는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세상적 또는 육적 안락함은 줄지 몰라도 영혼의 행복과 직결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영혼의 행복은 오로지 하나님만이 보장해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신앙 관계라는 행복의 전제 조건이 먼저 해결된 다음에야 이런 세상적 즐거움의 요소들은 있으면 더 좋고 없어도 그만인 것이다. 한편 본장의 세상적 쾌락의 요소에 대한 짙은 환멸은 독자들로 하여금 이와 상반되는 하나님이 보장해 주시는 영원한 행복에 대한 갈구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대한 강한 긍정을 유발시킨다(10절).

(1~6절)

세상 쾌락의 무가치함 - 재물, 장수, 건강, 존귀 등 세상적 쾌락은 그것 자체도 허무하지만 결과론적으로 그것이 아무리 많아도 짧은 인생에게 심령에 낙 즉 영혼의 행복을 주지 못함을 논하고 있다(3:11~15). 여기서 특히 강조된 것은 이런 세상에 속한 것들은 영생도 보장 못하지만 짧은 인생에서도 참 행복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4~6절]

이가 저보다 평안함이라. 이는 하나님과의 신앙 관계를, 회복하지 못한 자는 영생도 없고 이 세상에서의 참 행복도 없으니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좋았다는 극단적 염세주의이다.

[7절]

입을 위함. 하늘 나라에 속하지 않은 인간은 결국 먹기 위해 사는 셈이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식욕은 결코 충족되지 않는다. 또한 그것을 위한 인간의 모든 수고는 헛되다(사 56:11).

[8절]

지혜의 상대적 차이는 절대적인 죽음 앞에서 의미가 있느냐 없느냐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 문제를 해결한 자만이 참 지혜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을 이겨낼 인간의 지혜가 어디 있겠는가(고전 1:20, 21). 하나님을 경외함으로써 얻는 참 지혜(잠 1:7)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9절]

마음으로 원하는 것보다는 현재 가진 것이 더 낫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죽을 때 인간은 빈손으로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소유도 허무한 것일 뿐이다. 이러한 인생관은 믿음 안에 있는 인생관과 얼마나 다른가!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에 더 큰 소망을 두며, 그것들을 더 귀중히 여긴다(롬 8:24; 고후 4:18; 히 11:1; 벧전 1:8).

(10~12절)

인생의 절대적 구원자 - 지금껏 드러내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너무도 분명한 죽음의 존재 앞에서 그 어떤 것으로도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인생의 실존적 상황을 갈파한 전도자는 이제 방향을 바꾸어 인생에는 절대적 구원자가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밝히면서 네가 이제 어디에 가서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지를 스스로 생각해 보라고 반문하고 있다.

[10절]

사람은 존재론적으로 이미 스스로 선택하거나 거부할 수 없는 일정한 질서와 법칙 안에서 살아가야만 한다. 여기에 인간의 한계성이 있다. 강한 자. 그러한 질서와 법칙을 이미 옛적에 정해 놓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말한다(욥 38:4~39:30).

[12절]

누가 알며. 인간의 지혜로는 인생의 의미를 밝힐 수가 없다. 역사 이래. 이를 시도해 온 수많은 철학자들도 아직 인생의 의미를 밝히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 능히...고하리요. 자신의 지혜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지혜도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우리에게 이런 인생의 뜻을 가르쳐 줄 수 있는 분은 오직 인생의 모든 비밀을 알고 계신 하나님 밖에 없는 것이다(10절).

 

# 해설

해 아래 세상 자체의 영원한 헛됨 (1~12절)

4, 5장이 인본주의적 인간 욕망과 활동의 헛됨을 말했다면, 6장은 그 대상과 방법인 재물(1, 2절), 후손(3~6절), 인간 수고(7, 8절) 등 그 자체가 모두 상대적인 것으로, 그것들만으로는 근본적으로 인간을 총족시켜 줄 수 없음을 논하고 있다. 즉, 6월은 해 아래 인생의 헛됨이 인간의 욕망과 방법이 나빠서 뿐 아니라 세상은 근본적으로 인생에게 만족을 줄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심지어 10~12절은 내일은 더 나아지겠지 하는 기대 도피성 발상에도 쐐기를 가하는 것으로 해 아래는 지금 뿐 아니라 영원히 허무할 것임을 못박고 있다.


# 핵심

3절

그 몸이 매장되지 못하면 사람이 죽어 약속의 땅에 묻혀 열조에게로 돌아가는 것은 축복으로, 매장되지 못하고 시신이 버려지는 것은 저주받은 것으로 간주되었다(렘 22:19).

 

# 묵상

허무의 원인 (1~12절)

인생 허무의 근본 원인은 하나님을 떠난 인본주의와 세속주의에 있습니다. 진정한 행복의 제공자는 하나님뿐이십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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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1~7절)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과 자세 - 전도자는 지금껏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으면 인생의 모든 면이 다 허무하다는 것을 설명해 왔다. 그런데 여기서는 잠시 그 관점을 바꾸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과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예배(1절), 기도 생활(2, 3절), 서원을 통한 언행의 일치(4~7절)를 통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전도자는 '너는 마땅히 이렇게 행하라'는 식으로 당위론적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자기가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착각하는 자들의 형식적, 위선적 신앙 생활을 비판하는 방식으로 교훈을 전개하고 있다.

[1절]

네 발을 삼갈찌어다. '행동을 조심하라', '네가 행하고 있는 바와 가고 있는 곳을 기억하라'(시 119:59; 잠 1:15)는 뜻으로서 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발을 씻는 결례(출 30:18, 19)나 거룩한 장소에 들어갈 때 신을 벗는 습관(출 3:5; 수 5:15)을 염두에 둔 표현인 듯하다. 따라서 이 명령은 경건하고 진지한 태도로 하나님을 섬기며, 또한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예배에 임하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3절]

한 사람이 동시에 여러 일을 하면 정신이 어지러워져 어느 한 가지 일에도 충실하지 못하게 된다. 세상 일도 그러한데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가 횡설수설한다는 것은 그의 기도가 진실된 것이 아님을 나타내 준다<눅 11:1~13, 올바른 기도 생활>.

(4~7절)

<민 30:1~16, 서원과 맹세>.

[7절]

오직...경외할찌니라. 형식적 예배, 무성의한 기도, 경솔한 서원 등은 모두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데서 기인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헛된 공상이나 말을 앞세우기 전에 성경 연구와 묵상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깨닫는 데 주력해야 할 것이다(시119:9; 딤후 2:15).

(8~20절)

돈과 재물에 대한 사랑 - 돈과 재물을 사랑하는 것의 어리석음과 돈을 사랑하는 자들의 허무한 말로(末路)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돈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이기적으로 세상 쾌락만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우상은 꼭 짐승이나 괴물의 형상을 한 미신적 숭배 대상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외에 다른 것에서 구원과 행복을 찾는 행위 일체를 가리킨다. 따라서 돈을 추구하는 자에게는 돈이 우상인 것이다.

[9절]

난해 구절로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땅과 민중들의 힘에 의해서 살아가면서도 왜 민중을 학대하는가라는 뜻인 것 같다.

[10~12절]

재물 추구의 폐단 세 가지 -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기 때문에 재물이 아무리 많아도 만족을 주지 못함(10절), 재물은 결국 제 한몸 먹자는 것이었는데 결과적으로는 남 좋은 일만 시키게 됨(11절), 재물은 이처럼 만족도 못 주면서 공연히 불안하게 함(12절).

[13~17절]

재물을 사랑하는 자가 겪게 되는 고난 - 재물을 사랑하는 행위의 죄악성을 말해 주고 있다. 재물을 사랑하는 자는 재물을 지키기 위해 일평생 고통스러운 삶을 산다(13, 17절). 그러나 그 재물은 갑작스런 재난으로 인하여 한꺼번에 사라지기도 한다. 이럴 때에는 자식까지도 그 재난에 동참케 된다(14절). 비록 사람이 재난을 당하지 않고 일평생 애써서 재물을 지켰다 하더라도, 그가 죽으면 한푼도 남김없이 모두 남의 것이 되고 만다(15, 16절). 그러므로 재물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재물의 필요성을 아는 것(10:19)과 재물을 사랑하는 것은 다르다. 재물을 사랑함은 일만 악의 뿌리이며(딤전 6:10), 믿음을 떠나게 하는 것이며(딤전 6:10), 그 사람의 일평생의 고통을 그 대가로 요구하는 것이다(17절). 그래서 성경은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하나님께 두라'(딤전 6:17)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18~20절)

재물 추구의 헛됨 - 2:24~26; 3:22절 등과 유사한 내용을 지닌 문맥의 중간 결론으로서 이처럼 네 욕심만으로 해아래서 재물을 추구하는 것은 헛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과의 신앙 관계가 회복된 자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그 모든 것이 완전한 축복으로 변하게 되므로 참 만족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18~19절]

모든 수고 중에서...수고함으로. 성도의 즐거운 인생은 정당하고 건전하며 성실한 수고로만 획득되는 것이다. 즉 불신자는 죽도록 제 힘으로 쾌락을 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얻지 못하지만 성도에게는 이미 만족과 행복이 보장되어 있으므로 그에 합당한 노력만 기울이면 된다는 것이다.

