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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세리장 삭개오의 회심 19:1-10
의심할것없이 복음서 안에는 비록 나타나있지는 않으나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은 자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본문에 나타난 삭개오의 경우처럼 특별한 무엇이 있는 사람의 회심은 기록이 되어져 있다. 이때 그리스도께서는 여리고를 지나가시고 계셨다(1절). 이 도시는 저주하에서 세워졌으나 그리스도께서는 이곳을 찾아오심으로 이곳에 명예를 주셨다. 복음은 저주를 없애주기 때문이다.
(1)삭개오는 누구이며 무엇하는 사람이었는가? 그의 이름은 그가 유대인임을 나타내준다.
1) 그의 직업과 그가 맡은 직책 : 그는 세리장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온갖 부류의 사람들 가운데서 그의 구원하실 자를 찾으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의 괴수까지도 구원하시고자 오셨으며 따라서 이 세리장조차 구원하시고 계신 것이다.
2) 세상에서 그의 환경은 매우 상당한 것이었다. 즉 그는 부자였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방금전에 부자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보여주셨다. 그러나 현재는 잃었다가 찾은바 된 한부자의 경우를 보여주고 있다.
(2) 그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도에 들어왔는가?
1) 그는 예수를 보고자하는 큰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3절). 명성이 자자한 사람들을 보고자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최소한 우리는 나중에 우리가 이러한 대단한 사람을 보았다고 말할수 있게될 것이다.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예수를 보고자, 즉 그가 어떠한 사람인가하여 보고자 힘쓸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를 보게될 것이다.
2) 그는 키가 작았고, 사람은 많았기때문에 이 일에 대한 자신의 호기심을 만족시킬수 없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보이시려하시지 않으셨다. 그는 우리 중 한사람으로 무리가운데 보이지않게 계신다. 키는 작지만 큰 영혼을 가지고 있으며 영적으로 활발한 자들이 많이 있다.
3) 그는 자기의 호기심을 포기하지 않았기때문에 자신의 품위도 잊은채 앞으로 달려가 그를 보기위하여 어린아이같이 뽕나무로 올라갔다.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보고자하는 자들이라면 그를 보기위해 적합한 모든 방법을 강구할 것이다. 자신이 작다고 생각되는 자들은 스스로 그리스도를 보는데까지 이르기 위해서 그들이 할수 있는 모든 방법들을 취할수 있어야 한다. 난쟁이들은 높은 곳에 이르기 위하여 선한 도우심과 함께 큰 뜻을 품음으로 절망하지 말아야 한다.
(3)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주목하셨다. 즉 그와의 더깊은 교제를 하시기위해서 그를 부르셨다(5절). 그리고 그 부르심은 즉시 선한 결과를 낳았다(6절).
1) 그리스도께서는 삭개오의 집에 찾아오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나무를 올려다보셨으며 삭개오를 보셨다. 그는 그리스도를 보기위해서 왔을뿐 그리스도께 환대 받으리라고는 거의 생각지도 못했다.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그를 좋은 복들로 인도하시며 어떻게 그의 생각을 능가시는가를 보라. 또한 매우 미미한 시작을 그가 어떻게 크게 하시는가를 보라. 그리스도를 알고자하는 마음을 가졌던 그는 그를 알게되었다. 단지 그를 보고자 원했던 그는 그와 대화하도록까지 허락을 얻었다. 때때로 삭개오처럼 단지 호기심만을 가진채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자 오는 자들이 그들의 양심의 깨어짐을 갖게되며 그들의 마음의 변화를 갖게되는 경우가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삭개오야라고 그의 이름을 부르신다. 그는 '속히 내려오라'고 그에게 명하셨다. 삭개오는 주저하지 말고 서둘어야 했다. 그는 내려와야 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이날 그의 집에서 쉬시며 그와 함께 한두 시간 유하시려하시기 때문이었다.
2) 삭개오는 자기 집에 있게되는 그러한 영광에 대해서 '즐거워하였다.'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6절). 또한 자기 집으로 그를 영접하는 것은 자기 마음에 그를 영접하는 것의 암시이자 증거이기도 했다. 우리가 마음문을 닫고 변명할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얼마나 자주 우리에게 나에게 열어보이라고 말씀하시는지! 삭개오가 주저없이 그리스도를 영접한 것은 우리를 부끄럽게할 것이다.
(4) 옹졸한 영혼을 가진 비판적인 유대인들은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라고 말하면서 수군거렸다. 그렇다면 그들 자신은 죄인된 자들이 아니란 말인가? 또한 죄인된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하실 일이 아닌가? 그러므로 그의 집에 갔다고해서 그리스도를 비난하는 것은 매우 부당한 처사였다.
1) 그가 비록 세리였고, 대다수의 세리들이 악한 자들이었으나 그렇다고해서 그들 모두가 그렇다고 할수는 없었다. 우리는 사람들을 무더기로 정죄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모든 사람이 각기 심판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2) 그가 죄인이었다고 할지라도 지금도 여전히 전처럼 악하다고 단정지을수는 없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회개할 여지를 허락하시기 때문이다.
3) 그 당시에 그가 죄인이었다해도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가시는 것을 비난할수는 없었다. 의사가 병자에게 안가고 어디로 가겠는가?
