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udy

 

Ⅰ. 제자들의 사명과 헤롯의 공포 9:1-9

1. 그리스도가 그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택하신 방법(1-6)

그리스도는 그 자신이 두루 여행을 다니셨다. 그러나 그는 한번에 한곳에만 있을수밖에 없었으므로 그의 제자들을 내어보내셨다. 그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이런저런 방법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게 되었다. 그들의 가르침을 확고히 할수 있도록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기적을 행할 능력과 권세를 주셨다(1,2절). 그는 그들에게 '모든 귀신을 제어할 권세를 주어' 귀신들의 소유를 빼앗고 그들을 내쫓게 하셨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병고치는 능력을 주었고, 그러한 일들을 하도록 그들을 임명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사람들이 정확한 판단을 내리게 하였으며 그들의 호의를 얻게 하였다. 이것이 곧 제자들의 임무였다. 이 일에 대하여 더 자세하게 살펴보자.

(1) 이 임무의 수행을 위하여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지시하신 일은 무엇인가?

1) 그들은 외모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으려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있는 그대로 가야하며 옷을 바꿔 입어서도 새신을 신어서도 안된다.

2) 그들은 하나님께 의존해야하며 그들의 친구들의 돈을 가져서도 안된다.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에게 사람들의 친절을 받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말고 오히려 그것을 기대하라고 하셨다.

3) 그들은 자기들을 받아들인 자들이 그들을 지겨워하지나 않을까해서 숙소를 옮겨서도 안된다. 즉 어느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유하다가 거기서 떠나야 한다(4절). 사람들이 그들의 있는 곳을 알수 있도록 어느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유하고, 그들에게 익숙해진 자들과 함께있으라는 것이었다.

4) 그들은 권위를 가져야되며, 그들을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위로를 주고 그들을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경고의 말을 해야한다(5절). 만약 너희를 영접하지 않는 곳이 있다면 그들을 하나님의 심판에 맡겨버려라. 그리고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

(2) 이 임무를 수행하기위하여 그들은 무엇을 하였나(6절). 그들은 주의 곁을 떠나갔다. 그들은 각 촌에 두루 행하여 각처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쳤다. 제자들의 행할 일은 그들의 주가 행한 것과 마찬가지로써 영혼과 육체에 대하여 선을 행하는 것이었다.

2. 제자들의 복음 전파를 전해들은 헤롯의 놀라움(7-9)

우리는 여기서 헤롯이 이 일을 듣고 당황하고 고민하는 것을 볼수 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보내진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능력이 전달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메시야라는 놀랍고도 확실한 증거였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기적들을 행하셨을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기적을 행할 능력을 부여하셨다. 그리고 이 일은 다른 어떠한 일보다도 그리스도의 명성을 널리 퍼뜨렸다. '그들은 예수와 함께 있었었다'(행 4:13). 각 촌 사람들은 그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병든 자를 고치는 것을 보고 놀랐다.

(1) 사람들은 여러가지 추측을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잘 알수는 없지만, 우리 주 예수님을 존귀한 자요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이라고 생각할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를 세례 요한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였고 옛 선지자의 하나가 다시 살아났다고도 하였다. 혹은 엘리야가 나타났다고 하는 자들도 있었다(7,8절).

(2) 헤롯의 마음에 큰 고민이 생겼다. 그리스도가 행한 이 모든 일을 듣고 헤롯은 요한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생각하였다. "어찌 하여야 할까?" 헤롯이 말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거늘 이 사람은 누군고." "그는 요한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요한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하여 왔는가?" 하나님을 반대하는 자들은 점점더 당황하는 자신을 발견하게될 것이다. 헤롯은 그를 보고자 하였다(9절). 그런데 왜 가서 그를 만나지 않았을까? 헤롯은 그리스도를 보고자하였으나, 법정에서 만나기 전에 그를 보았는지의 여부는 알수가 없다.

 

Ⅱ. 제자들이 돌아온 일과 오천명을 먹이신 일 9:10-17

(1) 제자들은 그들의 사역의 결과를 예수께 고하였다. 사도들이 돌아와 자기들의 모든 행한 것을 예수께 고한대(10절).

(2) 그들은 잠깐동안 은거하여 휴식을 취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따로 한적한 곳으로 떠나가셨다. 우리의 남종과 여종을 쉬게하라고 명하셨던 그리스도는 그의 종에게도 쉬게하셨다. 지극히 공적인 자리에 있는 자들은 육체의 휴식을 취하기위하여 그리고 명상으로 그들의 마음을 채워 더나은 일을 하기위하여 때때로 은밀하게 은거해야 한다.

(3) 사람들이 모여들었으며 그리스도는 그들을 영접하셨다. 그리스도는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무리들이 그를 따라왔다. 그는 그들을 영접하셨다(11절). 여기서 우리는 경건한 열성을 품은 자들이 그 열성으로 인하여 다소 무례를 범한다해도 용납받는다는 사실을 볼수 있다. 이는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그랬으며 우리 또한 이러한 자들을 허용하여야할 것이다. 그들은 때 아니게 찾아왔지만, 그리스도는 그들이 와서 구하는 것을 주셨다. 곧 그는 하나님나라의 일을 이야기 하셨다. 그리고 병든 자를 고치셨다. 그리스도는 육체적인 질병을 지배하는 권세를 가지셨으므로 치유를 필요로하는 그의 백성들을 치료해 주신다. 우리에게 있어서 때때로 육체의 편안을 위한 치유보다는 영혼의 유익을 위한 질병이 더필요하다는 것을 그리스도는 알고계셨다. 죽음은 그리스도의 종이므로, 그는 성도들의 모든 질병을 치유할수 있는 것이다.

(4) 그리스도는 그를 따라온 무리를 충분히 먹이셨다. 곧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남자 오천명을 먹이셨다. 이 기사는 앞에서 두번 나왔는데, 여기서 다시 대하게 된다. 우리 구주의 기적들 중 사복음서 모두에 기록된 것은 오로지 이 사건뿐이다. 이 기사를 세밀히 살펴보자.

1) 열심히 그리스도를 쫓아 임무를 행하며 그러기위하여 자기를 부정하기도, 드러내기도 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특별한 보살핌을 받는다. 그는 그를 두려워하고 충실하게 섬기며 어떠한 선한 것을 바라는 자들을 방관하지 않으신다.

2) 우리 주 예수님은 아낌없이 주시는 관대한 분이시다. 그의 제자들은 '무리를 보내어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라고 말했지만, 그리스도는 "아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줄수 있는데까지 주어서 그들이 자유로이 먹도록 하여라"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는 그의 사역자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없이 할것'을 가르치셨다. 적게 가진 자들은 적은 것으로 할수 있는 일을 하자. 이것이 바로 그것을 많게하는 방법이다.

