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udy
Ⅰ. 용서할 것과 종된 자의 위치를 가르치심 17:1-10
다음 내용들을 잘 주목하라.
(1) 실족케하는 것은 큰 죄이다(1,2절). 우리는 실족케하는 것이 있으리라는 사실을 예상하지 않을수 없다. 실족케하는 것이 없을수는 없으나(1절). 그러므로 우리는 힘써 대비할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있게하는 자에게는 화가 있게된다. 즉 그의 죄과가 무거워지게 된다(2절). 그러한 사람들은 연자맷돌보다 더 무거운 죄의 짐아래서 멸망하게 된다. 이러한 형벌은 다음과 같은 사람들에게 있게될 화를 포함하고 있다. 그들은 첫째, 그리스도의 작은 자 중 지극히 적은 자에게라도 해를 입힌 핍박자들 둘째, 그리스도의 진리를 더럽힘으로 제자들의 마음을 근심케한 유혹자들 셋째, 비방함으로써 봉사를 약화시키고 하나님의 백성의 마음을 슬프게하는 자들이다.
(2) 죄를 용서해 주는 것은 큰 의무이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3절). 이것은 앞에 있는 말에 대한 언급이거나 아니면 뒤에 나오는 말에 대한 언급이다. 즉 너희는 이 소자중 하나라도 실족케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이거나 너희 형제가 너희에게 범죄했을때 너희는 성내지않도록 스스로 조심하라는 말이다.
1)만일 우리가 그를 꾸짖는 것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그렇게 하도록 권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분노를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말로 표현하는 것을 억제하여야 한다. 그에게 그의 잘못을 고하여야할 것이다. 또한 간혹 우리가 아무 허물도 없는 사람을 잘못 생각함으로 오해한 것을 깨달을때가 있을 것이다. 그때 우리는 그를 오해한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하여야 한다.
2)우리는 회개한 사람은 용서해 주어야 한다.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또한 해 받은 것은 잊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다시는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혹 그 사람이 회개하지 않는다해도 그에 대해서 악한 생각을 품지말아야 하며 앙갚음을 꾀하지 말아야할 것이다.
3)어떤 사람이 되풀이해서 죄를 범하더라도 항상 용서해주어야 한다(4절). "만일 어떤 사람이 하루 일곱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그때마다 자기 잘못에 대해 뉘우치곤 한다면 그를 계속해서 용서하라." 그리스도인은 용서하는 심령을 가진 사람들이어야 한다. 또한 기꺼이 모든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하여 대하여야 한다. 아울러서 그들은 해 받은 것에 대해 분개하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해 받은 것을 용서해 줄수 있어야 한다.
(3)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굳게할 필요가 있다. 이는 은혜가 자라감에 따라 다른 모든 은혜들이 성장하기 때문이다.
1) 제자들이 자기들의 믿음을 굳게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 드린 말씀(5절) : 사도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믿음이 아직도 연약하고 부족함을 알았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개선시키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함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들은 주께 '우리의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말씀드렸다. 우리의 믿음을 더하기위하여 우리는 그것을 진심으로 바래야한다. 그들은 해 받은 것에 대해 용서해 줄수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고 있었던 당시에 그리스도께 이와같은 간청을 드리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도들의 간청은 곧 이러한 말이라고 할수 있다. "주여, '우리의 믿음을 더 하소서' 그렇지않으면 우리는 결코 그와 같이 어려운 의무를 시행할수 없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자비하심 가운데서 주어진 것으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형제를 용서하는 일에 있어 대단히 어려운 것들을 이기게해 줄 것이다.
2) 참된 믿음의 놀랄만한 능력에 대해서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주신 증거(6절) : 너희에게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이 있었다면. 즉 겨자씨처럼 작으나 또한 겨자씨처럼 강하게 다른 모든 은혜들을 자극시키는 믿음이 있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너희가 하기 어려운 일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 심지어 나무의 뿌리를 땅에서 바다에 심기우는 것까지 가능하였을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하면 불가능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믿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할 것이다.
