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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불의한 청지기 16:1-18

그리스도의 말씀과 기독교의 목적이 하나님의 비밀을 아는 것으로 우리의 귀를 즐겁게하거나 하니님의 은혜를 아는 것으로 즐거워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오해이다. 복음안에서 이 양자를 밝히신 하나님의 계시의 의도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가지고 있거나 할수 있는 어떤것을 필요로하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의무, 즉 자선을 베풀고 선행을 하는 일에 참여시키고 고무시키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수많은 은혜의 청지기일 뿐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가지고 있는 것을 어떻게 선하게 이용할까 하는 방법을 생각하는 것은 지혜있는 태도이다. 만일 우리가 지혜롭게 행동하고자 한다면 세상적인 사람들이 가장 순간적인 이익을 위하여 모든 재산을 투자하는 것처럼 우리의 미래와 영원한 복지를 도모하기위하여 경건과 자선의 일에 부지런하고 열심히 우리의 재산을 사용할수 있어야 한다.

1. 청지기의 비유(1-8)

이 비유 자체에서 모든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거의 청지기로서 표현되고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그 재산은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는 단지 그것을 사용할 권한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1) 청지기의 불성실 : 본문에 나오는 청지기는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 것으로 인하여 그의 주인에게 고소당하였다(1절). 우리는 모두 동일한 고소를 면할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셔서 이 세상에서 마땅히 해야할 진보를 우리는 하지 않았다. 이것때문에 우리 주님의 심판을 받지않기 위하여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판단하는데 힘써야 한다.

(2) 청지기직의 박탈 : 그의 주인은 청지기를 불러서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라고 말하였다(2절). 주인은 청지기에게 실망하게 되어 유감인 것을 말한다. 그 사실은 주인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다. 그러나 청지기는 그것을 부인할수 없었고 해결책이 없었으므로, 책임을 지고 잠시후 물러나게 되었다(2절).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1)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서 얼마후에 청지기직으로부터 벗어날 것이다. 죽음이 찾아와 우리를 청지기직에서 쫓아내고 다른 사람이 우리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2) 죽을때에 우리가 청지기직에서 박탈당하는 것은 틀림없으며, 또한 그것이 당연한 이유는 우리가 주님의 재산을 낭비하였기 때문이다.

3) 우리가 청지기직을 벗게될 그날에 우리 주님께 그것에 대해 보고드려야 한다.

(3) 그후 갖게된 지혜 : 그러자 그는 '내가 무엇을 할꼬'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3절). 그는 벌써부터 이점을 생각했어야 옳았을 것이다. 그러나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보다는 늦게라도 생각하는 것이 훨씬 다행한 일이다. 그는 살아야만 한다. 그런데 어떻게 생계를 꾸려나갈 것인가?

1) 그는 노동으로 생계를 구한다는데 대해서는 자기에게 그럴만한 근면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그러나 땅을 파지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사실은 그의 게으름이다. 그가 할수 없다는 것은 할뜻이 없다는 말이다. 그가 땅을 팔 힘이 없다는 것은 육체적인 능력부족이 아니라 도덕적인 무능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한번도 땅을 파본적이 없었기때문에 땅을 팔수 없었던 것이다.

2) 그가 구걸하여 생계를 구한다는데 대해서 그럴만한 겸손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이 말은 그가 앞에서 자신의 게으름을 보여준 것처럼 교만에서 나온 말이다. 이 청지기는 구걸에서 얻게될 수치보다 자기 주인을 속임으로 말미암은 수치가 더 큰 이유이었다.

3) 따라서 그는 자기 주인의 채무자들을 친구로 삼기로 결심한다.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4절). 내가 내 주인의 채무자들을 알고있고, 여러번 친하게 대해 왔었다. '이제 한번더 도움을 베풀어 그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반길수 있도록 하자. 내가 혼자서 살아나갈수 있을때까지 그들에게 숙소를 정하고 이집저집 옮겨다니며 신세질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자기 주인에게 기름 백말을 빚진 자를 불러다가 이렇게 말하였다.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6절). 이와같이 해서 그는 그 빚을 반으로 탕감하였다. "우리가 발각되거나 의심받지 않도록 빨리 앉아 고쳐써라." 그는 자기 주인에게 밀 백석을 빚진 다른 사람을 불러 그에게 십으로 고쳐쓰라고 했다(7절). 본문에서 우리의 세속적인 재산이 얼마나 불확실한가를 보라. 재물을 가장 많이 가진 사람들에게 가장 그러하다. 그들은 그 재산에 관한 모든 책임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긴다. 그리하여 맡은 이들에게 주인인 자기도 속일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다. 또한 신뢰하던 사람들 가운데서도 어떻게 배반당하는가를 보라. 이 청지기는 부정거래한 것이 판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여전히 그렇게 하고 있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때문에 벌을 받지만 그 잘못을 고치는 일은 드물다.

(4) 청지기의 각성에 대한 주인의 칭찬 : 주인이 옳지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8절). 그의 주인, 즉 그 종의 주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종이 자신을 위하여 기발한 생각과 계책을 세운 것을 마음에 들어했다고 볼수 있다. 그러나 이 말씀을 그렇게 이해한다고 할때, 이 구절의 후반부는 우리 주님의 말씀이라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이 비유 전체가 주님이 의도하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수께서는 청지기가 자기 주인을 속였기때문에 칭찬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하여 지혜롭게 했기 때문에 칭찬한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여기에서 그는 자기 주인을 위하여서도 잘하였고, 채무자들과는 바른 관계를 맺은 것으로 보여진다. 그가 채무자들에게 빡빡한 거래를 했었으므로 저들은 빚을 갚을수 없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떠나는 마당에서 그는 이제 공정과 자비를 모두 행해야할 의무가 있는 것처럼 행하였다. 그는 이제까지 자기 주인을 위해서만 일하였다. 그러나 이제 자기 주인의 신을 잃어버리자 채무자들의 호의를 얻기위하여 그들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이 세상에서의 편안한 생존을 위해 행하는 이 청지기의 선견지명을 생각할때, 내세를 위해 우리는 지각이 없다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즉 빛의 아들들이 그들의 영혼과 영원에 대해 관심을 갖고있는 곳보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 세상적인 이익에 관심을 가지는데 있어 더 지혜롭다는 것이다.