3) 예수 그리스도는 병든 자를 치유하실뿐 아니라 음식이 필요한 자에게 음식도 주신다. 그리스도는 영혼의 질병으로 인한 죽음으로부터 우리의 영혼을 구해주실뿐 아니라 영혼을 살찌게하여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힘을 주신다.

4) 그리스도의 모든 선물은 정해진 격식에 따라 받아들여져야 한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떼를 지어 한 오십명씩 앉히라'(14절)고 말하고 계신다.

5) 우리는 우리에게 안락을 주는 것들(음식, 등등)을 받을때 하늘을 우러러야 한다. 그리스도는 그렇게하셨으며 우리에게도 그렇게하라고 가르치셨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그러한 것들을 받고 그것들을 우리에게 유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의지하며 또한 그 축복을 간구한다.

6) 그리스도의 축복은 작은 것을 크게 만든다.

7) 그리스도가 먹인 자들은 '다 배가 불렀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에게 다 주실수 있을만큼 부요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부족함을 느끼는 자는 아무도 없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 아버지의 집에는 먹을 것이 먹고 남을 정도로 풍부하다는 것을 확신하게 해준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궁핍하지 않다.

 

Ⅲ. 베드로의 고백과 예수님의 수난 예고 9:18-27

우리는 본문에서 다른 복음서들에는 기록되어 있지않은 특수한 상황을 볼수 있다. 즉 그리스도가 '따로 기도했다'는 것과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었다'는 것이다. 그때 그리스도의 물음이 시작된다(18절).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과 그의 아버지와 그리고 제자들과 대화하시기 위해서 은밀하게 따로 계실 필요를 느끼셨다. 따로 계실때 그리스도는 기도하셨다. 기도하기 위해 혼자있는 시간을 많이 가지는 것은 좋은 일이다. 우리는 따로 있을때 혼자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있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때에는' 제자들이 같이 기도하고자 '주와 함께' 있었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질문하시기 전에 그들과 함께 기도하셨다. 우리도 우리의 가르침을 받는 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며 또한 그들과 함께 기도해야 한다. 이어서 그리스도는 제자들과 함께 담화하셨다.

(1) 그리스도는 자신에 관하여 질문하셨다.

1)사람들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말했는가?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은 그들이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들었던 예수에 대한 여러 추측들을 말했다. 사역자들은 일반 사람들과 보다 자주 그리고 친밀하게 대화를 할때 더욱 그들의 상황에 알맞게 가르치고 책망하며 조언을 해줄수 있을 것이다. 의사도 환자와 많이 대화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환자를 위해 해줄수 있는 일을 잘 알게 된다. 어떤이들은 그가 죽은 세례 요한이라고 하였다. 또한 엘리야라고 하는 자들도 있었으며, 옛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말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그리스도는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아니었다.

2)제자들은 예수에 대하여 어떻게 말했나? 베드로는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 곧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그의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그들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표하라고 명하시지 않았을까 생각해 볼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렇게하시지 않으셨다. 그는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명하였다. 그가 부활하신후 그가 그리스도라는 것이 완전히 증거되자 베드로는 이 사실을 성전이 울리도록 외쳤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2:36). 그러나 본문에서는 아직 증거가 준비되지 않았으므로 그 사실은 감추어져야 했다.

(2) 그리스도는 그 자신의 수난과 죽음에 관하여 말씀하셨다.

이제 제자들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아주 확실히 믿게되었고 또한 증거할수 있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시다(22절). 제자들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아직 말해서는 안되는 이유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놀라운 사건이야말로 그가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는 것을 가장 확실하게 증거해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3) 그리스도는 자신때문에 제자들이 받을 고난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1)우리는 자기부정과 인내에 익숙해져야 한다(23절). 또한 안일과 욕심에 빠져서는 안된다. 그러한 것들에 빠지면 그리스도를 위한 수고나 궁핍, 피곤 등을 견디기 힘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의무를 행하는 동안 자주 십자가를 대하게 된다. 그러한 십자가를 일부러 찾아다닐 필요는 없지만 그러한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어지면 그것을 지고 그리스도를 따라가야 하며 그것에 굴하지 말아야할 것이다.

2)우리는 어떤 세속적인 일보다 우리의 영혼의 구원과 행복에 더 관심을 두어야 한다. 이 점에 대해 숙고해 보자.

①자기 멋대로의 생활이나 재산을 계속 유지하기 위하여 혹은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와 그의 진리를 부정하는 자는 결코 자신을 구원할수 없을뿐만 아니라 종국에는 말할수 없는 상실자가 될 것이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24절). 훨씬더 무한한 가치가 있는 자신의 영혼을 잃을 것이다.

②우리는 또한 다음과 같은 사실, 즉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나아가기 위하여 우리의 목숨을 잃는다면 말할수 없는 축복을 받게될 것이라는 사실을 확고하게 믿어야 한다. 그때 우리는 새롭고 영원한 생명을 다시 얻게될 것이다.

③온 천하를 얻어도 우리가 그리스도를 버린다면, 결코 그것에 비할수 없을 정도로 영혼의 끝없는 상실과 파멸을 피하지 못하게될 것이다(25절). 우리가 그리스도를 부인함으로써 이 세상에서 부, 명예, 즐거움 등을 획득했다고 생각된다하더라도, 그렇게하여 영원히 자기를 잃고 마침내 파멸해 버린다면 그렇듯 세상적으로 얻은 것들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는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을 보면 가장 두려운 일은 자기 영혼의 상실이라고 되어있으며, 여기 본문에서는 그것을 자기를 잃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 영혼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분명히 시사해 준다. 다시말해서 영혼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영혼의 잘됨과 못됨에 따라 우리 자신도 잘되거나 못되거나 하는 것이다. 영혼이 저 세상에서 비참한 상태에 있다면 몸도 편안할수 없다. 그러나 몸이 이 세상에서 많은 고통과 억압을 받아도 영혼은 행복할수 있다.

3)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부끄러워해서는 안된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그 사람을 부끄러워할 것이며(26절).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한 자는 최후의 심판날에 그를 위해 그리스도가 나타나기를 기다릴때, 그리스도가 그렇게 비겁하고 속되며 비열한 자를 인정하시기를 부끄러워할 것이며 '그는 내 백성이 아니며 내게 속하지 않았다'고 말씀하리라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그리스도가 수난을 당할때 기꺼이 함께 수난을 받는 자들 그리고 그들만이 그가 통치할때 그와 더불어 통치하게될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가 현재 수치를 당하고 있는 그 자신과 그의 따르는 자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그가 재림할때의 영광의 찬란함을 어떻게 말씀하시는지를 살펴보자. 그리스도는 그 자신의 영광으로 오실 것이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이 구절이 없다. 그리스도는 그의 아버지의 영광으로 오실 것이다. 그날 영광중에 오실 복된 예수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우리는 그가 그렇게 오시리라는 것을 믿으며, 이제 그리스도와 그의 말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말아야할 것이다.