(5) 삭개오가 이제 회개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들이 진술되고 있다(8절). 그는 자신의 선행으로 그의 믿음과 회개의 신실성을 증거하였다. 그는 서서 말했다. 이것은 하나님께 맹세하는 투를 나타내는 것으로 그의 말이 신중하고 엄숙하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그는 그리스도께 말하였다. 즉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주께 말한 것이었다. 그는 그의 생활의 변화를 통하여 그의 마음에 어떤 변화가 생겼음을, 즉 그가 회개하였음을 명백히 나타내 보였던 것이다.
1) 삭개오는 상당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장차 그것을 하나님을 위하여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는데 쓸것을 결심하고 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8절). 즉 삭개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내가 이제까지 가난한 자들에게 자선을 베풀지 못했다 할지라도 이제 나는 그것을 하겠습니다. 즉 이제 나는 그들을 구제하되 오랫동안 의무를 무시해온 만큼이나 아주 많이, 내 소유의 절반까지라도 들일 것입니다." 삭개오는 가난한 자들에게 자기 재산의 절반을 주었을 것이며 그것은 그로 하여금 쓸모없는 낭비를 줄이게 해주었을 것이다. 그는 여기서 이것을 그의 회개의 열매로써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2) 삭개오는 자기의 소유 모두가 정직하고 공정하게 얻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배상할 것을 약속하고 있다.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정해진 것보다 사배나 더하여 그에게 갚아 주겠습니다."
①그는 자신이 악을 행했던 것을 솔직히 인정하고 있다. 참으로 회개한 자들이라면 그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사실을 시인할뿐 아니라 특별히 세상에서의 사업과 직업으로 인하여 아주 쉽사리 죄를 범해왔음을 뉘우치게 될 것이다.
②그는 자신이 토색했음을 시인하고 있다. 세리들은 정부로부터 후대를 받았다. 그것은 그들에게 만일 그들의 어떤 사람에 대해서 악한 생각을 가질 경우 해를 입힐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③그는 사배나 갚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그는 만일 내가 고소당하므로써 그래야 하도록 강요 받는다면 나는 보상을 할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지않다. 반면에 어떤이들은 어쩔수 없게될 때에야 비로소 정직해 진다. 그는 자발적으로 그것을 행하려는 것이다. 나쁜 일을 행했음을 확신하는 자들은 갚아주는 것외에 달리 자신들의 회개의 신실성을 증거할 길이 없다. 그는 가난한 자들에게 자기 소유의 절반을 주는 것으로 자신이 행한 악한 일이 보상될 것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우리 것이 아닌 것을 주는 것은 선행이 아니라 위선이다. 또한 우리는 우리가 정직하게 벌지않은 것을 우리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6) 그리스도께서 삭개오의 회개를 인정하시고 받으심(9,10절).
1)삭개오는 이제 복된 사람으로 공포되고 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9절). 이제 그의 회개는 결과적으로 그의 구원이 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집에 오셨다.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곳은 어디든 구원이 수반된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오늘 구원이 그의 집에 있게된 것이다.
①삭개오가 회개했을때 이전보다 더욱더 그의 집에 축복이 있게 되었을 것이다. 그는 자기 집에 은혜와 구원의 방편을 가져온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푼 그는 그 자신의 집에 선행을 행한 것이며 복을 가져다준 것이다.
②삭개오가 스스로 그리스도께 나아갔을때 그의 가족 역시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게 되었으며 따라서 구원이 그의 집에 이르게 되었다. 이는 그가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곧 믿음으로 말미암아 세리들, 즉 이방인들에게까지 있게된 아브라함의 축복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뿐 아니라 그들의 자녀들에게도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 삭개오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출생하였으나 세리였기에 이방인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참으로 회개한 자는 마치 전에 결코 세리가 아니었던 것처럼 선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져야 한다.
2)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은 그가 세상에 오신 큰 목적과 의도에 일치하는 것이었다(10절). 그가 전에 가진 적이 있었던 똑같은 논쟁에서 그는 세리들과 교제하는 것을 정당화 하셨다(마 9:13). 거기서 그는 자신이 '죄인을 불러 회개케하기 위해서' 왔다고 변론하셨다. 여기서도 그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신다.
①사람들의 비참한 형편 : 그들은 잃어버린 자들이었다. 온 세상의 인류는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파멸된 세상에 어울리는 자들이 된 것이다. 마치 광야에서 길을 잃어 죽은 여행자와도 같고, 치료할수 없는 질병으로 말미암아 죽은 병자와도 같다고 하겠다.
②하나님의 아들의 자비로우신 목적 : 그는 '찾아 구원하시기 위해'오셨다. 즉 구원하기위해 하늘에서 땅에 오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잃어버린 자를 위해서 그 대의를 맡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잃어버린 세상을 찾아 구원하시기위해 오셨다. 그의 목적은 구원하시는 것이다. 그 목적을 수행하시는 가운데 그는 그 구원을 이룰수 있는 온갖 가능한 방법을 찾으셨으며 취하셨다. 그는 여기 삭개오처럼 그를 찾지않은 자들, 그를 요청하지 않은 자들을 찾고 계신다.
Ⅱ. 열므나의 비유 19:11-27
우리 주 예수께서는 이제 마지막 유월절을 지내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신다.
1. 이때 그와 함께하던 자들에게 일어난 생각(11)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러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때를 기대하고 있었다(눅 17:20). 또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조차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 제자들은 자기들의 선생이 현세적인 영광과 능력과 더불어 그것을 가져오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예루살렘이 그의 나라의 보좌가 될 것임에 틀림이 없다고 결론내렸으며 따라서 이제 그가 곧바로 그곳에 가고있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잠시후에 그가 거기서 보좌에 앉은 것을 보리라는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선한 사람들이라도 그리스도의 왕국에 대해서 잘못을 범하기가 쉽다.