(4) 우리는 무엇으로 그리스도를 섬기든지 매우 겸손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보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렇게 많은 일을 행한 사도들조차 그것들로 인해 그를 자신들의 채무자처럼 생각해서는 안되었다.
1)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종들이다. 우리는 우리의 전 시간과 전 힘을 그를 위해서 사용해야 한다.
2) 하나님의 종된 자로서 우리는 마땅히 우리의 시간을 의무를 행하는데 보내야할 것이다. 우리는 한가지 봉사의 끝남을 또다른 봉사의 시작으로 여겨야 한다. 종은 들에서 밭을 갈거나 가축을 먹이다가 밤중에 집에 돌아와서도 여전히 해야할 일이 있는 것이다. 즉 식사 시중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7,8절).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일하기로 하였으면 우리는 끝까지 하나님께 시중들수 있어야 한다.
3) 여기서 우리의 주된 관심은 반드시 우리의 의무를 행해야 한다는데 있다. 우리의 위안은 주인에게 맡겨져있는 것이다. 어떤 종도 자기 주인이 자기에게 '곧 와 앉아서 먹으라'고 말하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행할 것을 다 행한 후가 되어서야 비로소 그렇게 할때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일을 다 마치기까지 힘쓰도록 하자. 그러면 멀지않아 보상이 있게될 것이다.
4) 그리스도께서 우리보다 먼저 섬김을 받아야하는 것이 마땅하다.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8절).
5) 그리스도의 종들은 그리스도를 섬기게 될때 '띠를 띠어야' 한다. 즉 모든 방해되는 것과 얽어매는 것에서부터 자유롭게 될수 있어야 한다. 그와같이 우리는 그에게 시중들기 위해서 우리 자신들을 띠 띠어야 한다. 이것은 종들에게 있어야 되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강요하시지 않으신다. 그는 그의 제자들가운데 섬기는 자로 계셨다. 또한 그는 섬김을 받기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위해서 오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이를 증거한다.
6) 그리스도의 종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어떤 봉사를 하든 그의 감사를 받지 못한다. 종에게 사례하겠느냐(9절). 우리의 어떠한 선행도 하나님 편에서 볼때는 아무런 공로도 되지 못한다.
7)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무엇을 행하든 그것은 우리의 행해야할 의무보다 더 큰 것이 되지 못한다. 비록 우리가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일지라도 우리는 이 일의 많은 부족함으로 인해서 "슬프도다!"라고 탄식하게 된다. 이는 그것이 단지 우리의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는 크고 첫째되는 계명에 의해 행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8) 그리스도의 가장 훌륭한 종들일지라도 겸손하게 자신들이 무익한 종임을 인정할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의 섬김에 의해서 이득 보시는 분이 아니다. 따라서 그러한 봉사들에 의해 하나님께서는 결코 채무자가 되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들의 봉사를 무익한 봉사로, 우리 자신들을 무익한 종들로 부르는 것이 합당한 것이다.
Ⅱ. 열 문둥병자를 고치심 17:11-19
우리는 여기서 다른 복음서에서는 찾아볼수 없는 예수께서 열 문둥병자를 치료하시는 기사를 보게된다. 문둥병은 유대인들에게 다른 어떤 질병보다도 더 하나님의 진노를 받은 징표로 여겨진 질병이었다. 따라서 죄없이 하기위해 오신 그리스도께서 길가에서 마주친 문둥병자들을 특별히 깨끗케 해주셨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도중이셨다. 그러므로 그는 그때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에 놓여있는 경계, 즉 국경 지방에 계셨던 것이다.
1. 이들 문둥병자들이 그리스도께 외친 말(11-13)
그들은 열명으로 무리지어 있었다. 이는 그들이 비록 사람들의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있었다할지라도 병에 걸린 자들끼리는 서로 자유롭게 지냈기 때문이었다.