1) 이 세상의 일에 관한 세속적인 사람들의 지혜를 우리는 우리 영혼의 일을 할때 배울 필요가 있다. 가장 필요한 우선적인 일은 그들에게 주어진 기회를 포착하여 이용한다는 원리이다. 이와같이 우리가 영적인 일에 지혜롭기만 한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2) 이 세상의 자녀들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빛의 자녀들보다 뛰어나다. 그것은 이 세상의 자녀들이 참으로 지혜롭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시대에 있어서만'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리의 청지기의 임기가 얼마남지 않았다는 예고를 들으면서도 장래를 위하여 예비하지 못한다면 예고를 듣고 준비할줄 아는 그들이 우리보다 더 현명하다고 할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여기서 살 것처럼, 그리고 이후에는 다른 세계가 없는 것처럼 살고있다. 빛의 자녀로서 우리앞에 있는 다른 세계를 보지않을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위해 준비하거나 최선의 결과를 이루기위해 노력하지 아니하며, 또한 그 다른 세계에 최선의 애정을 쏟지도 아니한다. 그리고 당연한 것처럼 생각한다.

2. 비유의 적용과 결론(9-1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즉 "제자들에게 이르시되"(1절). 이 비유의 직접적인 대상은 제자들이었다. 즉 이 말은 "이 세상에 비록 얼마밖에 가진 것이 없다할지라도 그 적은 것으로 어떻게 선하게 사용할 것인지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다음을 살펴보자.

(1) 우리 주 예수께서 여기서 권면하시는 것은 '불의의 제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것이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현재뿐만 아니라 이후에 자기 돈의 이익을 배당받을수 있도록 돈을 관리하는 지혜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이 세상에서 이후에 더나은 유익을 얻을 목적으로 소망을 갖고 그들의 자본을 투자하듯이 우리도 다른 세상에서 장차 그 유익을 얻을수 있도록 하기위해서 우리의 돈을 이용하는 법을 그들에게서 배워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경우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우리 주의 재산이지만, 우리 주의 채무자들에게 그들의 유익을 위하여 그 재산을 사용한다면, 우리 주님께 손해를 끼치기는커녕 그것은 우리 자신의 삶의 방편이자 주님께 대한 의무를 행한 것이 될 것이다.

1) 이 세상의 것들은 불의의 재물 또는 일시적인 재물이다. 부란 사라져가는 것이므로 그것에 기대를 거는 자들을 실망시킬 것이다.

2) 비록 이 불의의 재물이 행복을 위하여 맡겨진 것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의 행복을 추구해 나가는데 도움이 될수 있을 것이며, 또한 마땅히 그래야 한다. 무리가 그 재물에서 진정한 만족을 발견할수는 없다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으로 친구를 얻을수 있을 것이다.

3) 우리는 임종할때 모든 것을 잃게될 것이 틀림없다. 죽음은 우리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가버린다. 상인이 파산에 이르게 될때 마지막이라는 말을 듣는다. 이와같이 우리는 조만간 모든 것을 잃게될 것이 틀림없다. 즉 죽음은 상점을 폐쇄시키고 재산을 몰수해 버릴 것이다.

4) 우리가 쇠약하여 죽게될때 하늘에 있는 영원한 거처로 영접될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우리의 중요한 관심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자기 사람들의 처소를 예비하기 위하여 먼저 가셔서 그들을 영접할 준비를 하고 계신다. 디모데전서 6:17-19절을 보라. 이 사실을 설명해 주고있다.

(2) 그는 여러 말씀으로 이 권고를 더욱 강조하신다.

1)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의 선물을 옳게 사용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의 선물을 그에게서 기대할수 있겠는가? 그 섭리의 선물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우리가 불성실할 경우에 우리는 우리를 영광으로 이끄는데 필요한 은혜를 상실한 자로 정확히 평가될 것이다(10-14절). 이 세상의 부는 보다 적은 반면에, 은혜와 영광은 더욱 크다. 만일 우리가 적은 것에 불성실하다면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에 있어서도 불성실할 것이라고 당연히 두려워해야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받지못할 것이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10절). 자기 돈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며 선을 행하는 자는 더욱 고상하고 가치있는 지혜와 자비의 재능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선을 행할 것이나 이 세상의 부 한달란트를 묻어두는 사람은 영적인 부 다섯달란트를 절대로 이용하지 못할 것이다. 이 세상의 부는 불의의 재물이다. 그것은 우리에게서 빨리 사라진다. 만일 우리가 그 재물을 이용하려한다면 서둘러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그러하지 않는다면 유일한 참 재산인 영적인 부를 어떻게 위탁받기를 기대할수 있겠는가?(11절). 진실로 부유한 사람이란 믿음안에서 그리고 하나님을 향하여 부유한 사람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향해 부유한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 확신을 갖자. 만일 다른 부가 우리에게 추가되어 진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잘 사용함으로써 진정한 부를 더 확고히 잡을수 있을 것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더 큰 영적인 은혜를 받을 자격을 얻게될 것이다.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진정한 부를 주신다. 이 세상의 부는 다른 사람의 것이다. 그것들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다. 그것들은 다른 사람의 것인데, 다른 사람에게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위하여 그것들을 사용하여야 하며, 곧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어야 한다. 그러나 영적인 영원한 부는 우리에게서 절대로 떨어질 수 없는 유익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의 약속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삼고, 하늘나라를 우리 자신의 것으로 소유한다면 우리는 참으로 우리 자신의 것이라 부를수 있는 것들을 갖게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재물을 맡은 청지기로서 그것을 가지고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이것들로 우리를 부요케하실 것을 어떻게 기대할수 있을 것인가?

2)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의 종인 것을 증명하는 길은 우리에게 유용한 세상적인 우리의 모든 소유를 그를 섬기는 일에 드릴 정도로 철저하게 우리 자신을 포기하는 길밖에 없다(13절). 집 하인이 두주인을 섬길수 없나니. 만일 어떤 사람이 세상을 사랑하여 그것에 집착하게 되면 그는 하나님을 미워하게 되고 경멸하지 않을수 없게 된다. 그러나 반대로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와 연합하게 되면 그만큼 더 세상을 미워하고, 세상의 재물을 하나님의 봉사하는 일과 그의 구원을 이루는 일에 이용할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우리앞에 분명해진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수 없느니라. 그들의 관심이 나누어지므로 그들은 절대로 혼합하여 섬길수 없는 것이다.