4)그를 위해 고난당하는 자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제 곧 오리라고 말씀하셨다(27절). "여기 섰는 사람들이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그의 능력으로 현세대에 임할 것이다." 성령이 확산되고 복음이 온세상에 전파되었을때, 그리고 모든 나라가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왔을때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보았다. 즉 그들은 이방나라가 파괴되는 것을 보았을때 하나님나라의 승리를 목격하였다.

 

Ⅳ. 예수님의 변모 9:28-36

본문은 그리스도의 변모에 대한 기사이다. 그리스도의 변모는 얼마전에 이야기했던대로 그의 영광의 본보기를 보여주고 결과적으로 그를 위해 고난당하면서 결코 그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그의 제자들을 격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기사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도 나와있다.

(1) 그런데 본문에는 상황이 위의 두복음서의 것과는 다르게 언급되어 있다. 두복음서에는 이 말씀을 하신지 6일후로 되어있는데, 누가복음에는 말씀하신후 8일쯤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그날은 말씀하신후 일곱밤 다시말해서 만 엿새가 지난후인 여덟째 날이었다.

(2) 본문에는 여러가지 상황이 덧붙여져 설명되고 있다.

1)본문을 보면 그리스도가 이 영광을 기도할때 받았다는 것을 알수 있다. 예수께서는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28절). 그리고 '기도하실때에 용모가 변화되었다'(29절). 그리스도는 겸비해져서 기도하였을때 이렇게 존귀하게 되셨다. 그리스도는 그를 위하여 준비되고 약속된 은혜를 스스로 구하여 받으셔야 했다. 그는 이렇게 기도하심으로써 영광을 받으려하셨으며 우리도 또한 그렇게하라고 권하고자 하셨다. 이것이 바로 변모되고 변화되는 일이다. 기도함으로써 우리는 지혜와 은혜 그리고 기쁨을 얻게되며, 그로인해 얼굴에 광채가 날 것이다.

2)누가는 변형되었다라는 말을 쓰지않는다(마태와 마가는 이 말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뜻을 가진 어구로 표현하고 있다.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즉, 빛이 비치는 것처럼 환했다. 그리하여 그는 빛으로 온몸을 치장하고 옷을 해입은 것처럼 보였다.

3)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도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에게 나타났다고 되어있다. 본문에서는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중에 계시므로, 그들도 예수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난 것이다.

4)여기서 그리스도와 구약의 두 선지자가 나눈 대화의 주제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 그들은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죽게될 것이라'고 말했다. 즉, 그의 떠남 곧 죽음을 이야기하였다.

①그리스도의 죽음을 본문에서는 그의 퇴거, 나감, 세상을 떠나감으로 표현하고 있다. 성도의 죽음은 출애굽, 즉 이 세상이라는 애굽에서의 떠남이요 속박의 집으로부터의 해방이다.

②그리스도는 죽어야만 했다. 그의 죽음은 하나님의 계획으로 결정되었으므로 변경될수 없었다.

③그는 예루살렘에서 죽어야했다.

④모세와 엘리야는 그리스도가 수난을 받고 그후에 영광 가운데로 들어가게될 것을 알리기 위하여 이와같이 이야기했다(참조. 눅24:26,27).

⑤우리 주 예수께서는 변화하신 후에도 그의 죽음과 수난에 관해 기꺼이 이야기하셨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영화롭게 되었다하더라도 우리에게 영원한 도성은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5)본문에서 우리는 전에 없었던 일, 즉 제자들이 조는 모습을 볼수 있다(32절). 아마도 죄된 무관심이 그들로 하여금 졸게 하였을 것이다. 그리스도가 그들과 함께 기도할때 그들은 그의 기도에 개의치 않았다. 그들은 지금까지도 계속 잠자고 있었으므로 이 놀라운 사건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볼 기회를 놓쳐버렸다. 이 세사람은 그리스도가 영광중에 있을때 잠자고 있었다. 이들은 후에 그리스도가 고뇌할때에도 똑같이 잠을 잤다. 제자들에게는 그들의 주님의 영광과 고뇌보다 더 관심있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영광과 고뇌중에 그들은 깨어있지 않았다. 우리가 살아있을뿐만 아니라 생동력있게 되기위하여 소생시키는 은혜를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은 얼마나 필요한가. 얼마후 그들은 정신을 차려 모든 영광의 장면들을 정확히 볼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때 일어났던 모든 일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기록할수 있었다(벧후 1:18). 우리는 지금 그들 중 한사람이 쓴 기사를 대하고 있는 것이다.

6)본문을 보면 모세와 엘리야가 막 떠날때 베드로가 이렇게 말한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게 하소서. 이와같이 우리는 축복을 잃고나서야 그 가치를 알게된다. 그리고 축복이 떠난후에야 그것이 계속되었으면 하고 갈망하고 구한다. 베드로는 자기가 하는 말을 알지못한채 그렇게 말하였다.

7)그들은 뒤덮인 구름에 대한 설명도 덧붙여져 있다. 구름속으로 들어갈때에 저희가 무서워하더니(34절). 이 구름은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의 표시였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구름속으로 들어가기를 두려워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구름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그는 안전하게 구름속을 지나갈수 있게 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8)하늘로부터 들려온 소리에 대한 누가복음과 마가복음의 기사는 마태복음의 기사만큼 자세하지 않다.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35절). 여기에는 마태복음과 베드로서에 있는 '내 기뻐하는 자니'라는 구절이 없지만, 그것은 '택함을 받은 자니'라는 말에 포함되어 있다.

(3) 본문을 보면 제자들이 그 본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아야 한다고 되어있다. 그들은 당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말할 시기가 있는가 하면 침묵을 지켜야할때도 있는 법이다. 모든 일은 때가 있는 법이다. 모든 일은 때가차야 아름답고 쓸모있게 된다.

 

Ⅴ.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심 9:37-42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 이 기사는 그리스도의 변모와 변모후 그리스도와 제자들과의 대화에 이어서 곧바로 나온다. 그러나 본문에는 '이튿날 산에서 내려온' 다음에 있었던 일로 되어있다. 다음날이 되어서야 그들은 '산에서 내려왔으며' 그때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을 아셨다.