(1)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한촌에 들어가셨을때' 그를 만났다. 그들은 그가 음식을 먹고 기운을 회복하시기까지 기다리지 않았으며 그가 지친 상태로 그 마을에 들어오셨을때 그를 만났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거절하지 않으셨다.
(2) 그들은 '멀리 서있었다.' 우리가 영적으로 문둥병자라고 하는 의식은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일에 있어서 우리를 매우 겸손하게 만들어 준다. 우리가 누구이길래 한없이 정결하신 그분께 가까이 나아갈수 있겠는가?
(3) 그들의 요구는 한결같았으며 매우 끈질겼다.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13절). 그리스도께 도움을 기대하려면 그를 선생님으로 여길수 있어야 한다. 만일 그가 선생님이시라면 그는 예수, 곧 구세주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들은 특별히 자신들의 문둥병을 치료해달라고 구하지 않았다. 단지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했을 뿐이다. 따라서 우리도 우리 자신들을 그리스도의 긍휼하심에 내어놓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반드시 그의 자비를 베풀어주실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제사장에게 보내심(14)
이는 제사장으로 하여금 검사케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스도는 그들이 고침받았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명확히 말씀하지 않으셨으며 단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명하셨을 뿐이다(14절). 이것은 그들의 순종에 대한 시험이라고 하겠다. 그리스도께 은총을 얻으려면 자신들을 그의 방법에 맡길수 있어야 한다. 그들 모두가 제사장에게 갔다. 의식법이 아직 유효했으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지키게 하셨던 것이다.
3. 그들이 갔을때 깨끗함을 받음(14)
이와같이 우리는 우리의 의무를 행할때 하나님께서 긍휼하심으로 우리를 만나 주시리라고 기대할수 있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 힘으로 할수 있는 것을 행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할수 없는 것을 부족함없이 채워주실 것이다. 비록 그 방법 자체가 우리를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방법대로 부지런히 준행하고 있는 우리들을 치료하실 것이다.
4. 그들 중 단 한사람만이 돌아와서 감사함(15)
그 사람은 자신이 고침받은 것을 보았을때 자신을 치료해준 분께로 돌아와서 그가 그 일의 영광을 받으시기를 바랬다. 그 사람은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으로 그리고 매우 감격하여 감사하고 있다.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15절). 하나님께 긍휼하심을 입은 자들은 그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일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또한 그리스도께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에 대해 감사해야 하되 특별히 질병에서부터 회복시켜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할수 있어야 한다. 기도하는 일에 있어서뿐 아니라 감사하는 일에 있어서도 또한 매우 겸손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합당한 태도이다.
5. 그리스도께서 이 사람을 주목하심(16)
이는 다른 모든 사람이 유대인들이었음에 반해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16절). 사마리아인들은 하나님을 아는 일에 있어서나 경배하는 일에 있어서 유대인들처럼 잘 알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모두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을 잊고 있었을때 하나님께 영광돌린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1) 그리스도께서는 그 사람에게 각별한 호의를 보이셨다. 왜냐하면 다른 아홉 사람도 함께 긍휼을 입었으나 그들은 모두 그 은혜를 망각했기 때문이다. 이방인이었던 그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위해 돌아온 유일한 사람이었다.
1)그리스도께서는 선을 행하시는 일에 얼마나 풍성하신가? 열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17절).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일괄적으로 치료해 주셨다. 즉 전 병자가 한마디 말씀으로 치유받았던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은혜받는 일이란 결코 없을 것이다.
2)우리는 다시 돌아오는 일에 얼마나 인색한가? 그리스도께서는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다. 은혜를 잊어버리는 것은 매우 흔히 범하여지는 죄이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긍휼을 입으나 단지 적은 사람만이, 아주 소수만이 감사를 드린다.
3)가장 감사하리라고 기대되어지는 자들은 과연 감사하였는가? 사마리아 사람은 감사했으나 유대인들은 그렇지 않았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들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계심은 그들의 배은망덕의 죄를 더 무겁게 해주는 것이 되기도 한다.