(3) 그리스도의 이 말씀이 바리새인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는가를 살펴보자.

1)바리새인들은 사악하게 그의 말을 비웃었다(14절).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부정할수 없었지만 비웃었다. 이것이 그들의 죄이며, 탐욕의 결과라는 것을 기억하자.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주로 범하는 죄이었다. 종교의 위대한 스승들이나 헌신적으로 많은 실천을 한 사람들 중에 대부분이 세상을 사랑한것 때문에 멸망하였다. 이 탐욕적인 바리새인들은 그들이 사랑하는 욕망, 그들의 '들릴라', 즉 그들이 갖고싶어 하는 욕망을 참을수 없었다. 이것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으며, 코웃음쳤던 것이다. 그것은 생각할수 있는 극도의 경멸과 모멸의 표현이다. 그들은 예수의 말씀이 세상의 견해와 방법에 반대가 되기때문에 비웃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않기로 결심한 사람들이 그것을 경멸하는 것은 예사이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죄인들의 반대뿐만 아니라 그들의 조롱까지도 참으셨다. 그는 보통 사람처럼 말하지 않았으므로 야유를 받고 조롱을 받으셨다. 이 사실로 충성스러운 주의 사역자들은 그들의 설교가 부당하게 경멸당하는 것에 낙담할 필요는 없다. 비웃음을 사는 것은 어떤 사람에게 있어선 수치가 아니라 비웃음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2)예수께서는 그들이 경건의 모양과 냄새로써 그들 자신을 속이기 때문에 그들을 단호히 꾸짖으셨다(15절).

①가장한 외모

첫째, 그들은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옳다고 여겼다. 그들은 그들이 책임져야할 어떤 잘못도 부인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특별히 고결하고 경건한 사람으로 인정받기를 원하였다. "너희는 사람들의 인기를 얻는 것을 과제로 삼는 자들이며, 세상에 자신을 의로운 것처럼 드러내려 한다. 너희는 이런 일로 유명하다."

둘째, 그들은 사람들 중에 높임을 받는 자들이었다. 사람들이 그들을 특별 취급하여 죄를 정하지 않았을뿐만 아니라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며, 선한 사람으로서만이 아니라 가장 훌륭한 사람으로 추대하였다.

②추악한 내면 : 그것이 하나님이 보실때의 모습이다.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사람들앞에 스스로 옳다하는 것과 우리의 악한 것을 사람들이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는 것이 마지막날에 우리에게 충분히 증거가 되리라고 생각하는 것도 어리석은 짓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은 아무도 알수 없는 우리의 악한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중심을 아신다는 사실을 숙지할때 자기를 높이려는 마음을 억제하게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신속에 비천한 인격과 불신할 수밖에 없는 것들을 가지고있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물을 사람들의 평가에 의해서 판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또한 사람들의 세속적인 평가에 부응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왜냐하면 어떤 것이 사람들 사이에 귀히 여김받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미워하시는 것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있는그대로 보신다. 사람들이 멸시하고 정죄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오히려 옳다 인정하고 칭찬하시는 경우도 있다(고후 10:18).

3)예수께서는 이 욕심많고 자만에 가득찬 바리새인들보다 복음에 의해 훨씬더 감화받을수 있을 세리와 죄인들에게로 향하신다(16절).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구원이 유대인의 것이었을때의 유대 조직과는 달리 오직 개개인을 중히 여기고 있다. 그러므로 이 사실에 확신을 갖고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그르치지 않도록 구원을 얻어 그 왕국에 들어갈수 있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부를 경멸한 것으로 인하여 그를 조롱하였다. 이는 그들의 생각에 율법과 선지자에게 있었던 부에 대한 많은 약속과 다른 현세적인 재물들에 대한 약속이 없었던 때문일까? "그것은 사실이다"라고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셨다. "과거 율법과 선지자의 때는 그러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전파되기 시작한 이제부터는 가난한 자, 슬퍼하는 자, 그리고 박해받는 자가 복이 있다. 복음이 전파된 이상 눈이 열린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침노한다." 하늘나라로 가려는 자들은 고통을 받아야하며, 세상과 거스려 싸워야하며, 정반대의 길로 가는 무리들을 밀어내야만 한다.

4)그러나 예수께서는 율법을 무효로 만들려는 어떠한 기도에 대해서는 반대하신다(17절). 율법의 한획이 떨어짐보다 천지의 없어짐이 쉬우리라. 도덕적인 법은 확정되고 재가되어진 것이다. 이 율법이 명하는 의무는 여전히 지켜야할 본분이다. 그것이 금하는 죄는 여전히 죄로써 존재한다. 의식적인 법은 복음에서 완전하여지며, 그 그림자는 복음의 색깔로 칠해진다. 율법의 일획도 어겨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복음에서 인화되어 나오기 때문이다. 율법은 더 큰 부정을 막기위하여 묵인한 몇가지 사항들이 있었다. 복음은 그러한 허용을 남겨두지 않고 오히려 마태복음 5:32, 19:9절에서 이미 상고한바 있는 이혼의 사례에서처럼(18절), 율법을 거스리거나 경멸하지 않는다. 예수의 복음은 인간의 부패한 탐욕과 정열의 지독한 그 근원을 쳐서, 그것들을 죽이며 뽑아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욕망에 빠지면 빠질수록 더욱 격렬해지고 완고해지기 때문에 그들이 탐욕에 빠질 정도로 허용했던 것처럼 해서는 안된다.

 

Ⅱ. 부자와 나사로 16:19-31

탕자의 비유가 우리앞에 복음의 은혜로 보여주려고 하였다면 이 비유는 우리에게 장차올 진노를 나타내어 우리를 일깨우고자 의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로 가난과 고난을 감내하게 하고, 세상과 호색에 빠질 유혹에 대항하여 우리를 무장시키고자하는 두가지 목적이 있다. 지금 이 비유는 이 두가지 큰 목적은 매우 잘 달성하고 있다. 이 비유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나 겨자씨 비유에서 처럼 영적인 일을 세상적인 사물에서 빌어와 그 유사성을 설명하는 그리스도의 다른 비유들과는 같지않다. 그러나 본문의 영적인 일 그 자체는 현세와 내세에 있어서 선악의 다른 상태에 대한 서술이나 묘사가운데 나타나고 있다. 가난하고 경건한 사람은 불행에서 벗어나 죽어서 하늘의 행복과 기쁨을 누린다. 호화롭게 살면서도 가난한 자에게 냉혹과 부유한 향락주의자들은 죽어 견디기 어려운 고통의 상태로 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사실상 언제나 진리인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비유인가? 그러면 여기에 있는 비유의 내용은 무엇인가? 우리 구세주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내세를 알게하기 위해서 오셨는데, 그는 본문에서 그 일을 하고 계신다.