[20절]

생명의 날. 인생의 짧은 연수를 말한다. 관념치 아니하리니. 인생의 연수가 너무 짧아 허무하다거나, 너무 길어 지루하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성도의 삶은 잘되든 못 되든 모두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며 단명이나 장수 역시 영생의 차원에서 볼 때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 해설

경박한 신앙과 과도한 탐욕 (1~20절)

4, 6장이 주로 직접적으로 인생 전반의 모순을 말한다면, 본장은 '그러면 안 된다'라는 교훈투로 인간의 내면에 있는 경박한 신앙(1~7절), 과도한 탐욕의 폐단(8~17절)을 간접적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이런 폐단을 벗어나는 길은 이 땅의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오로지 영원한 절대성을 주시는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뿐임을 18~20절에 중간 삽입 형식으로 보여 준다.


# 핵심

1~7절

형식적 신앙의 헛됨을 지적하면서 순종의 중요성, 기도의 바른 자세, 반드시 이행해야 할 서원을 가르치며,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권면한다.

올바른 재물관 (18~20절)

본래 사람은 노동하는 존재로 창조되었다(창 2:15). 따라서 성경은 일하지 않고 게으름 피우는 것을 죄악이라 규정한다(마 25:26). 그러면 힘쓰고 애써 모든 재물에 대해서는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할까? 재물을 모으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거나 모은 재물을 자신의소유로 생각하는 것은 성경적인 재물관이 아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재물관은 수고의 대가로 얻은 재물을 하나님의 선물로 알고 자족하며(빌 4:11, 12), 재물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않고, 그 재물을 잠시 관리하는 청지기적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다(눅 12:42).

 

# 묵상

인생의 허점 극복 방법 (1~7절)

인생의 허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헛된 자세로 예배 드리지 말고, 헛된 기도를 하지 말며, 헛된 서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믿고 실행에 잘 옮기며 살고 있다고 착각하는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신앙 생활을 비판하고, 자신을 다시 한번 돌아보는 신앙의 겸손과 지혜를 갖추어야 합니다(벧전 5:5).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폐단 (7절)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할 때 생기는 폐단은 형식적인 예배와 무성의한 기도, 경솔한 서원 등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진정으로 깨닫지 못하는 데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때문에 성도는 그 어떤 헛된 공상이나 말을 세우지 말고, 말씀 연구와 기도와 묵상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찾는 데 주역해야 합니다.

재물 추구로 인한 폐단 (10~17절)

재물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되며 믿음을 떠나게 하고, 평생의 고통을 그 대가로 요구합니다. 혹 많은 재물을 얻었다 할지라도 재물로 인해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오히려 불안 가운데 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재물을 지키기 위해 평생 동안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되고, 갑작스런 재난으로 재물을 잃기도 하며 그 재난이 자식에게까지 미치기도 합니다. 따라서 성도는 세상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재물을 하늘에 쌓는 것이 지혜로운 일입니다.

행복의 근거 (19~20절)

영혼의 행복을 공급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적이고 육적인 것은 영혼의 행복과는 거리가 멉니다. 왜냐하면 행복의 근거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건강, 학식, 돈, 쾌락이 행복의 요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언젠가는 허무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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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4:1~6:29절)

사회 전반에서 발견되는 모순과 허무 - 앞의 1:1~3:22절은 2:24절을 기준으로 해 아래 생활의 절대 부정과 해 위로부터 온 구원의 빛으로 인한 긍정적인 인생을 적나라하게 대조시키는 방법으로 문장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제 이 부분은 좀더 구체적으로 해 아래에 속한 것들을 추구하는 삶의 허무함을 논하면서 그 사이사이에 짧은 잠언 형식의 교훈을 삽입시키는 방법으로 문장을 전개시키고 있다. 1:1~3:22절 부분과 이 부분의 차이점이 있다면 전자가 주로 개인적이고 존재론적인 측면에서 인생의 허무를 논한 반면, 후자는 주로 사회 윤리적인 측면에서 인간 사회의 모순과 허무를 논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편 참고로 7:1~12:14절은 인생의 다양한 방법으로 논증하기보다 직설적으로 어떤 자세로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아갈 것인지를 교훈하고 있다. 따라서 본서는 후반부에서 성경 지혜 문학의 일반적 분위기를 한층 더 짙게 풍기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장 서술 방법을 기준으로 1:1~6:29절은 간접적 교훈의 부분으로, 7:1~12:14절은 직접적 교훈의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3절)

전도자의 고뇌 - 전도자는 여기서 인류 역사 이래 단 한번도 그친 적이 없는 사회적 모순 앞에서 절망과 무력함을 통감하고 있다. 앞서 고찰했듯이 너나 없이 죽어야 할 죄인들이면서 잠시 세상 사는 동안 권세를 가졌다 하여 타인을 괴롭히는 자가 속출하고 또 숱한 민중들이 괴롬을 당하면서도 별다른 해결책이 없는 부조리한 현실 앞에서 전도자는 인생 자체를 회의하고 있는 것이다. 전도자의 이러한 고뇌는 다음 두 가지 측면을 갖고 있다. 현재의 인간 사회에 대한 절망과 이 땅에서는 아무 해결책이 없으므로 오로지 하나님 나라의 개입을 간절히 간구하는 미래 지향적 희망이 그것이다. 즉 전도자의 고민은 절망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압제하는 권세자들에게는 해 아래서 행하는 악(3절)을 심판하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경고이며 압제를 당하는 자들에게는 희망의 암시인 것이다(사 33:1; 렘 22:3; 겔 18:7; 말 2:16; 히 13:3).

[1절]

위로자가 없도다. 이는 해 아래 세상에서는 피압제자를 충심으로 사랑해 주는 동시에 구원의 능력을 갖춘 구원자가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사랑과 능력을 갖춘 구원자는 오직 해 위에 계시다.

[2~3절]

복되다...더욱 낫다. 이는 마치 욥 3:1~26절의 반향인 듯하다. 욥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인생 자체를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가득한 삶보다는 죽음이 더 편하다는 말이다.

(4~6절)

수고의 무익함 - 앞서 전도자는 인간의 수고와 결과적으로 그 개인의 구원과 행복을 보장해 줄 수 없음을 이야기하였었다(2:18~23). 여기서 더 나아가 그 부작용 즉 세상에서의 쾌락만을 추구하는 인간의 노력은 잘되어도 사회적 시기와 질투를 받고, 못 되어도 스스로의 영혼을 번뇌케 하는 무익한 것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따라서 성도의 모든 노동의 동기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soli Deo gloria)이어야 한다(고전 10:31; 엡 6:5~8; 골 3:22~25).

[5절]

우매자는...먹느니라. 이는 4, 6절과 약간 다른 내용으로서 과도하게 욕심내는 것도 나쁘지만 게으른 것도 자기 자신을 파멸시키는 원인이 된다는 의미이다. 4~6절을 종합해 볼 때 노동은 그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제 욕심을 위해서 일할 때 나쁜 것이다.

(7~12절)

이기적인 삶과 공동체의 삶 - 먼저 7, 8절은 공동체를 거부한 이기적 개인주의자의 말로를, 그리고 9~12절은 공동체 안에서 서로 도우며 사랑함으로써 얻게 되는 기쁨과 평안에 대해서 대조 설명하고 있다.

[8절]

내가 누구를 위하여 악착스러울 정도로 이기적으로 살던 자가 문득 자신을 깨닫고 부르짖는 절규이다. 그의 이기심에 기인한 모든 노력은 결과적으로 그 자신에게도 불안과 고통만을 주었던 것이다.

(9~12절)

공동체가 주는 유익 - 이 부분은 당시 여행이 어려웠던 상황에서 여행할 때 여럿이 같이 가면서 서로 돕고 사랑하는 것이 좋음을 피력하면서 공동체의 기쁨과 필요성을 교훈하고 있다.

[9절]

두 사람. 수학적으로 꼭 두 명이 아니라 여러 사람으로 구성된 연합체를 가리킨다. 상을 얻을 것임이라. 목적을 성취하리라는 뜻이다.

[10절]

여행 중 구덩이에 빠지는 경우를 예로 들고 있다. 특히 밤에 그런 경우를 당했을 때에는 치명적일 수도 있다. 그런 처지에서 동료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11절]

팔레스타인의 밤 기온은 차갑다. 특히 여행 도중 밤을 맞아 홀로 노숙한다는 것은 무척 곤혹스러운 일이다. 이럴 때 함께 누워 줄 수 있는 동료가 있다면 얼마나 고마운 일이겠는가! 실패와 비방과 유혹과 질병 등은 우리의 인생살이를 매우 춥게 만든다.

[12절]

팔레스타인의 여행자들에게는 항상 노상 강도의 위협이 뒤따랐다(눅 10:30). 삼겹줄. 단합된 힘이 보여 주는 위력을 상징한다. 말세가 될수록 교회가 모이기를 힘써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히 10:25). 지금 우리는 더욱더 거세지고 빈번해진 대적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살후 2:7; 딤후 4:3; 계 12:12).