(2) 그리스도께서는 그 사람에게 큰 위로를 베풀어주셨다(19절). 다른 사람들도 치료를 받았으며 그 치료받은 것은 결코 번복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사람은 각별하게 자신의 나음을 확신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다른 사람들도 자신들의 곤궁을 불쌍히 여기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온전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 사람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해서 보셨던 것이다.
Ⅲ. 하나님의 나라가 이를때에 대한 가르침 17:20-37
1.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요구(20,21)
이것이 이 강화를 하게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때에 임할 것인가를 물었다. 그들은 아마도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나라가 임하기를 위해서 기도하도록 가르치셨고 그래서 제자들이 하나님나라가 가까웠다고 널리 전파한 것으로 이해한듯 싶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은 그 영화로운 때가 언제 있게될 것입니까라고 묻고있는 것이다.
2. 그 요구에 대한 그리스도의 답변 (22-37)
예수께서는 먼저는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그리고 곧 이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22절). 그가 양편에 대해 말씀하신 것, 곧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은 무엇인가?
(1) 메시야의 왕국은 영적인 왕국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그것이 어느때에 이를 것인가를 물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너희가 묻는 것을 너희는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즉 '그것이 임할 것이로되 너희는 그것의 임함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왕국은 신문을 발전과 변혁에 관한 기사로 가득 메우는 세상 국가들과 같이 외적으로 보이는 왕국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오히려 그 나라는 소리없이 임할 것이다. 즉 '볼수 있게 임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그들은 그 시기에 대한 자신들의 궁금증이 풀어지기를 원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나라의 도래에 대한 그들의 오해를 바로잡아 주실 것이다. 왕되신 메시야께서 그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오실때는 어떤 왕이 자기 영토를 방문할때 그렇듯이 '보라 여기있다, 보라 저기있다'라고 말할수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런 말과 함께 임하시지 않으실 것이다. 이는 나라가 이곳 혹은 저곳 등으로 한정짓는 자들은 '보라 여기있다, 보라 저기있다'하는 자들이다. 그러한 자들은 번영과 외적인 허식을 참된 교회의 징표로 여기는 자들이다. 그것은 영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안에 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 나라의 영광은 사람들의 생각과 부합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의 영에 영향을 준다. 또한 그 나라의 능력은 사람들의 영혼과 의식을 지배한다. 하나님나라는 사람들의 외적상태가 아닌 사람들의 마음과 삶을 변화시킬 것이다. 따라서 교만하고 무익한 자들이 겸손하고 진지하며 하늘에 속한 자들이 되어질때 그 나라의 도래가 있게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변화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나라를 고대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가운데 있는 것이다. 어떤이들은 이에 대해 이렇게 생각한다. "너희는 그 나라가 언제 임할 것인가를 물으면서도 너희 가운데서 이미 그 나라가 시작된 것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비록 너희 마음안에서는 아니라 할지라도 너희 민족안에서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그 나라가 임하게 될 시기에 관하여 궁금히 여긴 많은 질문자들의 어리석음은 곧 그들이 자기들 앞에 있는것 즉 이미 자기들가운데 있는 것을 고대했다는 사실에 있었던 것이다.
(2) 이 나라를 세우는 것은 수많은 반대와 방해에 부딪히게 된다(22절). 제자들은 자신들이 파죽지세로 나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그렇지않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사실상 처음에 너희는 놀라운 성과를 거둘 것이다(실제로 그들은 그랬었다. 한때 하루에 수천명이 교회로 들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항상 그러리라고 생각하지 말라. 사람들은 점차 냉담해질 것이다." 이 일은 후대에 그의 제자들에게 있어질 일이었다. 그들은 많은 실의를 각오해야만 했다. 사역자들과 교회들은 때때로 외적 압박에 처하게될 것이다. 그때 그들은 자신들이 이전에 누렸던 그런 날이 다시 오기를 바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이 자비를 적게 하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자비의 가치를 알도록 가르치신다. 때때로 그들은 내적 압박에 처하게될 것이다. 그때 그들은 자신들이 자주 겪었던 그러한 승리에 가득 넘친 날이 오기를 바랄 것이다. 우리는 항상 분명하지 않다고해서, 그리고 항상 널리 파급되어 가지 않는다고해서 그리스도의 교회와 대의가 유실된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된다.