1. 서로 다른 두신분(19-21)

이 세상에는 악한 부자와 경건한 빈자라는 서로 다른 두신분이 있다. 옛날 유대인들은 번영하는 것은 선한 사람이라는 표시가운데 하나라고 여길정도 이었으므로, 가난한 자에게 어떤 호의를 베푸는 일은 거의 있을수 없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본문에 충분히 묘사되어 있는 것처럼 모든 경우에 있어서 이러한 잘못을 시정해 주시고자 노력하신다.

(1) 악한 인간, 즉 행복의 절정에서 영원히 불행에 있을 사람(19절) : 한 부자가 있어. 라틴어에서는 흔히 어떤 부자라고 부른다. 그러나 부자는 가난한 자의 이름이 주어진 것처럼 나타나있지 않다. 이제 이 부자에 대하여 살펴보자.

1)그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었는데, 그것이 그가 다닐때의 행장이었다. 그는 쾌락을 위하여 고운 베옷을 입었으며, 매일 세탁하였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또한 밤에 입는 옷과 낮에 입는 옷이 있었으며, 신분을 나타내는 자색 옷이 있었다. 그는 밖에 나갈때는 반드시 매우 화려하게 차려입었다.

2)그는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였다'. 그의 식탁에는 자연과 인력이 제공할수 있는 각종 진귀한 음식들로 가득 차려졌으며, 보조 식탁에는 요리 접시로 가득 쌓여있고, 비싼 정복을 입은 종들은 식탁에서 시중을 들었다. 그리고 식탁에는 손님을 초대하였는데, 그는 그것이 그 자리를 빛내리라고 생각하였던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이 모든 것에 무슨 악한 것이 있는가? 비록 어떤 사람이 재산이 넉넉하여 부유하고,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으며, 또한 풍성한 식탁을 먹게 된다고해도 아무런 죄가 아니다. 또한 그는 자기 재산을 사기, 압제, 또는 착취로 모았다는 말도 없다. 그리고 그가 술취했다거나 다른 사람을 술취하게 했다는 말도 없다.

①그리스도께서는 이 말씀을 하심으로 사람이 많은 부를 누릴수 있으나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아래 영원히 놓여 멸망할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내시려고 했을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잘사는 형편을 통해 하나님께서 물질을 주시는 것만큼 그들을 사랑하시는 것인지, 아니면 그들에게 하나님이 물질을 주시므로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지 추리할수 없다.

②풍요와 쾌락은 매우 위험스럽다. 차라리 이 사람은 많은 재산과 즐거움이 없었더라면 행복하였을 것이다.

③육체의 방종, 그리고 육체의 안락과 쾌락은 많은 사람을 파멸시킨다. 좋은 고기를 먹고 좋은 의복을 입는 것이 좋은 것이긴 하다. 그러나 그것들은 종종 교만과 사치의 재료와 연료가 되어 우리에게 죄를 범하게 한다.

④우리 자신과 친구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면서 동시에 가난한 자의 슬픔과 고통을 잊어버린다면 하나님께 매우 진노를 살 것이며, 그 영혼에게 저주가 될 것이다.

(2) 여기에 불행과 고난 가운데서도 경건한 한사람이 있다(20절). 나사로라 이름한 한거지가. 이 가난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있을수 있는 한에 있어서는 최악의 궁지에 몰려있었다.

1)그의 몸은 욥처럼 '헌데' 투성이었다. 몸이 병들고 쇠약한 것도 큰 고통이지만 헌데는 환자에게 훨씬더 큰 고통을 주며, 그의 주위 사람들에게 훨씬더 혐오감을 준다.

2) 그는 먹고 살기위해 구걸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스스로 나다닐수 없을 정도로 헌데 투성이요 절름발이였지만 몇몇 동정어린 손길과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아서 부자의 문간에 놓여졌다. 돈으로 가난한 자들을 도울수 없는 자들은 수고로 그들을 도와야 한다. 돈 한푼을 그들에게 빌려줄수 없는 자들은 수고로 그들을 도와야 한다. 돈 한푼을 그들에게 빌려줄수 없는 자들은 한손이라도 빌려주어야 한다. 고난중에 처한 나사로는 스스로 생계를 이어갈만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①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에 기대를 걸었다.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21절). 그는 마땅히 부자의 식탁에서 한 그릇의 음식이라도 대접받을수 있었으나 그것을 바라지 않았다. 다만 그는 그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아니 부자의 개가 먹고 남긴 것들일지라도 고마워했던 것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설명한다.

첫째, 가난한 나사로의 곤경과 성품이 어떠한가를 보여준다. 그는 가난하였지만 마음이 가난하였다. 그는 안빈낙도하는 자였다. 그는 불평하고 울부짖으면서 부자의 문에 누워있었던 것이 아니라 조용히 그리고 온순하게 부스러기로 배불리려 하였다. 본문에서 진노의 자녀이며 지옥의 상속자 된 자는 집안에 앉아서 호화로이 지내고 있다. 반면에 사랑의 자녀이며 천국의 상속자 된 자는 문가에 누어서 굶주림때문에 죽어가고 있다. 사람들의 영적인 상태가 그때의 외적인 조건에 의해서 판단되어질수 있을까?

둘째, 나사로에 대한 부자의 태도가 어떠했는가를 보여준다. 우리는 부자가 나사로를 학대하였다는 소리를 듣지는 못했지만 본문에서 그를 무시하였다는 것을 알수 있다. 본문은 그가 참으로 자비를 베풀어야할 대상이며, 매우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 자체로 말해주고 있었다. 사소한 일이라도 나사로에게는 큰 친절이 될수 있었으나 그는 나사로에게 아무런 관심도 두지않았고 거기에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가난한 자를 압제하거나 유린하지 않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가난한 자들을 돕고 위로하지 않는다면 우리 주님의 소유에 대하여 불충실한 청지기로 밝혀질 것이다. 가장 무서운 운명에 놓이게 되는 이유는 '내가 주릴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라는 사실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고 믿는다고 말하는 부자들이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궁핍과 불행에 어떻게 그렇게 무관심할수 있을까 놀라운 일이다.