(1) 그리스도가 돌아오자 큰 무리가 그를 맞기위해 나아왔다. 평소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듯이 이날도 큰 무리가 그를 맞았다.

(2)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도와달라고 예수께 간청하였다.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아보아 주옵소서. 이것이 그의 요청이었다. 그리스도의 동정적인 보살핌은 모든 일을 올바르게 해놓기에 족하다. 아이의 아버지는 '이는 내 외아들이니이다'라고 호소하였다. 많은 자녀에게서 받는 위안으로 무마시킬수도 있지만, 외아들뿐일 때는 사정이 아주 다르다.

(3) 그 아이는 극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39절). 그는 '그를 잡고 있는' 귀신의 지배하에 있었다. 발작이 시작되면 그는 '졸지에 부르짖었으며' 그의 비명은 그의 온화한 아버지의 심정을 찔렀다. 이 악한 귀신은 그를 괴롭혔고 '경련을 일으켜 거품을 흘리게' 하였다. 사단은 자기가 들어간 곳에 얼마나 해를 입히는가! 반대로 그리스도와 가까이 있는 자들은 얼마나 행복한가!

(4) 제자들의 신앙은 불완전하였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더러운 영을 지배할 능력을 주었지만, 그들은 이 사악한 영을 내쫒지 못하였다(40절). 그들은 능력이 힘을 발휘할수 있다는 것을 믿지않았거니와 마땅히 해야할 기도로써 자신을 단련시키지도 않았다. 그리스도가 그들을 책망하신 것도 이 때문이었다.

(5) 그리스도가 이 아이에게 행한 치유는 매우 효과적이었다(42절).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이 할수 없는 일도 우리를 위해 하실수 있다.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셨다. 귀신은 그 아이를 산산조각이라도 낼것처럼 거꾸러뜨리고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말씀 한마디로 그 아이를 낫게 했으며, 귀신이 그에게 입힌 손상을 보상해 주었다. 예수께서는 아이를 그 아비에게 도로 주셨다. 우리 자녀가 질병에서 회복되면 그들이 우리에게 되돌아온 것으로, 그리고 죽었다가 살아난 것으로 생각하고 그들을 영접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손에서 그들을 돌려받는 것은 위안이 되는 일이다. "자 이 아이를 데려가라. 그리고 감사해라. 이 아이를 데려다가 나를 위해 양육하라. 왜냐하면 이 아이는 나에게서 받았기 때문이다". 이에 유념하여 부모들은 그리스도의 손에서 자녀들을 받아야 한다. 그런 다음 그들을 다시 그리스도의 손에 넘겨주어야 한다.

 

Ⅵ. 그리스도의 수난 예고와 제자들의 변론 9:43-50

1. 그리스도의 기적이 그것을 본 사람들에게 준 영향(43)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을 놀라니라. 그들의 놀라움은 보편적인 것이었다. 그들 각자가 모두 놀랐다. 각자가 놀란 원인은 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모든 일에 놀랐다. 그의 행하는 모든 일에는 특이하고도 놀랄만한 것이 내포되어 있었다.

2. 그리스도가 다가올 고난에 대해 제자들에게 하신 예고(43-45)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우리라. 여기에는 다른 복음기자들이 기록한 "그들은 그를 죽일 것이다"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본문에는 특이한 점이 몇가지 있다.

(1) 여기 본문의 구절은 바로앞에 있었던 사건, 즉 그리스도의 기적을 보고 사람들이 찬양한 일과 관계가 있다. 저희가 다 그 행하시는 모든 일을 기이히 여길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43절). 제자들은 그리스도가 세속적인 권위와 권세로 다스릴 현세적인 왕국에 대해 강한 기대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의 전능하신 힘으로 그 일을 쉽게 이루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그의 손에 넘기워지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질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다시 말씀하시게 되었다.

(2) 그리스도는 근엄하게 말문을 여셨다.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두라. "내가 말한 것을 받아들이고 복종하라". 시리아어와 아랍어로는 "이 말을 너희 심령에 담아두라"라고 되어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우리 머리와 심령에 담아두지 않는다면 유익이 없다.

(3) 제자들은 말할수 없이 어리석었다. 마가복음은 저희가 이 말씀을 알지못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말씀은 아주 간단한 것이었는데도 제자들은 실제적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그것을 어떤 다른 뜻으로 이해할수 없었다. 그들은 그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했는데 그것은 그들이 잘못을 깨달으려고도 또한 달콤한 꿈에서 깨어나려고도 하지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문에는 '저희가 깨닫지 못하게 숨김이 되었음이라'고 부언되어 있다. 그렇다고 우리는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예상하여 너무 슬퍼하지않도록 그 말씀이 자비로써 숨겨졌다고 생각할수는 없다. 그것은 하나의 역설이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3. 가장 큰 자가 되고자 하는 제자들을 책망하심(45-48)

이 구절은 앞에서도 나온 적이 있다. 이런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그와 같은 일을 다시 본문에서 대하게 되었다.

(1) 명예에 대한 야망, 그리고 우위에 대한 자리다툼은 걸핏하면 우리 주 예수의 제자들에게 찾아드는 죄였다. 그들은 그토록 극복해야 하며 부끄럽게 생각해야 했던 부패에 물들게 되었다(46절). 이 세상에서 크고자 하는 자들은 높은 자리를 노린다. 그러나 그들을 높여주는 것은 없다. 이러한 사실이 그들로 하여금 많은 유혹과 고통에 빠지게 한다. 그러나 작아지는 것, 가장 작아지는 것, 가장 작은 것보다 더 작아지는 것을 기뻐하는 자들은 그러한 고통과 유혹을 받지 않는다.

(2)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완전히 알고 계신다.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47절). 그에게 있어 생각은 말이고 속삭임은 큰 외침이다.

(3)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묵묵히 겸손해짐으로써 얻게될 명예를 구하고 끊임없이 치솟는 야망에 의해서 얻어질 명예는 구하지말라고 하셨다. 그리스도는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셨다(47절). 왜냐하면 그는 항상 어린아이들을 애정과 친절로 대하셨기 때문이다.

1)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이 어린아이의 품성처럼 겸손하고 조용하고 평온하라고 하셨다. 만일 그렇게 됨으로써 유익을 끼칠수만 있다면 가장 작은 자가 되기를 즐거워하라.

2) 이것이 바로 높아지는 길이라는 것을 확신케 하셨다. 그들(제자들)은 그리스도를 가장 많이 닮은 자들이므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들이라면 그의 이름으로 그들을 영접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가 사랑을 받았던 것처럼 그들도 사랑을 받게하고자 하셨다.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48절).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그들을 영접하고 환영하는 것보다 더 큰 명예가 어디 있겠는가?