(13~16절)

독불장군의 교훈 - 이 우화적 이야기는 실제 있었던 역사적 사실에서 끌어낸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능히 있음직한 이야기를 지어낸 것일 수도 있다. 여하튼 막대한 권력을 지닌 왕이라 할지라도 공동체 안에서 타인의 충고와 사랑을 받지 못하는 자는 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13절]

지혜로운. 지혜의 속성은 여러 가지이겠으나, 여기서는 동료의 간(諫)함을, 즉 남의 충고에 귀기울일 줄 아는 공동체 안에서의 겸손한 덕성을 가리킨다. 지혜로운 자는 친구의 충고를 '기름과 향'처럼 여긴다(잠 9:8, 9; 잠 15:31, 32; 잠 27:9). 늙고. 히브리인들은 나이가 들수록 지혜로워진다고 보았는데(시 119:100) 이 왕은 노인이면서도 타인의 충고를 듣지 않는다. 이것은 교만하고 독선적인 자가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이중으로 강조하는 용법이다(왕상 12:8, 13). 그는 왕인 동시에 연륜을 쌓은 자였으나 교만으로 인하여 어리석게 되었다. 외롭게 되었다. 왕위를 빼앗기는 비참한 말로를 갖게 되었다. 따라서 성도들은 겸손이 사회의 덕성이기에 앞서 하나님의 명령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렘 43:2, 겸손과 교만>.

[14절]

가난한 자. 연소자요, 거기에다 출옥자이기도 한 소년이 지혜 하나만으로 왕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지혜의 힘이 위대하다는 사실을 강조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15~16절]

사실 13~16절은 미묘하지만 엄정한 진실인 진리의 한 측면을 보여 준다. 지혜를 소유하고 인간 공동체 내에서 겸손할 때 크게 흥왕할 수 있으나 그렇다고 그것이 영원한 것이나 절대적인 것은 못 된다는 것이다. 해 아래서...기뻐하지 아니하리니라는 구절이 그 사실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해 아래 지혜로 잠시 동안 성공할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지혜로써 영원한 하늘 공동체에서의 성공을 추구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참 성도는 잠시 세상에서 왕으로 성공한 이 소년보다 더욱 큰 자들인 것이다.


# 해설

인본주의적 정치.경제의 헛됨 (1~16절)

1:1~2:26절이 주로 솔로몬 왕의 개인적 체험에서 획득된 생의 허무에 대한 진술이라면, 4:1~6:12절까지는 주로 객관적 관찰에 의한 진술이라 할 수 있다. 그중 본 4장은 인간 삶의 요체인 사회 생활의 가장 풍요한 사항인 정치.경제가 하나님 중심이 아닐 때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말하고 있다. 1~3절은 사회적 피압박자가 있는 터무니 없는 현실을, 4~12절은 과도한 개인적 이기심에서 발로된 경제 생활의 모순을, 13~16절은 정치적 능력과 명성도 종국에는 허망한 것임을 말한다.


# 핵심

4~16절

이기적인 수고의 헛됨, 외로운 자의 허무함, 세상 인기의 덧없음 등을 한탄한다.

심령의 낙을 빼앗는 탐욕주의자 (8절)

탐욕주의자는 자기의 소유를 보고도 결코 만족함이나 위로를 얻지 못하며, 스스로 심령의 낙까지 빼앗는다. 그의 탐욕은 채워지지 않고 오히려 끊임없이 목마른 갈증만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잠 27:20). 등을 따뜻하게 하고, 배를 불리며, 세상에서 모자랄 것이 없을 정도로 재물을 모았어도 자신의 부를 족하게 여기지 못하기에 항상 평안과는 거리가 먼 피곤한 생활을 할 뿐이다. 이와 같이 세상 일에만 집착하고 세속적인 일만을 추구하면 심령의 낙을 빼앗기고 양심뿐만 아니라 신앙까지 잃고 만다(딤전 1:19).


# 묵상

세상이 주는 것 (4~12절)

본문은 개인주의의 고독과 내적 불안정, 공동체의 친교와 상부상조의 유익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기적이고 물질주의적인 세상이 인간에게 가져다 주는 것은 사회적으로는 분쟁을 일으키고, 개인적으로는 고립감과 허무한 마음뿐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서로를 돌보며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데 힘써야 하겠습니다.

허무한 영광 (13~16절)

전도자가 본문에서 무익한 것으로 소개하는 것은, 자신의 수고와 지헤로써 입신 출세한 자도 그것으로 인해 참된 인생의 낙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교만한 자는 결국 어리석게 되며 외롭고 비참하게 됩니다. 남의 충고에 귀기울일 줄 아는 겸손은 성도들이 주 안에서 배워 가야 할 덕성이기에 앞서 하나님의 명령임을 알아야 합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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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1~22절)

하나님의 계획 아래에 있는 삶 - 앞서 전도자는 해 아래 있는 인생의 허무를 논할 때에도 먼저 극단적 허무를 선포하고 난 후에(1:1, 2) 세부적으로 허무의 실례들을 논하였다. 이제 해 위에 계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인생의 영원한 행복과 희망을 가르침에 있어서도 전도자는 먼저 2:24~26절에서 낙천적 인생관을 선포하고 난 후에 본장에서 그 세부 이유와 내용을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본장의 문단 구성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의한 인생의 질서(1~10절), 그에 대한 성도의 낙천적 인생관(11~15절), 하나님의 심판을 기억할 것에 대한 교훈(16~22절). 본장을 종합적으로 고찰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는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삶을 모두 주관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면 이 땅에서도 즐거운 삶을 살 수 있다. 최후 심판을 기억하고 영원한 나라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한다.

(1~8절)

때를 정하시는 하나님 - 세상 만사에는 때와 기한이 있다(1절). 전도자는 이러한 기본 명제를 열네 쌍으로 된 세상사를 예로 들어 증명해 보인다(2~8절). 여기 '때가 있다'는 말은 인생 범사가 각기 하나님이 정해 주신 제 시간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이 구절의 교훈은 다음과 같다. ①인생의 주권자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범사에 하나님의 뜻을 구하여야 한다. ②인생은 하나님이 주관하시니 안전하고 영원하다. 그러므로 성도는 영원한 삶을 보장 받는다. ③인생에는 질서와 기한이 있다. 따라서 항상 인생의 질서에 순응하며 모든 일에 끝이 있을 줄을 알고 그때를 대비하여야 한다(마 18:23; 마 21:34; 히 9:27). ④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중재하시며 선한 결과를 만들어 주실 것을 믿고 선한 일에 주력하여야 한다(갈 6:9).

[5절]

돌을 던져 버릴 때...거둘 때. 전쟁 중 군대의 진군을 위해 대로의 돌을 제하거나(사 62:10), 방어 진지를 수축하기 위해 도을 모으는 때를 말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하나님께서 인생을 세우시거나 파멸하실 때를 가리킨다.

[9~10절]

일하는 자...무슨 이익이 있으랴. 이 구절은 1:1~3절에 부수된 것으로서 하나님이 이처럼 모든 것을 섭리하시는데 이를 깨닫지 못하고 무엇이든지 제 힘으로만 하려고 하는 자는 헛된 수고만 하다가 끝마치게 되는 무가치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11~15절)

행복을 얻는 삶의 자세 - 이제 전도자는 이처럼 하나님이 때를 따라 주관하시는 세상에서 어떻게 또는 어떤 자세로 살아야 참 행복을 얻을 수 있을지를 비로소 직설적으로 이야기한다. 한편 지금껏 전도자가 부정적 허무와 비전을 외친 것은 참 행복의 교훈을 더욱 극적으로 제시하기 위한 것으로, 바로 이것이 전도자의 참 진의이며 긍정적 주제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미 밝힌 바 있다. 즉 본서는 세상의 부정적 상황을 하나님 신앙을 통하여 영원한 긍정으로 바꾸는 것이다. 다만 전도자가 지금까지 부정적 측면을 강조한 것은 지금 이 순간도 '해 아래'에만 얽매여 사는 자들에게 그들의 실존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를 각성시키기 위해서였다.

[11절]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영원을 사모하도록 창조되었음을 가리키는 이 구절은 인간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쾌락을 누린다 하더라도 왜 참 영혼의 행복을 누릴 수 없는지를 잘 설명해 준다. 하나님...측량할 수 없게. 14절 주해를 참조하라.

[12~13절]

사람이 사는...하나님의 선물. 2:22~23절과 모순되는 이 말의 이면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을 때와 회복되었을 때라는 두 가지 상황이 전제되어 있다. 이렇게 볼 때 똑같이 수고하며 먹고 마시는 일이 하나님이 안 계실 때에는 지루하고 괴로운 일이나, 하나님이 계실 때에는 완전한 행복으로 변함을 알 수 있다. 즉 문제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인 것이다.

[14절]

하나님...영원히 있을 것이라. 이 구절과 11b절은 절대적 존재인 하나님의 섭리는 상대적이고 제한적 존재인 인간이 도저히 깨달을 길이 없는 것으로서 다만 경외 즉 신앙의 대상이 될 뿐임을 각성시킨다.