(3)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는 이곳, 혹은 저곳 등 어느 특정한 곳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며 그의 나타나심은 즉시 모든 곳에 보편적으로 있게될 것이다(23,24절).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있다 보라 여기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좇지도 말라(23절). 하나님의 나라는 단지 한백성의 영광을 위해 예정된 것이 아니며 이방인들에게 빛을 비추기위해 예정된 것이다. '번개가 하늘아래 이편에서 번뜻하여' 갑자기 가눌수 없게 '하늘아래 저편까지 비침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세상에 그리스도의 왕국을 세우기위한 복음은 번개같이 모든 민족에게로 날아갈 것이다. 메시야의 왕국은 지엽적인 것이 아니며 전 지상에 널리 산재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왕국을 세우는 목적은 하나의 거대한 민족을 만드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전민족을, 최소한 전민족 가운데서 몇 민족이라도 선하게 만드는데 있는 것이다.
(4) 메시야는 통치하기 전에 먼저 고난을 받아야 한다.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바 되어야 할지니라(25절). 그러므로 만일 그가 이와같이 대우받게될 것이라면 그의 제자들 역시 그를 위해서 고난받을 것과 버림받을 것을 각오해야 한다. 인자는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한다. 고통, 수치, 죽음은 곧 이 많은 고난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는 다른 세대, 즉 믿는 이방인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전에 이 세대 즉 믿지않는 유대인들에게 버림을 받게될 것이다.
(5) 메시야의 왕국을 세우는 일은 유대 민족의 멸망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1)옛날에는 죄인들이 어떻게 되었던가를 주목하여 보라. 악함으로 주앞에 지극히 죄인되었던 소돔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가를 생각하여 보라. 다음을 살펴보자.
①그들은 모두 적절한 경고를 받았었다. 노아는 옛 세상에 대한 의로운 전파자였다. 소돔 사람들에 대해서는 롯이 그러했다.
②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경고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매우 안일하였다. 그들은 모두 매우 즐겼을 뿐이며 그 즐기는 것에 여전히 분주했을 뿐이었다. 그들은 니느웨 사람들이 금식기도하면서 회개하고 돌이킨 것처럼 그렇게 했어야 할때에 계속해서 걱정없이 육식을 하면서 포도주를 마시기만 하였다.
③그들은 두려운 심판이 임할때까지 계속해서 안일함과 성욕가운데 있었다.
④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된 자들을 안전하게 돌아보셨다. 노아는 방주에 들어갔으며 그곳에 안전하게 있었다. 롯은 소돔에서 나와 안전한 곳으로 갔다.
⑤그들은 자기들이 두려워하지 않았던 파멸에 대해서 놀랐다. '홍수가 났으며' 옛 세상의 모든 죄인들을 멸망시켰다. 또한 '불과 유황'이 임하여 소돔의 모든 죄인들을 멸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특별히 의도하고 있는 것은 음란하고 안일한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두렵고도 놀라운 멸망이 임할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데 있다.