2. 그들의 잘못된 기대가 시정됨(12-27)
그는 다음 세가지 면으로 그들의 잘못된 기대를 정정해 주신다.
(1) 그들은 그가 영광중에 지금 당장 나타나리라고 기대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들에게 그가 공적으로는 아직 오랫동안 그의 나라의 보좌에 앉지 않아야 됨을 말씀하신다. 그는 어떤 귀인과 같은 자로 그는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나라로 가게된다. 그는 왕국을 받아가지고 돌아와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이 강림하셨을때 돌아오셨다. 그때 예루살렘이 멸망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의미하고 있는 것은 그의 주된 귀환은 아직 우리가 기대하고 있는 것으로써 마지막 심판날에 있게되는 것이다.
(2) 그들은 그의 사도들과 그를 가까이서 모시고 있는 자들이 영광과 위엄가운데 나아가리라고 즉 그들 모두가 군주, 또는 고관대작이 되어질 것이며 왕궁과 도시의 고위직과 온갖 영화를 가지게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그들에게 이러한 것 대신에 그들을 일꾼된 자들로 계획하고 계심을 말씀하고 계신다. 즉 그들은 이 세상에서 장사하는 직 이외에 어떤 다른 높은 자리를 기대하지 말아야 했다. 그는 그들로 스스로 사람들 가운데서 그와 그의 나라의 이익을 위해 섬기는 일에 종사케 하기위해서 그들의 수중에 자본을 공급해 주셨다. 모든 현대적인 영광을 신앙심 깊은 경멸로 바라볼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과 사역자들의 참된 영예로움이 되는 것이다. 사도들은 '그의 나라에서 그의 좌 우편에 앉아있는 것'을 꿈꾸었으며 그로인해 즐거워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생각을 품게하는 것들 대신에 진지한 생각을 하게하는 것들을 말씀하시고 계신다.
①그들은 이제 해야할 큰 일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주인은 그들을 떠나가게 되며 떠나는 자리에서 그들에게 각각 한므나씩을 준다. 이것은 달란트 비유와 똑같은 것을 보여준다(마 26장). 그러나 그 비유에서는 그들을 더 겸손케 하고자 하는 것이 나타나 있다. 이 세상에서 그들의 영예는 최고의 상인이라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장사꾼이라는데 있다. 그는 이러한 책임과 함께 그의 종들에게 므나를 나누어 주었다.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부지런하라."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너희 직무를 기억하라. 그리고 그 일을 하라. 즉 열심을 가지고 그 일을 시작하라. 그리고 그 일에 몰두하라."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할일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며 사역자들은 더욱 그러하다. 전자나 후자 모두 게으르라고 세례받거나 임명받은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위해 일하도록 부름받은 자들에게 그들의 직무에 필요한 은사들을 공급하신다. 또한 그는 자신을 섬기는 자들에게 능력을 주신다. 그는 "가서 일하라 가서 장사하라"는 책임을 맡기며 므나들을 주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주인이 오기까지 우리의 일을 계속해서 기억해야 한다.
②그들은 최종 결산을 하게된다. 이 종들은 '각각 어떻게 장사한 것을 알고자'하는 주인에게 부름을 받았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가운데 부지런히 그리고 신실하게 장사한 자들은 이득을 본 자들이 될 것이다. 많은 수고한 장사꾼들이 손해보는 자이었으나 그리스도를 위해 장사하는 자들은 이득을 본 자들이 될 것이다. 회개한 영혼을 가진 자들은 이기는 자들이다. 참으로 회개한 모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명확히 이익이 된다. 사역자들은 단지 그를 위해 일하는 자들로 그들은 자신들이 복음의 그물로 잡은 고기, 즉 그들이 장사함으로 이득을 본 것을 그에게 회계해야 한다.
㉠몇몇 종들에게 있어진 선한 회계와 그들에 대한 주인의 인정 : 그 두가지가 16절과 19절에 예시되어 있다.
첫째, 그들은 모두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똑같지는 않았다. 한사람은 '열므나'를 남겼으며 다른 사람은 '다섯므나'를 남겼다. 똑같이 충성했다고해서 모두가 똑같은 성과를 거두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들 모두가 함께 충성했다 할지라도 어느 한편이 다른 사람보다 더욱 수고하고 자기 일에 더욱 열심으로 몰두했을 것이며 따라서 더좋은 성과를 거두었을 것이다.
둘째, 그들은 주인에 대한 자신들의 의무를 인정하였다. 즉 "주여 내 것이 아닌 당신의 므나로 열므나를 남겼나이다"라고 하였다. 우리가 남긴 모든 것의 영광은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한다.
셋째, 그들은 모두 자신의 충성과 근면에 대해 칭찬을 들었다. 즉 17절에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라고 하였다. 또한 다른 사람에 대해선 19절에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라고 하였다. 만일 그가 잘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라면 다른 방식으로 말하는 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안된다.