[15절]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시느니라. 이는 1차적으로 하나님의 섭리는 과거나 미래나 불변하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나아가 앞서 2:16절에서 인간은 죽음 후에는 영원히 잊혀질 것이라는 고민이 해결됨을 발견한다. 즉 인간은 하나님에 의하여 영원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16~22절)

죽음과 심판에 대한 경고 - 1:1~2:23절과 2:24~3:22절은 그야말로 상호 대조되는 부분이다. 전자는 '해 아래' 생활을 추구하는 자들의 허무한 결과를, 후자는 '해 위' 즉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자들의 행복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전도자는 이 양자에 대한 고찰을 일단 마무리하고 끝으로 세상 만인이 기억해야 할 문제 즉, 죽음과 그 후의 심판 문제에 대하여 각성시키고 있다. 이는 불신자들로 하여금 인생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니 진리를 깨닫고 올바른 삶의 길을 가도록 촉구하기 위한 것이고, 성도도 이 땅에서 행복을 추구하며 살되 심판과 그 후의 더 큰 상급을 기억하며 더욱 근신하면서 희망 가운데 살도록 촉구하기 위해서이다.

[16절]

재판하는 곳과 공의를 행하는 곳의 타락은 세상의 무질서와 타락을 저지하는 최소한의 교두보마저 허물어졌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법의 도용과 법정의 타락은 전 인류사가 증언하는 현실이다(눅 23:14~16).

[17절]

하나님이...이룰 때가 있음. 세상 만물의 이룰 때, 즉 세상 마지막 날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임을 경고한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 법정의 심판과 다음과 같은 점에서 다르다. 선악이 분명하고 공정하다. 인생 전체에 관한 것이며 단회적이다. 그 대상은 전인류로서 단 한 명의 예외도 없다.

[18~20절]

인간의 유한성 - 이 구절은 21, 22절과 연결된 문맥하에서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이 구절은 인생이 죄의 삯으로 죽어야만 하는데 죽음을 스스로 극복할 힘이 없다는 점에서는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을 뜻하고 있다. 즉 인간은 죄의 대가인 죽음을 스스로 이길 수 없다는 점에서 짐승과 마찬가지로 죄 아래 있는 존재라는 말이다(창 2:17; 롬 5:14; 롬 6:23). 그럼에도 지금 이 시간 교만하고 잘난 척하며 사는 자들은 죽음 앞에 이르러 짐승처럼 되는 공포와 수치를 느낄 것이다.

[21절]

그러나 죽음 이후의 상황에 있어서 인간과 동물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있다. 혼(히, 루아흐)은 생명의 근원(창 2:7)을 의미한다. 모든 생명은 인간이든 동물이든 다 하나님께로부터 왔다(시 36:9). 그런데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영혼을 지녔으며 육체적 죽음 이후에도 이는 소멸하지 않고 영원히 존재하게 된다. 바로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부인하거나 망각한 자는 '멸망하는 짐승'(시 49:20)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위...아래. 본서에서 '위'는 하나님이 계신 곳을, '아래' 또는 '땅'은 죄 아래 있는 세상을 의미한다(1:13; 5:2). 전도자는 죽음을 포함한 인생의 모든 비밀을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깨닫게 된다. 바로 여기에 전도자의 신앙 고백이 있다.

[22절]

즐거워하는 것보다...이는 그의 분복이라. 현재 인생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섭리 아래서 되어지며,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또 우리를 심판하실 것이니 겸손히 감사하며 인생을 즐기고 심판에 대비하는 것이 인생의 복이라는 것이다. 자기의 일들을 분복으로 생각하는 것만큼 긍정적인 생활 자세가 또 어디 있겠는가! 전도자는 본서 전체를 통하여 믿음의 두 가지 측면을 이야기하고 있다.

1) 부정적인 면 - 인간에 대한 강한 부정이며, 하나님 없는 만물 만사에 대한 철저한 부정

2) 긍정적인 면 - 하나님의 주권적 개입으로 인한 만물의 질서와 최종적 심판으로 인한 긍정으로, 이로써 부정은 극복된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지금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을 사모하면서 즐기고 누릴 만한 축복스러운 것이 되는 것이다. 성도에게는 지금의 인생을 즐거워할 이유가 있으며, 더 나아가 심판 날에 이르러서도 구원의 산 소망(벧전 1:3)을 가질 수 있다.


# 핵심

1~15절

하나님이 인생의 모든 일에 대해 기한을 두셨으며 온 우주 만물이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좇아 운행된다는 하나님의 주권 사상을 강조한다.

종교성 (11절)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영원을 사모하도록 창조되었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사실과 깊은 관계가 있다(창 1:27). 아담의 범죄 이후 모든 인생이 죄악된 모습을 지니고 있지만, 영원을 볼 수 있는 시각과 마음, 곧 무한한 시간의 개념과 불멸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이 영적 목마름을 다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고, 영원하신 하나님 안에 거할 때에만 해소할 수 있다(요 4:14).


# 묵상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업적 (11절)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을 지으셨고,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으며,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이 구절은 영원(永遠)과 상대(相對)의 위치에 선 인간 존재의 실상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와 영원하신 계획을 측량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께서 은혜로 베풀어 주신 삶을 향유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신앙하는 이유 (14절)

인간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신앙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섭리를 상대적이고 제한적인 인간이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과거나 미래에도 불변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그분 안에서 만족을 얻을 때야 비로소 죽음에 대한 고민의 해결과 함께 하나님의 영원성을 획득할 수 있게 됩니다.

죽음과 심판의 의미 (16~22절)

세상 인간이 누구나 기억해야 할 문제는 죽음과 심판의 문제입니다. 죽음은 인간 세상의 가치 판단과 가치 추구의 한계를 깨닫게 하지만 하늘의 지혜를 소유하지 못한 인간들로 하여금 허무를 피할 수 없게 합니다. 또한 죽음은 불신자로 하여금 인생이 죽음으로 완전히 끝나는 것이 아니며 그 후에는 심판이 있기 때문에 진리를 깨닫고 바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성도에게는 이 땅에서 행복을 추구하며 살되 심판 이후에 있을 커다란 상급을 기억하고, 근신하며 소망 가운데 살도록 깨우쳐 줍니다.

하나님이 집행하시는 심판의 특징 (17절)

세상 마지막 날에 있게 될 하나님의 심판이 인간 법정에서의 심판과 다른 점은 선악간에 행해질 분명한 공의의 심판이라는 점입니다. 또한 그것은 인생 전체를 그 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일회적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심판은 전인류가 대상이며 예외가 없습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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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1~11절)
쾌락의 추구와 그 결과 - 전도자는 여기서 자신이 왕으로서 온갖 쾌락을 다 누려 보았지만 결국 회한과 환멸만 남게 되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다. 솔로몬의 쾌락은 지적 허영, 부귀, 성적 만족, 풍류 등 세상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이었고 그것도 무제한으로 마음껏 향유할 수 있었다. 여기 열거된 쾌락은 한마디로 영원한 진리에 근거하지 않은 세속주의적 쾌락의 전형들이라 하겠다. 이런 쾌락의 속성은 다음과 같다.

  1) 자기 중심적(ego-centric)이다(1, 3, 10절) : 죄 아래 있는 세상이 추구하는 쾌락의 특징은 하나님이 이웃보다 자기를 더 사랑한다는 것이다(딤후 3:2).

  2) 물질주의적이다(4~9절) :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지 않는 세계에서는 인간의 영혼보다 물질을 더 숭상하기 마련이다. 자기 쾌락을 위해서 물질을 모으고, 그 물질을 위해서는 사람들의 영혼도 하찮게 여긴다(겔 1:19; 계 18:12, 13).

  3) 방탕한 것이다(3, 8, 10절) : 하나님 없는 쾌락은 비도덕적이고 방탕하며 욕심에 절제함이 없다(10절). 신앙을 버린 현대인들이 '삶을 즐기자'라는 표어 아래 정열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쾌락은 방탕하다는 특징을 뚜렷이 보여 주고 있다(눅 15:13).