②그가 개로부터 받은 대우 :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21절). 그 부자는 한떼의 사냥개, 아니면 다른 종류의 개들을 기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 개들은 충분히 배부르도록 먹을수 있었다. 그때 가난한 나사로는 연명할수 있을만큼도 먹을수 없었다. 그들의 개는 먹이고 가난한 자는 소홀히 한 사람들은 내세에 답변해야할 것이 많을 것이다. 그들의 개와 말을 배불리 먹이면서 가난한 이웃 가족들을 굶주리게 하는 자들은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인륜을 모욕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개들이 와서 불쌍한 나사로의 헌데를 핥았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이해할수 있다.

첫째, 그의 불행을 악화시킨 것으로 이해할수 있다. 그의 헌데는 피투성이였다. 그것이 개로 하여금 그 헌데를 핥도록 유혹했다. 그 개들은 주인처럼 인간의 피덩이를 즐겨 먹으면서 호화롭게 먹은 것으로 생각했다.

또한, 둘째로 얼마는 그의 불행에 대해서 그를 위로해 준 것으로 이해할수 있다. 주인은 그에게 냉담하였지만 개들은 와서 그의 헌데를 핥았다. 그것은 그의 상처를 아물게 하고 고통을 덜어주었다. 개들은 그 주인보다 훨씬 그에게 친절하였다.

2. 서로 다른 두상태(22-23)

죽음에 임해서와 그후의 생에 있어서 이 경건한 빈자와 악한 부자의 서로 다른 상태를 살펴보자.

(1) 그들은 모두 죽었다(22절). 그 거지가 죽어…부자도 죽어. 부자와 가난한 자, 경건한 자와 불경건한 자에게 죽음은 공통의 운명이다. 거기서 그들은 함께 만난다. 성도들은 죽어서 그들의 슬픔이 끝나게 되고 기쁨에 들어갈 것이다. 죄인들은 죽어서 그들의 책임에 대해 답변하러 갈 것이다. 죽음을 준비하는 일은 부자와 가난한 자 모두에게 관계된 것이다. 이는 그것이 그들 모두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2) 거지가 먼저 죽었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는 여전히 번창하게 내버려두시면서 경건한 자를 세상에서 데려가실 때가 종종 있다. 그는 다른 아무 피난처나 쉴곳을 찾을수 없었기때문에 무덤속에 숨은 것이다.

(3) 부자도 죽어 장사되었다. 가난한 자의 매장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도 없다. 사람들은 아무 곳에나 구덩이를 파고 그의 시신을 묻었다. 그러나 부자는 화려한 장례식을 가졌다. 부자가 지닌 관대한 인생 그리고 그가 베푼 좋은 식탁에 대하여 찬양하는 장례식사가 있었을 것인데, 그것은 연회에 참석했던 자들이 맡았을 것이다. 장례식은 그 사람의 행복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4) 거지는 죽어서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다.' 천사에게 받들려 안식에 들어간 그의 영혼에게 주어진 영예는 얼마나 큰 것이며, 매우 거창하게 부자의 시신을 무덤으로 옮긴 영예보다 얼마나 월등한 것인가!

1) 그의 영혼은 육체와는 분리된 상태에 존재했다. 죽지는 않았으며 육체와 함께 잠들어 있다.

2) 그의 영혼은 다른 세계로 옮기웠다. 즉 그 영혼을 주신 하나님께 그 본래의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다. 인간의 영혼은 위로 올라간다.

3) 천사들이 그 영혼을 돌본다. 그것은 천사들에 의해서 옮겨졌다. 천사들은 구원의 후사들에게 봉사하는 영들인데, 그들이 살아있을 동안뿐 아니라 죽었을때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영혼은 성화되지 못한 영혼처럼 이 땅에 얽매이거나 방해받지만 않는다면 그 자체에 탄성을 가지고 있어 육체를 멀리하자마자 그것에 의하여 위로 올라간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택하신 자들이 그렇게 되는 것을 바라지않으시며, 따라서 자신에게 그들을 데리고올 특별한 사신을 보내시는 것이다. 성도들은 안전할뿐만 아니라 영광스럽게 집에 인도될 것이다. 부자의 장례식에 있었던 상여꾼들은 아마도 일류급 인사들이었겠지만 어떻게 나사로의 상여꾼과 비교될수 있을 것인가?

4)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아브라함은 신실한 자의 조상이다. 신실한 자의 영혼은 그에게로만 모이게 되어있다.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즉 그와 함께 잔치를 갖게 되었다. 하늘에 있는 성도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앉는다. 아브라함은 위대하고 부자이었으나 하늘에서 그의 품에 가난한 나사로를 안기를 꺼리지 않았다. 부한 성도들과 가난한 성도들이 하늘에서는 다같이 만난다. 그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었다. 대식가인 부자는 그를 개의 무리와 함께 두기도 싫어하였던 것이다.

(5) 부자에 대해 들은 다음의 소식은 '저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었다'는 것이다(23절).

1)그의 처지가 매우 비참하다. 그는 지옥, 저 음부, 즉 분리된 영혼의 상태에 있다. 거기서 그는 불행의 극한에서 극도의 고통중에 있었다. 신실한 자의 영혼들이 육체의 짐에서 벗어나자마자 즉시 기쁨과 행복에 들어가는 것처럼 악하고 성화되지 못한 영혼들은 죽음에 의해 육체의 쾌락에서 끌려나오자마자 끝없고 무익한 치료 불가능한 고통과 불행에 머무르게 된다. 이 부자는 전적으로 감각 세계의 쾌락에 몰두하였으므로 영혼의 세계의 기쁨에 대하여는 전혀 적합치 않았다. 부자의 마음같은 속세적인 마음에 영혼 세계의 기쁨같은 것은 진실로 아무런 기쁨이 될수 없었을 것이며, 또한 그는 그것들을 대할수도 없었을 것이다.

2)그의 처지가 비참하게 된 것은 나사로가 행복한 것을 그가 알게됨으로써 더욱 악화되었다. 저가…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23절). 그는 그때 나사로가 어떻게 된 것인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기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아니, 그는 자신이 아브라함의 품에서 멀리 떨어져있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

①그는 멀리 아브라함을 보았다. 아브라함을 쳐다본다는 것은 즐거운 일임에 틀림없지만 멀리서 본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모습이다.