넷째, 그들은 자신들이 이룬 성과에 따라서 상급을 받았다.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고을 권세를 차지하라(17절). 별로 없는 가운데서 시작하는 것에 만족하는 자들은 성공할 가망이 있는 자들이다. 이러한 비유로써 사도들은 두가지 것을 약속받은 셈이 된다. 즉 그들이 많은 교회들을 세우기위해 수고했을때 그들은 큰 존대를 받게될 것이며 선한 그리스도인들의 사랑과 존경속에서 큰 관심을 받게될 것이다. 또한 그들이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자신들의 세대를 섬겼을때 그들은 내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왕들로서 다스릴수 있는 상급을 받은 천한 장사꾼의 경우보다 훨씬더 나은 것으로 선한 사역자나 혹은 선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질 것이다. 다섯므나를 남겼던 자는 다섯 등급이 있다. 즉 모든 그릇이 똑같이 쓸모있는 것이나 다 똑같이 크지는 않다. 이와같이 필요의 등급에 따라서 영광의 등급이 있게될 것이다.
㉡그들 중 한사람에게 있어진 악한 회계와 그에게 내려진 선고(22절)
첫째, 그는 자신이 맡은 므나로 장사하지 않았음을 인정하였다. 주여 보소서 주의 한므나가 여기 있나이다(20절). 이는 곧 "내가 그것을 늘리지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나는 그것을 줄게도 아니했습니다"라는 말이라고 하겠다. "나는 그것을 안전하게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이것은 은사를 받되 그것으로 도무지 선을 행하지않은 자들의 무관심을 나타내준다. 그리스도의 나라의 이익이 줄건 말건, 그 나라가 앞으로 나아가건 후퇴하건 그들에게는 매 한가지다. 이는 그들이 자기들의 직무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기때문이다. 세상에서 아무런 악도 행하지 않았고 아무런 선도 행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자기들의 므나를 수건으로 싸두는 종들과 같은 자들이다.
둘째, 그 일을 더좋게 만들지 못하고 나쁘게 만든 것을 변명함으로 자기를 정당화시켰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21절). '엄한'이란 곧 교활함을 뜻하는 말이다. '당신은 두지않은 것을 취하고'가 이것을 나타내주는 말이다. 그는 그가 심지않은 것을 거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참으로 그는 심은데서 거두고 있었다. 그는 자기의 주인의 엄함을 두려워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그는 단지 사기꾼에 불과한 자였다. 즉 자기의 게으름에 대해서 어리석고 근거없는 변명을 늘어놓는 자였다.
셋째, 그의 변명이 그를 판단한 것이 되었다.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22절). 그는 자신의 죄로 인해서 반드시 심판받게 된 것이다. "만일 네가 내 이익에 대해 유의했었다면 너는 내 돈을 은행에 두어 나로 내 것뿐 아니라 그 변리까지 가지도록 했어야 했다." 설사 그가 본전을 잃을까 두려워서 장사하지 않은 것이라해도 아무 이익을 내지못한 것에 대해서는 전혀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 게으른 자들의 구실이 무엇이든지 간에 참된 이유는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의 이익에 대한 그들의 전적인 무관심인 것이다. 그들은 단지 편히 살게되는 것외에 신앙이 터전을 얻건 말건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넷째, 그는 자기의 므나를 빼앗겼다(34절). 자기들의 은사를 사용하지 않는 자들이 그것을 잃게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본문은 '그에게서 그 한므나를 빼앗아'라고 했다.
다섯째, 그것이 열므나 가진 자에게 주어지고 있다. 그가 이미 많이 가지고 있기때문에 이 지시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을때(주여 저에게 이미 열므나가 있나이다(25절)) '무릇 있는 자가 받을 것이다'(26절)라고 대답되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하는 것이 공평한 처사이다. 즉 가장 부지런했던 자들이 가장 큰 격려를 받아야 한다. 또한 은사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 마치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것과 같을때 그들은 그것을 빼앗기게 된다. 자기들의 가지고 있는 은혜를 더욱 증가시켜 가려고 노력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더 큰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이다. 은혜를 무시하거나 은혜가 떨어지는 것을 그대로 버려두는 자들에게는 당연히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하실 것이다.
(3) 그들이 기대했던 또다른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나타날때 유대 민족이 곧 그 나라에 들어가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그가 떠나신 후에 유대 민족이 완고하고 패역하게될 것을 말씀하신다. 이것이 다음과 같이 나타나 있다.
1)그의 백성이 그의 뒤에 보낸 전언에서 그것이 나타난다(14절). 그가 자기 나라에 왕위를 받으러 갔을때 그들은 여전히 그의 대적이 되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됨을 원치 아니하나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승천이후 유대인들 속에서 널리 드러난 불신앙으로써 성취되었다. 그들은 결코 그에게 복종하지 않았다. 그것은 모든 믿지않는 자들의 말을 보여준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을 구원하시는 것에는 틀림없이 만족할수 있었을 것이나 그로 하여금 자기들을 다스리게는 하지않으려 할 것이다.
2)그가 돌아와 그들에게 내린 선고에서 그것이 나타난다.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27절). 그의 충성된 공복들이 상급을 받고 보상을 받을때, 그는 그의 원수들에 대해서 원한을 갚으실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나타났을때 그리스도와 그의 통치에 대해서 대적한 그 분간할수 없는 원수들에 대해서 보복이 행해졌다. 즉 그들은 '끌려와서 그 앞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이것은 불신앙을 고집한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적용될 것이다. 비참한 멸망이 틀림없이 모든 그리스도의 원수들의 대가가 될 것이다. 그들의 어리석은 변명을 파기하고 그들의 공로에 따라 선고하기 위해 '그들을 이리로 끌어오라'고 했다. 그리스도로 자기들을 다스리지 못하게 하는 자들은 그의 원수로 여겨져 처리될 것이다. 스스로가 자신들의 주인이 된 자들은 그리스도께 복종치않은 자들로 여겨질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은혜에 붙잡힌바 되지않은 자는 그리스도의 진노로 반드시 멸망당할 것이다.