  4) 무익한 것이다(11절) : 세상의 쾌락은 그것을 추구한 사람들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할 뿐 아니라 결국에는 그들의 모든 것을 소모시켜 버린다(눅 15:12~17).
[1절]
삶의 의미와 구원을 주는 데 있어서의 인간 지혜의 무익함을 시인하고 난 전도자는 쾌락의 허무함을 피력하고 있다. 실제로 우리 주위에는 세상살이에 실패한 자들이나 삶의 고상한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 자들이 말초적 쾌락을 추구하는 경우가 많다(마 16:26).
[2절]
웃음...희락. '웃음'은 표면적인 즐거움을 의미하며(잠 10:19, 23; 렘 20:7), '희락'은 보다 사려 깊은 즐거움을 의미한다(민 10:10; 신 28:47; 삿 16:23). 그러나 전도자는 이 두 가지 즐거움을 동일하게 취급하고 있다. 즉 모두 헛되다는 것이다. 무엇을 하는가. 도대체 웬 수선이냐는 조롱투의 질문이다.
[3절]
지혜로 다스림을 받으면서 쾌락으로 자기를 시험하고 있는 전도자의 신중함이 암시된다. 그러나 이 시험은 스스로 욕심에 빠져 쾌락으로 자기를 시험하는 악한 것이다(약 1:14). 어떤 것이 쾌락인지 알까. 과거의 전도자는 쾌락을 찾는 방향과 방법이 처음부터 틀렸기 때문에 세상의 여러 쾌락을 누려 보았으나 진정한 기쁨을 맛보지 못했던 것이다. 영원하고 참된 기쁨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누릴 수 있다(시 119:165).
(4~9절)
인간의 참된 만족 - 여기 전도자가 열거하고 있는 내용은 그가 세상의 물질과 육적 쾌락을 모두 무제한적으로 누려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참 행복과 만족은 물질과 육의 문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영혼의 문제인 것이다. 또한 물질과 육적 쾌락은 결국 한 몸뚱이 밖에 없는 인간이 무제한 느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기름진 음식도 배부르면 오히려 역겨운 법이다. 이처럼 행복과 만족이 물질과 육에 있는 줄 생각하는 자는 최후에 더욱더 쓰라린 허탈과 공허만을 맛볼 것이다(사 55:2; 엡 4:17).
[4절]
나를 위하여. 말세의 인생들에게 나타날 가장 현저한 특징은 '자기를 사랑'하고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딤후 3:2, 4)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를 위하여 육으로 심는 자는 썩어질 것으로 거둘 것이다(갈 6:8). 참지혜자는 하나님 나라에 보배를 쌓아두는 자이다(마 6:19, 20). 그러기 위해서는 이기심을 버리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해야 한다(마 6:33).
[7절]
소유는 그 자체만으로는 쾌락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여타 물질적 쾌락의 수단이다.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소유(재산)에 집착한 자들이 자기도 괴롭히고 남도 괴롭게 만들어 왔다(5:10~17).

[10절]

무엇이든지. 무절제를 말한다. 절제는 신앙의 기본 덕목 중 하나이다(벧후 1:5~7). 말세가 되면 사람들은 절제하지 못한다(딤후 3:3). 그러나 영적 싸움에서 이기기를 원하는 자는 반드시 절제를 생활화해야 할 것이다(고전 9:25)<벧전 4:3, 그리스도인의 절제>.

[11절]

해 아래서. 이 말은 왜 전도자의 모든 수고가 무익한 것인지를 설명해 준다. 그것은 하나님을 신앙하지 않는 영역에서의 수고였기 때문에 헛된 것이다.

(12~23절)

죽음이라는 인간 실존의 절대적 한계 상황 앞에서 전도자의 절망은 극에 달한다. 만약에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나버린다면 도대체 이 짧은 인생의 의미는 무엇이고 굳이 선악을 가리며 힘겹게 살아갈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것이며 인간은 그야말로 죽음과 운명의 노예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이 영생을 허락해 주지 않은 모든 자들에게 엄연한 현실인 것이다. 더욱이 성경이 분명히 경고하고 있는 심판을 생각할 때 굳이 죽음의 문제를 생각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영원한 단절보다 더욱더 무서운 것이다. 따라서 성도는 죽음의 필연성을 늘 기억하면서 죽음으로써 끝나게 될 이 세상의 일과 죽음 이후에도 이어질 영원한 일을 구분하는 지혜를 가져야 할 것이다. 또한 성도가 아닌 자들도 여기 전도자가 각성시키고 있는 죽음의 필연성, 인간 욕망의 무의미함, 그로 인한 존재론적 허무와 고통을 깊이 반성, 묵상해 보아야 할 것이다.

[13~17절]

세상 지혜의 헛됨 - 1차적으로 지혜는 우매보다 상대적으로 우월하다. 지혜는 신중함, 사려 깊음, 통찰력, 나아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성취하는능력에 있어서 우매보다 더욱 고귀하고 영광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그 지혜도 인간 실존의 절대적 한계인 죽음은 극복하지 못하며, 더욱이 죽음 문제에 대한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비록 당장은 우월하나 결국은 동일하니 지혜도 결국에는 허무와 좌절만을 안겨 줄 뿐이다.

[18~23절]

인간 수고의 허무함 - 13, 17절이 주로 정신적이고 추상적인 지혜의 허무를 말했다면 이 부분은 보다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인간의 여러 수고에 대한 허무를 말한다. 그 이유는 수고의 결과가 인간에게 행복을 보장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수고의 과정에서 영육의 고통이 동반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수고의 결과를 자신이 누리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인해 타인에게 넘겨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22절]

해 아래란 말이 거의 매절 언급되고 있는데 이는 '죄 아래', '사망의 권세 아래'(롬 5:12~15), '그리스도 밖에'(엡 2:12)로 대치될 수 있다.

(2:24~3:22절)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희락 - 본서 첫머리부터 그토록 집요하게 허무를 비탄해 온 전도자의 어조가, 폭풍우 치던  하늘이 급작스레 찬란한 태양이 빛나는 하늘로 변하듯 갑자기 인생에 대한 행복과 희망에 가득 찬 어조로 변한다. 그러나 사실은 변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다만 그토록 목놓아 세상의 허무를 말함으로써 참 구원과 행복의 실재와 그 은총에 대한 간구를 간접적으로 말하던 것을 이제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 부분은 본서 전체의 문장 구성으로 볼 때 일대 전환부이다.

[24절]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이 낙천적 선언은 22절의 말과 너무도 모순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2절은 인생의 의미가 '해 아래'에만 국한된 경우이고, 본절은 그 인생의 출발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을 경우를 말한 것이다. 즉 인생이 해 아래에 속했을 때에는 철저한 절망과 불만족, 죽음만이 있을 뿐이나 하나님에게 속했을 때에는 영원한 행복이 보장되는 것이다.

[25절]

전반부에서도 전도자는 이와 비슷한 자랑을 했었다(2:9, 10). 그런데 전반부의 그 자랑은 허무주의로 끝났었다(2:11). 그러나 본절의 자랑은 그것이 하나님 믿음 안에서였기 때문에 안전하게 보장 받는다.

[26절]

기뻐하시는 자에게. 문자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선한 자에게'라는 의미이다. 지혜, 지식, 희락. 이전엔 모두 허무주의 앞에 굴복되었던 가치들이다(1:18; 2:1). 그러나 전도자는 이제 영적으로 새로운 의미와 가치가 포함된 지혜와 지식, 희락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게 되는데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기쁨과 행복의 원천이 되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죄인(불신자)들은 여전히 허무주의를 극복하지 못한다. 저로 모아...주게 하시나니. 하만의 모든 재물이 모르드개의 것이 된 사건(에 8:2)을 연상시키는 구절이다. 그러나 이의 진정한 성취는 최후의 심판 날에 있을 것이다. 이로써 전도자는 세속적 염세주의와 신앙적 낙천주의를 분명하게 대조시키려 했다.

 

# 해설

인생 허무의 결정적 원인 (12~23절)

살아 있는 동안에는 맹목적 순환을 되풀이하는 '해 아래서'의 제한된 자들에게 인생을 결정적으로 허무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이 죽음이다. 이 죽음은 해 아래 생활에 관련한 필연적인 끝으로서 끊임없이 다가온다. 만약 사람들이 죽음 없이 영원히 살 수 있다면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낫거나 혹은 소위 미운 정이나마 붙이고 살아보려 하는 상대적 희망 또는 숙명론적 난관에 잠길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해 위의 세계와 관계없이 살아온 자에게 죽음은 모든 허무의 최종 원인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인생 허무의 극복 (2:24~3:22절)

근거 이는 전도서 전체의 후반부 4:1~12:14절에 대응한 전반부의 1차 결론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2:24~26절은 해 아래 세계에서 해 위의 세계, 즉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생의 허무성에서 하나님을 전제했을 때에 삶의 자세로 급전하는 전환부 내지 1차 결론 도입부라 볼 수 있다. 3:1~9절은 모든 세상 일은 하나님이 직접 정한 때와 기한이 있음을, 3:10~15절은 그 모든 것을 초월하는 절대자 하나님은 유독 인생들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셔서 인간은 상대자이지만 동시에 영원을 사모하는 존재이므로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방법대로 영생을 얻지 못하면 표면적으로 그 마음에 허무밖에 남을 수 없음을 웅변한다. 특히 3:11절은 영원과 상대의 접촉점에 선 인간 존재의 실상을 극명하게 보여 주는 구절로 유명하다. 한편 3:16~22절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영원성을 획득한 인간이 잠시 이 상대적인 지상에서 살 동안 가져야 할 두 가지 기본적 자세, 즉 미래 심판에 대한 명심과 자족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실로 인간은 이 세상에서는 그 무엇으로도 만족할 수 없지만 신앙으로 이미 영원을 획득한 참 성도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자족할 수 있는 것이다.


# 핵심

1~26절

인생 쾌락의 허무함, 죽음의 무차별성으로 인한 허무함, 인간 수고의 허무함 등을 저자의 개인적 체험에 근거하여 전달하면서 인생의 참된 만족은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다는 결론을 내린다.


# 묵상

쾌락의 특성 (1~11절)

쾌락은 자기 중심적(ego-centric)이고 물질주의적이며, 방탕하여 결국은 허무로 끝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실패한 자들이나 삶의 의미를 진정으로 깨닫지 못한 자들이 쾌락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영원하고 참된 기쁨은 오직 하나님 말씀 안에서만 누릴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헛된 지혜의 추구 (12~19절)

일반적으로 말하는 지혜조차 사람을 참 행복에 이르게 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전도자는 지혜를 추구하는 것도 헛되다고 말합니다.