4.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편협됨을 책망하심(49,50)

그리스도는 그를 존경하고 섬겼던 한사람을 실망시킨데 대해 제자들을 책망하셨다. 그 사람은 제자들의 동료는 아니었지만, 우연히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를 믿었으며, 진실한 태도로 믿고 기도하면서 그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쫒은 자였다. 제자들은 그를 비난하고 견제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그에게 기도하고 전파하는 일을 못하게 하였다. 그것은 그가 제자들과 함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았었기 때문이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행한 일을 꾸짖으셨다. 금하지 말라(50절). "오히려 그를 격려해 주라. 그도 너희와 같은 일을 하고 있느니라. 그는 똑같은 길에서 너희와 동행하고 있지는 않지만 똑같은 목적지에서 너희와 만나게될 것이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이다. 그러니 그를 격려해주어야 한다." 우리의 친구는 적고, 적은 많으므로 우리는 친구를 잃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를 충실히 따르는 자들은 비록 우리와 함께 그리스도를 따르지않는다 하더라도 그리스도께 인정받게될 것이다.

 

Ⅶ. 제자들의 그릇된 열심 9:51-56

이 본문은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것이다. 여기서 제자들은 비신자들을 죽이고 싶어한다. 이에 대해 그리스도는 그들을 책망하셨다. 왜냐하면 독단과 박해정신은 그리스도의 정신에 정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1. 예수께서 예루살렘행을 결심하심(51)

속죄와 구원을 위해 고난받을때가 되자 우리 주 예수께서는 준비하시고 결심하셨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우리 주 예수의 고난과 죽음의 때는 정해져 있었다. 예수께서도 그때를 잘 알고계셨다. 그는 모든 사람들앞에 공공연하게 자신을 드러내셨으며 자기의 때가 얼마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매우 분주하게 일하셨다. 그는 자기의 죽음과 고난이 다가왔음을 알고, 그것들을 통해 뒤따라올 영광을 바라보셨다. 그때가 되면 그는 '영광 가운데 올리우심을' 받게될 것이다(딤전 3:16). 모든 선한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에 대해 이와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며 죽음은 올리움을 받는 것이요 그리스도가 계시는 곳에서 그와 함께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다가올 기쁨을 예상하시며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셨다. 그리고 그 일을 단념하지 않으시고 즉시 예루살렘으로 가셨다. 그는 기쁨을 가지고 용기있게 그곳에 가셨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의롭다 인정받을뿐만 아니라 영광도 받을 것이며, 수치를 당하지 않을뿐만 아니라 '올리우심을 받을' 것임을 아셨으므로 실망하지도 낙담하지도 않으셨다. 이 일을 볼때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고 고통당하는 것을 꺼리는 것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2. 그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던 사마리아인들의 무례함(52,53)

(1)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예의를 지켰다. 그는 쉴곳을 정하고 자기와 제자들이 쉴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하여 사자들을 앞서 보내셨다(52절). 그는 그들이 그가 오는 것을 보고 놀라지않도록 몇사람을 보내 준비하게 하셨다.

(2) 사마리아인들은 예수께 무례하게 대했다(53절). 그들은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그들의 마을에 들어가지도 못하게 하였다. 만일 그들이 예수를 영접했다면 그는 가장 큰 축복을 베푸셨을 것이지만, 그들은 예수를 들여보내지 않았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려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유대인들과 사라미아인들 간의 논쟁은 예배장소에 관한 것이었다. 즉 예루살렘이냐 시갈 근처의 그리심산이냐 하는 문제였다(눅 4:20). 그들사이의 반목이 극심하였으므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했으며 사마리아인도 마찬가지였다(요 4:9). 사마리아인들은 특히 세상에 잘 알려진 그리스도를 환영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가 예루살렘 성전을 인정하고 그것을 지지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전의 전도여행때 그에게 보여주었던 것과 같은 예의를 베풀지않았던 것이다.

3. 이러한 모욕에 대해 야곱과 요한이 분개함(54)

이 두제자는 이 소식을 듣고 화를 냈다. 그리고 이 마을에 소돔의 저주를 내리도록 그리스도께 청했다.

(1) 여기서 제자들에게 몇가지 칭찬할만한 점이 있음을 알수 있다.

1)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능력에 대한 큰 확신을 볼수 있다. 그들은 말로써 하늘에서 물을 내려오게 할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 말을 우리가 하기를 원하신다면 그 일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2) 그들은 선생님의 명예를 위해 열심이었다. 가는 곳에서 마다 선을 베풀었고 환영을 받았던 그들의 선생에게 하찮은 사마리아인들이 마음대로 통행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보고 제자들은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들의 선생님의 선의를 따랐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일을 하려하지 않았다. "우리가 그 일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4) 그들에 앞서 간 선지자들의 예를 언급하였다. 그들은 "엘리야처럼 할까요"라고 물었다(개역한글 성경에는 이 말이 없다-역주). 그들은 이러한 전례가 오늘의 행위를 정당화시켜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우리도 훌륭한 사람들의 본보기를 잘못 적용하기가 쉽다.

(2) 그들의 말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지만, 잘못된 점이 더 많았다.

1) 우리 주 예수께서 많은 사람들에게 이처럼 모욕을 당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을 저주하지 않으시고 모욕을 끝까지 참으셨다.

2) 사마리아 사람들에게서는 더좋은 대우를 기대할수 없었다. 그들은 아마도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라'(마 10:5)고 하신 말씀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마리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더 잘알고 있었던 다른 사람보다 나쁜 것은 아니다.

3) 그 마을에서 단지 몇사람만이 그리스도에게 무례하게 대했을 것이다. 제자들은 자세히 알지못했지만, 그리스도가 그 마을에 가셨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를 만나러 나와서 그를 환영했을 것이다.

4) 그들의 선생님은 어떠한 경우에도 하늘로써 불을 좇아내리지 않았다. 야고보와 요한은 그리스도가 보아너게(우리의 아들 막 3:17)라고 불렀던 제자들이었다. 그 이름처럼 그들은 행동하게 된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들 역시 빛의 아들이 아닌가?

5) 엘리야의 예는 이 경우에 해당하지 않는다. 엘리야는 율법의 두려움을 알리도록 보내졌지만, 여기에서 선포되고 있는 것은 은혜의 법이다. 그토록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의 역사는 여기에 전혀 맞지않는다.

4. 그리스도가 야고보와 요한을 책망하심(55)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을 몹시 사랑하는만큼 꾸짖고 벌하신다. 특히 그리스도에 대해 열심히라는 미명하에 그들에게 어울리지도, 정당하지도 않은 일을 했을때 그렇게 하신다.