Ⅲ. 예루살렘 입성 19:28-40
우리는 여기서 전에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 보았던 것으로써 그리스도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으로 일종의 승리의 입성을 하신 것에 대한 동일한 기사를 접하게 된다.
(1)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고난받으시고 죽으시기위해 기꺼이 앞으로 나아가셨다. 그는 거기서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것이라는 사실을 매우 잘 알면서도 예루살렘으로 나아가셨다. 그것도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 가셨다(28절). 그는 무리 중에서 제일 앞서 가셨다. 그는 이와같이 우리를 위해서 고난받으시고 죽으시기 위해서 나아가지 않으셨는가. 그런데 우리는 왜 우리가 그를 위해서 할수 있는 어떤 봉사를 함에 있어 주저하는 것인가?
(2) 그가 죽으시기 바로전에 예루살렘에 공개적으로 들어가신 것은 그리스도의 겸손이나 현재의 비하의 상태 모두에 합치되는 것이다. 그것은 이로써 그의 죽으심의 굴욕이 더욱 크게 나타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3) 그리스도는 모든 피조물을 통치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나귀와 그 새끼를 그 필요하신 때에 그 임자들로부터 가져오도록 하셨다.
(4)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주장하신다. 그는 나귀와 그 새끼의 임자들로 하여금 그것들을 가져오는 것을 허락하도록 영향을 미칠수가 있었다. 그들은 주께서 그것들을 필요로 하신다는 것을 듣자마자 가져가기를 허락하였다.
(5) 그리스도의 명을 수행하는 자들은 확신하고서 나아갔다(32절). 만일 참으로 주께서 필요로 하신다면 그들이 찾는 것을 반드시 가져올수 있으리라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전파자들에게 위로가 된다.
(6) 그를 위해서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가져온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되며 자기들이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그것으로 그를 섬길수 있어야 한다. 그 제자들은 그를 위해서 나귀 새끼를 가져왔을뿐 아니라 '그 위에 자기들의 겉옷을 올려 놓았다.'
(7) 그리스도의 개선은 그의 제자들의 찬송의 제목이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까이 오셨을때 하나님께서는 열두 제자뿐 아니라 전 제자들의 무리의 마음가운데 갑자기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할 마음을 넣어주셨다(37절). 그들은 또한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폈는데'(36절) 이는 평상적인 기쁨의 표현이다. 그들의 기쁨과 찬양의 이유 혹은 제목이 무엇이었는가를 주목하여 보라. 그들은 '자기들이 본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했으며 특별히 '나사로를 살리심'에 대해서 찬양했다(이것은 특별히 요 12:17,18절에 언급되어 있다). 그들이 자기들의 기쁨과 찬양을 어떻게 표현했는지 보라.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시다. 그는 또한 찬송받으실 분이시다. 그를 찬양하자. 하나님께서 그를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하늘에는 평화요. 하늘의 하나님께서 그의 행하심에 평화와 성과를 주실 것이다. 그러면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 있을 것이다. 이 땅에서의 이 성도들의 찬양을 천사들의 찬양과 비교해 보라(눅 2:14). 이 둘은 모두 가장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일치하고 있다. 천사들은 '땅에서는 평화'라고 했다. 우리가 '하늘에 있는 평화'를 기뻐함같이 그들 또한 땅에 있는 평화를 기뻐하는 이러한 것은 우리가 거룩한 천사들과 교제를 갖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8) 그리스도의 개선과 그것을 찬양하는 제자들의 기쁜 찬양은 교만한 바리새인들의 분노를 샀다. 그들에 대해 격분한 무리가운데 바리새인이 몇명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이와같은 환호를 허락지 않으시리라고 생각했으며 따라서 그가 '자기 제자들을 책망하시리라고' 기대하였다(39절). 그는 교만한 자의 경멸을 멸시하시듯이 겸손한 자의 찬양을 받으신다.
(9)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찬양하든 안하든 그는 찬양을 받으실 것이며 받게될 것이고 또 받으셔야만 한다.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40절). 즉 이 사람들이 잠잠하다고해서 그리스도께서 찬양을 못받게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돌들이 소리지르게 된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찬양을 잠잠케하려 했으나 그렇게 할수가 없었다. 이는 하나님께서 '돌들로 능히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수 있듯이 그 자손의 입으로 능히 온전히 찬양하게 하실수 있기 때문이다.
Ⅳ.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심과 성전을 깨끗케 하심 19:41-48
하늘로부터 온 위대한 대사는 여기서 존대받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거절당하시고자 예루살렘에 공적으로 입성하시고 계신다. 그곳에 대한 그의 사랑과 근심을 보라.
1.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심(41-44)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의 멸망이 가까운 것을 아시고 눈물을 흘리셨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41절). 아마도 그때는 그가 감람산 언덕에서 내려오실 때였을 것이다. 거기서 그는 그 성을 한눈에 내려다 보셨을 것이다. 그의 눈은 그의 가슴에 감동을 주었으며 그의 가슴은 다시 그의 눈에 감동을 주었을 것이다. 여기서 다음을 보자.
(1) 그리스도께서는 얼마나 부드러운 심령을 지니신 분인가? 우리는 그가 종종 눈물을 흘리신 것을 볼수 있을지언정 그가 웃으신 것은 결코 볼수 없다.
(2)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그의 주위에서 기뻐하고 있었을때 눈물을 흘리심으로, 그들의 환호와 갈채가 그를 높이지 못한다는 것을 보이셨다.