②그는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았다. 나사로를 보자 자신이 그에게 잔인하고 야만스럽게 행하였던 것이 생각났다. 그리고 행복에 젖어있는 그를 보자 자신의 불행이 훨씬 고통스러워졌다.

3. 부자와 아브라함의 대화(24-31)

(1)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그의 현재의 불행을 경감해달라는 요청(24절). 멀리있는 아브라함을 보자 부자는 그에게 울부짖었다. 큰 소리로 명령하던 그는 이제 큰 소리로 애걸한다. 술마시고 떠들며 흥얼거리던 노래가 탄식으로 완전히 바뀌어졌다. 여기서 다음 내용을 살펴보자.

1)그가 아브라함에게 붙인 칭호 :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지옥에는 아버지 아브라함이라고 부를수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육체적인 환락에 젖어있을때 이 부자는 오늘날 종교를 경멸하는 자들이 하듯이 아브라함과 그 이야기를 비웃었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아브라함에게 존경의 칭호인 '아버지 아브라함이여'라고 부르는 것이다. 지금은 악한 자들이 의인들을 업신여기지만 의인들에게 억지로 가까워지려 하고 그들과 혈연 관계가 있는양 주장할 날이 올 것이다.

2)그는 현재의 비참한 처지를 아브라함에게 표현한다. 내가 이 불꽃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24절). 그가 하소연하고 있는 것은 그의 영혼의 고통이다. 따라서 그것은 영혼에게 고통을 줄수 있는 그러한 불꽃인데, 죄를 범한 양심에 임한 하나님의 진노의 불꽃 즉 스스로를 고소하고 정죄하는 마음의 무서운 불꽃이다.

3)이러한 불행을 생각하고 아브라함에게 간청함 : 나를 긍휼히 여기사. 하나님의 자비를 업신여기던 자들이 그것을 간절히 구할 날이 이를 것이다. 나사로에게 아무런 동정도 베풀지않았던 그는 이제 나사로가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 이는 나사로가 일찍이 자기보다는 훨씬 좋은 성품을 지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가 간청한 특별한 은총은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라는 것이었다.

①여기서 그는 특히 그의 혀의 고통을 하소연했다. 그 혀는 말하는 기관 중의 하나이며, 그 고통에 의해서 그는 하나님과 사람을 거스려 말했던 모든 악한 말, 즉 모든 완악하고 불결한 말들을 기억한다. 그가 말들에 의해 정죄받았으므로 혀에 고통을 당하는 것이다. 혀는 또한 맛보는 기관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그 고통은 그가 감각의 즐거움을 지나치게 추구했다는 것을 생각나게 할 것이다.

②그는 자기 혀를 시원하게할 한방울의 물을 원한다. 그는 구할수 있는 하나의 작은 것으로써 한순간 그의 혀를 시원하게할 한방울의 물을 요청한다.

③그는 나사로가 그 물을 가져오기를 바란다. 부자는 나사로의 이름을 불렀다. 왜냐하면 그는 나사로를 알고있고, 나사로는 옛날에 알고 지내던 자를 위하여 이 선한 일을 자기에게 해주는데 마다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을 미워하고 경멸하던 자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에게서 기꺼이 친절을 얻고자 할 날이 이를 것이다.

(2) 이 요청에 대한 아브라함의 응답. 그는 그 요구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 부자가 얼마나 정확하게 보응을 받고 있는가를 보라. 빵 한조각을 거절하였던 그는 한방울의 물을 거절당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생각나게 한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그러나 만일 우리가 늦게 구한다면 받지못할 것이다.

1)아브라함은 부자로 하여금 생전에 나사로의 사정과 그의 사정이 어떠했었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얘…기억하라. 이것은 날카로운 말이다. 그때 죄인들은 기억할 것을 요청받는다. 그러나 그들은 기억하지 않고 기억하려고 하지않을 것이다. "아들아, 너의 창조주, 구세주를 기억하라. 너의 최후를 생각하라." 그러나 그들은 이 지난 일을 상기시키는 말에 귀를 막고 기억할수 있는 말도 잊어버리려 한다. "아들아, 너에게 주어진 많은 경고를 기억하라, 영원한 생명과 영광을 얻도록 좋은 기회를 주었으나 너는 그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부자가 여기서 생각해야할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①너는 살았을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아브라함은 부자가 그것을 오용했다고 말하지않고 받았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네게 얼마나 풍성한 은혜를 주셨는가를 기억하라. 따라서 너는 하나님께서 빚진 것이 있다고 할수 없다. 너는 그가 너에게 주신 것을 받았고, 그것이 전부였다. 너는 하나님의 축복을 묻어버리는 무덤이었고, 씨를 뿌려도 수확이 없는 밭이었다.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다. 그것은 네 눈으로 보아 네 몫으로 삼아 스스로 즐기기에 가장 좋은 것으로써, 네가 선택한 것들이었다. 너는 살았을때에 이 좋은 것을 받았고 내세에서 더좋은 날은 다 지나가 버렸으며, 그것은 지난 과거이다.

②나사로가 받은 고난 : 그가 생전에 받은 불행과 비참이 얼마나 컸었는가를 생각해 보라. 너는 네 악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좋은 것을 많이 가졌고, 나사로는 그의 선에 비해 지나치게 나쁜 것을 받았다. 그는 나쁜 것을 받았다. 그는 그것들을 영혼의 병을 치료하기위해 주어진 약으로 받아 들였으며, 그 약은 결과가 나타났다. 악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만 좋은 것을 가지는 것처럼, 경건한 사람들도 이 세상에서만 나쁜 것을 가진다. 이제 아브라함은 그의 양심을 일깨워 그가 나사로에게 어떻게 대했었는가를 상기시킨다. 그때 나사로를 도와주지 않았는데, 지금 나사로가 어떻게 자기를 도와주기를 바라겠는가?

2)아브라함은 부자에게 나사로의 현재의 축복과 그의 비참함을 상기시킨다.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천국은 위로요, 지옥은 고통이다. 천국은 기쁨이고, 지옥은 통곡이요, 아픔이다. 이 세상에서 많고 큰 재앙을 거쳐가는 사람에게 천국은 진정한 천국이 될 것이다. 고생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안에 잠들면 그들은 위로를 받고 그들의 모든 눈물은 씻기워질 것이다. 천국에서는 영원한 위로가 있다. 반면에 지옥은 세상의 열락과 쾌락을 즐기다가 가는 사람에게 진정으로 지옥이 될 것이다.