(1) 그리스도는 특별히 그들의 잘못을 지적해 준다. "너희는 너희에게 어떠한 영이 있는지 모른다"

1) "너희는 너희 주님에 대한 열성이라는 구실속에 감추어진 자만, 분노, 원한이 얼마나 많은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 선한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부패가 숨어있다. 아니 그것이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 자신은 그것을 알지못하고 있다.

2) "너희는 선한 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정신이 무엇인지 확실히 배워야 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하늘로부터 불이 아닌 은혜가 그들에게 내려오기를 구하라고 배우지 않았느냐? 너희는 사랑, 자유, 은혜의 법아래 있다." 그것은 땅에는 평화요 사람에게는 축복이다라는 선포속에 잘 나타나 있다.

(2) 그리스도는 그의 종교의 일반적인 뜻과 취지를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56절). '인자는 사람의 생명을 멸하러 온것이 아니요 구하러 왔노라'(개역한글 성경에는 난외에 기록되어 있음-역주). 그리스도는 그의 거룩한 종교를 불과 검으로가 아니라 사랑과 친절,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끌고 애정을 느끼게 하는 모든 방법으로 전파하고자 하였다. 또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때처럼 천벌과 파괴의 기적으로가 아니라 치유의 기적을 행함으로써 전파하고자 하셨다. 그리스도는 모든 적의를 제거하고 그것을 마음에 품지못하게 하기위해서 오셨다. 그는 사람의 영혼을 구하러 오셨을뿐만 아니라 생명도 구하러 오셨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에게 선을 베풀고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으며, 인간적인 유대나 사랑의 끈으로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하라고 가르치셨다.

5. 그리스도가 이 마을을 떠나가심(56)

그리스도는 그들의 무례함을 벌하지 않을뿐만 아니라 조용히 그리고 평화스럽게 다른 촌으로 가셨다. 즉 그다지 완고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셨다. 만일 어떤 사람이 무례히 행동한다면 우리는 복수하는 대신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그와 마찬가지로 대우받지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Ⅷ. 주님을 따르려는 세부류의 사람들 9:57-62

본문에는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세종류의 사람들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1) 한사람은 그리스도를 즉각적으로 따르고자 나서는 자이다. 그는 너무 성급한 나머지 생각도 하지않고 앞일을 내다보지도 못하는것 같다.

1)그는 그리스도에게 큰 약속을 하였다(57절). 길 가실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이것은 진실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서 볼수 있는 결심임에 틀림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어린양이 어디로 가든지 그를 따라간다.

2)그리스도는 그에게 필요한 주의를 주었다. 즉 그를 따르는 자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에게 큰 것을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자는 머리 둘곳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말을 다음과 같이 생각할수 있다.

①우리 주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주 비천한 상태로 계셨다. 그는 훌륭한 왕자들이 으레껏 가지고 있는 장식품은 물론 여우나 공중의 새에게 있는 것조차 가지고 있지 않으셨다. 그는 모든 것을 만드셨지만 자기를 위한 거처, 즉 머리 둘곳은 만들지 않으셨다. 본문에서 그는 자신을 인자, 곧 육과 피를 가진 아담의 아들로 부르고 계시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있는 곳에도 낮아지는 것을 기뻐하시며, 이로써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해 주시고 이 세상에 대한 거룩한 경멸과 저 세상에 대한 계속적인 소망을 가르쳐주신다. 그리스도는 이처럼 비천해져서 가난한 그의 백성들에게 가난을 견디기 쉽게 해주셨으며 정당화 해주셨다. 우리는 예수님이 받으신 것과 같은 대접을 받는 것에 당연히 만족해야 한다.

②이 말은 예수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심사숙고해야될 말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한다면 다른 어떤 것도 우리가 믿는 하늘나라보다 더 중시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는 이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춥고 불편하게 되며 푸대접을 받고 모욕을 당하면서 살게된다는 것을 염두해 두라고 말씀하셨다. 만약 이 일에 복종할수 없다면 그리스도를 따르려하지 말아야할 것이다. 이 말씀을 듣고 그 사람은 돌아갔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하늘나라에는 이와 반대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자는 실망하지 않는다.

(2)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결심한 또 한사람이 있다. 그는 하루만 기다려 달라고 청하였다(59절). 여기서는 그리스도가 먼저 이 사람을 부르셨다. 그리스도는 그에게 '나를 좇으라'고 하셨다. 그리스도가 부르셨던 이 사람은 처음에는 주저했으나 나중에는 복종했던것 같다. 원하는 것도 그가 아니고 행하는 것도 그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고 불러주시는 것이다.

1)그의 변명 : 나로 먼저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나에게는 집에 늙은 아버지가 있습니다. 그는 오래 살지못할 것이며 살아있는 동안 나를 필요로 합니다. 가서 아버지가 죽을때까지 보살피게 하옵소서. 그러면 무슨 일이든지 하겠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세가지 유혹을 볼수 있다.

①일반적으로 제자직을 수행할때 우리는 쉬고싶은 유혹을 받는다. 그래서 그 일을 미해결인채로 내버려두게 된다.

②우리의 의무로 알고있는 일을 연기하라는 유혹을 받게되어 그 일을 어떤 다른때로 연기한다. 우리는 그러한 어려움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신앙적인 일을 생각하게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의 시간에 속음으로써 모든 시간에 속게되는 것이다.

③우리는 우리 친척에 대한 의무때문에 그리스도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지 못할것 같이 생각하도록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과 의의 나라는 무엇보다도 먼저 구하고 염두에 두어야 한다.

2)그리스도의 대답 :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60절).

"너에겐 해야할 다른 일이 있다. 가서 하나님나라를 전파하라." 그러나 그리스도가 그를 따르는 자들이나 사역자들에게 몰인정하게 되라고 하신 것은 아니다. 기독교는 가족 하나하나에 대하여 친절하게 대하고 선을 베풀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것을 하나님에 대한 의무를 수행하지 않는데 대한 변명거리로 삼아서는 안된다. 만약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자들인 사랑하는 가족이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멀어지도록 방해한다면 차라리 아버지와 어머니를 잊을 정도로 그리스도를 향한 열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부름에 응하지않는 일은 어떠한 변명으로도 용납될수 없다.

(3) 본문에는 기꺼이 주를 따르고자 하는 또 한사람이 있다. 그러나 이 일에 대하여 친구들과 잠깐만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다.

1)그는 간청했다.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61절). 이 말을 "가서 가사를 정리하게 하소서"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여기에서 잘못된 점을 찾아보자.