(3) 그는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셨다. 실제로 비탄의 대상이 된 도시들이 있었으나 예루살렘보다 더 비탄의 대상이 된 도시는 없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는 왜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셨는가? 그는 친히 우리에게 그 이유를 보여주신다.
1)예루살렘은 자신에게 주어지 기회를 이용하지 못하였다. 그는 우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뻔 하였거니와…권고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42-44절). 말씀하시는 양식이 날카롭게 나타나고 있다. 너도…알았더라면. 어떤이들은 이 말씀을 13:9절에 나타난 것과 마찬가지의 형식으로 즉 "만일 네가 알았으면 좋겠거니와"라는 말씀으로 취하기도 한다. 그 말씀은 그들에게 얼마나 복된 말씀이었던가! 그가 말씀하고 계시는 것은 곧 예루살렘 자신에 있다는 것이다.
①'평화에 관한 일'이 있다. 우리는 그 일을 알고 이해하도록 모든 관심을 기울일수 있어야 한다. 평화에 관한 일은 우리의 현재와 장래의 행복과 관계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지런히 이 일을 알아야만 한다.
②평화에 관한 일이 우리에게 알려지게될 권고받는 때가 있다. 우리가 기도나 예배 등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수 있는 방법을 매우 풍성히 가짐으로 우리에게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을 능력있게 지니게 될 그때가 권고받는 때가 되는 것이다.
③권고받는 때를 오랫동안 무시해온 자들이 혹 눈이 열림으로 그때를 깊이 숙고하게 된다면 그들 또한 반드시 좋은 결과를 얻게될 것이다. 십일 시에 포도원에 들어온 자들이라 할지라도 결코 거절당하지 않을 것이다.
④사람들이 자기들의 기회를 이용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방법을 누리는 사람들의 눈에는 놀랄만큼 어리석은 것으로 비쳐진다. 그들은 평화에 관한 일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마음을 두거나 중요시 하지않는 자들이다. 즉 그들은 평화에 관한 일에 대해 눈을 감아버리는 것이다. 그들은 구원의 날과 영접할 시기를 알지 못한다. 따라서 단지 부주의함으로 말미암아 파멸케되고 만다. 보지않는 자의 앞이 가장 어두운 법이다.
⑤복음의 은혜를 경멸하기를 고집하는 자들의 죄와 어리석음은 주 예수를 크게 슬프게 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마땅히 우리의 슬픔이 되어야 한다. 그는 잃어버린 영혼들, 즉 끝까지 회개치않는 자들을 눈물을 흘리시며 바라보고 계신다. 그는 그들이 자기들의 길을 계속 걸어감으로 죽게 되기보다는 돌이켜 살게되기를 간절히 바라셨다. 이는 한사람이라도 멸망케되는 것을 그가 바라지않으시기 때문이다.
2)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날은 반드시 올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예루살렘은 이제 평화에 관한 일을 볼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후 사도들은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죄를 깨닫고 회개하였다. 그러나 그 민족을 대표하는 지도층은 불신앙에 빠져 완고하고 무지한 판단에 빠지고 말았다. 큰 구원을 무시한 대가로 그 백성은 현세적인 심판을 받게되었다. 즉 그 심판이 예루살렘에 임한 것이다.
①로마인들은 성을 포위하고 성 둘레에 토성을 쌓고 성을 둘러 예루살렘 성의 거주민들을 사면으로 가두었다.
②그들은 성을 메어쳤다. 황제 디도는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려 도시를 파괴했으며 성 주변은 망루 세개만 남은채 폐허가 되었다. 성뿐만 아니라 자녀들을 포함한 시민들까지 잔인한 로마인들에 의해 땅에 메어쳐졌다.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이 '권고받는 날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2. 성전을 깨끗케 하심(45,46)
(1) 그리스도께서는 성전을 훼손하는 무리에게서 성전을 깨끗케 하셨다.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시며(45절). 성전의 영광은 그 물질적인 풍요보다 성결함에 있다. 예수께서는 성전에서 상인들을 내어쫓으시는 이유를 말씀하신다(46절).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요,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 성별된 집이다. 사고 파는 자들이 그곳에서 물건을 부정한 방법으로 매매함으로 성전을 도둑들의 소굴로 만들었다. 이 일은 틀림없이 성전에 기도하러온 사람들에게 소란스러운 방해가 되었을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는 성전에서 가장 적합한 일을 행하셨다.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47절). 이제 그리스도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때 두부류의 사람들이 그의 주변에 있었다.
1) 사악한 교회 지도자들이 그리스도를 어떻게 대적했는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두목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47절).
2) 백성들이 그를 어떻게 존대했는가?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백성들은 그를 대단히 존경하였으며 열심으로 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다. 어떤 학자들은 모든 백성들이 다 일심으로 그를 청종하였으므로 그의 적들이 그리스도께 대항할 방법을 찾을수 없었다고 말한다. 그의 때가 올때까지는 백성들이 그를 보호하는 일을 하였으나 그의 때가 이르자 백성들은 대제사장들에게 그를 넘겨주었다.