3)아브라함은 부자에게, 나사로의 도움을 입어 어떤 구조를 바라는 것은 헛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있어(26절). 천국에서는 가장 친절한 성도라고 할지라도 한때 그들의 친구였던 사람을 위로하고 구원하기위해 죽어 저주받은 무리를 방문할수 없다. 여기서 너희에게로 건너가고자 하되 할수 없고. 지옥에서 가장 용감한 죄인이라 할지라도 그 지옥을 힘으로 벗어날수 없다.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자연과 은총의 상태에 고정된 아무런 구렁이 없다. 우리는 전자에서 후자로 즉 죄에서 하나님에게로 나아갈수 있다. 그것은 시간에 제한을 받았지만 이제는 영원히 나아갈수 없게 되었다. 하나의 돌이 구렁의 문에 굴려졌는데, 그것은 다시는 굴려낼수 없는 돌인 것이다.

(3)부자가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행한 더 큰 요청 : 아브라함에게 말할 기회를 얻자 그는 뒤에 남겨둔 자기 친척들을 위해 간청하려 한다.

1)그는 나사로를 자기 아버지 집에 보내달라고 간청한다.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27절). 그는 다시 아브라함을 불러 요청한다. "당신이 이것만은 다시 거절하지 않을정도로 동정심이 많으신줄 확신합니다. 그를 나의 아버지 집에 돌려보내소서. 그는 거기에 여러번 드나들었기 때문에 그 집이 어디에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나사로를 알아볼 것이며, 그가 말하는 것을 존중할 것입니다. 나사로가 그들에게 증거하게 하소서. 내가 어떤 처지에 있다는 것을 그들에게 말하게 하소서. 그들이 내 전철을 밟지않고, 이 고통의 장소에 오지않도록 그들에게 경고하게 하소서"(28절). 그는 "내가 그들에게 증거하도록 나를 그들에게 보내주소서"라고 말하지 않는다. 만약에 그가 나갈수만 있다면 형제들이 정신을 잃고 놀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나사로를 보내소서. 그의 설명은 약간 무서울 것이나 충분히 그들을 죄에서 놀라 돌이키게 할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가 지금 그들의 파멸을 막고자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자연적인 애정을 가지고있는 그들에 대한 배려였다.

2)아브라함은 이 간청도 거절한다. 지옥에서는 어떤 요청도 수락되지 않는다. 아브라함은 그것들을 모세와 예언자들의 증언에 맡겼다. 여기에 그들의 특권이 있다.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29절). 이것이 그들의 의무이다. 그들을 믿으면 이 고통의 장소에 빠지지않게 막는데 충분할 것이다.

3)그는 다시 한번 간절히 강청한다(30절).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즉 이 말은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이 그들을 존중한다면 그럴수 있겠으나 죽은 자가 살아 그들에게 간다면 훨씬 분명한 확신을 가질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모세와 선지자들을 익히 알고 있지만, 이것은 새로운 일이요, 놀라운 일이기에 분명히 그들을 회개시킬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정하신 것보다 다른 방법을 확신하는 경향이 있다.

4)아브라함은 그것을 계속하여 부정한다(31절).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아니하면 비록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을 부수고 타락하게 만드는 힘은 죽은 자로부터 들은 증거의 힘을 능가하는 것이 분명하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의 뜻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므로,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 해설

재물 사용에 관한 교훈 ( 16 )

본장에는 재물 사용에 관한 세가지의 비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악하고 게으른 종이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자 꾀를 내어 어려움에서 벗어나는 비유와 위선적인 바리새인의 모습을 다루는 비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욕심이 많은 어리석은 부자의 말로에 관한 비유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1.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

1) 청지기 직분을 박탈 당함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주인에게 그 청지기에 관한 좋지못한 소식이 들렸습니다. 자신의 소유를 허비하는 청지기를 주인은 불러 조만간 그의 청지기직을 박탈하겠다고 했습니다. 청지기는 가정 총무로서 주인의 명을 받들어 제반에 걸친 사무를 관할하는 자입니다. 성실해야할 청지기가 주인의 재산을 허비한다는 것은 그가 성실하지 못한 사람이든지 아니면 적어도 부주의한 사람임을 나타내줍니다. 그는 주인으로부터 해고통보를 받자 골똘히 생각하다가 묘안을 발견했습니다. 청지기는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불러 자신의 미래를 대비해서 빛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a.지혜가 있고 진실해야 함(눅12:42)

b.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음(잠1:30-31)

2) 재물을 잘 사용하라

옳지않은 청지기가 해고통보 이후에 지혜롭게 일을 처리하는 모습을 보고 주인은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롭다고 평가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들어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하셨습니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귄 결과 그 친구들은 빛의 아들들을 영원한 처소로 영접할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재물을 잘 사용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의 손길과 도움을 주면 그에게 많은 보상이 주어진다는 의미입니다.

a.작은 일에 충성함을 의미함(마25:21)

b.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이 충성임(고전4:1-2)

3) 하나님만을 섬기라

예수님께서는 불의한 재물에 충성하는 자라야 참된 것도 맡을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불의한 재물은 이 세상의 재물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느냐보다는 그 사람의 성실성과 충성심에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불의한 재물에 충성하지 못하는 자는 아무리 좋은 재물이 있어도 그것에 충성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종이 두주인을 섬길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a.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을 잃게 됨(요일2:15)

b.하나님만을 섬기라(마4:10)

 

2. 바리새인들의 위선

1) 돈을 좋아함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바리새인들은 비웃었습니다. 그들은 돈을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겼으나 실상은 재물을 섬기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행위는 사람보기에 옳은것 같았으나 그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다고 예수님께서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위해 많은 사람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했습니다.

a.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함(마23:25)

b.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됨(딤전6:9-10)