인간 수고의 허무 (20~23절)

인간 수고가 허무한 이유는 수고의 과정이 고통을 동반하며 수고의 결과가 인간에게 행복을 보장해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이 수고의 결과를 누리지도 못하고 죽음으로 인하여 그것이 타인에게 넘겨질 수도 있기에 그 허무함은 더합니다. 이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인간 수고의 문제점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구원에 이르는 영혼의 수고를 사모하며 일해야 합니다.

행복과 소망의 근본 (24~26절)

진정한 인간의 행복과 소망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출발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생은 하나님께 속해 있을 때 영원한 행복이 보장됩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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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1:1~2:23절)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허무함 - 본서의 도입부라 할 수 있는 이 부분은 인생의 허무함에 대한 통렬한 체험적 인식과 그에 대한 전도자의 고백으로 충일해 있다. 그러나 전도자의 고백은 결코 절망과 포기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인생 자체가 무의미하고 허무한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결국이 허무한 것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지금껏 자기가 살아온 길이 하나님 중심주의가 아니라 자기 중심주의, 세속주의적 삶으로서 그 최후가 얼마나 허무한 것이었는지를 철저하게 깨닫고 그에 대하여 적나라하게 고백함으로써, 자신의 전철을 밟는 자가 생기지 않도록 애타게 촉구하고 있다. 이 부분에 언급된 전도자의 절망과 충격은 그가 하나님 중심주의로 회개함으로써 자동 소멸되고 오히려 더 큰 희망과 참 행복의 계기가 되고 있다. 그리하여 여기서 깊은 절망에 빠졌던 전도자는 뒷부분에 가서 인생은 하나님과 함께할 때 기쁘고 영원하며 축복된 것임을 밝히면서 오로지 하나님만을 의지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는다. 지금 나도 참지혜를 깨닫기 전에 전도자가 그랬던 것처럼 육에 속한 세상의 것을 추구하고 있지 않은가 반성해야 한다(사 55:2; 마 6:19). 전도자는 철저하게 허무를 깨닫고 더욱 굳건히 하나님만을 의지함으로써 그가 세상의 왕으로서 온갖 쾌락을 누리며 순간적으로 즐기던 때보다 더욱더 큰 평안과 행복을 누리게 되었다. 참 축복은 내가 철저히 부서지고 난 다음에야 가능한 것이다<막 14:66~72, 자아의 깨짐>. 이 부분은 전도자의 간단한 자기 소개(1:1)와 구체적 예증으로서 인생 여정의 무의미함(1:2~11), 인간 지혜의 무익함(1:12~18), 쾌락과 재물의 허무함(2:1~11)을 논하고 난 뒤 죽음의 엄연한 존재로 인한 이 세상의 삶의 본질적 무의미를 최종적으로 논하고 있다(2:12~23).
[1절]
다윗의 아들...왕. 일반 사람이 지나가는 말로 인생 허무를 논하는 것보다, 당대 최고의 현인으로서 또 왕으로서 쾌락의 극치를 누려 보았던 솔로몬 왕이 인생 허무를 오열하듯 토로할 때 그 설득력이 가일층 더해진다. 전도자의 말씀. 여기 전도자란 대중 연설자를 말하는 것으로, 본서가 솔로몬이 스승으로서 대중을 가르치기 위해 한 말이었음을 깨닫게 해준다.
(2~11절)
인생의 무의미함 - 본문은 인생 자체가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끝없이 맹목적으로 되풀이되는 역사의 한순간에 잠시 왔다가 허무하게 사라져 버리는 미미한 존재에 불과함을 말하고 있다. 즉 먼저 3절에서 인간이 제 힘으로 아무리 애써 보았자 결국 그것은 한낱 하루살이의 몸부림에 불과할 뿐 아무 소용이 없음을 절규하면서 그 이유를 4절 이하에 제시하고 있다. 거대한 우주의 순환은 아무런 변화도 없이 되풀이 되며, 그 순환 과정에 물거품처럼 왔다가 스러지는 죄인 된 인간은 이 땅 그 어디서도 인생의 본질 문제인 영원한 구원에 대한 해결책을 찾을 수 없음을 구체적 자연 현상을 예로 들어 비유적으로 보여 준다(4~8절). 또한 이런 죄인의 운명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며 또한 각 개인의 모든 노력은 본질적으로 새로운 존재를 탄생시킬 수 없는 제한된 것으로서 결국 너나없이 역사의 망각 속에 침몰될 것이라는 사실이 기술되고 있다(9~11절).

[2절]

헛되고 헛되니. 히브리 어법의 최상급 표현이다. 헛되되. 완전히 헛되다는 절망적 탄식이 진하게 스며 있다. 한편 롬 8:20절을 볼 때, 세상은 본래부터 헛된 것이 아니라 다만 인간이 죄를 범한 후 인간과 우주가 모두 허무한데 굴복하게 되었음을 가르쳐 준다. 따라서 이 구절은 역으로 이렇게 헛된 세상에서 구원을 발견하는 길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으며, 지금 우리들처럼 미지근하게 살아가는 생활은 결국 처절한 허무에 봉착할 것임을 역설적으로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3절]

해 아래. 하나님 없는 인간의 영역을 말한다. 이것이 전도자의 허무주의에 대한 전제 조건이 된다. 즉 전도자가 강력히 부정하려는 것은 하나님 없이 사는 불신앙적인 삶 전체를 말한다. 따라서 하나님 없는 곳에서는 허무주의만이 있을 뿐이다. 유익. 상업 용어로 '이익'(profit)이란 뜻이다. 세상이 허무한 데 굴복한 것이 사실일진대, 그런 세상이 인생들에게 줄 수 있는 유익이 무엇이 있겠는가! 아직도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세상으로부터 각종 유익을 얻으려고 분주히 뛰어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허무한 데 종 노릇하고 있는 것이다(갈 5:19~21). 그들이 허무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를 삶의 목적으로 삼는 길뿐이다.

[4절]

세대...땅. 시간과 공간의 두 영역으로 된 이 세상을 뜻하는 말로서 하나님 없는 영역을 가리킨다. 가고...오되...영원히. 제 스스로 아무 구원의 능력이 없는 땅은 하나님이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시기까지 아무런 변화도 갖지 못한 채 그저 묵묵히 있는데, 인간들만 속절없이 계속 교체함을 처연하게 노래한 것이다.

[5~8절]

해는 당장 온 하늘을 태우는 것 같으나 곧 서쪽으로 떨어지는 현상으로서 인생의 짧고 덧없음을, 바람은 인생의 참 방향이 없음을, 7, 8절은 끊임없이 순환하고 되풀이해 보지만 근본적으로 참 만족이 불가능함을 비유하고 있다. 특히 거대한 자연 현상이 실례로 사용됨으로써 인생의 허무함이 더욱 엄정하고 장엄하게 묘사되고 있다. 한편 자연 현상은 보는 눈에 따라 이처럼 허무하고 지루한 삶의 상징일 수도 있으나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위대한 솜씨와 사랑에 대한 산 증거가 될 수도 있다(시19:1~6). 따라서 문제는 외적인 자연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죄에 물들어 있는 인간의 내적 심성에 있는 것이다.

[8절]

만물. '모든 것'(4~7절), 또는 '모든 말들'로 번역될 수도 있다. 눈은...차지 아니하는도다. '세상의 어떠한 것도 인생을 만족시킬 수 없다' 또는 '세상의 어떠한 철학(모든 말들) 인생에게 만족할 만한 가치를 부여해 주지 못한다'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9~11절)

허무의 보편성 - 지금까지 진술한 인생 여정의 허무는 어느 한 시점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전역사에 걸친 일임을 말한 것이다.

[9절]

새것이 없나니. 인공 위성, 핵폭탄, 자동차 등은 과거에 없었던 새로운 것이 아니냐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것들도 결국은 과거의 것을 더 낫게 고친 것이지 절대적 창조물은 아니며 더 나아가 이런 물질 문명이 죄 가운데 죽는 인생의 본질적 문제에 새로운 해결책을 제시해 준 적도 없다. 즉 여기서 새것이 없다 함은 인간 문명의 현상이 아니라 본질에 전혀 새로운 것이 끼어들 소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절대적 불가능을 깨뜨리는 방법이 있으니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새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고후5:17).

[11절]

기억함이 없으니. 새것이 없고 무의미할 뿐 아니라, 각 세대가 자기 문제에 휩싸여 전혀 과거의 영광을 기억해 주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 설령 기억한다 해도 그것은 과거의 영광을 기리는 것보다는 현재 자신들의 이기적 목적을 위해서일 뿐이다.