# 해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주님 ( 19 )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는 본장에서부터 새로운 전환 국면을 맞게 됩니다. 지금까지의 예루살렘을 향한 긴 여행이 본장에서 끝나고, 예루살렘 입성에서부터 십자가의 수난 및 부활 사건에 이르기까지의 마지막 한주간이 시작됩니다. 본장은 내용상 크게 세단락으로 나눌수 있습니다. 삭개오를 만나시는 부분(1-27 절)과 므나 비유(11-27절)와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부분(28-48절)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 구원받은 삭개오
1) 세리장인 삭개오
삭개오는 여리고 성의 세리장이었습니다. 당시 여리고는 상업의 길목으로 매우 많은 통관세를 받는 고장이었습니다. 여리고 성의 세리장인 삭개오는 부자로서 별 어려움이 없이 평탄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는 세리장이었기 때문에 일반 민중과는 어울리지 못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당시 세리는 창기와 더불어 죄인의 대명사로 불렸습니다. 왜냐하면 세리들은 로마 정부의 앞잡이로서 국민들에게 받는 세금으로 부정축재를 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a.종려의 성읍(신34:3)
b.세관의 책임자(눅5:27)
2) 예수님을 만나는 삭개오
삭개오는 물질적으로는 풍요를 누렸지만 영혼의 만족을 누리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항상 죄의식을 가지고 자신이 구원을 받아야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고 그분을 보고자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키가 작은 삭개오는 많은 군중때문에 예수님을 볼수가 없자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그때 마침 예수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뽕나무에 올라가 있는 삭개오를 보실때 구원을 갈망하는 그의 갈급한 심령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뽕나무에 올라가 있는 삭개오를 부르시며 속히 내려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집에 오늘 유하여야 되겠다고 하셨습니다.
a.죄책감을 지녔음(눅18:13)
b.두소경을 만나신 곳(마20:29-30)
3) 아브라함의 자손인 삭개오
뽕나무에 올라가 있는 자신을 예수님께서 만나주시자 삭개오는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는 즉시 뽕나무에서 내려와서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집에 예수님께서 들어오시자 자기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삭개오의 참된 회개와 전적인 자기 포기에서 우러나온 구제의 고백을 보시고 구원이 삭개오의 집에 이르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선포와 더불어 삭개오를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선포하셨습니다.
a.하나님은 늘 개인을 감찰하고 계심(시139:1)
b.그리스도를 즐거이 영접한 자(눅19:5-6)
2. 므나의 비유
1) 먼나라로 가는 귀인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에 앞서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사람들에게 열므나 비유를 들려 주셨습니다.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나라로 갈때에 그의 종 열명을 불러 은 열므나를 주면서 자신이 돌아올때까지 장사하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귀인의 행동에서 우리는 그가 종들을 신뢰했으며 또 종들의 충성 여부를 시험했음을 알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자신의 일이나 다른 사람의 일을 막론하고 작은 일에 충성된 자는 큰 일에도 충성되지만 작은 일에 불의한 자는 큰 일에도 불의합니다.
a.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심(막4:34)
b.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임(고전4:2)
2) 귀인이 왕위를 가지고 돌아옴
귀인이 왕이 되려고 먼나라로 갔을때에 백성은 저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에 보내어 자신들은 귀인이 왕이 되는 것을 원치않는다고 했습니다. 악한 자들이 도모하는 일들이란 언제나 악하고 합당하지 못한 것들뿐입니다. 그들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므로 그 마음의 모든 계획들이 악할 수밖에 없습니다. 백성들이 귀인을 미워한 것과는 달리 귀인은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왔습니다.
a.세상이 그리스도를 미워함(요7:7)
b.충성된 자는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함(잠25:13)
3) 상급과 형벌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오자 그의 종들은 주인에게 나아왔습니다. 한므나로 열므나와 다섯므나를 남긴 종들에게 귀인은 칭찬과 함께 열고을과 다섯고을 권세를 차지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종은 주인의 엄한 것을 무서워하여 맡겨준 한므나를 그대로 수건에 싸두었다가 주인에게로 도로 가져왔습니다. 주인은 그에게 악한 종이라고 책망하면서 한므나를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왕됨을 거절한 자들을 끌어다가 죽이라고 했습니다.
a.정직으로 판단하심(시9:8)
b.열매맺는 백성이 천국을 차지함(마21:43)
3.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
1) 예루살렘에 입성하심
감람산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왔을때에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을 준비하시기 위해 제자 중 둘을 보내시어 나귀 새끼를 끌고오라고 명하셨습니다. 주님의 명령을 받아 그대로 행한 제자들은 준비된 나귀 새끼를 끌고왔습니다. 준비된 나귀 새끼는 이제까지 아무도 타지않은 나귀였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의 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놓고 예수님을 태웠습니다. 나귀 새끼를 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자 많은 무리들이 모여서 예수님을 찬양했습니다.
a.나귀의 실질적 주인은 예수님이심(시50:10-11)
b.선지자의 말씀을 이루고자 하심(마21:4-5)
2) 멸망을 안타까워하심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장차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을 아시고 우셨습니다. 예루살렘은 유대인의 정신 생활의 중심인 성전이 있는 신성한 성읍이었습니다. 이러한 도성이 하나님을 배역하고 선지자를 죽이는 일을 했으며, 하나님께서 보내신 독생자까지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하여 뉘우쳐 회개하지 않고 점점 강퍅해져 가는 예루살렘을 보시고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케될 것을 아시고 탄식하셨던 것입니다.
a.황폐하여 버린바 될 성읍(눅13:35)
b,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임(눅21:20)
3) 성전을 정화하심
주님은 예루살렘을 장사꾼의 소굴로 더럽힌 것과 순진한 순례자들을 착취한 이유로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엄히 책망하시고 내어쫓으셨습니다. 주님은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셔서 성전이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예배의 장소인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성전을 정화하신 예수님께서는 지속적으로 성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장사하는 자들로 인해 본래의 의미를 잃어가고 타락된 곳을 정화하심으로써 성전을 회복하셨던 것입니다.
a.하나님의 성전은 기도하는 집임(사56:7)
b.백성이 즐겁게 들음(막12:37)
결론
우리는 본장에서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이를통해 오늘 이 시대의 우리들이 소속해 있는 교회의 모습을 정화해야 하겠습니다. 교회안에 바람직스럽지 못한 요소들을 철저히 제거하여 하나님의 성전의 본래 모습으로 회복시켜야 하겠습니다.