①그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을 서글프고 고통스럽고 어려운 일로 생각하였다. 그 일이 그에게는 마치 죽으러가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그는 친구들에게 작별인사를 해야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를때, 그는 그들과 계속해서 함께있을 때보다 더 큰 위안과 축복을 얻을수 있을 것이다.

②그는 그리스도의 추종자로서 자기의 임무를 수행하는데 철저하려고 하기보다는 세상적인 일에 더 큰 관심을 가졌던것 같다. 그는 가족과 친척에 대해 관심이 더 많았을 것이다. 그들이 그를 주저하게 했던 것이다. 아마도 그는 작별인사를 한번 했었을 것이다. 떠나기가 싫어서 다시 한번 작별인사를 하려고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의 집에서 편하게 있었기 때문이다.

③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그리스도를 따르고자하는 그의 계획이 유혹받도록 하는데에 자진해서 뛰어들고 있다. 집에 편히있는 자들에게 가서 작별인사를 하는 것은 그의 결심을 바꾸게할 정도로 강한 유혹을 받게끔 자신을 유도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집에 있는 사람들은 그에게 자기들을 떠나지말라고 간청할 것이기 때문이다. 구세주를 따르기로 결심한 사람들은 그들을 유혹하는 것들을 가까이 하지않도록 애써야 한다.

2)그리스도는 그의 간청을 듣고 다음과 같이 책망하신다(62절).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말라. 그렇게되면 쟁기질을 잘못하여 쟁기질한 땅에 씨를 뿌리지 못하게될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나를 따르고자 하면서도 세상적인 생활을 되돌아보고 그것을 갈망한다면, 하나님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다. 만일 네가 무성의하게 쟁기질을 한다면 너는 하나님나라의 좋은 씨를 뿌리기에 적합한 땅이 되지 못한다." 쟁기질은 씨를 뿌리기위해 하는 것이다. 묵혀진 땅을 경작하는 법을 모르는 자들은 씨뿌리는 일에 적합하지 못한 자들이다. 그러한 자들은 쟁기를 잡고서도 수시로 뒤를 돌아보고 그 일을 그만둘 생각을 하게된다. 뒤를 돌아보다가는 후퇴하게 되며 후퇴는 곧 파멸이다. 얼굴을 하늘로 향하였다가 뒤돌아보는 자들은 하늘나라에 적합하지 않다. 끝까지 견디는 자만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

 

# 해설

그리스도의 사역 ( 9 )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실 일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메시야이신 예수께서 기적과 이사를 행하시고 우리를 위한 최종적인 사역을 감당하시기 위해서 자기에게 정해진 길로 걸어가십니다. 제자들에게 친밀히 말씀하시고 메시야의 놀라운 일들을 자세히 보여주십니다. 구원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길이 그의 앞에 놓여있기에 그는 그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가 하시는 일을 바라보며 우리의 삶의 방식도 정리해야할 것입니다.

 

1. 무리를 배불리 먹이심

1) 열두 제자의 파송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위임할 사역을 실천하도록 여행을 보냈습니다. 그들에게 능력과 권세를 주고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게 하기 위해서 내어보내신 것입니다. 인간적인 능력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돌보심과 인도하심에 의해서 그들은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이상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자신을 믿고 능력을 과신하고 있는 현대의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하나님의 능력과 인도하심이 우리에게 있어야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a.열두 제자(마10:1-4).

b.복음 전파(눅4:43).

2) 오천명을 먹이심

예수께서 많은 무리들이 광야에서 주리고 있을때 그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시는데,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남자가 오천명쯤 되는 무리를 먹이신 것입니다. 인간의 가장 큰 문제를 예수께서 해결하신 것입니다. 메시야로서 인간의 배고픔을 해결하시고 풍족하게 해주신 것은 그의 나라에서 누릴 것을 미리 맛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의 나라를 바라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모든 것을 해결하시고 풍족히 베풀어주신다는 것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드리고도 마음이 편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예수의 약속과 인도하심 때문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채워주십니다.

a.하나님의 은혜(행14:17).

b.선한 열매(약3:17).

3) 베드로의 고백

예수에 대한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의 칭찬을 듣게 됩니다. 예수에 대한 제자들의 고백은 이제 예수께서 어떠한 길을 걸어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밝히는 계기가 됩니다. 메시야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을 교정하시고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길을 걸어가시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우리를 구원하실 구주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였고 예수는 그대로 수용하셨습니다. 참 신앙의 고백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a.주를 섬김(롬12:11).

b.사명 완수(눅12:50).

 

2. 수난 예고

1) 첫번째 수난 예고

예수께서 자신이 당할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길은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 길은 예수와 함께 걸어가야 하는 길입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먼저 그 길을 걸어가시고 우리에게 따라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모든 것을 잃는 길 같지만 예수와 함께 걸어가는 그 길이 생명과 영광의 길입니다. 이 길은 찾는 이가 적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위한 성도들의 발걸음은 그리스도를 향한 것이어야 합니다. 오직 그곳에만 생명이 있고 영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수난을 무서워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따라가야 합니다.

a. 예언(벧전1:11).

b.영광에 이르는 길(히2:9-10).

2) 영광스러운 변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늘나라의 영광스러움을 잠시 보여준 것은 제자들에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영광에 대한 보장이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임을 알리시는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광채는 제자들에게 황홀한 경험이 되었습니다. 인간들의 생각과 경험으로는 알수 없는 경험을 하고서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예수의 말씀에 대한 확실함입니다. 이것을 보고도 믿지않는 자들은 그들의 보응을 받게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일을 인도하실뿐 아니라 그를 영화롭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는 바라볼 뿐입니다.

a.사람에게 나타내심(요2:11).

b.영원한 것임(히13:21).

3)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심

제자들이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하고 당황하고 있을때 예수께서 그 아이를 고치시고 제자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다시 알리셨습니다. 메시야로서 세상의 모든 권세를 이기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위에 이루시기 위해서 감당하시는 사역을 알리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기신 권세를 물려받은 사람들이 그 일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을 보시고 마음 아파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권세와 능력을 주셨는데 우리가 이것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있다면 이 또한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하는 것입니다.

a.하나님의 뜻을 행하심(요6:39).

b.생명을 주심(요10:10).

 

3. 예수를 따르려면

1) 두번째 수난 예고

예수께서 자신이 당할 일에 대해서 두번째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대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고난을 당하고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모든 일을 해결하신다는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모습이 먼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십자가의 일이 먼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일을 묻기도 두려워하였습니다. 우리는 고난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예고하시는 예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않는 것입니다.

a.고난에 동참함(빌3:10).

b.신자들에게 위로가 됨(고후1:5-6).