(12~18절)

세상의 지혜와 참된 지혜 - 여기 지혜에 대한 비판은 그 범위가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에 대한 참지혜가 아니라 하늘 아래, 해 아래에서의, 즉 세상 지혜에 국한된 것임에 유의하여야 한다. 전도자의 지혜 비판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는다. 인간의 지혜는 양적으로도 제한되어 있으나 더욱 중요한 것은 절대적인 면에서 한계가 너무도 분명하다는 사실이다. 즉 인간의 지혜로는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고전 1:19, 20). 세상 지혜는 이기적 목적에서 출발하며 인간을 교만하게 만드는 속성이 있다(렘 9:23). 세상 지혜는 그 깨닫는 과정도 괴로우나 그 내용 자체도 괴로움을 주는 경우가 많다. 지혜는 양이 아니라 질이 문제이다. 따라서 성도는 많은 지혜를 지니고 있다고 자랑하기보다는 하나님이 주시는 참지혜를 갖고 있음을 자랑하고 기뻐하여야 한다. 한편 성도는 현대 지성인들에 대하여 그 상대적 가치는 높이 존중하되(2:13) 그 한계성 또한 분명하게 깨달아 근본적으로 우리 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유일한 분인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지혜를 간구해야 할 것이다(고전 1:21). 그렇다면 그 지혜는 어떻게 얻을 수 있는 것인가? 이는 한마디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신앙의 응답으로서만 가능하다.


# 해설

자기 소개 (1절)

왕으로서의 근엄함과 전도자로서의 능력을 암시함으로써 이하 전개될 내용의 권위와 신뢰도를 높이고 있다.

인생 허무의 종합적 모습 (2~11절)

인간이 살아가는 시간적 역사와 공간적 우주는 그 자체로서는 맹목적인 순환만을 되풀이 한다. 이러한 역사와 우주의 마당에 혼자 와서 스스로도 만족하지 못하다가 훗날 누구도 기억해 주지 않은 채 사라져 버리는 인간의 실상을 이야기함으로써 인생 허무(vanity or emptiness)의 보편성을 서론적으로 개괄하는 단락이다.

인생 허무의 개별적 모습들 (1:12~2:11절)

앞 단락이 총론이라면 이는 각론(各論)이라 할 수 있다. 본 단락은 허무한 인간의 실상을 말하되 인간 자체의 정신적 측면의 허무를 말하는 전반부(1:12~18)와 각종 쾌락과 유희, 사업 성공과 육적 쾌락 등의 육신적 측면의 허무를 말하는 후반부(2:1~11)로 나눌 수 있다. 전도자는 이런 결론을 자신의 직접 체험과 관찰을 통해 얻었음을 시사함으로써 신빙성을 새삼 높이고 있다. 한편, '해 아래' 또는 '하늘 아래'라는 상황 설정을 자주 강조함으로써 전도자는 자신의 결론의 적용 범위도 해 아래로 국한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 핵심

1~11절

세상 만사의 헛됨을 진술하며,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연약함과 무상함을 시사한다.

덧없는 인간의 지혜 (17절)

'지혜의 왕'으로 불리는 솔로몬은 누구보다 경험이 풍부하고 지혜를 추구한 인물이었다(왕상 10:1~13). 그러나 솔로몬은 세상의 지혜를 추구하면 할수록 더 큰 공허감에 젖어 든다고 토로했다. 세상의 지혜에 빠져 들수록 더 큰 문제, 더 어려운 고민 앞에 서야 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고백하는 바와 같이 이 세상 지혜는 결코 인생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전 1:19, 20). 따라서 성도는 인생 문제의 궁극적 해결자이신 하나님께로 시선을 돌려 그분이 주시는 신령한 지혜를 덧입어야 할 것이다(고전 1:21).


# 묵상

헛된 인생 (1~11절)

'헛되고 헛되니'란 말씀은 히브리어의 최상급 표현으로서 인생이 본래 헛된 것이 아니었지만 죄를 범한 후 인간과 우주가 허무함에 빠졌음을 의미합니다. 절망의 탄식이 섞여 있지만 헛된 세상에서 그치지 말고 구원을 발견하여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함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그 삶과 함께 추구하는 모든 것은 결국 헛된 것이 됩니다. 따라서 인간이 죄된 인생의 본질적인 허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죄인의 종말 (9~11절)

죄인인 인간의 운명은 역사적 사실로도 알 수 있지만 개인의 노력은 본질적으로 새로운 존재를 탄생시킬 수 없는 제한된 삶임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죄인은 역사의 망각 속에서 침몰될 것입니다.

인간 지혜의 한계 (12~18절)

인간의 지혜는 양적으로 제한되어 있고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기적인 목적과 함께 출발하기 때문에 인간을 교만하게 만들며 깨닫는 과정이 괴로울 뿐만 아니라 내용은 현재를 더 괴롭게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시와 신앙의 응답을 통해서는 참된 지혜를 얻는 것이 가능합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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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10장 - 매튜헨리  (0) 2014.09.18

Ⅰ. 청년시절의 신앙심에 대한 훈계 12:1-7

 

(1) 청년들에게 젊었을때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의무를 유념하라는 요청 :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젊은 너희는 마치 세상에서 큰것을 얻을것처럼 기대하고 우쭐대지만 세상은 영혼에게 확고한 만족을 주지 못하는도다. 그러므로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그리고 이 세상의 허영으로인해 일어나는 해악을 당하지않도록 너희 자신을 지키라." 이것은 젊은 사람들의 특별한 병, 곧 감각적인 쾌락의 탐닉, 어린시절과 청년기때 빠지기 쉬운 허영을 고치는 훌륭한 치료제이다. "이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하기위해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자이시다. 그가 우리를 지으셨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만든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의 합법적인 주인이시다. 우리는 우리의 창조주로서의 그에게 마땅히 드려야할 존귀와 의무를 바쳐야 한다. '너의 창조자들을 기억하라.' 이 단어는 욥기 35:10절에서('나를 지으신 하나님들'-역주)와 같은 복수형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란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시다. "너의 날들을 시작할때, 너는 네 존재를 얻어 가지게 된 그분을 기억하고 시작하라. 너의 젊은 모든 날동안에 그를 기억하고 결코 잊지말라. 젊은시절의 여러가지 유혹에 넘어가지않도록 조심하고 젊은 시절의 많은 이점을 활용하라."

(2) 이 명령을 실행해야할 이유 : '곤고한 날이 이르기전, 나는 아무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전에' 창조주를 기억해야 한다.

1) "질병과 죽음이 이르기 전에 그 일을 속히 행하라. 나이가 들기전에, 곧 '나는 아무낙이 없다고 하기'전에 그리하라." 늙으면 우리의 '기력은 수고와 슬픔'이 될 것이며, 세상에서의 좋았던 시절을 회상하고 천국에서 누릴 더나은 생활을 기대하는 것외에는 '아무낙이 없을' 것이다.