# 핵심
19:1-10
예수님이 세리 레위에 이어(5:27-39) 다시금 세리장 삭개오를 구원하셨다. 이는 그분의 사역이 ‘죄인 구원’을 위한 것임을 밝히 증거한다.
므나 비유의 역사적 배경(19:12-27)
헤롯이 죽었을때 그의 아들 아켈라오(마 2:22)는 왕위 계승을 인준받으러 로마에 갔다. 이때 그의 포악성을 이유로 왕위 계승을 반대한 유대인들은 로마 황제에게 사절단을 보내어 로비를 벌였다. 그 결과 아켈라오는 유대와 사마리아, 이두매 지방의 에트나르크(‘백성들의 통치자’)로만 책봉되었다. 이에 분노한 그는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와서 주모자와 동조자 8,000명 가량을 잔혹하게 보복살해했다고 한다.
삭개오(19:1-10)
여리고에 살던 세리장으로서 부정으로 축재한 탓에 부유하게 지냈다. 예수님을 보기위해 뽕나무에 올라간 점, 그분의 부르심에 즉각 응한 점, 회개한후 부정한 재물을 돌려주겠다고 선언한 점은 그의 적극성과 과단성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진정으로 회개한 그가 구원받았음을 선포하셨다. 로마의 앞잡이로서 자기 배불리기에만 급급했던 삭개오가 이처럼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은총을 증거해준다.
# 묵상
삭개오의 구원 ( 19:1-10 )
삭개오는 여리고의 조세를 책임지고 로마를 위해 세금을 거두며, 그 지위를 이용해 많은 돈을 벌었지만 이로인해 동족들로부터는 매국노, 착취자, 죄인으로 낙인이 찍혔습니다. 그는 이러한 문제로 고민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꼭 만나고 싶어 뽕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이와같이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신앙은 은혜를 얻습니다. 삭개오의 구원 과정을 보면, 먼저 그는 사람들에게 죄인 취급을 당했습니다(7절). 예수님을 보기 위해 뽕나무 위로 올라갑니다(4절). 예수님이 그를 보시고 그의 집에 유하셨으며(5, 7절), 삭개오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합니다(6절). 그리스도에 의해 생의 놀라운 변화를 경험한 삭개오는 자신이 행하려고 결심한바를 선언합니다(8절). 이것은 자발적이며 율법의 요구를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열므나의 비유 ( 19:11-24 )
귀인은 자신이 맡긴 일을 종들이 얼마나 성실하고 충성되게 이행하는지의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열명의 종을 불러 한므나씩 주고 떠났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리우셨다가 심판주로 재림하실때, 성도들에게 하나님나라를 확장하도록 맡겨주신 명령을 얼마나 잘 이행했는지 보신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이익을 남긴 므나의 양이 아니라 자세입니다. 한므나로 열므나를 남긴 종이나 다섯므나를 남긴 종이 똑같은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한므나를 그대로 가져온 종은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교묘한 핑계로 책임을 회피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장사를 하다가 잘못되어 본전만 가지고 왔더라도 성의만 있었다면 책망을 듣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의 명령을 아예 처음부터 무시했던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청지기의 사명이 나오게 됩니다. 주의 청지기는 철저한 소명의식을 가지고(요15:16; 고전1:26-31), 주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며(롬12:1-2), 자기 직무에 충실해야 합니다(고전4:2). 더나아가 작은 일에 충성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작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에게 큰 일을 맡기십니다.
예루살렘 입성 ( 19:28-40 )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목적은 영원한 희생 사역을 성취하시고, 부활의 첫열매가 되시고, 죽음을 가져오는 사탄을 치시며, 영광과 승리의 왕이 되시기 위함입니다. 또한 재림때 심판의 자격을 가지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루살렘 입성시 타신 짐승은 아무도 타보지않은 나귀 새끼였습니다. 이는 슥9:9절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때 사람들은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송했지만 바리새인들은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때 입성을 기뻐한 무리들이 예수님의 고난을 깨달을 준비가 되어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켜줄 정치적 의미의 메시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한편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인정치 않고 예수님이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볼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눈물과 성전 정화 ( 19:41-46 )
예루살렘은 주후 70년 유대인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성전까지 모두 파괴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물리적인 파괴를 내다보신 것뿐만 아니라 현재 지도자들 사이에 팽배한 영적 형식주의로 인한 정신적, 종교적 황폐를 보시고 애통해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시자마자 먼저 성전을 청결케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에게 성전을 강도의 굴로 만들었다고 화를 내신 이유는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하나님과 만나고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은혜로운 곳이 착취와 폭리의 소굴로 전락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돌 하나도 남지 않으리라’는 말씀은 회개하라는 말씀이요(막1:4; 고후7:10), 경고의 말씀이요(잠1:23; 고전14:24), 확실한 예언의 말씀입니다(민11:26; 벧후1:19).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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