2)지금은 죄인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주목하여 보라.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30절). 그들은 지금 그리스도에 의해 경고를 받고있다. 후에 그들은 사도들에 의해 그 경고를 반복해서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소용없게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대중에게 공표된 우리 구주의 이 강화가 죄인들을 깨닫게 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6) 그 날에 믿지않는 유대인들과 구별되는 것, 그리고 그들을 떠나서 주어진 지시에 따라 정해진 곳으로 도피하는 것이 그의 제자들과 그를 따르는 자들의 관심사가 되어야 했다. 예루살렘에서부터의 그들의 이동은 반드시 신속해야 하며, 세상적인 어떤일에 대한 관심으로 인해 결코 지체되어서는 안되었다.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위에 있고 그것을 가지러 내려오지 말 것이요(31절). 그 세상에 유의하다 믿지아니하는 자들과 함께 멸망하는 것보다 그것을 뒤에 남겨두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롯과 그의 가족이 명령 받은대로 그들도 그와 같이 행할수 있어야할 것이다. "네 생명을 보존키위해 피하라. 이 패역한 세대에서 네 자신을 구원하라." 그들이 도피하게 될때 그들은 뒤로 돌이킬 생각을 하지말아야 한다. "롯의 처를 생각하라(32절). 그리고 그가 했던 것처럼 뒤를 돌아보지 말라. 멸망의 처소를 버리는 것을 아쉬워하지 말라." 그들은 되돌아갈 유혹을 받지않도록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했다. 아니, 마음속에 되돌아가는 것으로 인상지어지지 않도록, 혹은 마음이 뒤에 남아있다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도록, 그들의 생명을 구하는 다른 방법은 결코 없는 것이다.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33절). 자기 목숨을 과감히 내어놓고자 하는 자는 보존할 것이다. 이는 그가 영생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7) 모든 복된 그리스도인들은 틀림없이 피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 중 많은 사람은 매우 가까스로 피하게 될 것이다(34-36절). 하나님의 심판이 모든 쓸모없는 자들을 치실때 그는 자기 백성된 자들을 효과적인 방법으로 보존하실 것이다. 즉 '두사람이 한자리에 누워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다.' 주께서 그의 백성된 자들과 그렇지않은 자들을 아시는 것은 조만간에 반드시 나타나게될 것이다.
(8) 구별하고 분리하며 식별하는 일은 하나님의 왕국이 미치는 모든 지역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주여, 어디오니이까(37절). 그들은 그 시기에 관해서 질문했었다. 그러나 그가 만족하게 그들의 궁금증을 해결해주지 않자 그들은 그에게 또다른 질문을 시도하였다. '주여 어디오니이까'가 그것이었다. 그 답변은 속담식이었다. 주검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생각할수 있다.
①악한 자들이 있는 곳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즉 죽은 송장이 있는 곳마다 새들은 그것을 먹이로 삼을 것이다. 독수리가 그 먹이에게 행하듯이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을 공격할 것이다.
②보존되어야할 경건한 자들이 있는 곳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즐거움 가운데서 복된 자들로 나타날 것이다. 그리스도가 계신 곳마다 신자들은 마치 독수리가 본능적으로 먹이 주위에 모이듯이 그에게 모일 것이며 그를 대하게 될 것이다. '주검있는 곳에는' 즉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경건한 영혼들이 모이게 될 것이며 거기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찾게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이름을 나타내신 곳에서 그는 그의 백성들을 만나실 것이며 그들에게 복주실 것이다.
# 해설
성도의 생활과 주의 재림 ( 17 )
본장은 크게 두부분으로 나눌수 있습니다. 1절부터 19절까지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관한 것이고, 20절부터 마지막 절까지는 장차 주의 재림을 통해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에 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본장은 천국 시민의 생활에 있어서 규범이 될만한 윤리관과 내세관에 관한 교훈입니다.
1. 올바른 믿음
1) 형제를 실족시키지 말라
예수님께서는 실족케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없을수는 없지만 있게하는 자에게는 화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족이란 말은 장애물, 올가미, 미끼, 함정 등으로 유인하는 덫을 의미합니다. 실족케하는 자 즉 죄를 모르는 이에게 죄를 짓도록 유인하고 죄의 영향을 끼치는 사람은 참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소자를 실족케하는 것보다 연자 맷돌을 목에 메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낫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당시 의인을 자처하는 바리새인들과 율법주의자들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영혼에 상처를 받고 괴로워하는 상황을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또한 죄를 짓도록 유도한 그들에게 경책하시기 위해 말씀하셨습니다.