2) 그는 이 두가지 요지를 다음 구절에서는 단지 그 순서만 바꾸어 상술한다. 우리 인생의 정수는 마귀에게 내어주고 그 껍데기와 허접쓰레기만 하나님께 드리려고 남겨둔다는 것은 가장 어리석고 이루말할수 없이 배은망덕한 짓이다. 만일 노년에 여기에서 묘사되는 것과 같은 재난이 온다면, 우리에게는 그때에 우리를 지탱해주고 위로해줄 어떤것이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때를 맞춰 우리의 창조자를 기억하기 시작했다고 하는 우리 양심의 증거보다 더 효과적으로 우리를 지탱해주고 위로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젊었을때 하나님을 섬기려 하지않는다면 늙었을때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시리라고 어떻게 기대할수 있겠는가? 노년의 허약한 점들이 여기서 상징적인 표현으로 고상하게 묘사되고 있다. 그때에는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그리고 이것들로부터 나오는 빛이 '어둡게될 것이다.' 시력이 쇠퇴한 결과로 그것들이 노인들에게는 침침하게 보일 것이다. 영혼에게 빛과 같은 그들의 지적인 능력이 약해질 것이다. 그들의 이해력과 기억력은 그들을 실망시킬 것이다. 그때는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날때인 것이다. 구름이 한번 지나기가 무섭게 이내 또 구름이 몰려오듯이 노인들도 그런식으로 고난을 당한다. 그래서 그들은 한가지 고통이나 우환에서 벗어나자마자 곧 또다른 고통에 사로잡힌다. 그때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다.' 망대와 같은 머리가 흔들리고 몸을 보존할수 있는 손과 팔이 너무 떨려 약해질 것이다. 그때는 '힘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다.' 다리는 이미 다 고장난 것처럼 여행을 하는데 적합지 못하고 쉬 피곤해진다. 그때는 '맷돌질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다.' 그들의 치아는 '수가 적으므로'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한다. 그때는 '창들로 내어다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다.' 모세는 백이십세때에도 시력이 좋았는데, 그것은 아주 드문 경우이다. 그때는 노인들이 '새의 소리를 인하여 일어날 것이다.' 그들은 젊은 사람들처럼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사소한 일에도 방해를 받아 잠을 깬다. 심지어는 새소리에도 깨어 일어난다. 그때에 그들에게는 '음악하는 여자들도 다 쇠하여질 것이다.' 노인들은 듣는 것이 둔해져서 음향과목소리를 잘 구별하지 못한다. 그때에 그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다.' 즉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가기를 두려워할 것이다. 그 이유는 숨이 가빠서 오를수 없고 머리가 어지러워서 감히 올라가보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때에는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다.' 노인의 머리카락은 희어져서 그 머리는 꽃이 핀 살구나무처럼 보일 것이다. 그때에는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원욕이 그칠 것이다.' 노인은 아무것도 머리에 이거나 등에 질수 없다. 아무리 가벼운 것도 그들의 몸과 마음에는 무겁게 느껴져서 작은 것에도 그만 주저앉고 만다. 아마도 이 글은 솔로몬 자신이 늙어서 노인의 허약한 점들을 생생하게 말할수 있을때 쓴것 같다. 그는 어쩌면 과거에 감각적인 쾌락에 탐닉했던것 때문에 더빨리 이러한 노인의 허약을 겪게되었는지도 모른다. 이 모든 사실이 우리가 왜 '청년의 때에 우리의 창조자를 기억해야' 하는가에 대한 적절한 이유이다. 그는 우리에게 '곤고한 날이 이르더라도' 우리를 기억해주시며 감각의 기쁨이 그와 같이 사라지는때에도 그의 위로로서 우리 영혼을 기쁘게 해주실 것이다. 그때에는 '사람이 자기 영원한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솔로몬은 그의 안식처로 곧 그가 거해야할 곳으로 갔다. 그는 '그의 영원한 집으로' 간 것이다. 우리가 죽으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이 사실을 생각하고, 우리는 죽음을 기꺼이 맞이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바라지 않을 이유가 있겠는가? 죽음은 우리를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슬픔을 주는 동기가 된 것이다. '사람이 자기 영원한 집으로 돌아갈'때 '조문자들이' 곧 실제로 슬퍼하는 사람들과 장례식을 위해 곡하는 자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될 것이다. 장례식을 위하여 슬퍼하는 자들은 삯을 받고 죽은 자를 위해 울어 실제의 슬픔을 표시하고 자극하였다. 죽음은 사람의 체질을 분해할 것이며 6절에서 고상하게 묘사된 이 세상에 있는 장막 집을 무너뜨릴 것이다. 그때에는 몸과 영혼을 기이하게 굳게 경합시킨 '은줄이 풀릴 것이다.' 그 신성한 매듭이 풀어질 것이다. 그때에는 우리를 위해 생명수를 담고있던 '금그릇이 깨어질 것이다.' 그때에는 우리가 끊임없이 생명을 지탱하고 생명의 쇠퇴를 보수하기위해 물을 긷는데 썼던 '항아리가 깨어지는데' 바로 '우물위에서' 깨어져 더이상 물을 길어 나를수 없게될 것이다. 그리고 '바퀴(영양분을 모으고 분배하는 일을 하는 모든 기관)가 깨어져서' 더이상 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게될 것이다. 몸은 태엽이 끊어지고 모든 바퀴의 운동이 멈춰져서 정지한채로 서있는 시계처럼 될 것이다. 죽음은 우리를 최초의 본질로 환원시킬 것이다(7절). 사람은 하늘의 광선이 땅의 흙덩어리와 결합한 기묘한 피조물이다. 사람이 죽을때 이것들은 분리되어 각기 나온 곳으로 돌아간다. 진흙덩어리인 몸은 그 자신의 '땅으로 돌아간다.' 광선인 영혼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이는 하나님이 티끌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그를 생령으로 만드셨기 때문이다(창 2:7). 영혼이 몸과 더불어 죽지는 않는다. 영혼은 '음부의 권세에서 구제된다'(시 49:15). 영혼은 몸없이도 존재할수 있으며, 마치 촛불이 어두운 등피밖으로 나왔을때도 여전히 타며 오히려 더 밝게 타듯이, 몸에서 분리된 상태 가운데서도 존재할 것이다.

 

Ⅱ. 결론〔1〕 12:8-12

 

솔로몬은 여기에서 결론에 접근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주제를 되풀이한다(8절). 그는 자신이 이 주제에 관하여 하나님의 가르침과 영감에 의해 기록한바를 우리가 보고 진지하게 생각해보도록 권고한다.

(1) 이것은 회심자의 말이다. 즉 비싼 대가를 치루고 얻은 경험에 의해서 세상의 헛됨과 세상에서 큰것을 기대한 어리석음에 대해 말할수 있는 참회자의 말이다. 그는 방황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온 "코헬렛"(전도자)이었다. 이 참회자는 '헛되고 헛되도다' 라고 말하였다.

(2) 이것은 지혜자의 말이다. 그는 탁월한 지혜를 갖추어서 이웃나라 사람들가운데 유명해졌다. 그들은 모두 '그의 지혜를 듣기위해' 그를 찾아왔다. 또한 그는 뛰어난 지혜를 갖추었기때문에 이런 문제에 있어서 유능한 재판관이었다.

(3) 그는 선을 행하고 지혜를 바르게 사용하는 것을 본업으로 삼았던 자였다.

(4) 그는 '백성들에게 지식을 가르치려고' 마음을 먹고 노심초사 선을 행하려고 애썼다. 그는 잠언이나 짧은 격언을 가장 유익한 설교방법으로 채택하였다.

(5) 그는 자기가 해야할 말에다 가장 호감이 가리라고 생각되는 옷을 입혔다. 그는 '힘써 아름다운 말' 곧 즐거운 말을 '구하였다'(10절). 그렇게 함으로써 좋은 내용이 나쁜 문체로인해 망쳐지지않도록 하였다.

(6) 기록한 것은 정직하여 진리의 말씀이니라(10절).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들을 가르치는 정직한 말보다는 자기들에게 알랑거리는 '부드러운 말을' 좋아한다(사 30:10). 그러나 자신을 이해하고 자신의 이익을 아는 자들에게 '진리의 말씀'은 언제나 '마음에 드는 말씀'이 될 것이다.

(7) 그와 다른 거룩한 사람들이 기록한 것은 우리에게 큰유익을 줄 것이다. 특별히 그것을 해설해줄때 더 유익을 줄 것이다(11절). 흔들리며 변하기 쉬운 사람들에게는 이 말씀들이 '못과 같아서' 그들로 선한 것을 굳게 지키도록 만든다. 이 말씀들이 둔하고 뒤로 처지는 자들에게는 '채찍과 같고,' 변덕스러워 옆으로 비켜나가는 자들에게는 '못과 같아서' 우리안에 있는 선한 것이 '확실한 곳에 잘 박힌 못과 같이' 되게 할 것이다(스9:8). 경건한 예배를 위한 엄숙한 회중의 모임은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고 그의 교회를 교도하기 위해 옛부터 정해져 내려온 신성한 제도이다. 이 회중을 주관하는 스승들이 있어야했는데 그들이 곧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이다. 그들의 직무는 '지혜자의 말씀'을 꼭 붙들고서 그것을 '못처럼' 사람들의 머리에 박는 일이다. 그 일을 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망치'와 같은 역할을 한다(렘 23:29).

(8) 기록되어서 이렇게 우리에게 권고하는 이것은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여러사람의 손을 거쳐서 우리에게 전달될지라도(여러 '지혜자들'과 많은 '회중의 스승'을 거칠지라도) 그것은 '한분이 주신' 것이요 동일한 '목자' 곧 '요셉을 양떼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가(시 80:1) 주신 것이다.

(9) 만일 우리가 영감을 받아 기록된 성경을 사용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우리를 참된 행복의 길로 충분히 인도할 것이다. "내 아들아 내가 또 네게 말할 것이라곤 '여러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다'는 말밖에 아무것도 없도다." 사람들이 인생의 지침을 위해 아무리 많은 책을 저술하며 많은 연구로 지칠때까지 많은 것을 쓸지라도, 그것들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얻는 것보다 더나은 가르침을 제시할수는 없다.

 

Ⅲ. 결론〔2〕 12:13,14

 

솔로몬이 본서에서 제기한 중대한 질문은 '인간이 행해야할 선은 무엇인가'하는 것이다(2:3). 참된 행복에 이르는 참된 길은 무엇이며 우리의 이 중대한 목표를 달성할수 있는 확실한 수단은 무엇인가? 솔로몬은 하나님이 옛날에 사람에게 알리신 그 사실에 의해서(욥 28:28) 참된 경건만이 참된 행복에 이르는 유일한 길임을 발견하였다. 일의 결국은 다 들었으니(13절).

(1) 신앙의 개요 : 의심스런 논란을 일으키는 문제를 다 접어둔다면, 경건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이다. 신앙의 뿌리는 마음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즉 그의 위엄을 존경하고 그의 권위에 복종하며 그의 진노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신앙의 규칙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법이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경외심은 그의 명령으로 가르침을 받아야한다(사 29:13). 따라서 우리는 그 명령을 지키되 조심스럽게 지켜야 한다.

(2) 이 일의 중요성 :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이것이 사람이 해야할 일의 전부요 받을 축복의 전부이다. 우리의 모든 의무가 이 일에 요약되어 있고 우리의 모든 위로가 여기에 달려있다.

(3) 이 일에 대한 강력한 권유(14절) : 우리는 신앙심을 지닌다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알게될 것이다. 만약 우리가 마지막에 치러야할 대가를 생각한다면 우리 모두는 즉시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지 않을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중대한 사실은 그때 '모든 행위'가 선악간에 심판된다는 사실이다. 이제 우리는 "즐거움으로 우리의 회계를 할" 수 있도록 하나님과 동행하는 일에 매우 신중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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