2) 스스로 옳다고 여김

바리새인들은 사람앞에서 자기들의 행위를 내세우며 옳다고 인정받기를 원했습니다. 돈을 좋아하며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바리새인들은 자기 중심의 인본주의 신앙에 빠진 자들이었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듯했지만 그것은 위선이었으며, 결국은 형식적인 인간의 법에 매여 외식으로 굳어진 자들이었습니다.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의인으로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기위해 사람앞에서 보이기 위한 행함을 즐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람앞에서 높임을 받고 영광을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a.악인은 그 마음의 소욕을 자랑함(시10:3)

b.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심(벧전5:5)

3) 율법과 복음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의 시대인 구약시대가 세례 요한으로 마쳐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율법이 폐해졌다는 선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가르치시기 위해 곧이어 율법의 영원성을 언급하셨습니다. 율법의 한획이 떨어짐보다 천지의 없어짐이 쉬우리라고 하신 것은 세상이 없어지기 전에는 결코 구약의 말씀이 변치 않으리라는 의미입니다. 복음은 율법의 완성에서 오는 사랑과 은혜와 용서의 결실입니다. 주께서는 율법의 영원한 효용성에 대한 실례로 결혼과 이혼을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a.하나님이 세우심(사33:22)

b.율법은 완전함(시19:7)

 

3.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1) 대조적인 두사람의 삶

예수님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들어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바리새인들이 하늘나라에서의 삶과 최후심판을 믿으면서도 신앙에 부합된 삶을 살지못하는 것을 경책하셨습니다. 부자는 이 땅에서 호의호식하면서 살았지만 나사로는 병든 몸을 이끌고 부자의 대문에서 구걸하며 살았습니다. 거지 나사로는 구걸할뿐만 아니라 헌데를 앓으며 부자의 대문에 누워 있었습니다. 게다가 개들이 와서 그의 헌데를 핥는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a.부자의 상은 풍성함(왕상4:27)

b.구걸하기 위하여 성전 문에 있음(행3:2)

2) 죽음 이후의 세계

이 땅에서 비참한 삶을 살던 거지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그 후에 부자도 죽었습니다. 죽음은 누구나 피할수 없는 공동 운명이었습니다. 나사로는 홀로 쓸쓸히 죽었지만 그는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땅 위에서와는 달리 죽음 이후에 지옥으로 가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a.인간은 모두가 죽음(삼하14:14)

b.의인의 죽음에는 소망이 있음(잠14:32)

3) 때늦은 후회

음부에 내려간 부자는 너무 고통스러워서 낙원에 있는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해주도록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부자는 자신의 삶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음부에 가서야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음부에서의 깨달음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회개의 기회를 놓친 부자의 결국을 보면서 하나님의 권한아래 놓여있는 때와 기한에 대해 성도들은 두려움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고난받다가 낙원에 간 거지 나사로를 통해 위로와 소망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a.음부는 악인이 가는 곳(시9:17)

b.하나님의 동산(계2:7)

 

결론

우리는 본장에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 이 세상에 사는동안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발견할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위해 시간과 물질을 사용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자신이 생명과 소유를 희생하는 지혜로운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 핵심

16:1-18

예수님은 성도들이 재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는 선한 청지기의 삶을 살아야함을 교훈하셨다. 그러나 탐욕에 눈이 먼 바리새인들은 그분의 가르침을 비웃으며 배격했다.

사후 중간 상태(16:19-31)

하나님의 최후심판은 사람이 죽으면 즉각적, 개별적으로 시행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재림때 온인류를 대상으로 행해진다. 그렇다면 사람이 죽었을때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지만 영혼은 어떻게 되는가? 가톨릭 교회에서 영세받은 신자는 천국으로, 불신자는 지옥으로 곧장 가며, 영세받았지만 온전치 못한 자는 연옥에서 정화된후 천국으로 간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최후심판 전의 사후 중간기 동안 성도의 영혼은 낙원으로 불신자의 영혼은 음부로 간다는 것이 성경적 견해이다.

 

# 묵상

불성실하지만 지혜로운 청지기 ( 16:1-8 )

불성실한 청지기는 미래를 대비했기때문에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이 청지기는 실직한 후의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현재의 기회를 이용했다는 점에서 지혜롭다는 평가를 얻은 것이지 이로인해 부정직과 사기술을 인정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는 악한 세대에 속한 자로서 악한 지혜를 사용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할때 세상에서는 잘살지 모르나 하나님나라에는 이를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미래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 현재를 충실히 활용하되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도록 힘써야할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소유물을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입니다.

불의의 재물로 사귄 친구 ( 16:9-13 )

불의의 재물이란 하늘의 보화와 반대되는 개념으로써, 불의한 청지기가 마음대로 사용한 세상의 재물을 의미합니다. 이는 불신자들이 세상에서 장차의 유익을 얻기위해 지혜롭게 투자하듯이 신자도 천국에서의 유익을 위해 재물을 이용하는 법을 배우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수 없고 재물은 하나님으로부터 맡아 관리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줍니다. 그러므로 비록 재물은 하나님보다 열등한 것이지만 이를 소홀히 여겨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관리를 맡은 청지기답게 재물을 지혜롭게 사용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의 정체 ( 16:14, 15 )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요, 사람앞에서 스스로 옳다하는 자들입니다. 아무리 신앙이 좋다고해도 결국 하나님은 그들의 정체를 아십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인정받기보다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하였고, 무엇보다도 재물욕이 강했습니다. 또한 이들은 하나님나라와 율법에 대하여 그릇된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기때문에 예수님의 사역과 충돌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율법과 선지자 및 하나님나라와의 관계 ( 16:16 )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합니다. 즉, 율법과 선지자는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전자는 수단이고 후자는 궁극적 목표가 됩니다.

부자와 나사로 ( 16:19-22 )

부자는 죽어서 음부에서 고통을 겪고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습니다.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이 겪는 일이, 그 사람이 겪는 일의 전부는 아닙니다. 이 세상에 있을때 부자는 날마다 연락(宴樂)하였고 나사로는 극심한 고통을 당했으나, 저 세상에서는 두사람이 전혀 상반된 경우에 처해졌던 것입니다.

부자의 두가지 요구 ( 16:24-31 )

처음에는 나사로를 통해 물을 찍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부자는 살았을때 좋은 것을 받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제 나사로가 위로받는 것이 마땅하다며 부자의 간구를 거절합니다. 또한 그는 나사로를 형제에게 보내어 경고하게 해달라고 했으나, 이 요구에 대해서도 아브라함은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들으면 된다고 대답했습니다. 이는 심판의 불가피성과 불변성을 나타내줍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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