a.행한대로 보응을 받음(사3:11)
b.말씀을 순종치 않으므로 실족함(벧전2:8)
2) 무제한으로 용서하라
예수님께서는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형제의 범죄를 보고도 이를 묵과하는 것은 마음으로 그에 대해 무관심하고 소외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범죄를 볼때는 경계하며 책해야 합니다. 이는 성도들의 의무중 하나로 죄인을 권면하는 일에 속합니다. 또한 회개한 형제를 용서해주는 것도 성도들의 의무에 속합니다. 죄지은 자를 비판하고 정죄하기는 쉬우나 그 죄를 용서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에 대한 무한정한 용서를 요구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무제한의 용서를 가르치신 것을 기억하며 성도들은 용서의 생활을 실천해야 합니다.
a.범죄치 않도록(시39:1)
b.용서하면 천부께서도 우리의 과실을 용서하심(마6:14-15)
3) 믿음의 기적
사도들은 예수님께 자신들의 믿음을 더하여 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뽕나무를 바다에 옮겨 심을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겨자씨는 아주 작은 것을 비유할때 흔히 사용합니다. 겨자씨는 땅에 심으면 잠깐 피었다가 쓰러지는 잡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새들이 깃들일수 있는 큰 나무가 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므로, 만일 우리가 지극히 작은 믿음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그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이적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a.믿는 자에게는 능치못할 일이 없음(막9:23)
b.주를 믿는 자는 주께서 하시는 일을 저도 할수 있음(요14:12)
2. 천국의 참된 의미
1) 종의 자세
고대 사회의 종은 주인의 재산과 같은 신분이었습니다. 그 자신이 주인의 소유이므로 모든 것이 주인의 것이 되고 주인의 배려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종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주인을 위해 일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종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이 바로 이러한 종과 같은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종에게 있어서 자기 주장은 있을수 없습니다. 오직 주인의 명령이 그에게는 법이요, 이 법을 순종하지 않고 거역하면 벌을 받게 됩니다. 그가 주인에게 철저히 순종할때 주인은 그를 사랑하여 은혜를 베풀 것입니다.
a.주님은 만물의 통치자이심(롬11:35-36)
b.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했음(딤전1:5)
2) 구원받은 문둥병자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의 마지막 여행을 위해 갈릴리와 사마리아 접경을 지날때 열명의 문둥병자를 만나셨습니다. 문둥병자들은 예수님을 보고 멀리서 소리를 높여 긍휼히 여겨달라고 호소했습니다. 긍휼히 여겨달라는 그들의 외침속에서 그들이 예수께서 자신들을 고칠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병고침을 호소하는 열명의 문둥병자들을 말씀으로 치료해 주셨습니다. 고침을 받은 열명의 문둥병자 중 사마리아인 한명만이 주께 나아와 감사드렸습니다.
a.증세가 눈같이 희게 됨(왕하5:27)
b.착한 행실로 영광을 돌림(마5:16)
3) 사람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때에 임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볼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안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볼수 있는 세상의 나라가 아니며 영적인 나라이며, 또한 어떤 특정 지역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 마음속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a.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님(요18:36)
b.의와 평강과 희락임(롬14:17)
3.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1) 인자의 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가장 경계해야할 태도는 그날이 언제 어디에 임하는가 하고 묻는 자세입니다. 왜냐하면 때와 기한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징조에 관해서는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미혹하는 거짓 그리스도의 출현에 대해 가지도 말고 좇지도 말 것을 제자들에게 경고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마치 번개의 번뜩임같이 밝게, 빠르게, 갑작스럽게 임하게 되는 것으로써 우주적이며 동시적인 것입니다.