2) 누가 제일 큰 자인가

제자들에게 관심이 되는 것은 예수께서 이루실 나라에서 누가 제일 큰 자로서 권세와 능력을 행사하는지에 있었습니다. 이는 사람들의 어리석은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그들의 관심과 다르기때문에 그들은 다른 일에 열성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가장 작은 이가 가장 큰 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자신을 내어주시고 철저히 낮아지셨는데 그를 따르는 자들이 높아지려고 한다면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를 본받는 자들은 예수를 따라서 철저히 낮아져야 합니다.

a.신자들의 행동 규범(롬12:16).

b.그리스도의 모범(요13:4-5).

3) 예수를 좇으라

인간의 모든 일이 허무한 것이지만 예수를 따르는 길은 복되고 가치있는 일입니다. 그 길에는 영원한 생명이 있으며 영광이 있고 기쁨과 희락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길을 걷기위해서는 그가 제시하신 방법대로 살아가야 하는데, 예수께서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예수만 바라보고 그를 향해서 힘차게 달려가라고 하십니다. 이러한 초대에 응하는 사람에게 그의 구원의 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합당한 자에게 합당한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a.그리스도를 본받음(빌3:10).

b.복된 특권(행5:41).

 

결론

예수께서는 자신이 가실 길을 걸어가시면서 제자들에게 따라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초대는 지금 우리에게도 임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자신의 방법대로 살아가면서 예수의 인정을 받기를 원한다는 것은 있을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를 따라서 그와 함께 동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가 이루시는 일을 바라는 전적인 의뢰만이 그를 기쁘시게 합니다.

 

# 핵심

9:1-9

지금까지 혼자 사역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훈련시키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나라를 확장하기 위해 전도하러 보내셨다. 그 결과 분봉왕 헤롯도 듣고서 당황할 정도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쟁기질(9:62)

쟁기는 주로 소에 매어 논밭을 가는데 사용한다. 따라서 쟁기질하는 사람은 한손으로 쟁기를 잡고, 또 한손으로는 소를 부린다. 이때 앞을 보면서 똑바로 나가야지 자꾸 뒤를 돌아보면 밭고랑을 곧게 팔수 없다. 예수님은 이런 사실에 착안하여 누구든지 세상 것에 집착하는한 주의 일에 힘쓰기 어렵다는 교훈을 베푸셨다.

 

# 묵상

열두 제자 파송 ( 9:1, 2 )

갈릴리 사역을 위하여 주님은 제자들을 짝지어 파송하셨습니다. 교회는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가 있는데, 여기서는 흩어지는 교회로써의 파송인 것입니다. 주님은 먼저 열두 제자를 불러모으시고, 능력과 권세를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나라를 전파하고 병든 자를 고치게 하셨습니다. 이와같이 교회가 모이면 주님의 능력과 권세로 무장하고, 세상에 나가면 구원사역에 힘써야 합니다.

따라오는 무리들을 향한 예수님의 행동 ( 9:11-17 )

그들을 친히 영접하셨고 하나님나라의 일을 이야기해 주셨으며 병자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주님은 세상의 처세술이 아닌 하나님나라의 윤리를 가르치심으로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배우고 따를수 있는 지혜를 주셨습니다. 특히 오천명을 먹이실때는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모든 사람을 먹이는 놀라운 이적을 베푸셨습니다. 이 이적에 쓰인 오병이어는 한 어린아이가 가져온 도시락이었습니다(요6:9). 이와같이 주님의 놀라운 역사에는 우리의 작지만 정성어린 헌신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헌신이 있을때 오천명이 먹은 증산(增産)의 이적과 모두 골고루 배불리 먹은 분배(分配)의 이적이 일어납니다. 오늘날 증산의 이적은 많이 일어나지만 분배의 이적이 일어나지 않아 사회와 교회가 주름잡혀 있습니다. 교회는 분배의 이적에도 관심을 기울여 모두가 배불리 먹고도 남는 풍요한 역사를 이루어야할 것입니다.

신앙의 성숙단계 ( 9:18-27 )

구원 얻은 후의 신앙의 성숙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을 인간으로 아는 단계로써(18-19), 이는 신앙을 갖기 이전 단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단계(20-21)요, 더나아가서는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는 단계입니다.

변화산에서의 예수님 ( 9:28-31 )

변화산에서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의논을 하셨습니다.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고 엘리야는 선지자들을 대표합니다. 즉 예수님의 사역은 율법과 선지자의 예언에 부합되며 이를 완성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 내용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죽으시리라는 것입니다. 본문에 언급된 별세(엑소더스)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시킨 출애굽을 의미하며 죄악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말합니다. 따라서 성도의 죽음은 영원한 죽음이 아닌 영원한 생명의 삶을 의미합니다.

변화산에서의 베드로의 제안 ( 9:33 )

베드로는 주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 초막 셋을 짓자고 했습니다. 그는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용모가 변화되는 것을 보고는 그 영광스런 모습에 사로잡혀 산을 내려가야 한다는 현실을 망각했던 것입니다. 신앙은 현실도피의 수단이 아닙니다. 신앙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지도 않지만, 현실을 바로 직시하고 현실과 함께 미래에 대한 확실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무력함 ( 9:37-40 )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내려왔을때 제자들은 귀신들린 아이를 고쳐주지 못하는 무력함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귀신을 제어하는 능력을 주셨으나(1절) 제자들은 믿음이 없어 귀신들린 아이하나 치유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영광스런 일만 추구하고 마땅히 해야할 섬기는 일을 등한시한 결과였습니다.

수난 예고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 ( 9:44, 45 )

예수님께서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져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말씀을 듣고,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은 묻기마저 두려워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깨닫지못한 까닭은 그런 상황이 오는것 자체를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큰 자 ( 9:46-48 )

제자들 사이에 ‘누가 크냐’하는 변론이 일어났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마음속에 교만과 자만심이 자리잡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모든 죄악 중에 교만처럼 물리치기 어려운 것은 없습니다. 때문에 자신에 대해 철저하게 냉정해질때만이 교만을 물리칠수 있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16:18) 예수님은 가장 작은 이가 큰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에서의 가치관과 질서는 세상의 것과 다릅니다. 세상의 우두머리는 만민위에 군림하지만, 천국에서는 모든 사람을 섬기는 자가 큰 자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 ( 9:57-62 )

예수님을 좇겠다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곳이 없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좇는 일은 일순간의 감정으로 덤빌 낭만적인 일이 아닌 고난의 가시밭길입니다. 이를 알지못하고 쉽게 덤벼들었다가는 좌절과 포기에 직면하기 쉽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가족을 돌보는 의무를 무시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자가 취해야할 마음가짐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부름을 받고 즉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5:11).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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