a.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라고 자칭함(눅21:8)
b.그날과 그때는 오직 아버지만 아심(마24:36)
2) 혼돈의 삶을 살아감
주께서는 재림의 주로 오심과 그 전에 고난이 있을 것을 말씀하신후 그때에 있을 세상의 심판을 밝히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날의 세상의 모습이 노아의 때와 롯의 때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세속적인 신앙과 불신앙적인 삶에 빠질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잊어버리고 종말을 염두에 두지않게 됩니다.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 모든 사람들은 진리를 밝히 알 것입니다. 우리는 그날을 두려워하고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a.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함(마24:38-39)
b.마지막 날(요12:48)
3) 의인과 악인의 분리
이 세상은 재림의 때까지 인간 생활의 모든 분야가 계속되어지다가 심판을 맞이하게 됩니다. 구원받을 자는 그가 시간과 장소에 관계없이 마지막날에 들림을 받게 됩니다. 반면에 버림받는 자들은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살아왔기에 마지막날 멸망받게 됩니다. 그 나라에는 의인과 악인이 확연히 구분됩니다. 이러한 구분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습니다. 사람들의 믿음과 그 믿음에 따른 열매를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구원 여부를 결정하십니다.
a.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함(눅13:24)
b.불의한 자는 형벌아래 있음(벧후2:9)
결론
우리는 본장을 통해 성도들이 어떻게 사람을 대해야 하는가를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어떠한 여건에 처하든지 다른 형제들을 실족시켜서는 안되겠습니다. 오늘날 교회안에도 이기주의와 개인주의가 만연하여 남에게 거치는 자가 많은데, 우리는 철저히 각성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덕을 세워야 하겠습니다.
# 핵심
17:1-10
성도들이 이웃과의 관계에서 서로를 용납하며 죄를 멀리해야 하고,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오직 그분만을 의뢰하는 믿음에 입각하여 충성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
연자맷돌(17:2)
발동기가 없던 시절에 한꺼번에 많은 곡식을 찧기위해 마소의 힘을 이용해 돌리던 큰 맷돌로, 근동에서는 주로 나귀를 이용했다. 그러나 일반 가정에서 사용하던 맷돌은 사람이 한손으로 돌릴수 있을만큼 작았으므로, 사람의 목에 매단채 바다에 빠뜨릴수 있었다. 이런 처형법이 유대인 사회에서 실제로 시행된 역사적 증거는 없지만, 고대 시리아나 그리스에서는 중죄인에게 이런 형벌을 내렸다고 전해진다.
# 묵상
용서에 대한 교훈 ( 17:3, 4 )
형제의 잘못에 대하여 주님은 하루 일곱번이라도 죄를 짓고 다시 회개하면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7은 완전수입니다. 그러므로 하루에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은 모두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마18:21). 이는 우리 역시 하나님께 용서받아야할 처지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표본 ( 17:5, 6 )
예수님께서 믿음의 표본으로 제시하신 것은 겨자씨 한알입니다. 겨자씨 한알은 극히 작아서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그것이 심겨져 자라면 커다란 나무가 됩니다. 작고 보잘것없다 할지라도 그 안에 생명이 있는 믿음이라면 이와같이 자라서 놀라운 능력을 발휘할 것입니다.
고침받은 사마리아의 문둥병자 ( 17:11-19 )
이 사마리아인은 고침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님께 감사했습니다. 열명의 문둥병자가 나음을 입었으나 예수님께 감사를 드린 사람은 한명의 사마리아인뿐이었고, 이로인해 그는 영혼까지도 구원을 얻었습니다.
하나님나라의 도래 시기 ( 17:20, 21 )
예수님은 ‘하나님나라는 볼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있다 저기있다고도 못하니 하나님나라는 너희안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나라는 물리적인 처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을 말하는 것으로, 성도들가운데 주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주의 날이 도래했다는 소문에 대한 궁금증과 예수님이 그 질문에 답할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주님께 하나님나라에 대하여 질문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천국은 눈에 보이게 도래하지 않으나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재림 전에 선행될 일 ( 17:22-25 )
예수님께서는 재림하시기 전에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그분은 왕으로 오셔서 권세와 능력으로 이 세상을 다스리고, 영광을 얻기전에 먼저 많은 고난을 당하고 사람들에게 버림받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영광을 고난과 연결시켜 언급합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고난은 지금은 모르지만 결국은 최고의 영광임을 알게될 것입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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